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이원론의 극복
Ⅰ. 서 론
Ⅱ. 본 론
A. 이원론
B. 계시와 이성
C. 교회와 국가
D. 그리스도와 문화
E. 초월과 내재
F. 은총과 자연
Ⅲ. 평가와 결론
*** BIBLIOGRAPHY
I. 서 론
실로, 역사적으로 이원론처럼 명쾌하고 분명한 대답을 주는 논리가 다시 없다.
그리하여 고대의 類似 기독교적 집단들은 한결같이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고있는 것이다. 類似 기독교 이단만이 아니라 성서적인 정통에 서 있다고 하는 교부들과 신학자에게서도 이원론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발견된다. 사도 바울은 그의 학문적 배경으로 이미 플라톤적인 이원론자로 여겨지고 있는가 하면1) 1세기 후반, 2세기 初 헬라 문화권을 상대로 선교했던 요한에게서도 이원론적인 면은 얼마든지 나타난다.2)
사도 바울 이래 기독교 신학을 실제적으로 형성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떠한가.
A. von 하르낙은 아우구스티누스를 新플라톤주의자로 규정한다. 즉 그에게는 두번의 회심이 있었는데 386년의 첫번 째 회심은 新플라톤주의에로의 회심으로서 기독교와 복음으로의 회심은 391년에 가서야 일어난다는 것이다.3)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원론은 하나님-세상, 하나님의 도성-땅의 도성, 보이는 교회-보이지 않은 교회, 아가페-에로스, 카리타스-큐피디타스 ... 등의 다양한 형식을 취하면서 그의 전 저작을 관통하고 있다.4)
칼 바르트는 언젠가 자신의 신학적 전통에 대하여 예레미야 - 바울 - 아우구스티누스 - 루터, 칼빈 - 키에르케고르라고 말한 바 있다.5) 우리는 예레미야(하나냐), 바울(스토이씨즘 또는 유대주의),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루터(에라스무스, 후기 중세 인문주의), 칼빈(알미니우스), 키에르케고르(헤겔).... 의 목록에서 보여 주는 『보편주의에 대한 특수주의』 『역설과 합리』 『위로 부터와 아래로 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인 차이와 유한과 무한의 화해』, 『계시와 이성』 『초월과 내재』 그리고 『그리스도와 문화』..... 의 극명한 긴장과 대립을 보게 되는데 그 중심 軸은 이원론이다.
이러한 긴장과 대립은 우리 교회사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혹한 핍박과 무신론 운동보다 더 위협적인 것으로서 기독교 형성 이전에는 헤브라이즘-헬레니즘의 구조로, 기독교-스토이씨즘, 그리고 신약성서 內에서는 바울과 공동서신의 저자들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나 있고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카톨리씨즘은 신학과 이성의 『화해』로서, 제베르크의 말대로 아우구스티누스 主義의 약화 과정이었다. 르네상스 운동, 에라스무스로 대표되는 후기 중세 인문주의에 대한 루터의 극복, 그리고 칼빈-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의 싸움, 17세기 정통주의와 자연주의, 낭만주의의 대립, 그리고 최근의 칼 바르트와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투쟁으로 이어지는데 우리 개혁주의 전통은 이러한 첨예한 대립의 최 전선에 있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구조는 다양한 용어와 개념을 채용하는데 계시-이성, 교회-국가, 그리스도-문화, 초월-내재는 대표적인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연과 은총』이다. 이에 이 小考에서는 이러한 이원론적인 대립가운데 몇가지 개념에서 『이 세상적인 것』과 『저 세상적인 것』이 어떻게 극복되고 통일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본 론
A. 이원론6)
형이상학적인 이원론에서는 두 가지(kinds)의 구별되는 實在가 있다고 본다. 곧 플라톤에게서 보여지는 것처럼 보이는 감각 세계와 우리가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Idea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전 사상 체게를 통하여 용어를 달리 하면서 계속 반복하여 나타난다. 가령, 데카르트는 思惟와 延長, 칸트는 Phenomena의 세계와 Noumena의 세계로 말하기도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 말이 처음 쓰여진 것은 토마스 하이드(Thomas Hyde)가 1701년, 그의 저서 Historia Religionis Veterum Persarum에서 빛과 어둠, 선과 악, 생명과 사망을 대조시키면서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이 말이 성서적인 근거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 세계와의 관계를 말하는 제한적인(qualified) 이원론이다.7) 즉, 하나님은 chaos로부터 이 자연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창조 세계에 신적인 질서가 있음으로 하여 『보시기에 아름다웠다.』 그리고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생령(nephesh)를 불어 넣으심으로 자신의 형상을 만드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창조 세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주어졌고 그 자유의 誤用으로 인하여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사망의 길을 가고 있지만 이것으로 신적인 형상(divine Image)을 지닌 자녀로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 주장(claim)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기독교의 제한적인 이원론은 선과 악,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죄, 인간의 타락의 비극과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성취라는 변증법적인 관계와 함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초월과 내재의 방법으로 인간의 歷史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하나로 통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B. 계시와 이성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시고 이해하시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밖으로부터』 인간에게 다가오는 『사건』이다. 이것이 계시이다. 곧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말씀하신다. 일종의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시는 것이다.8)
문제는 이 계시를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고 또 남에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무엇』때문에, 인간의 무슨 힘과 능력에 의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여 작용하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해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고 단지 그러한 능력이 밖으로부터 먼저 인간에게 주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그 계시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만한 이성의 능력이 있는가.9)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고대 기독교가 헬라 철학과 대화하면서(헬라 세계로 선교되면서) 제기되었다. 신약의 정경에서도 그 고심의 흔적이 보인다.10)
더우기 이 문제가 절실하게 된 것은 성서와 성령으로부터 지도받지 않는 철학이 신앙적인 사고와 비슷한, 또는 동일한 사상을 가지고 사색한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님에 대한 이해, 인간 구원의 도식 등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질문은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의 관계로 종종 논의되었는데 여기에는 대체로 두 가지의 입장이 있어왔다.11)
먼저, 신학은 철학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 올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즉 인간은 전적인 他者인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접촉점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이룩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이해를 돕는 조건까지 주시는 것이다. 터툴리안이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뇨,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무슨 조화가 있느뇨. 우리의 가르침은 솔로몬 行閣에서 나왔느니라. 저 스토아주의는 무엇이고 플라톤은 무엇이뇨, 모두 물러가거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후에 그 어떤 희한한 논쟁도, 복음을 즐기는 외에 어떤 思辨도 필요가 없나니, 우리의 신앙을 원하는 외에 다른 믿음이 필요하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한 것은 그러한 입장을 잘 말해 준다.
