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얼마 전 어느 탄광에 갱도가 무너져서 그 안에 갇힌 광부
들이 모두 질식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쉽게 생명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조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끈
질기게 기다리고 있던 순간, 그 갱도의 위에서부터 구멍이
뚫려 산소를 마시면서 견디게 되고, 결국 그 사람은 구출되
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쉽게 낙심한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다만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끈질기게 버티던 그 사람만이 살아나왔다는 것입니
다.
인내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이 최후에 구원을 얻게 됩니
다. 어떤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하기를 배우고 기다리기를 배우라."
우리는 기다리기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기다림은 우리를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5분동안
지나간 세기의 유명한 무신론자중에 로버트 잉거솔이라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그는 어느 날 무신론 강의 도중에 탁상에 시계를 꺼내 놓고 "내가 하나님께 5분간만 시간을 주겠다.
내가 5분동안 하나님을 저주할 터인데 그 동안에 나를 죽이 기를 바란다.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거나, 있 어도 실패자에 불과하다"고 큰 소리를 쳤읍니다. 5분이 지난 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인간이 승리자요 신은 실패자라 고 외쳤읍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신앙인 데오도르 파커는 빙그레 웃으 면서 이런 흥미있는 말을 했읍니다.
"과연 하나님이 실패한 것일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 내를 5분간으로 단축시켜 보려고 한 잉거솔의 시도가 패배한 것이 아닐까!" 옳습니다. 주께서는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리 고 그를 믿는 그의 백성들이 또한 이 오래 참음의 옷을 입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시편 47:8)
동 서의 냉전시대 동안 그랜드 래피즈 신문 일면에 놀라운 머릿기사가 떠올랐습니다. 「컴퓨터 실수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계속되는 그 기사 속에도 똑같은 경고의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지난 7개월 동안에 두번 이나 국가의 미사일 경보센터의 컴퓨터가 소련 미사일이 미국을 공격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 하여 미국의 전략사령부 요원들을 비상 대기시켰다.” 핵전쟁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인데 그것이 컴퓨터의 오류로 발생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볼 때 더욱 더 섬뜩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좌에 좌정해 계 시면서 만물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이미 알고 계시며,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마음 속에 갖고 계신 하나님의 크고 선하신 계획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이 땅에서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국을 통치하시고 세상만사를 주관하심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 님의 통치하에 있습니다. 재난의 가능성에 관한 신문 표제 때문에 우리가 공포에 떨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실수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가라지도 뽑지 말라
한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사기덤불에서 떼어내었으나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다. 상처가 나고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을 보면서 어린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하여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구 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 곳을 찾아갔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그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가시나무 위에 앉더니 작은 부리로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남겨놓은 털들을 쪼아 모으는 것을 보았다.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털을 물고는 날아가는 것이었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던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
사실 대자연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 가라지라면 이 얼마나 화나는 일인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라지나 가시나무들일지라도 뽑거나 베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세상의 끝 날에 심판하실 이가 따로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가시나무도 가라지도, 좌절과 실패와 죄에 시달린 우리의 형제 자매들도 다 품에 안고 언젠가 우리 주님이 보상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이다.
기다림과 축복
본문: 사 30:18
오늘 본문 말씀 이사야서 30:18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 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를 기다리신다고 했고 또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11에도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자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 조급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도 없고 하나님 의 축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라는 아들을 주실 때까지 참으며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뜻으로 하나님의 일을 촉진시켜 보려다가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고 큰 불화와 후세에 전쟁의 불씨를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곧 이스마엘과 이삭의 전쟁인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의 꿈을 꾼 다음에 형제들의 모함으로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도 하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도 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원망하지 않고 14년이 나 참고 기다리다가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7년간이나 사울왕의 창칼을 피하여 이 굴, 저 굴, 이 바위, 저 바위를 숨어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축복의 날이 올 때까지 잘 기다렸기 때문에 대 성군 다윗 왕이 된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큰 그릇이 될 수 없고 큰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시편 37:7에 보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지어다" 했습니다. 복 받을 일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축복이 안 나타나고 응답이 오지 않습니까? 그럴지라도 불평하지 말고 참으며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은 도리어 "슬픔과 고 난의 보자기에 축복을 싸다 준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역대 하나님의 귀한 성도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다 겪었습니다.
