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그리심 산의 축복

하나님아들 2025. 1. 31. 01:05

 

 

본문성경 : 신 27 : 4 - 15절                 

설교제목 : 그리심 산의 축복

 

돈을 잘 버는 사람은 돈이 굴러다니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 통에도 돈이 보이고, 쓰레기 더미 가운데서도 돈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재리에 눈이밝고  돈버는 일에 탁월하게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믿는 사람들이 돈도 잘벌어야하고 사업도 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일과 돈을 버는 일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면 이것은 축복된 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씨뿌리는 비유가운데  마13:22절에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때문에 말씀이 막혀 결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그마음이 가시떨기 밭과 같은  사람이라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재리에 밝은 자가 아니라 하늘에 신령한 것에 밝고 영적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늘의 보화를 발견하고  그 보화를 소유할 줄 아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속에 나오는 신명기서는 가나안땅을 앞에 놓고 마지막 입국하기 이전에  모세의 세 편의 설교를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 3번째 설교 서론 부분으로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준행해야할 두 가지 규례에 대해 지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삶을 누리는 비결에 신령한 눈이 뜨여지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보면 애굽을 탈출해서 요단강을 건너 약속에 땅으로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게시는가하면 너희들은 약속의 가나안땅을 들어가거든  먼저 큰 돌위에 율법을 새겨서 에발산에 세우라고 하십니다.  그럼 왜 그렇게 명령을 하셨을까요?  

 

1. 율법을 새긴 돌단을 에발산에 세우라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4절)

그당시 고대의 일반적인 풍습이 중요한 법이나 칙령을 돌비에 새겨서  백성들이 지키도록 선포를 하였고 하나님이 가나안땅에 돌비를 세우라하는것은  돌비가 서는 그날부터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이 소유주가 되었다는 공식적 선포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세긴 돌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일깨워 주기위한 기념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발산에 돌비를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돌에다가 율법을 새기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돌에 율법을 새기는 것이 원래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고 깨닫고 마음에 간직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기억하고 순종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의 심비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고후3:3절에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돌비에 쓴 것이 아니라 심비에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복된 삶을 누리려면 먼저 내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의 기준과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의산 그리심산에 돌비를 세우라 하지 않고 저주의산 에발산에 세우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신11:29절과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에발산은 저주를 선포 받은 산입니다.  그런데 왜 저주의산 에발산에 돌비를 세우라고 하십니까?  저주의 산 에발산은 바로 죄악 세상을 상징하는 산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죄악의 세상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고 피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세상 속에서 이뤄집니다.

교회는 본래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다시 살게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이러한 죄에서 살리신 구속의 감격 위에 드려져야만 참예배요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주석가 쉐이퍼는  에발산에서 돌단을 쌓게 한 것은 저주를 면케해 주는 희생의 제사가  반드시 필요하게 될것을  강력하게 일깨워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위에 드려지는   오늘 우리의 예배를 통해 저주가 끝이 난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마치 룻기서에 나오는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을 나도 섬기기로 결심할 때  모압 출신 룻에게는 그즉시 모든 저주가 끊쳐졌다는 말씀과 같은것입니다. 

 

2. 돌단을 쌓되 특별히 다듬지 않은 돌로 쌓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5-6절에 보니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데지 말찌니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로 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자연석 그대로 단을 만들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인위적인 요소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다듬지 않은 돌,  철기를 데지 않은 돌이란?

다듬지 말고 자연 그대로의 돌로 순수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쇠연장과 철기로 갈고 다듬어서 번지르르하게 광택을 낸 천연대리석이 아닙니다.

광야에 구르는 투박한 돌, 아무 장식도 꾸밈도 없는, 평범하고 밋밋한 자연석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 이건 무얼 의미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집은 진리의 집, 자연 그대로 진실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진실은 일부러 다듬고 꾸미지 않습니다.

가짜일수록 꾸미고 화려하게 치장을하고 그럴뜻하게 위장을 하며 교만한 인격일수록 짐짓 겸양을 떠는 법입니다.  말도 진실한 말은 굳이 변명하고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꾸밈없이 진실되게 있는 그대로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에는 인간의 공로나 꾸밈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바로크 음악은 고전예술의 정수라고 불리는데, 바로크 Baroque는 고르지 못한 모양의 진주 즉 아름다운 진주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모습의 보기흉한 진주라는 포르투갈어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는 꾸밈없이 순전해야 합니다.

