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유대교
1세기의 유대교
그리스 철학이 단일한 통일체가 아니었듯이, 1세기의 유대교도 단일한 통일체가 아니었다. 그 차이는 지역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예수님의 사역과 복음서들에 관한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된다고 말할 수 있고, 그리스 디아스포라의 유대교는 바울의 사역과 그의 서신서들, 그리고 사도행전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1. 유대 역사(B.C 538 - A.D 200)
페르시아 시대(B.C 538-332)는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역사에 있어서 불확실한 시대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가 중요한 것은 성경 시대 이후 유대교의 기반이 이 시기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고레스는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고, 왕실 행정부의 감독 하에 지방 제도들을 지지함으로써 앗수르와 바벨론의 정책방향들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남는 편을 택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충고에 따라 정착했고, 자신들이 정착한 ‘도시의 번창함’을 추구해서 그들 중에 고급 관원들이 배출될 정도로 번성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바벨론의 유대인 사회의 영향력이 증가했다. 바벨론의 탈무드(A. D 500)는 후에 그 곳의 랍비 학자들이 누린 커다란 특권들을 보여 준다.
귀향한 포로들의 두 가지 커다란 업적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한 것,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규제할 목적으로 율법을 수집하고 연구한 일이다.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선지자들의 위로와 함께 제2 성전 건축은 B.C 515년에 완공되어 헌당되었다. 그리하여 “제2 성전”시대, 또는 제2 유대 공동체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성전과 율법의 복구는 신변의 안전을 요구했다. 이것은 아닥사스다 1세 치하의 총독으로서 B.C 445-444년경에 예루살렘에 돌아온 느헤미야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이 복원되면서 얻어졌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 분열한 배경은 페르시아 시대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포로들은 예루살렘 주위에 남아있던 “그 땅의 사람들”(렘 24; 왕하 17:24)보다 사회적으로 우월감을 느꼈고, 북 왕조의 수도였던 사마리아 주위의 부쪽에 있던 이웃들보다 종교적으로, 그리고 민족적으로 우월감을 가졌다. 사마리아 정부는 성전과 도시 성벽의 재건을 반대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B.C 332년에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 요세푸스는 알렉산더가 대제사장 야두아를 만나 그에게 절하고 그의 지시 하에 성전에서 제물을 바쳤다는 이야기를 기록한다(Ant. 11.8.4-5). 마케도니아인들의 진입은 이미 지중해 지역의 동쪽에서는 진행되고 있던 헬라화 과정을 가속했다. 헬라 군대의 주둔지들이 형성되고, 도시들은 헬라 양식으로 세워졌다.
B.C 323년 알렉산더 사후에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안티고누스와 톨레미는 팔레스타인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안티고누스가 알렉산더의 영역을 확보하는 가장 유리한 조건에 있었지만, 그를 대적해서 뭉친 다른 장군들은 톨레미가 팔레스타인을 소유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톨레미 1세는 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로 이주시켰고,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인 분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톨레미 왕조 때에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
안티오쿠스 3세는 팔레스타인을 이집트로부터 빼앗았다. 그러나 그는 B.C 190년경 마그네시아의 전투에서 로마에 대패함으로 과중한 공세와 함께 재정난에 빠졌다. B.C 169년 안티오쿠스 4세는 대제사장 메네라우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노략했다. 마카비 1, 2서는 셀류코스 왕조에 대한 반항과 독립 초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정부 대표자들이 모딘에 있는 유대인 부락에 와서 제사장 맛다디아에게 지도자로서 이방신들에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했을 때, 맛다디아는 거절했을 뿐 아니라 왕실의 요구에 부응해 앞장선 유대인과 관원을 죽였다. 그 후에 맛다디아와 그의 아들들은 유대 산중으로 도망가서 조상들의 법을 사모하는 자들을 불러 모았다. 맛다디아는 죽기 전에 아들 유다에게 지도권을 넘겼는데, 그는 ‘마카비’(망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가문의 시대를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라고 한다. 유다는 시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우상의 제단을 헐었으며, 성전 지역을 재봉헌했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를 ‘수전절’(봉헌절, 하누카, 빛의 축제)이라고 한다.
