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의 빛을 던져주는 유대주의 이해
들어가면서
신약 연구에 있어 유대교와 유대문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유대인 출신 학자들 및 몇몇 유대문헌 전문가들(예. Jacob Neusner, J.C. VanderKam, J.H. Charlesworth, Bruce D. Chilton, E.P. Sanders)의 활동과 몇몇 유대문헌과 관련된 저널들(예. Journal for the Study of Judaism, Journal of Jewish Studies, Jewish Bible Quarterly)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Context Group’을 필두로 하여 많은 학자들이 1세기 그레코-로마 세계(Greco-Roman world)의 빛을 연구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헬라문화가 넓은 배경을 이룬다면 유대 배경은 신약 연구를 위해 좁고 특수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약 연구를 위해서는 그레코-로마 배경과 유대배경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특히 신약 연구에 있어서 구약과 신구약 중간기 문헌(intertestamental literature)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유대문헌, 유대교, 그리고 유대주의에 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여기서는 모두 살필 수 없고 몇몇 관심을 끄는 중요한 부분만 다루기로 한다.
1. 유대파들
바벨론 포로와 로마에 의한 제 2성전의 파괴 사이의 기간은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삶이 대단히 복잡하고 다채로운 형태로 표현된 시기였다. 요세푸스는 주후 1세기 말에 글을 쓰면서, 적어도 당시에 제사장들이 2만 명 정도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숫자는 6천 명 가량의 바리새인들 또는 4천 명 가량의 에센파 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지키고 전수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와중에서도 몇 개의 분파로 나누어졌다. 따라서 우리는 유대인을 생각할 때 동질적인 획일성의 관점에서 접근 할 수 없다. 즉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유대교가 아니라 다양한 유대교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다. 유대교라는 한 지붕 아래 여러 가족들이 논쟁하고 발전하고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1세기 유대교에 속한 대부분의 분파는 신약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이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이해하는데 있어 의견을 달리 했다. 복음서에서 저자들은 아주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한 유대인들의 종교 분파를 언급한다. 사도들의 선교 사역이 헬라 세계로 퍼져 나간 상황에서만 우리는 성경 기록자들이 넓은 의미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대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갈리오가 말했듯이 외부인에게는 유대 분파간의 다툼이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문제”로 여겨졌다(행 18:15).
(1) 바리새파
우리는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 기록했다고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문서를 거의 알지 못한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이들은 제사장이 아니었으며, 대신 토라를 가르치고 해석하는 사람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주전 167년에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의 헬라화 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마카비 가문의 저항운동을 따르는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 하시딤이라는 용어는 그 후에도 몇 가지 유대인의 신비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 중에는 AD 18세기에 창설된 것도 있다)에게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바리새파의 명칭의 기원을 율법의 정확한 의미를 ‘구체화하다, 정확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에서 찾기도 하고, 부활과 천사들 인정하는 동방신앙의 영향을 받았다는데 기초하여 어떤 페르시아어의 변형으로 보기도 한다. 하스모네 왕조 후반에 가장 큰 권력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바리새인’ (Pharisee)이란 원래 ‘분리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온 것으로서 ‘분리된 자’를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리주의자’란 뜻은 아니고, 이방인들의 부정하고 가증스러운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구별하고 정결하게 살고자 하는 무리라는 것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외세의 침략과 억압 속에서 민족적인 정결을 추구하기 어려웠을 때 그 보상 심리로 개인적인 정결에 힘썼던 사람들로 보인다. 하지만 바리새파의 목표는 개인적인 경건 그 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영광스럽게 하고 여호와와 맺은 언약의 규례를 따르며, 이스라엘에 약속된 온전한 구속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때로는 바리새파가 정치적인 압력단체의 역할도 했다. 그들의 과제는 (1) 이스라엘로 하여금 참된 조상들의 전통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는 것, (2) 이스라엘을 독립적인 신정국가의 지위로 회복시키는 것, 그리고 (3) 토라에 대한 연구와 실천을 통해서 압력집단으로서 그러한 운동의 선봉에 서는 것이었다.
로마 강점기 동안(특히 AD 63-70년) 에 바리새파의 적어도 한 분파는 적극적으로 혁명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들은 픙부한데 하나만 들면 바리새파의 두 지도자들이었던 Pollio와 Samaias는 헤롯에 대한 충성맹세를 거부하였고, 이 두 사람 외에 상당한 수의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했다. 하지만 바리새파 안에서 분파가 발생했다. 친로마적 분파와 친 열심당적 분파인데 아마 AD 44년에서 66년 사이에 발생한 것 같다. 그리고 이 둘의 중간인 중도파도 있었던 것 같다. 바리새파는 갈릴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들에 대표들을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바리새파를 도처에 산재해있던 극히 강력한 집단으로 보기는 곤란하다. AD 135년 바 코크바 반란 이후 바리새파는 진정으로 ‘랍비 유대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AD 70년 이후에는 바리새파와 서기관이란 용어가 일반적인 용례에서 사라지고 랍비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고 유대교는 당파나 종파를 덜 강조하게 되었다. 바리새파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멸망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리새파 운동을 전횡적인 제사장 계급과 제한된 성전 의식에서 유대교를 해방하려는 노력으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파의 정결 사상을 좀 더 살펴보자.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과 규례들을 철저히 지킴으로 정결 이념을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기본적인 법규범으로 보고 이를 해석하고 연구하였다. 이러한 해석 전승은 ‘조상들의 유전’을 형성하게 되었는데(마 15:2, 막 7:5), 이에는 율법의 법규들을 해석한 전승인 ‘할라카’(Halakah)와 성경과 관련한 민담들 또는 교훈적인 예화 전승인 ‘하가다’(Haggadah)가 있다.
