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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레인지 괴담’으로 본 거짓 정보의 생산과 유통

하나님아들 2025. 4. 5. 21:49

‘전자레인지 괴담’으로 본 거짓 정보의 생산과 유통

입력2025.04.05. 
 
확증편향에 빠진 사람들 앞에서는 팩트체크도 무력하다.
대표 사례 중 하나가 ‘전자레인지 괴담’이다.
비과학적 주장에 대해 스위스 과학계와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혼돈의 시대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2010년대 이후 소셜미디어가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늘어난 채널만큼 혼란도 커졌다. 유언비어, 괴담, 가짜뉴스, 음모론···. 스토리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복잡한지에 따라 부르는 말은 다르지만 모두 거짓 정보의 한 종류다. 이것의 정점이 코로나19 팬데믹이라고들 여겼지만, 대규모 재난이라는 그럴듯한 배경 없이도 사람들은 꾸준히 거짓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선거, 백신, 신기술, 유명인, 사건·사고 등 무엇이든 계기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확실한 증거라도 무시하는 사고방식, 즉 확증편향에 빠진 사람들 앞에서는 팩트체크도 무력하다.

싸움을 할 때는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게 기본이다. 거짓 정보와의 싸움도 그렇다. 그것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방식, 생산자의 동기와 소비자의 성향, 급격히 퍼지는 계기, 각종 대응책의 효과 등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케이스 스터디도 도움이 될 것이다. 외계인의 납치 행각 같은 허황된 음모론보다는 일상생활과 긴밀하게 연결된 거짓 정보의 전파 방식을 추적해보는 게 더 유용하다.

여기에 잘 맞는 사례 중 하나가 ‘전자레인지 괴담’이다. 아마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조리하면 영양소가 파괴되고 그 음식을 먹으면 암에 걸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 인터넷에서 ‘전자레인지 괴담’을 검색하면 거의 반드시 따라붙는 이름 중 하나가 ‘스위스의 한스 헤르텔 박사’다. 각종 블로그와 게시판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신뢰도 높은 기성 매체에도 인용되는 인물이다. 대체 그는 누구이고 어떤 연구를 했을까. 스위스 과학계와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스위스발 전자레인지 괴담을 파헤쳐보자.

1989년 4월, 스위스의 환경단체인 프란츠 베버 재단이 분기별로 발행하는 저널에 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전자레인지에도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라는 제목이었다. 인터뷰 대상은 관련 전문가로 소개된 ‘한스 헤르텔 박사’다(헤르텔의 주장을 퍼뜨린 이들은 그를 ‘박사’로 표기했지만, 이후 나온 여러 법원 판결문에서 그는 ‘취리히 연방공대 학위를 가진 독립연구자’로 되어 있어서 박사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헤르텔에 따르면 ‘자연적’ 파장과 ‘인공적’ 파장에 ‘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기술적’ 파장이 인체에 위협적이다. 그런 파장을 이용하는 전자레인지는 음식의 영양소를 파괴하고 전자레인지를 이용하는 사람까지 위험에 빠뜨린다. 헤르텔의 주장과 작성자의 코멘트가 어지럽게 섞인 이 기사는 “전자레인지 이용은 다하우의 가스실만큼이나 위험하다”라고 적고 있다. ‘다하우의 가스실’이란 독일 나치 최초의 수용소를 말한다.

약 2년 후인 1991년 6월, 스위스에서 논문 하나가 발표된다. 제목은 “기존 방법으로 조리한 음식과 전자레인지에서 조리한 음식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비교 연구”였다. 저자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한스 헤르텔, 다른 한 병은 베르나르트 블랑이라는 로잔대 화학과 교수였다. 자원봉사자 8명을 모집해 전자레인지에서 조리한 음식과 기존 방식으로 조리한 음식을 각각 섭취하게 하고, 섭취 전후에 이들의 혈액을 채취해서 분석했다. 실험 기간은 두 달, 음식 종류는 8가지였다. 논문에 따르면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전자레인지로 조리한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이 인체에 미치는 측정 가능한 영향에는 혈액의 변화가 있는데, 이는 암의 시작과 일치할 수도 있는 병리학적 과정의 초기 단계를 나타낸다”.