다른 하나는 철학적 사고와 인식은 비록 제한은 있으나 신학적인 사고와 인식의 근거가 된다는 입장이다. 즉, 자연 신학은 계시 신학의 기초가 된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 (Gratia non tolit natrum, sed supponit et perficit.) 아퀴나스는 나아가 이성 홀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은 이성과 철학적인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타당한 지식을 획득한다는 것이다.12) 인간 이성이 성령의 역사없이도,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인식할 수 있다는 이러한 입장은 카톨릭 신학의 기초가 된다.
카톨릭에서는 자연적인 신 인식에 이의가 없다. 중세 신학 전통은 바로 인간의 합리성 위에 서 있고 제 1 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에 대하여 명확하다.13) 그리하여 神存在證明도, 神人同形論(Anthropomorphism)도, analogia entis도, 자연 신학도 가능한 것이다.
루터이래 우리 개신교 신학은 sola fide의 엄격한 입장을 세워가지만 이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신앙은 인식적인 요소(cognitive element)를 포함하는 것으로 단순한 belief(fiducia)의 차원이 아니라 fides이다. 그것은 논증되지 않는 도그마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신뢰(trust)라고 보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곧, 믿고 또 아는 것에 대한 자신의 생명을 위탁하는 것이다.14)
개혁주의는 전통적으로 이성을 신앙의 "whore"로 여기고 신앙을 높이는(extoll) 경향이 있어 왔다. 합리주의자들은 이들을 fideist 라고 부르는데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적 감정, 리츨의 도덕적 경험, 가치 판단,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하여 계시하신다는 역사적 상대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주체적인 것으로 여긴다. 곧, 이성은 계시를 판단하는 합리적인 기준이 된다. 여기에 계시가 자리할 가능성은 없다.15)
이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우리의 신앙의 요체를 비합리, 역설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역사, 이성에 의하여는 결코 소화될 수 없으며 보편적인 삼단논법으로는 변조될 수 없는 『역설(The Absolute Paradox)』이다.16) 우리의 이해의 영역을 넘는다는 점에서 『비합리』이다. R. 오토가 누미노제(nouminous, das Heilige)를 말하면서 『비합리』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의 비합리성이라기 보다는 그 逆說性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앙은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일(das Absurde)』로서 『거치는 것( rgernis)』이다.17) 그리스도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의 영역, 곧 이성이 정지되는 그 곳에 있는 신앙의 대상이다. 그에 의하면 신앙의 내용은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신앙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나 이론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신앙할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탐구하기를 계속하는 한 입증하려는 일 때문에 그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거기에 없다. 그러나 탐구하기를 그만 둘 때 그는 신앙의 대상으로 문득 거기에 있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이 일치되는 종합의 체계를 키에르케고르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양자 택일의 결단과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라는 역설을 믿는 것으로 이것은 인간의 사유를 넘어있는 신비이다.18)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엄격한 초월을 이어받은 바르트는 이성의 『적(foe)』으로 비난 받지만 바르트가 신학에서 이성이 필요없다고 말한 적은 없다.19)
계시, 신앙이 이성적인 기반 없이는 피상적이고 비도덕적일 수 있다. 신학이 이성을 사용하지 않으면 또 다른 암흑 시대를 도래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개혁주의 전통이 믿음은 이해를 추구한다,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라는 명제에 충실한 것은 이성과 신앙의 관계, 곧 이성의 한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을 통하여 나타난 계시의 객관성 안에서 종교 개혁의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문제는 계시가 이성을 활용하느냐라기 보다는 자연신학이 가능하냐의 문제이다.
자연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계시나 신앙에 터하지 아니하고 이성과 그 작용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자연 신학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연 신학은 중세적인 Anthropomorphistic에 기초한, analogia entis로서 자연적인 신인식은 적 그리스도적인 『하나님을 세계화』하는 것일 뿐이다.20)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에 관한 질문도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다. 바르트는 칼빈의 『하나님을 아는 이중 지식(duplex cognito Domini)』에 대한 논리를 발전시켜 신앙의 유비를 말한다. 곧 이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조명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관하여 질문할 수도 없다. 질문의 주체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질문하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하시는 하나님의 이 질문에 우리는 신앙으로 응답할 뿐이다.
베드로가 바르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 예수께서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이니라. 하시는 말씀은 곧 계시의 주체를 말씀해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이를 때 그것은 이성의 몫이 아니라 『가슴(heart)』을 자극하여 인격 전체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현명한 자여, 복이 있도다. 너희는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니라. 하시지 않고 마음이 깨끗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마태 5:8)라고 하셨다.21)
인간은 철학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주, 전지전능을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곧 하나님의 현실성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곧 신앙 안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인간의 가진 조건으로는 그러한 만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절대적이고 추상적인 이성 그 자체는 있을 수는 없다. 이성은 정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인간의 어떤 가능성이 아니라 다른 인격적인 존재와의 관계에서 정신적으로 대화하고 관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22) 그러므로 자연적인 신 인식이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신학의 전제로 삼았던 이사야 7 : 9는 오늘도 우리의 신학적 사고의 규범이 되어야 하겠다. 너희가 믿지 못하면 정녕 깨닫지 못 하리라 ! (Nisi crederitis non intelligetis)
C. 교회와 국가
국가 권력과 교회, 그것은 원시적인 제정일치 문화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가장 중심적인 문제였다. 특별히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데오도시우스의 기독교의 국교화 이래, 기독교와 로마 황제 사이에서 시작되어 중세 천년을 계속해온 Caesaropapalism과 Papalcaesarianism 사이의 긴장은 그것을 보여준다.
국가와 종교는 시대와 장소를 따라 다양한 형태, 다양한 기능을 가져왔다. 신학자들의 다양한 국가관 역시 자신이 경험한 역사적 체험의 범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네 가지의 관계가 가능하다.23) 곧, ① 교회와 국가 중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지배하는 관계, ② 양자의 상호 협력 관계 ③ 양자가 무관심하게 병립되어있는 관계, ④ 양자의 적대관계인데 여기서 ③은 불가능한 것은 한 나라 안에 두 개의 정부가 있는 격이 되는 것이다. 교회의 독립성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이러한 기형적인 관계가 성립되지만 인간은 이중적인 정부(duplex in homine regimen)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24) 그런 의미에서 ④ 역시 불가능하다. ①은 국가의 교회화, 또는 교회의 국가화, 세상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바르트가 그 온 몸을 던져 반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라 하겠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물론 ②의 경우이다.