바리새파는 왼쪽 팔소매에 기도문 조각들을 매고 다녔으며 옷단의 사방 구석에 성구 넣는 갑을 만들어 매달고 다녔다(마 23:5). 그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하였으며(마 23:23),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였다. 또한 특별한 안식일 식사를 하였고(눅 14:1), 자선 베푸는 것과 가문의 경조사에 참여하는 것 등을 열심히 하였다. 이들은 또한 영혼 불멸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을 믿었다(행 23:8). 예수님은 종종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셨다(보라. 마 23장의 7-8번의 질책). 왜냐하면 시작 당시의 율법을 위한 순수한 열정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차츰 쇠퇴하고 타락하여, 예수님 당시에는 주로 외적인 모습만 남아서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마 23:25; 23:28).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는 율법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입장을 보였던 힐렐(Hillel)학파와 이방인과 접촉하지 않았고 율법을 엄격히 해석했으며 反로마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샴마이(Shammai)학파로 나뉘어져서 대결하고 있었다. AD 70년 이후 온건한 힐렐학파가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생계를 직업을 통해서 꾸려 나갔다. 힐렐 역시 사소한 노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그들의 도를 전했기에 헬라-로마 세계의 스토아학파나 견유학파와 비교되기도 한다(Chilton, 1992:403).
(2) 사두개파
사두개파가 보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과 바리새파와 대립관계에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사두개인’(Sadducee)이란 이름은 대개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하 8:17; 왕상 2:35). 혹자는 ‘의로운 자’라는 의미의 차디크(Saddiq)에서 유래한 후손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파의 중심 세력은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인데, 세습 귀족들과 신흥 부자들이 합세하였다. 유대의 평민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고, 인기에 별로 연연하지 않았다. 사두개인들은 부자들에게서만 지지를 얻었고, 대중은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서기관들 및 장로들과 함께 산헤드린 공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는 의장을 포함하여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았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은 안나스였다. 그는 AD 6년부터 15년까지 공적인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퇴임 후에도 사위 가야바를 대제사장에 앉혀 놓고서, 35년에 죽을 때까지 계속 배후에서 산헤드린을 조종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산헤드린에서 제일 먼저 의견을 발표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군병들과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아 제일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는데(요 18:13), 이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은 로마의 권력과 밀착되어 있었다.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기 위해서는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도 사두개파 사람들을 이용하였다. 산헤드린은 유대의 내부 행정기관으로서 율법 문제에 있어서 자치권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로마 총독이 다스리고 있는 유대 지역에서는 직접세에 관한 한 산헤드린이 그 징수 책임을 맡아 그 업무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로마 총독 편에서도 이 산헤드린의 요구를 쉽사리 무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의 총독은 시리아 사절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병력을 소유하고 있지도 못했다(약 3,000명 정도: 가이사랴에 2,500명, 예루살렘에 500명 정도).
이러한 권력 관계는 복음서에서 총독 빌라도의 유약한 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자신은 원치 않았지만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의 압력에 밀려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말았다(눅 23:13-25).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대제사장들이 로마 군병들을 꾀어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고 말하라고 시키면서, “혹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거든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고 한 것은(마 28:13-14), 그들이 얼마나 로마의 권력과 밀착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사두개인들은 ‘전통’의 권위를 부인하고 오직 문서화된 ‘오경’(율법)만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된 일은 재판하고 율법의 규정을 따라 엄격히 시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부차적인 전승이나 인간의 가르침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경 속에서 분명하게 가르치지 아니한 어떤 것을 교리로 규정하거나 설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다.
사두개인들은 토라에 등장하는 천사들의 존재는 부인 할 수 없었지만 바벨론 포로 이후 무성하였던 천사와 귀신에 대한 발전된 신앙들에 대해서 냉담했다. 사두개인들은 사후의 영의 존속이나 부활을 믿지 않았다(행 23:8; 막 12:18-27; 행 4:1-3; 5:17 참조; 부활을 찾는 사람도 간혹 있기는 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은 자신의 과오에 대해 이 지상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현세에서의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두개인들은 ‘이스라엘의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믿음으로써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예수님께서 잡혀서 죽으신 것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결국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의 권력에 도전했기 때문이었다(마 27:18). 곧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막대한 이권을 누리고 있던 대제사장들 세력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할 뿐만 아니라(마 21:12-17),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름으로 사두개파 사람들의 지위가 위태롭게 되었기 때문이다(요 11:47-53).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사두개파는 변화된 유대교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여 역사에서 사라졌다.
(3) 서기관들
바리새인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나는 사람들로서 서기관(히브리어로는 소페림, soferim)들이 있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 출신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약간의 구별이 있다. 바리새인은 바리새파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반 대중들을 뜻하지만, 서기관은 오랜 기간 동안 엄격한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이며 종교 지도자를 뜻한다. 즉 바리새인들이 평신도라면 서기관은 교역자이다. 서기관은 율법을 해석하고 그것을 생활 가운데 적용하고 가르치며, 또한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함께 산헤드린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서기관의 기원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 겸 학사인 에스라(스 7:11)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관이 되는 데에는 출생이나 혈통과는 무관하였으며, 엄격한 공부를 통해 일정 조건을 갖추면 누구나 서기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공부와 훈련은 대단히 힘든 과정이었다.