고통이나 시련이 올 때 불평이나 낙심대신 "주여 감사합니다. 이 시험이 지난 뒤에는 무슨 축복을 주시 려고 하십니까"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시련의 크기 만큼, 고통의 크기 만큼 그 다음에 큰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감사할 수 없는 것을 감사하며 기다릴 때 기적적인 축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기다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계속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시편 40:1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계속 기도하며 기다리지 않는 자는 응답을 받기 어렵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하늘 나라에는 되돌아온 소포가 많을 것이다" 그랬습니다. 참고 기다리며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응답이 되돌아 오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낙심치 않고 계속 부르짖어 응답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애원할 때도 물러설 줄 모르고 계속 매어 달리다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기도는 응답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 며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때가 되면 내 뜻과 내 생각대로는 안 되어도 다른 방법으로라도 하나님은 꼭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기도하며 기다리던 120명의 성도는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지만 실상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그 약속을 들은 사람이 500여명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120명 외에는 중간에 다 낙심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못 받은 줄 압니다. 믿고 기도한 것은 은행에 저금한 것 이상으로 정확하게 찾는 때가 옵니다. 씨앗을 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것은 즉시 이루어 주시고 어떤 기도는 몇 년 후에 이루어 주시고 어떤 경우는 수 십년 후에 이루어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박국 2:3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자.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3.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득이 참고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은 큰 축복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0:23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해도, 십일조를 해도, 봉사생활을 해도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고 꾸준히 계속해야 합니다. 조급하고 안절 부절하는 사람은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참고 기다리십시오. 불평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계속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움직이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참고 계속하십시오. 그럴 때에 정오의 햇빛같이 빛나는 때가 오며 축복의 날이 오는 것입니다.-아멘-
참고 기다렸더니
"이번에는 정말 진짜다, 진짜 대전으로 나가자" 최후 결정을 한 후 이사갈 준비를 마무리하고 나니까, 새 신자가 찾아오기 시작하는데 너무 신기해서, 한 주 미루었더니 또 새 신자가 찾아오고, 또 한 주 미루고, 한 주씩 미루다가 결국 " 여보 여기서 목회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 가봐 " 말하면서 다시 그 곳에 머물며 목회하는데 지금은 목회가 잘 되고 부흥 되어 하남의 은혜를 감사하는 인사를 전해왔습니다.
진정 믿음의 사람은 인내합니다....히브리서6장에서, 아브라함이 오래 참음으로....
사랑에도...........................고린도전서13장
성령의 열매에도....................갈라디아서5장
기도에도...........................누가복음18장
믿음과 기다림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다가 왔지만 우표앨범은 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다 놀러온 친구들은 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구경하길 원했다. 존은 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할머니에게 받은 우표 앨범...이 건..."
"존, 아직 할머니에게서 우표 앨범이 오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을 했니?"
존은 이상한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우표 앨범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받은 것과 같아요."
존의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믿음을 방해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났으나 할머니에게는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다.
존의 어머니는 왜 할머니가 우표 앨범을 보내지 않는지 마음에 강한 의심을 가지고 아들에게도 이렇게 떠봤다.
"존! 할머니께서는 너에게 약속한 것을 잊으셨나보다."
"엄마, 결코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께서 잊어버리시다니요."
존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존의 어머니는 아들의 신뢰에 찬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엄마, 할머니께 앨범 고맙다고 하는 편지를 보내면 어떨까요?"
"그래,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구나. 자, 한번 써 볼까?"
존의 어머니는 이렇게 용기를 주었다. 순식간에 편지를 쓴 후 우체통에 넣었다. 존은 할머니를 믿으며 휘파람을 불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며칠 안되어 답장이 날아왔다.
