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세례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맥스웰 화이트의 ‘보혈의 능력’(은성출판사)에서 나온 글들입니다.
이 책은 구입하여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같은 내용이 규장에서 나왔는데 은성은 아주 오래 전부터 충성스럽게 출판했고 규장은 작년부터 출판되었습니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목사님들이 환상으로 예수님의 피가 자기에게 쏟아진다든지 방울 방울 떨어진다든지 하는 환상을 보고 능력있는 목회자로 변한 경우가 많습니다. 능력은 주님의 것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 그렇게 하여 주셨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능력을 사모함은 인간의 할 일이고 결정은 주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2000년도쯤에 읽은 책이 있습니다. 국민일보사에서 출판된 일곱시간 기도하는 박종훈 목사님의 책들입니다.(박중훈은 영화배우이고요.) 박종훈 목사님(당시에는 집사님)은 하루에 직장생활을 하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새벽 2시에 일어나서 매일 일곱 시간 기도한 분으로 유명한데
그분의 기도의 방법이 첫 한 시간 동안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보혈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받아 일곱 시간 기도를 하고 중보기도를 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신 분입니다. 지금도 사역을 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 기도의 시간이나 능력도 결국 예수님이 그렇게 예수님의 피로 정결하게 씻어주시고 성령이 임하시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3년도부터 예수님의 보혈에 대하여 강의를 듣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역을 하면서 예수님의 피를 뿌리면서 회개시킬 때에 병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저의 주된 방법은 예수님의 피를 뿌리면서 생각나는 모든 죄를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저에게도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서 어떤 종류의 죄가 있는지 알게 하십니다. (지식의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 누구나 예수님의 피로 일정 기간 이상 씻으면 주님이 이렇게 사용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회개한 자이며 말씀이 있는 자가 분명히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면서 병이 낫기도 합니다. 제가 사역을 할 때에 병이 나은 경우는 1. 폐질환(병원에서 불치병이라 함.) 2. 심장병(판막이 약한 경우, 세균성) 등입니다. 이때에 병이 낫기 전 혹은 병이 나으면서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은 간단하게 처리됩니다.)
저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뿌릴 때에 언약대로 나타나시고 임하시는 예수님의 임재 때문입니다. 곧 성령의 임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임재와 예수님의 임재를 같은 것으로 보아도 괜찮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께 순종하면서 말씀을 따라서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 자신을 철저하게 씻는다면 이러한 역사는 나타납니다.
성령의 역사를 하기 이전에
먼저 요한복음 14-16장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간단하게 요한복음 14-16장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진리들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기초를 정리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잘못된 성령론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평생 추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시기 전에 십자가에서 이루시는 구속사건을 기초로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특히 성령을 보내시는 일에 대하여 잘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르고 인간의 개념만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는 자는 실천적인 부분에서 실수를 하게 됩니다. 결국은 말로만 하는 기독교가 되어 버리고 공부한 사람만 기독교를 잘 믿는다 생각하게 됩니다. 바리새인화됩니다. 율법주의가 됩니다. 참다운 사랑과 긍휼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일 자라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말이 허상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참으로 주님을 덜 만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환상을 보기도 하고 극적인 영적 체험을 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그는 예수님과 일치되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마음에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그러나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인간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을 거룩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님에 대하여 기본적인 것을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영은 바로 성령이시고 성령은 바로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하나되어 역사하십니다.
요한일서 5: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2) 이 성령의 나타나심은 바로 약속하신 대로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맺으신 언약대로입니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나타내리라 = ejmfanivsw 원형은 ejmfanivzw, 엠파니죠, =manifest, 현현하다. 나타나다. show himself]
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3) 말씀에서 오류가 생기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나타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행하십니다. 진리가 정리되지 않거나 믿지 않는 자에게 성령이 역사하실 리 없습니다. 혹 역사하신다면 그를 깨우치시기 위한 예수님의 매우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그에게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역사한다 하는데 잘못된 경우는 사단이 거짓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절대로 예수님의 보혈을 통하여 회개하고 주님께 굴복하면서 역사하는 현장에서는 역사할 수 없습니다. 방해를 하려고는 하지만 사단이 주권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직접 역사하시며 직접 나타나시며 동시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성령만 역사하신다 라는 것은 잘못된 교리입니다. 성령이 보냄을 받으시지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직접 일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문맥상 14:18을 부활하여 다시 제자들에게로 오신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부활하셔서 고아신세를 면하게 하신다면 승천하시면 제자들은 또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로 옆에 계심이 아니라 영으로, 곧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이해입니다.
