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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신앙이란?

하나님아들 2024. 3. 4. 20:49

 청교도 신앙이란?

 

 

청교도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특정한 기독교 집단이나 교파가 아니다.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였던 웰리암 에임즈는

'청교도 주의란 하나님께 의존하며 사는 성경적    생활이다' 정의하였다.

 

청교도는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trust) 하고 섬기는 위대한 성도들이다.
청교도는 하나님께 철저한 헌신으로 자신과 교회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    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일군이다.

 


청교도주의 개혁은


1) 성경에 있는 대로의 믿음을 가지며, 성경을 매일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한다.
2) 청교도는 맑은 지성과 뜨거운 가슴으로 영원한 그 나라를 소망하며 지속적인 영적 각성과
경건한 삶으로 성경 속에 살아있는 성도들의 삶을 이어나간다.
3) 성경 적인 교리와 신앙과 생활이 일치되고

  매일 매일의 성스러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성숙한 성도이다.
 따라서 청교도는 현재를 충실하게 살면서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가는 백성(outsider)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며 영원한 왕국 의 상소 자들이다.

 

청교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된 것 같이
  말씀의 지식이 인격이 되어 생활 속에 실현하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고 영원    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거룩한 교회들이다.

 

청교도는 주님을 향한 열렬한 헌신은 구원받으려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 됨과 그리스    도  안에서 성도의 도리를 감사하므로 표현하는 것이다.

 

청교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서 언행을 삼가고 신앙양심에 따라서    행하며 죄 된 것을 멀리하며 바리세인 적인 것을 버리고 진실 무망하게 행하며 언행이 일    치되며 하나님의 주권에 순응하고 매사에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임재(동행)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청교도인의 삶이란 항상 주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은총을 마음 가운데 간직하는 생활이다.

 

청교도는 경건과 청빈, 성화, 재림, 회심과 절제를 생활의 지표로 삼고 지위나 명예나 이권에 욕심을 내지 않으며 차서와 질서를 따라서 행하되 무례히 행치 않으며 자기 부인하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

 

청교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지은 존엄한 인격과 영혼과 귀중한    생명임을 알고 물질의 유무나 지식의 유무나 지위의 고하를 보지 않고 동등한 인격으로 대    한다.

 

청교도는 자만하지 않고 이단을 불용하며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와 물량주의와 무속적 기복주    의를 배격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거룩한 투쟁을 계속한다.
청교도는 가능한 한 성경 속에 나타난 원리들에 적합한, 교리는 물론이고 교회의 규율과 행정조직을 갖기를 원했던 것이다.

 

 

명칭  

 

 

  청교도주의 역사는 과연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며, 우리의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일까?

과연 현대의 삶 속에 부딪치는 문제들에 밀접하고 생동적인 삶의 영향을 줄 것인가?


 

 청교도는 어거스틴과 칼빈 사상을 계승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과 하나님의 영광 사상으로 뭉쳐진

하나님 중심사상의 신학과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 사는 삶의 모습을

카톨릭과 술주정뱅이들과 세속주의 목회자들과 경건하지 못한 목회자들이 야유적으로 붙여준 별명이다.


  청교도는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기간(1588-1603)에 기독교의 중심 되는 위대한 진리를 강조하는 목회자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의 강조 점은 성경말씀에 충실하기 설교는 강해 설교,

개인 경건과 생활 전반에 걸친 실제적인 거룩한 삶을 강조했다.


 나중에 청교도라는 이름은 이처럼 경건과 청빈한 삶을 살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하게 여기고 말씀전파에 힘쓰는 자들에게 좋은 의미로 불러지게 되었다.


 그 당시 청교도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까다로운 사람”(Precisian)  "흥을 깨는 사람들" "청교도(Puritan)"라고 부르다가

청교도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가 부과되었는데

칼빈주의 은혜 교리를 따르는 잉글랜드 목사들을 청교도라고 불렀다.


 

   그 당시 대 주교 윌리암 로드(William Laud)는 목회자 승진 인사 목록에

청교도 목사 이름 앞에는「P」Puritan 자를 써놓고, 청교도가 아닌 목회자들에게는「O」Orthodox 자를 써 놓았다.

 

이와 같이 대 주교는 청교도들의 승진을 막고 정통주의 자들에게는 승진 할 기회를 주었다.

