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성경적 경제관

하나님아들 2023. 7. 8. 16:55

성경적 경제관              

 

제 1 장 : 서      론

성경은 경제를 가르치는 경제론이나 교과서는 아니다. 그러나 경제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칼빈주의에서 가장 근본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 인간들의 모든 삶의 원리요 표준이라는 것이다. 삶의 원리이며 표준이기에 성경에는 국가 관, 정치 원리, 윤리관, 가정관, 문화관, 예술, 음악, 경제 등 인간의 삶에 필요한 전반적인 원리가 계시도어 있다고 칼빈주의는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어서 몸을 만드셨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셔서 영혼을 주셨다. 다시 말해서 몸과 영혼, 물질과 영, 가견적인 것과 불가견 적인 것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원리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교의신학, 칼빈주의신학은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을 일반은총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을 특별은총이라 부르고 합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 부른다. 성경에서 경제에 관한 원리적인 교훈이 일반은총에 속하는 칼빈주의 경제관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주의 경제관을 다시 말하면 곧 성경적 경제관이 된다. 20세기가 낳은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 박사는 막스의 자본론과 경제이론을 철저하게 비판하여 그 모순과 허점을 파 헤치고 동시에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대한 허점과 단점도 지적하여 하나의 경제 혁명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자본주의의 경제 이론과 기원을 성경 특히 칼빈주의 신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자본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지적 하였다는 것은 성경의 원리나 교훈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적용과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씀해서 자유 경제의 극단적인 상황으로서 경제의 극한 자유방임, 이기주의, 자본집중, 기업윤리의 타락, 노사간의 극한적인 대립투쟁 등을 하나의 예로 들어 볼 수가 있다.

 

독일의 유명한 법 사회 경제학자인 Marx Weber(1864~1920)도 자본주의의 기원은 기독교 정신이요 특히 칼빈 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서구 문명의 원동력, 자본주의의 발달 원인으로서 목적합리와 가치합리라는 두가지 원리를 약술 했다.

 

[목 적 합 리]

1. 자유노동의 합리적인 조직

2. 자본재산의 합리적인 축적

3. 과학 예술의 합리화

4. 합리적인 성문 법전

5. 권한 분기의 합리성(삼권분립,  관직의 위계질서의 확립)

 

[가 치 합 리]

목적합리의 배후에서 끌어주고 밀어주는 원동력이 있는데, 이것이 곧 칼빈주의 사상인 하나님 중심주의의 신앙과 직업 윤리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현대의 유럽문명이나 자본주의는 죽어가고 병들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청교도적인 경건한 신앙의 타락과 변질, 윤리의 타락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제 2 장 : 재정 관리론(물질관)

 경제라 함은 우리의 일상적인 물질 생활의 총칭인 까닭에 물질에 대한 사상은 경제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경은 물질을 어떻게 보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물질 그 자체는 선하다는 것이다.

파사의 이원사상이나 불교의 물질관은 물질 개악설인데,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사상들은 결과적으로 금욕주의, 감상주의, 염세주의이니 최선의 방법은 물질에서의 해탈이요 일찍 죽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필연적인 결론이다.

이러한 물질 개악설이나 감상주의에서 어떻게 물질 생활이 풍요로워질 수 있으며, 과학이 발달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서적을 통해서도 익히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동서양을 순방하면서 살펴보면 미개한 나라, 후진 사회, 못사는 나라, 가난한 나라들은 예외 없이 물질을 천시하고 악한 것으로 보는 이원 사상, 불교의 영향권에 속하는 나라와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명한 나라와 풍요로운 사회는 모두가 기독교적인 국가와 사회임을 사실들이 잘 증명하고 있다.

