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들

하나님아들 2022. 10. 18. 23:06

예수님의 사역들

 

요한복음 1장 1-14절까지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로고스이며 어두움의 세상을 비취는 빛이요,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친다. 사도 요한은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비유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성육신을 쉽게 깨달아 알 수 있게 만든다. 그리스도는 빛이요, 세상은 어두움으로 가득하다. 어두움으로 가득한 세상에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이 세상을 덮고 있던 어두움은 물러갈 수밖에 없다. 깜깜한 어두움을 상상해 보자. 달 빛도 별 빛도 없는 밤,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는 밤, 가로등도 없고, 전기 시설도 없고 전지나 등불이나 횃불이나 어떠한 빛도 없는 시골길을 상상해 보자. 그 어두운 길을 수많은 사람들이 더듬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이 때에 저 멀리서 등을 든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 그 사람 주위에는 어두움이 물러가고 있다.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빛을 보며, 밝음을 본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한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한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 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9:2)

마태는 오신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스블론 땅과 해변길과

이방의 갈리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5-16).

예수님은 흑암속에 들어 오셔서 어두움으로 고통 당하는 자들을 밝게 비취는 큰 빛이요, 사망의 땅에 앉은 자들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구세주이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음을 얻을 것이다. 아무리 칠흙같이 어두운 곳에서 신음하던 자들이라도 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찬란한 빛의 영광을 얻을 것이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9-12)

신약성경은 여러가지의 어두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질병의 어두움, 결핍의 어두움, 죄악의 어두움, 부정의 어두움, 불구의 어두움, 사탄과 귀신의 어두움 …… 등등 갖가지 어두움이 이 세상을 뒤덮어 이 세상을 어두움의 세상으로 만들고 있다. 문둥병자의 어두움을 생각해 보자. 그는 날마다 자기의 지체들 중에 하나씩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격리되어 외로움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저주의 병을 가졌다는 생각으로 좌절과 원망과 분노에 떨고 있다. 그는 어두움으로 뒤덮인 깜깜한 지옥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문둥병자를 만났을 때에 그는 깨끗이 고침을 받고 감격과 기쁨으로 가득한 빛의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힘있게 증거하고 있다.

목회는 어두움 가운데 앉은 백성들에게 참 빛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분의 빛으로 어두움을 물리치고 빛의 영광 가운데에 들어오도록 사람들을 돕는 일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사람들이 지금 어떠한 어두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며, 참 빛이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하며, 예수님께서 그들의 어두움을 어떻게 물리치고 밝음으로 가득하게 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지금 어떠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지를 분별하고, 그리스도께서 명하시는 그 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야 하는 것이다. 목회는 언제든지 빛이신 예수님, 목자이신 예수님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하며,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을 목회자는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 특히 복음서를 중심으로 하여 빛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어두움을 물리치고 어두움의 세상을 밝음으로 채워 가고 있는지를 보면서 목회의 중심 주제와 모델을 발견하고자 한다.

1. 결핍이 있는 곳에 생수로 넘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목마른 자들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죄인들을 찾으시며(마10:11-13),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하는 자들을 부르신다(마11:28-30).

예수님은 부족한 자들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풍성한 생수로 채우시는 분이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인생을 상상해 보라.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성령의 생수요(요7:39), 사랑과 기쁨과 평강의 생수요(갈5:22), 새 창조와 치유와 은혜의 생수이다(겔47장 참조).

시편기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3)고 노래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목마른 자들에게 생수의 강으로 흐르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복을 받는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죄를 씻는 것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 씻음의 십자가요,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중보자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은(요일2:1-2, 롬8:34) 사실이다. 그리고 죄 용서는 우리의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씻으시는 예수님만 보여주지 않고 넘치게 채우시는 예수님을 더 많이 보여주신다. 그릇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딤후2:20-21). 그러나 그 그릇에는 보배로 채워져야 한다(고후4:7). 깨끗하게 씻겨졌으나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빈 그릇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13:1)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그릇은 먼저 씻겨져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그릇은 하나님의 보배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생수이신 그리스도 생명의 떡이 신 그리스도, 말씀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은혜와 진리이신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의 보배이다. 이 보배로 우리의 질 그릇을 채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결정적이다. 성경은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채우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거듭하여 가르친다. 이제 한국교회는 씻는 것만 강조하는 교회가 아니라 풍성하게 채우시는 그리스도까지 강조할 수 있어야 한다.

⑴ 목자이신 예수님

시편 23편은 여호와 하나님을 크신 목자로 비유하여 말씀하신다.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부족함이 없이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그처럼 사랑을 받는 시편 23편은 넘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강조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징계나 채찍이나 용서나 씻음보다는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양들로 풍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베푸시며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시고 우리의 잔을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신다.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사다(요10:14). 그분은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는 사랑의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자기가 오신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밝힌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요10;10). 그러나 예수님께서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10:10).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세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①어째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 해야 했는가? ②예수님은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해야 했는가? ③인간은 왜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생"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쉽게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며, 믿는 사람들이 죄의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물론 영생이라는 단어는 이런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생은 그보다 더 큰 뜻을 담고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한다면 영생(eternal life)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어떠한 존재에게도 없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생명임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조세계의 모든 것은 이미 시작이 있는 존재요 따라서 그 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저 산들도, 바다도, 저 하늘의 별들도, 인간의 영혼까지도 시작이 있으며 끝이 있을 시간적인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존 하시는 분이요 영생을 가지신 분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믿는 자들이 받을 것은 영생, 곧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 속에 없었던 것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자, 곧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받는 자들이다. 믿는 자들의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 이 생명은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이요, 미움을 사랑으로, 질병을 건강으로, 죄악을 성결로, 저주를 축복으로, 멸망을 구원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놀라운 능력이 믿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그런데 이 능력은 곧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 아골 골짜기, 뼈들이 널려 있는 죽음의 땅인 내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오셨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들어오셨다. 당신은 지금 사망의 땅, 죽음의 그늘에 있다고 해도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능력으로 당신에게 오셨기 때문에 빛의 영광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 4장 14절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는 영생의 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말씀이다.요한복음 7:38-39절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생수가 우리의 배에서 강이 되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들인가? 예수님은 부족함이 없이, 넘치게 양들을 채우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시다.

목회는 "나의 잔을 넘치게 하시는" 우리 주님을 소개하여 그 주님으로 성도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도록 도웁는 교역자들의 삶이다.

⑵ 가나안 혼인 잔치에 오신 예수님

요한복은 2장 11절은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혼인 잔치를 축복한 기적을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행하였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대 드라마를 연출하는 가운데 포도주가 모자라 고통하는 혼인잔치에 새로운 포도주를 만들어 공급함으로 이 드라마의 첫 번째 장을 열고 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대 사역의 첫 번째 시작이요, 앞으로 행하실 전 구원사역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을 요약적으로 계시하는 기적이다. 그러므로 가나의 기적을 좀 더 깊이 검토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대 드라마의 깊이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내용으로 특별한 주석이 필요없는 것이다.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청을 받았다.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모자라 고난에 빠진 것을 안 예수님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예수님께 말하고, 예수님은 하인들을 시켜 물로 된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게 한다. 이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은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가 나중에 나왔다고 기뻐한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보면서 예수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특별한 설명도 없고, 해설도 없고 오직 이 기적이 예수님이 행하신 처음 표적이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었다고 말씀하신다. 이 표적은 영광스런 예수님이 모습을 드러내실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비밀을 계시한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곳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계시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바로 이런 기적이 계속하여 이 땅위에 일어나야 된다.

그러면 가나의 기적은 오늘에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주시는가? 이 기적은 혼인잔치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즐거움, 감격, 사랑, 기쁨, 축하,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혼인잔치집을 상상해 보자. 혼인잔치집은 우리에게 긍정적이요, 적극적이요, 넘치는 이미지를 우리에게 주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가 아직 잔치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깨어져 버리고, 부정적이요, 비판적이요, 불안한 분위기로 바뀌어 버린다. 혼인잔치에 가장 필요한 포도주가 모자랐으니 주인도 손님도 다같이 불안과 불만과 원망등으로 얼굴이 어두워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어두움의 그림자는 오히려 더 찬란한 빛의 전주곡이 되고 있다. 어두움이 있으므로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의 기적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기회요, 구원의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포도주가 모자라 근심과 원망과 불만 가운데 빠져 있던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님의 등장으로 이전보다 더 넘치는 풍성한 잔치 자리로 바뀌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고 제자들에게 믿음을 더하고 주인들과 손님들에게 더 큰 감격과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해 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를 보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모든 좋은 것으로 가득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신명나는 삶을 살게 하셨다. 이곳은 잔치집과 같은 낙원이요, 긍정적이요, 적극적이요, 충만한 동산이었다. 하나님은 넘치는 인간, 기쁨과 감격과 사랑으로 가득하며, 모든 좋은 것으로 만족을 얻는 잔치집을 계획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그들은 잔치집에서 쫓겨나 땀 흘리며 수고하며, 해산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거치른 땅에 살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인간의 운명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잔치집을 만드셨으나 인간의 죄악은 비참한 광야를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우리는 포도주가 모자란 가나의 혼인잔치집같이 불만과 불안과 원망과 절망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어두움의 사람들이 되었다. 오늘 이 지구를 덮고 있는 어두움의 그림자를 보라. 포도주가 모자란 잔치집 같은 저기압을 보라. 그런데 예수님이 육신을 입어 어두움으로 둘러싸인 잔치집으로 들어 오셨다. 그 분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집에 영광의 빛을 비추시기 위해서 거기에 오셨다. 예수님은 욕망과 이기주의로 가득한 인간의 피를 영원한 하나님의 성결한 피로 바꾸어 모든 인류를 덮고 있는 죄의 그림자들을 씻어내며, 생명의 떡이 되고, 영생의 포도주 잔이 되어, 어두움의 인간들을 광명의 새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시며, 하늘 나라의 충만으로 넘치게 하시는 새역사를 창조하시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인간의 구원사의 축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드라마를 여는 문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의 축도를 제시하며, 우리에게 어떠한 구체적인 구원이 오시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인간은 너 나 없이 아름답고 즐겁고 기대와 감격에 넘치는 잔치 집으로 세상을 시작한다. 새 생명을 시작하는 출산의 순간을 생각해 보라. 새 가정을 시작하는 결혼의 순간을 상상해 보라. 새로운 직업을 얻어 첫 출근을 하는 감격을 생각해 보라. 목사로 임직하는 순간의 축하와 박수를 생각하라. 어느 하나라도 출발의 순간에 감격과 아름다움과 축복으로 가득하지 않는게 있는가? 그러나 타임머신을 타고 조금만 지나가 보라. 축복 속에 태어난 어린이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행복한 부부에게 어떤 어두움이 다가오고 있는지, 새로 취직한 직장에서, 새로 들어간 학교에서, 새로 위임받은 직책에서 어떤 신음 소리가 들리는지 자세히 드려다 보라. 거기에는 에덴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의 고통이 있을 것이요, 포도주가 모자란 가나의 혼인잔치의 어두움이 가득할 것이다.

예수님은 어두움의 땅, 모자람의 장, 고난의 자리에 오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바로 거기에 빛으로, 충만으로, 평강의 왕으로 오신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그 영광을 나타내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다. 충만하게 하신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미움을 사랑으로, 어두움을 빛으로, 불만을 충만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재앙을 영광으로, 불안과 싸움을 평강과 화해로 바꾸신다. 이전보다 넘치는 기쁨으로 그곳을 충만케 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다.

우리의 목회는 이 확신 속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무리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덮인 가정이나 성도들일지라도 예수님은 그곳에 빛으로, 충만으로, 생명으로 오심을 확신하고 주 예수님이 그곳에서 행하실 기적을 기대하며,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목회현장에 임하여야 하는 것이다.

⑶ 약함을 자랑하게 만드시는 예수님

바울 사도는 세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간 놀라운 체험을 간증하면서도 그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고 이 체험은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못을 박는다(고후12:1-5). 바울 사도는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선언한다(고후12:5-9). 그 이유는 약한 데에서 능력이 솟아나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기 위해서는 우리의 약함이 필수적인 조건이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고전 12:9). 그래서 그는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을 기뻐하고 있다.(고전 12:10). 그는 진정으로 약할 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자기를 강하게 하고 있음을 체험하고 있다. 바울의 하나님은 인간의 나약함 가운데 머무시면서 그 나약함을 은혜와 능력의 샘으로 사용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능력의 한계 속에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평안함을 얻는다. 바울은 핍박과 중상모략과 체험과 저주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더 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거기에서 생겨날 것을 믿고 즐거워한다. 바울은 궁핍과 곤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공급을 기대하며 소망중에 즐거워한다. 바울의 하나님은 결핍이 있는 바로 그곳에 오셔서 우리를 넘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누가 복음 6장 20-26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4가지 복을 몸으로 체험하였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너희 이름은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눅 6:20-23)

가난의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주리는 순간 주님께서 배부르게 채우실 미래를 소망하며, 눈물로 가득할 때에 웃을 내일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당하고, 소외 받고, 중상모략을 하며 버림 받을 때에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뛰논 것이 바울의 목회의 중심이었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빈 그릇을 비었다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그릇에 하늘의 보배로 가득 채워 안겨 주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의 약함을 크게 기뻐하고 자랑하고 있다(고후12:9). 자기의 약함을 더 깊이 깨달을수록 그의 그릇은 더욱 깨끗이 비워지며, 더 큰 능욕과 핍박을 받을 수록 그 그릇은 더 커지며, 궁핍과 곤란에 처할수록 더 넘치게 하나님이 채우신다. 빈 그릇을 채우시는 하나님이 바로 거기에 계신데 그 누가 자기의 빈 그릇을 부끄러워하겠는가?

당신은 지금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역을 담당하기 어렵다고 한 숨을 쉬고 있는가? 바로 지금 약한 곳에 임재하시는 주 예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그분을 바라보라. 당신의 빈 그릇을 가득 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라. 당신은 지금 능욕과 조롱을 당하고 있는가? 예수님 때문에 소외당하며,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있는가? 사람들에게 중상모략을 당하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가? 그렇다면 기뻐하고 뛰놀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놀라운 상을 가지고 지금 당신에게 오시고 있다. 당신을 비방하는 그들을 보지 않고 상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보는 자는 진실로 복되도다. 이제 주님을 위해 고난으로 나아가자.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 나의 약함을 자랑하자. 우리의 약함 가운데 임재하여 그 약함을 주님의 능력의 샘으로 삼으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하자.

하나님의 교역(Ministry of God) 은 약한 곳에 오시고, 부족한 것을 채우시고, 고난 가운데 영광의 샘을 만드시는 주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목회자는 바로 그 예수님만 의지하여 그 분의 능력으로만 목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질병의 치유자로 오신 예수님

복음서는 예수님의 교역(Ministry of Jesus)을 소개하면서 한결 같이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신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들도 대부분이 병든자를 고치시는 사건들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병을 고친 기적이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들에게까지만 나타나고, 성경이 기록된 다음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병을 고치는 기적은 단순히 증거의 기적일 뿐이라는 주장은 복음서를 읽을 때에 설득력을 잃어 버린다. 어떻게 그 수많은 기적과 사랑의 접촉이 단순히 예수님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도들임을 증거해 주기 위한 기적에 부과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병든 자들의 병을 고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아니면 질병의 어두움으로 고통 당하는 자에게 그 어두움의 구름을 걷어 버리고 밝은 빛을 선물하고자 하는 사랑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필자는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들은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는 증거의 기적이라기 보다는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여 그들은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대드라마의 중심 주제라고 믿는다.

⑴ 예수님의 기본적인 목회주제로서의 치유교역(Healing Ministry).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중심 교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자와 고통에 걸린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 병자를 대려 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마4:23-24)

마태는 9장 35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태는 예수님의 중심 교역(Ministry)을 심방, 교육, 설교, 병고치심으로 요약하고 있다.

예수님은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보낸 질문에 대답하면서 메시야 사역의 중심 가운데 하나가 병을 고치시는 일임을 천명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은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진정으로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입니까?』하는 질문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교역을 소개하므로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답한다.

너희의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4-5).

예수님은 메시야 시대를 예언한 구약선지자들의 말씀이(예, 사29:18, 35:3-6등) 자기에게 그대로 응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게 함으로 세례요한의 질문에 간접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예수님은 메시야 교역의 중심에 병을 고치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고난당하는 자들을 축복하는 일들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병고치는 일에 집중되고 있음을 공관복음서는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 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눅4:40).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리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막1:32-34).

