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 교의신학!! 변증학!!

기독교 교리 요약

하나님아들 2024. 4. 18. 22:59

기독교 교리 요약

 

 




   1. 종교 


  1. 종교의 본질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쳐 준다.  이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의  위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비록 인간의 죄된 성품은  종교를 끊임없이 반대하지 
만, 종교의 씨앗만은 아직도 전  인류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종족들에게는 각기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선교사들은  증거해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욕된 
것으로 비난하지만,  종교야말로 인류에게  준 최대의 축복 중의 하나인 것이 
다. 종교는 인간 생활의  가장 심오한 근원을 다룰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상 
과 감정과 욕망을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란 과연 무엇인가? 종교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 관계의 성격을 결정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 
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세우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특권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이를 행하신다. "종교"(religion)란  말은  아마 
라틴어의 relegere에서 온 것으로,  "다시  읽는다", "반복하다", 또는 "주의 
깊이 관찰하다" 등 여러가지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가끔 
제신예배(諸神禮拜)와 관계된 것들을 모두  끊임없이, 또는 열심히 살피는 것 
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은 영어 성경에  네 곳에 
만 있다(갈 1:13-14; 약 1:26-27). 


  구약에서는 종교를 "주님을  향한 경외"라고 설명하였다. 여기 경외라는 말 
은  공포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의 
감정이며,  사랑과 신뢰가 조화를  이룬 감정인 것이다. 이 종교라는 말은 구 
약 성도들이 율법계시에  대해 경건한 호응을  보인 것이며, 신약에서는 율법 
보다는  복음에 대해 반응을 나타낸  것으로 신앙과 경건의 태도를 뜻하는 것 
이다. 


  성경에 비추어 보면, 종교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 곧  하나님의 절 
대적 존엄성과 무한한 능력을 의식하고,   인간 자신의 비천함과 연약한 상태 
를 깨닫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종교란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이고 자발 
적인 영적 관계,  특히 감사의 예배와 사랑의 봉사 행위에서 표현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참으로 종교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위엄과 무한하신 권능을 의식하는 동시, 인간 자신의  전적 비천과 절망을 아 
는데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종교적 예배와   봉사의 태도는 인간 
스스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께서는 그의 말씀과 반대되는 예배는 어떠한 예배라도 받지 않으신다. 


  2. 종교의 자리 
  인간 정신에 있어서 종교의 자리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를 살필 때  몇 
가지 그릇된 견해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종교를 지식의  일종으로 생각하여  지성(知性; intellect)에 
종교의 자리를 둔다. 또 어떤  사람은 종교를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직접적인 
느낌으로  간주하여 감정(感情;  feelings)에서 종교의 자리를  찾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종교란  무엇보다 도덕적 행위로  성립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종교의  자리를 의지(意志; will)에  두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견해들은  모 
두 한편만 보는  관점이기 때문에 종교를 마음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유일하고도 정당한 성경적  견해에 의하면, 종교는 마음(heart)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성경  심리학에 의하면, 마음은 영혼의  중심적 기관이라고  한 
다.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인간의 모든 생활,  사상, 감정 그리고 의지의 모든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잠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 
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종교는  하나님의 형상 속에 뿌리박고 
있으며, 그리고 이  형상은 전인 속에서 그의   모든 재능과 능력으로 자체를 
나타내 보여주는 핵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도 
역시 핵심적인 것으로,  전인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전심  전령(全 
靈)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모든 생활에서 일체의 은 
사와 재증을  갖고, 영육을 아울러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야 한다. 이렇게 종 
교는 그 자리를  마음에  가지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사상, 감정, 의지, 
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전인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바쳐 
야 할 것은 마음이다. 또한 이   마음은 한 인간의 지혜, 지성, 감정, 그리고 
그의 도덕생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이 종교를 바르게 평 
가하고, 인간 생활에 있어서의 종교의 본질에 대한 바른 견해라 하겠다. 


  3. 종교의 기원 
  지난 수 년 동안 종교의  기원 문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집중되어, 이 문 
제를  설명하려고 여러 차례 계속적으로 노력해 봤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 
다.  어떤 학자는, 어떤 간교하고  기만적인 제사장이 하나의 돈벌이로  생각 
한데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이 설명은 오늘날 완전히 인정받을  수 없게 되 
었다. 다른 학자는, 종교를 생명없는  물체, 혹은 서물(庶物)에 대한  숭배나 
조상들의 영혼 숭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어떻게 하 
여  생명이  없는 혹은 생명이 있는 대상에 대한  숭배사상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므로  이 주장  역시 종교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되지  못 
한다. 또 다른  학자는 종교를 자연 숭배, 곧  자연의 신비와 능력에 대한 숭 
배나  마술의 광범한 실행에서 기원되었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이 
론 역시 비 종교적인  인간이 어떻게 종교적이 되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다른 학설 이상의 설명을 하지  못한 셈이다. 


  성경만이 종교의 기원에 관한   믿을만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성경은 우리 
에게,  종교적인  예배를 받기에 합당한 유일한  대상자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말해주고 있다. 더우기 성경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 
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와  특히 그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 
해서 자신을 계시하였음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 
에게  예배와 봉사를 요구하고 계시며, 어떠한 예배와  봉사를 기뻐 받으시는 
가를 하나님이 스스로 결정하신다고 성경은 설명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되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 
셔서 이 계시를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또한 하나님과 교 
제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나도록 인간의 마음 속에 자연 
적인  충동을 심어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1. 계시(啓示)에 대한 일반적 고찰 


  하나님은 불가해(不可解)한 존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감추어져 있는 심연 
(深淵)  속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그를 알 도리가 없다. 다만 하나 
님의  영(靈)만이,   하나님의 깊은  곳을  찾아 낼  수가  있는 것이다(고전 
1:10).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기 위하여는 인간이   하나님 보다  더 위대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욥의 다음과 같은 질문은, 무한자(無限者)를  이해하려는 인간능력 
에 대한 신랄한  거부였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 
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욥  11:7). 한편 인간은 자기의  개인적 욕 
구에 합당한 한도내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식마저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즐겨 계시하시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음폐(陰蔽)하셨던 자신의 베일을 벗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인간에게 자신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여, 이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 
님을  예배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아 주셨 
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고찰을 한 후에는 그 기원이 되는 계시에 대하여 고찰하지  않 
을 수 없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면 종교는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알리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질 수   없으며, 인간 그대로 버려  두신다면 하나님을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이 계시는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 구별할 수 있다. 


  물론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은 계시를  믿지 않는다. 범신론자들은  그 
들의 사상체계 속에 계시를 허용하지는 않지만 가끔 계시에 대하여  언급하기 
는 한다. 자연신론자들은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인정하나, 성경에 
나타난  특별계시의 필연성과 실재성, 심지어는 특별계시의  가능성까지도 부 
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다 믿는다. 


  2. 일반계시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시간상으로  특별계시보다 앞선다. 일반계시는 인간에 
게  구술적  전달 형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사건과 자연 세력과 자연 
법칙을  통하여 오는 것이다. 성경은  일반계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 
에서 언급하고  있다(시 19:1;  롬 1:19-20, 2:14-15). 


  ⑴ 일반계시의 불충분성 
  펠라기우스파와 합리주의자들과  자연신론자들은 일반계시만으로 현재 인간 
의  요구에 적합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반하여, 로마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는 
일반계시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본다. 


  이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에 남아있는 죄의 암영(暗影)에 
의해 희미하게 되고 말았다. 창조주의  솜씨가 완전히 지워진 것이 아니라 흐 
려지고 희미해진  것이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충분한 지식과 영적인 
일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전달하여 주지 못하므로 인간이  영원한 미래를 건 
설할 수 있는 확고한 기초를 제공하여   주지 못한다.  종교를 순수하게 하나 
의 자연적  근거에만 세우려는  자들의 현재의  종교적 혼란이 바로 일반계시 
의 불충분성을 분명하게 증명하여 준다. 


  일반계시가 일반적 종교에도 합당한  기초를 제공하여 주지 못하므로 참 종 
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심지어 이방 민족들은 어떤 가상적 특별계시 
에  호소한다. 결국 일반계시로서는 죄인들의 영적인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능력에 관한 다소의 지식을 전 
달하여  주지만,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한 
다. 


  ①죄는 일반계시와 이 계시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感受性)을 모두 변화시켰 
    다. 
  ②일반계시는 하나님과 영적 사물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③일반계시는 대체로 종교를 위한 충분한 기초도 주지 못한다. 
  ④일반계시는 그리스도교의 기초로서도 전혀 불충분하다. 


  ⑵ 일반계시의 가치 
  그러나 위에 언급한   내용이 일반계시가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계시는 아직도 이교(異敎)의 진정한 확립  요소를 설명해 주는데, 이  계 
시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후손임을 깨닫고(행 
17:28),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고(행 17:27),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 
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고(롬  1:19-20),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게 되었다 
(롬 2:14). 또  그들은 죄와 무지의 암흑 속에서   생활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곡해하지만, 말씀의 조명(요 1:9)과 성령의 일반적  작용(창 6:3)에는 참여하 
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그의 특별계시의 배경을 형성 
해  주므로, 특별계시는 일반계시 없이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과학 
과 역사는 성경  기록에 대해 빛을 던져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3. 특별계시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일반계시와  함께, 우리는 지금  성경에서 구체화 
된 특별계시를 받아들이게 된다. 성경은   탁월한 특별계시의 책으로 이 계시 
에서 말씀과 사실은  서로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씀 
은 사실을 해석하고 사실은  말씀에게 본질을 제공하여 준다. 


  1. 특별계시의 필요성 
  죄가 세상에 들어오므로,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흐려지고 부패해졌다. 그리 
하여  자연과 인간구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는, 처음 창조되었을 때 처럼 
분명하게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더우기 인간은 암흑과 무지,  오류와 불 
신앙의 권세에 종속되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의 맹목과 왜곡 속에서, 인간은 
현재 그 최초 계시의 흔적까지도  바로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  인간 
은 하나님의 진리를 허위로 바꾸어  놓는데 기뻐하고  있다. 이리하여 일반계 
시는, 이 이상 더 하나님과 영적사물에 관한  믿을만한 절대적인 지식을 인간 
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또한  인간에게 옳바르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그 
리고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과의  친교상태에까지 회복시킴에 아무 소용이  없 
게 되었다. 그리하여 네 가지 목적을 수행할 특별한 영적사역이 필요하게  되 
었다. ①일반계시에서 수집한 진리들을  정정하며 해석할  것, ②자연에 나타 
난 하나님의 솜씨를  인간이 다시  한 번 읽을  수 있도록  계명(啓明)할 것, 
③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계시를 인간에게  마련해 줄 것,  ④죄의 권세에서 
인간을 구속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의 친교를  갖도록 하여 인간의 영적 
상태를 전적으로 변화시킬 것 등이다. 


  2. 특별계시의 방법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방법은 대략 세 가지 종류로 구별된다. 


  ⑴ 하나님의 현현(顯現)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상징적으로는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그룹 
(Cherubim) 사이에  임재하셨다(시  80:1, 99:1). 하나님의 임재는 불과 연기 
의 구름  속에서  보여졌으며(창 15:17; 출 3:2,  19:9,  16  이하, 33:9; 시 
78:14, 99:7), 폭풍우  속에서 보여졌고(욥  38:1, 40:6; 시 18:10-16), 또한 
미풍 속에서도 보여졌다. 이것들은 모두가  그의 임재의 표상으로, 이 가운데 
서 그는  영광의 얼마를 계시하셨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주의  사자"의 현현 
이 특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자는 분명히  창조된  사자가 아니었 
다. 한편 이  사자는 하나님과 구별되었으나(출 23:20-23;  사 63:8-9), 다른 
한편, 그는 하나님과 동일시 되기도 하였다(창 16:13, 31:11, 13, 32:28). 일 
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그는 삼위 중의 제 2위라고 한다(말 3:1 참조). 하나 
님의 현현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그 최정점에 달하였고,  그리스도 안에 
서 신격의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임재하셨다(골  1:19, 2:9). 그리고 그리스 
도  안에서 교회는 성령의 전이   된다(고전 3:16, 6:19; 엡  2:21). 새 예루 
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고,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 사이에 
쳐질 때, 하나님과 인간과의 가장 충만한 동거의 실현이 있게 될 것이다. 


  ⑵ 직접적 전달 
  하나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인간에게 그의 사상과 의지를 전달하셨다. 하 
나님은  가끔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계시의 대상에게 말씀하셨다(창 2:16, 
3:8-19, 9:1, 8,  12, 32:26; 출 19:9; 신 5:4, 5; 삼상 3:4). 어떤 때는, 하 
나님은  제비와 그리고   우림과  둠밈과 같은  방법을   쓰기도 하셨다(삼상 
10:20, 21;  대하 24:5-31; 느 11:1; 민  27:21; 신  33:8). 꿈은  계시의 통 
상적인  방법이었다(민  12:6; 신   13:1-6; 삼상  28:6;  욜 2:28). 또한 이 
스라엘 백성 이외의  사람들에게 계시하실 때에도   꿈이 사용되었다. 계시의 
친밀하고도 보다 숭고한 형태는 환상이었으며, 이것은 선지자들의  경우 극히 
통상적인 것이다(사  6장, 21:6  이하;  겔  1-3장, 8-11장; 단  1:17, 2:19, 
7-10장; 암  7-9장).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계시의 영을 통하여, 
내적조명의  방법을 써서  선지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신약성경에서 그 
리스도는 지고자(至高者), 진리,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하신  예언자로 나타 
나고 계시다. 그는  계시의 조명의 영이기도 하신  그의 성령을 모든 믿는 자 
에게 주신다(막 13:11; 눅 12:12; 요 14:17, 15:26,  16:13, 20:22; 행 6:10, 
8:29).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거룩한  분 
의 기름부음을 받게 되며, 따라서 우리 주님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게 된다(요 
일 2:20). 


  ⑶ 이적(異蹟)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또한  이적을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적 
은 하나님의 특별권능의 현현이며 특별임재의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이적은 
가끔 영적진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앞으로 올  신국의 현현으로서의 이적은 
위대한 구속사업을  돕게 된다.  따라서 이적은 자주 악인을  벌하며, 하나님 
의 백성을 돕고  구원하는데 사용된다.  이적은  예언의 말씀들을  확증하고, 
하나님께서 수립하고 계시는  새 질서를 강조한다.  성경의 이적도 또한 성육 
신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으며, 이것은  모든 이적 중에서 최대의  것이요 가 
장 중심적인 이적이다. 절대적인 이적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만물은  회복되며, 
창조물들은 그 원시적 미(美)에로 환원되는 것이다(행 3:21). 


  3. 특별계시의 특성 
  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구원의 계시인데, 죄인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이 구원계획의 실현   방법을 보여주는 계시이다. 이 특별계시 
야 말로 인간의  마음을 조명하여  그의 뜻을 선한데로  이끌어 주며, 거룩한 
사랑으로 채워주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집을 준비케  하는  계시인 것이다. 
특별계시는 우리에게 구속의 메시지를 전해  줄 뿐 아니라 죄인을  성도로 변 
하게 하며 우리  생활을 변화시켜  준다. 그리고 이  계시는 분병히 진보적이 
다. 속죄의  위대한 진리가  처음에는 희미하게 나타나고 점진적으로  분명해 
지고 마침내 신약에 와서 이 진리의 충족함과 아름다움이 현저해진다. 


  4. 성경 


  1. 특별계시와 성경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성경에서  영원한 형태를  취하여 후대를 
위해서 보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시가 인간의 모든 
세대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영원한 말씀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계시는 마 
땅히 훼손과 부패와  허위에서  보호함을 받아야  한다고 작정하셨다. 하나님 
은 계시를  잘못 없는 기록으로  작성하시고, 섭리적인 보호로 그것을 지키므 
로서 그 일을 성취하셨다. 


  ⑴ 특별계시와 성경이 다른 점 
  '특별계시'라는 말이  하나님의  직접적 자기전달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 
면,  그것은 단순히 성경에 대하여  별개의  명칭으로 생각될 수는 없는 것이 
다. 이것은 성경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전달되지 아니하고, 경험에 의해서 
확인되고 역사적  연구에 의해서  수집된 것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 
에서 명백해질 뿐 아니라, 또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하기 오래 
전에,  자주 신적전달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확실해지는 것이다(렘 
25:13, 30:1, 36:2; 요 20:30,  21:25). 이러한  특수한 의미에서 특별계시란 
말을 사용하게  될  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말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적인 것으로, 그 기록을 인간적인 것 
으로  구별짓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는 부당한  진술도 
적당한 것이 못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특별계시'란 말은, 역시 '성경'과 
동일하다는 의미에서도 사용되는 것이다. 


  ⑵ 특별계시와 성경이 동일한 점 
  '특별계시'란 말은 그 본래의  역사적 설정과 함께 성경에서 발견되는 구속 
적  진리와 구속적 사실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특별계시는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무오하게 영감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진리의 신적 
보증을 얻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의 전성경만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것이다. 만일 이  말이, 이 
러한 의미에서 이해된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할 뿐 
만  아니라,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함이  타당하다. 성경은 
계시의 책이라는  사실에서  명백히  그 의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옛날에 일어났던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끊임없는 말씀인 것이다. 계시는   성경 속에서 활동하며, 마치  그것이 처음 
기록될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광명과 생명과 성결을 가져오는 것이다. 


  2. 성경의 영감(靈感) 
  성경은 그 신적 영감에   의해서만 인간의 모든 세대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 
씀이  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될 것이다. 성경의 전체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 이 사실은 성경으로 하여금 인류를 위한 신앙과 
행위의 무오(無誤)한 법칙으로 되게한다. 


  ⑴ 영감에 대한 성경의 증거 
  영감의 교리는 모든 다른   교리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나온다. 성경은 그 
자체가  영감에 대하여 풍부히   증명해 준다. 또한 철저하게  영감의 견해를 
확증해 주기도  한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명한 바를 쓰도 
록 반복적으로  명령을  받았다(출 17:14,  34:27; 민  33:2;  사 8:1, 30:8; 
렘 25:13, 30:2;  겔  24:1 이하;  단 12:4;  히  2:2).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신적 사신(使信)을 전한다고 의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와같이 주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주의 말씀이 나에게 임하셨느니라',  '이와같이 주 여호와 
가 나에게 보이셨느니라' 등등의  형식으로 그 자신을 소개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들은 자주 말씀하신  말씀에서 인증되었으나, 역시 쓰여진 말씀과 관련하 
여  사용되기도 하였다(렘 36:27, 32; 겔 26-27장, 31-32장, 39장). 이사야는 
자기가 쓴  예언을 '여호와의 책'이라고까지 말하였다(사 34:16).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자주  구약의  사신들을 인용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령의 말씀이라고 하였다(마  15:4;  히 1:5  이하, 3:7, 4:3, 
5:6, 7:21). 바울은   자기의 말을  영이 가르쳐준  말씀으로 말하고  있으며 
(고전 2:13),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말씀하고 계신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고후 13:3).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쓴 편지는 분명히  하나 
님의 말씀이다(살전 2:13). 그는 성령에  관한 표준적인  구절에서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⑵ 영감의 성질 
  영감설에는 특별히  피해야 할 극단적인  두 가지 그릇된  견해 곧, 기계적 
영감설과 동력적 영감설이 있다. 


  ①기계적 영감설(機械的靈感說; Mechanical  Inspiration)이 학설은 하나님 
께서 성경의 저자인 인간으로 하여금  성경의 글자  하나 하나를 받아쓰게 하 
셨다는 학설이다. 즉,  저자인  인간을 저술가의 손에 쥐여진 펜처럼  수동적 
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이 학설에  의하면, 저자들의 마음이 그들 저서의 
내용과  형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 학설은 그릇된  설이다. 성경의  인간 
저자들은 실제 저자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이 받은  명령에 근거가 되는 
자료들을  수집하기도 하고(왕상 11:41, 14:29; 대상 29:29; 눅 1:1-4), 시편 
여러 곳을 보면  그들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기도 했고, 그들의  저서를 자신 
의 독특한 문체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사야의 문체는 예레미야의 문체와 다 
르며, 요한의 문체는 바울의 문체와 같지 않다. 


  ②동력적 영감설(動力的靈感說; Dynamical  Inspiration)이 학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영감 과정에 있어서 저자들을  감동시키셨지만, 그들의 저서를 기 
록하는데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들의 심적,  영적생활이 감 
동을 받아 최절정에 달하므로 사물을  보다 분명히 관찰하고 그들의  바른 영 
적가치에 대한 보다 심오한 판단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감은 성 
경의 저서들이 기록될  시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는 저자들의 영구한 
특성이므로  그들 저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저자들에 
게 주신 영감은 일반 모든 신자들에게 주는  영적 조명과는 정도의 차이만 있 
을 뿐이다. 이 학설은 영감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가 못된다. 
  ③유기적 영감설(有機的靈感說;  Organic Inspiration)영감에  대한 성경적 
견해는 성령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유기적인 방법으로  감동시켜, 그들의 내적 
인간성, 곧  저자들의 성격과 기질, 은사와 재능, 교육과 교양, 용어와  문체 
를 그대로 사용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셨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저자들의 
마음을 조명하셨고,  기억을 새롭게하여 기록하도록  고취시키셨고, 기록함에 
있어 죄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장하셨으며, 그의 사상을 표현함에 있어 심 
지어  용어 선택까지도  지도하셨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한순간이라도 저자들 
의 능력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조사의 결과 
를 쓸 수  있었고, 그들 자신의 경험도 기록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문체나 
용어의 특징을 나타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⑶ 영감의 범위 
  영감의 성질 뿐만 아니라, 그  범위에 관해서도 역시 여러가지 학설들이 있 
다. 


  ①부분적 영감(部分的靈感; Partial Inspiration)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어떤 학자들은 성경 전체의  영감을  부인하거나 
부분만 영감되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학자는 구약의 영감설은 부인하면서도 
신약의 영감성은  인정한다. 또  어떤 학자는 성경의 도덕적 교훈이나 종교적 
교훈은  영감되었지만, 역사적 부분은  많은 연대적, 고고학적,  과학적 오류 
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학자는  산상보훈만이 영감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를 택하는 학자들은  이미 그들의 성경을 상실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런 견해의 상당한 차이는 성경의 어느 부분이  영감되고 어느 부 
분이 영감되지 않았는가를 아무도 확실히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②사상 영감(思想靈感) 
  또 성경의 사상만은 영감되었지만  용어의 선택은 저자의 인간적 지혜에 완 
전히  의존한다는 학설도  있다. 사상은 신적으로 영감되었으나, 언어는 단순 
히  인간저자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상이 용어 
와 분리될 수 없으며, 실상   용어없는 정확한 사상이란 불가능하다는 의문을 
남기게 된다. 


  ③완전 영감(完全靈感; Plenary Inspiration) 
  성경 자체의 증명을 따르면,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다고 한다. 예수 
님과  사도들은 어떤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경"(Scripture) 또는 "성경 
들"(the  Scriptures)이라 하면서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했다. 그와 같은 호소 
는 곧 하나님에  대한  호소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인용한 구약의 
책들 중에 어떤 책은 역사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령의  말씀인 구약의  구절을  계속 인용한다. 베드로는 바울의 
서간을  구약의 문서들과 동일한 위치에 두었고(벧후 3:16),  바울은 모든 성 
경은 영감된 것이라고 말하였다(딤후 3:16). 


  우리는 보다 깊은 단계에  들어가 성경의 영감이 사용된 낱말에까지 확장된 
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이  축자적(逐字的; verbally)으로 영감되었다고 해 
서 기계적으로  영감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축자적  영감교리는 완전히 성경 
에 근거한 교리이다. 주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기록할 것을  실제로 일 
러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레 3-4장, 6:1, 24, 
7:22, 28; 수 1:1, 4:1,   6:2).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을 자기들 
의 입술에   두시고(렘 1:9), 그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도록  지도하신다고 
한다(겔 3:4, 10, 11). 사도  바울은 여호와의 말씀을  성령이 가르치신 말씀 
이라고 표현했고(고전 2:13), 바울과   예수님은 한 개의 낱말을 가지고 이론 
을 펴셨음을  본다(마 22:43-45; 요 10:35; 갈 3:16). 


