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아들 2025. 1. 5. 22:20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이해를 돕는 명쾌한 글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읽어보면 또다른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죠. 아래의 글은 삼위일체의 기본서 격인 글을 옮겨보았습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2.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3. 삼위일체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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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Ⅰ. 들어가는 글

서방의 전통을 최종적으로 성숙하게 표현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시대에 나타난 글 중에서 가장 유능한 것 가운데 하나인 「삼위일체론」의 저작에 자신의 성숙한 시기의 거의 30년을(기원후 400-428년) 바쳤다. 그는 성경을 세밀하게 연구함으로써 이 심원한 삼위일체론을 구상했고, 역시 심원한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자들의 도움을 받지 못햇다는 것을 통해 그의 놀라운 지력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그는 신론에 있어서는 플라톤이나 특히 신플라톤주의에 가까웠기 때문에 신비적 요소를 받아들여서, 이것을 윤리적, 인격적 사유와 결부시켰지만,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는 완전히 서구의 전통에 서 있었다.
이 책은 다른 여러 날짜에 종합한 논의이며, 그가 수락한 진리는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구별되는 동시에 공동본질적 즉 실체에 있어서 숫자적으로 하나이시라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전체적으로 니케아 신조와 일치하지만, 삼위일체 내의 위격들의 본질이 하나라는 것을 더 역설하며,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을 명확히 주장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모든 종교 교리중에서 가장 방대한 교리이다. 그것은 신학의 토대이며, 기독교를 캐보면 결국 삼위일체 사상이다. 방대하고 자연히 신비가 되는 이 교리를, 이제 「삼위일체론」을 검토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신 사상을 이해하고, 우리의 삼위일체 사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또한 이 글의 구성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삼위일체론」제15권에서 자신의 글을 요약한 글과 헤네르의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와 켈리의「고대기독교교리사」를 인용했음을 밝힌다.

Ⅱ. 삼위일체론에 대해

1.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해설에 있어서 성경을 근거로하여 통일성과 동등성을 밝히고 있다. 그의 해설은 철두철미하게 성서적이지만 성부를 출발점으로 삼는 전통과는 대조적으로 신적인 본성자체로서 시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책의 목적을 앞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을 통해 그의 논의의 방향을 알 수 있다.



" 삼위일체는 유일 진정한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이시라고 말하며 믿으며 깨닫는 것이 바르다는 것을 설명하겠다" (제1권 제2장)
"성자와 성부는 동일한 본질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성부뿐 아니라, 삼위일체가 불사(不死)하신다. 만물이 성부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제1권 제6장)



그에게 있어서 본성 혹은 본질이야말로 삼위일체인 것이다. 그는 위격이나 인격의 구별에 대해서도 신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하나님께 대해 긍정되는 것은 무엇이거나 세 품격의 각개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긍정된다.



"성자는 성부보다 작으시지 않으며, 성부에게서 나셨다. 이런 말은 그가 동등하시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출생을 알린다." (제2권 제1장)
"....... 성자가 성부보다 작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에게서 나셨다는 뜻이다." (제2권 제3장)
"성령이 성부가 영화롭게 하시는 성자를 영화롭게 하시지만, 성부나 성자가 성령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으므로, 성령이 성부나 성자보다 크시다는 생각을 자칫 조심해야 한다." (제2권 제4장)
"성부가 말씀으로 성자를 보내셨다고 하므로, 그 보내는 일은 성부와 그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성부의 말씀은 곧 성자 자신이므로, 성부와 성자에 의해서 성자가 파견되셨다."

(제2권 제5장)
"우리는 또한 성자나 성령뿐 아니라 성부께서도, 그의 뜻에 예속된 어떤 피조물을 수단으로 삼아 구체적인 형태로 죽을 운명인 우리의 감각에 자기를 알리실 수 있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제2권제18장)



그는 제2권의 탐구를 통해 나타나신 분은 주 하나님, 즉 위격을 구별하지 않고 부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셨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는 한 위격이셨는데, 어느 위격이신가 하는 것은 성경기록에 비친 단서에 의해 결정해야 함을 말한다.



"성부 하나님과 말씀과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그 어느 분도 그 존재와 그 본성이 전혀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더군다나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 (제3권 제10장)



그는 제4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파견되신 까닭, 즉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목적을 우리가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을 뵈며 하나님께 밀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종의 형상으로 파견되셨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부보다 작으신 것이 아님을 말하며, 성령의 파견도 같은 이유임을 밝힌다.