마태는 예수님의 기본적인 교역의 중심에 병을 고치는 사역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증명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6-17).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노래이다. 이 말씀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어떠한 분이신가를 말씀하시며, 메시야 사역의 핵심을 노래한다. 마태는 이사야 53장 4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시기 위한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것 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시는 것까지 포함한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질병을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역(the ministry of God)을 위임받은 목회자의 기본적이요 중심적인 목회주제 가운데 하는 치유교역이요, 치유교역을 회피하거나 가볍게 보는 것은 하나님의 교역의 근본을 포기해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목회자들을 통하여 질병의 어두움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심으로 그들을 덮고 있는 사망의 그늘과 어두움의 그림자를 벗겨 내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으로 가득하게 하려고 하신다.

⑵ 전인치유와 인간구원

예수님의 치유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나 병 고침 자체의 기적적 행위보다는 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 자신과 그의 전인적인 구원에 더 큰 관심이 있다. 우리가 훌륭한 의사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에 능력있는 의사, 병을 잘 고치는 의사, 진단을 기가 막히게 하는 의사,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의사등으로 이야기 한다. 의사를 판단하는 기준은 병을 얼마나 잘 진단하고, 그 병을 잘 고치느냐에 있다. 의사가 환자를 사랑하며, 환자의 심정에 공감하며, 병고침을 받은 이후의 삶에까지 관심을 갖는다면 이에서 좋은 일은 없지만 사람들은 의사에게 이런 것까지 필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의사의 관심이 우선적으로 병을 고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 안에서 병고침의 은사를 받고 병고치는 일에 충성하는 교역자들은 의사처럼 전적으로 병고침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병을 고치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은사의 측면을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그 병을 고쳤다는 하나님의 치유를 강조하고, 병고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는 환자의 신앙을 강조하며, 환자 자신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려고 힘쓴다는 점에서 의사들과 다른 관심을 가지고 병을 고치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좀 더 포괄적으로 환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병고치는 교역자들은 첫째로 병자들 자신에게 보다 환자 이외의 어떤 것들을 더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사에 관한 관심, 하나님이 고치셨다는 믿음, 병고침을 받은 자들의 확신, 병고침을 받은 자들로 예수를 믿게 하려는 선교적 관심등을 강조함으로 그들은 환자 자신에게 깊이 관심을 갖지 못한다. 두번째로 병고치는 교역자들은 병을 고치는 그 일, 즉 환자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것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 이 모든 것은 교역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관심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예수님은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을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환자 자신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병을 어떻게 고치느냐? 또는 그 환자에게 믿음이 있느냐? 또는 하나님만이 이 병을 고치는 것이니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 등에 그렇게 큰 열정을 보이지 않으셨다. 가끔 환자에게 믿음이 있어야 고치는 것처럼 이야기 한 경우도 있으나(막5:34, 10:52 등), 그 때에도 예수님의 진정한 관심은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환자에게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예수님은 그들을 민망히 여기신다(막1:41).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깊은 연민을 느끼신다(마9:36). 마태는 환자들을 포함하여 고난당하는 인간들을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마4:15-16)이라고 표현한다. 환자들을 어떻게 고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에서 고통당하는 그들을 보며, 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그 현실을 공감하며, 그들을 위해 그 병을 친히 짊어지고 자신이 그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사랑이 예수님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을 본다. 의사는 병을 고쳐주고 얼마나 받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병 고치는 교역자들도 적어도 병을 고친 후에 얼마나 신앙이 부흥하고, 교회가 성장하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즉 병고침으로 생겨나는 유익 또는 결과 또는 내가 받는 반대급부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자들을 사랑하고, 환자들을 아끼며, 환자 자신을 위하기 때문에 병고침의 대가로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기대는 오직 그 환자들이 더 심한 것이 다시 생겨나지 않게 죄를 범치 않는 것이었다.(요5:14). 그것은 예수님이 받을 반대급부라기 보다는 환자 자신을 위한 권면이요, 부탁일 뿐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환자들의 연약함과 질병을 고쳐 주시고 자신은 그들이 담당했던 연약함을 친히 자기 몸에 담당하시고, 그들이 짊어졌던 병의 짐을 자신의 어깨 위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님의 치유는 자기가 짊어지고 담당하는 치유이다. 나는 고통당하고 너는 즐거워하고, 나는 병을 짊어지고 너는 건강하고, 나는 죽고 너는 생명을 얻으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관심이요, 치유교역의 중심이었다. 전적으로 환자를 사랑하여 그들의 심정을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을 예수님 자신이 담당하고, 그들의 건강의 대가로 자신은 그 병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의 치유교역이 바로 오늘 우리가 담당해야 할 치유교역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예수님의 치유의 특별한 점은 환자의 전인구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감, 환자의 몸을 고쳐 건강하게 사는 것, 환자의 정신적인 평안, 환자의 사회관계의 회복, 환자의 영적인 삶의 회복등 예수님은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장애들에서 해방되는 전인적인 건강과 영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가복음 1장 40-45에 나오는 문둥병자의 치유사건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이 문둥병자는 단순히 몸의 질병 때문에만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다. ①그는 날마다 지체들 중 하나가 죽어가는 병을 앓고 있는 육체의 질병을 갖고 있는 자다. ② 그는 질병의 공포속에서 불안과 절망과 수치와 원한과 저주를 안고 사는 정신적·정서적 고통을 당하고 있다. ③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 격리 수용되어야 하는 고독의 사람이요, 관계가 단절되어버린 사람이다. ④ 그는 사회적으로 소외를 당하고 문둥병자 촌에 구금되어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을 받고 있다. ⑤ 그는 하나님의 저주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저주하며 고통가운데 버려두는 하나님이 되어 버렸고 따라서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 상태에 있다. 문둥병자의 문제는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만이 아니라 전인적이요, 영적이다. 그의 문제는 단순히 병을 고쳐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전인적인 관심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몸의 질병에서의 회복 뿐 아니라 전인이 회복되어야 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① 먼저 관계가 단절되어 사람들과 교제가 금지된 이 문둥병자를 만나주셨다. 예수님은 전혀 자격이 없는 그 사람을 만나 주시고 있다. 예수님의 만남은 자격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필요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② 예수님은 그를 민망히 여기셨다. 즉 문둥병 환자와 같은 마음을 품으셨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문둥병자를 보셨다. 문둥병자의 깊은 심정속에 들어가 그의 마음을 고치고 있다. ③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의 몸에 대셨다. 육체적인 접촉을 통해서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감싸안고 있다. 예수님은 그를 자기품에 받아 들이고 있다. 문둥병자는 이제 예수님과의 육체적인 접촉 속에서 소외와 단절의 아픔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가고 있다. 과거에 하나님은 자기에게 저주의 병을 주신 분이었으나 이제 자기를 만나주신 메시야는 자기의 더러운 몸에 손을 대시고 받아 주시므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의 문이 열리고 있다. ④ 예수님은 말씀으로 문둥병자의 육체적 질병을 고쳐 주시고 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 되셨을 뿐 아니라 그 병을 짊어지신 분이 되셨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있다. ⑤ 예수님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를 제사장에게 보내어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치게 함으로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공적인 증거를 받게 만든다. 제사장이 공적인 증거는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이 사회적인 관계 회복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문둥병자의 문제들을 모두 제거하여 한 인간으로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고 있다. 얼마나 넘쳤으면, 예수님이 경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많이 예수님을 전파했겠는가?

예수님의 치유는 교역자들의 목회의 모델이다. 치유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누구나 알 고 있다. 치유의 능력이 그분에게서 오고 있다는 것도 교역자들은 알고 있다. 교역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는 통로에 불과하다. 교역자들은 이것을 강조하고 여기에 관심을 집중하기보다는 병으로 전인적인 장애를 경험하며 고통하는 환자를 사랑하며 그를 전인적으로 회복시키며, 영적으로 성숙하게 성장시킨 다는 예수님의 관점에 더 집중하여 교역을 하여야 한다.

 

3.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교역

⑴ 예수님의 오신 목적과 귀신을 쫓아내는 교역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교역중에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일반적인 교역들이 많이 있다(마4:24, 8:16, 막1:32-34, 39, 3:11, 6:13, 눅4:41, 6:18, 7:21등). 이 구절들 가운데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고치신 것처럼, 수많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마8:16).

마태는 이 말씀 가운데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교역은 아주 일반적인 교역들 중 하나이며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할 때에 그 목적은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 주어 귀신과 질병과 약함의 어두움 속에 살던 백성들을 어두움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의 빛 가운데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그 열두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막3:14-15).

예수님은 70인을 선택하여 전도하러 보낼 때에도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시고 보내었던 것 같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70인이 돌아와서 전도보고를 하는 가운데 그들을 가장 흥분시켰던 경험은 귀신들을 쫓아낸 경험이었던 것 같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7-20).

사도 요한은 아주 직접적으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마귀의 일, 곧 사탄의 시험과 귀신들의 역사를 멸하기 위해서라고 선포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며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교역을 오늘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에서 행하여야 한다면 목회자들의 교역 가운데 중요한 항목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공관복음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일반적인 교역외에 귀신들린자를 구원하신 7가지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① 회당에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를 구원하심(막1:21-28, 눅4:31-37).

② 귀신들려 시각 장애와 청각 장애를 당하는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마12:22-29, 막3:22-27, 눅11:14-23). ③군대 귀신들린 거라사인을 구원하심(마8:28-34, 막5:1-20, 눅8:26-39), ④ 흉악한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구원하심(마15:21-28, 막7:24-30), ⑤ 귀신들려 간질하는 소년을 구원하심(마17:14-21, 막9:14-29, 눅9:37-43), ⑥ 귀신들려 불구가 된 여인을 해방시킴(눅13:10-17), ⑦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고 그 사람을 구원하심(마9:32).

⑵ 예수님의 축사교역의 암시점들

우리는 이 사건들을 자세히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본 장의 목적이 아니다. 본 장은 예수님의 교역의 초점이 어디에 있었으며,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임으로 우리의 교역의 주제와 모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귀신을 쫓아내신 교역의 근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그의 저서 『나는 사탄의 멸망을 믿는다』에서 예수님의 축사교역의 강조점을 12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Michael Green, 오성춘역, 1994, pp.178-181).

①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를 찾아가지 않으셨다. 거의 모든 귀신 쫓아낸 기록들을 보면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구원을 받았다.

②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마8;16). 예수님은 귀신들을 꾸짖으셨다(마9:25). 그리고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논쟁하지 않으셨다. 참으로 예수님은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막1:34). 오직 유일한 예외는 군대 귀신들린 거라사인의 사건뿐이다.

③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행하셨다(마12:28).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이 일을 하셨다고 했는데(눅11:20) 이것은 구약성경의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성령의 권능과는 동의어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와 금식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막9:29, 마17:20).

④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나가라는 명령을 반복해야 했다. 귀신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즉시 순종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가복음 5장 8절에서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기록된 말씀을 읽는다. 이 말씀은 진행을 의미하는 시제를 쓰고 있다. 그 뜻은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과정에 있었다』또는 『예수님은 계속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다』로 읽을 수 있다.

⑤ 어떤 경우에 예수님은 귀신에게 나오라고 명하기 전에 귀신에게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눅4:35).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비유로 하신 말씀대로 그의 집에 들어가지 전에 강한 자를 결박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⑥ 예수님은 가끔 악령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명하고 있다(막9:25). 다시 한번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더러운 영이 다른 귀신들을 데리고 본래의 사람에게 돌아온다는 비유와(눅11:24-26) 연관하여 이 말씀의 뜻을 생각할 수 있다.

⑦ 예수님은 언제나 귀신에게 직접적으로 명령하고 있지 귀신들린 사람에게 명하지 않는다.

⑧ 예수님은 귀신에게 억압받는 자와 귀신들린 자를 구별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오늘날 인위적인 구별이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헬라어 daimonizomai는 귀신들렸다는 말이고, 가끔 나오는 echein damonion은 귀신을 가졌다는 말이다. 귀신억압과 귀신들림을 구별하는 현대의 관행은 헬라어 성경에 아무런 기초가 없는 것이다.

⑨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었고, 반면에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셨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가끔 누가복음 9장 1,2절과 13장 32절과 같이 그 구별은 유지하면서도 양자의 연계를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현대의 귀신 쫓는 교역에서 보면,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만은 부족한 경우가 많다. 동시에 그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귀신을 쫓아내는 일과 병고치는 일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⑩ 한번은 예수께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기록되었다(마15:28). 그 상황을 보면, 큰 믿음과 끈질긴 노력과 외골수의 간구가 이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⑪ 예수님의 권위가 이런 귀신 쫓는 교역에서 아주 중요하게 드러나고 있다. 귀신들은 아무런 질문 없이 그분께 순종해야만 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파송을 받은 제자들마저도 귀신들이 자기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발견하였다(눅10:17,20)

⑫ 십자가는 사탄과 그 추종자들인 귀신들의 패주의 절정이었다. 이것은 복음서 여러곳에 언급되었으나 마태복음 8장 16-17절은 이것에 관하여 중요한 힌트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사야 53장에서 인용한 이 구절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고 하신 17절 말씀은 16절에서 행하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에 적용되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구약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요, 구약에서 끌어내어 예수님의 교역에 적용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의 질병과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원수를 패배시킨 곳은 바로 십자가 상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삶으로 돌아가 그것을 적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치유와 귀신쫓아 내는 모든 교역에서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갈보리에서 보여준 본 영화의 예고편과 주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교역 과정에서 예수님께 상처를 입은 사탄과 그의 추종자 귀신들의 반발이 예수님을 십자가 위의 고난으로 이끌었으나 결국 그 장소가 그들에게 결정적인 패배의 장소가 되었다. 즉 십자가는 예수님과 사탄과의 갈등의 전 과정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사탄의 패배의 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귀신들을 쫓아내는 교역에서 견고히 설 수 있는 근거지가 된다.

우리는 귀신들린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교역에 관해서 장을 달리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것이다. 본장은 귀신을 쫓아내며 사탄의 시험에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들어오게 하는 중대한 예수님의 교역이요 십자가는 이 교역의 정점임을 암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⑶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

성경은 귀신들을 사탄의 추종자들로서 사탄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며, 사탄의 왕국을 지속시키려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자들이라고 가르친다. 귀신의 작전과 능력과 목적등을 알기 위하여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실 귀신들림과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는 말은 구별된다. 후자는 사탄이 사람들속에 들어오지는 않으나 끊임없이 성도들을 자기의 지배 아래 끌어들이려는 사탄의 수단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보자.

요한계시록 12장은 사탄과 그 추종자들의 활동과 계획과 원대한 포부에 관해서 희미하게나마 우리가 깨달을 수 있게 계시한다. 그 가운데 사탄의 존재의 근원과 귀신들의 시작을 이야기해 주는 구절들을 보기로 하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는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는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요한계시록 12:7-9).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사람들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구절들 가운데서 시탄과 그 추종자들의 기원과 계획과 방법에 대해서 약간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① 사탄은 본래 하늘의 존재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 가운데 하나이었다. 에스겔 28:14은 사탄이 본래 어떠한 존재이었는가를 암시하는데 그가 "화광석 사이에서 왕래하였었도다"하고 기록한다. 여기에 언급한 화광석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말로 사탄은 본래 하나님의 높은 보좌 사이에서 왕래할 특권을 가진 천사였다,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서 왕래하였었도다"(겔28:14). 덮는 그룹이라는 말은 아주 높은 천사를 지칭한다. 사탄은 본래 높은 지위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였다.

② 하나님의 천사로 하나님의 보좌사이를 왕래하던 사탄은 어떠한 이유로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천사장 미가엘은 사탄과 더불어 싸우게 되었다. 이 때 하늘 나라의 천사들은 양진영으로 나누어져 미가엘을 따르는 천사들과 사탄을 따르는 천사들이 하늘 전쟁에 참여하여 서로 싸웠다.

③ 이 싸움에서 사탄과 그의 사자들은 패배를 당하여 하늘에서 더 이상 있을 곳을 찾지 못하여 세상으로 쫓겨났다. 사탄은 이제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 세상을 자기 손에 장악하게 되었다.