저명한 서기관들 주위에는 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 학생들은 수업료를 내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율법 공부와 함께 엄격한 생활 훈련을 받았다. 서기관식 교육에 의하면, 선생은 앉아서 가르치고 학생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공부했다.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자기의 학창 생활을 회고하며 말할 때 “가말리엘의 발아래에서” 배웠다고 했다(행 22:3). 공부가 다 끝나면 장엄한 임직식을 통해 서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서기관은 보통 ‘랍비’라고 불리며 백성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자체를 따르기보다 인간의 해석과 유전을 더 따랐으며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을 좋아했으며, 모든 것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함께 묶어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책망하셨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으며(눅 16:14), 서기관들도 마찬가지로 예물과 금을 중요시 여겼다(마 23:16-2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백성들을 가르치고 지도했으니 그 당시 유대의 종교적 상황이 어떠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소경된 인도자’라고 불렀던 것이다(마 23:16).
(4) 에센파
에센파라는 이름이 신약 성경과 탈무드 문헌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필로, 요세푸스(13회 언급함), 플리니(Pliny the Elder), 2세기의 헤게시푸스, 그리고 3세기의 히폴리투스(처음으로 에센파를 이단적 유대 분파로 봄)가 에센파를 언급한다. 필로는 주후 40년 이전에 기록된 그의 책에서 에센파를 처음으로 언급했지만 그가 처음으로 에센파를 안 것 같지는 않다(보라. Beall, 2000:343).
금욕주의, 절제 그리고 묵시 사상으로 일관하여 은둔 혹은 공동체 생활을 한 사람들로 보인다. 에센파 운동은 바리새파와 비슷한 혹은 동일한 조상, 즉 BC 3세기 말과 2세기 초에 어렴풋이 그 활동이 포착되는 하시딤에서 유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아마 주후 70년을 기점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에센파는 신약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한 종파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집단이다. 헬라어로는 Essēnoi 혹은 Essaioi로 라틴어로는 Esseni로 불린다. ‘에센인’이란 말은 원래 ‘거룩한 자들’이라는 아람어 ḥasayyâ에서 유래한 것같이 보이는데,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이 이끈 공동체로 추정된다(참고. 마카비 1서 2:42; 7:13; 마카비 2서 14:6).
이들은 오니아스 3세 이후의 대제사장인 야손(BC 174-171년)과 그 후계자들을 부당한 찬탈자로 간주하고, 예루살렘을 떠나 팔레스틴의 많은 도시들에 따로 모여 살면서, 수도원과 비슷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 ‘제의적 거룩성’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예루살렘 동쪽 30km지점의 사해 부근에서 생활했던 쿰란 공동체이다. 처음에는 베두인(the Bedouin)에 의해 그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1947(1951)년부터 The École Biblique in Jerusalem의 R. de Vaux등에 의해 사해 부근 광야의 동굴에서 여러 항아리들이 발굴되었데, 그 속에는 구약 성경과 그리고 그 공동체의 규칙과 사상을 적은 두루마리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오늘날 학자들이 이 문서들을 연구함으로써 그 당시 쿰란 공동체의 생활과 사상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공동체에 가입하는 사람(남자)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헌납하였으며 옷과 음식을 포함하여 모든 재산은 공동소유로 정하였다. 공동 소유를 감독할 사람을 선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가입 지원자는 에센 공동체 밖에 머물면서 1년간의 시험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이 기간을 무사히 통과하면 (흰옷을 입고 젊은 회원에 의해 존경받는 나이든 회원이 씻어 주는) ‘결례’(the purificatory bath)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여기서 ‘결례’란 매일 정오쯤(식사 전후에 제사장이 기도하는) 거룩한 공동 식사(common meal) 전에 함께 목욕하는 의식을 뜻한다. 그 후 다시 2년이 경과해야만 완전한 회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그제야 비로소 ‘공동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공동 식사에의 참여를 허락하기 전에 엄숙한 맹세(awesome oaths)를 하였는데, 서약 중에 연장자에게 복종하는 것과 불의한 자를 미워하겠다는 것도 있다.
하루 일과는 해 뜨기 전에 기상하여, 역시 일출 전에 아침 기도를 드린 후 점심 전 까지 노동했다. 이들은 매일 농사일, 목축일, 양봉, 혹은 장인으로서 일을 했다. 노예를 거느릴 수 없었다. 그 후 씻고 공동식사 후 저녁까지 다시 일하고 저녁 공동 식사를 했다.
이들의 공동체 생활은 엄격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재정을 허위 보고하면 1년간의 추방과 식사량 4분의 1이 감축되는 벌이 내려졌다(F.F. Bruce, 1978:249). 회집 중에 졸면 30일간 벌을 받았으며 큰 소리로 웃어도 30일간 벌을 받았다. 안식일을 엄수했으며 안식일에는 헛소리를 금하고 1,000 규빗(약 500 m) 이상의 통행을 금지하였으며, 긴급 처방도 금지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결혼하지 아니하고 독신으로 지낸 세례 요한과 (의의 교사와 비슷하다고 보아서) 예수님이 혹시 이 에센파 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과 에센인들 사이에는 유사점과 더불어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쿰란 공동체의 ‘결례’는 매일 점심 식사 전에 하는 반복적인 목욕이었던 반면에, 요한이 베푼 ‘세례’는 단 한 번만 공개적으로 베푸는 단회적인 회개의 세례였다. 세례요한이 먹었던 꿀과 메뚜기가 쿰란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에센인들은 “불의한 자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5:44). 뿐만 아니라 안식일 문제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은 하실 수 있다고 하셨다 (눅 6:19).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집단을 이루어 따로 살 것을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 한 가운데 두셔서 ‘세상의 빛’으로서 이 세상을 비추게 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은둔주의자가 아니었고 제의 자체에 강조점을 둔 적 없으셨다. 주님은 그 당시 유대인에 의해 부정하다고 여겨진 사람들과 교제하는데 거리낌도 없으셨다. 예수님은 의의 교사(the Teacher of Righteousness)보다 약 100년 후대의 분이며, 의의 교사는 쿰란 공동체에서 종말의 메시아(the end-time Messiah)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의 죽음 역시 특별한 의의를 가지지 못했다(자세한 것을 위해서는 Beall, 2000:347을 보라).