 

구약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엿세 동안에 창조하시면서 매일 작업이 끝날 때마다 일곱 번이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이 선하고 아름다움에 하나님의 정하신 율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물질의 축복이 풍성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 야곱, 솔로몬, 욥 등은 하나님의 축복을 영육간에 크게 넘치게 받은 인물들이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고 하시면서 자연계의 피조물계를 찬양하셨고 마6:33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말씀하시고 물질적 축복을 허락하셨고 마4:4에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물질적인 떡을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들이 영의 눈이 어두워서 영적 삶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은 알지 못하고 육의 양식인 떡만을 구하는 타락한 인간들을 바르게 교훈하시는 말씀으로서 이 말씀이 주시는 의미는 인간의 육은 육을 기르는 양식으로서 떡을 먹어야 하고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원리를 교훈하신 것이다.

그 까닭은 육은 흙으로 지었으니 흙에서 나는 소산인 빵이 그 양식이요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지었으니 그 말씀이 영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께서도 딤전4:4에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결론적으로 물질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하고 아름답다. 다만 이를 사용, 활용하는 인간들이 악한 방법과 목적에 사용하면 그 물질까지 악해 보이고, 악한 물질이 되어 진다는 것이다.

 

수술 칼이 의사의 손에 잡히어 위급한 환자를 수술하는데 사용하면 생명을 구하는 도구가 되고 아무리 훌륭한 수술 칼이지만 강도의 손에 잡히어 금품을 강탈하기 위하여 집 주인의 가슴을 찌르는 살인의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질은 그 자체는 선한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방법,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물질관이요 경제 교훈인 것이다.

 

제 3 장 : 생산 경제의 원리

경제를 크게 나누면 생산 경제와 분배 경제 두 가지로 구별 할 수 있다.

 

생산 경제 함은 가장 작은 희생과 노력을 들여서 가장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경제적인 생산을 하기 위한 문제를 취급하여 연구하는 것이다.

분배 경제란 가장 선한 방법으로 생산된 경제물을 어떻게 분배,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취급한다.

 

그렇다면 생산 경제의 원리는 무엇인가?

 

1. 사유 재산 제도를 인정한다.

생산 경제가 크게 발전하고 육성하기 위해서는 재산의 사유를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보면 재산의 사유를 인정 했다.

구약의 사상이나 신약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사상은 사유재산을 교훈하셨다.

십계명중 7, 8, 9, 10계명은 재산의 사유를 가르치는 교훈들인데 공산주의, 사회주의에서는 재산의 사유를 전면 부정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재산의 사유를 크게 제한하고 있다.

 

   (1) 원시 공산 사회

인류의 원시 시대는 인간이든 물질이든 사유가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가 공유, 공통의 사회로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역사의 사실과 발전을 지극히 편견적 입장의 잘못 된 주장이다.

어떤 사회나 지역에서 원시시대에 무리가 모여 살던 시대가 있었고 사유 없는 공유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지역적 존재의 국한 된 현상이지 전면적인 존재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는 창세기 초부터 인류 기원과 발달을 설명했고 재산의 사유를 명백히 하고 있다.

 

   (2) 노예 시대

족장들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게 되면서 재산의 사유, 인간의 노예 시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3) 봉건주의 시대

 

   (4) 자본주의 시대

 

   (5) 공산주의 시대

지금은 잘 모르겠으나 러시아가 생기기 전까지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시대로 옮겨가는 과도기 시대인데 앞으로는 변증법적 역사 철학의 필연성에 의해 세계 공산주의 사회가 성취되고 그 때에 인류는 행복은 이상적인 사회가 건설 된다고 주장하여 재산의 사유를 부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산 주의자들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반역하는 주장이요, 허망한 사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소유욕을 본능적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 이 본능적인 소유욕은 자기 보존의 본능

종족 번식의 본능, 욕망의 무한성과도 공통성을 갖고 있다.(창1:28) 인간이 갖는 소유욕은 욕망의 무한성과 일치한다. 하나를 가지면 둘, 셋을 갖고 싶은 마음이 한이 없다.  물질을 가지면 권력을 가지고 싶고 권력을 가지면 명예를 가지고 싶다. 세상을 정복하면 내세를, 육을 정복하면 영의 세계를 지배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실존주의 철학자 쐬렌, 킬케골이 인간 실존의 3단계로서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을 말한 것이다.