④ 사탄의 사자들도 사탄과 함께 하늘에서 쫓겨나 세상으로 들어 왔으며, 그들은 사탄의 추종자로서 사탄의 계획을 수행하는 대리인이 되어 사탄의 세상 통치를 돕는 자들이 되었다. 바로 이들이 귀신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⑤ 사탄과 귀신들은 본래 하나님의 천사들로서 영적인 존재이며, 놀라운 힘과 권능을 가진 자들로 오직 하나님의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에게 쫓겨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이길 힘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으며 오직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을 십자가로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다. 그 분은 마귀의세력을 멸하러 오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 분을 의지하여서 사탄과 귀신들을 이길 수 있다.

⑥ 사탄은 대표적인 이름이요 그에게 붙은 별명들이 많이 있다. "큰용", "마귀", "옛뱀", "온 천하를 꾀는 자"등으로 우리는 수많은 그의 별명 가운데서 그의 세상에서의 사역과 그의 특성을 읽을 수 있다.

⑦ 사탄은 "세상을 꾀는 자"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은 "저희를 미혹하는 자" 즉, 성도들을 시험하여 미혹에 빠지게 만드는 자라고 했다. 요한계시록 13장 14절은 여러가지 표적과 기사를 이용하여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의 지배하에 두려는 자라고 하며,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 하는 자요 거짓의 아비"(요8:44)라고 선언한다. 사탄은 위장의 대가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언제나 성도들과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의 지배를 받게 만들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자이다.

사탄은 왜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을까? 첫째로 에스겔 28:11-19까지 말씀은 사탄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배반하였다고 가르친다. 그는 지음을 받을 때부터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다"(28:12). 사탄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였고 그를 위해 소고와 비파가 준비 되어었다(13절). 그는 기름 부음을 받는 덮는 그룹으로 하나님의 보좌사이를 왕래하는 특권을 받은 자였다(14절). 사탄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것들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완전하고, 놀라운 특권과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아름다움으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영화로움으로" 자기의 "지혜를 더럽혔으며"(17절) 하나님의 산에서 쫓겨났다.(16절) 사탄은 모든 것에 넘치는 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그를 넘어지게 만들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말씀이 아닐까?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4-26).

두번째로 사탄이 하나님을 배반한 이유는 하나님의 자리를 노리는 욕망 때문이었다고 이사야 14:12-20절까지에서 암시한다. 사탄은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자와 비기리로다"(사14:13-14)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에서 쫓겨나 세상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 가운데서 사탄은 "내가"라는 말을 5회나 반복하면서(우리말 번역에는 두번만 사용) 자기 중심적인 그의 특성을 아주 적나나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탄은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자기 중심적인 삶을 지향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하고 자기유익을 구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게 만든다. 사탄이 태초에 "옛뱀"으로 화하여 하와를 유혹할 때에도 그의 본성인 거짓말(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는 거짓말을 함, 창3:4, 창2:17 비교)을 사용하여 하와를 유혹하고 그녀의 이기적이요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자극하여 범죄하게 만든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우리는 여기에서 사탄의 시험의 특성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사탄은 우리 인간들에게 자기의 아름다움과 지혜와 특권들을 구하게 하여 거기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게 만들므로 사탄에게 종속되어 살기를 원한다.

② 사탄은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여 언제든지 자기의 유익과 자기의 명예를 구하게 만들므로 하나님을 나에게서 떠나게 만들고 모든 일을 자기 중심에서 하게 만든다.

③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자기를 보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보면서 열등감과 수치심에 빠지게 만들어 끊임없이 사탄의 방법을 배우고 사탄에게 자기의 양심을 팔게 만든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시험에 빠져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에 처음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며 자기를 비하시는 일이었다(창3:6-13).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완전히 비운 분이시다(빌2:5-6).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사탄의 방법을 완전히 부정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분은 철저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고난당하는 사람들만 위하심으로 사탄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신 분이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시며,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도우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안에서 예수님을 따를 때에 사탄은 우리에게서 물러가고 성령 안에서 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②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③ 자신을 존중하며 이웃을 존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장애자들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참 빛으로 이 세상의 어두움 속에 들어오셔서 어두움의 세상을 빛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만드시고자 했다면 불구자들과 장애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완전하게 만드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장애자들만큼 어두움의 그늘에 살고 있는 자들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⑴ 장애자들의 상황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이스라엘의 장애자들은 마태가 이야기하는 그대로 흑암에 앉은 백성이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었다. 인간이면서도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인간답게 살지도 못하고 천대와 멸시와 고난 가운데 살아야 했다. 성경의 불구자들은 대부분이 거지생활을 했다. 그들은 평생동안 구걸하여야 하는 운명의 사람들이었다. 어제도 거지, 오늘도 거지, 내일도 거지, 죽을 때까지 거지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예수님 당시에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였다. 맹인으로 태어난 자는 7세까지 부모에게 도움을 받으나 그 이후부터는 거리에 나가서 구걸해야 하며, 그 당시 사람들이 맹인의 눈을 보기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갈 때에는 보자기를 뒤집어 써야 하는 것이 맹인들의 삶이었다(노만 샤우척,『영성훈련 지침서』pp.62-63). 바디메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겉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 달려간 것은(막10:50) 겉옷 어깨에 연결되어 있는 눈을 가리는 보자기를 벗어 버리고 수치스러운 맹인의 눈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갔다는 뜻이다. 다른 인간에게는 수치스러운 눈이기 때문에 보자기로 가리워야 하지만 다윗의 자손 예수(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는 더러운 수치를 영광의 빛으로 고치시고 어두운 눈을 뜨게 하시고 장애자를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겉옷을 벗어 버리고", 즉 수치의 눈을 가리우고 있던 보자기를 벗어 버리고 바디메오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즉 수치의 눈을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내어 놓은 것이다. 예수님은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기 위해 오신 분이요, 인간의 수치를 영광으로 고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바디메오는 예수님 앞에서 다시 보게 되어, 거지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명자의 길로 들어섰다.(막10:46-52).

⑵ 장애자를 위해 오신 그리스도

이사야는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면서 그날의 영광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61:2-3).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에 슬픔으로 가득하였던 자가 화관을 쓰고, 희락의 기름으로 가득하며, 근심하던 자가 찬송의 옷으로 바꾸어지고 저주와 멸시와 절망에 쌓였던 자가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내는 의의 나무로 바꾸어진 자들이 누구인가? 베드로도 그러하고, 마태도 그러하고, 막달라 마리아도 그러하지만, 그 가운데 맹인 바디메오를 빼어 놓을 수 있을까?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제외시킬 수 있을까? 신약성경은 장애자들이야 말로 진실로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던 자들이요,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예언자들이 예언한 축복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라고 기록한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너무 정치적으로만 생각하고 장애자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다(요1:29-36, 3:22-30). 그러나 그가 헤롯에게 체포되어 헤롯 왕궁 지하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예수님에 대한 회의가 싹 텄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불의를 척결하고 정의 사회가 되며 대표적으로 불의의 왕 헤롯이 엄단을 받아야 하고 폭력의 빌라도가 쫓겨나야되고 이스라엘에 새 왕국이 들어서야 하는데 헤롯왕은 계속하여 연락을 즐기고, 빌라도는 더욱 권세를 부리고 있으니 진정 다윗의 후손이 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예수가 진정으로 기대하던 그리스도인가? 그렇다면 세상이 달라져야 할 것이 아닌가? 세례요한은 의혹중에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께 와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하고 질문하였다. 이 때에 예수님은 질병과 고통및 악귀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는 것을 가지고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임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리스도로 구약에서 예언한대로 불구자들을 고치며, 장애인들을 완전케 하러 오신이 이심을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 귀머거리가 들으며… "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하셔야 할 중대한 일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증거는 장애인들을 완전케하는데에서 입증되었다.

적어도 장애인들은 예수님이 구약이 예언한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바디메오는 맹인으로 구걸하면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말을 통하여 예수님이 오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힘을 다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부르짖는다. 이 부르짖음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입니다』하고 외치는 것이다. 바디메오는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예수님이 대답하였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대로 자기의 어두운 눈을 보게 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장애자들을 위해 오신 분이다. 그 분은 자기의 종들에게 오늘도 장애자들을 찾아가라고 부르신다. 장애자 목회는 하나님의 목회이다. 장애자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장애자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어두움의 땅에 주님의 영광의 빛으로 채워나가는 놀라운 교역이 될 것이다.

5. 가정의 평화를 회복시키시는 예수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제일 먼저 가족제도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국가나 교회, 노동이나 신앙의 제도보다도 먼저 가족제도를 만드신 이유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가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존권을 이야기 할 때에 어떤 이들은 지나친 개인주의적인 극단에 서서 의식주등의 육체적 물질적인 욕구충족을 거론하며, 성욕과 애정과 친밀등의 정서·정신적인 욕구를 이야기 하기도 한다. 반면에 사회학적인 접근을 하는 이들은 구조악의 정화와 민주적인 삶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인간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주장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하나님은 위의 모든 인간의 욕구를 아시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욕구와 필요들을 주신 분이시며, 동시에 그 욕구들과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신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구와 필요만 보시지 않고 그것들이 충족될 수 있는 제도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리고 바로 가정은 인간의 생존권을 충족시키는 첫 번째 장임을 아시고 이 제도를 제일 먼저 창조하시고 이 제도에 복을 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가정을 통해 도구지원(생존에 필요한 필수품의 지원)과 애정지원(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지원)뿐 아니라 정체성의 지원(삶의 의미와 목적등)을 받아야 한다. 가정이 무너진다는 것은 인간의 생존권 획득의 가장 중요한 장이 무너진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가정제도의 사활은 인간의 생존 자체를 뒤 흔드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부부및 가정에 관한여 신구약 성경은 부분적으로 여러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가족관계의 기초를 발견할 수 있으며,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에서 부부관계의 근본원리를 찾을 수 있다. 이 두 관계를 지배하는 근본원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언약(covenant)관계라고 할 수 있다(Myron, Chartier,1978).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아버지와 자녀 관계로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사랑하며, 돌보고, 응답하고, 훈련하고, 주며, 존중하고, 알고 용서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관계를 연구한 레이 앤더슨(Ray Anderson, 1982)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가족관계의 중요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스튜아트 맥린(Stuart MacLin, 1984)은 "언약의 언어와 가족신학"이라는 논문에서, 언약관계에 나타난 7가지 관계적 특성을 기술하면서 이것을 효과적인 가족관계의 모델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맥린이 관찰한 언약관계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 사람들은 관계적으로 창조되었고, 공동체 속에서만 참인간이 된다.

② 가장 기본적인 가족과 언약의 단위는 쌍방관계이다.

③ 공동체 속에 사는 인간은 화합과 일치 뿐 아니라 갈등도 경험한다.

④ 언약관계에 사는 자는 반드시 서로를 용서하며 용서 받으며 살아야 한다.

⑤ 언약관계 안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간에 결속관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⑥ 언약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관계의 형태와 질서를 유지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⑦ 언약관계 속에 사는 자들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살며, 현재의 삶을 살아가며, 미래를 기대하는 시간적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언약관계의 요소들은 가족관계에서 4중의 연속적인 단계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언약, 은혜, 능력부여, 그리고 친밀의 과정으로 이것은 직선적인 단계라기 보다는 서로 중복되며, 하나 안에 다른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면서 성숙한 언약 관계로 발전한다. 이제 이 4가지 과정을 차례로 살펴보자.

⑴ 언약(Covenant)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모델을 통하여 계시한다. 하나님은 요나와 언약을 맺으시고(창6:18, 22,9:9-10),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창15:18, 17:1-7),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다(출34장, 신5장등). 신약성경의 탕자와 사랑의 아버지 비유(눅15:11-32), 요한일서 4:10-19등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언약관계의 특성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모든 언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하에서 무조건적이요, 일방적으로 시작된다.

② 하나님의 언약은 상대자(아브라함, 이스라엘등)에게 적극적인 응답을 요구하지만 그 상대자가 응답이 없을 때에라도 자기의 언약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지키시는 영속적인 언약이다.

③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언약의 복(언약의 결과)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상대자가 그 언약을 지키는 쌍방적인 언약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언약 관계는 성숙해진다.

④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의 당사자 뿐 아니라 그 가족과 후손까지 포함시킨다(창12장, 15장, 17장등)

이러한 언약 관계는 모든 가족 관계의 기본모델을 제시한다.

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자녀는 부모와 무조건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 자녀와 부모는 인간적인 타협이나 조건에 의하여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출산을 통하여 자녀는 무조건적으로 자기 부모와 관계를 시작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시는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배우자의 선택은 조건에 의하여 좌우될 수 있지만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혼의 선언은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하는 절대적인 부부관계의 성립을 선포하는 것이다. 즉 모든 가족 관계는 절대적인 관계에서 시작한다.

② 부모와 자녀의 가족관계나 부부간의 관계는 죽음이 그 관계를 갈라 놓을 때까지 영속되는 관계이다.

③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부부관계가 진실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수의 강이 흐르는 관계가 되려고 한다면 쌍방간에 언약(충실성의 언약)을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

④ 가족관계의 복은 후대에 까지 이른다.

이처럼 언약은 가족관계의 출발이요, 그 언약을 쌍방이 성실하게 지키는 성숙한 언약관계의 달성은 행복한 부부와 가정의 필수적인 요건이다.

⑵ 은혜(Grace)

언약관계의 유지와 성숙을 위해서는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은혜 관계가 필수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언약을 배반하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유지에 필수적인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배반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저주하셨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약 성경의 탕자와 사랑의 아버지 비유(눅15:12-32)는 은혜관계의 핵심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탕자는 언약을 배반한 아들이다. 그가 다시한번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용서는 결정적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아버지의 행위를 용서의 은혜라고 믿는다.

①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영접하고 용서한 것은 부모와 자녀라는 기본적인 언약 관계에 기초한 것이다.

② 아버지는 배반한 아들을 용납하고 용서하여 자기의 아들로 다시 받아들인다.

③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를 씻어내고 새로운 옷, 신, 신발, 관계(반지)등을 부여한다. 즉 아버지의 용서가 아들과 아버지의 언약관계를 회복시킨다.

④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로운 책임을 부여하고(반지의 의미) 새로운 규범에 따라 살도록 한다.

이러한 탕자와 아버지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보여주신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의 성육신, 예수님의 십자가등은 은혜의 중심으로, 언약을 버리고 떠나간 인간을 용서하고 받아 주시고 회복시키시며, 새로운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살게 하시는 결정적인 행위이다. 바로 이것은 가족관계의 실천 모델로서 가정은 끊임없이 용서하고 용납하고 회복시키고 새 삶을 살게 하는 은혜관계라고 할 것이다.

⑶ 능력부여(Empowering)

능력부여라는 말은 관계 가운데서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능력부여는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힘이 없는 자에게 부여하여, 힘이 없는 자가 새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는 상대방을 지배하고 상대방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능력을 부여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여, 자기의 독자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촉진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는 능력부여의 구체적인 모델이다.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요10:10)하려고 오신 분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요7:28)된다. 예수님은 죄인, 병자, 불구자, 귀신들린자, 주린자, 약한자등이 새 힘을 얻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그 분은 섬기는 분이요, 생명을 버리는 분이다. 그러한 행위는 분명한 목적을 갖는 행위이다. 곧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더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넘치는 삶을 살게 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삶을 완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능력부여를 받는 자들이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을 부여할 수 있는 성숙한 삶을 포함한다.

바로 예수님의 능력부여는 자녀교육과 부부관계에 중요한 모델이 된다. 부모는 끊임없이 자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력은 자녀들의 가능성과 은사들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자녀의 독자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훈련하는 것이어야 한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완성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능력부여의 과정에서 성숙되어간다. 예수님의 능력부여 모델을 구체적으로 따른 가정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삶의 열매가 열린다.

⑷ 친밀(Intimacy)

하나님은 돌보시는(Caring for)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완전한 존재로 회복시키고자 원하신다. 우리가 성결하시를 원하며, 행복과 건강과 충만을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들으시며, 공감하며, 우리 가운데 내려오셔서 우리를 돌보신다(출3;1-11).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자기를 노출시키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교제를 나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를 포기하시고 사랑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우리의 옆에 서시며, 우리의 짐을 함께 지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곧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들으시며, 우리를 공감하시며, 우리와 교제를 나누시는 친말관계의 절정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친밀한 가정의 모델을 제시하며, 어떻게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는가를 보이신다.