"우리는 죄를 통해서 죽음으로 왔고, 그는 의를 통해서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죄제물로서 겪으신 것이다." (제4권 제12장)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신 목적은 우리가 믿음으로 깨끗이 되며 들어올림을 받아 변함 없는 진리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제4권18장)
"성부가 낳으시고 성자가 나신 것 같이, 성부가 파견하시고 성자가 파견되셨다. 그러나 낳으신 분과 나신 분이 하나이신 것과 같이,파견하신 분과 파견되신 분이 하나이시다." (제4권 제20장)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 존재의 본질에서 세 분이 같은 하나이시다. 거기에는 시간적 운동이나 시간, 공간의 간격없이 모든 피조물 위에 있다. 세 분은 함께 영원으로 영원까지 같은 하나이시며, 이를테면 영원 자체이시며, 그 영원에는 진리와 사랑이 없지 않다." (제4권 제21장)
"성부와 성자는 한 하나님이시며, 피조계에 대해서 한 창조주와 한 주이신 것과 같이, 성령과의 관계에서 한 시초이시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피조계에 대해서 한 창조주와 한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한 시초이시다." (제5권 제14장)

2.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신학에 있어서 가장 독창적으로 공헌한 것은 인간 영혼으로부터 끌어낸 유비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인격으로서의 신을 삼위일체론적 유비로써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어디에나 삼위일체의 '자취'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관념속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위일체적인 신성의 참다운 형상을 찾으려면 속사람 즉 영혼을 찾아야 한다.


"사랑에는 마치 삼위일체의 형적처럼 세 가지 면이 있다......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 이 셋이 있다." (제8권 제10장)
"우리는 아직 하늘 일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말하지 않고, 불충분한 형상이지만 역시 형상인 사람에 대해서 말하겠다.....내가 무엇을 사랑할 때에는, 그에 관련된 것이 셋이다......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 이 셋이 있다......자기를 알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삼위일체의 형상이 있다." (제9권 제2, 3장)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르므로, 그 점에서 삼위일체를 깨닫기 시작하는것 같았다. 즉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받는 대상과사랑, 이 셋이다......지헤와 지헤자체에 대한 지혜의 지식과 지헤 자체에 대한 지헤의 사랑, 이 셋이 삼위일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서도 한 삼위일체를 발견한다." (제15권 제6장)



그는 또한 인간의 자의식을 기억과 지성과 의지라고 하여 삼위일체론의 유비로서 말한다.




"마음 자체와, 마음의 지식이며 말인 지식, 즉 그 자체에 대한 지식 제3자인 사랑 이 셋에는 삼위일체의 일종의 형상이 있으며, 이 셋은 하나이며, 실체이다. 마음은 그 존재의 분량에 따라 자체를 알므로, 그 지식은 마음보다 적지 않다. 또 마음은 자체에 대한 지식의 분량과 자체의 존재의 분량에 따라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그 사랑도 마음보다 적지 않다." (제9권 제12장)



그에게 있어 신은 통일이며, 인격이기 때문에, 밖을 향하는 신의 모든 행위는 언제나 삼위일체 전체의 행위이다. 어느 위격, 어느 인격도 그 자체만으로 행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의 실체는 삼중의 형태를 가진 사랑, 곧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은 자와 사랑하는 힘으로서의 사랑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삼위일체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기억과 이해력(또는 지성)과 의지에서 우리는 능력과 지식과 이용(利用)을 보아야 한다.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상대적·관계적으로는 셋이다." (제10권 제11장)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를 가진 마음은 삼위일체의 한 형상이다." (제10권 제12장)
"기억속에 있는 외부 물체의 형상과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눈에 박히는 그 형상의 형태와 이둘을 결부하는 의지의 목적, 이 셋이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는 외면적 인간에 속한 것임을 우리는 알았다. 그 이유는 외부에서 지각된 물체로부터 마음속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제15권 제3장)



3. 위의 글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피조물에서 삼위일체의 형상을 찾아 설명했지만, 제15권에서 그 자신이 자연적인 이성으로 삼위일를 설명하기 어려움을 말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삼위일체들에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를 발견하기는 쉽지않으며, 우리의 이해를 위한 것임을 밝힌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와 같은 것은 우리의 외면적이며 감각적인 말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며 심적인 말에서 구해야한다. 우리의 말이나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식 사이에는 최대의 차이가 있다." (제15권 제11장)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과 다른 것과 같이, 우리의 지식에서 나는 우리의 언어도 성부의 본질적 존재에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다. 나는 이렇게 성부의 지식, 성부의 지혜에서 난다고 말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지식이신 성부에게서, 지혜이신 성부에게로 난다고 해야 한다." (제15권 제13장)



이렇게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의 차이를 말하며, 그는 다만 믿음의 도움으로 삼위일체를 알 수 있다고 하며, 성령은 무슨 까닭에 나시지 않으며, 어떻게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가 하는 문제는 천국에 이르렀을 때에만 이해된다고 고백한다.