 

1917년 러시아에 공산혁명이 일어난 후 재산의 사유를 철폐하고 공산주의의 경제이론을 실천에 옮겼으나 농촌의 생산력은 급격하게 감퇴가 되고, 공장의 생산과 운영은 불가능해 졌다. 사회는 보다 불안해지고 혼란은 극심해 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들은 유물사관의 변증법적인 운동법칙의 1보 전진, 2보 후퇴의 이론을 내세워서 1921년 5개년 신 경제정책을 발표하여 가족 제도를 부활시켰고 재산의 사유를 제한 인정하는 방식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창조 원리인 소유욕, 재산사유 원리를 배반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2. 노동의 신성성

생산경제를 잘 할 수 있는 둘 째 원리는 노동을 중히 여기고 신성시하여 열심으로 일하는데 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대체로 노동 특히 육체 노동을 천시해 왔고 죄악시 했다. 이는 동,서양이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1) 인류의 역사

       A. 서   양

헬라에서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에 의하여 철학자는 지식자, 생각하는 자라 하여 상류층에 속했고 국가도 그들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고 하여 존경했으며, 육체 노동자는 정욕에 사는 거의 동물 같은 존재라고 천시했다.

 

* 중세기 천주교에서도 노동을 천히 여겼다.

창3:19에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라고 하신 말씀은 형벌의 댓가라 하여 노동을 천히 여기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금욕주의 사상(이는 칼빈주의의 청교도주의나 금욕주의와는 그 신학적인 배겅이 전혀 다른 것임)이 유행했고 수도원 제도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B. 동   양

유교에서도 노동을 천시 했음이 분명하여 상류층의 계급이 노동하는 것은 큰 수치로 여겨왔고 속담에 "양반은 굶기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또 노동하지 않고 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서 "논다",  "발끝, 손끝 까닥하지 않고 논다."는 등의 말이 있다. 이를 증거하는 표현이 발9족)에 보신을 신어서 적게 만들고 특히 상류층 부녀자들에게 손, 목거리, 손톱거리 까지 만들어 치장하던 것이 중국의 상류 사회에 유행하였던 것이다. 필자가 태국에 갔을 때 그 손톱 길이를 보았는데 그 때 생각하기를 중국의 문화가 넘어왔는가? 궁금했었다. 우리 개신 학우들 중 이런 분야에 관심있는 자는 논문을 썼으면 좋겠다.

 

* 불교에서도 노동을 천히 여겼다.

염세주의 감상주의를 주장하고 해탈을 생의 최고 경지로 사고하는 불교사상이 노동을 멸시하고 천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교에서 비구라는 말은 빌어 먹는 구걸을 의미한다. 그들 승려들이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하는 업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 농업이나 임업 같은 것을 해서 먹고 살아서는 안 된다.

 - 벼슬아치나 천문, 지리나 점술을 해서 먹고 살아서는 안 된다.

 - 상업이나 공업이나 교통을 수단으로 해서 먹고 살아서는 안 된다.

 - 철학, 사상, 문예와 같은 것을 해서 먹고 살아서는 안 된다.

이상 네 가지는 방면의 직업을 해서 먹고 살면 안 된다고 했으니 결국 살 수 있는 방법은 빌어 먹는 구걸 밖에는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승려들은 비구승이 진짜 중이라는 것이다.

 

       C. 성경의 말씀과 칼빈주의는 노동을 신성시하고 존중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양하고 권장한다.

            (가) 성경의 교훈

                   창1:28 "땅을 정복하라"는 정복의 뜻 중에는 노동이 포함되어 있으며 창1:15의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의 [다스리며]의 뜻은 노동하게 하시고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지키게]의 뜻은 관리한다는 뜻이니 노동의 뜻이 포함된다.