"존에게... 존! 할머니는 너에게 우표 앨범을 사 준다고 한 약속을 잊은 게 아니란다. 너의 마음에 드는 앨범을 구하려고 찾아보았으나 좀처럼 없더구나. 그래서 나는 뉴욕에 주문편지를 보냈단다.
그런데 뉴욕에서 보내온 앨범은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도착한 데다 너무 좋지가 않아서 다른 것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여기 3달러를 보내니까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그곳에서 사가지렴. 할머니로부터."
편지를 읽은 존의 얼굴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다.
"엄마, 제가 말한 대로지요?"
존은 할머니와의 약속을 결코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그가 믿고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는 노력하고 있었다.
성급한 행동
알렉산더 대왕이 친한 친구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선물은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였습니다. 사냥을 즐겼던 대왕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은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개들은 사냥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습니다. 달아나는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화가 나서 사냥개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대왕은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를 불러 호통을 쳤습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볼품 없는 개들을 왜 내게 선물했는가?
그 쓸모 없는 사냥개들을 내가 모두 죽여버렸다." 친구는 대왕의 말을 듣고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대왕이시여, 그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기 위해 훈련된 개들이 아닙니다.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오랜 시간 훈련받은 값비싼 개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알렉산더 대왕은 땅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발이 급한 사람'은 성급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면 실수를 하고, 따라서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꼭 시간을 두고 신중히 생각하여 일을 생각하여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 묵상: 당신은 어떤 일을 정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십니까?
급할수록 돌아가는 지혜
요즘같은 여름이면 인생은 마치 광야와 같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유난히 광야가 많아 전 국토의 3분의 2가 광야다. 그 많은 광야에서 펼쳐진 이야기가 결국 성경의 역사다. 그러나 광야보다 더 무더운 것은 인생 광야다. 사무엘상 30장에서 다윗이 어느날 인생광야를 만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마지못해 몸을 숨기고 있던 블레셋의 시글락성에 어느날 아말렉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성읍을 불살랐고 부녀자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 중에는 다윗의 두 아내도 있었다.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고 남은 것은 패잔병같은 군사 600명뿐이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순간에 다윗이 군사들과 함께 들어간 곳이 있었다. 브솔 시내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지중해쪽으로 흘러가는 조그마한 개천, 메마른 땅을 적시는 한 줄기 물과 땡볕을 덮어주는 작은 숲이 있는 곳으로 다윗은 들어갔다. 지금 당장 아말렉을 쫓아가도 될까 말까 한데 왜 다윗은 한가하게 브솔시내로 들어갔을까?
사람들이 바쁠 때 하는 일은 서두르는 것이다. 그러나 서둘러서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모든 나쁜 것은 서두름에서 나온다. 심리학자 융이 말한 대로 “서두름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두름 자체가 마귀”인지 모른다. 생산성과 실적을 성공의 중요한 표징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은 조금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무능한 사람,바쁘지 않고 한가히 있으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깊히 박혀 있다.그래서 할 일이 없는데도 바쁜 체하고 산다.
그러나 바쁘기 때문에 생기는 단점은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듣는다는 것이다. 미국 철도 건널목에는 세 마디 말이 새겨져 있다. “Stop! Look! Listen!” 기차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달리기만 하다가 소리를 듣지 못하면 변을 당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다윗이 브솔시내로 들어간 이유는 분명하다. 멈춰야 들려오기 때문이다. 아말렉을 쫓아 달려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 날 밤 멈춰서서 하늘의 소리를 들었고 그리고 힘을 얻었다.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 누구나 군급할 수 있으나 멈추지 않으면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이번 여름휴가에 우리 모두 브솔시내로 가자. 거기서 서두르지 말고 하늘의 소리를 듣자. 그래야 광야같은 세상에서 용기를 얻는다.