헤롯 대왕(B.C 37-4년)은 자신의 통치 영역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왔고 산적들을 진압했다. 그는 농업과 상업을 통해 왕국에 엄청난 부를 가져왔다. 그는 성전을 재건했는데, 그 건축은 예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훈련된 제사장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로마의 총독 플로루스가 성전고에서 17달란트를 강탈한 일은 66년의 폭동을 촉진했다. 시리아의 총독은 그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진입했으나 패주했고, 열심당의 지도자들은 구원의 때가 도래했다고 확신했다.
네로 황제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베스파시안을 임명했다. 유대인들 중에 경쟁 상태에 있던 세 분파는 지도권을 놓고 싸웠고, 그들의 상호 파괴적인 반목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재촉했다. 마지막으로 점령된 것은 마사다였는데(74년경), 그곳을 방어하던 자들은 항복하지 않고 모두 자살했다. 유대는 집정관급의 보좌관에 의해 통치되는 완전한 속주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포위가 극에 달해 있을 때, 랍비 요하난 벤자카이는 관에 실려 도시를 빠져나가, 로마 정부로부터 얌니아에 자신의 학원을 재설립하는 허가를 받아냈다. 요하난은 힐렐학파의 지도자였는데,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으며, 로마에 복종하는 것을 지지했다.
하드리안 황제의 두 칙령(할례를 포함한 거세에 대해 사형을 명한 것, 옛 성전 자리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는 것)은 팔레스타인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이유가 되었다. 시몬이라는 지도자가 일어났는데, 그는 얌니아에 있는 요하난의 제자인 랍비 아키바에 의해 메시아로 인정받았다. 그는 민수기에 나타나는 “바 코흐바”(별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반란은 실패했고, 유대의 민족주의는 종식되었다(주후 132~135) .
로마인들은 이 반란을 진압한 후, 예루살렘의 공식적인 이름을 ‘콜로니아 앨리나 카피톨리나’라고 명명하고, 성전 자리에 주피터를 위한 신전을 세웠으며, 하드리안의 동상도 세웠다. 하드리안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금했다.
2. 초기 로마제국 시대의 유대인
유대인 이산(Jewish dispersion)의 기원은 구약 시대의 앗수르와 바벨론 포수에 있고, 헬라와 로마의 통치자들에 의해 진전되었으며, 헬라와 로마 시대에 가족들의 용이한 이동 조건에 힘입어 이동이 정상적인 일이 되었다. 기독교가 시작될 즈음에는 로마 제국과 동쪽으로는 파르티아 제국 등으로 확산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유대교는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전통적인 종교를 지닌 민족이었고, 마카비 시대에는 로마와 연합했으며, 시저와 같은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중대한 원조를 제공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의 신상들을 예배하지 않고, 자기들의 종교 의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3. 헬라 시대와 로마 시대의 유대 문헌 및 자료
‘70인역(70인경)’은 필라델푸스 톨레미 2세의 요청에 따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율법의 헬라 번역본을 제공하기 위해 72명의 유대 학자들이 만들었다. 구약을 인용한 대부분의 신약성경은 70인역을 따른다. 초대 교회의 성경은 헬라어 구약이었다.
다른 헬라어 역본들에는 ‘아킬라’, ‘심마쿠스’, ‘데오도티온’ 등 이 있다. 아킬라(Aquila)는 2세기 초에, 랍비 여호수아 벤 하나니아와 엘리에셀 벤 힐카누스와 아키바의 감독 하에 된 공식적인 역본이었다.
심마쿠스는 기독교 에비온파였으며, 3세기 초 또는 데오도티온 이전에 이 역본을 만들었다. 데오도티온은 에베소 출신의 유대교 개종자이며, 그의 역본은 아킬라의 직역적 해석과 심마쿠스의 명문가적 탁월함의 중간 형태였다.
개신교에서 외경이라고 부르는 책들을 카톨릭 교회에서는 “제2 정경”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일곱 권의 책, 에스더서의 첨부서, 트렌트 종교 회의에서 정경으로 인정된 다니엘서의 첨부서, 에스드라 상, 에스드라 하, 그리고 카톨릭에서 성경의 부록같이 취급하는 므낫세의 기도 등이다.