 

이상의 두 성경 말씀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 총회 학우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20:9과 신5:13의  십계명 중 4 계명에는 "엿 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하셨고 마25:26의 말씀에서 충성치 못한 1달란트 맡은 자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고 살후 3;10에서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

 

또한 롬 12:11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하시고 계2:10의 말씀에서는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다. 이 외에도 노동을 선하게 교훈하신 직, 간접적인 말씀이 허다히 많이 있으나 이상의 말씀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성경이 얼마나 노동을 중히 취급했는가를 알 수 있다.

 

            (나)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행위로서 사랑과 정의를 구현한다.

                  창3:19에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한다는 말씀이 형벌이나 징계의 일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죄인으로서의 창조의 질서요, 삶의 원리이다.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데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삶의 참 맛이 생긴다. 아직도 일 할 수 있는 정력이 있는데 정년퇴직이나 기타 이유로 놀고 있는 중년층 이상의 노는 고통이나 일감 없는 외로움이 이를 사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는 땀 흘리는 노동이야 말로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살전 1:3의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라 하셨는데, "사랑의 수고"는 사랑의 증거, 표현, 실천은 사랑하는 그를 위하여 무엇인가 수고, 일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녀가 잘못했을 때 형벌을 가한다. 그러나 그 형벌은 형벌 자체가 죄는 아니요 죄 때문에 받은 징계로서의 고통인데, 그 권증의 목적은 정의 구현의 질서 행위이며 사랑의 발로인 것이다.(히12:5~13)

 

            (다) 노동 측면에서 보는 윤리적 죄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웨버저)에 보면 영국 청교도 신앙의 대표자 중 1인으로 명성 높은 설교가이며 신학자인 리챠드 박스터(Richard Baxter)가 영원한 안식이란 책에 일절을 소개했는데 도덕적으로 가장 죄악시 한 죄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a. 재산을 가지고 휴식하는 죄             b. 부로 인한 향락, 태만, 정욕              c. 생활 수단으로 노력을 회피하는 것

그리고 성도의 영원한 안식이나 휴식은 내세 천국에서만 성취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부지런히 노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며, 하루 6~8시간 이상의 수면은 죄라고 지적했다.

 

            (라) 노동의 동기와 목적

a. 금욕적 수단으로서 노동은 일절의 죄악을 발생하지 않고 예방하는데 힘이 된다.

 

b. 순종의 생활로 노동을 해야 한다.

 

c. 직업의 소명이다.(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회분업과 직업 분화 현상은 하나님의 우주 계획에 속한다"고 했다.)

 

    "Calling"의 부른다의 소명사상은 다만 하나님께서 주의 종인 목사도 불러 쓰신다는 데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불러 쓰시기 위하여 소질, 달란트를 각각 다르게 주셨고, 이 서로 다른 달란트는 직업의 다양화를 이루고 각자의 맡은 바 달란트에 충성 봉사하고 열심히 일하는데서 기쁨, 행복, 감사가 넘쳐 흐르며 따라서 모든 소질, 모든 직업, 모든 노동은 차별이나 귀천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명 사상은 특별은총인 성직에게나 일반은총인 세속직업에까지 보편화 되어 노동과 직업이 존중되었을 때가 유럽의 전성기 시기요 칼빈주의 사상의 전성시대였다는 것이다.

 

d. 하나님께 영광이 긍국적이요 최고의 목적이 된다.(롬11:36)

 

          (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직업

a. 도덕적 직업에 합하는 직업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사회의 공익을 헤치는 직업은 택하지 말아야 한다.

b. 생산 재산의 사회에 대한 중요성

c. 개인 경제적 수익성이 참고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노동하고 부자가 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3. 이윤추구의 원리

경제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경제 행위는 이윤을 떠나서 생각 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소유욕과 욕망이 이를 증거한다.

 

* 성경은 이윤 추구의 교훈을 주셨다.