 이렇게 청교도라는 이름은 경멸의 명칭으로 사용되어 불이익을 당했고,

1641년 헨리 파커는

교황, 간신들, 대 시인들, 방랑시인들, 술 주정꾼들, 불량배들을 청교도들이라고 누명을 씌어 놀려댔다.

 

 이렇게 초기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윤리와 도덕을 지키고 양심을 따라 살았으며 그들이 가는 곳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며 지상에 낙원이 이루어져 갔다.

 

 예를 들면 칼빈 당시의 제네바는 온 시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이들을 시기하는 사람들은 청교도를 능멸하고 비웃었다.

 

       

  청교도의 역사 

 

 청교도의 역사를 간단하게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청교도운동이란 영국에서 일어난 교회의 개혁운동이다.
 청교도운동이 일어난 시기에 대하여는 학자들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청교도운동이 일어난 시기를 일반적으로 엘리자베스의 통치시기로 잡고 있다.
 

후커(HooKer)는 말하기를

“현재 사용되는 이 모든 이름들을 볼 때 청교도가 최초로 주의를 끌게 되었던 일이 있을 때까지는 그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일들은 청교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던 때보다 오래되었다”라고 하였다.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기독교도로 불리어지기 이전에 기독교도들이 있었고, 종교개혁 이전에 개혁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청교도라는 이름이 그들에게 붙여지기 이전에 청교도들이 있었던 것이다. 청교도 운동의 기원은 훨씬 전이기는 하지만 1559년경에 시작되었다고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견해는 청교도운동이 메리 여왕 (1553-1559)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피하여 유럽의 대륙으로 피신하여 있던 영국의 개혁자들이 엘리자베스(1559-1603)가 종교적인 관용정책을 펴면서 영국에 돌아와 일으킨 운동이라고 말한다.
 

청교도는 1553년에 프로테스탄트인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열렬한 카톨릭교도인 메리가 즉위했다.

 

 메리여왕은 강제로라도 잉글랜드를 카톨릭으로 복귀시키려 했다. 여왕이 카톨릭교도인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한 것도 프로테스탄트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란과 탄압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목숨은 매우 위태로웠다.
 

표면상 카톨릭 계율에 순종하는 척했지만, 어차피 정부를 뒤집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회복하려는 음모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1554년 1월에 토마스 와이엇경이 반란을 일으킨 뒤 , 엘리자베스는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갇혔지만, 어머니와 같은 운명은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온갖 심문으로도 그녀의 반역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자, 2개월 뒤 그녀는 런던탑에서 풀려나 1년동안 우드스톡에 연금되었다. 메리의 통치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온갖 박해를 받으며, 자신의 결백과 언니에 대한 충성 및 카톨릭 신앙을 다짐해야만 했다.
 

그 잔인함 때문에 "유혈(流血)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은 메리 여왕이  1558년  11월 17일재위 5년만에 급서한 뒤에 엘리자베스는 거국적인 환영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벳(Elixabeth I) 여왕은 자신을 합법적인 후사로 인정치 않는 교황권에 맞서 살아남기 위하여 정치적 이유로 개혁 신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지난 날 대륙으로 피신했던 개혁자들이 대부분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가지고 속속 귀국하였다.
 그들을 카톨릭 배경에 칼빈과 루터의 개핵신앙을 혼합한 국교회(Ahglican Church) 신앙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히 개혁하여 순결하게 (Purity)하려는 칼빈주의 청교도(淸敎徒 . Puritan)들이 일어났다.
  1559년의 엘리자베스 1세가 내린 통일령에 순종하지 않고 국 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적인 제도의식(儀式)의 일체를 배척하며, 성경 중심으로 개혁하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엄격한 도덕, 주일(主日:일요일)의 신성화 엄수, 향락의 제한을 주창하였다.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에 비 국교도로서 심한 박해를 받고 네덜란드와 기타 지역으로 피해 갔다.
  그 후 여러 왕이 바뀜에 따라 청교도 주의도 확장과 박해시대를 거쳤다. 이들의 역사는 마치 하나님께서 지도자 모세를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갔듯이 하나님의 오직 성경 속에 있는 언약만을 믿는 청교도들을 위하여 선민의 길을 예비하신 것이다.