하지만 에센파를 이렇게 은둔적-분리주의적인 분파요, 공동생활과 정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면 오해다. 에센파의 상징 세계(symbolic world)는 유대교의 적법한 상속자로서 그들 자신의 존재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 집단의 실천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야훼께서 메시야를 보내서 거룩한 전쟁을 이끄실 때 그들은 일어나 싸울 것이지만, 그때까지는 아니었다.
에센파의 신학은 (1) 한 분 신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선지자들의 신이 존재하고, (2)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신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질서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한 신의 역사를 촉진시킬 수단으로 택함 받았고, (3) 공동체의 규칙에 명시된 경건과 정결은 이들이 언약에 동참하고 있음을 반영하며, (4) 이들의 종말론은 철저히 미래적인 하나님의 개입만 바라지 않았고, 이미 야훼의 활동이 시작된 것으로도 보았다.
(5) 열심당-셀롯인들
셀롯인(Zealot: 눅 6:15; 행 1:13)은 다르게는 ‘열심당원’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원래는 바리새인들로 추정된다. 열심당이란 이름은 이들이 로마인들과 격렬하게 투쟁하여 예루살렘을 방어한 과격한 단체라서 붙여진 것이다. AD 6년에 아켈라오가 물러난 후 로마가 유다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을 때, 로마 정부는 효과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등록하게 하였다. 그러자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일부가 떨어져 나가 로마 정부에 항거하였다. 그들은 로마 황제를 ‘주’(Kyrios)로 부르기를 거부하며, 무력으로 로마 정부에 저항하였다.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기보다도 스스로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려고 하였다. 갈릴리 유다가 그 중 한 지도자였다(행 5:37).
이들 중에는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도 있는데, 곧 셀롯인 시몬이다(눅 6:15). 그러나 셀롯인들은 계속되는 로마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소멸되지 않았다. 주후 54년에 겉 옷 속에 단도를 감추고 다녔던 시카리 (Sicarii) 또는 암살단(Assassins)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최초로 언급되었다. AD 66년에 유대와 이두매와 갈릴리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때 셀롯인들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다윗 계열의 메시아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묵시적인 환상에 사로 잡혀 있었다.
결국 AD 70년에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2년여 동안의 예루살렘 포위 기간 동안에 죽은 자가 약 120만 명이며, 반란군의 지도자 요한과 시몬은 포로로 잡혀서 로마로 끌려가 로마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롯인들은 계속해서 저항했고 제 2차, 제 3차 유대인의 전쟁을 일으켰으나(115-117년, 132-135년) 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여기서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영(營; legion)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게 하여 그를 잡으러 온 무리들을 물리칠 수도 있었지만, 그런 무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6) 헤롯당
헤롯당(the Herodians- 마 22:16; 막 3:6, 8:15, 12:13)은 헤롯의 후손들 중 하나가 다시 등극하기 원하는 당파였음에 분명하다. 복음서에서 헤롯당원들은 바리새인들과 항상 같이 등장하는데 이유는 아마 예수님을 공동으로 배척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과 같이 등장했던 헤롯당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교부들 중에는 헤롯당이 헤롯을 메시아로 믿었다고 하는 사람이 한 둘 있었지만 이것은 억지 추측으로 보인다. 헤롯당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2. 유대묵시 문학 (Jewish apocalyptic literature)
사해사본은 AD 1세기 동안 팔레스틴에서 널리 회람되던 묵시문학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였다. 마지막 때에 대한 강조는 바벨론 포로 귀환 후 기록된 유대 예언서에 나타나 있으며, 마카비 혁명으로 그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경건한 유대인들 중에는 마카비 혁명 이후에 펼쳐진 부패한 하스모니안 제사장이 다스리던 정부에 불만을 품고, 실제로 성취된 적이 없는 정결한 유대교로 회복시킬 메시아의 도래를 대망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세 단계를 통해 이룩된다고 보았다.
첫째, 이스라엘에서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땅에 속한 자들 (암 하아레츠)을 추방하고, 둘째, 디아스포라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돌아오고, 셋째 이스라엘 땅을 외국 통치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묵시문학이 위기 상황에서 출현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헤롯 대왕이 죽었던 BC 4년과 AD 6년에 헤롯 아켈라오가 권좌에서 쫓겨났을 때, 그리고 주후 60년대의 유대-로마 전쟁과 AD 130년대 중반의 바 코크바 전쟁 때 묵시 사상이 번성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예수님 당시에는 묵시사상이 약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복음서의 기록 연대인 60년대에는 묵시 사상이 강화된 시기이므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묵시사상의 빛 속에서 재해석하여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참고. 엘버트 벨, 2001:91).