마25:14~30의 말씀에서 달란트 비유에 5 달란트, 2 달란트 맡은 자가 배를 남겼을 때에 칭찬하셨고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1달란트만 가지고온 한 달란트 맡은 자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시면서 "내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눅19:27에서는 열 므나의 비유에서 위와 같은 내용의 뜻을 교훈 하셨고, 마13:1~30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100배, 60배, 30배의 곡식을 거두는 것이 농부의 바라는 소망이요 행동인 것을 말씀하셨다. 이는 모두 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이윤을 목적하고 수고하는 것이 합당한 도리인 것을 보여 주시는 말씀이다.

경제인이나 그 외 누구라도 자기가 소유한 유형 무형의 재산을 투자하여 보다 많은 소득이 발생하고 증식되기를 원하는 욕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원리인 것이다.

 

4. 자유 경쟁의 원리

산업경제에 있어서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원리는 경제 행위에 있어서 자유스러운 경쟁 원리로 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리 중에서도 인권 존중의 사상, 자유존중의 사상, 평등존중의 사상은 민주주의의 골격이요 근분이 되는 3대 원리로서 민주주의의 사상적 토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 발전을 이룬 자본주의의 경제 체제가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사리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에 인간은 동일하게 존엄성을 가지게 됙 ㅗ존엄하기에 평등하고 자유로울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는 어떠한 방법이나 형태로서도 인간의 평등함과 자유로움에 제한을 가할 수는 없다.

칼빈주의 사상적 영향과 교훈을 받은 영국의 존 로크(John Rocke 1632~1704)는 "인간은 나면서 부터 모든 자유와 평등과 독립을 소유한다."고 했고 신학자유클럽은 "하나님의 은총하에서 인간은 누구나 전 우주를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제왕 이라"고 했고, 제임스 멕퀸토쉬는 "민권 자유의 기초는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신앙의 교리에 있다."고 했다.

 

이러한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인간의 성품, 특성, 만인만색으로 나타났고 직엄의 평등화 자유화로 나타나서 경제행위의 자유가 생산 경제의 발전과 증식을 이루게 한다.

 

   (1) 자본조의의 병폐

경제 행위의 자유경쟁은 분명히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케 했다. 인간의 창조력은 크게 개발되었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 자유경쟁은 철도로 탈선해서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자본중심의 기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현상은 부익부 빈익빈하게 했고, 소수의 자본가들은 황금의 왕좌에 앉아서 돈의 우상신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자유는 무한이나 방종이나 무질서가 아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규범과 윤리 안에서 자유이다.

자유는 철로 위에서 달리는 기차와 같기 때문에 탈선하면 죄악이요, 파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갈5:1의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애를 메지말라"고 하셨고 갈5:13에서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고 하셨다.

 

유명한 룻소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자유"라고 하였다. 물질은 귀하고도 선한 것이다. 그러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병폐는 물질을 우상으로 그리고 목적으로 그 가치를 전도시켜 오류를 범한 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요 타락이 되었다. 그 까닭은 칼빈주의적인 청교도 신앙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타락하고 약해져가고 그 대신 자유주의 신학이 교배하는데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2) 통제 경재의 필요

* 이상에서 말한 자본주의 위험과 병폐

 - 자유경쟁이 철도를 탈선하게 되었다.

 - 자본의 집중이 부익부 빈익빈으로 경제의 불균형을 발생 시켰다.

 - 소수 자본가의 지배권과 독점화가 발생했다.

 - 황금 만능의 물질 우상화가 되었다.

 - 이기주의 팽배등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명백한 신앙의 타락이요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침범하는 불법이요 죄악이다. 그래서 칼빈주의의 3대 신학자로 불리우는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1875년 국무총리직에 있을 때 화란에 통제법을 제정 실시하여 자유경제 제한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통제 경제는 자유 경제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서 결코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구조적인 그리고 철학적인 이념과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 4 장 : 분배 경제의 원리

물질이나 재산의 유형 무형을 물론하고 이를 증식생산 하는 것은 생산 경제의 행위이다. 그러나 경제는 생산만이 경제의 전부가 아니다. 생산이 재산축적된 재산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공평하게 관리 분배 사용하느냐는 것이 또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분야를 가르켜 분배 경제라 부른다.