칼빈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두 사랑에 기초한 두 왕국 사상의 틀이 있다. 그러나 칼빈의 국가관은 국가의 존재 근거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도구라고 하는데서 좀더 적극적이다. 칼빈에게서 국가의 존재 이유는 1차적으로 영적인 정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중세의 로마 천주교에서처럼 국가가 교회에 예속되는 식의 두 왕국도 아니요 19 세기의 국가주의나 히틀러 치하에서의 교회가 국가에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모두 한 왕국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25)
칼빈은 국가를 구축하는 세 가지의 요소로서 국가의 공직자, 국가의 법, 국민의 순종을 들고 있다.26) 그에게서 국가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을 매개시켜주는 매체요 국가의 공직자는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위탁 명령과 권위를 부여받은 자, 하나님의 봉사자로 신적인 진리의 도구들이다.
그러나 근대 계몽주의 이후, 18-19 세기에는 국가의 신적 기원이 희박해지고 그리스도의 왕국과의 유기적인 관계가 단절되고 근대국가가 성립되면서 국가지상주의가 대두된다. 이는 헤겔의 국가관에 힘입는다. 헤겔에게서 국가는 절대 정신의 실체로서 인륜의 총체이며 윤리적 정신의 완전한 형태이다. 국가는 신적인 절대 정신의 구체적 실현체로서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국가는 본질상 종교적이다. 따라서 국가는 정치와 종교의 종합이다. 27)
이에 대하여 바르트의 국가관은 헤겔에 대한 反題(anti these)이다. 1934년 바르트의 주도 하에 선언된 『바르멘 신학 선언(Die Barmer Theologische Erklarung)』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28)
그 선언의 제 5 항에서 그는 먼저 베드로 전서 2장 17절을 인용,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공경하라. 고 한다. 그리고 이어 말한다.
성서는 우리에게 말한다.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다음과 같은 과제 즉
교회도 속하여 있는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세상에서 인간의 통찰과 능력의 분량
에 따라 권력으로서 위협하고 권력을 행사하면서 정의와 평화를 보호할 과제를
지닌다고. 교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을 경외하면서 이러한 그 분의 섭리
의 은혜를 인정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계명과 義 그리고 통치자
들과 피통치자들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교회는 하나님게서 만물을 유지하시는
수단인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고 이에 복종한다.
우리는 마치 국가가 그 특별한 위임을 넘어서서 인간 생활의 유일하고 전적인
조직이 되고 그래서 교회의 사명까지도 성취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처럼 가르치는 그릇된 敎說을 배격한다.
또 우리는 교회가 그 특별한 위임을 넘어서서 국가적 형태, 국가적 과제 및 국
가의 위엄을 취하고 그리하여 자신이 유일한 국가의 기관이 되어야 하고 또 그
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그릇된 敎說을 배격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인의 국적, 또는 속한 도성은 현세가 아닌, 미래의 세계,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고 본다. (빌 3:20, 히 11:10, 11:13-16, 12;22, 13:14)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실 생활에서 교회와 국가는 지상에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다른 한 쪽으로 넘어갈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교회와 국가는 그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의 은총 안에서 사람들을 신앙으로 초대한다. 지역 안의 사람들을 그 안에 모으고 권력에 의하여 확립된 질서에 의해 보존한다. 국가는 인간의 필요를 따라 만들어진 상대적인 제도로서 인간의 죄를 반영하는 현실이지만 하나님의 넓으신 통치의 섭리 안에 허용된 제도이다. 당시의 나찌 정권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이 권한의 한계를 넘었다고 그는 본 것이다.29)
국가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본래의 목적대로 유지되도록 할 때 그 가치가 尊崇된다. 그러므로 『靈』, 『罪의 容恕』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는 국가는 교회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30)
이와 관련하여 바르트와 쿨만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국가라는 두 개의 同心圓的 구조를 말한다. 內圓은 교회이고 外圓은 세상과 국가이다. 교회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 있는 또 하나의 원, 세상에 이 사실을 전파한다. 이 두 圓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존속된다.
여기서 문제는 동일화가 아니라 상호 연관이다. 국가는 하나님의 용서의 使信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은총에 호소하지 못한다. 교회는 교회로 존속하면서 국가의 과제에도 참가한다. 여기서 교회는 이 세상의 영역 속에 뛰어들어 이 세상과 連帶를 맺게 된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이 두 개의 원은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부단히 동적이다. 즉, 교회와 국가는 다 같은 목적과 대상을 향하여 상호 연대의 관계에 있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각자의 사명과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동적이고 내적 연대성을 지닌다. 이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기능은 제사장적 기능이다.31)
이러한 동심원적 구조는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이 보여주는 두 왕국 사상은 결코 이원론적인 적대 관계나 서로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다. 여기서 국가와 교회는 대립과 투쟁, 불신과 박해의 관계가 아니라 힘을 합하여 공동의 목적이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향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는 것으로 기독교인의 문화와 학문, 직업 등 모든 삶의 현장에서의 태도를 결정한다.32)
물론 은총과 신앙은 문화적, 학문적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아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역사하실 때 일어나는 복음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은총과 신앙으로 구원얻은 기독교인과 교회 공동체는 문화와 학문, 그리고 직업의 영역에서 크나큰 개변(transformation)을 일으킨다. 특히 칼빈은 문화와 학문, 직업의 영역에서 나타나냐 할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개혁주의는 문화와 학문, 직업에 대하여 영지주의적 적대관계를 말하지 아니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성령의 계속적인 복음의 역사는 이 창조의 세계를 개변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국가와 사회, 문화와 학문 직업,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선교활동에 비례하여 이 세상은 주님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개혁신학은 참된 의미의 세속화 신학이라 할 수 있다.
D. 그리스도와 문화
Charles Kraft는 모든 문화 속에는 인간의 죄가 반영되어 있다. 33)고 말하는데 과연 그리스도는 인간이 이룩한 문화에 대하여 적대적인가, 이 둘은 본질상 이원론적인가.