(1) 용어: ‘Apocalyptic’이란 말은 뤼케(F. Lücke)가 1832에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묵시문학 연구를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는 묵시문학이 예언 정신이 뒤늦게 드러난 형태로 파악하면서 예언과 관련한 기본 사상과 표현 형태를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 가운데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했고, 또한 묵시문학가를 하나님 나라의 미래와 관련한 이미 주어진 생각을 구체적으로 더욱 발전시킨 사람으로 보았다. 최근에는 1947년 이후 쿰란 문서의 발견으로 묵시문학에 대한 열기가 많이 일어났다. 묵시문학은 신구약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에 주로 번성한 것으로 BC 200-AD 200년에 꽃을 피웠다. 그 기원에 관해서는 지혜문학, 예언 전승, 혹은 유대 제의 등으로 추측한다.
(2) 특징:
현 세상(this age)과 오는 세상(age to come)에 대한 이원론(dualism).
현 세상에 대한 염세-비관주의(pessimism)
오는 세상의 임박한 도래에 대한 기대
운명에 대한 예정 혹은 결정주의(determinism)
박해상황에서 출현
가명(pseudonymity, pseudonymous in authorship)
환상을 보기 위한 하늘 여행(heavenly journey)
과거로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예언의 형태로 기록함
내용을 서술하는 언어의 형태가 다양함(시, 산문 등)
(3) 유대묵시 문헌들
이디오피아 에녹서(=제 1 에녹서): 총 108장으로 구성되었고, BC 3-1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되었는데 나중에 헬라어로 다시 이디오피아어로 번역됨. 현재는 이디오피아어로만 완벽하게 전승된다. 아담 이래 인류의 7번째 에녹에게 계시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니엘서: 비록 묵시적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선지서다. 많은 학자들은 다니엘서를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당시인 BC 160년경에 관련된 예언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Ex eventu(사건 후 예언)가 아니라, 다니엘이 직접 기록했고 하나님의 예견적인 능력으로 다니엘보다 훨씬 후대인 에피파네스 시대에 이루어 질 것을 내다보았다고 본다면 무리 없다. 네 왕국설(단 2, 7장) 그리고 인자 (7:13이하)가 초점의 대상이다.
시리아어 바룩서(syrBar) = 제 2바룩서 (2Bar)= 바룩 묵시록(ApcBar): 이것은 LXX에 나오는 바룩서 (제 1바룩서)와 다르다. 총 87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77장만 묵시를 담고 있다. 주후 100-130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 4에스라서(4Esr): Vulgate의 제 1에스드라서 (=1에스더서)는 구약의 에스라서와, 2에스드라서는 느헤미야서와, 3에스드라서는 위경 에스라서와 상응한다. 이런 3권과 구분시키기 위해 제 4에스라서라 부른다. Vulgate에는 4에스라서가 3-14장에 배치되어 있으며, 1-2장은 제 5에스라서로, 15-16장은 제 6에스라서로 배치됨. 제 4에스라서 3장 1절은 BC 586년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30년째 되던 해(BC 556)에 에스라가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시작한다. 역사적 인물인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는 그 후대의 사람이기에,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30년 후인 AD 100년경으로 저작 연대를 잡을 수 있겠다. 여기서 익명성이 다시 분명해 진다. 아마 예루살렘 멸망을 주제로 하는 감람산 강화나 계시록 그리고 해당되는 구약 본문을 위해 아주 중요한 빛을 줄 수 있다.
제 4 에스라서의 내용 구분:
제 1환상(4 Esr 3:1-5:19): 에스라는 시온이 왜 황폐화되었는지 묻고 있다. 천사 우리엘이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없다고 말함.
제 2환상(5:20-6:34): 내용은 1환상과 비슷함.
제 3환상(6:35-9:25): 왜 이스라엘은 이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가를 에스라가 물음.
제 4환상(9:26-10:59): 슬픔에 가득찬 한 여인과 회복될 큰 도시가 등장함.
제 5환상(10:60-12:49):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독수리 한 마리는 메시아가 등장하기 전에 있을 4번째 왕국 (로마)를 상징함. 이것이 사자 (아마 메시아)에 의해 잡혀 먹힘.
제 6환상(13:57-14:48): 에스라가 회복될 환상을 보고 하늘에 올라간다.
신약 대부분 특별히 예수님, 요한, 그리고 바울의 사상이 묵시 문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케제만은 묵시문학을 ‘전체 기독교 신학의 어머니’라 부른다. 묵시 문학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고 있는 것 같다.
3. 랍비문헌(Rabbinic literature)
먼저 랍비문헌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랍비문헌은 AD 70부터 바벨론 아카데미가 몰락한 AD 1040년까지 거의 천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에 형성되었다. 당시 유대인의 종교와 삶의 두 구심점은 ‘에레츠 이스라엘’(Erets Israel) 즉 팔레스틴과 바벨론이었다.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파괴는 자연스럽게 제사장 계층의 파멸을 초래했고 이스라엘 전체의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새 구심점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야브네(Yabneh)에 Yohanan ben Zakkai를 중심으로 바리새파와 서기관들이 모여들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는 ‘가르침의 전당’(독일어로는 Lehrhaus)을 중심으로 모였다. 그 후 AD 132-135년에 로마에 항전한 Bar Kokhba revolt가 발발하여 유대인들이 죽거나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후 주후 138년 로마 하드리안 황제가 죽은 후에야 다시 유대교의 복구 운동이 Jehuda ha-Nasi(단순히 ‘랍비’라 불리기도 함)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AD 135년 이후에는 ‘가르침의 전당’이 야브네를 떠나서 갈릴리의 ‘우샤’(Usha)로 옮겼다. 그 후 다시 Beth Shearim와 Sepporis를 거쳐 3세기 중엽에는 Tiberias에 정착하게 되었다. 3세기는 유대인의 안정기인데, 유대인들의 최고 지도자에 해당하는 ‘나씨’(nasi- patriarchate: 랍비의 家長적 권위)의 권위가 커지게 되었고 또한 그를 중심으로 한 랍비들의 모임인 ‘라비낫’(rabbinate)의 지위가 상승했다. 이 안정된 시기에 구전 토라를 문서화했는데 그 결과 ‘미쉬나’(Mishna)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이후의 랍비문서의 토대가 되었다.