  ⑷ 성경의 완전성 


  ①성경의 신적 권위 
  로마 천주교와 개혁자들은 다같이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였으나,  그들 
이 각각 생각하고  있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로마 천주교에 의하면, 성경은 
그 자체로서는 권위를 갖지 못하나, 그 존재와  권위는 교회에 의해서 주어지 
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의 이러한 입장을 반대하여, 종 
교개혁자들은,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고유의  권위를 가진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성경은  그 자체의 권위 때문에   받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러기 때문에 권위로써  인간에게 말씀 
하는 것이다. 성경의 지상적(至上的)  권위에 관한 이와같은  견해는, 합리주 
의의 찬  바람이 전유럽을 휩쓸고, 이성이  진리의 판결자로 군림하기까지는, 
종교개혁의 모든 교회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영향을 받 
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일반서적과 동일한 수준에  놓았으며, 따라 
서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권위를 강조하는  것은 가 
장 중대한 일이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  다 
시 말하면, 그것은 참되고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기록이기 때문에, 성경 
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여기에 더  추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역시 생활과 행위의  법칙 
으로서의 규범적 권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하여는 절대적인 순종 
을 요구한다. 


  ②성경의 필요성 
  로마 천주교는 성경의  중요성과 유용성은 인정하면서도, 성경의 절대적 필 
요성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  의하면 교회가 성경을 필요로 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교회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 
이다. 몬타나스파와  재침례파, 그리고 제네바의 방임파와 같은  신비적 종파 
의 사람들도 역시  성경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신자의  마음  속에서 말하는 
성령의 말씀인   "내적 조명"의 중요성을 더   말하였다. 개혁자들은 이 점에 
대하여도 그들과 논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의 용도를 폐지 
하실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그 말씀으로 하여금 
교회의 씨(종자)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이었기 때문에,  그 
말씀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시간의 종말까 
지  존재하게 되며 또한 반드시 남게되는 것이다. 


  ③성경의 명료성 
  로마 천주교에 의하면,  성경은 흐려지고 손상되어서 신앙과 행위 문제까지 
도  해석해 줄 필요가 있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무오의 해석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은 교회만이  할 수 있다. 로마 천주교의 이같은 견해 
를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명료성 혹은 명시성을  강조하였다. 이 
렇게 강조한 것  때문에, 그들은  인간정신으로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신비가 성경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주석가의 노고를  전적으로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구원의 도리가  누구에게나 자기의 영적상태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성경을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경 안에 명백히 계시되었다 
고  주장하려 하지도 않았다.  구원에  필요한 지식은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 
동등하게  명백하지는  않지만, 진실하게 구원을 찾는   사람에게는 누구나가 
다 자기를 위하여 이 지식을  섭취할 수  있는 단순하고도 이해하기 쉬운  형 
식으로, 성경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나 사제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성경의  명료성은 다음과 같은 구 
절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시 19:7, 8, 119:105, 130. 영적인  사람은 그것 
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고전 2:15, 10:15; 요일 2:20). 


  ④성경의 충족성 
  로마 천주교와 재침례파는   성경을 하나님의 충분한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 
다.  후자는 저급한 성경관을 갖고, 내적조명의 절대적 필요성과 또는 각종의 
특별계시의 절대적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한편 전자는 구전(口傳)을, 기록된 
말씀의 필요한  보조물로 생각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이  구전은 사도들이 전 
한 진리를  구체화한 것이지만,   기록하도록 위탁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대로 아무 장애없이 로마  천주교 내에서  전달되었다. 이것들은 오 
늘날 주로 각종 회의의 신조, 교부들의 저작,  교회의 선언문, 그리고 기도서 
의 식사와 관례문 등에 포함되어 있다. 
  이와같은 로마  천주교의 입장을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완전성 
혹은 충족성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예언자들,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들이 말 
하고  쓴 것은 무엇이든지 다  성경 안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기록된 말씀이   개인과 교회의 영적, 도덕적 욕구를 위해서 충 
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록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우월한 권위를   갖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함을 뜻한다. 


  5. 하나님의 본질 


  1. 하나님에 관한 지식 
  하나님 지식의 가능성은   몇 가지 다른 근거에서   부정되어 왔다. 그러나 
어떤  경우, 이같은 부정은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말 
이다. 물론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지식을 갖고 하나 
님을 알며 신적 존재의 무한한   심연을 측량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 
한 일이다. 그러나  반면에 인간이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은  참되고  진실한 지식인 것이다.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 
지식은 일반적으로 둘로 나뉘어진다. 


  ⑴ 선천적 지식(Innate Knowledge) 
  이는 본유적(本有的)  혹은  생득적(生得的)  지식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이 
본유적으로 하나님 지식을 가진다는 말은,  단순히 그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생득적으로 소유하였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이상의 무 
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날 때 어떤 하나님  지식을 세상에 가지 
고 왔다는 것도 뜻하지 않는다.  본유적인  하나님 지식이란,  인간이 정상적 
인 상태하에서 하나님  계시에  접촉하자, 곧  자발적으로 성장한다는 의미에 
서 생득적인  것임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이 성숙하였을 때  필연적으로 발전 
하는 지식이요,  자기가  임의로  선택하여 얻은 지식이  아니다. 나면서부터 
이같은 지식은 오히려 일반적 성질의 것이다. 


  ⑵ 후천적 지식(Acquired Knowledge) 
  한편 후천적 지식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서 나온다. 그것은 정 
신  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지식에 대한 의식적이며 끊임 
없는  추구의 결과로 생겨지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과 반성, 논구(論究)와 토 
의 등  지루한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지의 자원적인 탐구와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만 가능하 
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본유적인 하나님  지식의 한계를 훨씬 
더 넘게 한다. 


  우리의 하나님 지식이,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하여 가지시는 관계에만 한 
정되어  있고, 하나님의 본유적인 존재에까지는 확대되지 않는다고 흔히들 말 
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것은 거의 타당한 말이  못된다. 하나님의 성질과 인 
간의 성질의 얼마를 알지  못하고는  이러한 관계를 아는 것  조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제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말 
미암아,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참 지식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2. 특별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지식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존 
재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에 대 
한 정의가 수 없이   많이 내리어졌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무한한 완전성을 
지니신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서술방법은 다 
음과 같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⑴ 하나님은 순결 혹은 순수한 영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라고 하신 
말씀에서, 정의에  가까운 표현을 보게 된다. 이것은 그가 본질적으로 영이시 
라는 것,  그러므로 영의 완전한 관념에 속하는 모든 특질들이 필연적으로 하 
나님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자의식적(自 
意識的)이며,  자기결정적(自己決定的)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서 순결한  영이시라는 사실은, 그가 일종의 영기적(靈氣的)이며  순화(純化) 
한 육체를 소유하였다고 주장한 초기 노스틱파(Gnosticism)와  중세 신비주의 
의 관념을 필연적으로 배척한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가견적(可見的)이 
며, 따라서  육체적 감각으로도 식별될 수 있다는 관념을 거절한다. 


  ⑵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은  또한 그가 인격적인 존재임을 뜻한다. 왜냐 
하면  영은 지적이며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라고   말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  결정을 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임을  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분명히 이 세 
계에서 볼 수 있는대로 지적이며  목적있는 행위의 발자국에서, 또는  인간의 
이성적이며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성질에서 밝히  나타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인격적 하나님에 의해서만 산출될 수 있는 것이다. 


  ⑶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하시다 
  하나님은 무한한 완전성 때문에 그의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신다.  그는 어 
떠한 제한이나 불완전한 것이 없이  그의 존재와 덕을 소유하신다. 그는 무한 
히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한계나 제한이 없을  뿐 아니라, 숭고함과 형언키 
어려운 위엄 속에서   그의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것이다. 이  무한성은 
모든 신적 완전성들을 특징짓는 것이며,  피조물의 속성들이 아무리 출중하다 
하더라고 그 신적 완전성들은 모든 피조물의  속성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⑷ 하나님과 그의 완전성은 단일하시다 
  단일성은 하나님의  근본적 특성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한 영으 
로서  여러 다른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본질과 특성 
들은 단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의 속성이 타계(他界)에서부터 
첨가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의 
전체는 속성의 각자 속에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완전성이란, 일반적으로 
그가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  자신임을 뜻한다. 하나님의 완 
전성들은 그의 신적 본질을 더욱 상세하게  서술하는데 이바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6.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그의  명칭 가운데 계시하실 뿐 아니라, 그의 속 
성 즉,  신적 존재의 완전성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 하나님의 
속성은  비공유적(절대적) 속성과  공유적(보편적) 속성으로  구별되는데, 비 
공유적 속성은  피조물에게서는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나, 공유적 속성은 
피조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속성이다. 


  1. 절대적 속성(非共有的 屬性) 
  절대적 속성(비공유적   속성)은 하나님과   피조물이 절대적으로 구별됨을 
강조하는데 다음과 같은 속성들이 있다. 


  ⑴ 하나님의 독립성(獨立性) 혹은 자존성(自存性) 
  이 속성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가지시며, 
인간과는 달리 자기 자신 외에   어떤 것에도 의존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 
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하심에 있어서  독립적이시며 그의 모든 
덕과 행위에 있어서  독립적이시므로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자신을 의존하도 
록  하신다. 이런 개념은 여호와라는  명칭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는데, 
다음 성구에 명백히 표현되어 있다(시  33:11, 115:3; 사 40:18; 단 4:35; 요 
5:26; 롬 11:33-36; 행 17:25; 계 4:11). 


  ⑵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 
  성경은 하나님께서 불변하신  분이심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그의  신적 
존재와 자신의  완전성에 있어서  영원히 동일하시며, 자신의  목적과 약속에 
있어서도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시다(민 23:19; 시 33:11,   102:27; 말 3:6; 
히 6:17; 약 1:17).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활동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왕래하시며, 자신을  숨기기 
도 하시며, 나타내기도 하시는  분이시라 한다.  하나님은 후회하시기도 한다 
고 하지만, 이  말은 단지 하나님에 대해   인간적 화법(話法)으로 표현한 것 
뿐이므로(출 32:4;  욘 3:10), 실제로는 인간편에서의  변화를 지적하는 것이 
다. 


  ⑶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이 속성은 하나님이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 
나님의 무한성에 대해 몇 가지 면을 말할 수 있다. 


  ①절대적 완전성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시켜 하나님의 무한성을 생각할 때, 절대적  완전성이 
라 부른다. 하나님은 그의 지식과 지혜에 있어서나, 그의 선과 사랑에 있어서 
나,   그의 의와  거룩하심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욥  11:7-10; 시 
145:3). 


  ②영원성 
  하나님의 무한성을 시간과  관련시켜 말할 때, 하나님의  영원성이라  부른 
다. 영원이란 성경에서 항상 끝없는  기간으로 표현되지만(시 90:2, 102:12), 
실제로는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시므로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나 미래는 없고,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이다. 


  ③무변성(無邊性) 
  하나님의 무한성을  공간과 관련시켜   말할 때, 하나님의  무변성(편재성= 
遍在性)이라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든지 존재하시며, 모든 공간을 
채우시면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거하지만, 결코  공간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왕상  8:27; 시 139:7-10; 사 66:1; 렘 23:23-24; 행 17:27-28). 


  ⑷ 하나님의 단순성(단일성) 
  하나님의 단순성이란 하나님께서는 영과  육으로 형성된 것 처럼 여러 부분 
의  성질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시므로, 나누이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한 
다. 그렇다고  삼위란 하나님의  본체가 여러 부분의 본질로 구성되어진 것이 
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존재는 각 위(位)에 종속된다.  그러므 
로 하나님과 그의 속성이 하나이요,  또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빛이시며, 사 
랑이시며, 의로우시며, 진리라고 할 수 있다. 


  2. 보편적 속성(共有的 屬性)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공유적 속성)은  인간에게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  속성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있는 속성은 다만  유 
한하며, 하나님의 무한하고 완전한 속성에 비할 때 불완전한 속성이라는 것이 
다. 


  ⑴ 하나님의 지식(知識) 
  하나님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 자신을 아시며, 가능성 
있는  일과 실재하고 있는 일을  다  아시는 그의 완전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 
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 안에 이러한 지식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외부로 
부터 이러한 지식을 얻어들이지   않으신다. 이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하며 그 
의 지성 안에 항상 현존한다.  또  이 지식은 총포괄적이므로 전지(全知)라고 
칭한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아시며, 실제 존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가능적인 모든 것까지도  아신다(왕상  8:29;  시 139:1-16; 사 
46:10; 겔 11:5; 행 15:18; 요 21:17; 히 4:13). 


  ⑵ 하나님의 지혜(智慧)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지식의 독특한  한 국면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최고 
의 가치있는 목적을 설정하시고,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해  최선의 방법을 택 
하시므로 자신의   지식을 나타내시는 그의 덕행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용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다(롬  11:33; 고전 
2:7; 엡 1:6,12,14; 골 1:16). 


  ⑶ 하나님의 선(善) 
  하나님은 그 자신이 선이시다. 즉,  완전히 거룩한 선이시다.  그러나 여기 
서 생각하려는 것은 선이 아니다. 여기서 생각하려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선  곧 타자에  대한 선행에서 나타나는 신적인 선을 언급하려는 것 
이다.  하나님의  선이란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을 친절하고 관대하게 
취급하도록 자극시키시는  신적   완전성을 말한다(시 36:6,  145:8,9,16; 마 
5:45; 행 14:17). 


  ⑷ 하나님의 사랑(愛) 
  이 속성은 하나님의 가장 중심적인  속성이라고 자주 불리우는데,  과연 하 
나님의 다른 완전성보다 더 중심적인  속성으로 간주해야 할는지는 의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의 속성에  의해 자신의  완전성과 자기 형상의 반영체 
인 인간을 보고 즐거워하신다.  이 속성은 몇 가지 관점에서 고찰된다. 


  ①하나님의 은혜(grace) :  죄를 용서하시므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른다.  그것은 아무 가치없는  죄인들에게 주어 
진 모든 영적  축복의 원천인 것이다(엡 1:6,7, 2:7-9; 딛 2:11). 


  ②하나님의 자비(mercy) 혹은 긍휼(tender  compassion) : 죄의 결과를  짊 
어진 자들의 비참을 제거하려는 사랑을 하나님의  자비 또는 긍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하나님의 가장 엄격하신 
공의와 조화하여서만  시행된다(눅 1:54,72,78; 롬 15:9, 9:16,17; 엡 2:4). 


  ③하나님의 오래 참으심(long suffering)  : 하나님의 교훈과 경고에  무관 
심한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또는 
관용이라고 칭한다.  이것은 훈계와  경고를 반복하며  특히 마땅히 받아야할 
심판을 연기하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계속  범죄하고 있는  죄인을 돌보시는 
사랑이다(롬  2:4, 9:22;  벧전 3:20;  벧후 3:15). 


  ⑸ 하나님의 거룩하심(聖)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그가 절대적으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며, 따라서   무한한 위엄으로  그들을 초월하시는   신적  완전성이라 
하겠다(출  15:11;  사 57:15).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특히 도덕적인 악, 곧 
죄와 분리되어 있는  하나님의  윤리적인 聖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 
聖에 관한 근본적인 관념은  분리의 관념이지만, 역시 그것은 적극적인 무엇, 
곧 하나님의 도덕적 초월성, 혹은 윤리적  완전성을 뜻하기도 한다. 이  거룩 
함 앞에서  인간은 죄의식의  중압감을  받는 것이다(욥 34:10;   사 6:5; 합 
1:13).  이 하나님의 聖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덕적 탁월성을 영원히  의 
지, 보존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며,  또한 인간에게서 순결을 요구하시는 하나 
님의  완전성이라 정의할 수 있다. 


  ⑹ 하나님의 의(義)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성에 위배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 
을  거룩한 존재로 보존하시는 신적 완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는 그의 의에 의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해 가시며  적당한 법을 인간에게 
부과시키므로  순종하는 자를    보상하시며,  불순종하는 자를  벌하신다(시 
99:4; 사 33:22; 롬 1:32). 
  ①상 주시는 공의(公義) : 보상을 줌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한 
    다. 
  ②벌 주시는 공의(公義) : 벌을 내리심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 
    한다. 
  상 주시는 공의는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벌 주시는 공의는 하 
나님의  진노를 표현함이다. 


  ⑺ 하나님의 진실성(眞實性) 
  하나님의 진실성이란 하나님이  그의 내적 존재하심에 있어서 참되시며, 그 
의   계시에 있어서 참되시며,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참되심을 
나타내시는 신적 완전성이라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상들과는 다른 참 신이시 
며, 존재하는  사물의 실상 그대로를 아시며, 그의 약속을 시행하심에 있어서 
신실하시다. 이 속성을  약속 이행면에서  볼 때  이를 하나님의  신실성이라 
고  할 수  있다(민 23:19;  고전  1:9; 딤후  2:13;  히 10:23). 


  ⑻ 하나님의 주권(主權) 
  하나님의 주권은 두 가지 견지(주권적 의지와 주권적 능력)에서 고찰되어질 
수 있다. 


  ①주권적 의지  :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궁극적 원인으로  나타난다(엡 
1:11;  계 4:11). 신명기  29:29에 보면 하나님의 의지는 감추어진 의지와 계 
시된  의지, 둘로 구별되어  있다. 감추어진 의지란 하나님 속에 감춰진 하나 
님의 섭리의  의지이며, 결과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의지인데 반하여, 
계시된 의지란 율법과 복음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이다. 피조물 
들에 관계된 하나님의 의지는  절대적으로 자율적이시다(욥 11:10, 33:13; 시 
115:3;  잠 21:1; 마 20:15; 롬 9:15-18; 계 4:11). 인간의  죄된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작용에 달려 있다(창 50:20; 행 2:23). 


  ②전능(주권적 능력)  : 전능(주권적 능력)이란  하나님의 의지를 집행하시 
는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함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가르쳐   준다. 즉,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 
시며, 죄를 지으실 수 없으시며,  자신을  부인하실 수도 없으시다(민 23;19; 
삼상 15:29; 딤후 2:13; 히 6:18; 약 1:13,17).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로  결정하셨던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의 뜻을 따라  수행하실 수 있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가  원하시면 그 이상으로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창 18:14; 렘 32:27; 슥 8:6; 마 3:9, 26:53). 


  7. 삼위일체 


  1.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리 개관 
  성경은 한 하나님이 삼위(三人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 
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특별계시의   교리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은 교리 
이며, 인간  이성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교리인 것이다. 


  ⑴ 이 교리의 진술 
  성경은 가르치기를 하나님은 본질상  한  분이시나 이 한 분 안에 성부, 성 
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삼위는 보편적 의미로 
서의  세 분이 아니다. 즉, 그들은 세 개체가 아니라  오히려 신적 본질이 그 
안에 존재하는 세 가지  양상이요 형태인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서로 인격적 
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 성질을  각각 가지고 있다. 성부는 성자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며, 반대로 성자는 성부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며, 성부와 성자는 성 
령을  파송할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의 오묘한  신비는  삼위 중 각 
위가 신적 본질의 완전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삼위의 테두리를  벗어나 밖에 
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순서에 있어서나 그들의 사역에 
반영된  순서에서 볼 때 삼위 중  성부가 제 1위요, 성자가 제 2위요, 성령이 
제 3위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  3위는  본질상 그 어느 한 위가 다른  위 
에 종속되는 일이 없다. 그리고  이 삼위는 어떤  인격적 특성에 의해서 구별 
된다.  곧 성부는 성자를   발생(generate)하고, 성자는 성부에 의해서  발생 
되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proceed)된다. 이  교리는 신앙의 위대 
한 신비들 중의 하나로, 인간의 이해를 훨씬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⑵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증명 


  ①구약의 증거 
  구약에는 하나님에게  한 위 이상이 존재함을  지적해 주는 구절들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로 나타내시기도 했고(창 1:26, 11:7), 여호와의 천사는 
한  신적  위로 나타났으며(창 16:7-13, 18:1-21,  19:1-22),  여호와의 영도 
또 다른 하나의 위로  표현되었다(사 48:16, 63:10). 이외에도 메시야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다른  두  인격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이 있다(사 
48:16, 61:1, 63:9-10). 


  ②신약의 증거 
  계시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신약은 더욱  명백한 증거들을 갖는다.  가장 유 
력한 증거는 구속의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성부는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성자는 성령을 보내신다. 더욱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몇 개 있다. 즉, 예 
수님의   명령(마  28:19)과 사도의  축복(고후 13:13)과  그외  눅 3:21-22, 
1:35; 고전 12:4-6; 벧전 1:2에 잘 나타나 있다. 


  ③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그릇된 견해 
  초대교회 사벨리우스파(Sabellian)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  행위, 혹은 신 
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수여에서는 성부로, 성 
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 
셨다고 하였다. 이렇게해서  삼위는  한 위로 축소되어 버렸다. 이 교리는 종 
교개혁시대에는 소시니안  학파들에 의해 부인되었고, 오늘날에는 유니테리안 
파와  현대주의자들에 의해 논박을  받는데, 그들은  삼위일체를 성부 하나님 
과 인간  예수와 하나님의  영이라고 칭하는 신적 영향력이라는  그릇된 주장 
을 한다. 


  2. 삼위의 개별적 고찰 


  ⑴ 성부(聖父) 하나님 
  하나님에게 적용된 이  "성부=아버지"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항상 동일한 의 
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말은   만물의 창조자(고전  8:6; 히 
12:9; 약 1:17)요,  이스라엘의 아버지(신  32:6; 사 63:16)요, 성도들의  아 
버지(마 5:45, 6:6,9,14; 롬  8:15) 되시는 삼위 하나님께 적용되는  말이다. 
더 깊은 의미로 보면 성부란 말은 제   2위와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삼위 
일체의 제  1위에  적용되는  용어이다(요  1:14,18,  8:54, 14:12,13). 이것 
은 본래부터 아버지  격이므로  지상의 모든 아버지는 이것의 희미한  반영에 
불과한 것이다. 성부의 독특한 특성은 그가 영원으로부터  성자를 낳으신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의   사역은 구속사업을 계획하시며, 창조하시며, 섭리하시 
며,  삼위일체를 구속의 계획 속에서 나타내는 일이다. 


  ⑵ 성자(聖子) 
  삼위 중 제  2위는 성자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성자 
가  이러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성부의 독생자(요 1:14,18, 3:16,18; 
갈 4:4)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메시야가 되기  때문이며(마 8:29, 
26:63; 요 1:49,  11:27),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은 그의 특별한 탄생에 의 
한 것이다(눅 1:32,35). 삼위 중 제  2위인 성자의 특별한 특성은 그가  영원 
전부터 성부에게서 출생했다는  것이다(시 2:7; 행   13:33; 히 1:5). 영원한 
출생에 의해서 성부는 신적 존재에  있어 성자의 인격적  존재의 원인이 되신 
다. 특별히 성자의  사역은  중재의 사명이므로, 그는 창조의 사역을  중재하 
셨고(요 1:3,10; 히 1:2,3), 또 구속의 사역도 중재하신다(엡 1:3-14). 


  ⑶ 성령(聖靈) 
  소시니안파와 유니테리안파와 현대주의자들은  성령을 단순한 하나님의  능 
력이나 영향력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하나의 인격이라고  우리에 
게 가르쳐주고  있다(요 14:16,17,26, 15:26, 16:7-15; 롬  8:26). 성령은 지 
식(요 14:26)과 감정(사 63:10;  엡 4:30)과 의지(행 16:7; 고전 12:11)를 가 
지신다. 성경은 말하기를  성령이 말하시며, 탐구하시며, 증거하시며, 명령하 
시며,  계시하시며, 노력하시며, 중재하시는  분으로  표현한다. 또  그는 분 
명히  자신의 능력과는 구별되신다(눅   1:35, 4:14;  행 10:38;  고전 2:4). 
성령의  특별한   특성은 그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생된다는 것이다(요 
15:26, 16:7; 롬 8:9; 갈 4:6).  성령의 사명은 창조와 구속을 완성하는 것이 
라 할  수  있다(창  1:3; 욥  26:13; 눅 1:35;  요 3:34; 고전  12:4-11; 엡 
2:22). 


  8. 하나님의 작정(作定) 


  1. 하나님의 작정의 일반적 의미 


  하나님의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할 모든 일들을 미리 정하시는 그 
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영원하신  목적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작 
정은  여러가지  특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상은  단일한 작정이지만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작정을  복수형으로 말하곤 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창 
조와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포함하며, 인간의 죄된 행위를 제 
외한 모든 행위를 내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죄가 세상에 들어옴을 
명백히  드러내 주지만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범죄행위의  책임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은  허용적인 작정이라 말할 
수 있다. 