여기서 『그리스도』라 할 때, 니버에 의하면, 2천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예수 안에 나타난 한 인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행사한 권능과 감화력으로 형성된 도덕적인 것, 정신적인 모든 것 그리고 그에 복종케 하는 가르침의 체계, 나아가 그를 믿고 그에게 복종하는 관계에 들어간 사람, 겸비와 온유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산이라도 옮길만한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행위를 소유한 모든 그리스도인 총체를 말한다. 곧 기독교적 믿음과 세계관에 대한 총칭이다.34)
이에 대하여 『문화』는 그리스도의 교훈의 체계에 대립되는 세속적이고 본질상 無神的인 것만은 아니다. 문화를 종교나 국가와 같이 강제적이고 권위적인 것과 구별하는 Jakob Buckhardt와는 달리 니버는 인간의 정신적, 도적적인 생활의 향상을 위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여기에는 인간이 이룩한 가치의 체계, 삶의 모든 양식을 포함하여 신약 성서에서 『세상』이라고 부르는 모든 영역이다. 이러한 문화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먼저 문화는 인간이 자연적인 것 위에 인공적으로 덧입힌 제 2의 환경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外化-內化-一般化의 과정을 거쳐 축적된 사회적 유산으로 생성-성장-소멸의 輪廻를 한다. 곧 문화는 끊임 없는 변화의 도상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언어, 교육, 전통, 신화, 과학, 예술, 정치, 법률, 의식, 신앙이 포함된다. 문화가 인간의 노력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듯 이것을 받는 사람도 자신의 노력과 성취 없이는 얻을 수 가 없다. 인간의 별다른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선물과는 다른 것이다. 문화는 인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고안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위하여 유용하며 인간에게 유익하다. 인간에게 좋은 것, 인간 중심적(anthropocentric)이다. 나아가 문화 그 자체는 優劣이 없다. 곧 문화는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것으로 『문화는 多元的이다.』35)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에 사는 동시에 문화 아래서, 문화 안에서 살면서 이 문화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각에 영향을 끼친다는데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사도 바울 역시 당대의 문화 가운데서 문화적 제한과 틀 속에서 한정적인 언어와 개념을 가지셨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당시의 그레코 로만 문화가 한정해주는 문화적 제약에서 사고하였다. 칼빈도 문화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특히 그의 후예들인 칼빈주의자들은 기독교 문화의 暢達과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다만 바르트는 문화가 인간 중심의, 인간을 위한, 인간의 자아 긍정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한다.36)
여기서 우리는 문화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니버의 정의에 유의하면서 양자간의 관계 역시 니버의 다섯 유형을 살펴 보기로 한다.37)
첫째 가능성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대립』을 말한다. 그것을 그는 『문화와 투쟁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문화가 어떠하든지간에 인간이 만든 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일반 문화나 종교에는 희망이 없으며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세상』을 포기하고 양자 택일의 선택만 강요된다. 신약의 요한 1 서의 내용이나 터툴리아누스, 중세의 수도원 운동, 근세의 신비주의 운동, 그리고 문화 부정론자 톨스토이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절대적 우월성을 비타협적으로 주장한다.
둘째는 『문화의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이다. 그리스도는 문화의 일부로서 양자 사이에는 근본적 일치가 있다. 이 입장에서는 교회와 세계, 사회 법과 복음,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 간에 아무런 긴장이나 부조화와 대립은 없다. 창조주와 그 피조 세계 사이에 질적인 단절은 없다. 그리하여 아래에서 위로 올라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다. 초기 교회의 영지주의, 중세의 아벨라르(P. Abelard), 근대의 문화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 리츨의 윤리주의, 라우쉔부시의 social gospel이 이러한 관계이해 위에 서 있다.
셋째로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라는 관계이다. 그리스도와 문화는 연속적이면서 비연속적이다. 문화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올릴 수는 있으나 인간의 예측과 판단을 넘어서 그리스도는 그의 방법과 원하는대로 문화를 이룬다. 그러나 배타적이거나 융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문화를 긍정적으로 용납하면서 그것을 지배한다. 일종의 종합주의이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주장되었으며 지금의 로마 천주교회는 바로 이러한 관계이해의 선상에 있다. 여기에서 시도되는 그리스도와 문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시간과 영원, 율법과 은총....을 하나의 실체로 통일시키려는 노력은 불가피하게 상대적인 것이 절대화되고 나아가 무한이 유한으로 해소되는 위험이 있다.
넷째로 『역설적 관계의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in paradox)』이다. 일종의 이원론적 관계이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실존적 상극관계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가 싸운다.』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룩된 화해와 사죄의 역사,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죄의 행동 사이에 긴장과 역동적인 삶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은총은 하나님께 있고 죄는 사람 안에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iustus et pecator)』이다. 만약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 세계를 그 죄 안에서 유지하지 않으면 세계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변증법적 이원론으로 바울과 루터, 키에르케고르, 트뢸치가 여기에 속한다.
다섯째로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Christ as transformer of culture)』이다. 이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아직도 죄인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인간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현존으로 사역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인간은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사회, 문화를 떠나서 사역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한 가운데서 역사하신다. 문화 안에서 그리스도는 속죄적 사역을 통하여 문화를 변혁시키신다. 창조와 타락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둘의 관계는 단절, 逆轉, 顚倒이다. 문화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라 『왜곡된 선』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분일 뿐만 아니라 문화 안에서 사는 인간을 질적으로 변화시켜 주며 문화 자체를 재생산하는 분이다. 신약의 요한 복음,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웨슬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형들로서 『이것이 기독교인의 해답이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결론에는 이를 수 없다. 이러한 유형들은 전적으로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다양한 입장들 중에서 많은 점이 서로 화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피차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38) 우리의 견해를 따라 우리는 토마스 주의자 루터주의자, 톨스토이 주의자, 어거스틴주의자라고 선언한 후에도 우리는 부분적이며 불완전하며 단편적인 지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이다.
문화, 또는 문명이라고 번역한 civis, civilis, civitavilis는 모두 『시민』, 『시민에 적합한』, 『시민의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인간 개인이 가지는 어떤 자격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생활, 공동 생활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문화가 우리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규정하고 역시 은총의 질서 가운데 있다. 이 말로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절대성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문화를 『위탁』하신 것이다.(창1:26)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인 문화의 창조자로, 개변자로서 새로운 문화 창달의 담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E. 초월과 내재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는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이다. 실로 Neo-Orthodoxy, 新正統主義는 하나님의 초월, 타자성에 대한 재발견이라 할 수 있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아들, 자유주의자 곧 문화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는 하나님께서 그의 지으신 세계 안에 내재하여 계신다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초월, 초자연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39)
우리 성서는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철학적인 정의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보여 주는데 초월은 주로 하나님의 창조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창조자로서 플라톤에서처럼 先在하는 이데아로부터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無(nihil)로 부터 창조하시고 절대적 주관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process의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것(any aspect)과 동일시 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은40) 기독교 교리에서 일찍부터 강조되었는데 구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인간 존재와는 구별되는 최고의 존재(supreme entity)이다. (이사야 45:15, 58:8 등) 헬라 철학에서는 보다 초 역사적이고 무시간적이며 靜態的인 존재로 이해되어졌다. 즉, 플라톤에서의 Idea는 우리의 지식과 존재를 넘어 있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不動의 動者(Unmoved Mover), 新플라톤주의의 一者(The One)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사고가 기독교 신학과 접촉하면서 교부들과 그 이후의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41)
하나님은 그 창조 세계에 대하여 절대 타자로 존재하시면서 우리 인간 존재와는 불연속성을 지닌다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함께 그의 역사성을 말한다. 즉, 루터에게서 하나님은 그의 진노로는 『숨어있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이고 그의 은총으로는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이 되는 것이다.42)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가 시작하였을 때만 창조자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적으로(continually) 창조적으로(creatively)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분임을 강조한다. 그는 『비 한방울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내리지 않는다.』 그의 절대 예정론은 이러한 섭리론이 극대화된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은 이 세상의 우상적인 존재에 대한 성서의 거부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제 2 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이른 바, 神人同形論的(Anthropomorphistic) 신관에 대한 거부이다.