그 후 AD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밀란 칙령’(Edict of Milan)을 통해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을 때 유대교의 발전은 큰 장애물에 봉착하게 되었다. 율리안 황제가(AD 361-363) 예루살렘 성전복구를 허용한 것은 하나의 예외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니케아신조(Nicene Creed, 380년)의 영향은 팔레스틴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국 유대교 자치조직인 ‘페트리아르키’ 지도체가 415-429년에 소멸되고 말았다. 그 후 438년의 Codex Theodosianus(데오도시아누스의 법)과 529/534년의 유스티아누스 법(Codex Justianus)으로 인해 유대인의 법적 지위는 불리한 채로 고정되었다고 한다. 614-628에 팔레스틴은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638년에는 아랍의 공격을 받았다.
한편 바벨론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유대인과 다른 역사를 경험했다. BC 586년에 포로로 잡혀 간 이래 바벨론에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AD 132-135년의 바르 코흐바 전쟁 때 팔레스틴에서 바벨론으로 이주한 유대인도 많았다. 당시 바벨론은 로마가 아니라 (로마의 대적이었던) 파르티안 (Partians)의 지배 하에 있었다. 226년까지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이주했는데, 그 후 조로아스트교를 따르는 페르시아의 Sassanid왕조가 바벨론을 지배하게 되었다. 사싸닛왕조는 반로마 정서의 유대인들을 환대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때 안정된 시기를 누렸다. 아바 아리카(Abba Arika)는 미쉬나를 바벨론의 Sura로 가져와 수라학파를 형성했다. 당시에 두개의 유대인 조직이 있었다. 정치를 담당한 최고 지도자인 ‘레쉬 갈루타’(Exilarch)와 최고 종교지도자인 ‘가온’(Gaon)을 중심으로 팔레스틴학파를 능가한 조직을 갖추었다.
그 후 이런 번성을 통하여 ‘팔레스틴 탈무드’를 능가하는 ‘바벨론 탈무드’가 집필되었다. 사싸닛 왕조는 AD 640년에 아랍인에 의해 점령당하였는데, 이 아랍제국의 수도가 바그다드로 결정되었을 때, 팔레스틴 유대인 보다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바벨론 유대인들의 비중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인들의 전성기도 아랍세계의 구심점인 ‘칼리팟’(Caliphate)의 멸망과 더불어 쇠퇴되었다. 주후 1040년에 바벨론에 있던 유대인 아카데미가 문을 닫았다. 1099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의 진격과 더불어 팔레스틴의 유대인공동체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 후 스페인과 아프리카의 튀니지와 모로코가 새로운 유대인의 거점이 되었다. 이로써 랍비문헌을 산출한 유대인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랍비) 유대인의 시대를 4시대로 나누어 본다면:
1. 제 1시대: AD 70-3세기 초. 이 시대를 타나임(Tannaim) 시대라 부름.
2. 제 2 시대: 3세기 초- AD 500년 경. 아모라임(Amoraim) 시대.
3. 제 3 시대: AD 6-7세기. 사보라임(Saboraim) 시대.
4. 제 4 시대: 그 후 1040년까지. 게오님(Geonim) 시대.
4. 토라 (Torah)
랍비전통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토라(Torah)이다. 미쉬나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기록된 율법을 받았을 때, 동시에 그것의 구전 해석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이 구전 해석은 온갖 종류의 실천 사항을 포괄하는 것으로 율법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전해졌다.
먼저 기록된 토라(The written Torah)를 살펴보자. (비평)학자들은 모세 5경은 BC 5세기경 페르시아 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다른 성문서는 BC 2세기에 와서야 완결되었다. 하지만 보수진영에서는 이른 시기를 주장한다.
구전의 토라(The oral Torah): 토라는 원래 가르침 혹은 교훈을 의미하는데 이 말 자체에 이미 구전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요세푸스는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지 않은 구전 토라가 바리새파에게서 기원한 것으로 본다. 이 구전 토라의 문서화는 AD 5-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구전 토라를 3가지로 분류해 보면:
(1) 할라카(Halakha):
히브리어로 ‘걷다’라는 의미인 동사 ‘할라크’에서 유래한 말로 ‘이스라엘이 걸어야 할 길’을 표시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교법과 관련된 모든 실천 사항들이 할라카에 속한다. 할라카는 불변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시대에 따라) 내용이 바뀌는 것이다. S. Safrai는 할라카를 유대 문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본다. 할라카를 세분해 보면 (a) 좁은 의미로는 탈무드에 나오는 할라카 모음 중에서 가장 작은 단위를 뜻함, (b) 보다 넓은 의미로서 개개의 법 조항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됨, 그리고 (c) 가장 넓은 의미로는 유대교 내의 여러 상이한 법률 구조를 가리키는 말(예. 사해 부근의 쿰란 사람들의 할라카), 마지막으로 (d) 법률적인 사항과 관련된 것들을 모은 ‘문학의 장르’로서 이해 할 수 있다.