  ⑴ 하나님의 작정의 특성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이 항상 이해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것이다(엡 3:9-11).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 전에 형성된 것이므로 영원적이시 
다(엡 3:11).  하나님의 작정은 효과적이므로 작정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분명 
히  발생한다(사 46:10). 하나님의  작정은  불변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참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욥 23:13,14; 사 46;10; 눅  22:22). 
하나님의 작정은 무조건적이다.  즉,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는 인간의  어떤 
행위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행위를 명백히  하신다. 하나님의 
작정은 총포괄적이다. 하나님의  작정 안에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엡 2:10; 
행  2:23)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창  50:20)과 인간  생명의 기간(욥 
14:5;  시 39:4)과 거할  장소(행 17:26)까지 포함된다.  하나님의 작정이 세 
상에 들어온 죄와 관련지을  때는 허용적이다. 


  ⑵ 작정교리에 대한 반대설 
  많은 사람들이  작정교리를 믿지 못하는데, 특별히  다음의 3가지 반대설을 
생각코저 한다. 


  ①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모순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작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우므로  자기 행위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명백히 가르쳐 
준다(창  50:19,20; 행 2:23, 4:27-29). 우리는  이 양면을 함께 조화시킬 수 
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본래부터 모순되었다고 성경이 증명해 주지 
않는다. 


  ②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한다만일 하나님이 인 
간들의 구원여부를 결정하셨다면, 인간들은  인간의  노력과 완전무관한 것이 
라고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그릇된  견해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에 관해 어떻게 작정하셨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인간의 최종적  운명을  결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실현되어가는 
방법까지 작정하신  것이다. 목적이란, 지정된 방법의 결과로서만 작정되어짐 
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을 낙망케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격려 
시켜 준다. 


  ③하나님을 죄의 조작자로 만든다 
  그러나 작정은 다만 하나님을   죄의 장본인들인 도덕적 존재자들의 창조자 
로 만들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죄가 작정 가운데 들어있는 것만은  사실이 
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직접적 행위에 의해 죄를  산출하지는 않으셨다. 그러 
나 하나님이 죄와 관련된 문제  역시 인간으로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없는 신 
비로 남아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2. 예정(豫定) 
  예정이란 도덕적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인 것이다.  예정 속 
에는 선인과 악인 즉, 모든  인류, 천사와 마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포함 
한다. 


  ⑴ 선택(選擇) 
  성경은 선택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면으로 말하고 있다. 
  ①하나님의 구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선택(신 4:37, 7:6-8, 10:15; 호 13:5) 
  ②특별한 직무와 특별한 봉사를 위한 인물의 선택(신 18:5; 삼상 10:24; 시 
    78:70) 
  ③구원 받을 개개인의 선택(마 22:14;  롬 11:5; 엡 1:4)이들 중 맨 마지막 
것이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선택이다.  그러므로 선택이란  인류 중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영원 
한 목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⑵ 유기(遺棄; 버리심) 
  선택교리는 하나님이  인생 전부를 다 구원하기로  에정하지 않으셨다는 것 
을  자연히 암시해 준다. 하나님께서  인생 중 일부만을 구원하시려고 목적하 
셨다는 말은  나머지는 자연히  구원치 않기로 목적하셨다는 것임을 알 수 있 
다. 이는  성경적 근거를 갖는다(마 11:25,26; 롬 9:13,17,18,21,22, 11:7,8; 
벧후 2:9; 유 4). 유기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 속에서 어떤  사람을 
간과하시고, 그들의 죄를 따라 그들에게 벌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기는 실제로 이중적인 목적이  있으니 ①구 
원의 은총을 베푸심에 있어 어떤  사람을 간과하시고 ②그들의  죄를 따라 그 
들에게 벌하시려 함이다. 


  ⑶ 예정론에 대한 반대설 
  이 예정교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불공평의 책임을 지게하는 것이라고 말 
하지만,  이것은 그릇된 견해이다.  우리 인간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권리요청을 할  때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푸실 의무가 있 
다고 할 때만  불공평이란 말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 인류가 하나 
님의  축복을 상실해 버린 이 마당에서  상황은 아주 다른 것이다. 인간은 어 
느 누구도 하나님을  향해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리셨느냐에 
대한 설명을  요청할 권리는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구원치 않으 
셨다 해도 하나님은 절대로 공평하신 것이다. 


  9. 하나님의 창조(創造) 


  작정의 시행은 창조 사업부터 시작된다. 이 창조 사업은 모든  계시의 시작 
이요, 기초이며 모든 종교생활의 근원인 것이다. 


  1. 창조에 관한 일반적 고찰 
  창조란 말은 성경에서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엄밀한 의 
미로 정의하자면 창조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부분적으 
로는  먼저 있었던 물질을 사용치 않고 창조하시고 한편으로는 본질상 불충분 
한 물질로부터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산출해 내신 하나님의 사역'이라 
고 정의할 수 있다.  창조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나타나 있다(창 
1:2;  욥 26:13,  33:4; 시  33:6;  사   40:12,13;  요 1:3;  고전 8:6;  골 
1:15-17). 우리는 범신론과는 반대로  창조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행위임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엡  1:11; 계 4:11). 
또  우리는 자연신론에 반대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이 세상은 
항상 하나님을 의존함으로 존속한다는  것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 
은 세상을  나날이 유지해 나가신다(행 17:28; 히 1:3). 


  ⑴ 창조의 시기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곧 현 물질 
세계의  시작을 가르쳐준다. 이 태초 전에는 끝없는 영원이 존재한다고 본다. 
창조사역의 첫 부분은 엄밀히 무(無)에서의 창조이며, 기존 재료를 사용치 않 
은  창조이었다(창 1:1). 무에서의 창조란 표현은 성경에서는 직접 찾아볼 수 
없지만, 외경 중의  한  책에서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마카비 2서  7:28).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다음의  성구에 분명히 잘   나타나 있다(창  1:1; 시 
33:9, 148:5; 롬 4:17; 히 11:3). 


  ⑵ 창조의 궁극적 목적 
  어떤 학자들은 창조의 궁극적 목적을  인간의 행복에서 찾으려  한다. 그들 
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충족함을 가지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 
재하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 
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의 찬양을  받기  위해 벌려놓은 하나의 허황 
한 구경거리로서 꾸며진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안녕을  촉진시키고, 피조물 
들로 하여금 창조주를  찬양하도록  이끌어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사 43:7, 
60:21,    61:3;  겔  36:21,22,   39:7;  눅  2:14;  롬  9:17,  11:36;  엡 
1:5,6,12,14, 3:9,10; 골 1:16). 


  ⑶ 창조교리에 대한 이설(異說) 
  창조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그릇된 이론을 
주장한다. 


  ①이원론(二元論) 
  어떤 학자는 본래의 물질은   영원한 것인데, 이 물질로부터 세상이 우연히 
또는  고도의 직접적인 힘에 의해  발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두 영원자가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즉, 두 개의 무한자 
가 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②유출설(流出說) 
  다른 학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이  본질상 하나라고  주장하며, 세상은 신이 
존재할  때 필연적으로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에게 
서 자기 결정의  능력을  박탈하였으며, 인간에게서는 그들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의 특징을 빼앗아  버리게  되고 말았다. 또  이 이론은 하나님을 세상의 
모든 악의 책임자로 만들고 말았다. 


  ③진화론(進化論) 
  또 다른 학자들은 진화론을 주장하는데, 이 이론 역시 분명히  잘못된 견해 
이다. 왜냐하면 진화란 우주의 기원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이미 기존물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영적 세계의 창조 
  하나님께서는 물질계 뿐 아니라 영적 세계도 창조하셨다. 


  ⑴ 천사들의 존재에 대한 증명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영적 세계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나  성경은 천사 
들의 존재와 그들의 참 인격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삼하 14:20; 마  24:36; 
유 6; 계 14:10).   어떤 학자들은 공허한 존재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성경에 
어긋나는 이론이다.  천사들은 우수한  영적 존재이며(엡  6:12; 히 1:14, 혹 
어떤 때는 육체적 형체를 취하기도  하지만), 살과 뼈도 없으므로(눅 24:39), 
볼 수도 없는  존재이다(골 1:16). 천사 중에도   어떤 천사는 선하고 거룩하 
며,  선택받은 존재(막 8:38; 눅   9:26; 고후 11:14; 딤전 5:21;  계 14:10) 
인데 반하여, 나머지 천사는 그들  본래의 위치에서 타락함으로  악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요 8:44; 벧후 2:4; 유 6). 


  ⑵ 천사의 부류 
  분명히 몇 가지 천사의 부류가 있다. 


  ①그룹 
  성경은 천사의  부류 중 그룹들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 
과  존엄과 영광을 선포하며, 에덴  동산에서나 성막과 성전에서나 지상에 하 
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에 하나님의 거룩성을   호위한다(창 3:24; 출 25:18; 
삼하 22:11; 시 18:10, 99:1;  사 37:16). 


  ②스랍 
  천사들 중에는 스랍들이라 불리우는 천사가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이사야 
6:2,3,6에만 언급되어 있다. 스랍들은 하늘의 보좌를 옹위하여 시종들며,  하 
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또 그들은 화해 
의  목적을 수행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올바로 접근하도록 준비시킨 
다. 


  ③가브리엘과 미가엘 
  성경에는 가브리엘과  미가엘이라 이름하는  두 천사가  있다. 가브리엘(단 
8:16, 9:21; 눅 1:19,26)의 특별한  업무는  신적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하며, 
그 계시를 해석해  주는 것이다.  미가엘(단 10:13,21; 유  9; 계 12:7)은 천 
사장이라고 불리워지는데(유 9),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을 대항하여 여 
호와의 전투를 대행하는  용감한  전사(戰士)다. 성경에는  이 천사들 외에도 
정사와  권세와 보좌와  주관자라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엡 
1:21, 3:10; 골 1:16, 2:10;  벧전 3:22). 이러한 명칭들은  천사들 사이에도 
등급과 위엄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⑶ 천사들의 하는 일(업무, 봉사) 
  천사들은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찬양하고   있다고 한다(시 103:20; 사 6장; 
계  5:11).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천사들은 구원 받은 자들을 위해  봉 
사하며(히 1:14),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며(눅  15:10), 신자들을 돌보며(시 
34:7, 91:11), 소자를   보호하며(마 18:10), 교회  안에 있으며(고전 11:10; 
엡 3:10; 딤전  5:21), 신자들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한다(눅  16:22). 또 
천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전달하며(단  9:21-23; 슥 1:12-14),  하나님 
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며(시 91:11,12; 사  63:9; 단 6:22; 
행 5:19),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기도  한다(창 19:1,13; 왕 
하 19:35; 마 13:41). 


  ⑷ 악한 천사들 
  선한 천사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 
기를  즐겨하는 악한 천사도 있다.  악한 천사들도 본래는 선하게 창조되었지 
만 그들 본래의  위치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벧후  2:4; 유 6). 악한 천 
사들의 특별한 죄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들은 아마도 하나님을 대 
항했으며, 신적  권위를 열망했을 것이다(살후 2:4,9). 사단은 천사들 중  높 
은 위치를  가진 자로서 타락한  천사들 중에 공인된   우두머리가 되었다(마 
25:41, 9:34; 엡 2:2).   사단과 그의 무리들은 초인간적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고자  하며, 심지어는  선택받은 자까지라도 우매하게 하여  미혹 
하려 하고, 간악한 방법으로 죄인들에게 범죄하도록 미혹한다. 


  3. 물질 세계의 창조 
  우리는 창 1:1에서 천지의 원시적 창조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1 
장 2절 이하는  제 2차적 창조 곧 6일간의  창조사역의 완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⑴ 창조의 기간 
  창조의 기간 중에서 문제시 되는 것은 창조 시의 날들이 보통 우리가  말하 
는 하루 24시간이냐 하는 문제이다.  지질학자들과 진화론자들은 창조의 날을 
시간적으로 오랜  기간이라고 말한다.  "날"이란 말은 성경에서 항상  24시간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창 1:5, 2:4; 시 50:15;  전 7:14; 슥 4:10). 
그러나 창조론에  있어서 "날"이란  용어에 대한 문자적 해석은 다음의  이론 
에 의해 주장된다. ①히브리어     (욤; 날; yom)은  원래 정상적인 날을  의 
미하는 것이므로 이 문맥이  다른 해석을 요하지 않는 한,  본래의 의미 그대 
로 이해되어야  한다.  ②아침과  저녁이라는 말의 반복은  이 문자적 해석을 
지지해 주는 것이다. ③여호와께서 구별하사 거룩하게 하신 안식일은  분명히 
정상적인 하루이다.  ④출 20:9-11에 보면 이스라엘은  엿새간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도록  명령을 받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엿새간 천지를 만드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다. ⑤마지막 3일은 분명히 정상적인  하루임 
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날들은  지구와  태양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날들이 정상적인  날인데, 어찌 다른 날들이 정상적인 
날이 아니겠는가? 


  ⑵ 6일간의 사역 
  ①첫 날에는  빛이 창조되었는데, 빛과 어두움이  분리됨으로 밤과 낮이 생 
기게  하셨다. 이 이론은  태양과 달과 별들이 넷째날에 창조되었다는 관념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의  운반체들이 
기 때문이다. ②둘째 날의  일은 분리하는 일인데, 궁창을 만듦으로  물이 위 
아래로 나누이는 작업이었다. ③셋째   날에도 분리작업이  바다와 땅이 분리 
되는 가운데  계속되었다. 그뿐 아니라 풀과  나무들의 식물계가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권능의 말씀으로  각기  그 종류대로 씨  맺는 꽃 없는 나 
무와 채소와 과수를  땅에 자라게 하셨다. ④넷째 날의 태양과 달과 별은  다 
양한 목적으로 따로 봉사하도록,   곧 낮과 밤을 나누며, 기후 상황의 징조를 
나타내며, 계절과 날과 연한의 계속을 결정하고, 지구를 위한 빛으로서  활동 
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⑤다섯째 날의 사역은  공중과  물 속에 사는 새와 
물고기를 창조한 일이다.  ⑥마지막 여섯째 날은 창조사역의 절정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이 날에 지상 동물 중  최고의 계급이 창조되었는데, 모든 창조사역 
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창조에 의해 절정에 이르게 되었던 것 
이다.  인간의 육체는 땅의 흙(티끌, 먼지)으로부터 형성된  반면에 그의  영 
혼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인   것이다. ⑦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창조의 사역을 끝마치시고 쉬셨고, 그의 창조사역을 보고 즐거워 하셨다. 


  처음 3일과 다음 3일의 창조 내용에는 평행되는 유사성이 있다. 
  1. 빛의 창조                             4. 빛을 가진 물체의 창조 
  2. 궁창(공간)의 창조와 물의 분리         5.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창조 
  3. 물과 마른 땅의 분리 :                 6. 땅의 짐승과 육축과 기는 것과 인 
                                           간의인간과 짐승이 거처할 땅의 준비 
                                           창조 


  ⑶ 진화론 
  진화론자들은 만물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반대하여 만물 기원의 진 
화론적  입장을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식물과 동물은(인간도 포함) 
물론 지성, 도덕,   종교와 같은 생활의 여러   형태마저도, 자연력의 산물인 
완전한 자연적 과정에 의해  발전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하 
나의  가정이므로 잘못된 이론이며,   성경적 창조론과 완전히 불일치한 논리 
이다. 


  10. 하나님의 섭리(攝理)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하신 세상을 유지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자연히  창조교리 다음에는 섭리교리를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며, 세상에  발생하 
는 모든 사건 속에서  활동하시며, 만물을 정해진 목적에 맞도록 이끄시는 하 
나님의 사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섭리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데, 그 
첫째는 존재에 관계된  것이며, 둘째는 활동에   관한 것이며, 셋째는 만물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1. 하나님의 섭리의 요소 
  하나님의 섭리는 세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다. 
  ①보존(保存) 
  보존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역이다. 세상 
은  별개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한 부분이 아니지만, 계속적인 존재의 근거를 
갖는다. 세상은 만물을 존재케  하시고  활동케  하시는 신적  권능의 계속적 
인   행사를 통하여   유지된다(시  136:25, 145:15; 느  9:6; 행  17:28; 골 
1:17; 히 1:3). 


  ②협력(協力) 
  협력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피조물과 협력하시며  피조물로 하여금 그 
들의  해야 할 일을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세계  속에 자연력과 인간의 의지와 같은  실제적 제 2의 원인들이 있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원인들이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일할 수 없다 
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 속에 
서까지라도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행동하도록 자극시키며, 순 
간 순간마다 그들의 행동에 함께 해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을 
동일한 원인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제  1원인이요, 인간은 제 
2원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 팀을 이룬 말들이 각기 그 일에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일의 한 부분을  각기 하고 있는 것처 
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과 인간이   행한 동일한 행위라도, 전체적인 
의미로 볼 때 하나님의  행동인  동시에 인간의 행동인 것이다. 또한 우리 신 
인(神人)협력교리가 인간의  죄악 행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 
이라는   그릇된 관념을  가져서는  안된다(신  1:18;   시 104:20,21,30; 암 
3:6; 마 5:45, 10:29; 행 14:17; 빌 2:13). 


  ③통치(統治) 
  통치란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들의  존재하는 목적에 맞도록 다스리시는  하 
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신구약에서 우주의  왕(다스 
리는 자)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다스리시는 피조물의 성질에 
맞도록 자신의 법칙을  적용시키셨다. 즉, 육체적 세계의 통치와 영계의 통치 
와는 다르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주적이시며(시 103:19; 단 4:34,35),  가장 
무의미한 것까지도 포함하며(마 10:29-31),  얼른  보기에 우연적인 것까지도 
포함하고(잠 16:33), 인간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까지라도 하나님의 통치 속 
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빌 2:13; 창 50:20; 행 14:16). 


  2. 섭리교리에 대한 그릇된 견해 
  ⑴ 자연신론적 관념(自然神論的 觀念) 
  이 관념은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관념이  가장 일반적 성질이라는 견해이 
다.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의 법칙을 확 
립하셨고, 세상을  움직이게 해  놓으시고는 세상에서 손을 떼셨다고  주장한 
다. 또 하나님께서 시계  태엽처럼  세상을 잘 돌아가게 해놓고  손을 떼셨다 
가 무엇인지 잘못될 때면 그때에만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 
로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저 멀이 계신 분에   불과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⑵ 범신론적 관념(汎神論的 觀念) 
  범신론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구별하지 않고, 이 둘을 동일시하므로 섭리 
교리를  인정치 않는다. 또 세상에 제 2원인이 없다고 보며, 하나님을 세상에 
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직접적인 조정자라고  본다. 심지어는 인간의 행위 
까지도 하나님의 행위라고   주장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신 분이라고 주장한다. 


  3. 비상섭리(非常攝理; 이적;異蹟) 
  우리는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로  구별하는데, 이 특별섭리 속에서 이적은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적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제 2원인의  중 
재없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제 2원인을 사용하 
시는 경우, 하나님은 제  2원인을 비상의 방법으로 사용하시므로, 결국  제 2 
원인을 사용하되 비상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므로 초자연적인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적이란 자연법칙을 어기는  것이므로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소위 자연법칙이란 다만  자연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의 통상적인  방법을  표현해  주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일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런 질서를 떠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이런 질서를 어기거나 혼란시키지  않고 특별 
한 결과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도 어떤 경우 
에는 자연법칙을 방해하지   않고, 자연법칙을 혼란시키지 않고도, 인간은 손 
을 들어 공중에 공을 던질  수 있다. 인간에게도 가능한 것이 어찌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것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적은 계시의 방도임에 틀 
림이 없다(민 16:28; 렘 32:20; 요 2:11, 5:36). 


  11. 원시상태(原始狀態)의 인간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말하여 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 
의  솜씨의 금관이라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하여 살펴 보게 되었다. 


  1. 인간성의 본질적 요소 
  인간은 영혼과 육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통상적인  견해이 
다. 이 견해는  인간이 그렇게  느끼는 바이며(자의식;自意識),  인간은 육체 
와   영혼으로  구성(마  6:25, 10:28)되었거나   육체와 영(靈)으로 구성(전 
12:7; 고전 5:3,5)되었다고  말하는 성경의 연구에 의해 나온 것이다. 


  어떤 학자는 혼과 영이  서로 다른 요소이므로, 인간은 육체와 혼과 영,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비교; 살전 5:23). 그러나  혼과 영이 서로 
교체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죽음은  때때로 혼(魂)의 떠남으로 
표현(창 35:18; 왕상  17:21)되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영(靈)의 떠남으로 
표현(눅 23:46; 행 7:59)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혼이 죽었다고 했고(계 
6:9, 20:4), 또  어떤 경우에는 영이  죽었다고  했다(벧전 3:19; 히 12:23). 
이 두 가지 용어는 다른 관점일  뿐이므로,  인간이 소유한 동일한 영적 요소 
라고 할 수 있다. 영은 생명과 행동의 원리로서 육체를  지배하며, 혼은 인격 
의 주체로서 생각하며, 느끼며, 의지하며, 정서의 좌소(座所)가 되기도 한다. 


  2. 개인 영혼의 기원 
  개인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는 다음의 3가지 견해가 있다. 


  ⑴ 선재설(先在說) 
  어떤 학자들은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기 전에 있었다고 주 
장한다.  이 학설은 인간이   죄인으로 출생한다는 사실에 대한  다소의 근거 
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오늘날 이 견해는 거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⑵ 유전설(遺傳說) 
  이 학설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혼을 그들의  부모에게서 유 
전받는다고 한다. 이는 루터교회의 견해이다.  하와의 영혼 창조에 대한 기록 
이 성경에 없고,  후손들이 그들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학 
설이다(창 46:26; 히 7:9,10).   뿐만 아니라 이는 동물의 경우, 육체와 혼이 
가족적 특성의 유전과 죄의  타락성의 유전에 의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 
해진다는 사실에 근거를 갖는데, 그것은   육체에 관한 문제라기보다 혼에 관 
해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난제가   있다. 이 학설은 부모를 영혼의 창조자로 만들며, 
인간의  영혼이 여러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가정하며, 더 나아가서는 예 
수님의 무죄성을  위태롭게 만든다. 


  ⑶ 창조설(創造說) 
  이 학설은 개인 영혼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인데, 그 시기는 명백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영혼은 순수하게 창조되었지만,  인류 전체가 짊어지게 된 
죄의 복잡성으로  말미암아 출생 이전이라   해도, 영혼은 죄된 것이라고  본 
다. 이  견해는 개혁주의  노선의  보편적인 견해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서로 다른   기원을 갖는다는 성경적   증거(전 12:7; 사 42:5;  슥 12:1; 히 
12:9)를 가지며, 영혼의 영적인 본질과   잘 조화되며, 예수님의 무죄성을 옹 
호하는 성경적인 학설이다. 


  그러나 난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학설로는 가족적 특성의 유전에 대한 
설명을 주지 못하며 하나님을  죄된 영혼의 창조자로 만드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3.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창 1:26에 의하 
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 
자"고 말씀하셨다. 형상과  모양이란 용어는 분명히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 
다. 성경은 이 두 용어가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 
다(창  1:26,27, 5:1,  9:6; 고전  11:7;  골 3:10; 약 3:9). 모양이란  말은 
아마도 형상이 거의 같거나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 같다. 


  ⑴ 로마 천주교의 견해 
  로마 천주교는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영성(靈性), 의지의 자유, 불명성 
과 같은  인간이 부여받은 몇 가지  자연적 은사들 가운데서 찾으려 한다. 하 
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연적 은사에다 인간으로 하여금  저속한 본성을 제어하 
기 위해 본래적 의(義)라  칭하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주셨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모양이 하나님과 닮게  구성되었다는 것 같이 생각된다. 


  ⑵ 루터파의 견해 
  루터파교회는 전적으로  로마 천주교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이 창조시에  인간에게 부여해준 영적 성질 곧 
참 지식과 의와  거룩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본래적  의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 견해는 너무 한정적이다. 


  ⑶ 개혁파의 견해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을  구별한다. 자연적 형 
상은 둘  중 보다 광범한 것으로  인간의 영적, 합리적, 도덕적  불멸의 본질 
속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아주 상실 
되지는 않았지만 모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덕적 형상은  보다 제한된 의미 
의 하나님의 형상이며, 참 지식과 의와  거룩 속에 존재하는 형상인데,  죄로 
말미암아 상실했었으나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된  것이다(엡 4:24; 롬 3:10). 
넓은 의미로 보면 인간은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인 
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라고 부를 수 있다(창 9:6; 고전  11:7, 15:49; 
약 3:9). 


  4. 행위 계약 속에 있는 인간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계약관계를 맺으셨다. 이 본래의 계약을 행위계약이라 
부른다. 