"나는 지금까지 말을 많이 했으나 최고 삼위일체의 형언할 수 없으심에 합당한 말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공언하며, 그 분에 대한기이한 지식은 너무도 위대해서 나는 능히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시 139:6) 고백한다." (제15권 제27장)



Ⅲ. 발췌를 마치며

지금까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놀라움뿐이다. 그 시대에 어떻게 지금의 기독교사상의 근거가 되는 이런 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과, 또한 그 방대함에 형언할 길이 없다. 그 자신도 마지막에 고백했듯이 인간지헤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이 많은 논의를 서술한 것이긴 하지만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논의에 대해 착각에 빠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었다. 인간정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어는 경우에나 멀고 불완전하다는 표현이 어쩌면 제일 타당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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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Ⅰ. 칼 바르트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의 위치
칼 바르트는 1932년 그의 [교회교의학] 제1권에서 삼위일체론을 다루고 있는데, 그의 방대한 교회교의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이 제1권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내용은 교의학의 체계에 있어서 외형적으로 한 특별한 위치를 가질뿐만 아니라 "전체 교의학에 대하여 결정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교의학은 인식의 원리로서 성서로부터 시작하였다.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다음의 질문들을 제기한다. : 1)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2)이 하나님은 무엇을 행하시는가? 3)이 하나님은 무엇을 일으키시는가?. 계시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은 필연적으로 삼위일체론의 문제를 야기한다. 그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와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하기 때문이다. 즉 "계시하는 하나님 그리고 계시의 사건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 이 사건의 작용"은 하나이다. "파괴될 수 없는 단일성 가운데에서 계시자, 계시, 계시의 능력"이신 하나님은 "또한 그 자신 속에서 파괴될 수 없는 상이성을 가지고 이 세 가지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
"파괴될 수 없는 단일성'과 '파괴될 수 없는 상이성" 가운데에서 계시자, 계시, 계시의 능력, 이 세 가지 존재방식을 가지는 하나님,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야말로 기독교의 신론과 계시의 개념을 다른 신론들과 계시의 개념으로부터 구분하고 그의 기독교성을 보장한다.



Ⅱ. 삼위일체론의 기초
삼위일체론의 기초, 그 뿌리는 바르트에 있어서 한 마디로 말하여 "계시"에 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주로서 계시한다" 이 명제가 삼위일체론의 뿌리이다. 달리 마하여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출발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계시의 사건은 하나의 주체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사건으로부터 삼위일체론이 형성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바르트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계시의 해석"이요, 게시는 "삼위일체론의 근거"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단지 '계시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의 해석"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동"의 문제, 곧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인 아들의 문제, 그리스도의 신성의 문제였으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버지와 성령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에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계시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첫째, 성서에 있어서 계시는 그의 본질상 인간에게 드러내어질 수 없는 하나님이 인간에 그 자신을 드러냄을 뜻한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의 계시된 본질 안에서", "드러날 수 없다". 셋째, 계시는 언제나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며 '구체적 인간들에 대한 구체적 관계'이다.



Ⅲ.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1. 삼위의 일체성
삼위의 일체성은 삼신론을 방지하고 '하나님의 일체성에 대한 인식과 일신론"을 지키는데 있다.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한다고 하여 하나님의 일체성 내지 하나됨이 폐기되고 세 가지 신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말하여 삼위의 일체성의 의도는 "기독교의 일신론"을 지키는데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여기에서 그는 삼위에 대하여 "인격"이란 개념 대신 "반복"이란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세 인격들"의 본질의 수적인 일체성의 진리를 강조하는데 그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2. 일체의 삼위성
동시에 바르트는 일체의 삼위성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의 일체성은 물론 삼위성'도 강조하고자 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일체성, 곧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이 개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의 구분, 하나의 질서를 포함한다. 이 구분 내지 질서는 세 '인격들'의 구분 내지 질서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인격"이란 개념 대신에 "존재양식"이란 표현을 채택한다. 그리하여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은 "세 가지 존재양식"을 가진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가지 존재양식 안에서 한 분이다는 명제는 단 한 분이신 하나님, 즉 단 하나의 주, 단 하나의 인격적 하나님은 ..... 아버지의 양식으로, 아들의 양식으로, 성령의 양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 가지 존재양식은 "하나님의 서로 다른 고유한 존재양식"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세 존재양식이 가진 상이성 내지 고유성을 "형식적 고유성", 다시 말하여 "그들 상호간의 관계를 통하여 주어져 있는" 고유성이라고 부른다.