인내
남편이 밤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라면 그가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과는 아무 상관없이 초저녁부터 혼자 자버린다면 이미 사랑의 농도가 엷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 시대의 신학자 터툴리안은 "신앙이란 불을 켜놓고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노력과 고통, 희망을 잃지 않는 인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살다 보면 믿음을 지키는 것이 정말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음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설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바란다면 인내를 통해 나타날 최종의 승리와 기쁨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는 말씀처럼 비록 현실은 암울하고 고통의 연속일지 모르나 다가올 승리와 기쁨을 바라고 나가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신앙의 고지에서 내려다보는 승리의 도취감을 생각하며 오늘의 근심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 기도: 인내를 통해 신앙의 고지를 정복하게 하소서
기다려 보는 힘
기다려 보는
''어느 정도의 시간'' 속에
전부가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갈 여러분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말을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번민하게 된다면, 그때 ''어느 정도의 시간을
기다려 보는 힘''을 내어 보세요!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부단히 힘을 길러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나의 나무 아래서》에서 -
* 안정환 선수가 경기 초반 페널티킥을 실축했다 해서 도중에 교체했다면, 연장 경기 후반의 그 기막힌, 세계를 흔들어 놓은 가히 역사적인 골든골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응원단의 큰 실망과 일부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히딩크는 그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믿고 기다려 주는 마음, 그것이 힘입니다. 기다려 보는 힘이 기적과 신화를 만듭니다.
잠시후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
영국의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가 쓴 시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가 있습니다 황량하고 거친 산속에 살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 새는 자기의 둥지를 떠나지 않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산을 향해 날아가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산을 떠나면 죽을 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썼으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폭풍을 이기고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새는 폭풍이 부는 대로 자기의 몸을 맡기고 그 방향으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강한 폭풍을 따라 한참 날아갔습니다. 드디어 폭풍도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의 눈 앞에는 푸른 초장과 멋진 수풀의 아름다운 산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살던 거친 수풀의 산과는 비교가 안 되는 훌륭한 수풀과 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잠시 어두움이 있다고 좌절해서는 않됩니다.
어두움이 지난 후에 반드시 광명의 빛이 옵니다.
오늘도 주님만 바라보면서 인내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고 기다리라
만 실은 우리가 그와 같은 태도로 기도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 고하고 나서 “수화기를 붙들고 기다리지”못하고 있다. 그 결과로 응답받을 때의 기쁨을 놓치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믿음에 대한 보상과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시기가 적절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부합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의 기도의 응답을 종종 늦추신다.
그럴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가 우
리 마음의 소원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최선을 다했는데도 우리가 바라던 일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때문이다. 우리가 침울해 있거나 죄의속성인 자기 연민에 빠져 있어서는 안되며 그가 완전하게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가 우리의 간구를 그의 모든 지혜 안에서 응답해 주실 것을 기쁘게 기대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양보와 기다림
좁은 길을 서두르며 달려와 상대방보고 비켜달라고 삿대질하는 것은 한가위 명절의 기분을 망칠 수 있다. 한가위의 넉넉함을 양보와 기다려주는 배려로 시작하면 좋겠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가 마음이 들떠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실수하기도 쉽다. 이럴수록 양보하고 기다리자.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는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나만 우선이라는 생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원수가 되기 쉽다. 마음은 벌써 고향인지라 서둘러 가려 한다. 이번 기회에 생각을 느긋하게 바꿔보자. 세상이 달라지고 가을하늘이 더 높게 보일 것이다.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
얼마 전에 바보처럼 살다가 돌아가신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보처럼 가장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수 있었는데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외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그 아들을 외국으로 쫓아버렸고, 한참 후배들이 통일운동을 한다면서 북한을 제집처럼 마음껏 들락날락할 때도 그분은 "고향에 못간 많은 실향민을 두고 나만 어찌 고향에 가겠는가?"고 하며 바보처럼 그분은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천국 본향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은 웅변도 몰랐고, 쇼맨십도 없었고, 그저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이 바보 같은 목사님의 이름은 바로 한경직 목사님입니다.
