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에 대한 학설 논쟁의 실체
종말론을 논하는데 있어서 학설의 다툼이나 논쟁은 단순한 다툼이나 견해의 대립이 아니라 서로의 시작이 다르고 과정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정체를 숨길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서 노골적으로 그 정체를 드러낸 결과라는 것이다. 종말론은 성경의 결론 부분이다. 결론에서 견해의 대립이 있다는 것은 결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서론과 본론에서 논리적 귀결을 다르게 이끌어 왔다는 것이고, 이것은 뿌리와 몸체가 전혀 다른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 것이다. 따라서 종말론의 논쟁은 신앙의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과정을 논하는 종말론에서 신앙의 근본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최상위 최고의 주목적이다. 나머지는 부수적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영생을 얻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종말론은 이 목적을 이루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즉, 종말론은 영생을 얻는 과정에 대한 기술이고 영생을 지키기 위한 각 절차인 것이다.(영생을 얻는 절차에 관한 개략적 내용은 09-2. 성경적 종말의 과정을 참조하고 보다 상세한 것은 각 단원을 참조하라.) 성경에 기록된 종말의 절차는 구원의 요건과 맞물려 정밀기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정교하게 돌아간다. 즉, 종말론에 문제가 있다면 구원론의 어딘가에 고장이 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듣는 구원론에 문제가 있다는 의식을 갖고 지금 신학자들 사이의 성경에 기록된 종말의 절차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면 신학자들이 말하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곧 저들이 말하는 구원론에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구원의 요건에 대한 본질과 그 실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론과 종말론의 관계는 구원의 요건의 본질에 따라 종말론의 과정에서 다른 구조를 갖게 된다. 학자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견해가 충돌하는 것은 여기에 기인한다. 종말론의 견해의 대립은 그 서론과 본론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신앙의 본질이 시작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견해의 대립이라고 가볍게 보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 또한 볼 수 있어야만 종말론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종말론에서 학설 대립으로 일어나는 파열음은 구원의 요건의 본질과 그 실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구원이 단순하게 믿음으로 된다고 하면서 믿음의 실질을 단순한 지식적인 이해로 알고 있다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짓신앙, 가짜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영생을 얻는 믿음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의 영생을 얻는 믿음의 실체는 무엇인가?
1. 영생의 요건 -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실체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하는 영생을 얻는 믿음의 실체는 히브리서 11장에서 그 본질을 살피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다.(히 11:5)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자기 집안을 구원하였다.(히 11:7)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유업으로 받을 땅으로 떠났고,(히 11:8) 믿음으로 모세는 마른 땅을 가듯 홍해를 건넜으며(히 11:29)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히 11:30) 이외에도 성경은 믿음의 영웅들로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등을 기록하고 있다.(히 11:32)
이 믿음의 사람들은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고 영생을 얻은 사람들로서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는데 에녹의 믿음의 행보에 대해 성경은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창 5:22~24)고 기록하고 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믿음의 실체가 하나님과의 동행이었던 것이다. 노아 역시 믿음의 행보가 하나님과의 동행이었고,(창 6:9)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다. 모세의 동행, 다윗의 동행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선지자들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이상을 보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실체,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하는 ‘동행’이다. 영생을 얻는 믿음의 실체가 동행이라는 것이다.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듣고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구원을 얻는 믿음의 실체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지식적인 이해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교회에서 우리에게 가르쳤던 믿음의 실체는 성경공부였다. 지식적인 배움을 통해 알게 되는 지식을 믿음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식적인 이해를 믿음으로 알고 있으면 종말론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지식적인 이해를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영생을 얻는 믿음의 실체는 동행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실체인 동행과 지식적인 이해는 어떻게 다른가?
2. 믿음의 실체인 동행과 지식적인 이해의 차이
믿음의 실체인 “동행”과 지식적으로 배워서 아는 “지식적인 이해”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동행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함이 있는 반면에 지식적인 이해는 그것이 없다. 지식적인 이해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삶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묻고 답하는 생활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그 생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공급을 받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교제가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것이다.