(4) 성령과 예수님은 다르게 보는 것은 일치되신 하나님을 분리하는 잘못된 시각입니다.
이렇게 개념상 잘못된 분리를 한 후(잘못된 성령론 때문에) 잘못된 사역자는 성령이 그 사역자가 움직이고 요구하고 기도하는 대로 움직일 것을 주장합니다. 그렇게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나 믿음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처음에 순수하고 올바르게 성령을 받고 종으로서 사역을 하다가 종이 아니라 사역의 주체와 주관자가 되어버리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자기 영으로 역사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과 예수님을 하나로 우리가 늘 보아야 하는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다음입니다.
요한복음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예수님이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오신다고 하시는데 거처를 함께 하십니다. 성령으로 임하셔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5) 성령은 예수님이 보내시고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십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6) 그러나 온전한 성령의 역사는 성령만 추구함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을 올바로 추구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5: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그러나 물과 피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물은 말씀으로 봅니다.
말씀이 없이 피만 외치는 것도 부족합니다. 물로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말씀이 충만해지면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이해하고 적용하면서 성령의 역사안으로 들어갑니다.
(7) 예수님의 피는 언약의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언약을 체결하는 도구였고 하나님께 언약대로 하여주십시오 라고 요구하는 도구입니다.
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것은 구약의 제사의 기본개념이며 이것은 변화된 것이 없습니다. 즉 피가 아니면 죄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율법이 선포되기 이전에도
아벨의 제사는 죄를 의식하고 죄를 사함받기 원하는 제사습니다.그러므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는 자기의 것을 드리려 하되(자기의 헌신이겠지만) 자기의 죄는 감지하지 못하는 제사였으므로 거부당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마저 단절된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가인이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사에서 봐야하는 것은 죄를 처리하기 위하여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과 계신 천국이 그런 곳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즉 거룩하시니 죄를 참아 보실 수 없으므로 천국에 들어오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에 믿음으로 천국간다는 것은 개념만이 아니라 이 죄사함과 정결하게 됨, 그리고 성령으로 변화됨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개념만으로 구원을 말하는 자는 사실 거짓말장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장로교의 약점입니다. 저도 평생 장로교인이고 장로교 목회자이지만 장로교가 이제 그 무지를 벗을 때가 충분히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와왔느니라
예수님의 첫 복음전도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체험하는데에도 회개가 필요하며 회개의 궁극적인 완성은 죄사함입니다. 주의하실 것은 회개와 죄사함이 같다고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회개는 인간이 하고 죄사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자기가 "아, 이제 죄사함받았을 거야" 하고 일어나면 자기가 하나님노릇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은 증거로 성령을 받는 일을 체험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올바른 신앙입니다.
믿는 자가 성령을 받는 것은 자기의 결정사항으로 취할 옵션이 아니라 필수적인 명령이므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와왔느니라 라고 하셨을 때에 궁극적으로 회개하는모든 이에게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십자가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참고로 예수님의 피가 시간을 거슬러 과거에도 거꾸로 역사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논리입니다. 이 말에 대하여 고민하지 마십시오. 알고보면 어리석고 잘못된 말장난이 좀 있습니다. 거짓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흘리신 이래로 역사하십니다.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1절--구약 10, 12-14-십자가 사건 이후의 신약이라고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5대 제사인데 이 제사는 죄를 없이 하지는 못하고 가리우기는 합니다.