이 기다림의 계절에 다시 한번 얼마 전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이 그리워집니다. 그분이 가졌던 마음의 깊은 평화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한 내면의 깊은 평화를 가져야 인생의 풍랑을 잠재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금년에는 엄청난 테러와 그로 인한 보복전쟁이 있었습니다. 섬뜩하지 않습니까?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찢긴 시신 사이에서 사단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을 겁니다 이 전쟁과 폭력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원수 사랑이 길이라고 하십니다. 원수 사랑이 무엇일까요?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자제하거나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힘이 있으면 그 힘을 과시하고 싶고 그 힘 앞에 벌벌 떨면 쾌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학벌에 신경 쓰고, 연줄에 신경 쓰고, 힘이 있다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처럼 힘의 논리로 살아가면 우리 속에 어둠의 힘은 커지고 영혼은 뒤틀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힘이 있는 곳으로 몰리기보다 힘이 없는 곳을 찾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힘을 얻으면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섬겨서 평화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칭송 받는 이유는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선하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싸움은 내 욕망을 위해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남을 생각지 않는 이기주의와 독점욕은 우리 속에 어둠을 키우는 평화의 적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내 욕망을 조금 덜어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손해보는 삶을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 없는 세상이라고 느끼신다면 그런 세상에서 평화의 길을 걷기로 작정해보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길이 없어 보여도 내가 평화의 길을 걷다 보면 반드시 그 길은 생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은 그렇게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평화의 길을 걷기로 새롭게 작정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날 성탄절에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이 아닐까요?
어느 때까지이니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이 시는 다윗의 인생 중 어느 시기에 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때까지니이까?’란 질문이 많아 ‘울부짖는 시편’으로 제목이 붙은 시입니다.
1. 다윗의 근심 어린 질문(1∼2절)
첫번째, 그는 먼저 “하나님 나를 잊으셨습니까?”하며 하나님께서 전에 보여주셨던 친절과 사랑, 언약과 사랑의 미소를 왜 그치셨는가 하는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원망이 서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간절함입니다. 그 간절함이 하나님을 애타게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번째,“하나님 내가 언제까지 근심하겠습니까?”라고 근심 어린 질문을 합니다. 다윗을 괴롭히는 생각과 슬픔이 이런 질문을 하게 합니다. 세번째,“내 원수의 자긍과 교만을 언제까지 보여야 하겠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도 이 모든 일에는 그 끝이 있고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2. 근심에 따른 기도(3∼4절)
그의 기도는 첫째,“나를 생각하소서”입니다. 자신의 사정을 알아달라는 기도입니다. 둘째,“내 근심 어린 질문에 응답하소서”입니다. 셋째,“나의 눈을 밝히소서”입니다. 자신의 영안을 밝혀주셔서 닥쳐있는 모든 상황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근심의 상황은 사람의 바른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아갑니다. 심지어 영안까지 흐려지게 됩니다. 그는 이러한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이 꼭 들어주셔야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옵니다”입니다. “제가 죽으면 좋겠습니까? 아버지!”하며 졸라대고 매달립니다. “내 원수가 이겨서 대적들이 기뻐하면 하나님 그 꼴을 보실 수 있으십니까?”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지고 원수가 이기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3. 승리의 기쁨
주님은 자녀들의 근심과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그분은 자신의 자녀를 후대하시는 아버지시요,구원의 기쁨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요,인자하심을 보이시는 하나님입니다. 인자하심이란 표현은 ‘실패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근심,원수,대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실패하지 않는 아버지이십니다.
인생길 서두르지 말라
일본의 야마모리라고 하는 사람이 벚나무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벚나무의 수명은 짧다. 그 이유는 꽃을 많이 피우기 때문이다. 벚나무는 소나무나 전나무보다 오래 살지 못한다. 아마 이것이 하늘과 땅의 이치인가 보다. 한 나라나 한 집안의 영광도 오래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벚나무는 무상한 나무다”
벚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벚나무는 한순간에 활짝 피었다가 한순간에 우수수 떨어져 버립니다. 나무의 수명도 짧은 편입니다. 화려한 꽃은 나무의 기운을 쇠하게 만듭니다. 또한 병충해를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벚나무는 흥망성쇠하는 인간의 역사를 연상시킵니다.