이상에서 언급한 언약, 은혜, 능력부여, 그리고 친밀은 ①기독교 가정의 삶의 모델을 제시하며, ② 기독교인의 삶의 근본윤리가 어떠함을 제시하며, ③하나님의 성령께서 기독교 가정에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가를 가르친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시며 가르쳐 주신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능력을 주시며, 기독교인의 가정을 복된 가정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언약의 삶, 은혜의 실천, 능력부여의 봉사, 그리고 친밀한 교제등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삶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요,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게 힘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인의 가정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너진 가정을 일으켜 세우며, 모든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로 채우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경의 모델을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따라 가정회복과 평화의 교역을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6. 죄의 해방자로 오신 그리스도

⑴ 죄인의 친구 예수

예수님의 주위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많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에게 세리와 죄인은 교제가 금지된 자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가치한 자들이요, 전염병과 같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갈 때에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눅19:7)하고 수군거렸고, 세리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 잡수실 때에도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비판을 들으시고 아주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2-13).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긍휼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이요, 개인적으로 죄악의 삶에 젖어 있고,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며, 율법적으로 죄인의 낙인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요, 존중과 사랑을 받야야 하고, 존중과 사랑을 받을만한 귀중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죄인들과 교제하며 함께 음식을 나누며, 죄인의 집에 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상식으로는 서로 교제하며 음식을 나누며, 집에 유한다는 것은 아주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고, 친구나 사랑하는 관계나 또는 적어도 존중할 수 있는 대상과만 이런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 마태의 집에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고(마9:10),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유하시고(눅19:7),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죄인인 여자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고(눅7:36-50), 일곱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의 섬김을 받으셨다(눅8:2-3).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이다(눅7:34, 마11:19). 예수님은 죄인들의 회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불러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눅5:32) 오신 분이다. 회개라는 조건이 죄인을 받아 들이고, 친구가 되어 교제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며, 사랑을 베풀게 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회개시켜 구원얻게 하려고 했다(마9:13). 예수님은 호세아 선지자가 외친 인애의 참 뜻(호6:6)을 아시는 분이시다. 죄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예수님의 인애가 죄인들을 만나게 하고, 죄인들을 멸망에서 구원시켜야 한다는 절박감을 가지게 했다. 예수님은 회개할 줄 모르고, 죄 가운데서 멸망해 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 인애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서슴없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종된 교역자들은 죄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용납하며, 사랑으로 친구가 되고 그들과 교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애를 전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사랑을 베푼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역자의 몸과 마음과 영에 베어야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⑵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예수님의 빛으로 말미암아 참 빛 가운데 행한다. 이것이 복음서 기자들이 한 가지로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이다. 질병의 어두움에 있던 자들이 예수님앞에 나갈때에 성령의 빛을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 불구자의 어두움으로 고통하던 자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에 하나님의 형상의 빛으로 가득하였다. 죄인들도 예수님을 만날 때에 용서와 성결의 참빛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화하였다.

요한복음 8장 2-11절에 소개된 여인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자.

이 여인은 간음 중에 잡힌 여자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자를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에게 끌고와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의 정죄를 기다린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자를 어떻게 판결해야 하며, 이런 여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구약성경 레위기 20장 10절, 신명기 22장 22-24까지에 보면, 현장에서 붙잡힌 간음한 여자와 남자는 모두 돌로 쳐 죽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죄를 없이하라고 엄격하게 명하고 있다. 이 여자는 사형의 유죄 판결을 받아 돌로 쳐 죽이는 심판을 받아야 할 여자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로 쳐 죽이는 자의 자격을 들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도전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은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였고 아직까지 양심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 버렸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를 선포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여인은 반드시 죽어야 할 죄를 지은 여자요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인이다. 이것은 구약의 법으로나 그 당시 사회 관행으로나 아주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죄인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에 구약의 법과 다르게, 그리고 그 당시 사회 통념과 반대로 죄를 용서받고 생명을 보존하고 평안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회개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는가? 그가 예수님께 어떤 간구를 했는가? 부르짖었는가? 새 삶을 약속했는가? 살기등등한 바리새인들, 돌을 들어 내려치려고 하는 서기관들에게 끌려 예수앞에까지 왔던 간음한 여인을 상상해 보라. 그녀의 얼굴이 어떠했겠는가? 그녀가 진정 예수께 나오고 싶어 나왔던가? 그녀는 끌려 왔을 뿐이다. 예수님 앞에서 더욱 두렵고 떨리고 불안했을 뿐이다. 수치와 부끄러움에 떨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회개도, 신앙도,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먼저 죄를 용서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한 것은 죄를 용서한 이후에 따라 나온 말씀이지, 다시 죄를 범치 않는다는 약속에 근거해서 예수님이 그녀를 용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용서의 본질이다. 예수님은 성결의 빛이시기 때문에 어떠한 죄의 어두움을 가지고 있는 자도 예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여인이 반드시 죽어야 할 죄를 범했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어떤 간구도 하지 않았으나 예수님 앞에 있었다는 것, 즉 참빛 앞에 있었기 때문에 그 빛을 받아 용서와 기쁨과 생명의 빛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교역은 용서와 용납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예수님의 교역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 모습 그래도 받아 주고 용서하여 사랑을 베푸시고 도움을 주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목회자의 교역의 기본모델이다.

⑶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는 예수님

위에 언급한 간음중에 잡힌 여인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무엇인가? 복음의 미명하에 율법을 범해도 좋은가? 은혜로 용서하는 일과 율법대로 심판하는 일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여인의 사례를 자세히 검토하면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①구약성경(신22:22-24)은 분명히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엄격히 명령한다. ②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히 간음한 여인에게 심판의 돌을 던지지 못하였다. ③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므로 구약의 명령대로 이 여인을 도로 쳐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요8:11)고 말씀하셨다. ④ 그렇다면 사랑을 빙자하여 구약성경이 명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죄인에게 아무런 정죄나 심판도 없이 돌려보내어도 괜찮은가?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든지, 아무도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이 없다든지, 예수님은 사랑이시요, 용서의 복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붙잡힌 죄인일지라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질문은 계속 남는다.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구약의 명령을 어길 수 있는 것이냐?』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6:23).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죽어야 할 죄를 범했는데도 대가나 형벌이나 심판을 받지 않고 무조건 용서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기본원칙은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좀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함께 제기할 수 있다, 『율법이 요구하는 정죄와 심판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죄의 용서와 새 삶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가?』, 또는 『율법의 요구와 은혜의 선물은 양립할 수 있는가?』

우리는 위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몇 가지 단계를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로 성경은 "빚진다"는 단어와 "죄를 용서한다"는 단어가 교차적으로 사용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에서 하나의 암시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것을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가 있는데, 이 기도 가운데 죄사함이라는 단어는 빚진 것을 탕감해 준다는 의미이다. 물론 빚지는 것이 죄를 짓는 것도 아니요,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죄를 용서하여 준다는 뜻도 아니다. 이 단어는 죄 용서의 참뜻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기 위한 것이다. ① 빚을 지면 반드시 갚아야 하듯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갚아야만 한다. ② 빚을 졌을 때에 자기가 갚을 수 없는 경우에 다른 사람이 대신 갚아도 그 빚은 없어질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그대로 죄와 용서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①죄를 지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롬6:23, 마5:26). ② 죄를 지었을 때에 죄인이 스스로 갚을 수 없는 경우에 다른 사람이 대신 갚아 주어도 그 죄인의 죄는 사하여 진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단계로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죄 용서의 원리를 보자. 제사장이나 이스라엘 백성중에 죄를 범하여 허물이 있을 때에는 양이나 소나 염소등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죄를 범한자는 제물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취하여 성소에 일곱번 뿌리고 규례에 지정한 것을 제단에서 불살라야 한다. 그러면 죄를 범한 자의 죄가 속죄함을 받게 된다(레위기 1장 -7장 참조). 이 규례에서 죄를 범한 것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자기를 대신하여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제물을 죽여 피를 뿌리고 제단에 불살을 때 죄인은 속죄함을 받고 그 죄인을 대신하여 제물은 죽임을 당한다. 즉 제물이 대신 죄인의 죄의 값을 갚아주므로 죄인의 죄가 용서함을 받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요1:29)하고 증거한 것은 예수님이 속죄 제물이 되어 사람들의 죄악의 대가로 하나님께 드려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대가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요,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으로 용서함을 받는 것이다.

이제 세 번째 단계로 간음한 여인의 용서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그 여인은 죽어야 마땅한 죄를 지었고, 따라서 정죄받고 심판을 받아 돌에 맞아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여인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 죄의 대가로 죽임당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어린 자식이 잘못하여 물에 빠져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사랑의 어머니는 비록 수영을 못하더라도 물 속으로 뛰어들어 그 자식을 구하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그 여인의 정죄 받고 심판 받으시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그 여인을 대신하여 정죄 받고 죽임을 당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내가 너를 대신하여 너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니 너의 죄는 갚음이 되었다. 이제 너는 죄에서 용서받고 해방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여자 대신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에 율법이 완성된 것이요, 그 여자는 이제 죄의 용서를 받고 죄에서 해방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 여자에게 넘치게 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된 것이다.

네 번째 단계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자.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못 박혀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예수님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처절한 아픔을 경험하셨고, 하나님이 마련한 제물이 되어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다고 기록되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가 용서받는 것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자신은 제물이 되어 죽지만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는 용서 받기를 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이다.

예수님은 오후 3시 죽기 직전에 네마디 말씀을 하셨다. 그 가운데 한마디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원어는 "텔레스타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본래 헬라지방에서 빚을 지고 갚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속되게 되었을 때에 큰 부자가 그를 대신하여 빚을 다 같아 주고 '이제 너의 빚은 다 청산이 되었다. 너는 해방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말이다.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고 말씀하신 것은『이제 네 빚은 다 갚았다. 이제 너는 해방이 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 설 때에 예수님의 선언을 듣는다, 『너의 죄의 대가는 다 지불되었다. 너는 이제 자유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님은 모든 죄인의 죄를 다 갚으신 분이시다. 스스로 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신 분이다. 그 분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된다. 동시에 예수님은 은혜의 부여자가 되신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갚으시고 율법의 완성이 되셨기 때문에 그 분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꾼으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율법의 저주와 심판과 죽음을 받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생수를 마시는 자가 된다.

기독교 교역자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과 은혜를 하나로 연합시키는 자가 되는 것이다.

7. 정의 사회를 구현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는『나』만을 바라보며 살 수 없게 만든다. 성령은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을 보게하고 이웃을 보게하며 나를 보게 만드신다. 성령의 역사는『나』를 하나님과 세상과 이웃사이에 세운다. 성령은『나』를 관계적 존재로 만들어 하나님과 세상과 이웃과의 관계속에서『나』의 의미를 다시 찾게 하며, 그 안에서 사명을 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만을 추구할 수도 없고, 세상과의 세속적 관계만 계속할 수도 없고 이웃과의 인간관계 속에서만 만족할 수도 없고, 자기와의 이기적 대화만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변화시키실 뿐 아니라 그 사랑으로 세상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사명과 책임을 주신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상속자로 인치신 성령은 또한 우리를 부르셔서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교역(ministry)을 담당하게 하시며, 그 일을 수행할 수 있게 은사를 주시며, 그 교역 가운데서 열매을 맺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요. 지으신 이 세상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더라"(창1:31) 고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사회악에 관심을 가지시며, 이 땅위에 사랑과 정의로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사회적인 억압과 구조적인 모순과 폭력적인 통치에 관심을 가지시는 근본원인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러한 것들로 해서 고통당하며, 부르짖었기 때문이다(출2:23-25). 바로 왕이 강팍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며 학대할 때, 하나님은 바로 왕과 애굽을 대적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에게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의 죄악에서 구원하고자 하신다. 즉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백성의 구원과 평강이요, 애굽이 범하는 죄악과 폭력을 깨뜨리는 것은 제2차 적인 것으로 하나의 수단이나 과정에 불과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계시하는 하나님은 불공평과 부정과 폭력으로 가득한 사회를 심판하며, 사람들을 사회악으로부터 구원하며, 그 사회를 인자와 공의로 가득하게 채우기를 원하신다. 아모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을 대변하는 수 많은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 하나이다:

너희가 가난한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아모스5:11-12, 14, 24).

하나님은 불의와 거짓과 폭력으로 가득한 사회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회가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촉구하신다. 하나님은 구원을 원하시고, 멸망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이 사회의 통치자들과 구조와 문화가 악하여져서, 거기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으며, 풍성한 평강으로 가득한 삶에 장애를 받을 때에 하나님은 백성들을 위하여 사회구조에 개입하셔서 심판하시고 새 일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한 세상 나라를 심판도 하시고, 일으키시기도 하시고, 성장케도 하시고, 멸망시키기도 하신다. 왕들을 세우시고 폐하시며, 악한 통치자들을 징계하시며, 악에 물든 사회를 권능으로 깨뜨리신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일을 믿음의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컨데 하박국 선지자는 강포와 간악과 패역한 일들과 율법이 해이해지는 것과, 공의가 굽어지는 것등, 사회에 가득한 악을 보면서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합1:2-4)하고 외치고 있다. 하나님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운" 갈대아를 일으켜 이스라엘의 구조악을 깨뜨리시겠다고 약속하신다(합1:5-11). 하박국은 갈대아가 무참하게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어찌하여 불의한 이방인을 들어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시나이까 하고 항의한다(합2:12-2:1). 이 때에 하나님이 주신 응답이 바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말씀이다. 하박국은 이방나라 갈대아를 일으켜 유대를 징계하는 것도 믿음의 사건이요, 징계받는 유대인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도 믿음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사회의 악을 심판하시고, 이 땅의 통치자의 운명을 관장하시며,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사회구조 속에 들어오셔서 이 사회를 고쳐, 그 속에서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평강과 생명으로 넘치는 삶을 살게 도우신다. 즉 믿음의 사건은 사회구조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구조악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사건들 속에서 언제나 일어난다.

메시야 도래를 선포하는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로만 초대하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의 이웃속에 만연한 죄악들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로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의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4:16-21).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자들, 무시당하고 소외된 자들, 억압과 폭력에 눌린 자들, 구조의 악 때문에 비인간화되어 있는 자들을 해방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는 참 인간으로 변화받게 하려고 성육신하여 인간들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이시다.

특히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자이다.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성경 레위기 25장에서 명하는 희년을 의미한다. 희년을 일곱 번째 안식년 다음의 해로 50면마다 돌아오며, 희년이 되면 종으로 팔렸던 자들이 해방되어 자유를 얻으며(레25:38-43), 팔렸던 땅들도 원주인이게로 되돌려 주며(레25: 23-28), 빚을 졌던 자도 모두 면제를 받으며(레25:47-55), 이제까지 경작하던 땅도 한 해동안 쉬게 한다(레25:11,12). 희년은 인간의 탐욕과 사회악으로 조성되었던 모든 억압과 가난과 눌림에서 해방이 되고 새 출발하는 해이다. 희년은 돌이키는 해요, 회개하는 해요,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는 해요, 모든 탐욕과 사회악에서 자유를 얻는 해요, 하나님과 함께 새로이 시작하는 기쁨과 감격의 해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명하신 희년을 지킬 수 없었다. 인간의 탐욕과 악한 사회구조 희년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임하는 날에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희년이 지켜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탐욕과 사회악을 깨뜨리고 진실로 하나님의 희년을 이 땅에 성취하게 만드시기 위해 오신 분이다.

성령강림으로 새 시대의 문이 열린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드디어 주의 은혜의 해를 이 땅에 실현하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인간의 내면에 탐심을 없이하고 오직 주 예수만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셨을 때 인간들은 희년의 해방과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다음을 같이하여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여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3-47).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더라(행 4:32, 34,35).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공동체를 상상해 보라.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명하시는 희년의 참 실천이요, 주님의 은혜의 해의 실현이요,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진 실예가 아닌가?

여기에서 암시하는 중요한 교역의 주제는 ① 성령의 역사로 인간속에 자리잡은 탐욕과 자기 중심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② 탐욕과 이기주의와 교만에 기초하여 구조화되었던 사회구조가 성령으로 무너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새로운 구조를 이 땅위에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수단에 근거하여 만들어 질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전적으로 헌신하여 그 분이 우리의 생명이요, 소망이요, 진정한 주님이 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며, 성령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며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게 만드시고 그들을 사랑하여 나를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실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목회, 성령충만한 교역은 이 땅위에 정의와 사랑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참 길을 만들어 줄 것이다.