논문이 발표된 지 반 년 만인 1992년 초, 위의 환경단체 프란츠 베버는 헤르텔의 논문을 인용해 다시 한번 전자레인지 관련 기사를 낸다. “전자레인지: 건강에 대한 위협. 반박 불가능한 과학적 증거”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전자레인지를 들고 쓰레기장으로 가라! 전자레인지가 음식을 처리하는 방식은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먹는 사람의 혈액에 변화를 일으키고 이것은 빈혈과 암의 전 단계로 이어진다”. 내용뿐만 아니라 저널 표지에 실린 그림도 섬뜩했다. 망토를 뒤집어쓴 채 한 손에 커다란 낫을 든 해골이 웃으면서 전자레인지를 향해 손을 뻗치고 있다. 이 해골은 독일어로 젠젠만(Sensenmann)이라 불리는 죽음의 신이다.

1992년 프란츠 베버 재단이 발행한 분기별 저널 표지. 전자레인지가 인체에 해롭다는 헤르텔의 주장을 실으면서 내용을 과장, 왜곡하는 이미지를 이용했다. © 프란츠 베버 재단 웹사이트

표현의 자유로 번진 ‘헤르텔 소송’



1992년 8월7일, ‘스위스 가전제품 제조 및 공급업체 협회(MHEA)’는 베른 상업법원에 헤르텔을 상대로 불공정 경쟁법 위반 소송을 제기한다. 전자레인지가 인체에 해롭다는 비과학적 주장을 퍼뜨림으로써 헤르텔이 전자레인지 판매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그의 발언을 제한해달라는 가처분 소송이었다. 스위스 불공정 경쟁법 제3조는 “부정확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거나 불필요하게 해악을 미치는 진술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이나 그의 상품, 작업, 서비스, 가격 또는 사업을 모욕하는 경우”에 그 행위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한다.

1993년 3월, 법원은 헤르텔에게 전자레인지 조리 음식이 암을 유발한다는 주장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헤르텔은 이에 승복하지 않고 스위스 최고법원인 연방법원에 항소를 제기했지만, 1994년 2월 연방법원 역시 이를 기각했다.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의견은 자신의 작업이나 타인의 작업에 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광고의 위장된 형태로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연방법원의 판단이었다. 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그가 1991년 출판한 논문의 공동저자인 블랑의 의견이었다.

블랑은 당시의 연구가 완전하지 않아 전자레인지에서 조리한 음식이 병을 일으킨다는 결론을 과학적으로 도출할 수 없다며 예전 주장을 철회했다. 전자레인지에서 조리한 음식을 섭취한 후 헤모글로빈 수치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 수치는 생리학적으로 정상 범위 이내였으며, 음식 섭취 후 두 시간 내 콜레스테롤 수치가 상승하긴 했지만 그것은 “좋은” 콜레스테롤에 해당하는 HDL 콜레스테롤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암을 일으키는 특정 식품 사례에서 관찰되는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와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다.

헤르텔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 안건을 유럽인권재판소로 가져간다. ‘헤르텔 vs. 스위스’라는 타이틀의 소송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이번에 쟁점이 된 것은 불공정 경쟁이나 전자레인지의 위해성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였다. 헤르텔은 스위스 법원의 제재가 유럽인권협약 제10조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유럽인권협약 제10조 1항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이고 2항은 그 자유의 제한에 관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이러한 자유의 행사에는 책임과 의무가 함께 뒤따르므로, 국가안보, 영토 보전 또는 공중의 안전을 위해, 무질서와 범죄의 예방을 위해, 공중보건과 도덕의 보호를 위해, 타인의 권리나 명성을 보호하기 위해, 비밀리에 얻은 정보의 공개를 방지하기 위해, 또는 사법부의 권위와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법률에 의해 규정되고 민주사회에서 필요한 경우 어떤 형식이나 조건, 제한이나 처벌을 감수할 수도 있다”. 전자레인지가 위험하다는 헤르텔의 발언은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까, 아니면 민주사회에서 제한이 필요한 경우에 해당할까.