(2) 아가다(아람어 Aggada/ 히브리어 Haggada):
‘이야기하다’, ‘말하다’, ‘연설하다’라는 뜻을 지닌 lehaggid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중세 시대 (특히 993-1055년)에 Samuel ha-Nagid는 “아가다란 율법이 아닌 온갖 주제에 대하여 탈무드에 나오는 모든 해석이다”라고 정의한다. 이 말은 랍비전통에 있어서 할라카 이외의 모든 것이 아가다란 말이다. 할라카와는 달리 아가다에는 통일된 언어 사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아가다는 성경에 대한 짧은 주석, 이야기, 삽화, 우화, 동화 등의 형식을 담기도 한다.
그밖에도 현자들의 세계관, 삶의 지혜, 다양한 신학 주제, 지방 풍속 또는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주제도 포함하고 있다. 때로 대화나 논쟁의 형식을 가진다. 그러나 아가다의 본래 핵심은 성경 주석과 관련되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아가다는 현재의 삶을 종교적으로 극복하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아가다는 할라카를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할라카와 아가다의 구분이 모호할 때가 있다.
(3) 미드라쉬(Midrash):
이 말은 ‘구하다’ 혹은 ‘묻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다라쉬’에서 나온 명사형으로 ‘연구’ 혹은 ‘공부’를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50회 이상이나 하나님이나 토라를 그 목적어로 하여 이 말이 사용되었다(예. 에스라 7:10). 랍비 시대의 미드라쉬는 특별히 성경에 대한 연구나 그 주석을 뜻하였다. 동시에 이 연구의 결과물을 미드라쉬라는 말로 지칭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 주석가/설교자를 다라샨이라 부른다. 미드라쉬의 근원을 구약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역대기서를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의 일종의 미드라쉬로 이해할 수 잇기 때문이다.
G. Vermes는 랍비 시대의 미드라쉬 주석방법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Pure Exegesis (순수한 주석)인데 역사비평과 비슷하다. 다른 하나는 Applied Exegesis(응용 주석)인데 이것은 주석가가 현재와 관련지어 행하는 주석을 말한다. 랍비 시대에는 할라카적 미드라쉬(Halakhic Midrash)와 아가다적 미드라쉬(Aggadic Midrash)가 있었고, 그 형태에 따라서 주석적 미드라쉬(Exegetical Midrash)와 설교적 미드라쉬(Homoletic Midrash)가 있다. 히브리어 자음에 모음이 붙은 맛소라본 이후에는 본문의 의미가 주로 하나로 한정되었기에 미드라쉬 작업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5. 주요 랍비 문서 개관
미쉬나는 랍비 문서의 기초이다. 따라서 탈무드가 미쉬나를 주석하여 확대한 것이며, 뒤에 살펴보겠지만 Tosefta 역시 미쉬나의 일종의 보충서이다. 따라서 미쉬나를 먼저 살펴보자.
(1) 미쉬나(Mishinah):
‘반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샤나’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했다. 반복하다는 말은 구전 전승을 반복하여 배운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미쉬나는 ‘배움’ 혹은 ‘구전의 가르침’, 혹은 ‘가르침의 문서화된 형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 시대 이후의 유대교에서 나온 최초의 율법 모음집인 미쉬나는 처음에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대략 2세기 말경에 이르러 문서화되었다. 미쉬나는 할라카, 아가다, 미드라쉬를 모드 포함한다. 미쉬나는 6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6세다림(‘세더’의 복수형, 질서라는 뜻)이 있고, 1개의 세다림은 7-12개의 마쎄컷(직물 조직, tractate)로 구성되어 있고, 이 마쎄컷은 페렉(장, chapter)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세더는 농사에 관련된 법들이 포함되며 11개의 마쎄컷을 포함한다.
두 번째 세더는 축제일을 포함하며 12개의 마쎄컷으로 구성된다.
세 번째 세더는 여자들을 주제로 하여 7개의 마쎄컷으로 구성된다.
네 번째 세더는 ‘손해를 끼침’이란 뜻의 ‘네지킨’(Neziqin)이라 불리는데, 10개의 마쎄컷으로 구성된다.
다섯 번째 세더는 ‘성스러운 것들’을 다루며 11개의 마쎄컷으로 구성된다.
여섯 번째 세더는 정결을 다루며 12개의 마쎄컷을 포함한다.
미쉬나의 구조는 이후의 토세프타와 탈무드의 구조의 본보기가 된다. 따라서 미쉬나가 만들어진 시대를 ‘랍비 전승의 황금기’라 부른다. 미쉬나는 팔레스틴의 지도자인 예후다 하-나씨에 의해 AD 190-200년경에 첫 편집작업이 완성되었다. 4세기에 와서야 미쉬나의 문서화 작업의 완성이 되었다.
(2) 피르케이 아보트(Pirkei Avot= The chapters of Avot- 이 부분을 위해 참고할 책은 조철수(역주). 1998. 선조들의 어록: 초기 유대교 현자들의 금언집. 성서와 함께):
이 작품은 미쉬나의 4번째 세더 중에서 9번째 마쎄컷이다. 미쉬나 이해를 위한 입문서로 불린다. 단순히 그냥 ‘아보트’(조상들이란 뜻)라고도 부른다. 조상은 권위 자체이기에 ‘권위를 담은 장(章)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BC 300년부터 AD 200년까지 60명의 유대교 현자들이 남긴 교훈을 채록한 책이다. 유대교의 모든 문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까지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출간된 4000여 권의 유대교 문헌 가운데 ‘선조들의 어록’에 대한 인용과 해석이 가장 많다고 한다.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 장에서 모세 시대 이후로 한 번도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내려온 유대 전승을 소개한다. 따라서 미쉬나 시대의 연대기를 밝히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 내용은 히브리 지혜문서의 발전된 형태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은 유월절부터 칠칠절(오순절) 까지 6주 동안 매주 안식일 오후에 회당에서 피르케이 아보트를 1절씩 읽고 강론을 듣는다. 마지막 주 안식일에는 부록인 여섯 번째 장 ‘키얀 하-토라’(토라의 소유)를 읽음으로 다음 주 칠칠절을 준비한다. 아보트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모세는 토라를 시내 산에서 받아 여호수아에게 전해주고 여호수아는 장로들에게, 장로들은 예언자들에게, 예언자들은 대의회 의원들에게 전하였다. … 세상은 세 가지 위에 서있다. 토라 위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 위에, 자비를 한껏 행하는 일 위에.”