  ⑴ 행위계약의 성경적 증명 
  ①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였다(롬 5:12-21).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죽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속한 자는 살 
아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있는 자의 대표자가 된 것 같 
이 아담이 전  인류의 대표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호세아 6:7에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라고 기록되었으니, 아담 
의  죄는 계약의 위반이라고 부를 수 있다. 


  ⑵ 행위계약의 요소 
  ①계약의 당사자 : 계약은   항상 두 당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때  계약의  당사자들은 우주의 주권자가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류의 
대표자 되는  아담이다. 이  양편은 매우 불균형하므로 자연히 계약은 타협의 
성격을 인간에게 부과한다. 
  ②계약의 약속 :   계약의 약속은 가장 고상한   의미로 생명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생명은 죽음의  가능성을 초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신자들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 
  ③계약의 조건 : 계약의 조건은 절대적 순종이었다.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 
를 먹지 말라는 엄한 명령은 순수한 순종에 대한 시험이었던 것이다. 
  ④계약의 형벌 : 총괄적   의미로 여기서 형벌이란 육체적, 영적, 영원적인 
죽음인  것이다.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 
님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를 말하는 것이다. 
  ⑤계약의 상징 : 생명나무가  하나의 상징이었다면, 이 계약의 유일한 상징 
이었을  것이다. 생명나무는 생명의 상징과 보증으로 지명된 듯하다. 


  ⑶ 행위계약의 유효성 
  알미니안파들은  행위계약이 완전히  폐기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견해이다. 완전히 순종의  요구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의(義)를 받아들 
이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존속한다(레 18:5; 갈 3:12). 이런 인간들은 이러 
한 요구에 응하지  못했지만,  그 조건은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 
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적  요구에  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계약이  타락 후 무력하게 되었으므로, 생명의 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12. 죄(罪)의 상태(狀態)에 있는 인간 


  1. 죄의 기원 
  성경은 가르쳐 주기를 최초의 죄는  낙원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 결 
과로 세상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 최초의 죄는 뱀의 형태로 가장한 사단의 시 
험에 의해  발생된 것인데, 사단은 인간의 마음  속에 의혹과 불신의 씨를 뿌 
렸던 것이다. 성경은 타락   사건의 유혹자인 뱀은 다만 사단의 도구이었다고 
분명히 지적해 준다(요 8:44;  롬  16:20; 고후 11:3; 계 12:9). 최초의 죄는 
인간이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따 먹는데  있다.  이 실과를 먹음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금(禁)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죄된  것이다. 실과를 먹음은 인간이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복종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 준 것이며, 몇 가지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음은 그  자 
체가 지적인 면에서는 불신앙과 자만심을,  의지면에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 
는 욕망을,  감정면에서는 금지된  실과를  먹으려는 호기심을 나타내는 것이 
다.  그 결과로 인간은 엄밀한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전적 
으로 타락하여 죽음의 지배하에 있게 되고  말았다(창 3:19; 롬 5:12, 6:23). 


  2. 죄의 본질 
  ⑴ 죄는 특별악(特別惡)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악(惡)이란   말 대신에 죄란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이것은  그리 좋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죄란 말은 보다 특수한 의미가 있 
기 때문이다. 


  ⑵ 죄는 절대적 성질을 가진다 
  죄의 본질은 악의  일종 즉, 인간이 책임져야  할 도덕적 악을 나타내는 것 
인데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정죄하(定罪下)에 놓이게 된 것이다. 


  ⑶ 죄는 하나님의 뜻에 관계된다 
  오늘날 죄를 단순히 이웃에   대한 잘못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완전히  그 요점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와같은 
잘못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어긋날 때에만 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 
다. 죄란 불법이며(요일 3:4),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복종의  결여이며, 신 
적 율법에 의해 요구된 사랑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항상 죄를 율법 
과   관련시켜 생각한다(롬 1:32,   2:12-14, 4:15, 5:13;   약 2:9,10; 요일 
3:4). 


  ⑷ 죄는 죄책(罪責)과 오염(汚染)을 내포한다 
  죄란, 첫째로 인간으로 하여금 형벌에 빠뜨리게 하는 죄책(롬 3;19,  5:18; 
엡 2:3)이며, 다음은  선천적 부패성 또는 도덕적  오염이라 정의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가  있으므로 부패한   성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욥  14:4; 렘 17:9;  사 6:5;  롬 8:5-8; 엡 4:17-19). 


  ⑸ 죄는 인간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죄는 인간의 마음에  그 좌소를 가지므로, 이  중심에서부터 지.정.의  즉, 
인간 전체에 영향을  미치며  육체를 통해  나타난다(잠  4:23; 렘  17:9; 마 
15:19,20;  눅 6:45;  히 3:12). 


  ⑹ 죄는 외부적 행위만은 아니다 
  우리는 로마 천주교와는 달리, 죄란  외부적 행위에만 있지 않고 악한 사상 
과   악한 감정과  마음의 악한 의도까지  내포한다(마 5:22,28; 롬  7:7; 갈 
5:17,24). 


  3. 인류생활에 있어서의 죄 


  ⑴ 아담의 죄와 후손의 죄 
  이 관계는 세 가지로 설명되어 왔다. 
  ①실재설(實在說) 
  가장 최초의 설명은 실재설인데,   이 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본래 하나의 
일반적  인간성을 창조하셨는데, 이  인간성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많은 부분 
곧 인류  각 개개인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은  이 일반적 인간성 전 
체를 소유했는데, 죄를   지음으로 그것이 유죄가 되어 더럽혀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모든  개인적 인간성도 이러한 죄책과 오염을 공유하게 되었 
다는 것이다. 


  ②대표설(代表說) 
  개혁시대의 대표적인  학설로, 이 견해에 의하면  아담은 그의 후손과 이중 
적   관계를 가지는데, 그는  자연히 인생의 머리가  되었고 언약의 머리로서 
인생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범죄했을 때, 이 죄는 
인류에게 전가되어졌으며, 그  결과 모든 인류는 부패한 상태  하에서 탄생하 
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학설이 우리  개혁주의의 견해이다. 


  ③간접전가설(間接轉嫁說) 
  이 이론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아담의 죄책은 직접적으로 우 
리에게  관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담의  부패는 그의 후손에게 전가되 
며, 이 부패성은  인간들을 개인적으로 죄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 
들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유죄하기 때문에 부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부패 
하기 때문에 죄된다는 것이다. 


  ⑵ 원죄(原罪)와 본죄(本罪) 
  우리는 죄를 원죄와 본죄로  구분한다. 모든 인간은 죄된 상태와 죄의 신분 
에서  출생하므로, 이것을 원죄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본죄의 뿌리인 것이다. 


  ①원죄(原罪) 
  원죄는 죄책과 오염을 포함한다.  아담의 죄책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아 
담이 우리의 대표자로서 범죄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죄된 인간인 것 
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  아담의 부패성을  상속하고 죄를 향한 적극성 
을 갖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상 전적으로 타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것은 모든 인간이 하는 바가 악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인 
간의 본질 전체를   부패시켰고,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영적 선이라도 행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직도 그의  동료와의 관계에 
서 가치있는  일을 하고자 할는지 모르지만,  인간의 최선의 일이라 하더라도 
그런 행위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의해  충동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순종함 
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것이다. 이 전적 타락 
과  전적 무능력은 펠라기우스파와 알미니안파와 현대주의자들에 의해 부인되 
었지만, 성경은 분명히  전적타락과  무능력을 입증해주고 있다(렘  17:9; 요 
5:42, 6:44,   15:4-5;  롬 7:18,23,24,  8:7,8;  고전  2:14; 고후  7:1; 엡 
2:1-3, 4:18; 딤후 3:2-4; 딛 1:15; 히 11:6). 


  ②본죄(本罪) 
  본죄란 말은 외부적  행위의 죄  뿐 아니라,  원죄로 인해 일어나는 의식적 
인 죄된  생각, 욕망, 결심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개인이 그의 고유 
의 성질과  경향으로부터  구별하여 행동한 죄이다. 원죄는 하나이지만, 본죄 
는 여럿이다.  본죄는 교만, 질투,  증오, 감각적 육욕, 악한 욕망과 같은 내 
적 생활의 죄이며, 사기, 도적,   살인, 간음 등과 같은 외적생활의 죄이기도 
하다.  이들 중에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즉,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있다. 
이  죄를 범한 후에는 심령의  변화가 불가능하며,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 
가 없다는  것이다(마  12:31; 막  3:28-30; 눅 12:10;  히 6:4-6, 10:26,27; 
요일 5:16). 


  ⑶ 죄의 보편성(普遍性) 
  성경과 경험을 통하여 볼  때, 죄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 
어  펠라기우스파까지도 그들은 죄를 나쁜  환경이라든가 악한 실례라든가 또 
는 그릇된 교육과  같은 외부적  조건의 탓으로  돌리기는 하지만, 죄의 보편 
성만은 부인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죄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구절들이 많다 
(왕상 8:46; 시  143:2; 잠 20:9;   전 7:20; 롬 3:1-12,19,23;  갈 3:22; 약 
3:2; 요일 1:8,10). 그뿐 아니라  성경은 인간이 나면서부터 죄된다고 가르치 
는데 이 죄의  보편성은 모방의 결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욥 14:4; 시 
51:5; 요   3:6). 심지어 유아라도  죄의  결과인  죽음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죄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롬  5:12-14).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정죄(定 
罪) 아래 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어린 아 
이들이 이 원칙에서  결코 제외될 수 없다(요 3:3,5; 엡 2:3; 요일 5:12). 


  13. 은혜계약 안에 있는 인간 


  우리는 이 교리에  대해 잘  알기 위해서  구속의 계약과 은혜의 계약을 구 
별한다.  이 둘은 밀접한 관계이므로  한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니, 곧  전자 
(구속의 계약)는 후자(은혜의 계약)의 영원한 기초가 된다. 


  1. 구속(求贖)의 계약(契約) 
  구속의 계약은 스가랴 6:13에서 나온 명칭인데, "평화의 의논"이라  불리워 
진다. 그것은 삼위를 대표하시는 성부와  선택 받은 자의 대표이신 성자 사이 
에의 언약인 것이다. 


  ⑴ 성경적 근거 
  구속의 계획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엡 
1:4,  3:11; 딤후 1:9). 그리스도는 그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 그에게 맺으신 
계약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또  성부로부터 받은 부탁에   대해 거듭  거듭 
언급하셨다(요 5:30,43,   6:38-40, 17:4-12).   또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한  계약의 머리가  되신다(롬   5:12-21;  고전 15:22). 시 2:7-9에 보면 계 
약의 당사자들에 대해  언급되어 있고  하나의 약속이  지시되어 있다. 또 시 
40:7,8에서 메시야는 죄의 희생제물이  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준비 
를 나타낸다. 


  ⑵ 구속계약에 있어서의 성자(聖子) 
  그리스도께서는  구속계약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보증이  되신다(히 
7:22). 보증인은 타인의 법적  의무를 자신이 책임지는 인물이다. 그리스도께 
서는  죄인을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짊어지셨고, 자기 백성을 위한 법적 요구 
에 응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영(靈)이신 마지막 아 
담이 되었던 것이다(고전  15:45).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이 계약은 그가  본 
래적 계약의 요구에 응하셨던  행위계약이었으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 계약 
이 은혜계약의  영원한 기초가 된다.  이 계약의 효능은 선택받은  자에게 제 
한되어 있다.  그들은 다만 구속을 받으며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 이룩하신 
영광을 상속받을 뿐이다. 


  ⑶ 구속계약의 요구와 약속 
  ①구속계약의 요구 
  성자 자신은 죄가 없지만  인간의 현재의 나약성을 책임지도록 성부께서 그 
에게  요구하셨다(갈 4:4,5; 히 2:10,11,14,15,  4:15). 즉, 성부는 선택자를 
위해 형벌을  받으시고 영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법 아래 처하게 해 
야 하며(시 40:8;  요 10:11; 갈 1:4, 4:4,5), 또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자 
신의 공적을 자기  백성에게  적용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헌신 
의 생활을 유지하게 해야 했다(요  10:28, 17:19-22; 히 5:7-9). 


  ②구속계약의 약속 
  성부께서는 성자를   위하여 몸을   준비하시고(히 10:5),   성령으로 기름 
부으시며(사 42:1, 61:1;  요 3:34), 그의 사역을  지원하시며(사 42:6,7; 눅 
22:43), 그를   사망 권세에서 건져 내어   자기 오른 편에  있게  하시며(시 
16:8-11; 빌 2:9-11),  교회의  설립을 위해 성령을  보낼 수 있게 하시며(요 
14:26,  15:26, 16:13,14),  택한 자를   불러  내시고  보호하시며(요 6:37, 
39,40,44,45),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후사를  그에게 허락할 것이라고 성자에 
게 약속하셨다(시 22:27, 72:17). 


  2. 은혜(恩惠)의 계약(契約) 
  하나님께서는 구속계약에 근거해서   은혜의 계약을 확립하셨다. 이에 대해 
서 몇  가지 특별한 고찰이 필요하다. 


  ⑴ 계약의 당사자들 
  하나님께서는 계약에 있어서 제 1당사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확립 
하시며, 제 2의 당사자와의 관계를  결정하신다. 그런데 제 2의 당사자가  누 
구인가를 결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개혁파의  통상적 견해는 제 2당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은  죄인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계 
약이 두 가지 면에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①목적 자체로서의 계약 
  상호 친교 또는 생명의 교통의  언약 즉, 계약의 목적 그 자체는 역사의 과 
정  속에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실현되어지는 것이다. 계약이란 어떤 특 
권이  영적 목적을 위해 증진되어지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 
속은  산  믿음에 의해 받아  들여지며, 그렇게  해서 약속된  축복은 완전히 
실현되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이 계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택함받은 죄인과의  은혜로운  계약으로서,  하나님께서 택함받은 
자들에게 구원의 축복과 함께  자신을 제공해 주시고, 택함받은  죄인은 하나 
님과 그의 모든 은혜로운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로 체결한  은혜로운 협 
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신 7:9; 대하 6:14; 시 25:10,14, 103:17,18). 


  ②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의 계약 
  이것은 영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순수한 법적인 협정을 말한다. 성경은 
이스마엘, 에서, 엘리의 악한  아들들,  그리고 죄 가운데서  죽은 패역한 이 
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사람들처럼 약속이 결코 실현되지 않은 경우까지도 포 
함한 계약에 대해  가끔 언급한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계약은 하나님께 
서 모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축복을  보증해 주신 순수한 법적인  협정이라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언약을 이처럼  넓은 의미로 생각해 본다 
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믿는 자들과 그의 자녀들에게  이룩하셨다 
고 말할 수 있다(창 17:7; 행 2:39; 롬 9:1-4). 


  ⑵ 은혜계약의 약속과 요구 
  모든 계약은 양면성을 갖는데,   그것은 어떤 특권을 제공하며 동시에 어떤 
의무를  부과한다. 


  ①은혜계약의 약속 
  모든 다른  약속들도 포함하고 있는  이 계약의 주요  약속은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자주 반복하신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다 
(렘  31:33,    32:38-40;  겔  34:23-25,30,31, 36:25-28;  히  8:10;  고후 
6:16-18). 이 계약의  약속은 현세적인 축복, 칭의, 하나님의 영, 끝없는  생 
명  속에서의 영화의  약속  등과  같은 다른  모든   약속들을  포함한다(욥 
19:25-27;   시 16:11, 73:24-26;  사  43:25;  렘 31:33,34; 겔   36:27; 단 
12:2,3; 갈 4:4,5,6; 딛 3:7; 히 11:7; 약 2:5). 


  ②은혜계약의 요구 
  은혜계약은 행위계약이 아니어서   공로가 될만한 어떤 행위를 요구하진 않 
지만,   그러나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으며 의무를  부과시킨다. 인간은 
계약의 요구에 응함으로써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한  축 
복을 자기에게 주실 것이라는  뜻에 자신을 맡길 뿐이다. 더우기 계약의 요구 
까지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도 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계약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계약관계에  있는 인간들은 계약과  그 계약의 약속들을  믿음으로 받아 
들임으로 계약의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들은 그들 속에 
있는 새 생명의 원리를 따라   새로운 순종심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 
다는 것이다. 


  ⑶ 은혜계약의 특성 
  ①은혜로운 계약이다 
  은혜의 계약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와 표현이므로 은혜로 
운  계약이다. 이 계약은 시종일관 은혜다. 


  ②영원한 계약이다 
  인간은 계약을 깨뜨리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계약에 대해 참되시므로  은 
혜계약은 영원하고 폐할 수 없는 계약이다. 


  ③특수한 계약이다 
  은혜계약의 범위가 광범위하지만,   이 계약은 특정한 인간만을 포함하므로 
특수한  계약이다. 신약시대의 계약은  그  계약이 구약에서 처럼 유대인에게 
만 제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다 미치게 된다는 의미에서 볼 때 보편적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④단일한 계약이다 
  은혜계약은 단일성이 그  특성이므로, 계약 이행의 형태는  변하지만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본질적으로 약속이 동일하며(창 17:7; 
히  8:10), 복음도 동일하며(갈 3:8), 믿음의 요구도 동일하며(갈 3:6,7), 중 
보자도 동일하다(히 13:8). 


  ⑤조건적인 동시에 무조건적인 계약이다 
  은혜계약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하므로 조건적이라 할 수  있으며,  또 
계약이 가져다 주는 생활의  기쁨은 신앙의 훈련에 의존하므로 조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은혜계약은  인간의 어떤 공로라도 의존하지 않으므로 무조 
건적이라 할 수 있다. 


  ⑥유언적 계약이다 
  은혜계약은 하나님 편에서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처분이므로 유언(遺言)적 
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히 9:16의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되나니" 
에서 나온 것이므로   유언적 계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첫째 은혜계약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협정이다.  둘째 은혜 
계약의 신약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소개되었다. 세째 하나 
님께서는 그가 요구하시는 바를 계약 속에서 주신다. 


  ⑦계약의 중보자 
  은혜계약은 중보자가 있다는  면에서 행위계약과는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보자로 나타나셨다(딤전 2:5; 히 8:6, 9:15, 12:24). 또  그리스 
도께서는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하도록 중재하신다는 면과 그가 화 
평의 실질적  성취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할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셨다 
는 면에서  중보자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증인으로서(히  7:22),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죄의 형벌을  받으시고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화평을 회복하 
신 것이다. 


  ⑷ 은혜계약 안에 있는 회원 


  ①계약 안에 있는 성인 
  성인(成人)들은 믿음으로만   순수한 합법적 협정으로서의   계약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은혜계약에 들어가면 동시에  생명의 교통의 계약에 들어가는 것 
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곧 완전한 계약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②계약 안에 있는 신자의 자녀들 
  그러나 믿는 자들의 자녀들은  믿음에 의한 합법적 협정으로서의 계약에 들 
어가긴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곧 생명의 교통으로서의  계약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계약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계약 생활이 그들의 생애 속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올바른 확신을 준다. 우리는 신자의   자녀들이 신앙을 반역하지 않는 한, 그 
들이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자라면 그들 
은 자발적으로 진실한 신앙을   고백하므로 계약적 책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 
이다. 이것이 실패할 때는 그들 자신이  계약의 파괴자가 된다. 


  ③계약 안에 있는 비중생자 
  앞서 말한 것을  보아  비중생자도 일시적으로 순수한  합법적 관계를 맺는 
계약  속에 들어갈 것이라  본다(롬 9:4). 그들은 계약의  자녀들로서 인정되 
며, 그 요구에  복종하며, 계약의  직무를 분담한다.  또 그들은 세례의 증표 
를 받고 계약의 평범한 축복을  기뻐하며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까지도 참여하 
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에 수반되는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들은 계약의 파괴자로 인정될 것이다. 


  ⑸ 계약의 시대적 경륜 


  ①계약의 최초 계시 
  계약의 첫번째 계시는 창 3:15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그것은  항상 원복음 
(原福音) 또는 어머니의   약속이라고 불리워진다. 이것은  계약의  형식적인 
확립이라 말할 수는  없다. 


  ②노아와의 계약 
  노아와의 계약은 모든 혈육있는 자와의 계약으로 매우 일반적인  성질이 있 
다. 그것은  단지 자연적인 축복이므로,  흔히 자연의 계약  또는 일반은총의 
계약이라고 불리워진다. 그러나 은혜계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이 계 
약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열매)이며, 은혜계약의 실현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연적이고 현세적인 축복을  보증하는 것이다. 


  ③아브라함과의 계약 
  아브라함과의 계약은 형식적인 확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계약은  구약의 
특수한 통치의 시작인데,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만 국한되어진다. 
신앙은  현저하게  계약의 필연적 요구로서 나타나며,  할례는 계약의 증표가 
된다. 


  ④시내산에서의 계약 
  시내산에서의 계약은 본질적으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과 동일하지만,  형 
식면에서는 달리 이스라엘  전체 민족과 맺은 계약이므로  국가적인 계약이었 
다. 이 계약은  율법의  수행을 강력히 강조하지만,  그것은 행위계약이 회복 
된  것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율법은  죄 의식을  증가시켰으며(롬 
3:20),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갈 3:24). 그리하여 유 
월절인 제 2의 성례로 첨가되었다. 


  ⑤신약의 새 계약 
  신약에 계시된 새 계약(렘  31:31; 히 8:8,13)은 본질적으로 구약의 계약과 
동일하다(롬 4장; 갈 3장). 신약의 계약은 특정한 민족이나 사람의 장벽을 깨 
뜨리고,  그 축복이 모든 나라의 백성에게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우주적(보편 
적)이다. 그 계약의 축복은  보다 충만하고 보다 영적이며, 세례와 성찬은 구 
약 성례를 대신하게 되었다. 


  14. 그리스도의 명칭과 본질 


  1. 그리스도의 명칭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명칭들은 다음과 같다 


  ⑴ 예수(Jesus) 
  '예수'란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     ; Jehoshua; 수  1:1; 슥 3:1) 또 
는 예수아(    ; Jeshua;  스 2:2)의 헬라어 형태이다.  이 명칭은 "구원하다 
"라는 히브리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구주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마 1:21).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두 가지 모형은 동일한 이름 즉,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이다. 


  ⑵ 그리스도(Christ) 
  '그리스도'란 이름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구약의 메시야에 대 
한  신약적 형태이다. 구약에 보면 선지자(왕상 19:16), 제사장(출 29:7), 왕 
(삼상  10:1)은 성령의 상징인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그들  각자의 직무를  위해 구별되었고 그것을 위해 자격을 얻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왕의  3가지 직무를 위해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역사적으로는 이  기름부음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을 
때와 세례받았을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 


  ⑶ 인자(人子; Son of Man)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이  명칭은 다니엘 7:13에 근거한  것으로,  예수께서 
자신에게 적용하신 가장  통상적인 명칭이며, 다른 사람들은  이 명칭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인자란 명칭은  예수님의 인간성의  표시이지만, 그 역사적 
기원을 보면 그것은 그의  초자연적 특성을 지적해 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위엄과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장차 오심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단 
7:13; 마 16:27,28, 26:64; 눅 21:27). 


  ⑷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그리스도는 몇 가지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지는데, 그 이유 
는  다음과 같다. 삼위 중 제  2위이시며 자신이 하나님이시며(마 11:27), 기 
름부음 받은  메시야이시며(마  24:36), 그의 탄생이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눅 1:35). 


  ⑸ 주(主; Lord)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우리가 선생님이란 말을  존칭어로 사용하듯, 존 
칭어인  이 명칭을 예수님에게 적용했다.  그  명칭이 특별한 깊은 의미를 갖 
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부터이다. '주'란  명칭은 교회의 주인이며 
통치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며(롬  1:7; 엡 1:17), 하나님께 대한 명칭 
으로도 표현되어 있다(고전 7:34; 빌 4:4,5). 


  2. 그리스도의 본성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성품  즉,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가 
르쳐  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위대한 신적 신비인 것 
이다(딤전 3:16). 


