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스님의 선사상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천년고찰은 너무 많이 접해서 특별하지 않지만 외국인이 보는 천년고찰은 인류문화의 보고다. 불과 400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인들이 천 년이 지난 고찰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는 우리의 귀중한 자산을 모르고 있다. 불교는 어렵다. 그러나 5년 정도 공부하면 대체로 불교에 대한 기본지식을 알 수 있다.
탄허승려는 기독교는 구약 신약 3년
유교는 13경 10년
도교는 도장경 20년 공부하면 된다.
그러나 불교는 8만대장경 상근기도 30년 하근기는 300년 해야 된다고 말씀했다.
8만대장경은 많은 경전의 핵심만 모아 놓아 어려운 내용만 들어 있다. 반야부 경전만 600권이다. 반야심경 중 無眼耳鼻舌身意 문장 외웠다고 이해할 수 있나? 세상의 모든 학문은 불교 속에 다 담겨 있다고 탄허스님은 말씀하셨다. 불교는 어렵기 때문에 회통하는 것이다. 불교는 비교적 쉬운 공부를 통해 먼저 입문해야 한다. 탄허스님의 회통은 너무 어려운 불교를 보편화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경전을 쉽게 요약한다고 했음에도 20종 80권의 책을 남기셨다. 會通이란 말은 무엇인가?
회통학은 원효대사를 포함해 많은 학자들이 쓰고 있는 용어다. 주역 계사상전 8장 觀其會通을 보면 성인이 천하의 움직임을 보고서 그 회통함을 관찰하여 떳떳한 예를 행하며 말을 달아 길흉을 결단하였다 라는 말이 있다. 諸行無常은 세상 모든 것은 늘 변하여 한 가지 모습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易經<Book of change>을 변화의 책이란 말로도 쓴다. 易은 해와 달이다. 變易=無相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은 세상의 핵심이요 진리다.
易經의 3易
모든 것은 변한다<變易>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不易> 이 사실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簡易>
觀其會通 – 모든 변화의 양상을 한 데 모아 보게 됐을 때 세상의 흐름을 알게 된다.
세상은 음양 남녀밖에 없기 때문에 이분적 구성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제 3의 성별은 없다. 남녀 주야 선악 장단 시비 컴퓨터나 모르스 부호도 이진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單子論<Monodologia>은 주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은 음양 이론만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밤 낮밖에 없나? 밤과 낮 사이에는 아침 저녁의 중간이 있고 선과 악을 딱 둘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이 훨씬 더 많다. 절대적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이분법적 사유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탄허스님은 太極을 아는 것을 깨달음<覺>이라 했다. 태극은 음양이 끊어진 세계다. 陰과 陽 둘은 太極 하나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不二법문이다. 몸만 남녀가 있지 마음엔 남녀가 없다. 똑같은 마음이라 一心이다. 둘이 아니라는 不二가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일주문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깨달으라는 상징이다. 그래서 일주문을 보면xx산 xx사 또는 불이문이라 써져 있다. 여기 들어오면 둘이 아닌 줄 알라는 뜻이다. 둘로 나뉘어 있는 것들의 핵심은 원래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會通學의 핵심은 세상의 모든 변화양상은 결국 수렴하여 이분되는데 그것을 회통하여 하나임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판단하고 마지막 선택할 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2가지가 하나임을 알고 2개 중 어느 것을 선택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 會通은 둘의 근본이 다르지 않음을 알고 선택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長短은 있다. 중국의 한어대사전을 보면 會通을 融會貫通이라고 써 있다. 서로 융합해 모아서 꿰뚫어서 관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會通을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근본 실체를 본격적으로 공부해 나가는 것 때문이다. 서로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만 근본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기는 어렵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이걸 하나 저걸 하나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수준이 떨어지는 순간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가 된다. 불교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생각이 없다. 이것이 원효대사의 화쟁회통으로 불교의 핵심이다. 一心사상=會通사상. 그러나 하나라 해도 30방 맏아야 한다. 이를 유교는 一以貫之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 라고 한다. 불교는 萬法歸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 도교는 得一萬事畢 근본적 하나를 얻게 되면 만사가 다 끝난다는 뜻이다.