1998년 8월25일, 유럽인권재판소는 헤르텔의 발언을 제재하는 것이 ‘민주사회에서 제한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다. 헤르텔이 논문을 쓰기는 했지만 더 자극적인 내용으로 문제가 된 프란츠 베버 저널의 기사를 직접 쓴 것은 아니며, 이 저널의 표지에 실린 죽음의 신 이미지 선정에도 관여하지 않았고, 논문에서 “암의 시작과 일치할 수 있는” 패턴이 보인다고 했을 뿐 암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는 주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스위스 정부의 발언 제재 조치는 과하며,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유럽인권협약 제10조를 위반했다는 결론이었다.

‘전자레인지 괴담’은 거짓 정보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시사IN 조남진


하지만 애초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버틴 헤르텔만큼이나 스위스 법원도 만만치 않았다. 스위스 연방법원은 1999년 3월2일 재심 판결에서 이렇게 논파한다. “유럽인권재판소는 헤르텔이 논문에서 주장한 내용을 스위스 법원에 비해 훨씬 온건하게 받아들였다. 헤르텔은 재판 과정에서 (비록 스스로 고르지는 않았지만) 죽음의 신 이미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 전자레인지 조리 식품이 암을 유발한다는 진술을 고수했다. 그의 과학적 태도 뒤에는 이념적 태도가 있었다”. 스위스 연방법원은 헤르텔에게 가해진 발언 제한은 고수하지만, 유럽인권재판소의 결정을 일부 수용해 제재를 다소 완화하기로 한다. 전자레인지 관련 발언 전체를 금지하지는 않되, 일반 대중을 상대로 ‘전자레인지에서 조리된 음식이 해롭다는 점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동기화된 추론’의 위험성



1989년 헤르텔 인터뷰 기사에서 시작된 전자레인지 괴담은 이쯤에서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걸로 끝이 나긴 한 걸까? 스위스 연방보건청은 1990년대 들어 여러 차례 전자레인지의 안전성을 설명하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전자레인지의 조리 원리를 설명하고 전자레인지로 조리한 음식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주장이 근거 없음을 대중에게 알리려 노력했다. 그 이유는 헤르텔의 주장이 학계와 법정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에 상관없이, 스위스 사회에 그의 발언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연간 전자레인지 판매량은 1989년 10만 대를 넘기며 정점을 찍은 뒤 계속 감소해 1992년에는 7만 대 이하로 내려갔다. 연방보건청은 1998년 5월 발간한 ‘제4회 스위스 영양 보고서’에서 이례적으로 한스 헤르텔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의 비과학적 주장이 전자레인지 괴담의 진원지임을 밝히고 있다.

심리학자이자 행동경제학자인 댄 애리얼리는 책 〈미스빌리프〉에서 사람들이 거짓 정보를 믿는 이유 중 하나로 ‘동기화된 추론(motivated reasoning)’을 제시한다. 이는 자기가 원하는 결론에 딱 들어맞는 방향으로 주변 현실을 왜곡하는 경향을 뜻한다. 예를 들어 스포츠 경기에서 심판 판정이 우리 편에 유리하면 공정하다고, 불리하면 편파 판정이라고 보는 태도다. 기후변화, 낙태권, 총기 규제 등의 이슈를 다룰 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조금 과장하고 왜곡하는 정도는 상관없다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헤르텔은 재판 과정에서 ‘프란츠 베버 저널의 과장과 왜곡을 왜 적극적으로 바로잡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전자레인지의 위해성을 알리기 위해 그 정도는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과학자라 할 수 있을까.

이제 헤르텔의 논문은 찾아볼 수 없지만, 낫을 든 죽음의 신이 전자레인지 앞에서 미소 짓는 그림을 표지에 내건 저널은 여전히 그 환경단체 웹사이트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 종이 매체로 퍼진 거짓 정보의 생명력이 이 정도라면 소셜미디어 시대의 거짓 정보는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정보의 오염이 인류가 지금껏 유발한 오염 중 가장 강력한 것일지도 모른다.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editor@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