 

그러면 유럽대륙에 피신하였던 개혁자들이 영국에 돌아와 일으킨 개혁운동이 왜 개혁주의운동인가 어떤이는 회의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독일에는 루터파들이 있고, 화란에는 재침례파들이 극성을 부렸기 때문이다.
 청교도운동이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운동이라는 것은 영국에 돌아온 개혁자들 가운데 중심적인 인물들이 바로 칼빈의 제네바나 하인리히 뷸링저의 취리히에서 개혁주의 신학교육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은 영국에 돌아오자 요한 칼빈(1509-1564)에 의하여 체계화된 신앙과 신학을 그들의 토양에 접목시키려 하였다. 곧 그들은 칼빈의 제네바를 모델로 삼아 영국의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칼빈주의적인 예배와 교리, 그리고 경건을 강조하면서 로마 천주교회에 의하여 영국교회에 뿌려진 무지와 미신적인 잔재를 제거하고 성경이 다스리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국가를 건설함으로 영국을 개혁하고자 했다. 
 

청교도들은 성경에 있는 언약을 믿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1620년 9월 6일 지도자 브루스타(Brewster)의 인도 아래 102명의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The Mayflower)호를 타고 사우스앰턴(Southampton)을 떠나 아메리카 신대륙을 향해 출발했다.
 메이플라워호는 원래 버지니아를 향해 항해하였으나

항해사의 실수로 버지니아 보다 북쪽에 있는 매사추세츠의 케이프 콧(Cape Cod)에 도착했다.
 1620년 11월 11일 마침내 그들은 66인간 항해를 하여 신대륙에 도착한 일행은 가족을 배에 남겨두고 케이프 콧과 플리머스를 탐사한 후에 플리머스를 정착지로 결정하고  1620년 12월 11일에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항구에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다.
 

이때에 청교도 지도자 William Bradford는 청교도로서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 우리를 오게 하시고 아름다운 항구와 평화로운 땅에 정착하도록 인도하신 하늘의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무릎을 끓고 기도했다."
  이들은 어려움 중에서도 신대륙에서 살아갈 규범 "메이플라워 협약서"(MayFlower Compact)을 선포했다.
 이 규범은 법률과 규례와 규약을 평등하고 공평하게 집행하고 공직자의 업무를 규정하여 법을 제정하고 정부에 복종과 순종의 의무를 다 할 것을 약속하면서 법안에서 하나 될 것을 서약했다.  이 메이풀라워 협약서는 아메리카에서 성문화된 최초의 합의 문서였다.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민주적 성격도 크게 평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시대적 한계를 초월한 문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협약서가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진취성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해 겨울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추위와 배고픔과 질병으로 그들의 절반이 땅에 묻히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무덤을 감추어야 했다.
 그 고생스러웠던 첫 해 겨울 초대 총독 John Carver도 사망했다.
이들이 바로 미국의 건국 조상이 된 "필 그림 파아더즈"(Pilgrim Fathers)들이다.
 

그의 후계자 William Bradford가 총독을 계승했다. (30년 이상을 재임)
1621년 1월과 2월에 많은 사람이 추위와 굶주림을 당하다가 102명의 승선자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50명에 불과 했다.
 참된 신앙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했던 청교도들의 꿈은 깨어지고 결과는 비참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청교도들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사랑으로 하나되어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입양하여 돌보고 홀로된 사람은 집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3월이 되자 허허벌판을 개간하여 영국에서 가져온 씨앗을 심었고 콩, 옥수수의 씨앗은 인디언들로부터 받았다.
사냥과 낚시로 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 후 청교도들은 1621년 Fortune호를 타고 32명이 이주했다
 

1623년 Anne and little James호를 타고 100여명의 이주민이 새로 정착하게 되었다.
 1630년에는 1000여명의 청교도 이민 자들이 매사츄세츠 베이회사의 지원으로 미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오늘의 보스턴을 건설했고 후에 하버드 대학을 세웠다.
 그 후에는 영국에서 10년동안 1만 8천명의 대 이민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청교도 지도자들은 경건한 새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시민권과 이민은 기독교 신자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약속의 땅에서 오직 성경에 약속된 자유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고 대자연에 감사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신대륙을 많이 찾았다. 
  한 세기가 넘도록 종교 동란에 시달려 온 구 세계를 뒤로하고 새 땅에 새 둥지를 트려는 이 청교도들은 마치 버년(John Bunyan)의 천로역정(天路歷程)의 주인공처럼 지금까지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면서 신앙적 삶의 완성을 위해 달려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달려나가려는 자랑스런 순례자이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고 북돋워 줄 교회와 사회를 세우고 그 터전 위에서 이웃의 비 기독교도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고 자유와 질서가 공존하는 신앙공동체의 한 모형을 이 광야에 세우려 한, 순례자의 부조들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400년이 못되는 역사의 정신적 지주는 바로 청교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대한민국에도 이 같은 청교도의 신앙만이 한국교회를 갱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청교도 교리 

