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유다

바벨론 포로와 귀환시대

하나님아들 2022. 9. 24. 21:08

바벨론 포로와 귀환시대 

 

 

 

유대민족과 앗시리아,바벨론, 페르시아

 

1. 강대국의 초석을 닦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

 

BC 1,000년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 중 길보아산에서 죽은 후 유다 족속의 왕으로 30세에 추대되어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통치한 후 이스보셋이 살해 당한 후 온 이스라엘 지파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여부스 족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통일 왕국의 수도이며 종교적 중심지로 삼아 내부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합하고, 주변 족속들을 정복하는 전쟁을 벌여 모압,에돔,암몬을 복속시키고 블레셋의 영역을 남쪽해안으로 제한하여 영토를 시리아지역, 요단 동쪽까지 포함하는 지역으로 크게 확장하고 강대국의 기틀을 만들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순종하고, 범죄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는 믿음을 가졌던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2. 이스라엘의 최전성기 - 솔로몬

 

다윗이 이루어 놓은 강대국의 기초를 바탕으로 왕위에 오른 솔로몬의 재위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을 구가하였다. 국제 무역로인 해변로와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 두로왕 히람으로부터 전수받은 해양 기술로 해상무역 까지 겸해 중계무역을 발전시켰다. 무역을 통한 이익, 하솔,므깃도,게셀의 도시에 군사시설을 설치하여 무역로 이용자들로부터 걷어들인 통행세 뿐 아니라 모암,에돔등 정복민족으로 받아들이는 조공등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혼인 정책을 통하여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 추구(1,000명의 후궁)하여 대외적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 조공 : 매년 25톤의 금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가 육백육십육 금 달란트요” 왕상 10:14)

-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왕상 10:27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였으나 모압의 신 그모스, 암몬의 신 밀곰, 시돈의 여신 아스다롯등의 신당을 예루살렘에 만들고 자신의 이방 아내들과 예배하는 우상숭배를 범하였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같이 좇지 아니하고”(왕상 11:6). 또한 친유다족속 정책으로 다른 부족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게되었다.

 

3. 통일 다윗 왕국의 분열

 

솔로몬이 하나님을 저버린 결과 그의 사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었다.

 

북 이스라엘 왕국 (10지파)

 

-여로로암이 단과 벧엘에 성소를 세우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두었다.

 

1) ‘단에서 브엘세바 까지’라는 영토 경계를 ‘단에서 벧엘 까지’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국가의 경계로 선포

2) 종교 중심지를 단과 벧엘로 설정하여 예루살렘과 결별을 선포

3) 북이스라엘의 영토는 요단 동쪽을 포함하였고 2개의 국제 무역로인 해변길과 왕의 대로가 통과하였으며, 두로,시돈등 부유한 페니키아의 해양도시들과 인 접해 경제적으로 번영하였으나, 지리적 개방성은 이방 문화와 종교의 유입을 가져왔다.. ex) 바알숭배

4) 처음에는 세겜에 수도를 세우나 나중에 다르사를 거쳐 사마리아가 수도가 되었다(오므리왕). 

    사마리아 - 앗시리아에 멸망할 때까지 북이스라엘의 중심지

5) 정치적으로 불안정 - 9개왕조 중 8개 왕조가 암살로 전복. 권위 부재

 

성경은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을 악하다고 평가하였다.

 

1. 여로보암 왕조 

  1) 여로보암 / 22년 / 930-910

  2) 나답 / 2년 / 910-909

 

2. 바아사 왕조 

  3) 바아사 / 24년 / 909-886

  4) 엘라 / 2년 / 886-885

 

3. 시므리 왕조 

  5) 시므리 / 7일 / 885 

 

4. 오므리 왕조  

  6) 오므리 / 12년 / 885-874

  7) 아합 / 22년 / 874-853

  8) 아하시야 / 2년 / 858-852

  9) 여호람 / 12년 / 852-841

 

5. 예후 왕조 

  10) 예후 / 28년 / 841-814

  11) 여호아하스 / 17년 / 814-798

  12) 요아스 / 16년 / 798-782

  13) 여로보암 2세 / 41년 / 793-753

  14) 스가랴 / 6개월 / 753

 