8. 자연을 회복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은 자연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참으로 완벽한 자연을 그대로 유지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기사를 읽을 때에, 우리는 두 가지의 절정을 본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여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와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그 절정으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신 것이 천지 창조의 첫 번째 절정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절정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가 완전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세상』은 창세이후 오늘까지도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목표로 남아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다스리는 사명은 우리가 가져야 할 최고의 가치요, 의미요, 책임이 되었다. 인간은 자연과 사이에 화해를 유지할 뿐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고 가꾸고 보존하고 다스리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태초의 자연으로 회복시키는 사명을 잘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창세기의 인간의 역사는 자연을 존중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보존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연을 가꾸는 역사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 욕망을 위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 아름다운 자연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 욕망을 만족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훼손하였기 때문에 땅은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창3:17-18). 그러나 이 때만 하여도 아담이 땀흘리는 수고만 하면, 그 땅은 수고 한대로 소산을 내는 땅이었다(창3:18-19). 그런데 이 땅은 범죄가 흉악하여져서 사람의 피가 땅에 흐르고 그 피로 땅이 적셨을 때에 메마른 광야로 변해 버렸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신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 네가 밭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 "(창4:11-12). 폭력으로 인하여 피가 흐르는 땅은 저주를 받는다.그 땅은 효력을 잃어 버린다. 이제 더 이상 심은대로 거두지도 못하는 자연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수고하여도 그 대가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땅이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더욱 심각한 죄에 빠져 갈수록 자연도 비례하여 파괴되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연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한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믿음이 자라날수록 자연은 더욱 아름답고 완전해지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이기적인 탐욕과 욕망을 따라 살며 범죄하게 되면 자연은 점점 황폐하여지고 파괴된다. 즉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자연의 아름다움과 황폐화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노아시대를 읽으면서 자연과 신앙과의 관계가 더욱 밀접한 것을 발견한다. 노아시대는 한마디로 죄악과 불신앙으로 가득한 시대이다. 이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다"(창6:11).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지으셨음을 한탄하사 근심하셨다"(창6:5-6). 이 때는 진실로 불의와 폭력, 탐욕과 정욕, 불신앙으로 가득한 때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큰 홍수를 이 땅에 내려, 노아와 그 가족과 선택받은 짐승들 이외에는 다 멸망시켰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던 자연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심판하는 도구로 변하였다. 불신앙으로 가득한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드디어는 그 자연이 인간들을 이 땅에서 쓸어 버리는 심판자가 되었다.

신명기 28장의 하나님의 복과 저주도 이런 각도에서 다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원하는 때에 복으로 가득하게 하시고, 또는 재앙으로 황폐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 말씀은 이 복과 저주가 백성들의 신앙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복이 백성들에게 내려올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을 거역하며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자기 중심의 삶을 살고 신앙을 버리면, 모든 자연은 백성들의 대적이 되어 백성들에게 저주와 재앙을 안겨주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만든다. 신앙과 자연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에 밀접하게 서로 연관되어서 하나가 실패하면 다른 것도 실패하며, 하나가 바로 되면 다른 것도 바로 된다.

그러나 환경과 자연보존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을 통하여 드러난다. 태초에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좇아 사람을 지으셨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다스리게"(창1:26)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 즉 환경과 자연보존이었다. 아담과 하와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자연을 파괴하기 이전에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친밀한 관계,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며, 섬기는 관계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사람들의 범죄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서로 소외되고 적대적인 관계, 폭력과 약탈과 저주와 심판의 관계로 타락해 버렸다.

예수님이 오심은 화해의 십자가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제까지 소외되고 적대자가 되어 서로 약탈하고 저주하고 심판하던 모든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자연과 인간의 화해, 인간과 인간의 화해,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간의 화해를 성취한 화해의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서는 자만이 자연회복, 환경보존의 참뜻을 발견할 것이요 , 진정한 화해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예수님은 타락과 함께 잃어 버렸던(또는 손상을 랴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 분을 믿는 자들은 그분의 형상을 본받게 된다(롬8:29, 빌3:21등). 예수 안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부여 받는 것이 우리의 구속이라고 한다면, 성도들이 구속받았을 때에 최초로 하나님께 부여 받을 사명이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그 계획이 아닐까? 그것은 곧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다스리는 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그 자연을 아름답게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은자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사랑하고 보존하고 구원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것이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바울이 모든 피조물들의 탄식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이 이제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가르치면서(롬8:24),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롬8:19). 이 세상에사는 사람들이 죄악에 빠졌기 때문에 자연도 함께 탄식하며 고통한다. 피조물들이 처참한 파멸과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야 한다.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이 나타나야 자연이 회복되고 모든 피조물이 탄식과 고통에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탄식하는 자연의 회복을 원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이 일을 담당시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탄식하는 자연 가운데도 임재하시며, 자연을 회복시켜『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연』이 되도록 교역하는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역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구속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하나님이 지으시고 이처럼 사랑하시는 자연을 회복하고 환경을 보존하는 일에 참여 시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Ⅷ. 교역의 관계성

신앙과 교역



Ⅰ. 통상적인 신앙 이해의 문제점

1. 통상적인 신앙 이해

 

이제가지 우리가 가져왔던 통상적인 신앙이해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주님이시요, 모든 존재에 생명을 불어 넣으신 생명의 주님이시요, 혼돈과 어두움 가운데 빛과 질서를 심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능히 이루시고 성취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며 신뢰하는 우리 인간의 확신과 신뢰.

2)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늘 아버지이시며,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시고 우리 인간을 그 고통과 죄악 가운데서 건지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으며, 장사한지 3일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하나님께서 작정한 때에 재림하여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것을 시인하며, 받아 들이는 우리의 지성적인 인식,

3)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절대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실천적인 삶.

이 세가지 신앙 이해는 우리의 정신기능과 신앙을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신뢰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정서(emotion), 또는 우리의 깨달음(heart)의 작용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 이해는 우리가 얼마나 뜨겁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얼마나 깊이 그 분을 심령으로 깨닫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중시하며, 우리의 정서와 경험의 깊이에 신앙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시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신앙과 동일시하는 주장은 우리의 지성적 기능과 신앙을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즉 우리가 삼위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한국교회들 가운데는 지성적인 기독교를 표방하고 "아는 것"에 중점을 두고 사역하는 교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는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의 한 부분임을 시인하면서도 아는 것 자체가 믿음과 동일시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세번째 통상적인 믿음 - 전능하신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생각 - 은 인간의 의지적인 기능을 강조한다. 필자가 많은 사람을 상대로 하여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믿음이 없어 천당에 갈 수 없다고 고백했다. 다시 그 사람들에게 어떤 믿음이 부족한가를 질문했을 때 그들의 공통적인 대답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한국 교회의 대중적인 신앙 이해는 우리의 의지적인 결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통상적인 신앙 이해의 문제점

이러한 통상적인 신앙 이해는 분명히 신앙의 어느 한 국면(facet)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성경적인 신앙 이해를 총괄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로 이러한 신앙 이해는 환원주의적 (reductionistic)이다. 즉 이것은 신앙을 우리 인간의 총체적인 삶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 기능들중의 한가지 기능의 작용이나 또는 몇가지 기능들의 작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컨데 근간에 개발된 심리학의 이론들은 우리의 정신 기능은 지·정·의 뿐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 상상력과 통찰력등 다양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현대 심리학의 원조라고도 불리우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의 정신 기능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고 우리의 지·정·의를 포함하는 의식은 무의식에 비교하여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더구나 인간의 정신장애나 정신문제의 근원은 우리의 사고, 감정, 의지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있다고 한다. 즉 심층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 기능을 의식작용(특히 지·정·의의 작용)에 국한 시키는 것은 지극히 위험스러우며, 실제로 부분적인 인간이해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을 확신과 신뢰(정서의 작용)나, 지성과 인식과 깨달음(지성의 작용)이나, 또는 순종과 헌신의 삶(의지의 작용)등으로만 해석한다면, 이러한 신앙이해는 전인적이라기 보다는 부분적이요 환원주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신앙을 우리의 정신작용의 한 부분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신앙을 사람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여 총체적인 삶의 과정으로서의 신앙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신앙은 우리의 의식·무의식을 포괄할 뿐 아니라 정신 기능을 넘어서 우리의 육체적인 행위와 영적인 삶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런데 신앙을 우리의 지·정·의등의 정신 기능으로 이해한다면, 그 신앙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을 이야기 할 뿐 전인적인 삶을 포괄하지 못한다.

둘째로 통상적인 신앙 이해는 인본주의적이다. 인간의 지성적 인식이나 정서적인 확신과 신뢰나 의지적인 순종을 신앙이라고 할 때에, 이 신앙은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 위에 기초하는 신앙이 되고 만다. 인간의 신뢰와 확신의 행위, 의식행위, 그리고 순종의 행위등 인간의 행위를 신앙과 동일시한다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선포한 바울의 가르침(엡2:8)과 모순이 된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10:1-15에서 자기의 의를 세우려는 유대인들의 인본주의적 신앙과 하나님의 의를 구별하고 나서, 6-7절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건과 십자가와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니시어티브를 쥐고 일어났다는 사실을 밝히고, 8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여 사람들의 귀와 마음에 들리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응답만 할 뿐이라고 선포한다(9-10).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고 가르친다(11-15절).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것처럼 설명한다면,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물론 그러한 행위가 인간 스스로에서 나오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명목상의주장이 되어 버리고, 실제로 인간의 노력과 행위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통상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우리의 초점을 인간 '나'에게 맞추고 어떻게 신뢰와 확신의 정서적 행위, 지성적인 인식의 행위, 의지적인 순종의 행위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냐에 관심을 모은다.

통상적인 신앙 이해가 인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신앙의 자리를 인간의 정신 기능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삶은 총제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정서, 의지, 지성등의 정신 기능도 신앙의 한 부분이 된다. 즉 신앙의 삶 속에는 신뢰와 확신, 인식과 순종등의 인간의 정신행위가 포함된다.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구원과 역사를 확신하며, 그분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시인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 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인간의 정신 기능위에 신앙의 자리가 있다고 보는 것은 신앙의 중심을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옮겨 놓는 인본주의적 사고이다.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은 인간의 정신 기능의 개발이나 완성에 그 중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정신 기능의 개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의 중심은 고난당하는 인간을 찾아오셔서 인간을 그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께 두고 있다.

셋째로 통상적인 신앙 이해는 인간의 신념(belief)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faith)을 혼동하고 있다. 파울러(James Fowler)는 신념과 신앙을 구별하여 전자를 인간의 정신행위이나 후자는 하나님을 믿는 영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신념은 인간의 내면의 정신행위로 그 주체가 인간 [나]이지만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격에 중심이 있으며,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에 기인하고 있다. 맥시 듀남(Maxie Dunmam)은 신뢰(confidence)와 신앙(faith)를 구별하여 "신앙은 인간의 기준으로 측정될 수 있는 신뢰(confidence)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듀남은 기도와 관련시켜 믿음과 신뢰(신념)를 설명하고 있다. 기도하는 믿음(faith in prayer:신념의 기도)은 하나님께 최후 통첩을 보내고 무조건 응답을 요구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인간의 주체적인 신념이 중심이 된다. 반면에 믿음의 기도(prayer in faith)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이다. 기도하는 믿음은 기도하는 '나'의 주체적인 노력과 간절한 열심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요, 믿음의 기도는 기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즉 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주체적인 역사를 구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의 표현이다. 통상적인 신앙 이해는 이처럼 인간적인 신념을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혼동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신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기 보다는 인간의 목표와 뜻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구체적인 노력이 앞선다. 신념은 모든 권세들이 하나님의 통치와 권능아래 굴복하기를 구하기 보다는 자기의 소원이나 꿈이 성취되는 것을 더 바랄 수 있다. 그러므로 통상적인 신앙 이해는

1) 우리의 신앙의 삶의 초점을 인간의 정신기능에 맞출 위험이 있으며, 2)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에 신앙의 중심을 두어 인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3) 인간의 신념에서 신앙의 자리를 찾는 오류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의 이니시어티브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이며, 全人的인(holistic)각도에서만 신앙의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속에서만 신앙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적으로, 그리고 목회학적으로 규명하려고 한다.

통상적인 믿음이해

① 신뢰와 확신에 중점을 둔 믿음이해 - 정서적

② 아는 것에 중점을 둔 믿음이해 - 지성적

③ 결단과 실행에 중점을 둔 믿음이해- 의지적

통상적인 믿음이해의 문제점

① 부분적인 믿음 이해 :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믿음이 아니라 정신기능에 믿음의 자리를 국한시키고 있다.

② 인본주의적 믿음이해 : 인간의 신뢰와 확신의행위, 인간의 지성적 인식행위, 인간의 순종행위등 인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관심을 모을 소지가 많이 있음.

③ 인간의 신념과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생겨나는 믿음(faith)을 혼동하고 있음 - 인간의 신념(belief)에 신앙의 자리를 둘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신앙개념을 상실함.


Ⅱ. 신앙의 본질

1. 語意에서 본 신앙의 의미

0 "내가 믿는다"를 뜻하는 라틴어 credo(또는 credere)는 cor(또는 cordia)라는 단어와 do의 합성어이다. cor는 심장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것은 제 2차적으로 중심, 마음, 심령등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영적인 중심을 의미한다. 즉 cor는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와 교제를 나누고 사귀는 중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do 는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어떤 신뢰의 대상에서 "드린다" "그에게 고정시킨다" 또는 "의지한다"는 뜻을 가지는 동사이다. 즉 credo는 본래 "우리의 인격의 전인적인 중심인 심장을 특정한 대상에게 드리고 그 대상에게 고정시켜, 그를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credo는 사도신경의 처음 단어로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심장을 성삼위 하나님께 완전히 드리고 그분만 의지하며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상)고 고백한 것은 자기의 심장을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고 살아간다는 바울의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3)고 담대히 주장할 수 있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3-4상)하고 바울이 기록한 진정한 의미는 우리 믿음의 사람은 이미 심장을 하나님께 드린 바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만 생명과 삶의 의미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4:6-8에서 심장을 주님께 드리는 삶이 무엇이며, 심장을 주님께 드리는 믿음이 어떻게 그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지를 간명하게 보인다. 심장을 주님께 드린 바울에게는, 이날을 중히 여기거나, 저 날을 중히 여기거나, 음식을 먹으며 헌신하거나, 금식하며 기도하거나 그 이유는 오직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 주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면 이것도 가능하고 저것도 가하나, 주님께 합당치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이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결론 짓는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바울은 심장을 주님께 드리는 신앙의 삶의 모델이다.

"심장을 드린다"는 첫번째 의미가[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분 안에서만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라면 그 두번째의 뜻은 [관계적]이라는데에 있다. 관계적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심장을 드린다는 것은 반드시 그 심장을 받을 유일한 대상을 예상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심장은 우리의 인격의 중심이요, 우리의 생명이요, 하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심장을 여럿에게 나누어 줄 수 없고 단 한 분에게 드릴 수 밖에 없다. 심장을 드린다는 말은 다른 모든 대상을 거절하고 유일한 한분에게만 드린다는 데서 관계적이다. 즉 내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신념이나 확신이나 사상은 대상에 관계없이 항상 내 속에 나의 것으로 가지고 다닐 수 있다. 그러나 credo는 나의 심장을 한분의 대상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한분, 나의 심장을 받으시는 그분에게 대하여서 내가 가지는 감정이요 확신이요 신뢰요, 태도이다. 우리가 그 한분을 향할 때에는 어떤 정서가 일어나지만 다른 사람들을 향할 때에는 그런 정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서는 관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정서가 대상에 따라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credo는 이와같이 특정한 대상에게만 향하여 가지는 관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만 가지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 관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관계적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는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에게만 심장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심장을 드릴 때에 아무나 한 사람을 정하여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것을 주어 버릴 수 없다. 나의 소유중에 한 부분을 누구에게 줄 때에라도 거기에는 관계적인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예컨데 우리가 100만원을 어느 누구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백만원을 아무에게나 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느 한 사람을 정하여 백만원을 주었다고 하면, 그는 우리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서로 사귀면서 특별한 관계로 발전되기 전에는 우리가 땀흘려 모은 100만원을 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심장을 그 누구에게 드린다고 할 때에 그 심장을 아무에게나 줄 수 가 없다. 내가 나의 심장을 주님께 드릴 때에 주님과 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나와 주님과의 사이에 특별한 교제와 사귐이 있고 그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그분에게 나의 심장을 드리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는 판단이 섰을 때에만 나의 심장을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credo, "나의 심장을 그분께 드린다"는 것은 그 분과 나 사이에 특별한 사귐이 있고 특별한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신앙을[관계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의 어의

Credo : 내가 믿는다는 라틴어로 사도신경은 이 단어로 시작한다.