 

1.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헌금)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소유의 3중성은 첫째가 하나님의 소유이다. 이는 절대적인 소유권이다. 하나님이 필요하실 때에는 보관자요 청지기인 인간은 이유나 구실이 없이 필요한 데로 바쳐야 한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사업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기관은 교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것은 적정 분배의 제일 원리요 순서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헌물, 헌신 등으로 구분할 수 있고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와 감동으로 인하여 바치는 자의 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 감격하여 자의 적인 마음으로 봉헌하는 것이다.

 

가. 봉헌의 정신

(1) 감사이다.

시116:12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 할꼬"라고 하셨고, 시116:17에서는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했다. 살전5:18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다.(고후9:11,12,15)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고후9:13 ; 빌4:18~20)

 

(3) 축복이 된다.(고후 9장의 씨뿌리는 것)

 

(4) 감사이다.(고후9:7)

 

(5) 좋은 것으로(말 1;6~14)

 

(6) 준비하여(고후9:1~5)

 

(7) 넘치도록(고후9:1~5)

 

(8) 천국에 저축하는 것(마6:19~21)

 

(9) 특별한 경우

봉사의 정신은 이상에서 열거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경우가 있다. 사렙다 과부에게 요구하셨든, 엘리야의 떡과 물은 명령이요 강제성이 내포된 것이 분명하다.9왕상17:8~16)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과부의 일가족을 살리시는 축복을 과부 자신이 알지 못한 것 뿐이다. 과부는 일차에는 사양했고 이차에 순종하여 축복을 받았다.

 

오병이어의 이적도 제자의 요구에 어린아이의 적은 헌물이 큰 역사를 이루는 큰 뜻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교회 생활에서도 어떤 때는 성도들의 자의와 자원성을 넘어서 강제성을 띠는 헌금이 간혹 있을 수가 있다. 교회의 일반 예산 외에 특별한 시설을 위하여 특별 헌금을 실시하는 경우 등이다. 이런 때에 성도들은 사르밧 과부의 심정으로 교회의 특별 시설과 기타 계획에 순종하면 또한 과부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나. 헌금의 종류 

(1) 일반 헌금

a. 주일 헌금 : 한 주간 동안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예배시 드리는 헌금으로서 가장 가볍게, 기쁨으로 드린다.

b. 각종 감사 헌금 : 특정한 사건에 특별히 드리는 헌금이니 예를 들면 생일 감사, 약혼, 여행, 병의 치유, 장례, 개업, 입학, 졸업

                            등 우리의 생활 전반에 걸쳐서 감사하는 헌금이다.

c. 십 일 조

  ㄱ. 기 원 :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에게(창14;17~20)

 

  ㄴ. 이 유

       * 복(창14:19 ; 말3:10 ; 히7:6)

       * 의무(말3:8)

       * 감사(창14;20)

       * 하나님의 명령이요 주님의 말씀(마23:23)

       * 여호와의 성물(레27:30~31)

 

  ㄷ. 방 법

       * 소득의 십일조(창14:20) 내게 주신 모든 것의 10분의 1

       * 온전한 십일조(말3:10) 일체의 10분의 1 히7:2

       * 좋은 것의 십일조(히7:43)

       * 준비하여 기쁨으로 넘치도록(고후9장)

       * 레위지파(목사)도 십일조의 십일조(민18:26 ; 느10:38)

 

  ㄹ. 드려야 할 대상

       * 멜리세덱에게(창14:17~20 ; 히7:1~10)

       * 하나님 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드린다.

       * 구약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지파에게 있다.

       *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에 드린다.

 

  ㅁ. 십일조 생활에 실제적인 면

       * 십일조는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드려야 한다.

       * 십일조를 가지고 인심을 쓰고 생색을 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의 전부 혹은 일부를 자기가 마음대로 떼어 가지고 타인에게 다른 교회에 드리는 것은 주님께 드려

          야 할 감사와 영광을 가로채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 십일조 중에서 주일 헌금, 각종 감사헌금, 심지어 구제비까지 지출하는 사례도 있는 듯 한데 이런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감사와 구제등은 자기가 쓸 수 있는 것으로 드려야 한다.