사해 사본은 1947년 사해의 서북 해안에 있는 키르벳 근교의 동굴들 안에 숨겨져 있던 사본들을 말한다. 그 문서들은 성경의 사본들, 외경과 위경들, 그리고 전에는 몰랐던 종파들의 문서들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사해 사본이라고 하면 B.C 2세기부터 68년 멸망 때까지 쿰란에 거주하던 집단의 도서관 유적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동굴 1에서는 두 개의 이사야서 두루마리와 다섯 개의 종파 문서들, 그 밖에도 72개의 단편들이 나왔다. 동굴 2, 3, 5-10은 그 범위와 분량에 있어서 발견된 것들이 총 130개 정도의 소수 밖에 되지 않으므로 부차적 동굴(Minor Caves)이라고 불려진다. 동굴 11에는 히브리 정경에 없는 시편들, 욥에 관한 탈굼, 그리고 고대 히브리어 사본에 있는 레위기 복사본을 포함하는 커다란 시편 두루마리가 있다.
요세푸스(37/38-110/120)는 왕족이었으며, 후에는 바리새파에 충성한 제사장이었다. 그는 티투스와 함께 로마로 가서 시민권과 연금을 받았다. 그는 유대인의 고대 역사와 종교적 신조를 찬양하고 반란의 탓을 소수의 과격주의자들에게 돌리면서, 유대 민족의 문학적 수호자로 헌신했다.
랍비 문학은 두 주요한 시대에 발달했다. 130년대에 바 코흐바의 반란이 실패한 후, 그리고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와 그의 후계자들 치하에서 기독교 제국이 설립된 후, 전자에 속하는 것은 미쉬나의 형성 및 가장 초기의 미드라심(2-3세기)이고, 후자에 속하는 것은 탈무드 편찬이다(5-6세기).
랍비 유다가 구전 율법을 기록하여 약간 보완해 편집한 것이 법적 판결을 주제별로 수집해 놓은 미쉬나(“반복하다”, “연구하다”)이다. 구체적으로 미쉬나는 할라카가 법전화된 것이다.
성문법인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은 미드라쉬라고 불린다. 미쉬나가 주제별로 율법을 법전화한 것인데 비해 미드라쉬는 성경 본문의 순서대로 배열된 율법에 대한 율법 학자의 해석을 기록한 주석이다. 그리고 미쉬나 자체를 해석한 결과는 탈무드(“연구”, “교육”)이다.
4. 당파들과 분파들
‘바리새’라는 명사는 일반적으로 “분리된”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된 것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율법 해석을 온 나라에 강제로 적용시키려 했던 정치적 당파로 나타난다. 그들의 해석과 적용은 “장로들의 유전”에 귀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두개’라는 명사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다윗 왕 시대의 대제사장이나 후기의 사독, 혹은 “의로운 사람들”과 연결된다. 그들은 보수적인 종교 태도들과 정치의 권력을 결합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엄격하게 해석했다.
‘쿰란 공동체’는 에세네파와 가장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쿰란 맹약자들은 에세네파이거나, 그들의 분파이거나, 아니면 에세네파와 유사한 알려지지 않은 분파였다. 스스로를 ‘사독의 아들들’이라고 했고, ‘의의 교사’를 중심으로 모여 공동체 생활을 했다. ‘에센’이란 명사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람어 ‘하사야’(경건한 자들’이 헬라화된 형태라는 것이고, 히브리어의 ‘하시딤’과 동일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열심당은 자유에 대한 열정,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바리새인들과 동일했다. 그들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 긴장을 고조시키는 일을 했다. 그들은 마사다를 포위하고 장악했으며, 로마에 함락되는 것보다 자살하는 편을 택한 무리였다.
헤롯당이라는 말은 헤롯의 당파나 그의 추종자들을 뜻한다. 그들은 분명히 헤롯 왕가, 특히 헤롯 안티파스의 지지자들이었다. 그 명칭은 그들이 정치적 당파 이상이었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지적하지 않는다.
사마리아인들의 기원은 열왕기하 17장에 묘사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들로 보았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가장 뚜렷한 점은 그리심 산에 있는 성전을 향한 집착이었다.