인류의 역사는 떠오르고 가라앉는 부침의 연속입니다. 영고성쇠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한 순간의 기쁨과 슬픔에 너무 기뻐할 것도,너무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항상 든든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첫째, 속도 조절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1시간에 걷는 속도는 4㎞ 정도 즉,10리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능력을 감안하시고 시속 4㎞의 속도로 걸어가도록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출 13:21). 마라톤 경기의 선수는 속도 조절을 잘해야 우승할 수 있습니다. 처음 경기가 시작됐을 때 힘이 있다고 전력 질주를 하면 얼마동안은 앞서 갈 수 있으나 잠시 후에는 지쳐서 낙오되고 맙니다.
인생길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생길은 평생 가는 길입니다.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조급함은 절대 금물입니다. 인내를 가지고 내일을 위하여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기도로 전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화려하고 멋있는 장래가 보장될 것입니다.
둘째, 젊은 시절의 영화보다 노년의 영화가 더 귀한 것입니다.
전북 전주∼군산간 100리 길은 벚나무 꽃길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벚나무가 노화 상태에 있습니다. 전북도 산림행정과에 문의해보니 1975년에 전주∼군산간 40㎞ 도로에 6300여 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이중에 해마다 100여 그루가 시들어 말라죽거나 교통사고로 죽고 또 도로공사 등으로 훼손돼 보식을 한다고 합니다. 불과 30여년의 짧은 세월에 화려한 벚나무가 쇠락해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해마다 꽃을 많이 피워 영화를 누린 까닭입니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젊어서 혜성처럼 두각을 나타내며 영화를 누리다가 어느덧 힘을 잃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잠 3:35)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세상의 영화보다 하늘나라의 영화가 더 복스러운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을 보십시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사도 바울은 세상에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이 허무하고 헛된 것인줄 알았기 때문에 분토처럼 버리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을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25). 세상은 벚꽃처럼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어머니의 기다림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등록금이 면제되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언제나 월요일 아침이 되면 기숙사로 가기 위해 짐을 챙깁니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때에 절은 손으로 차비 몇 푼을 겨우 쥐어 주곤 돌아앉아 속앓이를 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기숙사로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뜻밖이라 왜 오셨냐고 말도 못하고 서 있는 아들에게 몇 번을 접었는지 모르게 꼬깃해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미안하구나,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서..."
아들은 어머니의 그 손이 부끄러워 얼른 방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몇 년 뒤, 그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고 교도소에 수감됐습니다.
수갑을 찬 아들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보며 아들은 비로소 다짐했습니다.
"죄송해요 엄마... 조금 기다리시면 제가 호강시켜 드릴게요."
"그, 그래... 기다리마, 기다리고 말구."
출소 후 아들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습니다.
돈을 모을 때까지는 어머니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란 결심으로 명절 때도 찾아가지 못하고 견뎠습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나고 설을 앞 둔 어느 날, 그가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이젠 찾아갈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큰아들이 돈 벌어 호강시켜 준댔다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전갈이었습니다. 그날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가슴에 안은 채 아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 왜 하루를 기다리지 못하셨습니까? 하루를...."
어머니 가슴에 박힌 못을 끝끝내 뽑아드리지 못한 아들은 눈물만 흘렸습니다.