       * 십일조는 장사하는 분이나 사업하는 성도는 매 주일 대 예배 시간에 드리고 월급 생활자는 월급 받은 다음 주일에 드림

          이 합당하다. 소득된 수입의 다음 주일에 드린다는 것이다.

       * 십일조는 소득을 예상하고 떼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까닭에 일년 중 매월 혹은 매주

          금액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주정헌금을 십일조의 명목으로 드리는 것은 성경 위반이니 드려서는 안 된다.

       * 십일조의 계산은 실제로 어려운 경우가 많으니 주님께 많이 바친다는 신앙으로 후하게 계산함이 나에게도 더 큰 축복이

          요 은혜가 된다. 봉급자는 전 봉급의 총 수입의 10분의 1, 장사하는 분은 상품의 원가를 제한 총 이익의 10분의 1, 농사,

          어업을 하는 분은 농산물 어업고의 총액 10분의 1(씨, 비료, 인부, 노임과 같은 대금까지 공제해서는 덕스럽지 못하다.

          => 그렇다면 지푸라기, 가축에서 계산되는 퇴비를 수입으로 계산해야 할 것이다.) 선물 기타 일정하지 않은 부 수입은

          적당한 시기에 계산하여 금액으로 환산해서 드리든지 현물로 10분의 1을 넘치게 계산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ㅂ. 개인은 교회에, 교회는 상회에, 십일조 상납을 총회가 작정한대로 철젛히 실행해야 한다.

 

(2) 계절 헌금

신약 교회에 사대 절기가 있곡 절기마다 감사헌금을 드리게 된다.

 

a. 부활절 감사헌금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온 교회 성도들이 합심하여 드리는 헌금이다. 우리 한국 교회 실정을 살펴보면 부활절 축하의 제도는 성탄절 보다는 좀 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성탄절보다도 더 축하해야 할 것이다. 아뭏튼 부활절에 정성껏 헌금하여 복음 선교의 운동에 효과있게 쓰여져야 할 것이다.

 

b. 맥추절 감사헌금

맥추절 헌금의 성경적 유래는 출애굽기 23:16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하신 말씀이다.

직접적으로는 도시 교회에서는 별로 실감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맥추절이나 그 헌금을 등한히 하는 일이 있다. 이는 성경의 교훈하심이요 보리 농사는 우리의 식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반 은총이니 하나님께 감사의 헌금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c. 추수 감사절 헌금

추수 감사절에 드리는 헌금에는 두 가지 큰 뜻이 있다.

 - 유월절 적인 구속의 은혜

 - 추수에 대한 일반 은총의 은혜

도시 교회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지만 농촌 교회에서는 추수 감사절 헌금이 일년 예산을 좌우하고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헌물 헌금이기에 소산이 십일조와 감사 헌금을 구별하여 잘 드릴 수 있도록 교회는 특별한 기도회를 가지고 깊은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d. 성탄절 감사헌금

성탄절에 드리는 헌금으로서 일반적으로 성탄절 헌금은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사용한다.

교회는 성탄절을 계기로 하여 교회내 형제와 교회 밖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친절을 최대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며 목사는 위에서 아래로 있는 자에게서 없는 자에게 전달하는 영적 복덕방의 구실을 다해야 하며(고후9:9~15) 목자 자신의 생활은 교인 평균치의 생활이 가장 바람직한 생활이라 할 것이다.

 

이상 사대 절기의 헌금은 미리 준비하여야 하고 작정 같은 헌금을 해서는 안 된다.(특별한 경우외) 감사의 예물에 준작정(외상)이란 받으시는 이를 무시하는 일이요 경멸하는 태도로서 인간 관계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에 이런 행위는 있어서는 안 된다.