  ⑴ 두 가지 본질(성품) 
  ①신성(神性)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므로, 이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강조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안다. 
  구약 → 사 9:6; 렘 23:6; 미 5:2; 말 3:1 
  신약 → 마  11:27, 16:16, 26:63,64; 요 1:1,18; 롬  9:5; 고전 2:8; 고후 
5:10;  빌 2:6; 골 2:9; 히 1:1-3; 계 19:16 
  ②인성(人性) 
  예수의 인성은 문제시 되지   않는다. 사실상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 
고 있는   예수의 유일한  신성(神性)은 그의 완전한  인간성의  표현인 것이 
다. 예수의 인성에   관한 증거도 많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요 
8:40)이라 말씀하셨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그렇게 불리워졌다(행 2:22; 
롬 5:15; 고전 15:21). 예수님께서는 인성의  본질적 요소 즉, 육체와 영혼을 
소유하셨다(마 26:26,38; 눅 24:39; 히 2:14).  그뿐 아니라 그는  인간의 정 
상적인 성장과정(눅 2:40,52)을   따르셨고, 인간적 욕망과  고통에도 영향을 
받으셨다(마 4:2,  8:24; 눅  22:44; 요  4:6, 11:35,  12:27; 히   2:10,18, 
5:7,8). 그러나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시지만, 그는 죄가 없으시다. 다시 말하 
면  죄를 짓지 않으셨으며, 죄를  지으실 수도 없다(요  8:46; 고후 5:21; 히 
4:15, 9:14; 벧전 2:22;   요일 3:5).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이  되셔야 
함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아  죽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야  했고, 또 그가 인간의  죄를  구속할 수 있기 위해서도 죄 없 
으신  인간이 되셔야만 했다. 또 그가 무한한 가치의 희생을  제공하고, 하나 
님의  진노로부터  인간을 건지실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되셔야  했다 
(시 40:7-10, 130:3). 


  ⑵ 한 인격 속에 결합된 두 성품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가지셨지만 인간의  인격은 아니시다. 중재자의  인 
격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하 
나의 인간 인격으로  변한 것도  아니요, 또한 하나의 인간 인격을 취하신 것 
도  아니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성에 덧붙여 인성을 취하셨는데, 그 인 
성은 다만 독립적 인격으로  발전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 속에서 
인격적이 된 인성인 것이다. 이런 인성을 취하신  후 중보자의 인격은 신적일 
뿐  아니라  동시에 신인(神人)적인 것이다. 그는 신적  의지와  인적 의지를 
소유하셨듯이, 신적 의식과  인적  의식을 소유하고 계시다. 이 진리는  인간 
으로서는 측량할 수 없는  신비인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 인격의 단 
일성을  지적해 준다. 말하시는  의식이 인적이든 신적이든 관계없이  말하는 
분은 언제나 동일한  인격(요 10:30,  17:5; 비교;  마 27:46; 요 19;28)이시 
다. 인간의 속성과  행동은 가끔  신적  칭호로 표현된 인격으로 묘사되고(행 
20:28; 고전 2:8; 골 1:13,14),   신적 속성과 행동도 가끔 인간적 칭호로 표 
현된 인격으로 표사된다(요 3:13, 6:62; 롬 9:5). 


  ⑶ 이 교리에 관한 오류 
  초대교회 당시 알로기파와 에비온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다.  개혁 
시대의 소시니안파와 유니테리안파와  오늘의  현대주의자들도 이러한 부인설 
을 따른다.  초대교회의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당한 것으로 
보았으며,  그리스도를 반신(半神)으로  간주한데 반해 아폴리나리스는  그리 
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신적  로고스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의 영을 대신해서 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안파는 한 인격 속에서 
의 두 본질의 결합을 부인했으며,  유티커스파는 두 본질을  완전히 분간하지 
않았다. 


  15. 그리스도의 신분(身分) 


  우리는 가끔 "신분"과  "상태"라는 말을 상호 교차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율법과 율법 앞에 선 그리스 
도와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보다 특수한  의미로 "신분"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낮아지셨을  때는 율법 아래 있는 종이었으나  높아지셨을 때 
는 율법을 초월한 주님이시다. 자연히 이   두 가지 신분은 생명의 상태와 조 
화를 이루면서 동반하게 되며, 이들은 몇 가지  단계로 언급된다. 


  1. 낮아지신 신분 
  낮아지신 신분은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주권적인 통치자로서 자신의 것이었 
던  신적 위엄을 버리시고, 종의 형체로  인성을 취하셨으며, 최고의 율법 수 
여자이신 그가  율법의 요구와  율법의 저주  아래  굴복하게 되셨다는데  있 
다(마  3:15;  갈 3:13,   4:4;  빌 2:6-8). 그리스도의 이 신분은 그에 상응 
하는 상태로 나타나는데, 우리는  흔히 다음 몇 가지 단계로 구분한다. 


  ⑴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하나님의 아들은 인성을   취하심으로 육신이 되셨다(요  1:14; 요일 4:2).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나심으로   인류 중의 한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가 재세례파의   주장과 같이 하늘에서부터  그의 인 
간성을 부여받으셨다면,  성육신은 참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경은 동정 
녀 탄생을 가르쳐  준다(사 7:14; 마 1:20;  눅  1:34,35). 이 이상한 출생은 
시초부터 죄의 오염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보호해 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 
사(눅 1:35)에 의한 것이었다. 


  ⑵ 그리스도의 고난(苦難) 
  우리는 가끔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의  최후적 고통에만 국한된 것  처럼 말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전생활이  고난의 생활이었다. 그의 
생활은 만주의 주가  종이 되신 생활이었으며, 죄로 저주 받은 세상에서 무죄 
한 자의  생활이었다. 사단은  그를 공격했고, 그의 백성은 그를 배반했으며, 
그의 대적들이 그를  괴롭혔다. 영혼의 고난은 육체의 고난보다 더 격렬한 것 
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악마에 의해   유혹받으셨고, 자기 주위의 불의한 세 
상에 의해  억압을 받으셨고, 자기에게 지워진 죄짐에 의해 눌림을  받으셨으 
므로,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이셨다(사 53: 3). 


  ⑶ 그리스도의 죽으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 말할 때, 자연히 그의 육체적  죽음을 생 
각한다. 그는 어떤 불의한 사건의  결과로  죽은 것이 아니며, 어떤 암살자의 
손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법적 판결에 의해   죽으신 것이며, 죄인으로 
간주되셨던 것이다(사 53:12).   그는 로마의 십자가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 
를 위해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저주된 죽음을 죽으셨던 것이다(신 21:23; 
갈 3:13). 


  ⑷ 그리스도의 장사(葬事) 지냄 
  그리스도의 죽음이 마치 그의   고난의 최후 단계이었던 것 처럼 생각될 것 
이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지 아니했던가? 그러나 이 
말은  아마도 그의 능동적 고난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그의 장례는 확실 
히 하나님의 아들된 자로서  인식했던 바 낮아지심의 한 형태인 것이다. 인생 
이 흙으로  돌아감은 죄에 대한   형벌인 것이다(창  3:19). 다음의 성구들에 
나타난 바와 같이  구원자가 무덤에 머무심은 하나의   낮아지신 신분이다(시 
16:10; 행 2:27,31, 13:34,35). 이는 우리에게서  무덤에 대한 공포를 제거해 
준다. 


  ⑸ 지옥(地獄)에 내려가심 
  사도신경에 있는  "그가 음부에 내려가시고"란 말은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빠져있음). 로마 천주교는  그리스도가 구약 성도들을 해방 
하기 위해 그들이  갇혀있는  선조  림보(limbus Patrum)에 내려가셨다고  말 
하며, 루터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 기간에  흑암의 권세에 대한 
그의  승리를 선포하며 기념하기 위해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본다. 아마도 다 
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는 상징적 표현이   될 것이다. ①그는 동산에서와  십 
자가 위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고, ②그는 사망의  상태에  있어서 가장 
낮아지신 상태에 들어가셨다(시 16:8-10; 엡 4:9). 


  2. 높아지심의 신분 
  높아지심의 신분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하시고 죄인을 
위하여 의와 영생을 준비하시므로 계약적 의무인 율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시 
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훌륭한 존귀와  영광으로 면류관을 쓰시게 되 
었다. 여기에는 네 단계로  구분되어야 한다. 


  ⑴ 부활(復活)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단순한 재결합으로 된 것이 아니라, 자 
기 안의  인간성 즉, 육체와  영혼이  그 본래의 아름다움과 강함을 회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이름으로 되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이전에 부활한 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인  육체를 가지시고 부활하셨다(고전  15:44,45).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의   첫 열매(고전 15:20)와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골 1:18; 계  1:5)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 
스도의 부활은 3가지 의미를 갖는다. 


  ①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모든 요구에  응하셨다는데 대한 
하나님의 선포이었다(빌 2:9). 
  ②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칭의와 중생과 최종 부활을 상징하신 것이다 
(롬  6:4,5, 9; 고전 6:14, 15:20-22). 
  ③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칭의와 중생과  부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롬  4:25, 5:10; 엡 1:20; 빌 3:10; 벧전 1:3). 


  ⑵ 승천(昇天) 
  승천은 어떤  의미에서 부활의 필연적 완성이었으나  승천도 독자적 의미를 
가졌다고 본다. 
  우리는 눅 24:50-53;  행  1:6-11에서 이에 대한  이중적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엡 1:20, 4:8-10;  딤전 3:16에서 이에 대해 말씀하였고, 히브 
리서도 승천의  의미에 대해 강조했다(히 1:3, 4:14, 6:20, 9:24). 승천은 지 
상에서 하늘로,  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따른 
중보자의 유형적인 상승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현저한 영화를 내포한  것이다. 루터파는  승천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갖는다. 
그들은 승천을 하나의  조건의 변화라고 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인성이 어떤  신적  속성의  완전한 기쁨에 들어가시어서  영구히 편재하시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심으 
로 그의   희생을 성부께 나타내기  위해 성소에  들어가  보좌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신다(롬 8:34;  히 4:14;, 6:20,  9:24). 그는 우리의  거할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 승천하신  것이다(요  14:1-3). 우리는 이미 그와 더불어 하 
늘 처소에 거하게 되었고   그의 승천하심으로 우리도 하늘에 있는 처소에 대 
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엡 2:6; 요 17:24). 


  ⑶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게  되었다(엡 1:20; 
히  10:12; 벧전 3:22).  자연히 "하나님의  우편"이란 표현은 문자적으로 취 
급될 수 없으나   권능과 영광의 처소를 말하는   상징적 지시로 이해해야 한 
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동안에 그의  교회를 다스리시 
며, 보호하시며, 우주를 통치하시며, 그의   완전한 희생에 근거해서 그의 백 
성을 위해 중재의 역할을 하신다. 


  ⑷ 육체적 재림(再臨)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때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최절정에 달하게 된다. 분명히  그의 재림은 육체적이고 유형적이  될 것이다 
(행 1:11; 계   1:7).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러 오실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 
여러 군데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요  5:22,27; 행  10:42; 롬  2:16; 고후 
5:10; 딤후 4:1).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목적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실 목적으로 오실 
것이다.  재림은  그의 구속사역의 완전한 승리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고전 
4:5; 빌  3:20; 골 3:4;  살전 4:13-17; 살후  1:7-10, 2:1-12; 딛  2:13; 계 
1:7). 


  16. 그리스도의 직무(職務) 


  성경은 그리스도에게 세  가지 직무 곧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무가 있다 
고  가르쳐 준다. 


  1. 선지자직(先知者職) 
  구약(신 18:15, 비교; 행   3:23)은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로 오실 것을 예언 
했다.  그리스도는 눅 13:33에서  자신을 선지자라고 말씀하셨고, 아버지로부 
터 메시지를  가져오셨다고 말씀하셨다(요 8:26-28, 12:49,50, 14:10,24). 그 
리고 장래  일을 예고하셨으며(마 24:3-35; 눅 19:41-44),  독특한 권위로 말 
씀하셨다(마 7:29). 그러므로  백성들이  그를 선지자로  인정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마   21:11,46;  눅   7:16, 24:19;   요  6:14, 7:40, 
9:17). 선지자는 꿈이나 환상(幻像) 또는 언어 전달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선지자적  활동을  하는  가운데 이 계시를  구술적으로나 가시적으로 
백성에게 전달해 주었다(출 7:1; 신 18:18; 민 12:6-8; 사 6:; 렘 1:4-10; 겔 
3:1-4,17). 


  그의 일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그의 중요한 일 중 
의  하나는 백성들을 위해  율법을 도덕적이고 영적인  면에서 해석하는 것이 
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미 선지자로  일하셨다(벧전  1:11, 
3:18-20). 
  그는 지상에 계시는 동안 선지자의  일을 행하셨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도 
들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로 그 사명을   계속하셨다(요 14:26, 16:12-14; 행 
1:1). 지금도 그의  선지자적 사명은 말씀의 역사와  신자들의 영적인 조명을 
통하여 계속된다. 이 사명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유일하게 인정해 주 
는 그리스도의 직능인 것이다. 


  2. 제사장직(祭司長職) 
  구약은 오실 구속주가 제사장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예시했다(시 110:4; 슥 
6:13;  사 53:). 신약에서는 그를 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 
은 히브리서이다.   거기에는 여러 번 반복적으로   이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히 3:1, 4:14, 5:5, 6:20,  7:26,  8:1). 그러나  다른 저서들도  그의 제사 
장적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다(막  10:45;   요 1:29; 롬  3:24,25; 고전 
5:7; 요일 2:2; 벧전 2:24,  3:18). 예언자는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하지만 제사장은 백성을 하나님   앞에 나타내는 일을 한다. 이  둘 다 
선생이었으나 예언자는 도덕적인 것을 가르친데 반해 제사장은  예법(제사법) 
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특권을 가졌으며,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특권을  가졌다.  우리는 히브리서 
5:1,3에서 제사장이  백성 중에서 그들의 대표로 뽑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백성의 유익을 위해  활동하며,  속죄를 위하여 제물과 희생을 드린다는 것과 
또 백성을 위해 중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⑴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역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보다 사죄를  위한 희생을 
드리는 것이라고 하겠다.  구약의  희생은 다가올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을 
예시해 주는  형태였다(히  9:23,24, 10:1,  13:11,12).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요, "유월절  양"(고전 5:7)이라 불리워 
진다. 신약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사역에  대해 분명히 말해주 
고 있다(막   10:45; 요  1:29;   롬 3:24,25, 5:6-8;   고전 5:7,  15:3; 갈 
1:4; 엡 5:2; 벧전 2:24, 3:18;  요일 2:2, 4:10; 계 5:12). 이는  특히 히브 
리서에    잘    나타나    있다(히   5:1-10,    7:1-28,    9:11-15,24-28, 
10:11-14,19-22, 12:24, 13:12). 


  ⑵ 그리스도의 중재(仲裁)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죄를 위한 큰  희생을 드릴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 
을  위해 중재의 역할을  하기도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요  14:16에서 함축 
적으로 우리의  보혜사(保惠師;           ; parakletos)라고 불리워졌다. 그 
리고 요일 2:2에 나타난  이 용어는 분명히  돕기 위해 부름받은  자, 타인의 
소송을  변호하는 자를 의미한다.   신약(롬 8:34; 히 7:25, 9:24; 요일 2:1) 
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은 그의 희 
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가끔 잘못 생각되는 것 처럼  중보적 기도에 
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희생을  드림으로 자기 백성을 
위한 신령한 축복을 요구하며,   사단과 율법과 양심의 고소로부터 이런 신령 
한 축복을  보호하며, 이들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용서해 줄 
것을 확증하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들의 예배와 봉사를 하나님께  바 
친다. 이러한 중보적 역할은  성질상 국한된 것으로 선택받은 자에게만  관계 
되어 있다. 이미 믿었든지 아직 불신앙 속에  살든지간에 선택받은 모든 자를 
포함한다는 것이다(요 17:9,20). 


  3. 왕직(王職)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함 
께  참여하신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중재인으로서 그리스도가 부여받으신 
왕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왕권은 교회를 향한 영적 왕 
권과 우주를 향한  왕권의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⑴ 영적 왕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에 대해  말한 바 있다(시  2:6, 132:11; 사 9:6,7; 
미 5:2;  슥 6:13; 눅  1:33, 19:38;  요 18:36,37; 행 2:30-36). 그리스도의 
왕권은 자기 백성을  향한 그의 통치인 것이다. 그것은 영적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그의  왕권이 영적 영역에 속한 것이며, 신자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서 이루어지며, 죄인을  구원하려는 영적 목적을 가지며, 영적 수단인 말씀과 
성령에 의해 실시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의 모임과  교회를 통치하심과  교회를 보호하심과 
교회를 완성하심에  이바지한다. 이  왕권은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와 동일한 것을 뜻한다. 엄밀한  의미로 보면 무형(보이지 않 
는) 교회의 회원인 신자들만이  그 나라의 시민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란  말은 가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사는 모든 자 
즉,  유형(보이는)  교회에 거하는   모든  자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 
용된다(마  13:24-30, 47-50). 한편 이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마음과 생활 속 
에 있는 현재적이고   영적인 실존(마 12:28; 눅  17:21; 골 1:13)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재림 때까지   실현되지  않을 미래적  소망인 것이다(마 
7:21;  눅 22:29; 고전 15:50;  딤후 4:18; 벧후 1:11).  미래의 왕국은 본질 
상 하나님의 지배가 인간의 마음  속에서  확립되며, 인정되는 것으로서 현재 
의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미래의 왕국이 유형적이며 완전하게 
될 것이라는 면에서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그의  재림으로 끝날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영원히 지 
속될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준다(시 45:6,   72:17, 89:36,37;  사 9:6; 
단 2:44;  삼하 7:13;  눅 1:33;  벧후 1:11). 


  ⑵ 우주적 왕권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말씀하셨다.   고전 15:27과 엡 1:20-22에서도 
이와같은 진리를  가르쳐 준다.  우주적 왕권은  하나님의 아들되신 그리스도 
의 원래의 왕권과는 그 미치는   영역이 동일하지만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이 
러한 왕권은 그의 교회를  위하여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 맡겨진 우주를  다 
스리는 권한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로서,   개인과 국민의 운명을 
다스리시며, 세상의 생활을 지배하시며, 이 왕권을  그의 구속적 목적에 이바 
지하게 하시며, 그 왕권을 통하여  세상에서 일어나는  위험으로부터 그의 교 
회를 보호하신다. 이  왕권은 하나님 나라의 대적들을  물리칠 때까지 지속될 
것이며, 그  목적이 성취되면 우주적 왕권은  성부에게로 반환될 것이다(고전 
15:24-28). 


  17.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   중에서 좀 더 생각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구속 진리이다. 


  1. 속죄의 동인(動因)과 필연성 
  속죄의 원인은 마치 그것이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동정에 있는 것 같이 
자주  묘사되는  때가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죄인의 
멸망에 골똘하신  분이시지만, 사랑의 그리스도께서는 그 중간에 서시어 죄인 
을 구원하신다고  말하며, 그리스도는 모든  영광을 받으나, 성부께서는 그의 
명예를 훼손당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속죄가  그 원인 
을 하나님의 참된  기쁨 속에서  찾는다고 가르쳐  준다(사 53:10; 눅  2:14; 
엡 1:6-9; 골   1:19,20). 속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즉,  사랑은 죄인들에게 피할  길을 제공해 주었고, 
공의는 율법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요 3:16; 롬 3:24,26). 
어떤  학자들은 속죄의  필연성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은 어떤  만족을 얻음이 
없이도 죄인을   용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할 수   없으시므로 이에 대해  반응을 일으키신다고 가 
르친다(출 20:5,  23:7; 시 5:5,6;  나 1:2;  롬 1:28,32). 그뿐 아니라 하나 
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셨던 것이다(창  3:3; 롬 6:23). 


  2. 속죄의 성질 
  다음의 특성에 주의해야 한다. 
  ⑴ 속죄는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었다 
  속죄는 주로 죄인을 감화하여 그의  마음에 회개를 불러  일으키므로, 죄인 
을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공헌했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 
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범죄자에게 
가 아니라 해를  당한 편이  보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속죄의 제 1 
차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죄인에게 화해시키는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 
나님께 대한 죄인의 화해는 제 2차적  목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⑵ 속죄는 대리적 속죄였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개인적 속죄를 요구하셨지만,  죄인들은 그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인간의 
대리자로 세워 사람을 대신해야   한다고 작정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 
스도께서는 우리의  대리자로서 죄의 형벌을 짊어지시고 인간을  위해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  속죄를 대리적 속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범죄를  당한 편에서  속죄를 위한 준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레 
1:4, 4:20,31,35, 5:10,16, 6:7, 17:11). 우리는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 위에 
놓였으며(사 53:6), 그가  죄를 짊어지셨고(요 1:29; 히  9:28), 죄인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셨다(막 10:45; 갈 1:4; 벧전 3:18)는 것을 알 수 있다. 
  ⑶ 속죄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이며 피동적인 순종을 포함한다그리스도의 속 
죄는 이중적  순종으로 구별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그가 영생을 얻게할 조건으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신데 있다. 그리 
스도의 피동적 순종은  그가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그의 백성의 빚을 탕 
감하므로써  고난을  당하신 데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둘로 구별하긴 
하지만 이들을 결코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고난 당하심 
에 있어서도 능동적이셨고,  율법을 복종하심에 있어서도 피동적이셨다. 성경 
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형벌을 담당하셨고(사  53:8; 롬 4:25; 
갈 3:13; 벧전  2:24), 죄인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공을 세워 놓으셨던 
것이다(롬 8:4, 10:4; 고후 5:21; 갈 4:4-7). 


  3. 속죄의 범위(範圍) 
  모든 교파 중 로마  천주교와 루터파와 알미니안파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   말은 그들의 견해대로 모든 인간 
이 구원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예외없이 구원하기  위해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 
다. 그러므로 그들은  의도된 취지가 성취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께서는 모든 사람을 실제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다만 구원할 가능성만을 
확립해 놓으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들의 실제적  구원은  그들 자신의 
선택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개혁파 교회는 제한 속죄를 믿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택받은  자만을 
구원할 목적으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으며, 그 목적은  실제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가능케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생명을 버려 주 
신 모든 자 하나 하나를  실제로 구원하신다(눅 19:10; 롬 5:10;  고후 5:21; 
갈 1:4; 엡 1:7).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생명을  버리셨다 
(마 1:21)고  말한다. 즉, 그의  양무리(요  10:11,15)와  교회(행 20:28; 엡 
5:25-27)    곧  선택받은  자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다고    지적한다(롬 
8:32-35). 


  성경은 가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요 1:29; 요일 2:2, 4:14) 또는 
모든  자를 위하여(딤전 2:6; 딛 2:11; 히 2:9) 죽으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그가   세상 모든 민족(유대 민족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의  백성을 위하여, 또는  모든 종류와 모든 계급(특수 
계급이 아니라 어떤  계급의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을 강조)의 백성 
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8. 성령의 일반적 작용(일반은총;一般恩寵)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사역에 관한 고찰  다음에는 자연히 성령 
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  죄인들의 심령과 생활에 적용되는 구속 진리에 대한 
논제가 따르게 된다. 


  1. 일반 은총(一般恩寵)의 성질(性質) 
  우리는 일반 은총에 대해 말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①일반 은총이란 마음을   갱신시키지는 않지만, 인간에게 성령으로 말미암 
아 죄를  제재하고, 사회생활에서  질서를 유지하며 시민의 의를 증진시켜 주 
므로  도덕적 감화를 불러 일으키는 성령의 일반적 작용이다. 


  ②일반 은총이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선하게 보여지는 분량대로 모든  인 
간에게 차별없이 나누어 주시는 일반적 축복이다. 
  알미니안파는 달리,  우리는 일반 은총이 죄인으로  하여금 영적 선을 행하 
게  하거나  믿음과 회개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갖는다. 
일반 은총은  인간에 의해 거절될  수 있으며  항상 다소 거절되는데, 기껏해 
야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인  생활의 외면에만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가 
택함 받은 자만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 
와 유기된 자를 포함한 전 인류는 그의  죽음에서 큰 유익을 얻는다. 일반 은 
총의 축복은 그리스도 사역의 간접적인 결과로 간주할 수 있다. 


  2. 일반 은총의 방법(方法)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법이 있으니, 


  ⑴ 일반계시의 빛 
  이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빛이다. 이 일반계시의 
빛을 떠나서는 모든 다른 방법은  불가능하며 헛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 
에게 비추이며  자연인의 양심을 지도한다. 


  ⑵ 정치(政治) 
  인간의 정치는 이 목적에 종사한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 따르면  정치는 
악한 경향을 억제하고, 선한 질서와 예절을 촉진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⑶ 여론(與論) 
  여론은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되는 곳에서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것은 여론 판단에 민감한 사람들의 행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⑷ 신적 형벌과 보상 
  신적 형벌과 보상도 세상에서   도덕적 선을 권장한다. 형벌은 흔히 인간의 
범행을  막으며, 보상은 인간에게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도록 격려한다. 


  3. 일반 은총의 효과(效果) 
  다음의 결과는 일반 은총의 작용에 기인된 것일 것이다. 
  ⑴ 형(刑)의 집행유예(執行猶豫) 
  인간에게 사형의 집행은  연기된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사형을 완전히 집행 
하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시지 않고  인간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신다 
(롬 2:4; 벧후 3:9). 


