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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형성 과정

하나님아들 2023. 12. 19. 14:17

삼위일체의 형성 과정               

 

1. 들어가는 말

 

세 위격의 연합과 상호 침투로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는 세 위격의 연합을 의미한다. 이러한 삼위의 개념은 그를 믿고 따르는 군중들이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동등한 구조의 공동체를 형성함과 동시에 기회가 균등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시되는 사회를 이루라는 것을 간접적이지만 강력하게 표현함으로 교회 공동체가 갖추어야할 자세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 주는 지침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근거가 되며, 삶의 지침이 되는 이러한 삼위일체의 개념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지 않기에 많은 논의와 협의를 통해 이루어진 교의로서 우리에게 놓여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 정해진 개념만을 받아들일 뿐이기에 그것이 가져다주는 의미에 대해 간과하는 경우가 일어나곤 한다. 그렇기에 그 과정을 파악해 삼위일체가 가져다주는 의미와 그 가치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2. 삼위일체의 형성 과정

다음 본문은 경세적 삼위일체를 타고 올라가 내재적 삼위일체에 도달하는 과정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1) 구약 : 유일신

 

구약에 등장하는 백성들은 애굽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출한 하나님을 여호와로서 알게 되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언약을 맺어 자기 백성 삼은 여호와임을 확신하고 섬겼다. 이들이 하나님을 유일신으로서 이해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는 신명기 6장 4절의 말씀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유대의 이러한 신앙의 모습은 신약교회가 그대로 이어받아 여호와 하나님만을 창조주와 구속주로 믿는 유일신 사상이 교회의 기본 신앙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신앙을 토대로 하여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함으로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와 구약의 여호와가 동일자임을 표현하여 삼위일체의 교리와 기독론의 교리의 형성 기반이 이루어지게 된다.

 

2) 신약과 사도교부들 : 하나님의 복수성

 

사도 교부들은 하나님의 복수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클레멘스는 시편들 속에서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그의 주권을 행사할 때에 사용하여 왔던 도구가 바로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성육신 이전에 전재하였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자기와 같은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성령이었다고 보았지만, 삼위 하나님의 상호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이그나티우스는 경세적 삼위일체론자로 하나님을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무시간적이고 분화도지 않은 단일자이고, 성자와 성령은 계시의 과정 속에서만 하나님과 구별될 수 있는 성부의 자기 계시의 형태들 또는 양태들이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헤르마스는 주인이신 성부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인 성령 그리고 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라는 세 인격을 상정한다. 이러한 사도 교부들로부터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렵지만 그리스도의 선재는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 그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복수적인 표현이 신약에서 구체화 되어 표현되는 것을 봄으로, 삼위라고 하는 하나님의 복수성이 인정되고 확립되어지는 것이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오는 전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복수성의 개념은 신학적으로 많은 토론과 논쟁이 있었으며, 이것이 진행됨으로 삼위일체의 개념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3) 로마 : 하나님의 일체를 말한 군주론- 양자론과 양태론

 

주후 2세기 말의 20-30년 동안에 군주신론이라는 공통의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 주장이 출현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한 평범한 인간 이었다는 양자론과, 하나님은 한분이시기에 성자와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역사의 모습을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쓰인 것이라는 양태론이 그것이다.

먼저 양자론을 퍼뜨린 인물은 비잔티움 출신의 가죽상인이었던 테오도투스였다. 테오도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 비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신명기 18:15와 누가복음 1:35를 근거로 들어 예수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성령은 그의 안에 내주했던 것이 아니라 영감을 주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합리성에 기반을 두어 하나님의 성육신 이라는 개념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러한 양자론자들의 활동은 그리스 철학에 젖어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이방 기독교 내에서 대표성이 전혀 없는 고립적인 운동일 뿐이었던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이 예수라는 사람을 통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명령하였다`는 주장을 펼친 사모사타의 파울루스에 의해 주후 3세기 후반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하지만, 주후 268년에 열린 안디옥 공의회에서 결국 단죄된다.

 

양태론으로 불린 고유한 의미에서의 군주신론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주창했기에 고립적 현상으로 치부된 역동적 군주신론과는 달리 공식적인 진영들 속에서도 일정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인기 있는 사상의 조류로 널리 퍼져있었다. 이러한 이론을 체계화 시킨 인물은 사벨리우스였다. 그는 성부는 형상 또는 본질이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자기표현의 양태들 이라 주장함과 동시에 신적인 유일자의 확장 또는 팽창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성부는 전개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처음에는 성자로, 다음에는 성령으로 투사하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창조주이자 율법 수여자로 여겨진 한 분 하나님은 성부이고, 이 하나님은 태양 광선처럼 투사되었다가 물러난 후에 성령으로서 활동하며 영감을 주고 은혜를 수여하였다는 것이다.