저의집에 가면 어렸을때의  손자 손녀들의 웃는 얼굴의 사진들이 응접실에 몇장 붙어 있습니다.  너무 귀엽고 사랑도 스럽지만 꾸밈이 없는  아이의 해 맑은 웃는 모습이 제 마음에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기 때문에  손자손녀들의 얼굴 모습을 볼때가 많이 있습니다.  진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인 것입니다.

거짓말만이 조작되고 그럴 듯하게 다듬어지고 꾸며 집니다.  참말은 단순명료하지만, 거짓말은 길고 장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 당시 사회적 배경에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처음 들어가서 새로운 환경에서 적들을 공격하고 성을 무너뜨려야할 전쟁의 상황이였지만 가장먼저 율법에 순종을하며 율법을 지켜야 하기에 넓고 커다란 돌에 율법을 새겨 다 볼수있는 장소에 세워서 시청각적으로 율법의 중요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정치적 애굽의 상황은 피라미드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애급에 피라미드를 가보신분은 알겠습니다마는  피라미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축물인데, 이집트 전체에서 94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지역의 피라미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프왕의 피라미드인데  2.5t 되는 돌 235만 개와 10t되는 돌 268만개 정도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하루10만명의 노동자가 20여년동안 동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왕 하나를 위해서, 그 사람을 신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이러한 대규모 토목사업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죽어 갔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조상 히브리인들은  바로 이러한 일에 동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 할 때에 강제로 동원되어 했던 일을 생각하면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고,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으라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천주교나 동방교에서는 성상과 성화를 숭배합니다.  교회를 대단히 웅장하게 천정을 높이 짓습니다.   물론 저들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형상화를 통해  보이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천주교인들은 고딕 교회당이나 마리아 상이나 성상들을 우상화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손길에 갖히는 분이 아니심을 알아야 합니다.

3. 그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6-7절을 보면 단을 쌓고 그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서있는 세겜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의 중심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창12:6절에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단을 쌓은 곳이요 하나님께서 이땅을 너와 네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곳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는 것은  즉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복된 삶을 누리는 비결이  그 중심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는데  번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불태워 바치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말 그대로 화목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예배에 꼭 있어야 할 사항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예배에 헌신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터 위에 세워진 제단이지만   이제는 우리가 희생의 제물이 되고 헌신자가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가까워 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감격이요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에는 감격이 있어야 하고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는 예배는 진정한 참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헌신과 감격속에 감사가 넘치는 예배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헌신과 감격이 있는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몸을 깨뜨려 밀알같이 헌신하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처음부터 롬12:1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중요하게 우리가 보아야할 말씀이 11절 이하에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기 위해 6지파를 그리심산에 세우고 저주하기 위하여 6지파를 에발산에 세우라고 모세에게 명령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의 말씀을 들려 줄때  6지파는 그리심산에 세우고 6지파는 에발산에 세웠습니까?   여기에는 분명히 중요한 신앙적 의미와 교훈이 있습니다.

 

4.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영적 교훈이 무엇입니까?(11-15절)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말씀에 순종할 때  여호수아 8:33절에 보면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리심산에 서든지, 에발산에 서든지  중간에 머무는 사람은 궤를 멘 제사장들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두 가지 반응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말씀으로 들리어 지든지 아니면 저주의 말씀으로 들리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든지 아니면 안 들려져서 은혜를 받지 못하든지 그렇게되면 결국 심령이 죽는 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항상 교회 와서 예배드릴 때 말씀에 귀를 기울여 청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설교가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들려 질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하다 보면 꼭 “목사님 이번 말씀은 나 들으라고 하시는것 같애요. 전부 내 말입니다”  즉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율법 중에는 축복의 약속이 따르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어떤 율법은 저주가 따르는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중 제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5계명 부모를 공경하면 네 생명의 날이 길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 2계명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   우상 섬기면 나는 질투하는 여호와라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갚으리라 합니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내가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리라 그러면   그리심산의 6지파가 아멘, 아멘 하고