임시적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구약의 짐승의 피는 육체에 적용되고 양심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양심까지 즉 마음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를 부릴 때에 우리는 가장 깊은 죄 평상시에 죄라고 여기지 않은 부분의죄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는 흘리신 그 이래로 적용된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어리석고 헛된 어떤 신학자들의 말장난을 구분하지 못하는것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기도원에 가면 열심히 울고 불고 시원하게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는 것이 회개의 과정인데 정말 그 사람이 회개한 결과 하나님이 다시 그를 받아주시고 사랑하시고 그와 함께 하시기로 하셨을까요? 아마 그 사람에게 가서 이같은 질문들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이 물어볼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맞아요 라고 할까요? 일부분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시기 때문에 천국에 오려면 죄를 회개하라 하시는 것이며 그 죄의 처리방법이 인간이 스스로 해도 죄를 벗을 수없으며 오직 예수님의 피로 씻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는 온 세상의 바닷물로 다 씻어도 손이 정결해지지 않습니다. 나의 귀한 몸의 소산을 (자녀) 제물로 바친 들 죄는 씻겨지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대로, 제정하신 제물로, 그 피로 씻어야 죄사함을 얻게 되고 그때에부터 구원의 길이 그 사람앞에 열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그래도 이러한 은혜를 받았으나 이방인들은 이러한 죄사함의 방법을 모르고 흉내만 냈습니다. 동양의 무당도 닭피를 흘리고 잉카족도 사람의 심장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하셨습니다.
우리의 헌신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잘못된 헌신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입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헌신할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됩니다.
그릇된 가인의 헌신은 참된 회개없이 자기의 것을 추구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열매가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거절당하는 것이며 결과는 비참합니다.
올바른 헌신은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우리가 상급을 받고 주님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하고 친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진리가 올바로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진리의 기초위에 서지 않은 모든 신앙이나 헌신은 다 없어져버릴 것입니다. 사라질 것입니다. 안개처럼 사라질 일을 하는 것은 믿는 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알고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개념이 없이 예수님의 피를 모욕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개념으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은 아벨로부터 구약시대 내내 피를 드리는 제사를 요구하셨고 그 요구대로 제대로 행하여 자신의 죄를 씻은 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24장의 구약체결의 제사에서도 나타납니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님의 피흘리심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참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엡1:7]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2: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골1: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히9: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9:21]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히9:22]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25]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13: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13:20]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벧전1: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왜 예수님의 피를 어떤 이는 오해합니까?
예수님의 피에 대한 말씀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온전하나 사람이 준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족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결이 부족하므로 성령이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심이 덜 나타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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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맥스웰 화이트의 책 ‘보혈의 능력’의 일부분입니다. 주는 미래를위한이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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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레스터 섬랠(Lester Sumrall)은 필리핀 제도에서 귀신 들린 소녀를 구원해 주기로 했는데, 그 때 그 소녀 속에 있는 귀신은 완전한 영어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영어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아이였다. 이 악령은 성부, 성자, 성령, 예수의 피를 순서대로 저주했다.
[주: 그러나 이러한 저주는 아무 효력이 없다. 1. 성경적으로 ‘저주하다’란 ‘너 죽어라’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싸우면서 예를 들어서 ‘죽어라 이 놈아’ 하는 것 자체가 저주하는 행위에 속하는 것이다.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저주는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신명기 28장)]
2. 귀신의 속성중 악함과 능력을 보자면 그 존재는 악하지만 능력면에서는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비할 바 없는 존재이며 그리고 이미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심판을 내리시고 죽으라 저주하신 피조물이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상을 올바로 가져야 한다. 어떤 경위로든지 사단이나 귀신을 힘있다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자세이다.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귀신이 이렇게 저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1957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복음 전도대회에서 섬렐 형제는 말하기를 그 귀신은 예수의 피가 살아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의 피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 강한 악령의 반응에 놀라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예수의 보배로운 피를 전하고 그것을 노래하거나 간구하기 시작하면, 마귀는 무섭게 불안해 한다. 마귀는 예수의 피의 능력을 알고 있으므로 기독교인들이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해왔다.
많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표현대로 말해서 "도살장 종교"와 전혀 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지 않는 종교 신앙이 있는데, 마귀는 우리가 그런 종류의 신앙을 갖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나 우리가 적극적으로 예수의 피를 존중하기 시작하는 순간 마귀들은 병적으로 흥분한다. 그것은 마치 말벌 집에 불을 붙인 것과 같다.
(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예수님의 피를 적용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히 회개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까지 회개하는 것이 옳다.)
교회 내에서조차 예수의 피에 대해 그다지 가르치지 않으며 교인들이 악령들의 활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현명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의 피에 대한 믿음이 없이 악마들을 쫓아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여러 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 영과 육이 마귀의 지배 하에 있는 사람들을 구한 일이 있었는데, 언제나 예수의 피를 힘입어 간구했으며 그가 문자 그대로 그 피에 덮혔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경우에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신 예수의 약속(눅 10:19),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는 이사야서의 약속(이사야 54:17)이 완전히 실행된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그 피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사실에 의지한다. 그 피는 하나님께 "죄가 덮혔다! 벌금을 지불했다!"고 소리친다.