내재주의가 극대화된 것이 범신론적, 자연주의 낭만주의이다. 여기서 우주, 자연은 이 세상의 만물이 신적인 것이 되고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초월은 그의 절대적인 도덕, 거룩하심의 의미이며 특별히 『역사에서의 그의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어떤 필요나 결핍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세상의 창조가 그의 필요라거나 부족한 것을 메꾸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더우기 하나님은 그의 창조로부터 자유하신다. (God is not bound by his creation) 가령, 회개한 죄인은 용서 받는다. 그러나 이 용서는 하나님의 기계적이요 의무적인 용서가 아니라 개별적인 용서와 사랑이다. 죄인에 대한 용서와 구원,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일 뿐이다.43)
우리 개혁주의는 물론 엄격한 초월주의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내재적인 섭리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로 나누어 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초월주의자들은 2층 구조적 우주상을 견지한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만드신 세상을 초월하여 계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초월적인 창조자 하나님은 이 우주를 전능하신 섭리(providential guideance)와 기적적인 개입(miracoulous intervention)을 통하여 유지하신다. 이 『기적』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간섭하시는 것으로서 여기에 특별한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神性을 보여 주시는 창문이 되는 것이다.
초월주의자들의 우주관은 개방적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초월하여 계시되 자연적인 제한은 없는 것이다. 극단적인 초월주의에 理神論(Deism)이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는 하셨지만 간여는 하지 않으신다. 이는 성서에서 보여주는그의 이 세계와 끊임 없이 관계되어 있고 계속적으로 관심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곧 인격적인 하나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에 대하여 내재주의자들은 폐쇄적인 우주관을 갖고 있다. 이 우주, 시간과 공간은 그 자체로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배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자연법칙 안에 계신다.
내재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의미가 관계되어 있다.44)
먼저, 내재의 원리는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나 사건들은 이 세상 안에서의 다른 사건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원리이다. 가령, 트뢸치에게서 내재의 원리는 역사 탐구의 기본적인 원리로서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따르고 있다. 이들은 초자연적인 개입으로서의 기적의 가능성이나 하나님에 의한 이 세상에의 직접적인 작용(work)을 부인한다. 슈트라우스가 그랬고 불트만은 이 원리를 성서 해석의 원칙으로 삼아 그의 『非神話化論』을 세워 나간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그 창조 세계에 직접 내재하신다는 것으로 하나님은 그 창조물과는 떨어져서 독립하여 계신 external power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이 세상에 계시하시는 world process의 내재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근대 자유주의의 아버지로서 그에 의하면 기적은 단순한 ordinary event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창조의 완성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은 곧 만유』라는 스피노자에게서 깊이 영향받은 것이다. 이러한 내재의 원리는 범신론, 무신론, 또 panentheism(萬有內在神論)이 된다.
바르트가 하나님과 인간, 세상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질적인 차이, 곧 큰 간격(crevasse), 深淵, 죽음의 線(Todesline), 빙하의 계곡(Gletscherspalte), 極地域(Polarregion), 사막의 지역(Verwustungszone)이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대주의,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중요시하는 인간중심의 신학, 자연 속에 混和되어 버린 하나님을 재발견하려는 외침이었다.45) 하나님의 세계와 이 물질 세계가 아무런 경계없이 混和된 신비주의적, 유물론적 일원론을 거부한 것이다. 이 둘 사이를 건너는 다리란 없다.46)
바르트의 이러한 『수직적』 신학의 최대 관심은 하나님의 자유와 주체성(Aseitat)이다.
후일 바르트가 『하나님의 인간성』을 말함으로서 우리 인간 여사 속에 내재 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게 되는데 여기서 바르트는 초월과 내재의 통일을 계시 속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자유(초월)와 사랑(내재)을 본 것이다.47)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초월적인 『하나님 그 자신(Gott an sich)』이 내재적인 『우리를 위한 하나님(Gott fur uns)』가 되신 것이다.48)
하나님은 초월적이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49) 실로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기초(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타자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Deus pro nobis)』이 되셨다. 『Adonai』가 『Abba』가 되신 것이다. 신약 성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nouminous(das Heilige),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비하의 하나님』이다. 이로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과 대립하신 분이 아니다.50)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분명히 위엣 것이요, 또 보이지 않는 세계로서 저 세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이 역사적 지평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역사로부터의 무시간적, 무아적 도피로 약속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역사의 성취를, 완성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51)
F. 은총과 자연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 사이의 자연 신학 논쟁은 1934년, 브룬너가 발표한 논문, 『자연과 은총(Natur und Gnade)』과 이에 대한 바르트의 응답, 『아니오!(Nein !)』로 구성된 것으로 이는 결국,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 존재론적 구조의 문제이다. 즉 『유한은 무한을 포함할 수 없고(Finitum non copax infiniti)』 『죄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Homo peccator non copax verbi Domini)』는 바르트의 입장과 인간의 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곧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접촉점(Anknupfungspunkt)이 남아있다는 브룬너의 입장이 극명하게 대립된 논쟁이다.