 

 

청교도주의 교리는 장로교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풍성하고 발전적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 근거한 교리는 성도로 하여금 올바른 실행을 가져오게 한다.
 청교도들은 성경 중심의 신학사상과 생활을 교리 적으로 몸소 실행했다.
 

그 교리를 간추려 보면....
1) 성경 말씀의 가르침대로 인간의 전 인격을 통합시키는 생활 철학이다.
2) 청교도들은 성경이 모든 진리에 기초가 된다고 가르치고 믿었다.
3) 청교도들은 성경만이 인간의 모든 필요에 대한 유일한 답변서라고 믿었다.
4) 청교도들은 절대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이다.
  => 제임스 폐커박사는 칼빈주의 기본 원칙은 "인간의 구원이란 예수님께 속한 것이다" 성경적 원리라고 말하였다.

 

    청교도들은 구원사역에 있어
       (1) 성부 하나님의 선택
       (2) 성자 하나님의 속죄
       (3) 성령 하나님의 효과적인 소명을 강조하였다

 

5) 청교도 주의는 전통신앙과 열성적인 헌신의 건전한 결합이다.
6)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죄로부터 깨끗케 하시기 위해서 그의 죄 없는 피를 인간을 위해서 흘려주셨다. 그는 또한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였다.
7) 청교도 목사의 설교와 교리

 

■청교도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고 철저하게 연구했으며 본문에 충실하게 강해 설교를 한다.
 ①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인간들은 자기의 죄로부터 돌아서기 위해서 진지하게 경고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행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행 26:20)
② 그 리스도가 진정으로 죄인들에게 나타나야 한다는 문제이다.
■ 모든 예배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교회를 이룩한다.


       

 

 

청교도 교회의 역사 줄거리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세우고자 했던 교회는 교회에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초대교회와 같은 것이며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삼고 그리스도 그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성도들간의 교제가 있는 교회였다.
  초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 조직을 갖추지 못한 교회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 까닭은 사도들에게 있어서 급선무는 부활하신 예수가 메시야임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 예수께서 죽으신 지 수 백년 후에는 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비잔티움, 예루살렘 같은 중심의 통치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주후 1000년까지는 로마의 교황은 기독교계 모두가 자신의 권력 아래 있음을 주장했고 서유럽의 모든 교회들은 그의 권력에 순복했다(동서교회 분리이후 동유럽, 아시아, 이집트 교회들은 독립유지 했음) 서방교회들은 로마통치 아래서 나라의 1/3정도 땅을 소유하리 만큼 부유하고 권력이 있었다.
  

이에 따라서 교회 타락은 증가했고 성직자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이 같은 부패에 맞서 종교개혁전 개혁자 Peter Waldo(피터 왈도), John Wycliffe(존 위클�), John Huss(존 휴스)등이 로마 교회의 타락에 대항하여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Martin Luter(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면죄부의 효능"을 묻는 95개 조항을 작성하여 교황청에 대항했으며 이 사건은 마침내 종교개혁으로 번져 나갔고 John Calvin(죤 칼빈)이 종교개혁에 따른 교리를 집대성했다.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읽음에 따라 사상, 예술, 과학의 출현, 진보 등이 있었고 인문주의, 문예부흥, 산업혁명 등의 개인주의가 발전하도록 인도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 충만하고 간결하고 경건된 예배 생활로 돌아가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영국국교회 제도는 로마교회와 다름이 없는 국왕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했으며 국왕이 교회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Robert Broune(로버트 브르운), Henry Barrow(헨리 브라우), John Green Wood(죤 그린우드), John Rovinson(존 로빈슨)등이 초대교회와 같은 성경적이고 자유스러운 교회(즉 개혁주의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내 영국의 지하교회들과 화란으로부터의 추방당한 성도들 중에서 1620년 9월에 런던에서 출항된 메이플라워를 탄 청교도들을 낳게 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이들 모두는 개혁주의를 찬동하는 청교도 신앙자들이었다. 이들이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의 조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