5. 신조들과 관습들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성전 예식과 연관된 일에만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성경을 읽을 때 야훼 대신 아도나이라고 읽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는 많은 명칭들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탈굼들은 하나님의 이름 대신 “메므라”(말씀)을 사용했다. 흔히 사용되던 대체명들은 “이름”, “권능자”, “천국”, “영광” 등이다. 명칭의 성화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언급 속에서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미래의 축복에 동참하려면 순수 혈통에 의해 선택된 민족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관심이 민족적인 순수성에 주어졌다. 선택된 백성이라는 믿음과 연관된 것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존중심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땅에 묻히면 부활이 보장되며, 거기에 묻힌 자들은 메시아가 올 때 가장 먼저 소생한다고 믿었다.
초대 교회는 유대교로부터 성경뿐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도 물려받았다. (1) 직역, (2) 탈굼적 해석 - 의역에 의한 해석, (3) 예표론적 해석 - 과거와 미래의 인물과 사건들의 상응, (4) 풍유적 해석 - 역사적인 배경과는 절연한 영원한 영적인 의미, (5) 페셔(페셰르) - 그 성취로 인해 밝혀진 숨겨진 비밀, (6) 미드라쉬적 해석 - 성경들을 혼합해서 개인의 경험이나 또는 다른 사건 등의 새로운 상황들에 대해 적용과 함께 새로운 해석을 주는 방식.
랍비들의 해석은 공식적인 규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힐렐은 일곱 가지 규율(미도트)을 만들었다.
(1) 칼 와호머(칼 베호메르) - 덜 중요한 것에서 더 중요한 것으로, 또는 반대의 추론,
(2) 게제라 샤와 - 한 절로부터 다른 구절로의 축어적 유비에 의한 추론,
(3) 비니안 압 미카툽 에하드 - 같은 본문으로부터 한 과(family)를 세우는 것, (4) 비니안 압 미셰네 케투빔 - 두 본문들에서 한 과(family)를 세우는 것,
(5) 켈랄 우페라트 - 일반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6) 카요제 보 베마콤 아헤르 - 다른 구절에 있는 유사한 것,
(7) 다보르 할라메드 메이니아노 - 문맥에 의해 성립된 의미
모든 유대인들이 개종자들을 호의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탄나임 문헌은 개종자들에 대한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의 다른 태도를 기록한다. 이방인이 유대교에 입교하려면 할례와 세례, 성전에 예물을 드리는 것 등 세 단계가 요구되었다.
개종자 세례는 침례였다. 미쉬나에 있는 논문인 미크와옷(침수탕들)은 몸이 완전히 잠기게 하기 위해 침례탕의 크기와 물의 분량에 관한 요구 사항들을 규정한다. 거기에서는 물을 뿌리는 의식, 물을 붓는 의식, 물에 잠기는 의식들을 분명히 규정한다.
여자 개종자들의 남편이나 남자 친척들은 유대인 공동체에 완전히 귀속됨을 증명하는 흔적인 할례를 받지 않고 유대교의 도덕적인 가르침들과 종교적인 관습들만 받아들였다. 이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theosebeis)이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유대인들의 국가적인 소망은 이스라엘을 위한 영광스러운 운명,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모든 은혜가 드러나는 “좋은 시절의 도래”에 있었다. 이 소망은 좋은 시절을 가져오는 중재자인 인간 메시아를 수반할 수도 있고,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메시아는 구약 성경에서 왕, 제사장, 그리고 은유적으로 선지자들을 일컫는 데 사용되었다. 감람유로 부음을 받는 것은 특별한 임무를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하나님의 선호하심의 특별한 대상의 표식이었다.
신약 시대에는 내세에 관한 통일된 유대교 교리가 없었다. 시락은 선인이건 악인이건 간에 사람이 죽으면, 음부(스올, 하데스)로 들어가며, 상급이나 징벌 없이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된다는 구약 성경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관점을 반복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솔로몬의 지혜서는 악인에 대한 벌로써 죽음이 주어지는 것과 불멸에 대한 헬라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암시한다.
부활의 교리는 정통 랍비 문학에서 필수적인 교리 중 하나가 되었다. 악인을 징벌하는 장소로서 음부(스올, 하데스)의 사용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신약 성경에서처럼, 간혹 지옥(게헨나)이 징벌을 위한 장소의 이름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유대인의 종교력에는 매주, 안식일, 매달 월삭, 그리고 연례적인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 가지 중요한 순례 절기(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때에는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왔다.