 

(3) 특별 헌금

특별헌금은 교회가 필요로 할 때 일반 헌금이나 계절 헌금에 관계 없이 필요 금액, 사용목적, 한도, 헌금 시간, 헌금 방법, 등을 작정하여 드리는 헌금이다. 예배당, 교육관, 목사관, 기타 필요한 교회 사업 등이다. 물론 노회나 총회적인 사업도 포함한다.

 

2. 사회에 바쳐야 한다.

제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소유이다.

제 2차적으로는 사회의 소유이니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한도에서 사회에 공정한 분배가 있어야 한다.

사회의 분배 행위로는 다음과 같다.

 

(1) 국가에 바쳐야 한다.

유대의 지도자들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책잡고 죽이기를 꾀하여 로마 정부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여부에 대하여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함을 아시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셔서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임을 가르치시고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잡히는 고기에서(그 입에서) 한 세겔의 돈을 얻을 것이니 나와 너를 위하여 세금을 바칠 것을 명하셨다.

 

바울 사도께서도 백성과 국가에 관한 원리를 교훈하시고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씀 하시어 납세의 의무를 강조하셨다.

 

(2) 이웃을 위하여 바쳐야 한다.(사회 사업, 공익 사업)

 나는 네가 없이 살 수 없는 사회적인 유기성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반드시 너를 위하여 필요한 재산의 분배가 있어야 한다. 눈이나 귀가 하는 짓이 못 마땅하다 하여 그를 제거 할 목적으로 입이 먹는 일을 하지 않고, 입은 살수 있겠는가? 같은 원리로서 내가 잘 살고 행복하기 위하여서는 네가(이웃이) 잘 살아야 할 것이다. 이웃의 괴로움은 나의 괴로움이요 너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다. 이웃의 불우함은 곧 나의 불우임을 확신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이웃을 위하여 경제의 합리적인 분배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자신을 위하는 수단이요 방법으로서 사회사업, 공익 사업이 활발해 질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말씀하시어 이웃 특히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행한 선한 일들을 곧 주님을 위한 일이요 나를 위한 일이라는 분배성을 교훈 하셨다.

 

이러한 분배 원리는 기독교 신앙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진리요 계시의 말씀이기에 신앙이 타락하고 부패하여질 때 경제의 분배 행위는 철도를 탈선하여 자본의 집중, 소수인의 독점, 부익부 빈익빈, 이기주의, 황금만능 주의와 같은 그릇된 현상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고 이는 공산주의와 같은 효력이 일어나서 사회는 곤경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된 재화는 이웃을 위하여 쓰여질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쁘게 여기시고 축복하시는 것이다. "기록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후 9:9)

 

3. 나 개인에게 바친다.

그 원리는 정직이 직무의 댓가의 가치가 있어야 하고 보관 즉 맡은 자에게 지불 보관 수수료의 의미에서 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나에게 분배 될 적정선을 지시하셨다. 이 적정선은 마6;11의 주기도에서 보여주신 "일용할 양식"이요, 잠30:7~9에서 보여주신 "필요한 양식"이다. 딤전6:7~8에서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셨고 욥1:21에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시고 이상의 말씀을 종합하여 보면 일용할 양식, 필요한 양식,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의 정신과 의미하는 바는 감사와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회, 그 지역, 그 환경에서 중산층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정도 이하의 극빈자의 생활이 바람직한 생활이 되지 못한다.  성도생활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이 더하여 질 것을 약속하셨고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잘 지켜 순종할 때 영육간의 생활이 큰 축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고, 이를 말씀 그대로 실행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가 극빈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다만 일반 사회의 생활정도가 가난한데 나만 호화스럽게 생활, 사치스런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웃을 향한 주님의 뜻이 아니요 사회분배의 원리를 망각한 행위이기 까닭에 이를 경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청지기 사명의 물질적인 원리는 소유의 삼중성에서 성경이 가르치는바 첫째는 하나님께, 둘째는 이웃에게, 셋째는 나에게 라는 말씀 안에서 분배행위가 이루어질 때 인류 사회의 신앙적이요 경제 생활은 가장 공정하고 행복하고 풍요한 삶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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