신선한 아침의 은총
내일에는 다시금 나에게 어려움이 닥쳐올지라도, 고통속에 기진하며 몸이 틀리는 고통이 찾아와 숨을 쉴 수 없고 끝내는 마지막 소망의 싹까지 고통이 삼켜버릴지라도 그때에도 믿을 수 있는, 보지 않고도 당신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붙잡고 절대 움직이지 않을 신뢰로써 당신의 아침을 기다리도록 저에게 은총을 허락하여 주소서.” 우리가 지금은 아주 어려운 과제에 직면한 캄캄한 밤 같을지라도 아침이 다가와 그것을 해결하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입장이라면 기다리라. 탁월성을 키우라 / 찰스 스윈돌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기다리는 자 되기를 소원합니다. 슬프고 외로울 때도 나를 지켜보시며 기쁨으로 채우실 주님을 기대하오니 주의 구원의 날을 속히 이루소서.
믿고 조용히 기다려라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말없이 그리고 조용히 기다려라. 정신을 차리고 민감하게 깨어 기다려라. 믿음이란 자동차에 기어를 넣는 것과 흡사하다. 믿음은 즉시 가동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즉시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적인 생활을 가동시킬 수 없을 때는 기어를 후진으로 하지 말고 중립으로 하라.
신뢰란 당신이 영적인 생활을 중립에 두는 방법이다. 신뢰는 곧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것으로서 “나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또 어디에 계신지 알지 못하지만 나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어딘가에 계신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기다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광야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것이 결코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황무지가 변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의 약속의 땅을 기다리면서 끌레르보의 버나드가 드렸던 기도를 되풀이할 수 있다.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제가 무엇을 했기에 주께서 저를 피해 숨으시는 겁니까? 이젠 기도하기에도 지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 기도하고 구하며, 계속 기다릴 것입니다. 주님밖에는 달리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표 전, 30일을 기다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사임하기 전에 적어도 30일을 기다릴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는 자신 이외에 아무도 그의 생각을 알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고용인이 그만두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대개의 고용주들은 깊은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고용인이 계속 남아 있다 해도 고용주는 그 실망의 상처가 완전히 치료되지 않는다.
오래 전에 목회를 했던 친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복을 주셔서 그의 교회는 우리 지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아침에 그 교회 찬송 인도자가 지각을 했습니다. 피아노 반주자는 오지도 않았다. 잘못될 수 있는 일들은 다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 그가 일어나 강단에 섰을 때는 실망도 하고 약간 화도 났다. 그래서 그는 다음 주일이 그의 마지막 주일이 될 것이라고 광고를 해버렸다.
정말로 다음 주일이 그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 곳에서의 사역과 같은 일을 하지 못했다. 그는 아마도 그때의 결정이 평생의 실수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도 감정적으로 사임을 해서는 안된다.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
- 로빈 쉬어러의 《더이상 우울한 월요일은 없다》중에서 -
* 살다보면 온갖 고통과 번뇌, 없는 사람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다스리지 못해 자기도 남도 해치는 독(毒)으로 만드는 사람과, 자기 안에서 잘 다스리고 녹여 향기(香氣)로, 활력(活力)으로, 삶의 에너지로 만드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 향기, 그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월요일도 화요일도, 좋은 일도 궂은 일도 다 즐겁습니다.
시골버스
그런데 버스는 떠나지 않았다. 왜 안 떠나느냐고 승객들이 소리쳤다. 운전수는 “저어기” 하면서 눈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승객들은 모두 운전수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젊은 여인이 열심히 논둑을 뛰어 오고 있었다. 버스를 향해 손짓까지 하는 폼이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 승객들은 여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개울가로 가서 세수도 하고 바람을 쏘이기도 하였다.
얼마 후 여인이 도착했다. 그러나 여인은 버스에 타지 않았다. 운전수가 빨리 타라고 소리쳤다.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맨 앞좌석에 앉은 젊은 군인에게로 가서 창 밖으로 내민 손을 잡고서 “몸 성히 잘 가이소” 하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젊은 군인도 “걱정 마래이” 하며 여인의 손을 아쉬운 듯 놓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승객들은 너나없이 한바탕 유쾌하게 웃었다. 즐겁고 흐뭇한 웃음이었다. 버스는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여인을 뒤로 남겨둔 채 매미 울음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로수 사이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