매주 일곱째 날을 거룩한 안식의 날로서 지키는 것은 유대 분리주의의 중요한 요소였다. 신약 시대 이전에 안식일은 휴식의 날일 뿐만 아니라 중요 회당 예배가 거행되는 날이었다. 성전이 있을 때는 희생제사가 드려졌고, 가족과 친구들간 공동 식사의 날이었으며 이 때 마시는 포도주는 축도에 의해 거룩해졌다.
월삭(New Moon)때에도 안식일을 지킬 때처럼 휴식하며 성전에서 특별한 희생제사를 드렸다. 오순절은 구약 성경에서 맥추절이나 칠칠절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오순절은 원래 봄철 수확의 종결을 축하하는 추수감사절이었다. 궁극적으로 이 명절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신 일을 기념하는 역사적이고 구속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초막절(장막절)은 가장 대중적인 축제였다. 포도를 수확한 후인 티스리월(9월 20일부터 10월 19일) 15일 시작되어 8일 동안 계속되었다. 초막절에는 사람들이 기쁨의 표현으로 할렐(시편 113-118)을 부르면서 높이 들어 흔드는 종려 가지와 시트론을 가지고 행진했다.
나팔절은 “한 해의 첫 날”(티슈리월 1일, 양력 9~10월 사이)이었다. 그 날에는 수양의 뿔로 나팔을 불었다. 그 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막절과 속죄일을 비롯한 중요한 종교적인 날들의 기간이 시작됨을 표시했다.
속죄일은 티슈리월 10일이었다. 속죄일은 명절이 아니라 엄숙한 금식일이며, 회개와 사죄를 위한 기도의 날이었다. 수전절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더럽힌 성전을 청결하게 하고,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유다 마카비우스가 제정한 것이다. 부림절의 제정에 대해서는 에스더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회당에서 에스더를 봉독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종교 의식이 없이 지내는 흥겨운 축일이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셰마(쉐마, “들으라”)를 회당에서 뿐만 아니라 매일 암송했다. 쉐마는 유대교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인 신명기 6장 4절의 첫 단어이다. 기도(테필라)는 아침에 한 번, 그리고 오후에 성전에서 흠 없는 예물을 바칠 때에 한 번 드렸다. 어떤 문헌에서는 하루에 세 번 기도했다고 지적한다.
6. 조직과 제도
순례 절기들의 목적지인 산헤드린의 소재지, 그리고 희생제를 드리는 장소인 성전이 세상의 모든 유대인들의 초점이었다. 원래 성전은 대략 남북 방향으로 1,590 피트 정도 되고, 동서로는 1,30 피트 정도인 성채와 시가지 사이의 북서쪽 코너에 있었다.
성채와 시가 사이의 공터는 시내로부터 오는 통로로 안내하는 주랑식의 돌출 현관들 또는 행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로 성전의 남쪽이었던 신성한 벽의 개방된 부분은 이방인들을 위한 뜰이라고 알려졌다. 성전과 이방인들을 위한 뜰 사이에는 낮은 난간이 있어 그 둘을 분리했다. 여인의 뜰은 성전 동쪽에 연접해 있었는데, 정결한 상태인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이 구역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뜰은 성전 자체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올 수 있었다. 성전은 A.D 1세기에 가장 부요했다. 주된 수입원은 20세 이상의 남자가 지불하는 반 세겔의 세금이었다. 성전 경내에 있는 나팔 모양의 13개 상자에 자유롭게 헌금했다.
제사장들은 24반차로 나뉘었는데, 각 반차는 한 번에 한 주간씩 일 년에 두 번 성전의 의식을 거행하는 책임이 있었고, 큰 순례 축일들에는 모든 반차가 대기해야 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바깥에 거주했고, 자기의 반차가 임무를 수행할 때에만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성전에서의 구체적인 임무는 제비뽑기에 의해 부여되었다.
헤롯 시대와 로마 시대에는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혀줌으로써 대제사장 임명이 이루어졌다. 대제사장직은 구약 성경에 따라 계승되었지만, 그리스의 왕들은 정치적인 호의로써, 또는 뇌물을 받고서 제사장들을 제거하거나 임명하곤 했다.