둘째, 동행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반면에 지식적인 이해에는 그것이 없다.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생활을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음성이 모두 성경 속에 있다고 말하는 자들 밑에서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서도 대화가 없는 교제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다. 아버지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녀는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동행은 삶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는 반면에 지식적인 이해에는 그것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전 4:20)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생활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이다. 반면 지식적인 이해에 터 잡은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삶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현대 의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질병에 걸리면 죽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삶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지식적인 이해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부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지식적인 이해를 넘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구원론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눅 13:38)에서 드러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정한 사람, 즉 성경공부를 하였든 무엇을 했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한 사람들은 낙원에만 거한다. 그리고 그들은 백보좌 심판 때 둘째 사망을 피하지 못하여 영생을 얻는데 실패한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한 사람들이 낙원에만 거한다는 사실이 지금의 구원론과 종말론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분명하게 정리를 하고 가야 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이 책 11-3-1-1. 십자가의 강도가 구원을 받았는가 - 영생의 요건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설교자의 삶은 설교가 실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설교가 되는, 즉 경험이 설교가 되는 삶이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을 학문으로 보고 이론으로 접근하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믿음의 실질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행하는 사람은 경험되어진 것, 즉 실천된 것을 가르치지만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식적 이해를 요구하는 이론을 말하고 그것을 실천하라고 말한다. 이 차이가 거짓신앙과 참 신앙의 차이이다. 따라서 이들이 인간의 지적 추론을 따라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이론 정립을 시도할 때, 즉 학문적인 이론정립이 신적 요소인 신앙의 신비와 부딪칠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신비와 부딪칠 때 항상 좌절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종말론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나타나는 파열음들이 이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심판의 절차적 정당성에 관한 인식의 결여缺如
지금의 종말론의 문제점을 논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규범의 세계를 예로 들어야 할 것 같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규범의 세계에서는 실체實體와 절차節次를 논하지 않고는 규범의 당위를 설명할 수 없다. 규범에서의 실체와 절차의 관계는 칼날과 칼자루와 같이 뗄래야 뗄 수 없는 표리관계에 있다. 실체는 규범적 가치인 권리를 말하고 절차는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권리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을 말한다. 즉, 실체법의 권리가 침해될 경우 그 권리를 구제하고 지키는 것이 절차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권리의 구제救濟와 수호守護는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되면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衆論이다.
이에 비추어 종말론을 살펴보면 종말론은 최후 심판의 절차에 관한 규정이라 할 수 있다. 실체법의 권리를 절차법이 지키듯이 종말론은 최후 심판에 관한 절차적 규정으로서 구원의 실체를 지키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의 절차에 절차적節次 的 정당성正當性이 결여된다면 구원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최후 심판의 절차에 등장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그 개념들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소송절차에 등장하는 제도에서 제도적 취지가 무시될 때 인권침해가 일어나고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것과 같이 요한계시록의 심판 절차에 등장하는 사건들 가운데 하나라도 무시되면 우리의 구원은 지켜지지 않고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신학에서 다루는 종말론의 문제는 이 절차적 정당성에 관한 인식이 학자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종말론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심판과 백보좌 심판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요한계시록의 심판의 구조를 최후 심판 하나만 인정하는 단일 심판 구조로 보는 데 있다. 지금의 학자들은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면 최후 심판이 있기 전에 죽은 영혼이 머무는 중간상태의 거처를 결정하는 그리스도의 심판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심판의 절차상에 중대한 하자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가 도출된다. 그리고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심판 절차에 의구심을 품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의 심판인가를 의심케 한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심판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심판의 절차상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심판의 기능이 무시되어 모든 심판 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추스를 수 없는 논리적인 모순에 빠지게 되는데 지금의 종말론이 가닥을 추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금 종말론의 문제는 종말론을 다루는 학자들이 종말의 절차에 등장하는 사건들 하나하나가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즉, 심판의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학자들의 의식의 결여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권리 구제에 있어서도 절차적 정당성이 핵심 주제로 다루어지는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있어서 절차적 정당성의 중요성이 무엇인지조차 학자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종말론이 식자識者들의 글이라고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소결
올바른 종말론의 이해는 올바른 구원론의 정립에서 시작된다. 구원의 실질, 즉 구원의 본질을 삶에서 경험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을 지키는 과정과 절차를 다루는 종말론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종말론을 다루는 학자들이 요한계시록의 진리를 풀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원인은, 우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즉 계시로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이 계시를 받아야 풀 수 있는 요한계시록을 풀고 있기 때문이고, 다음은 구원의 요건인 믿음의 실질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믿음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동행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자들이 종말론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생을 얻는 과정은 정확하게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자와 동행을 하는 자로 나누어서 그 결과를 달리한다. 그러나 지금의 신학은 이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죽으면 있게 되는 그리스도의 심판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의 강도와 같이 단지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자들도 영생을 얻는 것으로 알고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적이지 않은 내용을(왜 성경적이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이 책 11-3-1-1. 십자가의 강도가 구원을 받았는가 - 영생의 요건에서 상술한다.) 종말의 절차에 맞추어 해석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구조적인 논리 모순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고 지금의 종말론에 온갖 설設과 궤변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믿음의 실체이고 구원의 실질이라는 올바를 구원론을 정립한 후에 성경적 종말론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각주참조) 믿음의 실체를 지키는 절차를 논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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