실제로 성경에는 흘림을 당한 피가 하나님께 말한다는 증거가 많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창 4:10) 이 말씀으로 보건대, 아벨의 피 속에 있는 생명은 그가 살해당한 후에도 끊어지지 않고 복수를 위해 소리쳤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죄하게 흘려진 피는 복수해달라고 소리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피를 아벨의 피와 비교하여 언급하면서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라고 했다(히브리서 12:24). 아벨의 피가 복수를 부르짖는 반면에, 예수의 피는 자비를 부르짖는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해마다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에 염소와 황소의 피를 뿌린 것 안에 상징되어 있다(히브리서 9:25). 그렇게 피를 뿌린 결과 하나님께서는 속죄소를 가리고 있는 두 스랍 사이에서 대제사장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고 말씀하셨다.
피를 사용할 때에만 영광이 나타내고 음성이 들렸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대제사장이 지난 일 년 동안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대속하는 피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그는 피를 사용해야 했다.
우리는 오직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를 위하여 휘장(휘장은 그의 육체를 의미한다)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따라가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 10:20-22).
구약 시대에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피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오직 피만 바쳤다. 오늘 기독교 사회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본다. 즉 자기의 행위, 감정, 이상한 불, 다양한 종류의 예배들을 바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거룩한 곳"에 들어가려 한다면 우리의 유일한 탄원의 근거로 예수의 피를 바쳐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피를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손에 아무 것도 들지 않고 다만 당신의 십자가에 매달리나이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근거로 내세우면, 그 피는 곧 우리를 위해 탄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하는 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함께 앉아계신 하늘 나라 속죄소에서 자비의 말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의 피를 근거로 내세우는 이유이다.
우리는 온 교회가 예수의 피를 사용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배워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 비밀을 발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의 모든 영역이 개방된다. 또 하늘나라에 있는 천사들은 예수의 피를 귀하게 여기고 사용하며 간구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와서 그를 돕고 구해줄 것이다. 진실로 어느 작가가 노래한 것처럼 "성령은 예수의 피에 응답하신다."
예수의 피는 우리의 피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는 그것을 "보배로운 피" 라고 했는데, 이것은 올바른 표현이다.(벧전 1:19) 우리는 인간의 가치 기준에 의해서 예수의 피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무한히 귀한 것이다. 그것은 온 인류를 대속하기 위해서 치르신 하나님의 속전(贖錢)이다.
잠시 상상해 보라. 만일 예수의 피가 세상에 있는 인간의 혈액 은행에 저장될 수 있다면 놀랍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피를 수혈 받는 사람들은 그 깨끗한 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하나님께서는 결코 수혈에 의해서 구원을 집행하려 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예수를 의뢰하며 자기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때 그와 마찬가지로 큰 기적이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즉시 큰 정결케 함이 발생하며 혈류 속에 있는 죄가 씻기어진다.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요엘 3:21)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 그의 피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고 선포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정확한 사실이다. 우리의 혈류 속에 있는 죄가 깨끗이 제거되고 영적 더러움이 씻기어졌다면, 피를 순환시켜 주는 심장도 깨끗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이라는 기적에 의해서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건강을 받는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살균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들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단의 별명인 "마왕(Beelzebub)" 이 "파리들의 주" "파리들의 왕자" 라는 뜻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죽은 피는 파리들을 끌어들이며, 파리들은 굳어지는 피 속에서 부패함을 번식시킬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피는 그와 정반대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마왕과 모든 악마들을 격퇴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어떤 대상에게 예수의 피를 뿌리면, 예수의 피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사단은 도망칠 것이다. 생명은 예수의 피 속에 있다.
마귀는 예수의 피에 대한 언급을 싫어한다. 우리가 직접 그러한 말로 마귀들을 공격해 보면 이러한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언급했을 때에 어떤 마귀들은 실제로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라고 말했었다.
또 어떤 마귀는 마치 우리가 무서운 말을 하기나 한 것 처럼 비난조로 "너 계속 그런 말을 할테냐?"라고 말했다.