  ⑵ 죄에 대한 제재 
  죄는 개인과 민족들의  생활에서 억제시된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생활에 들 
어온  부패성이 지연되고  있으며 아직은  그 파괴적  활동을 수행하도록  허 
용되어 있지  않다(창 20:6, 31:7; 욥 1:12, 2:6). 


  ⑶ 진리, 도덕, 종교에 대한 의식(意識) 
  인간은 아직도 진리, 선,  미에  대한 의식을 가지며, 어느 정도 이것을 인 
정하며,    진리와 도덕과  종교의  어떤  형태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다(롬 
2:14,15; 행 17:22). 


  ⑷ 세상적 의(義) 
  자연인은 자연적 선 또는  시민의 의 즉, 영적 가치는 결여되었지만 하나님 
의   율법과 외부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일을  행할 수  있다(왕하 10:29,30, 
12:2, 14:3; 눅 6:33). 


  ⑸ 자연적 축복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수 많은    과분한   축복을  받는다(시 
145:9,15,16;  마 5:44,45; 눅 6:35,36; 행 14:16,17; 딤전 4:10). 


  19. 부르심(召命)과 중생(重生) 


  1. 부르심(召命; Calling) 
  일반적으로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 
공된  구원을 받도록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 
을 것이다. 이  부르심은 외적이며 또는 내적인 것이다. 


  ⑴ 외적 부르심 
  성경은 다음의 성구들에서 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마 28:19, 22:14; 눅 
14:16-24; 행 13:46; 살후 1:8; 요일 5:10). 
  외적 부리심이란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하는  열망적인 권고로서,  죄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시하고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정의로 보아 외적 부르심은 
다음의  3가지 요소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복음적 사실과 복음적 개념의 제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하는 초청 
  ㉢용서와 구원의 약속 
  그 약속은 조건적이며 그 약속의 성취는 진정한 믿음과 회개의  방법에서만 
기대될 수 있다. 


  ①우주적 부르심 
  외적 부름은 그 부름이  복음을 듣는 모든 자에게 온다는 의미로 볼 때  우 
주적이라할 수 있다. 그 부름은 어떤 시대나 어떤 국민이나 어떤 계급이나 어 
떤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택할  자 뿐만  아니라 유기된 자에게도  온 
다(사 45:22,  55:1; 겔 3:19;  욜 2:32; 마 22:2-8,14; 계 22:17). 


  ②진정한 부르심 
  자연적으로 이  부름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서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좋은  믿음 가운데로 부르시며, 그들이 그  부르 
심의 초청을 받아들이기를 열망하시며,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신실하게 
영생을  약속하신다(민 23:19;   시  81:13-16; 잠  1:24; 사  1:18-20;   겔 
18:23,32, 33:11; 마 23:37; 딤후  2:13). 외적  부르심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향한  요구를 계속 하신다. 만일 인간이 그 부름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인 
간은 하나님의  요구를 멸시하는 것이므로  그의 죄가 증가된다. 또  외적 부 
르심이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국민들로부터 택한 자를 모으시기 위하여 정 
하신  방법인데(롬  10:14-17),  비록 죄인들이 이  부름을  욕되게 하더라도 
하여간 죄인을   위한  하나의 축복으로   간주되어야 한다(사   1:18-20; 겔 
3:18,19; 암  8:11; 마  11:20-24, 23:37). 끝으로  이 부르심은 또한 죄인을 
정죄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공의로우시다고 한다. 만일  죄인들이 구원의 제 
공을  멸시한다면   그들의 죄는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요  5:39,40; 롬 
3:5,6,19). 


  ⑵ 내적 부르심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두  가지 면으로 구별했는데 이  내적 부르 
심이 진정한 부르심이다. 이  내적 부르심이란 성령의 역사로  외적 부르심을 
효과있게 만드는  것이다. 내적 부르심은 항상  성령의 역사에 의해 구원적으 
로 적용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들에게 이른다(고전 1:23,24). 외적 
부르심과는 달리, 이  내적  부르심은 구원을 유효하게 하는 능력있는 부르심 
이다(행  13:48; 고전 1:23,24).  이뿐 아니라 이  부르심은 후회없는 부르심 
이며(롬  11:29), 결코 변경되지 않으며 취소되지 않는  부르심이다. 이 내적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분명히 구원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그 말씀의 권위를 유효케 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제공된 지력(知力)에  호소하므로, 인간은 그것을 의식 
한다. 그리고 내적   부르심은 항상 일정한  목적에로 인도되며, 그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이룩하게 하는 부르심이며(고전  1:9), 축복을 누 
리게 함이며(벧전 3:9), 자유를  위함이며(갈 5:13), 화평하기 위함이며(고전 
7:15), 거룩함을 위함이며(살전 4:7),   소망을 위함이며(엡 4:4), 영생을 위 
함이며(딤전 6:12),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부르심이다(살전 2:12). 


  2. 중생(Regeneration) 
  하나님의 소명과  중생은 서로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는  중생에 관하여 몇 가지로 생각하려 한다. 


  ⑴ 중생의 본질 
  중생이란 말은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신앙고백서 
는  여기에다 회심을 포함시켜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오늘날에는 보다 협의 
의  의미를 갖는다. 엄밀한 의미로 중생이란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 속에 뿌 
리시고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性向)을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 
의할 수 있다. 앞의 정의에 덧붙여  좀더  이해하기 쉬운  의미로 말하면, 중 
생이란 생명의   원리와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에   있어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화이므로, 그  인간   전인격(全人格)에 영향을  미친다(고전   2:14; 고후 
4:6; 빌 2:13; 벧전 1:8). 


  중생은 순간적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성화와 같이 점진적인 과정이  아 
닌 것이다. 우리는 중생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다(요일  3:14). 그 
러므로 중생은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는 파악되지  않으나 그 결과에 따라 
알려질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된 사역인 것이다. 


  ⑵ 중생케 하시는 분 
  하나님이 중생의   주체자가 되신다.   성경은 중생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해준다(요 1:13, 3:5,8; 행  16:14). 우리는 알미니안파와는 반대로 중생이 
전혀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독자적인 역사라고 본다. 중생의 
사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작용이란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엄밀할 
의미에서 중생은 새 생명을 심는  것으로서,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역 
사라고 말할 수  있다. 중생은 복음의 사역이  도구로서 사용될 수 없는 것으 
로 보므로, 하나의  독창적인 사역인 것이다. 약 1:18;   벧전 1:23은 설교의 
말씀이 중생에 있어 도구로서 사용되어진다고 증거하지만, 이  구절들은 신생 
(新生)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서의  중생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다. 중생은 
보다 총괄적 의미로 볼 때 확실히 말씀의 방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⑶ 중생의 필요성과  구원 차서에 있어서의 그  위치성경은  분명히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해   명확히 말해준다(요   3:3,5,7;   고전  2:14; 갈 
6:15). 


  중생의 필요성은, 인간은 본래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이므로  하나님의 은총 
을 기뻐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기기 위하여 새로운 영적 생명을 부여 받아 
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소명과 중생 중에 어느 것 
이 먼저 일어나느냐는  문제인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는  성인의 경우 
에는 외적 부르심이 항상 선행하지만,  엄밀한 의미로서는 중생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새 생명을 심는  것이라 할 수 있는  중생은 내적 부르심보다 
는 앞서며,  외적 부르심은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 또는 신생보다  앞선다. 
  우리는 이  순서의 지시를  루디아의 전환에서  찾아볼 수 있다(행 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외적  부르심),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엄밀한 의미에서의 중생) 바 
울의  말을 청종하게 한지라(내적 부르심)." 
  20. 회심(回心)과 믿음 


  중생에서 이룩된  변화가 의식적인 생활 가운데서  나타나기 시작할 때, 이 
를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른다. 


  1. 회심에 대한 일반적 고찰 
  성경은 회심에 대해 항상   동일한 의미로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회심이란 중생받은 자로 하여금 그들의 의식적 생활 가운데서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 
다. 이 정의를  통해  보면 하나님이 회심의 창시자이심을  알 수 있고, 이에 
대해 성경(행 11:18; 딤후  2:25)은  명백히 증거해 주고 있다. 중생은 새 생 
활의 의식적인 변화를 통하여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통하여서만 일어나는  것이다(요  6:44; 비 2:13).  그러나 중생에 있 
어서는 하나님만 역사하시고 인간은  피동적인데 반하여 회심에  있어서는 인 
간은 협동하도록 요청을 받는다(사   55:7; 렘 18:11; 행 2:38, 17:30). 그러 
나 그런  경우에 인간은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행하는 것 뿐이다. 
회심은 중생과  같이 순간적인 변화이지, 성화와 같은  점차적인 과정이 아니 
다. 그러나 중생과는 달리   회심은 인간의 무의식적 생활에서 일어난다기 보 
다는 오히려 의식적인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변화인 것이다. 회심은 모든 
성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겔 33:11;   마 18:3), 그렇다고 회심이 반 
드시 각 사람의 생활에서 현저한 전환점으로 나타나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나아만(왕하  5:15),  므낫세(대하 33:12,13),  삭개오(눅 19:8,9), 
구스  내시(행 8:30 이하),  고넬료(행 10:44 이하), 바울(행  9:5 이하), 루 
디아(행 16:14)  등과 같은 사람의  회심을  예로 들어 말해준다. 이  외에도 
국민적인 회심(욘 3:10),  마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일시적인  회심(마 
13:20,21;   딤전   1:19,20;  딤후   4:10;   히 6:4-6),  반복적인 회심(눅 
22:32;  계  2:5,16,22, 3:3,19)이 있다. 회심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반복을 
인정치 않지만, 이 반복이란 말은 회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소극적인 
요소인 회개와 적극적인 요소인 믿음으로 이루어지며 이에 대한  개별적 고찰 
이 필요하다. 


  2. 회심의 소극적 요소인 회개 
  회개란 과거를 돌아보는  것으로, 죄인의 의식적인 생활 가운데서 죄를  쫓 
아버림으로 일어나는 변화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⑴ 회개의 요소 
  회개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데, 
  ①지적 요소 : 이것은  과거의 생활이 자신의 비행과 추행과 무력함을 수반 
하는  죄의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롬 3:20). 
  ②감정적 요소 : 이것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대항하여  범한 죄를 
슬퍼함이다(고후 7:9,10). 
  ③의지적 요소 : 이것은   목적의 변화에서 일어나는 요소인데, 죄로부터의 
내적인  전환과 죄를 용서받고 씻어 버리고자 하는 성향을 말함이다(롬 2:4). 
회개는 본래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⑵ 로마 천주교의 개념 
  로마 천주교는 회개에 대해   외적 관념을 가지므로, 그들에 따르면 회개는 
선천적  죄에 대하여 슬퍼함이 아니라,  외적 형벌에 대한 공포로부터 일어나 
는 것에 불과한  개인적 범죄에 대하여 슬퍼함이며,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신부에게 말하는 고백이며,  금식  고행(채찍질)과 성지순례 등과  같은 고해 
성사의 외부적 행위에 의한 배상의  표준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성경은 회개를 전적으로  내부적 작용 즉, 죄에 대한 통회하는 
태도로 보므로, 그 결과로 일어나는 생활의 변화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3. 회심의 적극적 요소인 믿음 
  회개와는 달리 믿음은 앞을 내다보는 것이다. 


  ⑴ 믿음의 종류 
  성경은 믿음에 대하여 항상 동일한 의미로 말하지 않는다. 
  ①역사적 믿음 : 성경은   역사적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 신앙은 
아무런  실제적인 도덕적, 영적  반응없이  성경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믿음은 진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행 26:27,28; 약 2:19). 
  ②일시적 믿음 :  성경은 일시적 믿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이 신앙 
은   중생한 자의 마음에는  뿌리박지 못하는 것으로서,  양심의 어떤 자극과 
감정의 흥분으로 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일시 
적이라 칭하는  이유(마 13:20)는  영속적 성질이 없으므로  시련과 핍박시에 
는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히  6:4-6; 딤전 1:19,20; 요일 1:19 비 
교). 
  ③이적적 믿음 :  성경은  또한 이적적인 믿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이  신앙은 이적이  자기에 의하여  또는  자신을 위하여  행해질  수 있다는 
개인적  확신이다(마 8:11-13, 17:20; 막 16:17,18;  요 11:22,40; 행 14:9). 
이 믿음은 구원적 신앙을  수반할 수도 있고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④구원적 믿음 : 성경은  구원적 신앙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구원적 믿음 
의  필연성을 강조한다. 이 신앙은  인간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또한 중 
생한  생명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신앙의 씨는 중생의 밭 
에 뿌리어지고, 점차적으로  능동적 믿음으로 되어진다.  그러므로 구원적 신 
앙이란 성령에   의해 마음 속에 일어나는  복음  진리에 대한 개인적 확신이 
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진실한 신뢰라고 정의할 수 있 
다. 


  ⑵ 믿음의 요소 
  우리는 진정한 구원적 믿음의 요소를 3가지로 구분한다. 
  ①지적 요소(지식) :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된 진리에 대해 적극적인 인 
식 즉,  죄인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진리에 대한 영적 통찰력이 있다. 이 요 
소는  절대적으로 하나의 확실한  지식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이 
지식은 신자에게 복음의  기본적 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개념을 제공하기에 
충분해야 한다. 


  ②감정적 요소(찬동)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이런 요소에 대해 구분해 
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요소가 구원받는 믿음에 관한 지식 속에 실 
제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요소가  그  대상의 중요성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게 해주는 것은   구원받는 지식의 특성인데, 이것을 찬동이라고 한 
다. 


  ③의지적 요소 :  이 요소는 구원받는 믿음의  으뜸가는 요소가 된다. 그것 
은   사죄와 영적 생명의  근원되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 신뢰인데, 이 
신뢰는 그리스도에게 범죄한 영혼의 항복을 포함하는 것이다. 
  마지막 분석에  의하면 구원받는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구원 
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다(요   3:6,18,36,  6:40; 행 
10:43; 롬 3:22; 갈  2:16). 이  신앙은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선물이다(고전  12:8,9; 갈 5:22;   엡 2:8). 그러나 이 신앙의 수행은 하 
나님의 자녀들이 반복적으로   권고받는 인간의 활동인 것이다(롬 10:9; 고전 
2:5; 골 1:23; 딤전 1:5, 6:11). 


  ⑶ 믿음의 확신 
  감리교에서는 믿는 자는 곧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하 
지만, 이것은 그가 궁극적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다. 왜냐하면  그가 은혜에서 떨어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올바른 견해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포함하는  진정한 믿 
음이란 자연히 안전과 보호의 의미를  수반하는 것이다. 이 확신은 신자의 영 
구한 의식적 소유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충실한 신앙생활을 영위 
하는 것이 아니므로, 항상 영적  부함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회의와 
불안정에 의해 동요될는지도 모르므로,   확신을 얻도록 권고를  받는다(고후 
13:5; 히 6:11; 벧후   1:10; 요일 3:19). 이 확신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명상함으로써,  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진전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21. 칭의(稱義) 


  1. 칭의의 성질과 요소 


  ⑴ 칭의의 성질 
  칭의(Justification)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죄인을 의 
롭다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칭의는 중생이나 
회심이나 성화와  같이 갱신(更新)의  행위나 갱신의 과정이 아니므로,  죄인 
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신분에  영향을 준다. 칭의는 
몇  가지 특별한 점에서 성화와 차이가  있다. 칭의는 죄인 밖에서  즉, 하나 
님의 법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죄책을 제거해  주며, 단번에 영원히 완성 
되는  행위인데 반하여, 성화는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죄의 오 
염을 제거해 주며 게속적으로 일생을 걸쳐 행해지는 과정이다. 
  ⑵ 칭의의 요소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 두 가지 요소를 구별한다. 


  ①소극적 요소(에수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죄의 용서)칭의에서 허락된 바 
그  용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반복을 인정치 
않는다(시 103:12; 사 44:22; 롬 5:21, 8:1,32-34; 히 10:14).  이 말은 우리 
가 죄의 용서를 위해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 
니다.  왜냐하면  죄책의 인식이  그대로  남아있어, 용서받지 못했다는 감정 
(분리된 감정)을  조장시키므로, 사죄의 확신에 대한 위안을 반복적으로 요청 
할 필요가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시 25:7, 32:5, 51:1; 마 6:2; 약 5:15; 요 
일 1:9). 


  ②적극적 요소(하나님의 자녀로서 양자됨) 
  칭의로 인해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 즉, 하나님께서 
는  신자들을 자녀의 위치에 두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상속권은 물론 자녀의 
모든 권세를  부여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롬 8:17; 벧전 1:4). 신자들의 이러 
한 법적 아들됨은  중생과 성화를 통한 도덕적 아들됨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 둘  다 다음의  성구에서 잘  나타나  있다(요  1:12,13; 롬  8:15,16; 갈 
4:5,6). 


  2. 칭의의 시간 
  칭의란 용어는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떤 학자 
들은 사중적(四重的) 칭의 즉,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칭의, 믿음에  의한 칭의, 마지막 심판에서의 공적 칭의를 말한다. 


  ⑴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관념적인 의미로 이 칭의를 설명해  보면, 그리스도의 의는  구속의 뜻으로 
신자들에게 이미 설명된  것이므로 영원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르 
나, 이 설명은  죄인의 칭의에 대한 성경적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 가운데서 작정된  것과 역사의 과정에서 실현되는 결과를 구별해야 
만 한다. 


  ⑵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칭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칭의에 대한 말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의 
미에서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칭의였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 
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칭의는 보편적이고 
순수한 객관적인 처사이므로,  이것이 죄인에 대한 개인적 칭의와 혼동되어서 
는 안된다. 


  ⑶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진정한 칭의 교리) 
  성경은 죄인의 칭의에 대해 말할 때,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관 
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전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 
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일상적으로 표현한다. 
  이 말은  칭의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얻어지는 것이라 
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칭의의 도구요,  칭의가 전 
용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에게 적용하는데, 이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믿음은 그 믿음이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한(롬 4:5; 갈 2:16) 의로 여겨진 
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 의나 자신의 믿음에  근거해 
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로마 천주교와 알미나안파의 잘못을 경계해 
야 한다. 인간  자신의 의나 믿음은 인간의 칭의에 근거해서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인간 자신의 의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롬 3:24,  10:4; 고후 5:21;  빌 3:9). 


  3. 칭의 교리에 대한 반대 
  이 교리에 대한 몇 가지 반대설이 대두된다. 


  ①어떤 학자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인간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칭의는 그것이 내 
포하고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인 것이다. 그리스도 
의 선물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심과,  하나님이 죄인 
을 의롭다 칭하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은혜인 것이다. 


  ②또 어떤 학자는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무가치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들이 자신들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시지 않으시고, 죄인들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게 되었다고 선언하신다. 


  ③마지막으로 어떤 학자들은 칭의   교리가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의 도덕적 
생활을  무관심하게 만들기 쉽다고   주장한다. 만일 죄인들이 행위와는 상관 
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면, 왜 죄인들이   개인적 경건에 마음을 써야만  하 
는가? 그러나 칭의는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기초하므로 이것은 
진정한 경건 생활을 위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 그리스도와 실제로 생명력 있 
는 연합을 이룩한 자는 도덕적인 면에서 무관심할리 없다. 


  22. 성화(聖化)와 성도(聖徒)의 견인(堅忍) 


  칭의의 교리 다음에는 자연히 성화의  교리가 따르게 된다.  칭의의 상태는 
하나님에게 헌신된 성화의 생활을 요청하고 있다. 


  1. 성화의 본질과 특성 
  성화(聖化)란  죄인을 순결케  하시며, 죄인의  전성질(全性質)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며, 죄인으로 하여금  선행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 
령의 계속적이고  은혜로우신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화는 인간의 내 
부생활에서  일어난다는 면에서 볼  때, 칭의와 다르다.  성화는 법적 행위가 
아니라 재창조적(원기를 북돋우는)  행위이며, 대체로 장기적 과정이며, 현세 
생활에서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성화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초 
자연적인 사역이지만  신자는 하나님이  그의 뜻대로 정해 주신  수단을 부지 
런히 사용함으로  성화에  있어 하나님과  상호 협력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후 7:1; 골 3:5-14;  벧전 1:22). 성화란 중생에서 이미  주어진 
것들로부터 단순히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새 생활에 힘을 북돋우며, 증진시 
키며  견고케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화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인간성의 오염과  타락의  점진적 제거이며(롬 6:6;  갈 5:24),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하는 새 생활의  점진적인  발전(롬 6:4,5;  골 
2:12, 3:1,2; 갈   2:19)이다. 성화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자연히 
전생애(全生涯)에 영향을 준다(롬  6:12;  고전 6:15,20;  살전 5:23).  내적 
인간의 변화는 외적 생활에 있어서의  변화를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인간이 
성화작용에서 상호 협력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악과 유혹에 대한 반복적인  경 
고(롬 12:9,16,17; 고전 6:9,10;  갈  5:16-23)와  거룩한 삶을 위한  끊임없 
는 권고(미 6:8;  요 15:4-7;  롬 8:12,13, 12:1,2; 갈 6:7,8,15)에서부터 오 
는 것이다. 


  2. 현세에 있어서의 성화의 불완전성 
  성화가 인간의 각 부분에  영향을 주지만, 신자의 영적 성장은 현세에서 불 
완전한  채로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신자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죄와 
더불어 투쟁해야만  한다(왕상 8:46;  잠 20:9; 약 3:2, 요일 1:8). 신자들의 
생활은 육과  영 사이의 항구적인 투쟁의 생활인데, 심지어 가장  잘 믿는 자 
라도 아직도 죄를 고백해야 하며(욥   9:3,20; 시 32:5, 130:3; 잠 20:9;  사 
64:6; 단 9:7;  롬 7:14; 요일 1:9), 죄를 용서받기   위해 기도해야 하며(시 
51:1,2; 단 9:16;  마 6:12,13;  약 5:15), 보다 더 완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롬 7:7-26;   갈 5:17; 빌  3:12-14).  이  진리는 소위 완전주의자들에 
의해 부인되는데, 그들은  인간이 현세에서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다.  또 그들은 성경이  성도들에게 완전하게 되기를 명령하며(마 5:48; 벧전 
1:16;  약   1:4), 어떤  사람을 완전하다고  말하며(창 6:9;  욥  1:8; 왕상 
15:14; 빌 3:15),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언급한 사실(요 
일 3:6,8,9, 5:18)에 근거해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하기 위해 노력해 
야만 한다는 사실은 어떤 인간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 
다. 그뿐 아니라 "완전"이란 말은 항상 죄에서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 
다. 노아와 욥과  아사는  완전한 자라고 불리워졌지만,  역사는 그들이 죄가 
없지는  않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해 준다. 또  요한은 분명히 새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과  신자는 죄 가운데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요한 자신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 
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해준다(요일 1:8). 


  3. 성화와 선행 
  성화는 자연히 선행의 생활로 인도한다.  이러한 선행의 생활은  성화의 열 
매라고 부를 수 있다. 선행은 완전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원 
리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원리에서 솟아  나오는   행위(마  7:17,18, 
21:33,35; 히 11:6)이며,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의식적으로 순종함으로써 행 
해지는 행위(신 6:2; 삼상 15:22;   약 2:8)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그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행위(고전 10:31;  골  3:17,23)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선행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중생된 자들만이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비 
중생된  자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는  것을 의미(참고;  왕하 10:29,30, 
12:2, 14:3; 눅 6:33; 롬  2:14)하는 것은 아니다. 비중생된 자라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따라 외적으로 율법에  맞는 행위를 할  수 있으며 훌륭한 목적 
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언제나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영적 뿌리로부터 분리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진정한 내적  순종을 나타내지  못하며, 하나님의 영광 
을 목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마 천주교와는  반대로, 신자의 선행에 대하 
여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를 상으로 주시기로 약속하시긴   했지만, 그것이 
공로가 되지 못한다는(눅 17:9,10; 엡 2:8-10; 딛 3:5) 사실을 우리는 주장해 
야  하며, 율법폐기론자들을 반대해서는  선행의 필요성을  주장해야 한다(골 
1:10;  딤후 2:21;  딛 2:14; 히 10:24). 


  4. 성도의 견인(堅忍) 
  "성도의 견인"이란 표현은 자연히  신자들이 구원의 길에서 인내하는  계속 
적인 활동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여기의 견인이란 신자의  활 
동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역인데 신자들도 이   활동에 참가해야만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구원에  대한 확실은 하나님이 인내하신다는 사실에 근 
거한다. 