6. 살룸 왕조 

  15) 살룸 / 1개월 / 752 

 

7. 므나햄 왕조 

  16) 므나햄 / 10년 / 752-742

  17) 브가히야 / 2년 / 742-740

 

8. 베가 왕조 

  18) 베가/ 20년 / 740-732

 

9. 호세아 왕조 

  19) 호세아 / 9년 / 730-722 

 

BC 722년 앗수르 왕 사르곤에 의해 북 이스라엘 멸망

 

 

남 유다 왕국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

 

- 북이스라엘에 비해 1/3에 불과한 영토 면적과 국제도로가 유다 국경을 통과하지 않았다. 홍해의 에시온 게벨과 네게브를 통한 제한된 교역을 하였다. 상대적으로 주변국과 격리되어 외부의 영향을 덜 받았으나 경제적으로 이스라엘보다 약하였다. 

 

- 아달랴를 제외한 모든 왕들은 다윗 가문 출신으로 정치적 안정이 있었다.

- 예루살렘 성전과 언약궤를 가지고 것이 종교적 자부심과 정통성의 근거가 됨

 

1. 르호보암(B.C.930년-B.C.913년)

2. 아비암(=아비야)(B.C.913년-B.C.910년)

3. 아사(B.C.910년-B.C.869년)

4. 여호사밧(B.C.871년-B.C.847년) 

5. 여호람(=요람)(B.C.847년-B.C.840년)

6. 아하시야(B.C.840년-B.C.840년)

7. 아달랴(B.C.840년-B.C.835년)

8. 요아스(B.C.835년-B.C.796년)

9. 아마샤(B.C.796년-B.C.767년)

10. 웃시야(=아사랴)(B.C.791년-B.C.739년)

11. 요담(B.C.750년-B.C.735년)

12. 아하스(B.C.731년-B.C.715년)

13. 히스기야(B.C.715년-B.C.686년)

14. 므낫세(B.C.696년-B.C.642년)

15. 아몬(B.C.642년-B.C.640년)

16. 요시야(B.C.640년-B.C.609년)

17. 여호아하스(=살룸)(B.C.609년-B.C.609년)

18. 여호야김(B.C.609년-B.C.598년)

19. 여호야긴(B.C.598년-B.C.597년)

20. 시드기야(B.C.597년-B.C.586년)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유다왕국 멸망

 

 

4. 앗시리아의 발흥과 이스라엘왕국의 멸망

 

이사야는 앗시리아를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로 표현(사 10:5) 

-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경고 

 

BC 900년경 앗시리아가 수도를 니느웨로 옮기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유프라테스 주변의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지배하고 서쪽으로 정복 전쟁을 감행하여 영토를 확장하여 나갔다. 국제무역의 전략적 요충지이며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시도하였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스라엘의 분열을 포함하여 강력한 국가가 부재한 상태였다.

 

BC 853년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BC859~824)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진군하였는데 다메섹이 주도하고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참여한 동맹군이 강력히 저항해 카르카르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살멘에셀은 그의 비문에 자신에게 대항한 동맹국을 열거해 놓았다. 아합왕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묘사하였고 그가 2,000여대의 전차와 1만병의 군사를 파병하였음을 기록하였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의 위치를 짐작케한다.

 

카르카르 전투이후 동맹군의 결속은 깨어지고 자기들끼리 전투를 하였다. BC 841년 살만에셀 3세가 재침을 하는데 엄청난 규모의 병력으로 적군에게 위협감을 주고, 허술한 촌락에서 민간인을 강간,학살하는등 위협과 공포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 전술을 사용하여 다메섹을 점령하고 페니키아,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받았다. 이 과정을 “검은 오벨리스크 Black Obelisk"에 상세히 기록했는데 이스라엘 왕 예후가 살만에셀 3세에게 무릎 꿇고 절하며 조고을 받치는 모습이 장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오므리의 아들 예후에게 금과 은, 금으로 된 사발과 술잔, 항아리,주전자, 납, 왕좌의 팔 뱓침대, 창을 조공으로 받았다”

 