언젠가 우리는 정신이 나간 여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예수여. 우리는 당신의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간구합니다!" 라고 말했는데, 즉시 그 여인의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말하기를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나는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하여 "우리가 그 피를 힘입어 간구합니다!" 라고 소리치며 기도했다. 그랬더니 드디어 마귀는 항복했다. 마귀는 "좋다. 그런 말을 해도 좋다.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고 말했다.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마귀는 그 부인에게서 나갔으므로 여인은 정신을 되찾았다. 우리는 예수의 피의 능력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레위기 17장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였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말한 사도의 말은 옳은 말이다. (히 9:22)
사람들 중에는 예수의 이름을 소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예수의 이름과 피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피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피를 흘리시고 그것을 아버지에게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셨으며(마태복음 28:18), 그런 까닭에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이다. 또 그와 동일한 능력과 권세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지만(누가복음10:19), 그것은 우리가 예수의 피를 존중할 때에만 작용한다.
흔히 예수의 죽으심을 "대신하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대속의 죽음이라는 의미이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구약에는 피흘림이라는 조건에서만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 생명에는 생명으로 대응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말씀들이 많으며, 신약 성서에서도 그러한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9:22)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피를 흘리셨으며,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을 대신하여 피를 뿌리셨다. 그는 유월절, "여호와께서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고 하신 것을 기리는 명절날에 십자가에 달리셨다(출애굽기12:23). 유대인들이 최초의 출애굽을 경축하는 순간에 예수는 두 번째 출애굽을 위한 대속을 행하고 계셨다. 이 제물과 그의 보배로운 피의 효능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죄와 그로 말미암는 형벌(질병 포함)으로부터의 출애굽이 있다.
예수는 자신의 피를 뿌려 다음과 같은 전형(典型)들을 성취하셨다.
제단(십자가)위에서: 출애굽기 24장 6-8절
출애굽기
24: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24: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24: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24: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십자가의 주위에서: 출애굽기 29: 12-16절
출애굽기
29:12 그 피를 네 손가락으로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을지며
29:13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고
29:14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
29:15 너는 또 숫양 하나를 취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안수할지며
29:16 너는 그 숫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단 위의 주위에 뿌리고
대제사장의 옷에서: 출애굽기 29:20-21절
일곱 번 뿌림을 당했으며: 레위기 4:6-7절
십자가 밑에서: 레위기 4장 6-7절
십자가 옆에서: 레위기 5:9
십자가 주위에서, 즉 십자가 밑의 땅에서: 레위기 7:2
성소 앞에서 일곱 번 뿌림을 당했다: 민수기 19:4
마지막 것은 십자가와 갈보리 언덕은 예루살렘 성전이 보이는 곳에 있었다는 점에서 성취되었다.
이 모든 구약의 전형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 속에서 성취되었는데, 예수는 자신을 우리의 유월절, 우리의 대리인,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피 제물로 만드셨다. 예수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덮을 수 있다.
예수께서 갈보리에서 지신 무거운 죄짐을 생각해본다면, 예수께서(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영혼의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신 것을 어찌 조금이라도 기이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시편22:1, 마태복음27:46)?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자기 아들을 버리셨는가?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참아 보지 못하시기" 때문이다.(하박국1:13)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이었지만 참아 보실 수가 없었다. 예수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의 악을 담당하시고 계셨기 때문에, 자기의 몸을 자기의 피로 덮기 전까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참아 보실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 자기의 몸을 자기의 피로 덮은 후에야 아버지께서는 자기의 독생자에게 얼굴을 돌리시고 그를 바라보셨다.
그는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제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고 그의 보배로운 피로 덮혔다. 그는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으니, 그것이 아버지께서 요구하신 일이었다.
이 일이 이루어진 후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죄를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피를 바라보셨다. 그것이면 넉넉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온 인류를 대신하여 자기의 피 속에 있는 생명을 바치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 제물을 존중하셨으며, 우리의 대속은 완전히 이루어졌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중히 여긴다면, 아버지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정결케 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따분하게 신학적으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결정적으로 그의 피를 포옹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피를 바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덮고 용서하고 탄원하기 위해 바쳐진 자기 아들의 피를 보실 때에는 결코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는다. 그는 단지 우리의 죄를 덮어주는 것, 즉 예수의 피를 보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한다" 는 것을 깨닫는다(레위기 17:12).