유교 불교 도교가 모두 하나<一>를 중시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空이다. 開口卽錯 하나라고 말을 하는 순간 그르친다. 드디어 유교의 역학도 無極이란 말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절대적인 하나가 있다 진리가 있다고 하는 순간 모두 그르치게 된다.
一心 –> 空<불교> 無<노장> 無極<역학> 이론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無라고 하는 순간 無라는 언어가 있고 무라는 생각이 있고 無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有가 존재하게 된다. 無라는 말이 존재하려면 이 3가지가 존재해야 한다. 無나 空이 되려면 정말로 無心이 되어야 한다. 마음수행을 통해 닦아야만 비로소 空 無 無極과 조우할 수 있다. 말로 해선 안 된다. 진짜 마음이 無心이 되어 봐야 안다.
一以貫之 萬法歸一 得一萬事畢 하나라는 것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드디어 선이 등장한다. 8만대장경은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가신 이후에 나온 말씀이지만 깨달음은 참선을 통해 이뤄진 것이므로 선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탄허스님은 18년간 화엄경을 역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화엄경 불사는 임제 제3구에 불과하다 임제 제1구는 선이다 그러니 참선하라고 말씀하셨다. 탄허스님의 선사상은 禪 중심적 사유와 선사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면 참선부터 하셨다. 대중 가운데에서도 질문이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선에 들었다. 붓다는 질문하지 않았는데 먼저 설법하는 無問自說이 없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항상 질문을 받은 뒤 법문을 설하셨다.
敎相判釋 – 부처님의 가르침을 순서 방법 형식 의미 내용 등에 따라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방법
탄허스님의 선에 대한 설명
四敎 會通의 근본원리로서의 선은 性 자리이다. 탄허스님의 易經 강의 법문 중에서 性 자리에 대한 것을 모아 정리했다. 이를 통해 스님의 禪觀을 어렴풋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 스님은 선을 聖賢之學 心性而已 성현들의 학문은 마음<心>과 성품<性>일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스님의 性 자리는 선사상의 핵심이고 모든 학문을 회통하는 기본이다. 性자리=道자리=佛性=眞性=自性=本性=靈性
四敎會通의 근본 원리로서의 禪
性자리=覺=마음의 본체=시 공간이 끊어진 자리=우주의 핵심체=우주가 생기기 이전=天地未分前 소식=몸이 나기 전<父母未生前>=현존一念의 起滅 이전의 경지=한 생각 일어나기 전
九世 – 과거<과거 현재 미래> + 현재<과거 현재 미래> + 미래<과거 현재 미래> + 현존一念=10世
과거는 지나가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없고 현재도 말하는 순간 벌써 지나간 과거가 되니 없다. 있다면 오직 생각만 있을 뿐이다. 지금 과거를 떠올려 회상한다면 과거는 어떻게 있나? 내 생각 속에 있다. 과거는 실체가 없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 한 생각 속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 시간도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용수는 중론에서 착각하고 있다 그러는 것이다. 사실 시간은 없는 것이다. 시계 보면 5분 단위로 동그랗게 그려 놓았다. 그렇다고 이것이 시간인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시간이다. 하이데거도 그의 저서 <Sein und zeit>에서 시간은 본래 없는 것인데 인간이 생각으로 실체화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시계는 시간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게 분할해 놓은 것이다. 시간은 사회적 약속을 통해 만든 것이다. 시간의 공간화다. 아침 저녁을 구분해 놓아야 살기 쉽다는 것이지 사실은 속고 있는 것이다.
굳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一念밖에 없다. 그러므로 과거에 연연할 필요 없다. 오직 이 순간 최선을 다하면 미래는 보장된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이 국어 시간에 영어하고 수학한다. 현재 이 순간에 100% 집중해서 살라. 우리는 한 생각밖에 없는데 회통은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의 소식이다. 생각이 끊어진 곳이다. 유교로 말하면 7정이 일어나기 전의 소식이다. 언어문자 생각이 끊어진 자리이다. 그래서 不立文字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경전을 도외시할 필요는 없다. 문자를 내세울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문자를 떠날 수도 없다. 49년 동안 부처님이 설법하고도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말하는 자리다.