3. 삼위일체와 그 의미
삼위일체란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삼위에 있어서의 일체성과 일체에 있어서의 삼위성"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다. 이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먼저 "아버지, 아들, 성령 상호간의 일치성"을 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삼위의 세 가지 근원적 관계는 역시 "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각 존재 양식의 다른 존재 양식들에의 한 특수한 참여"를 뜻한다.
아버지, 아들, 성령 상호간의 일치성은 "밖을 향한 그들의 일치성",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활동에 있어서의 일치성과 상응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본질과 활동은두 가지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계시자-계시-계시의 능력, 창조자-화해자-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본질이 곧 하나님의 활동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활동이 곧 그의 본질이요 그의 본질은 곧 그의 활동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론은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의 아래 잇다는 종속론을 거부하고, 아들은 하나님이 나타나는 양식에 불과하다는 양태론을 거부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현상하는 단순한 양태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신적 존재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며 하나님은 오직 이 존재양식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이 세 요소 너머에 있는 어떤 보다 더 높은 존재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 된다.



Ⅳ. 바르트의 신관
바르트의 신관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관을 다시 찾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삼위일체 신관은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이 대화할 수 있는 접촉점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현실성을 무시하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사변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전제를 무시하고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문제도 철학적인 공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관은 유대교나 모하메트에서와 같은 유일신론과는 구별된다. 또 일반 철학적인 수로 본 '일신론'과도 구별된다. 또 그는 삼위일체신론을 '삼신론'으로 떨어뜨리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극단의 '유일신론'과 극단의 '삼신론'을 억제하고 여기에다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관'을 전개시키려는 것이 바르트의 복안인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관은 결코 바르트의 '그리스도교 유일신론'에 지장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리스도교 유일신관을 '인격적'으로 터닦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해석해 놓은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성서에 제시된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 관념이나 절대자 혹은 실체가 아니요, 철두철미하게 '주님'으로 나타나신다. 바르트는 이 '주님' 사상이 그의 삼위일체 교리의 근본 바탕이 된다고 말하였다. 이 '주님' 사상은 계시론적 입장에서 볼 때에도 다시금 삼위일체적인 기능으로 각기 구획되게 됨은 물론이다. 즉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계시자'로서, 아들은 '계시' 자체가 되시는 분으로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은 '게시답게 하시는 분으로 각기의 기능이 분배된다.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은 그러므로 결코 '비인격적인 지
배' 즉 '세력' 또는 '능력'이 아니고, '인격'으로서, 즉 '주님'으로서, 다시 말하면 '절대정신'이 아니고, '인격' 혹은 '사람'으로 이해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된다. 따라서 삼위일체 되신 주 하나님은 결코 중성적이며 비인격적인 어떠한 세력이 아니고, 철두철미하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되시는 인격적인 '그 분' 즉 라틴어로 'alius-alius-alius'(he-he-he)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은 그 각기의 위격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입장을 바르트는 고수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있어서 '성령'도 '중성'이 아니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남성'으로 간주된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신론을 토대로 하여 그의 신학적 '삼분법'을 조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창조'를 맡아 다스리시는 '창조주'가 되시고, '아들'되시는 하나님은 '속죄'를 맡아 다스리시는 속죄주가 되고 마지막으로 '성령'되시는 하나님은 '구원'을 맡아 다스리시는 구원주가 되신다. 성령이 구원주가 된다는 사상은 아마 전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사상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이것은 바르트 신학의 치밀한 조직력에서 비로소 찾아내진 것이라고 말해서 좋을 것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이채 있는 특징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삼분법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에도 세 가지 특징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바르트는 그의 그리스도론에서 '칭의' '성화' '약속'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시켜 놓았다. 그리고 여기에 각기 해당하는 인간 쪽에선 세 가지 특이성을 도출해 놓고 있다. 즉 '칭의'에 대비되는 인간 쪽의 반응은 믿음이고, 성화에 대비되는 인간의 의무는 '사랑'이며, 마지막으로 '약속'에 대비되는 인간쪽의 태도는 '소망'인 것이다.
우리는 바르트의 '교의학'이 삼위일체론을 기반으로 하고 전개시킨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내심으로는 '칭의'에서 출발시켜도 좋고 '성화'에서 출발시켜도 좋고 또 '약속'에서 출발해도 동일한 결론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책에서는 전연 다른 각도에서 즉 믿음, 사랑, 소망이라는 각도에서 자기의 교의학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의 '상호관련성'(Perichoresis)과 '상호 개별성'(Ap