Credo는 Cor(심장을 의미함) do(드린다. 고정시킨다, 의지한다는 의미)의 합성어로서 "나의 심장을 드려 고정시키고 그분을 의지한다"는 뜻임

"믿는다"는 말은 상대방과의 관계가운데서 그에게 심장을 드려야 겠다는 마음을 그가 나에게 심어주었을때에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즉, '그가 나에게 해준 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는 나의 심장을 그에게 드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때에 우리는 Credo라는 말을 사용한다.

2.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신앙이다.

우리의 심장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동시에 그분을 나의 심장의 중심에 모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하고 말씀하신 다음에 곧이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이미 그의 심장을 예수님께 드렸고 그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인 바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의 심장에는 우리주님께서 오셔서 그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신다.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면서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요15:4)고 말씀하신다. 내가 예수님께 심장을 바치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동시에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내안에 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사실 이 말씀을 받은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한"(계3:15)교회요, 자기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계3:19) 책망받은 교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 있는 그 교회에 들어가기를 원하여 그 교회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이 그처럼 우리를 찾아와 우리 안에 들어 오시고자 애쓰시는 이유는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참된 교제를 원하시기 때문이다(계3:20). 그리고 그분을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기 위함이다(요1:1-12; 요일 5:11-13; 요일 1:1-3; 요1:14; 갈 3;26-27 등).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은 생명이시요 빛이시요 재창조의 능력이시라고 선포하신 후에(1:1-4), 빛 되신 예수님은 어두움 가운데 찾아 오셨으며, 어두움의 백성들에게 영접받기를 원하였으나 무시되고 거절 당하신 분이라고 선언한다(요1:4-5, 9-11). 빛이 어두움 속에 들어 오시고자 하는 근본 이유는 어두움 가운데 빛을 창조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떠한 어두움도 물러 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어두운 사람이라도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밝음과 진리와 영광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의 인간들은 빛되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요1:12) 주실 것이다. 즉 예수님은 누구든지 영접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능을 가지게 하실 것이다. 개의 새끼는 개의 능력을 가지고 토끼의 새끼는 토끼와 같은 것처럼, 사람의 자녀는 사람의 능력을 가질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과 영광과 진리를 가질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들어오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영접 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을 것이요, 하늘의 광명과 빛을 얻어 빛의 사람이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즉 1)빛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어두움에 속한 죄인들을 찾아 오셨다. 그 분은 우리 어두운 인간을 밝히시고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2)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면 그분은 그에게 들어와 그와 함께 교제하면서 그를 빛의 사람, 하나님의 권세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 3)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여 그분과 교제하면서 그분의 능력으로 참빛의 사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3. 믿음은 주님께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심장의 중심에 모셔 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그분을 섬기는 종이 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들이고 주님되신 예수님께 종으로서 철저히 순종하여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의 이면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순종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충성된 종으로 순종하며 사는 것은 자기의 뜻과 생각과 욕망을 완전히 배제하고 주님의 뜻과 생각과 욕망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하는 믿음은 "주 예수님의 뜻과 생각과 욕망을 나의 것으로 받아 들여 철저히 순종하며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하는 믿음은 "주 예수님의 뜻과 생각과 욕망을 나의 것으로 받아 들여 철저히 순종하며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것이 믿음의 세번째 의미이다.

한국교회는 1960면대 말부터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믿음의 두번째 의미)을 강조하였다. 대학생 선교회(C.C.C.)를 비롯하 선교단체들은 합리적 접근으로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영접하기를 가르쳤다. 특히 한국 대학생 선교회에서 출간한 전도 소책자 [4영리]와 거의 모든 다른 문서들은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중심에 영접하는 것을 강조했으며, 도형을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삶과 영접지 못한 삶을 가시적으로 판별할 수 있게 하고 직접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게 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출발이 예수님 영접임을 강조한다. 이단적이기는 하지만 구원파도 60년대 후반 70년대초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신앙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도전하였다. 구원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어느시에 구원을 받았습니까? 자기의 영적인 생일도 기억 못하다니 말이 됩니까?'등의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1970년대에 한국교회의 신앙의 중심을 예수님을 영접하는 신앙에 두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고 할 것이다. 구원파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서적인 깨달음을 강조했고 정서적인 깨달음과 예수님의 현존을 동일시하는 경건주의적인 잘못을 범했으나 기존 교단들에게 중대한 도전을 한 것은 사실이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에 확산된 오순절 운동은 방언체험이라는 경험적 입장에서 예수님 영접을 가르쳤다. 70년대에 있었던 여의도 광장의 대중집회들은 대체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신앙에 중점을 둔 것들이었다.

이러한 예수님 영접의 강조는 한국의 신앙운동에 매우 중요한 이정표를 만들어 준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영접하는 신앙"의 이면인 "주님께 순종하는 신앙"을 간과해버렸다는데에 문제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종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이 말씀이 임할 때까지 광야에서, 성전에서, 굴속에서, 산 위에서, 무릎을 끓고 기다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의 뜻을 따라 예언하고 실천하는 자들이었다. 세례요한도, 모세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는 묵묵히 기다리고 그 말씀이 임했을 때에 그대로 순종하여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올바른 자세이다. 믿음은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우리가 영접해들인 우리의 주님 예수님의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며, 그분이 말씀하실 때에 철저히 순종하여 실천하는 삶이다. 1980년대의 한국교회는 믿음의 두번째 의미인 예수님을 영접하는 삶 보다는 어떻게 예수님께 순종하며 살 것인가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70년대의 활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의 주장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신앙을 곧 주 예수님을 순종하는 신앙의 다른 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양자를 동시에 강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정성있는 목회는 이 양자를 모두 중시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훈련하는 것이어야 한다.

4. 신앙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의 역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요(요일1:1-3), 우리 인간의 생명이시요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시다(요1:4-5; 9-10; 3:19-21; 엡 5:14등).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 안에 오신 분은 바로 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 안에 오셔서 그분의 권능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것이다. 캄캄한 방 안에 아무리 조그마한 빛이라도 빛이 들어오면 그 방이 아무리 어두웠을지라도 그 방은 그 빛만큼 밝아질 것이다. 이것이 빛의 원리이다.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들어오는 그곳에는 예수님의 빛으로 말미암아 밝아질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4복음서 기자들은 한 가지로 이 사실을 증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복음서는 먼저 우리에게, 오신 이가 사람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한다(요1;1-14, 마4:12-16; 막1:21-28; 2:1-12; 눅 9:28-36 등등). 그리고 다음으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드러오고 있음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암흑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백성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돠 하였느니라"(마4:12-16).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만났을 때에 병든 자들은 고침을 받았으며,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고침을 받았다(마8:16-17; 막1:32-34등).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롯 유다와 바리새인들과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들이 병자든지, 귀신들린 자들이든지, 불구자이든지, 죄인이든지, 세리나 창기들이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치유받고 건강을 회복하며, 성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와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귀신들린 여인으로 부모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동네와 가문의 수치가 된 여인이요, 완전히 미쳐버려(일곱귀신 들려), 제정신을 잃어버린 완전히 인간 이하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녀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예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찾아 갔을 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하나님이 빛이 비취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귀신들이 떠나가고 이제는 예수님을 섬기는 여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눅8:2-3), 예수님을 따라 골고다의 길을 걸어 올라가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눅23:49), 예수님의 무덮 앞에(눅23:55; 막 15;47)까지 따라가며, 안식후 첫날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만나고(요20:11-18),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요20:17-18).

예수님은 천한 여인, 인간 이하의 인간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고상하고 성스러운 막달라 마리아로 바꾸셨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핵심이다.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꾸어 가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역사가 곧 믿음인 것이다. 세리장 삭개오에게서 우리는 또 다른 믿음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그는 교제가 금지당한 민족의 배신자인 세리장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만나 주시고 그를 초청하여 세리장 삭개오의 집으로들어가 그와 함께 교제를 나누신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두움이 짙을수록 그곳을 비추기를 원하시며, 그곳에서 밝음과 생명을 창조하시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삭개오와 교제하실 때에 삭개오는 예수님의 밝은 빛에 비추임을 받고 밝아질 수 밖에 없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가 갚겠나이다"(눅19:8). 삭개오는 돈에 끌려 세리장이 되었으나 이제 예수님을 만남으로 돈보다도 가난한 자들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눈을 얻었으며, 자기의 순결을 대가로 토색한 재산을 모았으나 그것을 4배로 갚아 자기의 순결을 회복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만드셨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속에 진실한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의 역사이다.

⊙ 믿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참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님이 나에게 들어 오셔서 나를 빛과 생명의 사람으로 마드 시고자 한다. 우리가 그 분을 받아들여 그 분의 생명과 빛으로 나를 채우는 것이 믿 음이다.

⊙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그 분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 분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 철저하게 나를 포 기하고 예수님을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 우리 안에 오신 에수님은 우리 안에 생명과 은헤로 넘치게 하신다. 믿음은 그분이 우리 안 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하게 하고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바꾸어 가는 삶의 과정이다.

Ⅲ. 신앙의 성경적 이해

신 ·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들 중에는 1)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교제하시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주제와 2)고통당하는 인간들 가운데 찾아 오셔서 인간을 그 고통 가운데서 건져내시고자 갈망하시는 하나님의 주제가 특별히 우리의 논제와 밀접하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이유는 우리 인간들과 교제하시고자 갈망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창세기 1-3장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로 설명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갈망할 뿐 아니라, 그 관계들이 합당하게 형성되었을 때에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 속에 이러한 관계의 갈망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본회퍼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어버린 인간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즉 인간들과의 관계를 갈망하시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그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절한 인간은 비참과 고통 가운데 빠질 수 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아담·하와의 고통, 가인의 고난, 노아시대의 심판, 바벨탑 사건등 모든 인간의 고난의 근저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절하고 인간 중심의 우상숭배에 빠져버린 관계의 단절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들 가운데 먼저 찾아 올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고난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밖에 없었다. 신·구약 성경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가운데 몇가지 사건을 좀더 자세히 고찰하면서 믿음의 본질을 성경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1. 아브라함의 신앙모델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모델이다. 아브라함은 최초의 진정한 신앙인으로 부름을 받은 자요,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족장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신앙인의 삶의 모습이 무엇임을 우리에게 제시해 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의 삶을 고찰하면서,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아브라함의 신앙의 특성을 보고자 한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사건은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어떠한 준비를 하였는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였는지, 그의 삶이 얼마나 거룩하였는지 등 아무런 기록이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사건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창12:1)로 시작된다. 아브라함이 먼저 요구하고 하나님이 응답하는 순서가 아니라,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의 응답을 촉구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 왔으며, 아브라함이 자기와의 관계의 삶을 살아주기를 하나님 자신이 열망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말씀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사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와 말씀하시고, 약속을 주시며,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의 삶을 살도록 권고하시는 사건들(창12:1-3,7; 13:14-17; 15:1-5; 12-15; 17:1-22등) 두번째 유형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삶을 거절하고 자기 중심적인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위기를 당할 때에 아브라함이 부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그 위기 상황 가운데 오셔서 아브라함을 그 위기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새로운 신앙으로 성장시킨 사건들이다(창12:10-13:4; 16:1-14; 20:1-7; 22:1-19등). 세번째 유형은 아브라함이 먼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부르고 간구하여 하나님과 말씀을 나눈 사건이다(창18:22-33). 이 세가지 유형들은 실제로 다시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와 두번째 유형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부르기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 오셔서 아브라함을 도우시고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건이요, 세번째 유형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사건이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사건들 중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사건은 오직 단 1회에 불과하며 이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을 미리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신앙의 사건들을 분석해 본다면, 실제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망하여 하나님을 먼저 찾은 사건은 하나도 없다고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사건도 1)하나님의 계시가 아브라함의 기도보다 앞섰으며, 2)이 경우에 아브라함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멸망당할 소돔과 고모라성과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위한 중보의 기도이었다는데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망하며 아브라함을 부른 사건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의 사건들을 검토하면서 내릴 수 있는 한가지 결론은 1)하나님이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갈망하고 있으며, 2)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와 말씀하시며 구원을 베풀고 있으며, 3)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찾아와 말씀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응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아브라함의 사건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신앙의 모델은 1)신앙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의 삶이며, 2)그 관계는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관계요, 3)그 관계의 성립은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은혜의 구원을 베풀 때에 시작되며, 4)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하여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 가는 삶 그 자체가 신앙이라는 것이다.

2.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신앙 모델

바울은 예수님의 사건을 매우 간명하게 요약하여 가르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바울은 이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섬기러 오신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본체를 버리고 종의 형체(헬라어 원문은 종의 본체임)을 입고 세상에 들어와 죽기까지 섬기며 복종하는 종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즉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섬김과 복종으로 인간을 고난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건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이니시어티브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가르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렇게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 가겠느냐 하지 말라하니 올라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 10:6-7). 바울은 이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들어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요,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여 우리의 구원의 기초를 놓게 하심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내려 오시도록 하나님을 설득했는가? 이 세상 어느 누가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는데 동참했는가? 인간이 아무리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해도 인간은 하늘에 올라갈 수도 없고, 음부에 내려 갈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갈망하여 세상에 먼저 찾아 오심으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삶을 살고자 갈망하시며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인간을 고난 가운데서 건져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신다는 사실 속에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행2:23)된 것이라고 거듭하여 천명하고 있다(행2:23,25-32; 3:18-26; 4:25-27; 7장; 8:29-36; 10:43등).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과 십자가와 부활은 이미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을 이루신 것이며, 여기에 어떠한 인간의 노력이나 협조나 역할이 가미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과의 관계를 갈망하여, 인간이 구하기 전에 인간을 찾아 오신 하나님의 주도권만을 강조한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은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역하여 우상숭배와 인간중심의 삶으로 타락하여 비참한 고난에 빠진 인간을 그 고난 가운데서 구원해 내시는 사건이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인간의 행복을 드러낸 사건이다. 4복음서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받는 수 많은 사람들을 도우시며 구원하시고 있음을 본다. 병든 자들을 고치시며,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며, 불구가 된 장들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시며, 눌린 자들과 메인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며, 가난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죄인들에게는 성결한 인격을 회복시키고 있다(마8:16-17;4:23-25;11:2-5;막1:21-45; 2:13-17;눅19:1-10;4:16-22;요1:14등).

이 모든 예수님의 구원의 사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들의 신뢰나 확신이나 열심이나 순종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마8:1-12; 9:27-31; 막5:25-34등)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열심과 노력이 있었다(마15:21-28; 마9:27-31; 막5:21-24; 요4:46-54등)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열심도, 순종도, 확신도, 심지어는 어떤 기대도 없었다(요8;1-12;5;1-18;요2:1-12등) 예수님께 어떤 기대도 가지지 않았고,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오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끌려나온 예루살렘의 간음한 여인도 예수님에게 용서와 생명을 얻었다(요8:1-12).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든 구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1)예수님과의 만남이요, 2) 예수님을 받아 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빛이시요 생명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계신곳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와 은혜와 구원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요1:14).

그러므로 성육하신 하나님 에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고 감격스러운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모든 이들은 바로 주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즉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들에게 찾아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요,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이요 그래서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고 감격을 맛본 사람들이다. 요약하면 성경은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그 관계는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심으로 시작되며, 그분과 만나고 그분을 영접하여 그분의 구원의 능력과 감격을 체험하여 그분께 헌신하여 사는 삶의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Ⅳ. 신앙의 목회학적 주제들

신·구약성경의 신앙의 사건들을 자세히 고찰하면, 창세기의 사건들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고난당한 인간들을 찾아와 직접 그분의 손으로 구원을 베풀고 관계를 회복시킨 예는 드물다. 우리는 출애굽기 3장에서,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성경의 모델이 되는 사건을 읽을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서 40년간 양을 치면서 고통하는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구원하고자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고통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으로 거기에 오셨다.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의 관심의 초점을 읽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출3:7-8).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고자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 이스라엘을 찾아가지 않고 모세를 찾아오셔서, 모세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일을 하라고 명하신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9-10).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고난당하는 이스라엘에게 보내신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애굽에 들어갈 때 모세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구약 성경의 중심이 되는 믿음의 사건들이 암시하는 중요한 목회학적인 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하나님은 종들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대신 수행케 하신다.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인간들에게 먼저 찾아와 인간들을 구원하시며 인간들과 믿음의 관계를 맺으신다는 것이 우리가 주장해 온 첫번째의 주제이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스스로 그 일을 하시지 않고, 자기의 종들을 선택하여, 종들로 구원의 사역을 대신 수행케 하시며, 종들이 순종하여 일하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고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계획을 세우고 구원하시지만 실제로 보면 모세라는 종을 선택하여 보내시고 모세가 일할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고 있다. 모세가 거역하거나 하나님이 계획한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은 나타나지 못하며, 믿음의 결과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한가지 결론은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목회를 통하여 구체화 되며, 인간 사역자들의 순종 속에서 하나님은 믿음의 사건들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의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 속에서 나타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순종하는 인간 사역자들의 목회실천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2. 예수님이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위에 이루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이시다. 그분 속에서 우리는 고난 받는 인간을 찾아와 인간을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며, 동시에 하나님께 죽도록 순종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수행하시는 참 인간 사역자의 모습을 본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그분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 오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람들을 섬기며 구원하시는 인간이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그분만이 우리의 믿음의 모델이다. 그분은 하나님께 그 심장을 완전히 드리신 분이요,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셔서 그분의 모든 것을 지배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이루신 분이시다. 요14:10-12; 16:38;17:21;8:29;요5:19등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 얼마나 밀접하게 하나가 되어 사역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밝힌다. 마가복음 14장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이 자기의 뜻을 아버지의 뜻과 일치시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힘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될 수 있는대로"(막14:35) 십자가의 때가 지나가고 십자가의 쓴잔을 받지 않게 되기를 구한다(막14:35-36).