브룬너는 이 논문을 통하여52) 바르트가 sola gratia에 충실한 나머지 하나님과 타락된 인간 사이의 『存在의 類比』, 곧 자연과 양심, 일반 역사에 나타난 신적 계시를 거부하고 창조와 유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은총을 부인하며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부정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물론 브룬너가 자연과 은총을 동등하게, 같은 평면 위에서 병립시키고자 한 것은 아니고,53) 하나님의 독자적 행위(Alleinwirksamkeit)를 보존하면서 무엇보다 자신이 개혁주의 전통에 있음을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물론 칼빈의 충실한 해석자로 자처한다. 즉 자신이 sola gratia에 굳게 서있으면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이 세계의 구원자로, 오직 신앙을 통하여만 의롭게 되며(sola fide), 성서만이(sola scriptura)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의 규범임을 인정한다. 나아가 인간의 의지는 노예의지로서 그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54) 그러나 비록 인간은 죄인이지만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서 이 형상은 『창조의 중심이요, 정점』이다. 이것은 죄와 타락으로 완전히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전제로 존속한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식적(formal) 형상과, 내용적(material) 형상이 있는데 내용적 형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죄인이다.』55)
그러나 형식적 형상은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교란되기는 하였어도 파괴되지는 않고 남아 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 형식적인 것으로 『언표성(Wortmachtigkeit)』과 『책임성(Verantwortlichkeit)』이라는 두 가지 특성의 『인간성(Humanitas)』이다. 『이로서 인간은 주체적으로 하나님과 또한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으로 창조적으로 주어진 것이다.』56) 이 『죄로 인하여 훼손 되었으나 완전히 파손되지는 않은』 대화의 가능성 (Ansprechbarkeit), 언어의 수용성(Wortempfanglichkeit)은 접촉점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면서 믿음을 창조한다. 이로서 새 사람의 창조는 『회복(reparatio)』을 의미한다. 『..... 만일 인격성이 완전히 없어졌으면 회복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브룬너의 입장이다.57)
어떠한 형태의 자연신학도 철저하게 거부한 바르트에 비하여 브룬너는 오히려 『현대 신학자의 참다운(prosper)과제는 자연 신학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브룬너는 창조의 계시, 곧 자연에서의 계시를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한다. 즉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요, 자기 전달이다.』58)
나아가 브룬너는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에게 주시는 지속적으로 주시는 『維持의 은혜(Erhaltungsgnade)』를 말한다. 인간은 그 영적인 삶 이외에도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삶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인간은 그의 삶과 사회 속에서 획득하는 모든 것, 세계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선물, 곧 『하나님의 維持(保存)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 즉 인간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 구원의 은혜를 깨달아 알기 전에 이미 부지중에 그 은혜 가운데 있었다는 것으로 이 유지의 은혜가 필요한 이유는 『모든 인간이 범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을 보존하시려는 이 유지의 은혜를 주시는데 여기에는 부모, 결혼, 민족, 역사 ....... 자연법(lex naturae), 국가, 제도 등이 있다.59)
이에 대하여 바르트는 즉각적으로 아니다( Nein !) 라고 대답한다.
즉 브룬너의 이러한 생각은 비성서적이요, 毒性이 있는(pious) 아퀴나스의 카톨릭적인 것으로 반 종교개혁적인, 『적 그리스도』의 주장일 뿐이다.60)
바르트는 묻는다. 과연 복음적 신학과 자연 신학이 공존할 수 있는가.. ?
바르트의 대답은 물론 『아니다!(Nein)』이다. 바르트는 인간의 본성적 경험과 계시 사이의 어떠한 접촉점도 거부하는 키에르케고르적인 『간격』, 『심연』, 『전적 타자』, 『역설』.... 로 그리고, 『계시의 유일성』,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으로 인간이 지니는 신적 관계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창조 관계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은다. 『인간 속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계시의 가능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창조자 자신이 그의 은혜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어떤 『인간적인 행위』를 바르트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61)
analogia entis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와 은총 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어떤 연결성, 연속성도 허락지 않은다. 비록 하나님과 화해되고 의롭다 함을 받은 인간이라도 인간은 여전히 죄인으로(simul justus et peccator) 존재하기 때문이다.62)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을 알고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이 특권은 폐기되고 인간으로 부터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어떤 길도 막혔다. 바르트는 인간의 타락을 역사적 사건으로가 아니라 超 역사적 진리로 이해한다. 이 사건은 두 형이상학적 대립의 현실화이며,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를 구별하는 근거가 된다. 『이 타락은 각 개인에게 동시적으로 작용,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은다.』 이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전체적으로』 불가피하게 『철두철미하게 죄인』이라는 것으로 인간에게 접촉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 속에 있는 어떤 가능성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며, 『기적』으로서 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간 실존의 절망과 함께 신앙을 고백하게 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인식하게 하는 능력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63)
바르트는 나아가 펠라기우스적 인간의 자기 高揚(Self-exaltation)을 규탄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자연신학은 『크나큰 유혹』으로 『오류의 원천』이다.64) 바르트는 자연 신학을 『종교(religion)』로 부르는데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믿게 하며, 『너도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eritis sicut Deus)』 하던 사탄의 속삭임일 뿐으로 『사람은 종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바벨탑을 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길들여(domesticate) 자연적인 존재로, 우상으로, 추상적인 존재로(abstracto) 전락시키기 때문이다.65)
『인간의 종교야말로 인간에게서 가장 위험한 원수』이다. 『종교는 신앙의 적이다.!』66) 그것은 시간과 세계에 있으면서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시키며 결국 자기 자신을 의존케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종교는 인간의 장엄(grandeur)이자 비참함(misery)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율법에서 처럼 종교에서도 그 스스로의 한계와 존재와 비존재의 간격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에서의 모든 오류의 근원은 이른 바, 仲裁, 媒介神學(Vermittlungstheologie)으로서 그는 자연과 은총, 이성과 신앙, 역사와 계시, 현대와 實證(positive),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히틀러.... 에서 보여주는 『...와(und)』를 반대하면서 이 둘 사이의 어떤 연결점(하이픈,--)도 거절하였던 것이다.67)
이렇듯, 바르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성, 역설성이라는 근본원리로 수행한다. 바르트에게서 은총론은 그의 모든 신학의 공통분모가 되는 『은총 보편주의』가 되는데 하나님의 은총은 괄호 앞에 붙은 부호처럼 하나님의 모든 행위와 성품을 규정한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은 바르트의 신학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바르트의 신학을 관통하는 『원리』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이나 행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인간의 자연신학적 추구로는 포착되지 아니한다. 물론 하나님의 이러한 초월은 공간적인 의미나, 하나님을 저 세상적인(other worldly)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서 은총으로의 길은 없으며,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 유일의 길은 『은총 그 자체』요 그리스도 뿐이다.68)
바르트의 이러한 극단적인 초월주의적 입장은 『영지주의, 새로운 마르시온 주의』(하르낙), 『懷疑(Skepsis)』(고가르텐), 『천상의 독백』(챠른트), 『신학의 역사의 상실』(판넨베르크),..... 등의 비판이 제기된다.
그러나 우리는 바르트가 그의 신학에서 역사적 지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르트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즉, 타락한 자본주의, 한계를 모르는 무절제한 방종에 빠진 자유주의.... 더우기 참다운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라고 생각했던 사회주의가 전쟁을 위한 이념적 도구가 되어 버리고 자연신학을 기초로 하는 나찌즘 안에 있는 악마적, 죄악적 요소를 바라 보면서 이 모든 역사적 상대주의에 대한 『해독제(anidote)』로서 절대 부정적인 초월적 은총주의를 세워나가는 것이다.69)
Ⅲ. 평가와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우리 기독교 신학에서 자칫, 이원론으로 여겨질 수 있는 몇가지 개념에 대하여 그것들이 갖는 의미의 한계와 함께 이것들이 배타적이고 양자 택일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혁주의 전통에서 어떻게 통일되고 극복되는지를 알아보았다.