상번제(타미드)는 매일 두 번 드렸다. 성전에서 아침(일출)과 저녁(오후 3시)의 희생 제사가 있는 시간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당일 봉사하기로 되어 있는 제사장들은 자신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몸에 물을 담금으로써 그 일을 시작했다. 어린 양은 제단 위에서 완전히 불살라졌고, 관제(drinking offering)가 부어졌으며, 레위인들의 합창이 있었다. 찬송이 그칠 때에는 두 나팔을 불면 사람들이 그 소리를 신호로 삼아 절했다.
제사장들은 함께 감사 기도, 십계명, 그리고 셰마를 암송했다. 지성소에 있는 제단에 드리는 분향제는 예식의 절정이었다. 통상적으로 제사장은 평생에 단 한 번 분향하게 되어 있었다. 이 일 후에 다섯 명의 제사장들이 계단 위에 서서 기도하러 온 사람들에게 제사장의 축도를 했다. 예루살렘에서는 제사장들이 축도를 할 때 야훼라는 거룩한 이름을 사용했으나, 지방의 회당 예배에서는 대체명을 사용했다.
‘산헤드린’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synedrin"(공회, 의회)의 히브리어 음역이다. 신약 성경에 있는 산헤드린의 전신은 ‘장로들의 공회’, 또는 하스몬 왕조 시대의 ‘의회’였다. 신약 시대에 예루살렘에 있던 산헤드린은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로 구성되었다. 랍비 문헌에 의하면, 그것은 지파, 거짓 선지자, 대제사장에 관련된 경우를 판결했다. 랍비들은 70년 이후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을 ‘베트 딘’(Beth Din)으로 대치했다. 학자들은 집행적, 사법적, 그리고 학술적 기능들을 지녔다. 대제사장은 산헤드린을 주재했다. 대제상직은 성전 멸망과 함께 사라졌으므로, 70년 이후부터는 의장(Nasi)과 ‘아브 베트 딘’(ab beth din, 재판소의 최고참자)이 주재했다.
유대인의 공동체 조직은 과두정치, 민주주의, 전제 정치의 성격을 보였지만, 종종 이 세 가지 측면이 함께 기능을 발휘했다. 권한은 공동체와 그 도시에 사는 남자들의 집회에 속했다. 보통 연장자들의 위원회가 지도력을 행사했다. 간혹, 박식한 학자나 랍비, 특별한 상황에서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실제적인 지도자였다.
임명된 학자를 일컫는 전문 용어로서 ‘랍비’를 사용한 것은 70년 이후의 상황이다. 70년 이전에 이 단어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랍비의 직무는 유대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사법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 책임은 지도력, 가르침 그리고 전승을 보전하는 기능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랍비의 자격 요건에는 “지혜, 이해력, 명성”과 “능력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당 이득을 혐오하는 진리의 사람”과 같은 자질이 포함되었다.
이밖에도 40세 정도의 기혼자로서 자녀들의 양육을 마친 사람이 선호되었다. 랍비들은 초기의 전승들을 의존하고 수정하고 재형성하는 일을 통해 유대교에 중요한 변화들(모든 유대 남자들이 의무적으로 경건의 중심 행위인 토라를 연구하게 한 것, 그리고 기도를 하나님께 대한 공동예배 행위로 발전시킨 일)을 가져왔다. 그 과정에서 랍비들은 거룩한 사람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었가. 즉 제사장 대신에 학자들이 종교 지도자가 되었다.
기독교 기원들과 관련해서, 회당은 유대교 내의 가장 중요한 제도상의 발전이었다. 회당은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의 가르침의 중심지였고, 초기 기독교 신자들의 모집 장소였으며, 초대 교회의 예배와 제도에 관한 많은 국면들이 회당으로부터 유래되었다. 회당의 예배에는 기도와 성경 연구라는 두 개의 중심이 있었다.
여러 문헌들은 주로 성경 봉독과 연구에 관련된 예배를 묘사한다. 이것은 안식일 예배의 진수였지만, 장날(월요일과 목요일)에 성경을 봉독하기 위한 모임이 있기도 했다. 공적 모임의 기도(테필라)는 ‘18축도’였고, 아미다(기립)라고 불렸다. 후대의 회당 예배에서는 셰마와 테필라에 이어 성경을 낭독하기 전에 제사장의 축복이 있었다. 회당은 유대인 남자 10명이 모이면 조직할 수 있었다. 유대인 남자들은 누구나 성경을 읽고 번역하고 설교하거나, 또는 기도들과 셰마를 인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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