※블랙 오벨리스크 : 1845년 영국의 고고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Austen Henry Layard)가 이라크의 모술 남부의 님루드 (성경의 갈라)에서 발견하여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앗시리아살만에셀 3세의 기념비이다. 설형문자로 명문이 기록되어 있고 전투,정복, 조공 바치는 모습등이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살만에셀 3세가 죽은 후 내분으로 혼란한 틈을 타 억눌렸던 여러 세력들이 다시 부상하는데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 왕 때에 시리아(아람)가 강성하여 북이스라엘은 그들의 압제하에 있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저희의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그러나 일개 병사에서 쿠테타로 왕이 된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5~727)가 앗수르를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내부 조직을 정비하고 전차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정예병으로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성경에 앗수르 왕 불로 기록된 디글랏 빌레셀 3세를 말하는데 정복욕에 붙탄 그는 시리아, 이스라엘, 이집트까지 정복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북이스라엘의 16대왕 므나헴은 공포에 떨어 자진해서 은 1,000달란트의 조공을 받쳤다. (왕하 15:19)

 

디글랏 벨레셀 3세의 후계자인 살만에셀 5세(BC 727~722)가 다시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마지막 왕 호세아가 조공을 받쳤는데, 배반하여 이집트에 반 앗시리아 동맹을 제의함으로써 앗시리아가 3년간의 사마리아 포위 끝에 점령하여 속국으로 만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시리아로 끌고갔다. 

 

앗시리아의 정복정책은 정복한 땅에서 충성된 통치자를 세우고 조공을 받는 정책을 취하였고, 충성도가 떨어질 경우 속주로 삼아 앗시리아 총독이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 경우 반란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주민들을 앗시리아 제국 내 여러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또한 정복지에 여러 지역 사람들을 이주 시켜 민족들을 섞는 혼혈 정책을 시도하여 민족 말살정책을 사용하였다. 

 

살만에셀의 뒤를 이은 사르곤 2세(BC 722~705)는 이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여 앗시리아 통치에 복종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곳에 머물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 2만 7,290명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으로 이주시켰다고 그의 비문에 기록하고 있다. 

 

정복한 이스라엘 정복지역에 여려 민족을 이주 시켜 혼혈 민족을 만들어 사마리안인이 나오게 되었다. 

“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 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왕하 17:24)

 

  

5. 남 유다를 위협하는 앗시리아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전 부터 유다는 앗시리아에 충성하고 있었다. 히스기야왕이 통치할 때 종교개혁과 블레셋 도시들을 점령하는 등 유다왕국은 중흥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한편 이집트와 지중해 주변 국가들이 반앗시리아 동맹을 형성하였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반앗시리아 동맹에 가담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앗시리아 왕은 이집트인을 포로로 삼아 데려가고 에디오피아인들은 추방하게 될 것이다.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고, 벗은 몸, 벗은 발 할 것 없이 엉덩이를 다 드러낸 채 이집트의 수치가 될 것이다” (사 20:3~4)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충고를 반아들이는 한편 히스기야 터널등 예루살렘을 비롯한 곳곳에 방어벽을 만들며 앗수르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앗수르의 왕 산헤립(BC 705~681)은 BC 701년 사마리아를 거쳐 쉐펠라 평원으로 진격하여 아얄론,소렉,엘라골짜기의 주요 요새들을 점령하고, 해안 평야지대와 유다 산지를 잇는 당시 유다왕국의 전락적 요충지이며, 마지막 방어선인 라기스를 함락시키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최대 위기에 봉착한 히스기야는 은 11톤, 금 1톤을 산헤립에게 바치었으나, 산헤립은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라기스의 함락으로 예루살렘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히스기야 왕은 옷을 찟고 굵은 베옷을 입고 궁전에서 기도하였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중에 있던 18만 5천명의 병사들의 목숨을 가져갔고 산헤립은 니느웨로 회군 하였으나 몇년 후에 암살당하였다.

 

산헤립의 뒤를 이은 에살핫돈 (BC681~669)에서 아슈르바니팔 2세(BC669~627) 때 앗시리아는 시리아와 유다왕국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장악력은 물론이고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앗시리아 제국의 최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국내 정치의 내분과 나보폴라사르(BC625~609)가 이끄는 갈대아인들의 반란으로  BC612년 니느웨가 함락되고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은 바벨론 제국으로 넘어갔다.