아리조나 주 피닉스에 사는 어느 목사는 아주 특이한 증언을 했다. 어느 날 그는 예수의 피를 자기의 수표책에 뿌리기로 작정하고 기도했는데 얼마 후에 그의 봉급이 올랐다. 그가 알고 있는 여신자도 역시 같은 일을 했는데, 그녀도 예상치도 않았던 보너스를 현금으로 받았다.
세속적인 교인들은 그런 증언들을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기독교인들은 결코 사단의 속박을 대적하여 싸움을 벌이지 않을 것이며, 봉급이나 재산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몇년 전 영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형제가 자동차의 시동을 걸려고 해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의 피로 간구했더니 시동이 걸렸다. 당신 자신이나 가족들 앞에 난관들이 쌓이는 것을 발견할 때에는 그저 예수의 피로 간구하기 시작하라. 그리고 사단의 계획들이 일소되는 것을 지켜 보아라. 그것은 확실한 불이다!
1908년 1월 말, 예수의 피를 간구함으로써 스코틀랜드의 킬시드에 있는 웨스트포트 교회당에 자발적으로 성령이 임하셨다. 죤 레이드라는 형제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가운데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손을 쳐들고 "피, 피, 피" 라고 하며 예수의 피를 간구하기 시작했다. 즉시 성령이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임했으며, 13명의 청년들이 무릎을 꿇고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성령 세례를 초래한 것은 예수의 피로 간구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같은 무렵에 우드워드 에터 여사가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에서 큰 집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을 높이 들고는 "나는 여러분에게 예수의 피를 뿌린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 피를 뿌리는 듯한 몸짓을 하곤 했다. 사람들은 강단 앞으로 달려 나왔으며, 많은 사람들은 엎드려 방언을 하고 병 나음을 얻기도 했다.
초대 시대에 오순절 성령이 부어졌을 때에 예수의 피로 간구하는 것은 일반에게 인정된 성령의 계시였다. 그러나 다른 많은 신적 계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조직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들을 대신하게 되면서 그것은 상실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메시지가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는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예수의 피가 사용될 때, 그 피는 놀라운 결과들을 가져온다. 진실로 우리는 피로 말미암은 승리자이다(계 12:11)
초기 스코틀랜드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앤드류 멀독 목사는 1908년 초에 성령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내는 침실에서 예수의 피가 폭포처럼 흐르는 환상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녀는 "피, 피, 피!"라고 외치며 남편을 부렀다. 남편은 이 환상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그녀에게 확언했다. 그 날 그녀는 성령 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한 동안 그녀는 환상 속에서 계속 피의 폭포를 보았는데,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갈보리에서부터 흘러나와 죄와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주는 강력한 샘을 생각하게 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각성하여 예수의 피의 실체 및 그 피와 성령 세례와의 절대적인 관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러한 초자연적인 체험을 하게 하셨다.
1908년 2월, 윌리암 맥크레아라는 사람이 킬시드에 있는 자기 집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글래스고우에서 두 사람이 교회의 예배를 감독할 목적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두 형제는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강단에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일을 실행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으므로 그 사람들은 예배를 감독하게 되었다.
맥크레아는 장로들과 집사들을 뒷방에 모아 놓고는 그들에게 예수의 피로 간구하라고 요청했다. 그들이 그의 말대로 기도하고 있는 동안 주님께서는 예배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계시하셨다. 글래스고우에서 온 형제들 중 한 사람이 일어나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단지 목소리를 과시하고 있을 뿐임을 드러내 주셨다. 장로들과 집사들은 계속 예수의 피로 간구했으며, 주님이 그 예배에서 역사하시리라고 믿었다. 며칠 후 두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았으며, 같은 날 43명이 예수의 피로 간구함에 의해서 성령세례를 받았다. 이리하여 1908년 초에 성령의 부음이 시작되었다.
이 때에 몇 명의 미국인들이 킬시드를 여행하던 중 성령 세례를 받았다. 이 사람들은 그 전에 여러 차례 안수기도를 받았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이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여 예수의 피로 간구하기 시작했을 때, 곧 모두 성령을 받았다. 요한이 성령과 예수의 피가 일치한다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유익한 글! 명언! 단문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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