각각의 주제는 먼저 의미를 규정해주고 문제가 되고 있는 주장들을 대별해 보면서 이에 대한 개혁주의의 통합적인 해결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이 매우 빈약한 것은 말할 것 없고 또 개혁주의 입장이라는 것이 칼 바르트로 집중된 것이라는 제한적 것이다. 또 그것도 primary source가 아닌 2차 자료에 의존하였다. 이것은 본 연구자의 한계이기도 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계시와 이성, 내재와 초월, 그리스도와 문화, 교회와 국가, 자연과 은총 .... 등은 2천년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논의되어 온 중심적인 과제로서 다양한 용어와 개념으로 나타나고는 있지만 이것은 곧 하나의 맥락으로 관통하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계시와 초월, 은총... 그리스도, 문화 이런 용어들은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도 있는 것으로서 관점, 시대적 관심을 달리 한 것일 뿐이다. 모든 신학적 논쟁은 바로 그 시대 정신과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신학자들 역시 그들의 역사적 경험의 범주에서 사고하고 말하였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성경은 분명 계시의 주관성, 또 하나님 주도적인 특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계시의 객관성과 자연을 통한 하나님 인식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초월을 말하면서 또 내재를 너무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문화에 대해서도 그 입장이 분명한 것만은 아니다. 이중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한 쪽을 취하고 어느 한 쪽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성』, 『세례 받은 문화』, 『거듭난 국가』... 『초월을 경험한 내재』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바르트적인 『위기』와 『하나님의 불벽 앞에서의 죽음과 심판』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의 인간성』에 이를 수 있어야지 이러한 자기 부정, 자기 규탄, 철저한 자기 파산선고에 의한 절망의 경험없이는 인간 스스로 높아진 것으로 거부되어 마땅한, 인간의 자기 高揚(self- exaltation) hybris, superbia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정당성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확보된다 하겠다.
현대의 Missio Dei 선교 신학은 종래의 하나님-교회-세상의 도식을 하나님-세상-교회로 바구어 놓았다. 이것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성서적 타당성을 지닌다 하겠다.
우리가 편협된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선교적 과제로서 세계를 포용함으로 현존하는 세계의 온갖 부조화된 모습을 개변시켜 해소하는 한편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역사화는 임무야말로 우리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참다운 기독교의 과제라 할 것이다. 이것이 참다운 세속화 신학이겠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교회와 복음의 자기 정체성에 충실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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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hrnt, Heinz. The Question of God(ET). New York : Harcourt Brace &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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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가령, 그의 인간 이해는 영과 육을 날카롭게 대립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생각
이 헬라적 이원론이라는 것이다. 헬라 문화권에서 성장한 바울은 히브리적
전통과 헬라적 전통에 익숙하였다. 이 점은 바울로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사
도가 되게 하였다.
2 ) 요한에게서 보여지는 빛-어두움, 생명-사망, 육-영은 전형적인 이원론적 용
어이다. 물론 요한의 이원론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결정되는
결정론적인 이원론 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개개인을 종말론적 결
단으로 부르는 실존적, 결단의 이원론(Entscheidungsdualismus) 이다.
3 ) 한 철하, 고대 기독교 사상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8512) p. 257
4 ) 물론 이러한 이원론은 존재론적, 실체적,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
이원론(Ethical dualism)이다. 이 윤리적 이원론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통해 이 세상에 들어와서 세상의 종말과 심판으로 없어질 것이다.
Karl Jaspers, Augustine. 김 쾌상 역,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서울 : 전
망사, 1981) p. 111
5 ) 1963, 키에르케고르 탄신 100주년 기념 강연에서.
Heinz Zahrnt, The Question of God.(ET) (New York : Harcourt Bace &
World Inc., 1969) p. 28
6 ) 이하, Richardson, Allen.(Ed) 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 (Philadelpia : The Westminster Press. 1983) 항목 p. 166
7 ) 이에 대하여 존재론적, 절대적인 이원론이 있을 수 있다. 곧, Zoroaster교의
빛과 어둠, 선과 악은 좀더 근원적으로 절대적이며 Hindu교에서 보여지는
advatia와 vedanta의 대립 역시 영원한 것으로 무제한적이다.
8 ) William Hodern, The Case for a New Reformation Theology (Philadelpia
: The Westminster Press, 19893) p.55
9 ) 이하, Heinrich Ott, Die Antwort des Glaubens. 김 광식 역, 신학해제. (서
울 : 한국 신학 연구소, 198911) p. 54
10 ) 가령,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
니 .... 했을 때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바울의 이성까지 십자가에 못박았
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식을 구
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요 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니라.. (고전 1:22-23)고 말한다.
11 ) H. Ott, op. cit., p. 56
12 ) W. Hodern, op cit., p. 67
13 ) .... 만물의 근거와 목표가 되시는 하나님은 인간 이성의 자연적인 빛으로
서 피조물로부터 확실하게 인식될 수 있다.(롬1:20) 만물과 여러 방법을 통
하여 말씀하신(히1:1-3) 신적 계시의 결과로 인간의 이성 자체가 신적 사물
에 접근할 수 있고, 인류의 현 상태에서도 누구나 쉽게 안전하게 아무 오류
도 범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
Enchridion symbolorum et definitonum. H. Ott, op cit., p. 70 재인용
14 ) W. Hodern, op. cit., p. 69
15 ) Ibid., p. 70
16 ) 김 균진, 헤겔과 바르트 (서울 :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62) p.153
17 ) Ibid., p. 159
18 ) 김 광식, 현대의 신학 사상 (서울 :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77) p.56
19 ) 이하, W. Hodern, op. cit., pp. 71 ff
20 ) Pohlman Horst, Abriss der Dogmatic. 이 신건 역, 교의학. (서울 : 한국신
학 연구소, 1989) p. 139
21 ) W. Hodern, op. cit., p 74
22 ) H. Ott, op. cit., p. 97
23 ) 이 종성, 교회론 II (서울 :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9) pp. 165-166
24 ) 이 형기, 죤 칼빈에 있어서의 교회와 국가 박창환 박사 주선애 교수 화갑
논문집 (서울 : 장로회 신학대학 출판부, 1984) p. 100
25 ) Ibid., p. 103
27 ) 이 종성, op. cit., pp. 217-218
28 ) 이 장식, 기독교 신조사(II) (서울 : 컨콜디아사, 19832) p. 286
29 ) 이 종성, op. cit., p. 234
30 ) Ibid., p. 265
31 ) Ibid., pp. 320-329
32 ) 이하, 이 형기, op. cit., pp. 521 ff
33 ) Charles Kraft, Christianty in Culture,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 (서울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p. 62 재인용
34 ) Richard Niebuhr, Christ and Culture 김 재준 역, 그리스도와 문화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837) pp. 35-37
35 ) 이상, Ibid., pp. 37-47 요약.