 

6. 바벨론 제국과 남유다의 멸망 - 바벨론 유수

 

니느웨가 함락된 후 앗시리아 잔존 세력은 하란으로 도망을 갔고, 이집트는 해변길이 지나는 지중해 동부 연안을 확보하였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갈그미스’에 수비대를 두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오랜 숙적이었던 앗시리아 잔존세력을 이집트가 지원을 하였는데, 메소포타미아에 강력한 제국이 탄생하는 것보다는 앗시리아와 바빌론으로 분열되는 것이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국제도로를 장악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앗시리아 잔존 세력과 바벨론이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앗시리아를 돕기 위해 이집트의 느고 왕이 팔레스타인을 지나 북으로 진군할 때,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이집트 군을 저지하였으나 패배하여 죽었다. 요시야(BC640~609)가 이집트와 싸운 이유는 바벨론의 승리를 예견하였거나, 이집트에 대한 적개심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 종교개혁은 끝이 나고 유다왕국의 힘은 더 약화되었다. 느고는 여오아하스를 제거하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다.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서 유다의 왕은 눈치를 보며 줕타기를 하는 신세였다.

 

바벨론과 앗시리아 잔존세력을 지원하는 이집트가 BC605년 갈그미스에서 맞부딪히는데 나보포라사르 왕의 아들 느부갓네살의 활약으로 바벨론이 승리하였다. 이 전투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전투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느부갓네살 왕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침공해 아스글론을 정복했다. 여호아김은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포로로 잡혀갔다. (1차 포로)

 

3년간 바벨론에 조공을 받치던 여호아김이 BC601년 느부갓네살의 이집트 침공이 실패하자 친 이집트 정책으로 돌아선다. 이에 느부갓네살이 BC598년 강경한 군사 조치를 취하여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였다. 포위기간 중 여호야김은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여호아긴은 BC597년 3월 16일 항복하였다.성전 보화를 포함해 예루살렘은 약탈당했고 여호아긴과 고위 관료등 유대 지도자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에스겔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2차 포로)

 

느부갓네살이 세운 왕 시드기야는이 집트가 바벨론 군대를 몰아내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바벨론을 배반하고 이집트에 기대었다. 분노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해 18개월 동안 포위하여 BC586년 유다왕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성전, 왕궁, 주요 시설들이 모조리 파괴하였고 동쪽으로 달아난 시드기야는 여리고 근처에서 붙잡혀 느부갓네살 앞에 끌려가 자신의 아들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으며, 자신의 두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백성들 중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포로로 끌려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열하25:11~12).(3차 포로)

 

느부갓네살은 정복 전쟁을 통해 얻은 부를 가지고 제국의 수도 유프라테스 강가의 바벨론에 거대한 건축공사를 하였다. 웅장한 궁전,성곽, 신전들을 건설하였다. 바벨론과 결혼동맹을 맺은 메대(메디아)의 공주였던 그의 아내 아미티스가 고향의 울창한 산림을 연상하도록 지었다는 ‘공중 정원’은 고대 7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바벨론을 가리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도시보다도 아름답게 장식된 도시’라고 기록하였다. 바벨론 성곽은 높이 100미터의 외벽, 내벽을 2중으로 건설하고, 20m나 되는 인공해자로 보호하였으며, 외벽, 내벽 사이의 공간을 폭 25m의 도로로 만들어 네필의 말이 끄는 전차가 회전할 정도로 대단히 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의 유적 발굴은 이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 바벨론 포로 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됩니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습니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제 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 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 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귀환자 
총인원 
49,897명 
회중 42,360명 (스 2:1-64, 느 7:5-66)
지도자 11명, 평민 15,604명(가계별), 평민 8,540명(지역별), 제사장 4,289명,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 392명, 레위인 341명, 
종족과 계보가 불명확한 자 652명, 
계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12,531명 
노비 7,337명 (스 2:65, 느 7:67)
노래하는 남녀 200명 (스 2:65, 느 7:67. 245명으로 기록)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 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습니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 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바벨론 포로시대의 연대

 

 

B.C 

722. 북이스라엘 멸망(앗시리아)

605. 바벨론 1차 포로(다니엘, 귀족들)

597. 바벨론 2차 포로(여호야긴, 에스겔, 기술자)