  그러므로 "견인 은혜"란 심중에  일어나는 신적 은혜가 계속되고  완성되도 
록 역사하는 바, 신자 내부에서의 성령의  계속적인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 
다. 성경(요  10:28,29; 롬 11:29; 빌 1:6; 살후 3:3; 딤후 1:12, 4:18)은 분 
명히 이 교리에 대해  가르쳐 준다.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견인   은혜를 믿을  때 뿐이다(히 3:14, 
6:11, 10:22; 벧후 1:10). 


  이 교리는 개혁주의 노선 외에서는  찬성을 받지 못한다. 이 교리는 배교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히  2:1, 10:26)과 신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계속 유지하 
도록 권고하는  말씀(마 24:13; 골  1:23; 히 3:14)과 심지어는  배교의 경우 
를 기록한 말씀(딤전  1:19,20; 딤후 2:17,18, 4:10)과 모순된다고  한다. 그 
러한 경고와 권고는 타락할 가능성을   가정하는 것 같으며,  또 배교의 실례 
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증명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그 경고와 권 
고는 다만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역사하시며,  인간에게  견인 은혜의 사역에 
협력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언급된  배교 
자는 참 신자들이었다는 증거가 없다(참조; 롬 9:6; 요일 2:19; 계 3:1). 


  23. 교회의 성질(性質) 


  1. 교회에 대한 일반적 고찰 
  교회에 관해 구약에 주로 사용된 용어는 "부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 
된 것이며, 신약의  용어는 "불러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것이다. 이 
두 명칭은 모두가  교회를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은 회중"으로 표현한다. 


  ⑴ 신약용어의 다양한 의미 
  대개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예배를  목적하고  모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지교회(支敎會)를 의미한다(행 5:11,  11:26;  롬 16:4;  고전 11:18, 16:1). 
때때로  이  용어는   가정적인  교회,  곧  집에  있는 교회를  의미한다(롬 
16:5,23; 고전 16:19; 골  4:15).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이 말은  하늘에서나 
지상에서나를 불문하고, 믿는  자의 모든 무리를   표현하는 것이다(엡 1:22, 
3:10,21, 5:23; 골 1:18,24). 


  ⑵ 교회의 본질 
  로마 천주교와 신교는 교회의   본질적인 성질에 관한 견해에 차이가 있다. 
구교는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과 같은 고위 성직자와 함께 주로 사제들 
로 구성되고  있는 외부적이고 유형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그 본질을 찾 
는다. 신교는  이러한 외적인 관념을 깨고 성도들의 무형적이고  영적인 교통 
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는다. 교회는 그   본질적인 성질에서 볼 때 모든 시대 
의 성도들 외에는 아무도 포함하지  않는다.  교회는 불신자로서는 참가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지체(肢體)인 것이다. 


  ⑶ 교회의 구별 
  ①투쟁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지상에 현존하는 교회는 거룩한 투쟁을 하는 것이므로 투쟁적 혹은  전투적 
교회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천상의   교회는 세상의 창검 대신에 승리의 종려 
나무로 대치되므로  승리적 교회라 할 수 있다. 
  ②유형교회와 무형교회 
  이 구별은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 적용되는 것인데, 이 교회가 영적 성질 
에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는 무형적이므로, 누구는 교회에 속하고 누구는  속 
하지 않는가를 분명히  결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교회가 교인들의 
신앙고백과 행위 면에서,  말씀과  성례의 사역 면에서, 또 교회의 외적 조직 
과 정치 면에서는 유형적인 것이다. 
  ③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이 구별은 유형적  교회에만 적용된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 
면에서와 세상에 대한 공동적인  반항에서 유형적이며, 또 조직체로서의 교회 
는  직무와 형체 면에서 유형적이다. 


  ⑷ 교회의 정의 
  무형적 교회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름받아 택함받은 자의 영적 무 
리라고  할 수 있으며, 또는 단순히  성도들의 영적 회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 
다. 유형적 교회란  참 신앙을 어린아이와 같이 고백하는 자들의 단체라고 정 
의할 수  있다. 우리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회원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 교회의 속성(屬性)과 표지(標識) 
  교회에는 세 가지 속성이 있으며, 세 가지 표지 또는 외적 특성이 있다. 


  ⑴ 교회의 속성 
  다음과 같은 3가지 속성이 있다. 
  ①교회의 통일성 
  로마 천주교의 주장을 따르면, 이  속성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조직체로서 
의 통일성을 의미하는데, 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통일성을 의미 
한다. 
  ②교회의 거룩성 
  로마 천주교는 교회의 거룩성을 교회의  교리, 도덕적 교훈,  예배, 권징의 
거룩성에서 찾으려 하는데 반하여,  프로테스탄트는 완전한 성결로 이끄는 새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원리 면에서 거룩한 그러한 
교회의 회원들 가운데 둔다. 
  ③교회의 보편성 
  로마 천주교는  특별히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구교가 전 
지구상에 퍼져 있으며, 모든 종파들의 총수보다 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기  때 
문이라고 한다. 반면에 신교는  무형적 교회를 진정한 보편적 교회로 보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 
다. 


  ⑵ 교회의 표지 혹은 외적 특성 
  교회의 속성이 본래 무형교회에 속하는데 반하여, 교회의 표지는  유형교회 
에 속하며, 참 교회를 구별해 내는데는 3가지 특성이 있다. 
  ①말씀의 바른 실행 
  말씀의 바른 실행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요일 4:1-3; 요이 9). 
이 말은  말씀 전파가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순수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파가  기독교의 근본에 있어서  참되어야 하며, 믿음과 
행위에 지배적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②성례의 바른 집행 
  로마 천주교와  같이 성례가 말씀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성례는 신적 제 
도에  따라서,  합법적 성직자들에  의해 성도들과  그의 자손들에게만  집행 
되어야 할  것이다(마 28:19; 막 16:16; 행 2:42; 고전 11:23-30). 
  ③권징의 바른 시행 
  이것은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성례의 거룩성을 보호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마 18:18; 고전 5:1-5,13, 14:33,40; 계 2:14,15,20). 


  24. 교회의 정치(政治)와 권세(權勢)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  되시며,  모든   권위의 근원이  되신다(마 
23:10;  요 13:13; 고전 12:5; 엡  1:20-23, 4:11,12, 5:23,24). 그는 교회를 
다스리시되  강제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말씀과  성령에 의해 다스리신다. 교 
회의 모든 직원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옷입은 자이므로, 그의 말씀의 지배 
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1. 교회의 직원 
  신약에 보면, 교회의 직원은 두 종류로 나타나 있다. 
  ⑴ 특수 직원 
  ①사도 
  교회 직원 중에 가장  중요한 직원은 사도직이다. 엄밀한 의미로 특수 직원 
이란  명칭은 예수님에 의해  직접  택함받은 그 제자와 바울에게만 적용되지 
만, 이 칭호는  사도적 인물들에게도 적용된다(행 14:4,14; 고전 9:5,6; 고후 
8:23; 갈 1:19). 
  사도들은 일정한 특별 자격을   가진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부름 
을  받고(갈 1:1),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으며(고전 9:1), 영감받음을 의 
식했고(고전 2:13),  이적을  행했으며(고후 12:12), 그들의 사역을 행하는데 
충만한 축복을 받았다(고전 9:1). 
  ②선지자 
  또한 신약성경은 선지자들에 대해  말하는데 이들은 교회에 대한 교훈을 말 
하도록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인물들인데, 어떤 때는 미래사를 예고하기도  한 
다(행 11:28, 13:1,2, 15:32; 엡 4:11). 
  ③전도자 
  또 신약성경은 전도자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사도들의  일을 돕 
는 자들이다(행 21:8; 엡 4:11; 딤후 4:5). 


  ⑵ 보통 직원 
  사도행전은 특별히   장로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행  11:30, 14:23, 
15:2,6,22, 16:4,  20:17, 21:18). 그와 병행해서  감독이란 칭호가 사용되는 
데,  이는 동일한 직원을  가리키는 것이다(행 20:17,28; 딤전 3:1, 5:17,19; 
딛 1:5,7; 벧전 5:1,2). 이  두 칭호는 모두 동일 계급의  직원들에게 적용되 
는데, 장로란 칭호는 그들의 나이를 강조한  것이며, 감독은 감시자로서의 직 
무를  강조한 것이다. 장로는 본래 교사가 아니지만  가르치는 직능이 그들의 
직책과 관련이 되어 있다(엡 4:11; 딤전 5:17; 딤후 2:2). 
  딤전 5:17에 보면  어떤  장로는 단순히 치리만  했으나, 다른 어떤 장로는 
가르치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신약(빌  1:1; 딤전 3:8,10,12)은 집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집사직의 제도는 사도행전 6:1-6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일 
반적 견해이다. 


  2. 교회의 회의 
  개혁 교회는 많은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들 서로의 관계는 주의 깊은 
순서에 의해 구분된다. 이 여러   회의는 당회, 노회, 총회를 말하는 것이다. 
당회는 지교회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고, 노회는 일정한 지역 내에 각 지교 
회의 목사 일인과  장로 일인으로 구성되며,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된 같은 
수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⑴ 지교회의 정치 
  지교회의 정치는  전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교인들에 의해 피택된 목사 
와  장로는 교회의 관리를 위한 하나의 당회를 구성한다(행 14:23, 20:17; 딛 
1:5). 장로는  교인들에 의해   선택되나 그들의  권위를 교인(인간)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는 것 
이라고  본다.  모든 지교회는 교회의  사건을  정치하기 위해 충분히 구비된 
하나의 완성적인 교회이다.  그러나  지교회는 공통적  일치점을 근거로 해서 
다른 교회와 관련을 맺으므로 지교회는  완전히 독립될 수가  없다. 교회헌장 
은 지교회의 권리와 이익을 수호하지만 한편으로는 연합된 교회의  공통의 권 
리와 이익을 보장해 준다. 


  ⑵ 주요회의 또는 대회의(大會議) 
  지교회가 교회의 연합성을 보다  잘 이룩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경우, 노회 
나  대회와 같은 대회의가  필요한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는 하나의 대회의적 성질을 말해주는 것이다. 회중의 직접 대표자들은 당 
회를 구성하며 이 회원  중에 일정한 수가 노회의 총대로 파송되며, 또 이 노 
회원 중 일부가 총회의 총대가 된다. 


  교회 회의는 본질상 교회적인   사건들, 곧 교리와 도덕, 교회 정치와 권징 
에 관한  문제들만을  취급한다. 그러나  대회의는, 성질상 소회의(小會議)에 
속하나 어떤  이유에서나 거기서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 또는  성질상 소회 
의의 영역에 속하나 일반  교회에 관계된 사건들까지도 다루게  된다. 그리고 
대회의의 결정은 권고적이라고만 솔직히   선언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권위 
적인 것이다. 


  3. 교회의 권세 
  교회의 권세는 영적이다. 그 이유는  교회의 권세가 성령에  의해 주어지며 
(행 20:28), 성령의 권세의  표명인 동시에(요 20:22,23), 오로지 신자들에게 
만  관계되며(고전 5:12, 13), 영적인 방법으로만  집행되기(고후 10:4) 때문 
이다. 또한 교회의 권세는  대리적인 권세인데, 이 권세는 그리스도에게서 나 
온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시행된다. 이 교회의  권세는 3가지로 나누어 진 
다. 


  ⑴ 교리권(교훈권) : 가르치는 권세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며, 오고오는   세대에 진리를 신실하게 전하고, 불신 
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진리를 보수(保守)하도록(딤전  1:3,4; 딤후 1:13; 딛 
1:9-11) 위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을 세계  모든 민족들 
에게   끊임없이 전파해야   하고(사 3:10,11;  고후 5:20; 딤전  4:13; 딤후 
2:15, 4:2; 딛 2:1-10), 신조와  신앙고백을 작성해야 하며, 장래 사역자들의 
훈련을 위해 준비해야만 한다(딤후 2:2). 


  ⑵ 치리권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교회의  모든 것들이  단정하고 질서있게 
되기를 원하신다(고전 14:33,40).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 일들의 적절 
한  규정을 제공해 주셨고, 그리스도의 법을 실행할 교권을 교회에 주셨다(요 
21:15-17; 행   20:28;  벧전 5:2). 이  교권은 권징의   권한도 포함한다(마 
16:19, 18:18;   요 20:23;  고전 5:2,7,13;   살후 3:14,15; 딤전  1:20; 딛 
3:10). 
  교회 권징의   목적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교인들의 입교와 출교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하는 목적이며,  다른 하나는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의  법에 순종케 함으로써  그들의 영적 교훈을 촉진시키려는 목적이다. 만일 
병든 교인이  있으면, 교회는  먼저 그를 치료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를 실패한다면 절단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는 공적인 범죄가 있으면 
비록 정신적인 고소가 없더라도 치리하여야 하며  개인적 범죄인 경우에는 마 
18:15-18에 언급된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 


  ⑶ 봉사권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전도만 하도록 하실 뿐 아니라 모든  질병들 
을 낫게 하기 위하여 파송하셨다(마 10:1,8; 눅 9:2, 10:9,17). 초대  교인들 
중에는 신유(神癒)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더러 있었다(고전 12:9,10,28,30). 
이러한 특별한  은사는  사도시대가 지난 후로부터는 중단되었다. 그때로부터 
자선의 봉사는 교회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을  돌보게 하는데 크게 국한되었 
다. 주님은 이러한 의무를 암시하신  바 있다(마 26:11; 막 14:7). 초대 교회 
는 유무상통하는 생활을  실천하므로 아무도 생활에   궁핍한 자가 없었다(행 
4:34). 그후 "공궤를  일삼도록" 일곱 집사를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가난 
한 자들에게 식물을 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게 하셨다(행 6:1-6). 그후  집사 
라는 말이 계속  나온다(롬 16:1; 빌 1:1;  딤전 3:8-12). 특별히 신약성경은 
가난한  자를 위하여 물품을 모아 분배해  주는 일을 크게 강조해  주고 있다 
(행 11;29,  20:35; 고전 16:1,2;   고후 8:13-15, 9:1,6,7;  갈 2:10, 6;10; 
엡  4:28; 딤전 5:10,16;  약 1:27, 2:15,16;  요일 3:17). 


  25.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 


  1. 하나님의 말씀 
  로마 천주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을 성례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은혜의 가장 중요한 방편이 되는 것이다. 
  ⑴ 말씀과 성령 
  '은혜의 방편'이란 말은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교 
회가 사용하기로 한 방편의 표명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우리가 '말씀' 
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인격적인 말씀(삼위 중  제 2위)이나 능력있는 창조 
의 말씀(시 33:6)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포함되어 있고 교회에 전 
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특히 언급하는  것이다(벧전 1:25).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므로 은혜의 가장 중요한  방편인  것이다. 
한편 강조할 점은 전파되는 말씀인데,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인간에게 전해 
지는 것이니 즉,  가정에서와  학교에서 대화나 종교적 문학의 방편으로 소개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서만 은혜의  방편의 효 
과가 된다. 그 말씀만은 믿음과 회심을  일으키는데 충족치 않지만 꼭 필요한 
도구인 것이다. 


  한편 성령은 믿음과 회심을  일으킬 수 있긴 하지만, 말씀을 떠나서는 통상 
적인  역사를  하지 않는다. 말씀 전파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⑵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인 두 부분 
  은혜의 방편인 말씀은 두 부분 즉,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된다. 
  ①율법 
  은혜의 방편으로서  율법은 먼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케   하며(롬 
3:20), 율법의 요구에 응하기에 무능력함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 
하는 몽학선생이 되게  하시는 목적이 있다(갈 3:24).  또한 율법은 신자들의 
생활규칙이므로,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준 
다. 


  ②복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바 구원의 방도의 명백한 표시이다. 복 
음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와서 믿고 회개하도록 권고하며, 진정으 
로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금생과 내생에 있어 구원의   모든 축복을 약속해 
준다. 또 복음은 믿는 모든   자를 위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고전 1:18). 


  2. 성례의 일반적 고찰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한 방편으로  완전하다. 그러나 성례는  말씀을 떠 
나서는 완전하지  못하다. 이 말은  로마 천주교와 반대되는  견해인데, 로마 
천주교는 성례가 구원에 필요한 전부라고 가르친다. 말씀과 성례는 다음과 같 
은 면에서 차이가 있다. 
  ①말씀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데 반하여 성례는 그렇지 않다. 
  ②말씀은 믿음을 일으키며 믿음을  강하게 하나 성례는 믿음을 강하게만 한 
다. 
  ③말씀은 전 세계를 대상한  것인데 반해 성례는 신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위해서만 시행되는 것이다. 


  다음 몇 가지 면에서 관찰해 보자. 


  ⑴ 성례의 구성 부분 
  성례는 3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①외적, 가견적 표시 
  성례는 각각 외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이 외적 요소는 세례에  있어서는 물 
이요, 성찬에 있어서는 떡과 포도주이다.   이 외적 요소만을 받는 자는 성례 
를 받았다고  말할는지 모르나 성례가  의미하는 바 모든  것을 받은 것이 아 
니며, 성례의 가장 중요한 것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②내적, 영적 은혜의 표징 
  이 표징은  성례가 의미하는  바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성례의 내부적 요소 
인  것이다.  이 요소는 믿음의 의(롬 4:11), 사죄(막  1:4) 즉, 믿음과 회개 
(막 1:4,  16:16) 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 
을 말하는 것이다. 
  ③표시(表示)와 표징(表徵)과의 연합 
  이것은 실질상 성례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성례가  믿음으로  받아지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동반된다. 성례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정된 거룩 
한 제도로서, 이  제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감각 
적 표시에   의하여 신자들에게 제시되고, 확증되고,  적용되는 것이며, 한편 
신자들은 하나님께 그들의  신앙과 순종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⑵ 성례의 수(數) 
  구약시대에는 두 가지 성례 즉,  할례와 유월절 예식이 있었다.  할례는 아 
브라함 시대에 제정된 것이었으며, 유월절은  모세 당시에 시작된 것이다. 이 
두 예식은 모두  구약의  제사 제도와 조화되는 유혈(流血) 성례이었다. 신약 
교회에도 역시 두  가지 성례 즉, 무혈(無血) 예식인  세례와 성찬이 있었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희생을 드린 후로는  더 이상  피흘림이  필요없게 되었 
다. 로마  천주교회는  부당한  방법으로 견진, 고해,   신품(按手), 혼배(結 
婚), 종유(終油)예식 등을 추가함으로 성례의 수를 확대시켰다. 


  ⑶ 구약 성례와 신약 성례와의 비교 
  로마 천주교회는 이 둘을 서로 본질상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즉,  구약 
성례는 단순한 예표에  불과하므로, 받는  자의  법적 위치에만 영향을 주고, 
받는 자의 영적  상태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며, 받는 자의 신앙에 의 
해 영향이 좌우  된다고 본다. 신약 성례는 받는 자의  영적 상태와는 관계없 
이 다만 성례행위에 의해서 받는 자의  심령에 영적 은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본질상 차이는 없다(롬 4:11;  고전 5:7, 10:1-4; 골 2:11).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상이점이 있기는 하다. 
  ①구약 성례는 영적 의미 이외에 국가적 국면이 있으며,②구약 성례는 장차 
올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시하는 것인데  반해  신약 성례는 완성된 희생의 회 
고이며, 
  ③구약 성례는 성례를 받는   자에게 신약 성례가 주는 정도의 영적 은혜의 
풍부한  양(量)을 전하지 못하였다. 


  26. 세례(洗禮)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세례식을 제정하셨다(마  28:19; 막 16:16).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의 형식에 대하여 규정하려  하지 않으셨지만, 회가  그 필요 
성을 느꼈을 때 이 제정의  말씀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형식은 2세기 
초 이전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신교에서는 공인된  목사에 의해 삼위일체 하 
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세례를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데  반하여, 로 
마 천주교는 세례를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간주함으로 어린 아이 
가 위독할 때는 신부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특히 조산원에게도 세례를 베 
풀도록 허락하고 있다. 


  1. 세례의 바른 양식(樣式) 
  침례교회는 세례의 합당한  양식이 침례(浸禮)라고 말할 뿐 아니라, 심지어 
는   침례가 세례의 본질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어떤 방법으로 시행된 
세례는 세례가 아니라고 한다. 또  그들은 세례의 근본적인  관념이 그리스도 
의  죽음과  부활관념(롬 6:3-6;  골 2:12)이라고  주장하며, 세례는  침례에 
의해서만 상징적으로 표시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성결이 
세례의  상징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겔 36:25;  요 
3:25,26; 행 22:16; 딛 3:5; 히 10:22; 벧전 3:21).  또한 세례는 침수(浸水) 
와 마찬가지로 물을 뿌리는   형식이나 붓는 형식에 의해서도 상징될 수 있는 
것이다(레 14:7; 민 8:7; 겔 36:25; 히 9:19-22, 10:22). 따라서 세례의 양식 
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침수의 형식에 의해 집례 
될 수 있으며, 붓는 형식이나   뿌리는 형식에 의해서도 집례될 수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침례파는 신약이 침례에  의한 세례만을 정당시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증명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세례의 어떤 형식을  제정하지 않으셨고 성경은 결코 어떤 특별 
한  양식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Baptize란 말은  꼭 "담 
그다"란 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씻어 정결케하다'란 뜻을 의미하는 것 
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침례에 의한 세례라고 확증할만한 예를 한 번도 찾아 
볼 수 없다. 
  세례 요한에게  운집한 무리들과 오순절에 회심한  3천명도 침수에 의해 세 
례를  받은 것이 아닌듯 하다.  또한  이 양식은 행 9:18, 10:47, 16:33,34에 
언급된 경우에서도  사용된 것 같지 않다. 


  2. 세례의 합당한 대상 
  세례는 성인과 영아 혹은 유아에게 수여된다. 


  ⑴ 성인 세례 
  세례는 신자와  그의 후손을 위해 시도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세 
례  제정의 말씀을 주로  성인 세례를 심중에 두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왜냐 
하면 제자들이  그들의 선교사업을 성인들에게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 
수님의 교훈은 신앙고백이   세례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막 16:16).  오순절 베드로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들은  세례를 받았다(행 
2:41, 8:37, 16:31-34). 그러므로 교회는  세례를 받고자 하는 모든 성인들에 
게 신앙고백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한  고백이 이루어지면  그 진실성을 의심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한 교회는 그 고백을 표면적 가치로 받아들여야 한다. 


  ⑵ 유아 세례(영아 세례) 
  침례교회는 유아  세례의 정당성을 부인하는데 그  이유는 유아들이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며, 신약에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없으며 그런 
세례의 단순한  예를 기록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유아 세례가 
비성경적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①유아 세례의 성경적 증거 
  유아 세례는 성경의 단일한   구절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 사상의 산 
물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것이 국가적  국면이긴 했지만,  주로 
영적인  언약이었다(롬 4:16-18; 갈  3:8,9,14). 이러한 언약은 아직도  유효 
하며, 본질상 현시대의 새   언약과 동일한 것이다(롬 4:13-18; 갈  3:15-18; 
히 6:13-18). 유아들은  언약의 혜택에  참여하였으며,  할례의 표를  받았으 
며, 이스라엘 회중의 한 부분으로  계산되었다(대하  20:13; 욜 2;16).  할례 
는 신약에   와서  언약에   들어가는 표와   증표로써 세례와   대치된다(행 
2:39; 골 2:11,12).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은혜로운 것으로  성경(사 54:13; 렘  31:34; 히 
8:11)에  나타나 있으므로, 새 언약은 유아를  좀처럼 배제하지 않는다. 이는 
마 19:14; 행 2:39;  고전  7:14 등의 구절들의  견해와도 역시 다르다. 뿐만 
아니라, 전 가족이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유아를 제외했다는 것이 아니다(행 
16:15, 16:33; 고전 1:16). 


  ②유아 세례의 근거와 작용 
  개혁파 노선의 어떤 학자는  유아가 가정적 중생에 근거해서 세례를 받는다 
고  주장하며, 또 어떤 사람은  유아는 중생의 약속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총 
포괄적, 언약적 약속에 근거해서  세례를 받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후자의 
견해가  보다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다. 언약적 약속은 유아  세례의 확실한 
객관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유아   세례가 어떻게 영적 생명을  강하 
게 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일 
어나는데,  그  대답은 유아들이 세례받을 때 중생되었다고  하면  세례는 그 
시행시에 중생의 생명을 강하게 하는 것이며, 세례의 의미가 보다  명백히 이 
해된 후에는 믿음이 더 견고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의 작용이 
세례의 시행 순간에만 필연적으로 제한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27. 성찬(聖餐) 


  성찬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유월절에   제정된   것이다(마 
26:26-29;   막 14:22-25; 눅 22:19,20; 고전 11:23-25). 
  이 새로운 성례는 유월절   음식의 중심적인 요소와 직결된다. 양고기와 함 
께 먹는  떡은 새로운  용도로 봉헌되었으며, 축복의 잔이라고 칭하는 제 3의 
포도주잔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떡과 포도주는 주님의   찢어진 살과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이니 이런   것을 먹고 마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열매에 대 
한 영적 유용성을 지적해 주는 것이며,   그 성례 전체는 그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계속적인 기념인 것이다. 