不立文字는 성현들의 글을 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性 자리를 증득하지 않고 책만 본다고 알아지는 세계가 아니다. 무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진각혜심국사는 선문염송 서문에서 不立文字를 不外文字라고 하셨다. 중국 사람들은 不離문자라고 쓴다. 발음이 같다. 不立文字는 禪이요 不離文字는 敎다. 서산대사는 이 2가지를 다 말씀하셨다. 不得已는 어찌할 수 없다 그만 둘 수 없다는 뜻이다. 禪에서 봤을 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부득이 있고 敎에서 봤을 때는 언어를 쓰지 않을 수 없는 부득이함이 있다.
性 자리
性 자리는 善惡是非의 분별이 붙을 수 없는 자리다. 당체가 본래 없는 것=모양이 끊어진 것=성인이나 범부나 똑같은 것이다. 性 자리는 열반경의 4덕인 常樂我淨이다. 열반에 들면 無常이 아니고 常이며 苦가 아니고 樂이며 無我가 아니고 我며 예토가 아니고 淨土다. 여기서 한 생각 일어나면 바로 無常 苦 無我 穢土가 된다.
유교의 性자리는 仁義禮智다. 性자리=중용의 中과 未發=대학의 至善 지극히 선한 세계는 선악이 끊어져야 한다. 大學의 道는 밝은 덕을 더 밝게 하는 데 있고 백성과 친한 데 있으며 지극히 선한 곳에 머무는 데 있다. 능과 소가 하나되는 세계가 지극한 세계다. 至는 끝까지 간다는 뜻이다. 性 자리=맹자의 良知<불교의 普光明智> 주역의 統體一太極이다. 各具一太極 그 안에 각자 하나의 태극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하나의 진리요 모든 만물이 다 갖추고 있다.
유교의 性 자리=시경의 思無邪 세계. 아무리 마음을 일으켜도 삿된 생각이 없는 것이다. 性 자리=반고씨 이전 소식. 반고씨는 중국 전설상의 천자로 천지개벽 때 처음 태어났으며 부부음양의 시초요 천지 만물의 조상으로 천지를 나누어 들고 있는 모습의 인물이다. 서당 훈장님한테 반고씨 이전 소식은 무엇입니까? 물어보니 대답을 못하자 한암스님은 이 점이 궁금해서 출가하셨다고 한다.
노자의 性 자리=天下母 / 장자의 性 자리=渾沌과 物化 / 열자의 性 자리=太易=선종의 最初一句子
불교의 性 자리=圓相. 원 하나 그려놓고 점 3개 찍어놓은 조계종 마크도 근본 성품은 법신 보신 화신 체상용 대방광을 나타내지만 원상 하나로 나타나는 것이다. 불교의 性 자리=화엄의 最淸淨法界. 기독교의 性 자리=하나님 聖父=우주 창조주. 한 생각 일으키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천부경의 性 자리=始無始의 一 시작을 하되 시작이 없는 그 하나이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표현되는 性 자리가 있다. 이것이 會通이다. 결국 나열한 모든 것이 하나의 세계이다. 언어 문자로 말할 수 없는 우리의 근본自性 자리와 같고 우주법계의 법성 자리와 하나가 되는 세계다. 화엄에서 말하는 법신 자리다. 태극 하나님 성부 혼돈 원상 最初一句子이다. 이런 것들이 탄허스님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會通했던 기본 원리다. 禪을 근본으로 해서 보는 세상의 모든 사상과 종교의 회통이다. 동양학의 근본 정신이다. 성품 性 마음 心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탄허스님의 학술체계의 중심이다.
4회. 문광스님. 탄허스님의 선사상 중에서
[출처] 752.탄허스님의 선사상|작성자 Ink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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