36 ) 이와 같은 바르트의 문화에 대한 거부는 그의 종교 비판과도 맥을 같이 한다.
註) 66를 보라.
37 ) 이하, R. Niebuhr, op. cit., pp. 52-228 요약
38 ) 이하, Ibid., pp. 229 ff.
39 ) 이하, W. Hodern, op. cit., pp. 108 ff
40 ) 이하, 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 p. 572, 항목
41 )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에 대하여 incomprehensible Being 이라 하였고, 아
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파악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Si
comprehends non est Deus) 라고 말한다.
Vatican I 에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eternal immense, incomprehensible,
infinite in his intellect and will and in all pefection... distinct
from the world in existence and essence 라 하고 17세기 프로테스탄트 스
콜라에서도 하나님을 "spiritus independens, ens spirituale, a se
subsistens라고 말한다.
42 ) P. Horst, op. cit., p. 131
43 ) 이하, W. Hodern, op. cit., pp. 112 ff
44 ) 이하, 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 p. 287, 항목
45 ) H. Zarnt, op. cit., p. 24
46 )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본성, 소유 및 행위의 한계로서 인간과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하여 무한한 질적인 차이속에서 대립해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이
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하나님으로 경험, 에감, 경배하는 것과는 전혀 동일
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적인 소요에 대한 무조건적인 정지, 우리의 부정 속의
긍정, 우리의 긍정 속의 부정이다....』
Karl Barth, Romer Brief, P. Horst, op. cit., p. 147 재인용
47 ) Ibid., p.155
48 ) Ibid., p.157
49 ) 이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 역시 영원과 시간, 무한과 유한이 그리스도 안에
서 교차(intersection)되고 있다고 말함으로 그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50 ) Ibid., p. 151
51 ) 이하, W. Hodern, op. cit., pp. 123 ff
52 ) 이 논문에는 칼 바르트와의 대화(A Contribution to the Diologue with
Karl Barth) 라는 副題가 있어서 처음부터 바르트의 超切的인 견해를 문제삼
고 있었다.
우리는 브룬너가 1920년대 초 바르트와 함께 변증법적 신학 운동의 주요 멤
버였음을 기억한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1판이 나왔을 때 브룬너는 열성
적으로 환영하였다. 적어도 초기의 두사람은 신학적인 동반자였다.
H. Zarnt, op cit., pp. 60 - 61
마르쿠바르트는 칼 바르트가 그의 신학 운동을 전개하면서 필연적으로 결
별하였던 몇가지의 例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그에 의하면 바르트의 신학은
대상과 객관성에 대한 학문적 사변적 태연자약 에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대
결과 논쟁, 분노와 否定 으로 많은 결별을 하게 된다. 그 첫번째가 그의 스
승이었던 A von Harnack과의 결별이었으며 그 후 고가르텐, 브룬너, 킷텔,
불트만.... 등과 차례로 결별한다.
Freidrich W. Marquardt, Notwendige Scheidungen und Entscheidungen in
der Theologie Karl Barths 김 애영 역, 칼 바르트 신학에서 있어서의 필
연적인 결별들과 결단들 기독교 사상 제382호 (1990. 10) pp.120. ff
53 ) H. Zahrnt, op. cit., p. 60
54 ) 이하, 브룬너의 입장에 대하여,
이 종성, 신학적 인간학. op. cit., pp. 58 ff
김 균진, 헤겔 철학과 현대 신학. (서울 :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44)
pp. 165 ff
55 ) H. Zahrnt, op. cit., p. 61
56 ) 김 광식, op. cit., p. 107
57 ) 김 균진, 헤겔 철학과 현대 신학. op. cit., p.168
김 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 현대신학의 개혁주의적 조명 - (서울 :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66) p. 41
58 ) 김 영한, op. cit., p. 40
김 광식, op. cit., p. 107
물론 칼빈도 『하나님을 아는 이중적인 지식(duplex cognito Domini)』을 말한
다. 그 근거는 롬 1:19-20, 2:14-15, 행 14:17, 17:27 등이다.
이 종성, 신학적 인간학. op. cit., p. 61
59 ) 브룬너 자신이 이 『유지의 은혜』가 범신론적 원리로의 위험성을 안고있다고
말하듯, 이 유지의 은혜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제 3의 개념』으로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회개와 믿음 이외의 다른 은총, 곧 아퀴나스의
causa materials, causa instrumentalis 와 같이 『협동하는 은총』으로 그리
스도의 유일성이 부정되고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은총의 통로를 말하는 것
이다.
이 종성, 신학적 인간학. op. cit., pp. 58-60
60 ) 김 광식, op. cit., p. 106
H. Zahrnt, op. cit., pp. 60-66
이는 물론 당시 바르트의 입장, 곧 고백교회의 국가사회주의(Nazism)와의 투
쟁에서 취하던 바르트 자신의 신학의 상징이었다. 당시 독일 국가 사회주의
의 철학적 종교적 배경을 이루고 있던 자연신학에 대하여 어떠한 존재의 유
비(analogia entis)도 거부하고 있는 바르트와 독일 교회가 당면한 가장 급
박한 현실 문제 였으므로 더욱 극단화되었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 입장은 같
은 해에 발표된 『바르멘 신학선언』에서도 잘 나타난다.
61 ) 이 종성, 신학적 인간학. op. cit., p. 62
62 ) 김 균진, 헤겔 철학과 현대 신학. op. cit., p. 175
63 ) William Scott, Historical Protestantism, 김 쾌상 역, 개신교 신학 사상
사. (서울 :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8) p. 185
64 ) 김 영한, op. cit., p. 43
65 ) W. Scott, op. cit., p. 187
66 ) 이 종교 는 물론 기독교까지를 포함한다. 교회는 결코 구원을 소유하지 못
한다. 다만 그것을 소망할 뿐이다.
Neve, J. L.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II). 서 남동 역, 기독교
신학사.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848) p. 266
68 ) 김 광식, op. cit., pp. 132 - 133
김 영한, op. cit., p. 66
69 ) W. Scott, op. cit., p.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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