사벨리우스의 주장에는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여러 특징들을 빌려온 흔적이 보이게 되는데, 이는 양태론적 접근으로는 하나님이 성자로서 나타났을 때 문제가 되는 성부수난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단논쟁을 피하고자 했지만 여러 신학적 허점으로 인해 단죄된 이러한 시도들은 노바티아누스의 해석과 같이 한분 하나님이라는 교의를 지키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된 잘못된 시도들이었다.

 

4)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 : 삼위일체론

 

주후 2세기의 사상을 요약한 신학자인 이레나이우스는 하나님을 내재적인 존재 속에서의 하나님과 “경륜”, 즉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일련의 질서정연한 과정 속에서의 하나님, 이렇게 두 가지로 보았다. 즉, 이레나이우스는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과 본성에 있어서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시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의 구속의 경륜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 성령이 계신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만물에게 몸을 주고 존재의 실재를 수여하는 이는 말씀이고, 이러한 서로 다른 권능들에게 질서와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말하며, 성부가 말씀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계시하신다고 보았는데 이에 따라 성령의 역할은 대단히 필수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부를 아는 지식이 성자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은 오로지 성령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에 성령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성자에 대해서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이해했는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낳아진 것은 그 어느 것이나 하나님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주장으로 볼 때 그가 성령역시 하나님으로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듯, 주후 2세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레나이우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터툴리안이 등장하기까지 그 어떤 신관보다 삼위일체에 대해 가장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후 3세기에는 북아프리카의 뛰어난 신학자였던 테르툴리아누스가 이레나이우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방향으로 접근하였는데, 그는 하나님을 `영원한 존재 안에서 존재하는 하나님`과 창조와 구속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고찰한다.

그는 첫째로 만물 이전에 하나님은 홀로 계셔서 자기 스스로가 우주, 장소, 모든 것이었지만, 그때에조차도 하나님은 사실 홀로 계신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소유하고 있던 저 이성, 즉 자신의 이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내재적인 이성은 인식하거나 계획할 때 개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 역시 스스로의 안에서 타자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둘째로, 본질적인 존재 안에서의 하나님의 삼위성은 창조와 구속에서 드러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자로 말미암아 성부로부터 유출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세 번째 위격인데, 이것은 가지로부터 나온 열매가 뿌리와는 구별되고, 강에서 끌어온 수로는 샘과 구별되는 것과 같이 구별되는 세 번째의 것이기에 성령도 `위격`이고, 따라서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구별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확장된 것이기에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이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본질을 공유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테르툴리아누스는 경세 속에서 계시된 삼위를 그들이 인식하였던 복수성의 시현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이레나이우스와 동일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권능 또는 본질은 하나이고 그것의 표현들 또는 형태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시도했다는 점과 삼위의 위격들이 기본적인 특질에 있어서, 셋일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삼위성을 오로지 위격들의 표출과 관련된 현시로 보았다는 점에서 이레나이우스보다 진일보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5) 경세적 삼위일체 :삼위 하나님의 외부로 향하는 고유사역

 

초대교회부터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가 정립되는 과정 속에서 존재한 경세적 삼위일체는 히폴리투스와 테르툴리아누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학을 살펴보기 전에 경세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세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계획 또는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에 기독교 신학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의 목표 지점인 성육신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원래 의미들 가운데 분배, 조직과 같은 여러 요소들을 질서로 배열한다는 의미가 있었고 이러한 용법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전개되면서 드러나게 된 한 분 성부로부터 성자와 성령의 구별을 가리키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히폴리투스와 터툴리안을 살펴보면 그들에게서 이러한 경세적 견해로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전개해 나가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히폴리투스에 의하면 하나님이 원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낳았고, 그 말씀을 사용해서 우주를 창조하였으며, 그의 지혜를 사용해서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고 장식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경세 속에서 계시되는 삼위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명령하시는 분은 성부이며, 성자는 순종하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기에 사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터툴리안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셋으로 현현되고 그들이 수로서 구별되어 세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하나의 불가분적인 능력의 현현으로 이해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뿌리와 가지, 그리고 그로부터 나온 열매라는 예시를 사용함으로 그들 사이에 구별은 있으나 실상은 동일한 실체로서 확장되거나 분리되지는 않는다는 그의 견해를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페리코레시스 가운데 창조와 구속 그리고 성화라는 각각의 고유사역을 전개한다는 삼위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에게 접근하려는 도전적인 시도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고정적인 사고로부터 나온 구조적인 한계인 삼위를 구원론적인 기능과 사역으로만 이해하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양태론에 빠질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6) 내재적 삼위일체