(3) 토세프타 (Tosefta):
‘토세프타’라는 말은 아람어로 ‘삽입’ 혹은 ‘보충’이란 의미이다. 즉 미쉬나에 대한 삽입과 보충(을 담은 책)을 의미한다. 토세프타의 4분의 1은 미쉬나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 독자적인 할라카를 포함한다. 미쉬나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6개의 세더와 33개의 마쎄컷 (장)으로 구성되는데, 미쉬나 처럼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의 3가지 기능을 소개하면:
(a) 토세프타는 미쉬나에 대한 가장 이른 주석이다. 랍비 아키바와 그의 제자들이 토세프타의 시발점을 이룬다.
(b) 미쉬나에 포함된 할라카를 더욱 자세히 다루고 있는 일종의 보충서이다.
(c) 미쉬나의 연속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미쉬나에 들어오지 못한 타나임 시대 가운데 마지막 세대의 할라카 결정들을 담고 있다.
(4) 탈무드(Talmud):
‘타무드’라는 말은 ‘배우다’라는 뜻의 ‘라마드’(lamad) 혹은 ‘가르치다’라는 뜻의 ‘림마드’(limmad)에서 파생한 명사형인데, ‘연구, 가르침, 교훈’이란 뜻이다. 동시에 탈무드란 말은 ‘전승된 모든 가르침’ 특히 아모라임 시대(AD 3세기 초-AD 500)에 미쉬나 구석을 통하여 얻은 가르침을 가리키기도 한다. 좁은 의미에서 탈무드는 미쉬나에 대한 주석이다. 탈무드는 어느 한 시점에 일괄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기에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자료를 다루는 가운데 여러 학파들의 입장을 모아 놓은 다양한 문서의 모음집이다. 탈무드는 (a) 미쉬나 부분과 (b) 미쉬나에 대한 주석부분(=Gemara= (연구를) ‘완성하다’, (전통을)‘배우다’라는 의미) 이렇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a) 팔레스틴 탈무드(The Palestinian Talmud)
이것은 팔레스틴 아모라임들의 미쉬나 주석이다. 특히 Tiberias, Caesarea, Sepporis에 잇던 학파의 전승물 모음으로서 주후 5세기 전반부에 완성된 모습을 갖춘다. 팔레스틴 탈무드는 미쉬나 주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을 미쉬나 구조에 따라서 수집하였으며 아마도 Tiberias에서 편집작업이 이루어진 것 같다. 이것은 AD 70- 3세기 초의 타나임 문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팔레스틴의 역사 이해와 유대교 예배 의식의 발전에 관한 이해에도 중요한 도움을 준다. 팔레스틴 탈무드는 총 63개의 미쉬나 마쎄켓 가운데 단지 39개의 마쎄켓만 주석 했다.
(b) 바벨론 탈무드 (The Babylonian Talmud)
유대교에서 그냥 탈무드라고 부르면 바벨론 탈무드를 가리킨다. 이것은 백과사전적인 성격이어서 랍비 전통 가운데에서 보존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 모두가 이 안에 집적되었다. 이 이유로 ‘바벨론 유대교의 국립도서관’이라 불린다. 바벨론 탈무드의 Gemara(주석부분)는 63개의 미쉬나 마쎄켓 중에서 단지 36과 2분의 1 마쎄켓과 관련된다. AD 2세기 말경이나 3세기 초에 바벨론 디아스포라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AD 600년경에 거의 완성되었고 8세기에 최종 완성되었다.
6. 유대 신비주의 (Jewish mysticism)
유대 신비주의의 기원은 무엇인가? 아마 성경 자체에서 찾을 수 있겠다. 창 1장의 창조 기사와 겔 1장의 하나님의 보좌 마차 환상에 기초하여 유대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려고 하며 일곱 층의 하늘을 향한 신비에 찬 상승을 통하여 에스겔이 언급한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려고 한다. 이런 이해에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다른 유대문헌에서 지적하기도 한다. 보좌 신비주의는 탈무드 시대 말기로부터 10세기까지 이르는 기간에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메르카바 신비주의(Merkaba mysticism)는 이것의 일종인데, 기발한 사변과 신비로운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하늘 보좌 마차를 바라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내용을 담은 문서를 Hekaloth(하늘 궁전들) literature(문헌) 라고 한다. 이 문헌은 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됨. 계시록의 보좌 환상을 이것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나오면서
이런 유대주의에 대한 이해는 신약 중에서 유대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성경의 이해에 중요한 빛을 던져 줄 수 있기에 그 가치가 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열심당, 서기관, 헤롯당, 에센파, 쿰란공동체, 사해사본과 여러 유대 구전-기록 랍비 문헌들, 요세푸스, 그리고 필로 등에 관련된 용어의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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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www.daehaak.org )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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