우상을 섬기지 마라 우상을 섬기면 내가 그죄를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하면 에발산의 6지파가 아멘, 아멘 하며  우리는 절대로 우상 섬기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한 일 같은데  왜 이런 의식을 행하게 했을까하는 의문을 가질수 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예배와 신앙의 교훈이 담긴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 주경가 델리취는 이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 형태가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성도는 그리심산에 선 6지파같이 늘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들려져서 아멘, 아멘 하다가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내게 이렇게 복을 많이 주었는고 하지만  어떤 교인에게는 늘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지만 마음에 와 닫지를 않고  마음에 동의가 않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쩔수없이  체면과 외식으로 예배는 드리지만 그 삶이 메말라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신29:18절에 보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 그 마음에 독초와 쑥의 뿌리가 생겨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결과 심령이 강퍅해져서 우상 섬기면 망한다 해도 설마 뭐 그럴까 목사들이 다하는 소리지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내가 그 죄를 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하고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해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독초의 뿌리가 뭡니까?

신약으로 말하면 히12:15절에 나오는 쓴 뿌리입니다.

쓴 뿌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히 12:16절에 말씀하고 있는데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음행하는자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여기 망령된 자가 뭡니까? 망조가 든다는 말입니다.  결국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절말 불행한 에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맺쳐있는 상처와 쓴뿌리가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외곡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말씀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행7:51보면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합니다.  “목이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하고 설교를 할 때 두가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찔려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다른 사람들은 이를 갈며 스데반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쓴뿌리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축복으로 바르게 받을수가 없고 오해를 하고 곡해를 하여서 저주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쓴뿌리를 뽑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히12:29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령의 불로 쓴뿌리의 근원을 소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마음에 축복을 담을수있는 마음 그릇으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5.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리심산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8-10절)

8절에 보면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찌니라”  왜 명백히 기록하라고 합니까?

물론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에 잊지 말라는 의미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새겨져야만 거기에 힘이  솟아나고  축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요가를 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공중에는 기가 떠다니고 우리의 인체에도 무한한 기가 흐르고 있다고 하는데 모든 문제는 기가 막힐 때 병이나고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의 흐름이 막히면 무기력해지고 생기가 없어지고 의욕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를 뚫고 기를 살려주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를 죽이지말고 기를 살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4:14절에 보면 수가성 여인에게 하는 말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고 성령이 함께하면 우리 속에서 기가 펑펑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돌에다가 율법의 말씀을 명백히 새기라고 합니까?  그리고 9절에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고 합니다.  말씀이 들려지고 말씀이 가슴에 와 닿으면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기가 살아서 성도들의 삶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그리심 산을 축복의 산으로, 에발산을 저주의 산으로 정하였습니까?

구약 주경가 델리취는 “하나님은 이렇게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교훈 하시는데  그리심산은 항상 햇빛을 바라보는 산이요  에발산은 항상 햇빛을 등지고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다 세겜성 근처에 있는데  너비가 200미터 정도 되는 골짜기 하나를 두고 남북 방향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심 산은 855m 정도의 높이가 되고 에발산은 920m의 높이입니다.  이 두산은 골짜기 하나로 붙어 있지만,

그리심 산은 산림이 무성하며 생명의 기운이 왕성한 산이고  에발산은 거의 황폐하다시피 한 산입니다.

지금도 그리심 산은 나무가 무성하고 에발산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리심 산은 햇빛을 바라보고 있어 일조시간이 길어 항상 밝은 곳이고,  에발산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서 그늘진 곳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섰다면 그리심 산에 서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무관심하다면 나는 지금 에발산에 서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 반드시 예배때마다 은혜가 되고 그말씀이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이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올한해가  그림신산에 서있는 축복의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축복을 받는 한해가 되어서 하시는 일마다 형통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 (눅 17:11-19)  (0) 2025.01.31
항상 기쁘고 즐겁게 살자  (0) 2025.01.31
항상 긍정적으로  (0) 2025.01.31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0) 2025.01.27
교회의 본질.  (0) 2025.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