그러나 결국 예수님의 기도의 결론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이었다. 예수님은 피땀흘리는 투쟁 속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실천하였고, 그가 마시는 십자가의 잔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이 땅위에 수행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credo는 단순하게 아버지를 향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 credo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에게 향하는 credo 였다. 즉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심장을 드리는 신앙의 삶을 산 인격자이시나 동시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의 심장을 인간에게 내어 주신 사역자의 모델이었다.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등 사도들이 전적으로 자기의 심장을 하나님께 바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간들을 섬기는 사역자가 될 수 있었던 근본 동기는 하나님께 credo 하시며 그들을 위해 credo 하시는 신앙인이요 사역자이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예수님의 모델을 따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credo하며(한 신앙인이요 인격자),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필요한 자들에게 credo하는(진정한 사역자) 예수님의 모델을 따르는 목회자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구원의 기적이 일어나며, 거기에 믿음의 사건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3. 기독교 목회자의 근본적인 사명은 살아계신 주 하나님을 소개시켜 주고 그 분과의 관계의 삶을 격려해 주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이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를 구원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면 그리스도인 사역자의 기본 사명은 그 분을 소개하고 그 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격려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갈망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 오신다. 그 분은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시며, 깊은 교제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에게 오실 때에 일정한 통로를 거쳐 오신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골방의 훈련과, 성도의 교제와 예배와 성례, 그리고 봉사와 참여등의 통로이다. 우리 주님은 이 모든 통로를 통해서 오시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타고 오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역자들은 이러한 훈련의 방법들과 실제들을 구체적으로 습득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관계의 삶(신앙)을 살게하는 책임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Ⅸ. 교역과 만인 제사장직

Ⅰ.들어가는 말

시카고 신학교의 앤더슨(Philip Anderson)교수는 오늘의 교회를 다음과 같이 비평하고 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올 때, 그들은 가치있고, 사랑스러우며,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용납받고 싶어하며, 자기들의 신뢰하는 그 공동체에 확실한 소속감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온다. 그런데 교회는 대체로 고립된 개인주의적 구원만을 제시한다. 그들은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타인의 목 뒷 부분만을 바라보면서, 극도로 제의적이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린다. 신앙고백이 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인격적인 고백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고, 대체로 일반적이요, 전체적이 되어 버린다"(Anderson, 1975:50-51).

앤더슨 교수는 부부의 공저 The House Church에서 이러한 형식적인 교회의 정체성을 극복하고 생동적이요 신뢰로 가득한 교회경험을 회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 부부는 이 저서에서, 몇가지 심리학적인 전제를 세우고 있다. 사랑과 두려움과 분노와 고통은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이요, 애증 따위의 반대감정의 병존(ambivalences), 삶의 단편화, 그리고 소외현상은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있으며, 인간상황이 어떠하든지, 그가 속한 문화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의 심령은 용납과 용서와 화해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인간이해의 가정이다(ibid:8-9, 35). 그들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친밀과 나눔과 돌봄과 전인적이요 통합적인 관계의 욕망을 가진 존재라고 본다. 따라서 앤더슨 부부는 근간에 각광을 받고 있는 인본주의적 심리학이 교회갱신의 본질적인 하나의 자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도출한 몇 가지 법칙들을 실제로 [가정교회]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 법칙들 가운데는 가정교회 내에서는 서로간에 ①비판하지 말라 ② 해석하지 말라 ③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지 말라 ④ 도와 주지말라는 부정적인 원칙과 ① 함께 있어 주어라 ② 있는 그대로 용납해 주어라 ③ 마음을 기울여 경청해 주어라 ④ 격려하고 지지해 주어라 하는 적극적인 원칙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성도의 교제로서의 교회의 교리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로서의 교회의 교리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로서의 교회와 하나님의 세우신 거룩한 기관으로서의 교회와의 관계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러한 앤더슨 부부의 주장이 오늘의 교회에 생동력을 제시하고, 성도의교제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연구조사와 실천을 통하여 어느 정도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몇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그들은 교회의 생동력의 근원적 자원으로 현대의 인본주의적 심리학을 사용하면서 인간의 잠재 가능성의 활용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는 과거의 계몽주의적 환상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 같다. 둘째로 앤더슨 교수의 가정교회는 요한 웨슬레의 사상에서 약간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나 방법론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웨슬레는 소그룹모임을 교회와 동일시하여가정모임을 교회라고 부르고 가정교회의 활성화에 힘을 썼다는 점에서 앤더슨 교수의 가정교회와 일치하나, 교회에서 사용하는 자원면에 볼 때, 웨슬레는 성경자원이 교회활성화의 중심이었으나 앤더슨의 가정교회는 현대의 인본주의적 심리학의 자원들을 더 중시하고 있다. 즉 웨슬레의 가정교회는 하나님 중심, 성서중심성을 잃지 않고 있으나 앤더슨의 가정교회는 여기에서 문제성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앤더슨 부부는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의 모델로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 자유주의적인 경향의 사람들이 많이 주장해 온 인간 예수 운동의 맥락에 가정교회의 신학이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예수의 모습은 앤더슨의 가정교회에서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오늘의 교회의 경직성을 극복하고 생동적인 교회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근본적인 주장은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만인제사장직을 우리의 교역의 신학적 기초로 받아들이고 만인제사장직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갈 때에 오늘의 교회의 정체성을 극복하고 초대교회의 생동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교회에 대한 앤더슨의 지적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본주의적 심리학의 자원들이 교회활성화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것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만인제사장직을 교역의 실천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교회의 삶 속에 적용할 때에라야 앤더슨이 제시하는 모든 인본주의적 심리학의 자원들이 그 유용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Ⅱ. 만인제사장직과 기독교인의 정체성

(Christian Ideutity)

1. 만인제사장직의 의미

거의 모든 문화에서 우리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 모종의 문제점이 있으며, 그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서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중재자 또는 중보자를 우리는 제사장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제사장은 인간들을 향하여서는 신의 대리자로, 신의 뜻을 향하여서는 사람들의 대리자로서,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리며, 신을 달래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신을 향하여 제사를 드리는 자이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은 본래 신의 대리자의 뜻이 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요(출4:15-16), 하나님의 율법의 종이요(미가3:11),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자(신33:8)였다.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며, 해석하며,분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사장의 교육적 사명이 인간을 대리하여 하나님께 중보하는 제의적 사명으로 전환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광야의 유랑생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영구적인 성소들이 가나안 정착과 함께 생겨났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전수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일을 서기관에게 전담시키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제사장의 일은 점점 희생을 드리는 일로 제한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에 비해 인간의 뿌리깊은 죄악성을 인식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로서 제사장의 사명은 더욱 존중되어 갔다. 이런 과정에서 제사장의 기능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중보자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발견하는 제사장의 개념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①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다. ②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함께 참여한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의 제사장의 모든 기능은 예수님에게 귀속된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제사장적 중보자이시다. 예수님이외의 어떤 다른 제사장도 불필요하다. 대제사장의 사명을 완수하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고대교부들의 글 속에서,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참여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제사장직을 나누어 갖는다는 만인 제사장직의 교리가 하나의 중심주제를 이루고 있다. 모든 성도들의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요(플리갑과 오리겐), 이것은 평신도들의 성찬참여를 의미하며(로마의 클레멘트), 성만찬 참여는 곧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로마의 클레멘트와 순교자 져스틴), 이것은 교회의 하나됨의 근본이며(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성부께 자유로이 나아갈 수있는 특권이며(오리겐),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의미한다(폴리갑과 오리겐)고 보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부들은 제사장 족속으로서의 교회와 영적 제사를 드리는 사명자로서의 성도들을 의미하는 말로 만인제사장직을 기술하고 있다.

제사장 족속으로서의 교회의 개념과 영적 제사를 드리는 성도들의 사명을 의미하는 제사장직의 의미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은 싸이프리안의 사상에서이다. 그에게서 제사장직의 의미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희생제사의 의미도 함께 변화되었다. 싸이프리안은 제사를 드리는 권위는 제사장에게 귀속된 것이며, 제사장 족속과 영적제사를 드리는 것은 성만찬때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의 제사행위로 국한시켰다. 그리고 제사장의 권위는 오직 성직 임명을 받은 감독에게만 귀속시켰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 예배, 권징, 교회의 모든 권위들도 감독들에게만 주어진 권한으로 보았으며, 좀더 신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복음의 모든 거룩한 보화들도 제사장직을 맡은 감독들이 통제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러한 제사장직에 대한 개념은 루터의 종교개혁시까지 별로 중대한 반대나 이의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제사장직의 왜곡에 강력히 도전했으며 성경과 고대교부들의 만인제사장직의 참뜻을 회복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2)만인제사장직의 기초

깔뱅은 만인 제사장직의 교리를, 예수님의 3직 즉 예언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3직과 관련시켜 발전시켰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선적으로 3직을 말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의 예언자, 왕, 제사장의 직을 말한다... 그리스도란 이름의 뜻은 바로 이 3직에 관련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율법 아래서 왕과 제사장의 직과 함께 예언자의 직은 거룩한 기름을 바름으로 증거되었기 때문이다.(Calvin, Institute. II, xv.:36-37).

예수의 제사장직에 관하여, 우리는 간단히 그 목적과 효과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여야 한다. 아무 죄도 없으신 중보자 예수는 그 자신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하시려고... 그리스도는 제사장직을 완성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셨다. 율법 아래서도 피 없이는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제사장의 명예는 예수외에 그 누구에데고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분이 친히 희생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 죄를 속죄하셨기 때문이다(Institute:36-37).

깔뱅은 3직의 대속적인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제사장이 우리의 더러움을 정결케하시고, 우리를 거룩케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심령과 삶 속에 베어있는 더러움과 죄악이 우리를 가로막아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은총과 효과가 우리에게 미친다면, 그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의 새 삶은 시작되는 것이다(Institute:43).

깔뱅은 신자들의 제사장직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의 결과로 오는 직접적인 은혜(Benefits)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 이제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직을 담당하시고, 영원환 화해의 율법으로 성부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하시고, 우리를 위한 화해의 제사를 드리셨을 뿐 아니라, 가장 영광스러운 제사장직에 우리를 참여시키셨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 가운데 더려워졌으나, 예수 안에서 제사장이 되었으므로, 하늘의 성소에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이며, 아름다운 은총이 되는 것이다(Institute:43-44).

요한 깔뱅의 신학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신약성경의 유일한 제사장이며, 주교로서,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직은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예언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다. 이 3직은 예수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모든 교회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그분의 대속적인 제사장직의 근거에서 모든 교회는 공동의 제사장직을 소유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이 대속적인 희생이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참여하여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며, 구원과 용서의 은총을 받는 것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와 함께 예수님의 희생제사에 공동으로 참여하여 예수님의 대속적인 제사장직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특권과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구별이 있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속죄에 참여한자는 모두 제사장직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2. 만인 제사장으로서 기독교인의 정체성

루터의 견해를 따르면, 복음이 바로 선포되고, 성례가 바로 집행되면, 만인 제사장직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루터는 이 사실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① 모든 신자들은 다같은 존엄성을 나누어 갖는다. ② 모든 신자들은 다 같은 소명을 받는다. ③ 모든신자들은 다 같은 특권을 나누어 갖는다. 이제 이것을 차례로 설명하면서, 만인제사장직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1)모든 신자들은 같은 존엄성을 공유한다.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인 계급이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신 명예와 위엄을 모든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베풀어 주셨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어떠한 종교적인 계층에 속해 있든지 상관없이, 그들이 각기 다른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구별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는 모두 한 몸이나 각 지체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각기 다른 일을 부여 받는다고 말씀한 이유이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이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같은 세례를 받았고, 같은 복음 받았으며, 한 믿음을 가져, 모두가 동등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대문이다.... 사실은 우리의 세례가 우리 모두를 예외없이 성별하여, 우리 모두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Reformation writings of Martin Luther, vol. 1,113).

구두장이든, 대장장이든, 농부든, 그리스도인 각자는 자기의 직업과 일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성도들은 제사장과 주교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갖고 있다.(ibid)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보화를 다 받았다는데서 모든 신자들은 근본적으로 동등하다. 하나님의 은총은 모두에게 똑같이 부여되었으며, 각자의 특성에 따라서 각기 다른 사명과 직책을 주셨으나 이 모든 사명과 직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을 성취시켜 나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은 꼭같은 하나님의 사명자로서 존엄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다같이 참여하고 하나님의 일을 분담하여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위에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같은 존엄성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2)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같은 사명을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의 존엄성은 봉사의 존엄성이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봉사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종의 역할을 담당하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들였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실제로 모든 신자의 존엄성의 개념속에 이미 포함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이요 유일한 관심은, 이 세상에 속한 특권과 신분과 권리와 권능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스도는 선의 근거위에서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분의 부르심에 합당한가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요구하신다. 루터가 참 교회의 표시로서 결코 성도들의 외면적인 거룩함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성도들의 거룩함은 결코 과시할 수 있는 거룩함이 아니고 숨겨진 거룩함이다. 그것은 곧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참여할 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로움을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함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된다. 교회의 마크(marks)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들이 신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선포된 복음의 부르심을 깨닫고 그 복음에 응답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분리해서는 어떠한 거룩함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를 빼앗기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같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의에 같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새로운 신앙계급이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르심을 받아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참여했으며, 그리스도의 특권과 직(offices)을 같이 나누어 가진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부르심을 받은 동등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3) 모든 신자들은 특권을 소유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같이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면,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평신도들도 꼭같이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두가지 중대한 관심은 거룩한 성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과,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중재하는 것이다. 첫째 관심에 대하여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평신도들에게 성례의 참여를 거절하는 것은 불경건하며, 억압적이다. 어떠한 천사들이나 교황이나 공의회라고 할지라도 이것을 거절할 권한은 없다.... 성례(sacraments)는 제사장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속한 것이다. 제사장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그들의 의무는 성례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례를 집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원할 때에는 언제든지 성례를 수행하여야 한다(ibid.224)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또 하나의 특권은 중보의 교역(the ministry of intercession)을 행사하는 것이다. 루터는 이것을 부드러운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에 첨가하여, 우리는 제사장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왕들보다도 위대하다. 그 이유는 제사장직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제사장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고 기도하는 자격을 주기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였다. 제사장들은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기도하는 직책을 받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왕권을 가지고 만물을 다스리며, 제사장직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능력을 행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요구하고 원하시는 바로 그것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ibid,366)

웨슬레(John Wesley)는 이 주제를 매우 심도있게 설명하고 있다. 웨슬레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주님의 제사장직의 하나의 핵심은 자기 백성을 위한 계속적인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웨슬레는 이 신앙에 근거하여, 감리교 조직 가운데 합심기도(서로를 위해 드리는 중보의 기도)를 위한 만남의 시간을 마련하였다. 이 모임에서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께 받은 특권인 제사장직을 행사하여, 중보기도의 교역을 실천한다. 교회가 제사장직을 실천한다는 것은, 필요와 환난에 처한 형제/자매들과 진정한 공감적 연대 가운데 동일시(identify)하는 것이다. 즉, 고난당하는 자들(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의 곁에 서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그들의 짐을 함께 지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대리하여 대제사장의 기도로 하나님께 중보기도 드리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특권인 제사장직의 실천인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바로 이것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이것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참다운 성도의 길이 아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히7:25) 분이시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자의 특권이다(롬8:34).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계속적인 중보의 사역을 하시고 계신다. 우리도 성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우리의 앞에는 측량할 수 없는 특권의 문이 열리며,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계속적으로 중보기도의 교역을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제사장직이 우리의 주님과 함께 나누어 가진 만인 제사장직이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특권이요,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직을 실천해야 할 사명과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3. 만인 제사장직의 목회적 주제