  1. 표징(表徵)과 인(印)침으로서의 성찬 
  ⑴ 표징 
  다른 모든  성례와 마찬가지로  성찬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표징인 것이다. 
그  표징은 떡과 포도주의 유형적   요소들 뿐 아니라, 그런  것을 먹고 마심 
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 표시(고 
전 11:26)이며,   신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과 능력에 참예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찬은 거기에 참여 
하는  자의 고백 행위인 것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을 고백하며, 그들의 왕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고백하는 것 
이다. 


  ⑵ 인침 
  그러나 성찬은 표징만이  아니고 하나의 날인(捺印)이니, 이것은 그 표시하 
는  사물에 부착되어 그 실현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성찬은 성찬에 참여하 
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에 자 
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보여주신  그 위대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확신시 
켜 주며, 언약의 모든 약속과 복음의 모든  풍요함이 그들의 것임을 확신시켜 
주며, 나아가서는 구원의 축복이 실제  소유에 있어서  그들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2.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임재(臨在)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실재성에 관한 문제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 되 
어 왔으며, 아직도 상당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네 가지 견해를 생 
각하고자 한다. 


  ⑴ 로마 천주교의 견해 
  로마 천주교는 성찬에 있어서 육체적 의미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말한다.  " 
이는 내 몸이니"라는  예수의 말에 근거해서 볼  때, 실상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몇 가지 반대 주장을  면치 못한 
다. ①육신으로 제자들 앞에  서 계신 예수께서 그가 손에 그의  살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혀 말할 수 없다. ②성경은   떡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만한 때 
에도 그것을 떡이라고 말했다(고전 10:17,  11:26-28). ③떡과 포도주의 모양 
과 냄새와 맛인데, 그것을 실제 살과  피라고 믿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것 
이다. 


  ⑵ 루터파의 견해 
  루터파는 떡과  포도주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의  전인격 즉, 살과 
피가 그 요소(떡과 포도주)들  속(in)에, 그 요소들 밑(under)에,  그 요소들 
과 함께(along  with)  임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손에 떡을 가지셨 
을 때, 그가 자기  몸을 그것과 함께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는 내 살이니라 
"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떡  받는 모든 자는 그가 신자이건 아니 
건  간에 살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로마  천주교 교리를 크게 발 
전시킨 것이 못된다.  이 견해는 예수의 말씀을 "이는   내 몸을 동반한다"는 
부당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몸이 편 
재한다는 불가능한 개념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⑶ 쯔빙글리의 견해 
  쯔빙글리는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부인하지만,  그리스 
도는 신자들의 신앙  속에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한다.  쯔빙글리에 의하 
면 성찬은 주로   하나의 단순한 표징이나 상징,   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 또는 믿는 자들   편에서 하나의 고백 행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견해는 성찬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을 위해 
행하시는 단순한 날인과 보증으로 간주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⑷ 칼빈의 견해 
  칼빈은 중간적 입장을 취한다.  칼빈은 육체적, 장소적 임재 대신에 그리스 
도의  영적  임재를 가르친다. 그는 쯔빙글리와는   달리 성례의 깊은 의미를 
강조한다. 칼빈은  성찬을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보증으로 보기보다는 하나 
님께서 신자를 위해 행하시는   날인과 보증으로 보았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 
리스도의 희생의 공덕과   효과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임재하며 
실제적으로 전달된다고 볼 수 있다. 


  3. 성찬과 그 참여자 
  성찬은 무조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 성찬의 영적 의미 
를  이해하는 신자들만을 위해서 효과있는 것이다. 아직 분별할 수 있는 연령 
에 이르지  못하는 아이들은 성례에   참여함이 합당치 않다. 심지어  진실한 
신자라도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영적 상태 하에  있게 될는지도 모르므 
로 자신을 주의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고전 11:28-32). 


  불신자는 자연히 성찬에서 제외된다. 이  성례에서 받은 은혜는  말씀의 도 
구를 통해서 받는 은혜와 그 종류로  보아 다를 바 없다. 성례는 단순히 말씀 
의 효과와 이미  받은 바 은혜의 분량에 부가된  것 뿐이다. 이 성례의  영적 
유익의 희열은 그 참여자의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다. 


  28. 육체적 죽음과 사후의 중간 상태 


  1. 육체적 죽음 
  육체적 죽음은 성경에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다. 성경은 육체적 죽음을 영 
혼의  죽음과 구별해서 말하고 있으며(마   10:28; 눅 12:4), 또는 동물적 생 
명의 종결이나  상실로 언급하고 있고(눅 6:9; 요  12:25), 또는 육체와 영혼 
의 분리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전  12:7; 약 2:26). 육체적  죽음은 결코 멸 
절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의 분리에  의한  육체적 생명의 종결인 것이다. 펠 
라기오스파와 쏘시니안파는 인간이 죽어야  할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지 
만, 이 견해는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다. 성경은   죽음이 죄의 결과요, 죄의 
형벌이라고  가르쳐 준다(창 2:17, 3:19;   롬 5:12,17, 6:23). 죽음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자연적 과정이라고  보기보다는  인간의 마음에 공포와 두려움 
을 가져다 주는  신적 진노의 표현(시 90:7,11)이며, 하나의 심판(롬 1:32)이 
며, 정죄(롬  5:16)이며, 저주(갈 3:13)이다. 


  그러나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이며,  신자가 죄책에서 구속 받았다고  한다 
면, 왜 신자들이 아직도 죽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렇지만  죽 
음이 신자들에게는 형벌이 아니라, 성화 과정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 
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성도의 죄에  대한 죽음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다. 


  2. 중간 상태 
  인간의 죽음과 그후 일반적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에 관한 견해는 상당히 
다양하다. 그러므로 그 중 중요한 이론들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⑴ 스올 - 하데스의 현대적 개념 
  이 개념은 현대에 상당히  성행되는 개념으로서, 경건한 자나 악한 자나 누 
구든지  죽은 후에는  구약에서  스올(Sheol)이라고 부르며, 신약에서는 하데 
스(Hades)라고  부르는 중간지대에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곳은  보상이나 형 
벌의 장소가 아니라, 모든 자의   동일한 운명의 장소이며, 지상생활의  약화 
된 반영에 불과한 음침한 장소이며, 생활의  흥미를 잃고 삶의 희열이 슬픔으 
로 변해가는 약화된 인식과 침체된 무능력의 장소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거의   성경적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스올과 하데스 
란 말이  항상 경건한 자와  악인이  함께 내려가는 장소를 의미한다면, 그곳 
에 내려가는 것을   악한 자들을  향한 경고로서   어떻게 지지할  수 있겠는 
가?(시  9:17; 잠  5:5, 7:27,   9:18, 15:24) 또 하나님의 진노가  스올에서 
불붙고 있는 것으로 성경은 어떻게 경고할 수  있었겠는가?(신 32:22) 
  부자는 하데스에서  그의 눈을 들어 쳐다보면서  자기가 있는 곳을 "고통하 
는  곳"(눅 16:23,28)이라고 했다.  스올과  하데스란 말은 항상 동일한 의미 
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가끔  무덤(창 42:38;   시 16:10)으로,  어떤 때는 
죽음의 상태나  조건(삼상 2:6;   시 89:48)으로, 또 어떤 때는  영원한 형벌 
의 장소(신 32:22; 시 9:17; 잠 9:18)로  의미되었다. 


  ⑵ 연옥(煉獄), 선조(先祖)림보, 유아(幼兒)림보 
  ①연옥 
  로마 천주교에 의하면, 죽을  때 완전한 자들의 영혼은 즉시 천당에 들어가 
게  되지만(마  25:46; 빌 1:23), 완전히 정화되지  못한 자의 영혼(즉, 이는 
많은  신자들의  상태이다)은 연옥이라 불리우는 정화의   장소에 들어간다고 
한다. 거기 거하는 기간은   개인의 형편에 따라 다른데, 경건한 친구와 친척 
의 기도, 선행, 미사에 의해 단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리는 성 
경적인 근거가 없다. 


  ②선조림보(Limbus Patrum) 
  로마 천주교에 의하면,   선조림보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부터 부활하실 
사이에  존재하던 곳이요, 죽으신 주님이 오셔서 해방시켜 줄 때까지  구약성 
도들이 억류되었던 곳이라 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비어있는 곳이다. 


  ③유아림보(Limbus Infantum) 
  유아림보는 세례받지 못한 모든 아이들의  영혼이 거하는 처소라  한다. 그 
들은 적극적 형벌을 당하지  않지만 천당의 축복에서 제외되고,  아무런 구원 
의 소망이 없이  거기에 거한다. 이 견해 역시 성경적 근거가 없다. 


  ⑶ 영혼의 수면(睡眠) 
  영혼이 죽으면  무의식적 휴식이나 수면상태에 들어간다는  견해는 과거 여 
러  종파의 지지를 받아   왔지만, 오늘날의 영국의 어빙파와  미국의 럿셀파 
의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이 견해는 지성을 떠나서는 인식의 지속성을 믿을 
수 없다는 자들에게   하나의 특별한 매혹이 된다.  그들은 죽음이 영혼의 잠 
(마 9:24; 행 7:60; 살전   4:13)이라는 사실과 죽은 자는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시 6:5, 30:9,  115:17, 146:4)을 성경적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전자는 
단순히 죽은 육체와  잠자는  육체의 유사성 때문에,  죽음을  단순히 잠자는 
것으로 말한 것이고, 후자는 단순히 죽은 자는 현세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없 
고, 현세의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 뿐이다. 성경은 믿는 
자가 사후에   즉시 의식적 생활을   향유하는 것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8; 빌 1:23; 계 6:9). 


  ⑷ 멸절설과 조건적 영생설 
  이 교리에 의하면, 악인은  죽은 뒤 의식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멸 
절설은  인간이 불멸하게 창조되었다 하더라도 그 죄악 속에 계속 거하는  자 
들은 하나님의 적극적 행동에 의해 불멸성을 박탈당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 
러나 조건적  영생설에  의하면 인간은 사멸하도록 창조되었지만 믿는 자들만 
은 그리스도 안에서 불멸의   선물을 받는다고 한다. 악인은 궁극적으로 완전 
히 멸망하거나 모든 의식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두 경우 모두 마 
찬가지이다. 


  이러한 교리들은 성경이 영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요 
10:27,28; 롬 2:7,   6:23)이며, 죄인들은   죽음과 멸망으로  위협당한다(시 
73:27;  말  4:1;  벧후 2:12)고 표현한 사실을  근거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죄인들이 계속  존재할 것이며(마 25:46; 계  14:11, 20:10), 
악인의 형벌의 등급(눅 12:47,48; 롬  2:12)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⑸ 제 2의 시련 
  어떤 학자들은 죄로  죽은 자들이 사후에 그리스도를  영접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누구든지 예수를   알고 영접할 좋은 기회를 제공받지 
않고서는 멸망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학자들은 고전 15:24-28; 엡 
4:8,9; 빌 2:9-11,   골 1:19,20; 벧전 3:19, 4:6   등의 성경 구절을 이론적 
근거로 삼고자 한다. 그런데 이런  성구들은 그런 이론을 증명해 주는 구절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사후의 불신자의 상태를 변할 수 없는  고정된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전  11:3; 눅  16:19-31; 요 8:21,24;  벧후 2:4,9; 유 
7,13). 그들의  심판은 그들의   육신으로 행한  것에 의존한다(마  7:22,23, 
10:32,33, 25:34-46; 고후 5:9,10; 살후 1:8). 


  29.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신약은 그리스도의 초림이 있은  후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의 다시  오심을   여러  번  말씀하셨으며(마 24:30, 
25:19, 26:64; 요  14:3), 천사도 예수님의 승천시에  그의 재림에 주의를 환 
기시켰고(행 1:11), 바울  서신에서도 재림에 대하여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빌 3:20; 살전 4:15,16; 살후 1:7,10; 딛  2:13, 히 9:28). 


  1. 재림 전의 대 사건들 
  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일어난다고 
했다. 


  ⑴ 이방인의 부르심 
  천국 복음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온 세계에 전해져야만 한다(마 24:14; 
막  13:10;  롬 1:25)고 성경은 말해준다.  이  구절들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전 국민이 완전히  복음화되어 복음이야 말로  국민생활에 능력이 되며, 결신 
(決信)을 촉구하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⑵ 이스라엘의 회심 
  고후 3:15와 롬 11:25-29는   이스라엘의 회심을 말해 주는데, 특히 로마서 
는 이  회심을 시간적 종말과  관련시키는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들 
을 들어서  이스라엘 전체 또는 국가적 이스라엘이 결국은 주님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롬 11:26의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단순 
히 고대 언약  백성으로부터  선택하여 낸 충족한  무리를 의미할 것이다. 이 
모든 구절은 이스라엘  많은 무리가 세상   끝날에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⑶ 큰 배도와 큰 재난 
  성경은 끝날이 가까울수록 크게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여러 
번  가르쳐 주고 있다. 세상  끝날에  죄악이 증가할 것이며, 많은 사람의 사 
랑이 식어질  것이다(마 24:12; 살후  2:3;  딤후 3:1-7, 4:3,4). 하늘에  사 
무친 악으로 인하여, 천지가  시작된 후로 전무후무한 무서운 재난이  초래될 
것이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했더라면,  구원을 얻을 영혼이 없었을 것이지 
만, 택한 자들을 위해 그 날들을 감할 것이다. 


  ⑷ 적 그리스도의 출현 
  적 그리스도의 영은 이미   사도시대에도 분명히 있었으며(요일 4:3), 많은 
적  그리스도들이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었다(요일 2:8). 그러나 성경은 우리 
에게  가르치기를 끝날에 개인이 악의 화신으로서 일어날 것이라 한다. 즉, " 
죄악의  사람"이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 
느니라"(살후 2:3,4)⑸ 표적과 기사 
  성경은 이상한  표적을 세상 끝날이 시작되는  징조로서 말해주고 있다. 전 
쟁,  기근, 지진이 각처에 있을  것이니  이것이 재난의 시작이며, 이 재난은 
우주의 재생전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무서운 징조가 나타날 것 
이며, 그때에   하늘의 권세가 흔들릴 것이다(마  24:29,30; 막 13:24,25; 눅 
21:25,26). 


  2. 재림 자체 
  앞서와 같은 징조가  있은  후에는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인자(人子) 
를 보게  될 것이다. 


  ⑴ 재림의 시기 
  어떤 학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는다. 즉,  어느 때든지 방 
금 그  일이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앞서 말한 사건들과 징조 
들이 재림 전에  앞서 일어난다고  가르쳐 준다. 하나님  펀에서 볼 때, 재림 
은 언제나 가까운 것이다(히  10:25;  약 5:9; 벧전 4:5). 그러나  그 누구도 
그 확실한 때를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천사들이나 인자라도 
알 수 없다(마 24:36). 


  ⑵ 재림의 양식(樣式) 
  그리스도의 인격은  다시 오실 것이다(인격적 재림).  그는 이미 오순절 날 
에  영으로 오셨으나, 육체로  다시 오실 것이므로(형태적, 육체적 재림), 각 
인의 눈이 볼  수 있을  것이다(가견적 재림)(마 24:30, 26:64;  행 1:11; 딛 
2:13; 계 1:7). 많은 징조가   재림 전에 일어날 것이지만, 그의 재림은 사람 
들이 생각지 않은 때  불시에 일어날 것이다(돌발적 재림). 하늘의 구름이 그 
의 마차가 될 것이며(마 24:30),  천사들은 그의 호위병이며(살후 1:7), 천사 
장들은 그의 전령관이  되며(살전 4:16),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의 영광스런 
수행원이 될 것이다(영광의 재림)(살전 3:13; 살후 1:10). 


  ⑶ 재림의 목적 
  그리스도께서는 미래의 시대,  곧 사물의 영원한 상태를 도입하실 목적으로 
재림하실 것인데,  그는 두 가지 사건  즉, 부활과 최후  심판을 통해 이러한 
목적을 실행하실 것이다(요 5:25-29;  행 17:31;  롬 2:3-16; 고후  5:10; 빌 
3:20,21;  살전 4:13-17;  벧후 3:10-13; 계 20:11-15, 22:12). 


  3. 천년왕국(千年王國) 
  혹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또는 천년왕국 후에 될 것이라고 
믿는다. 
  ⑴ 무천년설(無千年說) 
  이는 천년왕국에 대한 부정적 견해이므로 다룰 필요가 없다. 


  ⑵ 후천년설(後千年說)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후에 될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천년왕국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복음시대라고 생각되는데, 이  시기  끝 
(末)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것이라 한다. 복음은   세상 끝날에 현재보다 
훨씬 효과적이 될 것이며, 의와   평화의 시대와 풍요한 영적  축복의 시대로 
인도하여 들일 것을  이야기한다. 현재에도  어떤  학자는 천년왕국이 진화의 
완전한  자연적 과정의 거대한 결과가 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 모든 개 
념은  세상 끝날에 배도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부 
합치 않는 것 같다. 


  ⑶ 전천년설(前千年說) 
  전천년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지상 위에 다윗의 왕국을 재건 
하시고  천년 동안 예루살렘을 통치하실  것이라 한다. 이 이론은 선지서들과 
계 20:1-6의  여자적(如字的) 해석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천년설 
은 하나님 나라를 지상적  왕국과 국가적 왕국으로 만드는 반면에, 신약은 하 
나님 나라를  현재에도  존재하는  영적, 우주적 왕국으로  표현하고 있다(마 
11:12, 12:18; 눅  17:21; 요 18:36,37; 골 1:13).   신약은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왕국에  대해 말한 일이 없지만,  그의 하늘(딤후 
4:18)의 영원한 왕국(벧후  1:11)에 대하여만 말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이론은 계 20:1-6에 근거한 것인데,  이 구절은 하늘의 한 장면을  나타내 
주며, 유대와 지상적, 국가적 왕국이나  장차 예수께서 다스릴 곳인 팔레스틴 
에 대해 언급한  일이 없다. 


  30. 부활과 마지막 심판, 그리고 무궁세계 


  1. 부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자가 부활할 것이라고 가르쳐 준 
다.  구약은 이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사 26:19; 단 12:2). 신약 
은  이에  대해 충분한    증명을  제공해    준다(요 5:25-29,  6:39,40,44, 
11:24,25; 고전  15장; 살전 4:13-17;  계 20:13). 


  ⑴ 부활의 성질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육체적 부활을 기대하라고  말씀 
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육체도  포함될 것이다(롬  8:23; 고전 
6:13-20). 그러한 부활은  고전 15장과 롬 8:11에서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 
다. 부활은 의로운  자나 악한 자들  모두를 포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의로운 자만을 위한 구원과 영화(榮化)의  행위가 될 것이다. 


  ⑵ 부활의 시기 
  성경에 의하면, 일반적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세상 끝날과 일치할 
것이며,  최후  심판 바로 직전에   있을 것이다(요 5:27-29, 6:39,40,44,54, 
11:24; 고전 15:23;  빌 3:20,21; 계 20:11-15). 
  전천년설 주장자들은 이중적  부활을 주장하는데, 그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시의 의로운 자의 부활이요, 다른 하나는 천년 후 세상 끝날의 불의한 자 
의  부활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과 악인 모두의 부활이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가르쳐 준다(단 12:2; 요 5:28,29; 행 24:15). 성경 
은 악한 자의 심판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시켜 말해 주며(살후 1:7-10), 
의로운  자의   부활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  준다(요 
6:39,40,44,54, 11:24). 


  2. 최후 심판 
  부활의 교리는 최후 심판  교리와 바로 연결된다. 성경은 궁극적 심판이 집 
행될   것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시 96:13,  98:9; 전  3:17,  12:14; 마 
25:31-46; 롬  2:5-10; 고후 5:10; 딤후 4:1; 벧전 4:5; 계 20:11-14). 


  ⑴ 심판주와 그 보조자들(심판의 주재)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가  될 것이다(마  25:31,32; 요 5:27; 
행  10:42, 17:31; 빌 2:10;  딤전 4:1). 이러한 명예는 그의 구속사업에  대 
한 보상으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다. 천사들은  그를 보조할 것이며(마 
13:41,41, 24:31, 25:31),   성도들도 그의 심판사역에 다소나마 참여할 것이 
다(고전 6:2,3; 계 20:4). 


  ⑵ 심판 받을 무리들(심판의 대상) 
  인류  개개인이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 
나  있다(전 12:14; 마 12:36,37,  25:32; 롬 14:10; 고후  5:10; 계 20:12).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의로운 자는 심판에서 제외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 
은 마 13:30,40-43, 25:31-36;   고후 5:10에 어긋난다.  마귀도 분명히 심판 
을 받게  될 것이다(마 8:29; 고전 6:3;  벧후 2:4; 유 6). 


  ⑶ 심판의 시기 
  최후 심판은 자연히 세상 끝날에 되어질  것이며, 죽은 자의 부활 후에  즉 
시 이루어질 것이다(요  5:28,29; 계 20:12,13).   심판의 기간은 결정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심판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필연적으로 
24시간의 하루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것은 천년이 하루와 
같다는 하루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전천년설자들의 주장도 근거가 없는 것 
이다. 


  ⑷ 심판하는 표준 
  성도들과 죄인들이  심판받게 된  표준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意 
志)일  것이다. 이방인들은  자연법을 따라 심판받을 것이요,  유대인들은 구 
약계시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요, 복음의 충만한 계시를 안 자들은 복음으 
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롬 2:12). 하나님은 인간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베푸 
실 것이다. 


  3. 최후 상태 
  최후 심판은 각 개인의 최후 상태가 어떨 것인가를 분명히 말해 준다. 


  ⑴ 악인의 최후 상태 
  악인은 지옥이라 불리우는  형벌의 장소로 보내진다. 어떤  학자는  지옥이 
하나의 장소임을  부인하고 다만  하나의 상태로 간주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장소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성경은 "풀무의 불"(마 13:42), "불못 
"(계  20:14,15), "옥"(벧전 3:19)으로 표현하는데, 이 용어 모두가 장소적인 
용어이다. 
  이런 곳에서 그들은 완전히   신적 은총을 빼앗길 것이며, 생활의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할 것이며, 영육간에 적극적인 고통을 당할 것이며, 양심의 번뇌 
와   실망에 빠지게  될 것이다(마  8:12,13; 막  9:47,48; 눅  16:23,28; 계 
14:10,  21:8).    그들의  형벌은  등급이  있을  것이다(마  11:22,24;  눅 
12:47,48, 20:47). 그들이 당하는 형벌은   영원할 것이 분명하다. 어떤 학자 
는 영속과  영원이란 말이 단순히  오랜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 
원한 형벌을 부인한다. 그러나 이는  그 용어의 통상적 의미가 아니므로,  그 
용어들이 장래 형벌에 적용될 때,   이같은 제한된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표현이 이  형벌에 대하여 사용되었는데, 이는 
끝없는  형벌을 지적하는 것이다(막 9:43,48; 눅 16:26). 


  ⑵ 의인의 최후 상태 
  신자의 최후 상태는 현세가 지나가고,  새 창조가 이룩되기 전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 미래의 창조는 전적으로 새  창조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현 우 
주의 갱신(更新)인  것이다(시 102:26,27; 히 12:26-28). 천국은 성도들이 영 
원히 거할 처소가  될 것이다.  어떤 학자는 천국을 단순히  하나의 상태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성경은 분명히 천국을   하나의 장소로  언급하고 있다(요 
14:2; 마 22:12,13, 25:10-12). 의로운  자는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뿐 아니 
라, 완전한 새 창조를 상속할 것이다(마 5:5; 계 21:1-3). 


  의인의 보상은 영생이니 즉, 끝없는 생명일 뿐 아니라, 현재의  불완전이나 
불안이 없으며, 모든 면에서 완전한  생(生)인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충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영생의 본질인 것이 
다(계 21:3). 모든 사람이  완전한  복락을 누릴  것이지만, 이  천국의 복락 
에도  등급이 있는  것이다(단 12:3;  고후 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