586. 바벨론 3차 포로/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

539. 10월 고레스의 바벨론 점령

538/7 1차 포로 귀환(세스바살, 스룹바벨): 에스라 1-6장

520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

515 제2성전 완공

492. 1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1세, 헬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300척의 전함과 2만명의 군사를 잃음)

490. 2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 1세,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의 중장병 밀집대전술에 패함)

480. 3차 페르시아 전쟁(크세르크세스,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 

465. 궁정 쿠데타로 크세르크세스 사망

465.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닥사스다 1세 집권(느헤미야가 술맡은 관원) 

461. 이집트가 페르시아 제국에 반기

458 2차 포로 귀환(에스라): 에스라 7-10장/ 1차 신앙운동

444/5 3차 포로 귀환(느혜미야): 느헤미야서/ 성벽재건 공사와 2차 신앙운동

 


   (출처 : 두란노성서지도) 

 

7. 바벨론 제국의 멸망과 페르시아 제국

 

느부갓네살 사후 바벨론 제국은 쇠퇴하는데 하란 출신인 나보니두스(BC 556~539)가 왕위에 있을 때 그는 바벨론 전통 신인 마르둑 보다 달의 신인 ‘신(Sin)' 숭배에 열성이었다. 그는 바빌론을 그의 아들 벨사살에게 섭정케 하고 아라비아 사막의 데마에 신 사원을 세우고 10년간 거주함으로써, 마르둑 제사장들의 불만을 가져왔다. 이에 마르둑 제사장들이 잇달은 재앙과 기근의 원인이 왕이 마르둑을 예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선동하여 민심이반이 일어났다. 

 

이 무렵 바벨론 제국의 동쪽에 있던 나라 페르시아(바사)의 고레스 2세(키루스 2세)는 메대(메디아)를 병합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당시 부유한 국가였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인 사데를 점령하여 가난하였던 페르시아가 부강한 국가가 되는 기틀을 만들었다. BC539년 고레스 왕이 티그리스 강 유역의 오피스(Opis)에서 바벨론군을 무찌른 후 바벨론으로 진격하자 마르둑 사제들은 바벨론 왕 나보니두스와 그의 아들 벨사살을 폐위시키고 고레스를 새 통치자로 세웠다.

 

백성들의 환영 속에 무혈입성하여 대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고레스 2세는 도시를 재건하고, 정복지의 백성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정책을 폈다. 점령지에서 잡혀온 포로의 귀환을 허가하는 조서를 내렸다. 앗수르 제국의 혼혈주의, 바벨론 제국의 고급 인재 활용 정책과는 다른 관용의 정책을 폈다. 이사야는 고레스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목자라고 예언했었다.

 

“고레스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44:28) 

 

※ 고레스 원통비문 : 1873년 이라크의 바벨론 마르둑 신전 폐허에서 발견.

BC539~530년 사이 고레스 권력 획득 과정 및 피정복 민족들에게 펼친 정책들을 아람어로 기록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언어가 아람어였음을 입증하고 있다.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나는 그곳(바벨론)”에 거주하는 신들의 형상들을 그들의 장소로 돌려보냈으며,그곳에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도록 허용했다. 또 주민을 모두 모아 그들의 거주지로 돌려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바벨론 유수기간 : BC 605년 (1차포로)에서 고레스 칙령 발표 1년 후인 BC 538년 귀국 때까지 약 70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은 유대인들 : 모든 유대인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많은 유다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바벨론 사회에 적응하여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 위치를 확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대인 상거래 기록은 이런한 상황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더, 모르드개, 느헤미야 등과 같이 페르시아 상류사회에 진입한 인물들도 있었다. BC 5세기 유대 공동체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127개 관할구역에 두루 흩어져 있었다.(더 1:1,3:8).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다수였으며 그들이 유대공동체를 이루며 디아스포라 ‘흩어진 유대인’의 기원이 되었다. 참고로 탈무드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경전인데, 2개의 탈무드 중 하나가 바벨론에서 뿌리를 내린 유대공동체에서 6세기 경 탄생하였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남은자 ; 경제적 안정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 불확실한 고향 땅으로 돌아온 소수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기초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사야는 그들을 ‘남은 자’라고 표현하였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사야 10:20~21)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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