만인제사장직의 실천은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한다. 웨슬레가 주장한대로 아가페의 사랑만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기독교인은 누구든지 필요에 처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들을 사용하여 봉사하며, 중보할 사명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의 실천을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제사장직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시키는 열쇠이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그들을 하나님께 중보시키는 제사장직의 열쇠이다. J.S. 웨일(J.S. Whale)은 개신교의 기본전통을 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들을 위해 계획된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이웃을 위한 것이다. 우리 신자들 각자는 믿음 안에서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를 충분히 준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계를 위해 어떠한 다른 행동이나 어떤 종류의 삶이나 더 이상 필요가 없다.(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관계를 회복하셨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받아 자기의 이웃을 섬기며 중보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바로 그대로 하여 주어야 한다. 우리가 볼 때 꼭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과 도움이 될 것들과, 받을만한 것들을 이웃을 위해 실천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한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Whale, 98-99).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인 제사장직은 곧 이웃을 향한 기독교 교역의 기초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가지 은사를 주시는 것도 제사장직을 실천하여 이웃을 섬기는 사명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는 것도 이웃을 위한 제사장직의 바른 실천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사장직을 주실 뿐 아니라, 제사장직을 실천하는 도구인 은사들과 아가페의 사랑을 주신다. 기독교 교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참여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우리의 연구만으로도 이제까지 우리가 잘못 인식해 온 만인제사장직에 관한 오해를 교정하는데 충분할 것이다.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다음과 같다. [로마 천주교회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중보하기 위하여 사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로마 천주교 신자들은 자기들의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고, 사제의 용서를 받고 사제가 나누어 주는 성찬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개신교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어떤 다른 중보자도 필요없다. 그들은 모두 제사장들이 때문에 자기 자신이 자기들의 중보자가 된다. 모든 신자는 자기를 위한 제사장이 된다] 위에서 우리가 언급한 제사장직에 대한 교리는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이와 같은 개인주의적인 해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지적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제사장직을 결코 이처럼 해석하지 않았다.

만인 제사장직의 교리는 신자 각자는 자기의 제사장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뜻은 그 반대이다. 즉 신자 각자는 다른 신자들을 위한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서로에게 내어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며, 모든 신자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더욱 효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제사장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때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하해를 경험할 뿐 아니라, 필요를 충족받으며, 고통과 환난에서 구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새 생명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결국 기독교 교역은 신자들의 제사장직의 실천여하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Ⅲ. 만인제사장직과 기독교 교역

1. 만인제사장직과 교회

만인 제사장직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곧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가지 개념이 어떻게 서로 연관이 되는가? 1530년에 나온 아우그스버그 신앙고백 제 7조는 교회의 본질을 선언하고 있는 이 조항의 본질은 대부분의 16세기 17새기 개신교 신앙교백에서 그대로 채택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회는 성도들의 회중(會衆)이요, 복음이 합당하게 선포되며 성례가 합당하게 집행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 교회의 진정한 일치를 위해 복음의 선포와 성례의 집행에 동의하는 것으로 족하며, 예식이든지 의식이든지 인간에 의하여 제도화된 인간의 전통은 불필요하다.

이 조항에 따르면, 교회는 복음과 성례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복음선포와 성례의 집행이 없이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말씀(복음과 성례)이 교회를 창조하는가? 슐링크(Schlink)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교회는 복음의 선포와 성례의 집행의 사건에 의해 창조되며, 이 때에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과 성례 안에서 임재하여 역사하므로 교회가 출발되는 것이다(Flew,:61).

그러나 뉴비긴(J.E.L.Newbigin)은 슐링크가 개신교의 전통을 두가지 점에서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믿음'이란 단어의 내용을 지나치게 주지주의적으로 이해하여, 결과적으로 복음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되는 성도들의 지속적인 회중의 맥락을 도외시해 버렸으며, 둘째로, 보이는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개념을 잃어버렸는 것이다(Newbegin:50)

바른 교리의 선포는 저절로 교회를 창조하지 않는다. 그러한 선포는 하나의 신자들의 모임을 전제한다. 그리고 만약 믿음 안에서 응답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믿음의 사람들의 응답은 성령의 역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설립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선포와 성례의 집행 외에 적어도 두 가지 요소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와 믿음의 공동체의 신앙의 응답(각성)이다. 즉 교회는 말씀의 선포와 믿음의 응답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루터의 견해를 따르면, 믿음은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외적인 말씀이 항상 거기에 있어야 하며, 성령께서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역사해야 한다. 즉 성도들의 교제(교회)는 선포되는 말씀에 의존할 뿐 아니라 말씀선포의 결과이다. 이처럼 성도의 교제는 외적인 말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는 교역(ministry)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복음을 각 영혼(사람)들에게 전달하며, 그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하게 하는 일들은 기독교 교역의 사명의 중심이다. 만약 이 믿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할 수 없으며(incorporate), 성도의 교제(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의 뜻을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 교역의 임무(task)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하신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 사명을 받아 실천하며, 따라서 복음은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중보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교회)의 중보가 없이는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의 중보가 없이는 사람들이 그 복음에 믿음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인제사장의 직무는 교역의 중심기능이 되며, 만인제사장직을 실천하는 곳에 교회가 탄생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마다 자기의 제사장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며, 믿음의 응답을 일으키는 중보교역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2. 만인제사장직과 교역(Minisktry)

개신교신학은 두가지 극단을 반대한다. 한가지 극단은 신비적인 성령의 역사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여 교회 의 교역(ecclesiastical ministry)자체를 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요, 다른 극단은 교역(ministry)을 너무 높게 평가하여, 성령까지도 교역에 귀속시켜 버리며, 모든 영적인 사건의 모든 영광을 교역에 돌릴 만큼 교역의 권위와 힘을 높이는 것이다. 개혁교회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이 양극단의 중간입장을 취한다. 즉 개혁교회 신앙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은 교회의 종들의 외적인 교역이 없이도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깨우칠 수 있는 권능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제2신앙고백 1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교역을 통하여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고 있다(Dunkerly, 198). 그러므로 교역은 성도들의 교제(교회) 안에서 그 기능을 수행하며, 결코 교회위에 군림할 수 없다. 즉 교역은 전체교회(모든 신자들)와 분리해서도, 그 위에 군림해서도 안되며, 그 안에서만 기능을 다 한다. 멕클레오드(Macleod)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신자들이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진리와 일치하지 아니하는 어떠한 교역의 이론도 기독교 정신에 벗어나는 것이다. 어떠한 교역도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신자의 책임과 특권을 부인하고서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 복음은 성부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어떠한 사제조직도 사제계급도 세우지 않았다.(ibid, 34)

감리교회가 조직되면서 최초에 강조한 원칙은 감독의 직(Episcopacy)은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 전체교회에 소속되었으며, 모든 감독직의 기능은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자기의 의무를 지고 행사하는 한에서만 합당하게 실천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상적인 교회는 활동적인 소수의 성직자와 그 성직자들로부터 은혜를 받는데 만족하는 수동적인 대부분의 평신도로 구성되지 않는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섬기는 직분을 실천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만인제사장직과 교역의 진정한 관계에 관한 감리교의 실천지침(the Deed of Union in Methodism)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교역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청지기들이며 하나님의 양떼의 목자들이다. 어떤 신자들은 이 사명만을 위해 부름을 받고 안수를 받아 이 큰 의무들을 수행하는 우선적이요 직접적인 책임을 진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주님의 백성들과 구별되는 제사장직을 가진 것도 아니요, 복음의 선포와 영혼들을 돌보는 책임과 특권과 사명을 독점적으로 가진 것도 아니다. 이 교역은 모든 신자들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며, 성령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분이 원하시는대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각자의 직무를 실천하게 하신다(Townsend and Workman, 22-23).

이러한 의미에서 만인제사장직은 교역의 다양성을 암시한다. 사실 신약성경의 교역자와 교역을 의미하는 단어는 매우 다양한 그리스도인의 봉사의 교역들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교역에는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고침의 은사,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을 하는 것등이 있다고 가르치며, 에베소서 4장에서는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교사등을 교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목적들은 이외에도 다양하게 신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목록들은 초대교회에서 실천되었던 교역의 다양성을 우리에게 증거해 준다. 이러한 견해도 개신교가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마다 적어도 하나의 교역(ministry)을 그리스도로부터 부여 받았다.(Flewe & Davies;104).

그리스도인마다 성령의 은사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구체적인 교역을 성취해야 할 사명을 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역을 공직(office)으로 인정하면서도 신약성경의 교역을 안수받은 교역자들에게만 제한시키지 아니한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교역을 만인제사장직이라고 확인하며, 성령께서 부르시고 부여해 주시는 은사를 받은대로 모든 신자들이 성취해야 할 직무라고 믿는다(ibid, 35)

페어베언(Fairbairn)은 이 진리를 기억할만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

저들의 공적인(Official) 제사장직에 반대하여 우리는 영적인(Spiritual) 제사장직을 이야기합시다. 우리는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되게 부여하고 성별해 주신 직무와 기능으로서 제사장직을 믿읍시다. ... 우리 모두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며,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앞에서는 제사장들이라는 사실을 느끼며 삽시다. 우리는 교회가 제사장 공동체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분위기를 교회안에 창조합시다. 신자들은 누구나 돌봄과 기도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와 사람들과의 사랑의 나눔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의 사역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삽시다(Eastwood, 203).

우리는 바울 서신(롬12:1-9, 고전 7:6-7, 고전 12:1-28, 에4:11-14)에서 뿐만 아니라 베드로전서에서(벧전 4:10-11)에서 기독교 교역과 만인제사장직에 관한 두 가지 기본적인 원칙을 발견한다. 첫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없이 다 성령께서 그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은사를 받았으며, 두번째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은사를 받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지는 것이요 교역을 통하여 봉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을 섬기며,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리는 기본적인 기독교 교역의 주제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Ⅳ. 만인제사장직과 공동체

친첸도르프(Zinzendorf)는 독일 개신교의 경건의 성격을 진정으로 예언자적이요 복음적으로 구체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친첼도르프가 일생동안 열정을 기울인 것은 모든 신자들 서로 간에 진정한 교제를 증진시키고자 한 것이다. 애디슨은 친첸도르프의 열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하나의 교회가 존재하기 위한 유일의 기초는 사람들 가운데 진정한 교제를 창조하고 증진시켜, 열렬한 사랑을 나누며, 구세주에게 전적으로 순종하여 살게 하는 것이다.(Addison, 24).

친첸도르프는 교육과 교제의 목적을 위하여 클래스(Classes)와 밴드(Bands)를 만들었다. 밴드는 더 깊은 교제를 구하는 열렬한 성도들을 위하여 조직된 자유로운 모임이다. 밴드들은 대체로 3명에서 7명가지로 구성된 소그룹으로, 주안에서 더 완전히 양육받기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양선을 다하여 서로간에 대화의 교제를 나누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다른 한편 클래스들은 성별과 나이를 고려하여 교회의 지도에 따라 구성되며(밴드는 구성원들이 자유로이 구성함), 7명에서 11명으로 조직되었다. 클래스는 초신자들을 훈련시키며, 교육을 받게 되며, 덕을 세우게 하는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밴드는 한 단계 높은 성경공부를 하며, 그들이 배운 진리들을 공동체의 삶에서 야기되는 신학적 목회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적용하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은 기도와 권면과 징계등을 통하여 성도들을 돌보는데에 초점을 맞추며, 그러므로 그들은 약한 형제·자매들에게 때맞추어 도움을 제공한다. 요약하면, 친첸도르프는 만인제사장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클래스와 밴드를 조직하여, 온 교회가 서로를 돌보며, 중보하는 교역에 동참시키고 있으며, 공동체 형성의 기본적인 원리를 만인제사장의 교리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레는 친첸도르프의 조직과 신학에 매우 익숙했던 것 같다. 그는 이 원리를 교회에 활용시켜, 초기 감리교 조직을 만들었다. 웨슬레는 감리교의 기본 원리를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삶으로 양육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신앙체험 가운데, 생동력있는 교제의 삶은 필수적이다.(감리교회 규칙)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교제의 종교이다.기독교를 개인주의로 바꾸는 것은 기독교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교회는 교제, 즉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교제하는 교제조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Wesley, Sermon,xxiv. v.1)

웨슬레는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초신자 모임인 클래스, 성도들의 삶을 점검하며, 훈련시키고 양육시키는 밴드모임, 지도자 육성을 위한 소사이어티 모임등을 조직하였다. 웨슬레는 이러한 작은 공동체에서 성도들의 영적 성장상태를 점검하며, 성도들을 훈련시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양육하며, 개인들의 은사를 개발하여 서로를 위한 교역에 동참게 하는 등 모든 성도들을 조직화하고 훈련시켜 그리스도의 교역을 실천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영적인 교제와 덕을 세우기 위한 모임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러한 모임은 초대교회에서 이미 활성화되어 있었고(행2:41-47), 그 때부터 교회사에서 이러한 모임들이 없었던 때는 없었다. 그들 중에도 특히 하나님의 형제회, 성 프란시스의 작은 형제회, 18세기 영국 성공회의 신앙그룹운동(religious Societies), 할레와 헤른허트의 경건운동은 믿음을 깊게 하며, 교육을 하며, 교제의 강도를 더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소그룹 운동이었다.

웨슬레의 소그룹운동의 독특한 공헌점은 이러한 소그룹의 성도의 교제를 교회와 동등시했다는 점이다. 평신도들이 감리교의 클래스모임이나 밴드모임등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다.그것은 안수 교역자가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만인제사장직의 교리가 평신도들도 성도들 가운데서 가르치고, 지도하고,영적인 목회를 할 수 있게 허용하며, 필수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이 모임과 교제의 머리시요, 모든 성도들은 바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켰으며, 여기에는 봉사하는 기능의 차이 외에는 어떤 다른 구별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독교회역사의 공동체운동의 핵심에는 만인제사장직의 교리가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만인제사장직의 교리대로 모든 신자들에게 지도자의 직을 열어 놓았으며, 그것을 이해 구체적인 양육을 시켰으며,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의 방법으로 조직적인 훈련을 했다. 이렇게 훈련받고 양육받은 성도들은 누구든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찬양하며, 증거하며, 돌보는 제사장직을 담당했다. 시대 시대마다 일어났던 교회갱신 운동은 바로 만인제사장직을 깊이 인식하고 실천하던 공동체운동이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Ⅴ. 맺는 말

그리스도인들은 다 왕같은 제사장 족속(벧전 2:9)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예배공동체인 교회로 주님의 종으로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고,돌보며, 지탱하는 만인제사장직을 담당한 사명을 진다고 할 것이다. 우리 교회는 만인제사장직의 교리를 따라 교인 각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며, 방문하며, 돌보며, 지탱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사명을 져야 한다. 동시에 교인들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아픔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신자들은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동안에도 서로를 위한 봉사의 사역을 담당해야 하지만 이것에 결코 못지 않게 날마다의 제사장직을 담당하여 이웃을 이한 사랑의 관심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머릿말에서 지적한 앤더슨의 인본주의적 돌봄의 원칙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필요한 방법론이 될 것이다. 즉 인본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돌봄이 아니라, 개혁자들의 만인제사장직의 교리에 입각하여 제사장직의 실천을 위해서 인본주의적 돌봄의 방법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앤더슨이 제시하는 함께 있어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경청해 주며, 격려해 주며, 서로를 지탱해 주는 방법들은 만인제사장직의 실천에 유용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조직인 것을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거룩한 공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직을 수행하여 서로간에 뜨거운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것도 믿는다. 즉 우리는 사도신경의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의 전반부 '거룩한 공회'를 믿으며-조직으로서의 교회-동시에 '서로 교통하는 것'도 믿는다-교제로서의 교회-우리가 만일 우리의 신앙고백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 신앙고백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모든 성도는 서로를 위한 제사장이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제사장직 수행을 위한 훈련을 받으며, 제사장직을 실천할 방안을 배워 구체적으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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