propriation)을 동시에 성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소위 '삼중성 가운데서이 통일성'과 '통일성 가운데서의 삼중성'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만물의 창조자로서 만물과 구별되고 성별되는 점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초월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의 간격을 메꾸시려 이 세상에 오신 속죄자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역사적 객관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따라서 마지막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역사가 현재뿐만 아니라 장래까지도 우리들의 마음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내재성'이 여기서 입증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내재성'을 신비주의와 구별시키기 위하여 바르트는 바울의 서신들을 인용하면서 '구원'은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게시나, 속죄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직 오지 않은'(noch ausstehehende)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모양의 실례들을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이라고 말해서 바르트는 일괄적으로 평가하여 놓았다. 이것은 많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적인 삼분법을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설명은 물론 설명으로서는 좋으나 그러나 삼위일체신 자체는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하고 앞서 이미 말한 바 있는 '계시', '성서' 그리고 '전도' 이 세 가지가 'vestigium'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바르트가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점이며 동시에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 자체로서 완전하신 하나님 모습이라느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직접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요, 이 역사는 다시금 하나님의 세 '존재양식'에 해당되고 대비되는 인간 쪽에서의 반응양식과 교호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현실성은 입증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Ⅴ. 계시된 하나님
바르트가 보는 하나님 관념은 아주 엄밀하게 성서적인 특색을 살려주고 있다. 바르트는 막연한 공상적인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초월한 어떠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이 세상 가운데서 행동을 취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바르트는 구체적으로 성경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보편적인 그리고 막연한 중성적인 초월자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기의 자유스러운 뜻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빼내어 다른 민족으로부터 성별시키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비단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빼내심으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실현되던 구원의 역사를 실현시켰을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살게 하며 이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역사를 감행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즉 바르트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인식 근거'라는 바르트의 입장이 그의 교의학의 지배적인 주류임을 알 수 있다.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사람'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심'도 동일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는 어떠한 종류의 행위인가가 문제가 되는데 첫째로 하나님의 존재는 '사랑하시는 존재'이시다. 아니 하나님은 곧 사랑이신 것이다. 이 사랑의 주체자로서 하나님은 인간과의 교제를 원하시고 만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만 그의 이러한 모든 의지는 자신의 결함이나 고독을 풀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독특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과의 만남 없이는 존재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람이시며 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바르트는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이 사람이요, 따라서 '유일한 삶'이시오,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는 자유 가운데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단 인간의 어떠한 계기나 소질로부터 초월한 사랑이요, 달리 말하면 거룩한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스러움은 그것이 옛 신학에 있어서 표현되던 하나님의 '자존성'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바르트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내재성을 위한 그의 자유성'을 의미하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내재하실 수 있는 자유성을 의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공존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기도 한 만능하신 하나님의 품성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품성을 '신적인 사랑'과 '신적인 자유'로 갈라서 소위 하나님의 속성에 해당하는 부분을 각기 갈라 생각하고 있다. 즉 신적인 사랑에 해당하는 부분을 '은혜와 거룩하심' '긍휼과 의' '인내와 지혜' 등으로, 그리고 신적인 자유에 해당하는 것으로 '통일과 편재' '불변성과 전능' '영원과 영광'등으로 보고 있다.
바르트는 여기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와 속죄의 주체가 되시기 때문에 주님이 아닐 수 없으며, 이러한 창조와 속죄와 구원의 역사를 현실적으로 감당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완전하신 주님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완전성이란 곧 창조주와 속죄주와 구원주의 각기의 역사를 완전성이라는 개념으로 바르트는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와 삼중성을 다시금 상호 밀접한 관련속에서 해명하려는 것이 바르트의 '계시돤 하나님'의 모습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바르트는 새로운 '예정론'을 제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놓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트에 의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이라는 말로 명명된다.



Ⅵ. 결론
삼위일체론의 근거 내지 출발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있다고 보는 바르트의 견해는 탁월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교의학에 있어서 그 출발점인 하나님의 말씀, 곧 에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되고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게시로부터 정립되는데, 기독교 신학의 기독교적 특성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여러 학자(허지슨, 몰트만, 베일리)에 의하여 그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되고 있긴 하지만 교부시대 이후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더 깊이 생각하여 볼 수 있는 기초를 다시 한번 정립하였다는 위대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