 

내재적 삼위일체란 무근성의 특질을 가지신 성부와 그분께서 낳으신 성자 그리고 그들로부터 발출된 성령이라는 이해를 기초로 한다. 이러한 삼위의 이해의 기초는 당시에 기독교를 소개하고, 이단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활동했던 변증가중 한명이었던 오리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초기 신학자들의 `경세적` 삼위일체의 교리를 지나 `내재적` 삼위일체의 교리를 시도하였으며, 이로 인해 성부로부터의 출발이 아닌 세 인격으로서의 삼위 하나님으로부터의 출발이 가능해졌다.

오리겐은 로고스라는 개념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인간의 형태로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과 태양의 광선과 같은 파생물로서, 말씀은 성부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로고스와 결합되어 있던 예수의 영이 되기로 한 영혼이 `한 영`을 이루었고, 이 영혼이 동정녀로부터 태어났을 때 신성과 인성이 뗄 수 없을 정도로 연합되었기에 육체와 하나 된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며 성자에 대해 설명한다. 또한, 그는 성령이 로고스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보았지만,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존재가 아님은 분명히 했다.

이러한 성자와 성령에 대한 그의 이해는 삼위 하나님의 세 위격을 존재론적으로 규명하려 했던 시도 점에서 분명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도적이었던 것은 로고스의 본성이었다는 점에서 아들은 로고스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성령 또한 그에 종속되어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렇듯 오리겐의 세 위격에 대한 가르침 안에서 살펴볼 수 있는 삼위의 위계를 설정한 것처럼 보이는 경향은 이후 아리우스가 종속론을 펼치는데 영향을 주게 된다.

 

7) 아리우스 : 호모오이시우스(종속설) 와 니케아 : 호모우시아(동등설)

 

4세기에 활동한 아리우스는 바우칼리스교회를 담임한 장로였다. 그는 유식하고 능력이 있어 경건한 설교자로서 명성이 높았으나 안디옥에서 단일신론의 영향을 입어 성부의 하나 됨과 자기 충족적 존재 양식을 강조하게 된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리스도는 완전신도 아니고 완전인도 아닌 그 사이의 제3의 존재였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는 열등하나 인간보다는 뛰어나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을 종속적인 관계로 보는 오리겐의 사상을 단일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의 존재가 아니며, 다른 피조물과 같고, 무로 만들어졌다. 비록 그리스도가 피조물 중 가장 먼저 태어났고, 세계 창조의 대행인이기는 하지만 영원하신 분은 아니다. 성자는 시점이 있으나, 성부는 시점이 없다.”라고 말하며 성자의 시점에 대해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알렉산더가 보기에 이는 완전히 이단적인 논리였기에 “성자는 영원하며, 그 본질에 있어서 성부와 다르지 않고, 창조된 일이 없는 존재”라고 반박하고 아리우스를 파문하게 된다.

아리우스와 알렉산더 사이에서 벌어진 이러한 논쟁은 겉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어 동방 전체로 퍼지게 된다, 이러한 와중 황제 측근에서 수도원장으로 있던 유세비우스가 아리우스를 지지하게 되자, 교회의 분열은 제국의 통일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325년 6월 19일부터 7월 29일까지 제국 내 전체감독회의인 제 1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니케아 회의를 소집한다.

회의가 개막되자 아리우스 지지파가 재빨리 신조를 제출했으나 거부되었고, 두 그룹의 중재를 원했던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신조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채택되었다. 이 신조에는 성자에 대해 “출생하신 것이며 피조된 것은 아니다”, “성부와 동질”등의 표현이 첨부되었으며, “성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는 없었다.”, “성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물질로 만들어졌다.”와 같은 어구를 삽입함으로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니케아 공의회의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 동일실체`를 가진 분이며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된 하나님`이시다”라는 삼위의 기초를 이룬 판결로 인해 아리우스파는 정죄를 당했지만, 그 영향력은 계속 확산되어 많은 지역이 아리우스주의를 천명하고 있었기에 33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고 아리우스주의는 다시금 승기를 잡게 된다. 그러나 379년 서방신학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테오도시우스의 황제가 즉위함으로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가 열리게 되고 이곳에서 니케아 신조가 재확인함으로 인해 아리우스는 파문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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