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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신경[Symbolum Athanasianum] 해설 1

하나님아들 2022. 10. 8. 17:32

아타나시우스신경[Symbolum Athanasianum] 해설 1

작성: 구본승 2011년 10월 4일 화요일 오후 10:17

몇 년 전에 개인적으로 공부하려고 정리해놓은 것입니다. 조금 손봐서 올립니다. 사실 그때 아타나시우스신경을 중심으로 공부한 뒤, 삼위일체론에 대해 흥미가 떨어졌습니다.ㅠㅛㅠ 일단, 제가 ‘개인적으로’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는 방식임을 염두에 두시고 읽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튼, 제가 앞으로 삼위일체론을 좀 더 공부를 해본다면, 이하의 내용이 개인적 입각점이 되리라는 건 확실합니다.

번역은 제가 직접 한 거고, 아타나시우스신경의 역사적 배경 등등은 생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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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는 모든 것 이전에 보편신앙을 고수해야 한다. 2. 누구라도 이 신앙을 완전하게, 어김없이 지키지 않으면 의심의 여지없이 영원히 버려질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성경’이 없었으면 생겨나지도 않았을 ‘論’이라 할 수 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삼위일체론‘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삼위일체론들을 살펴보면, 삼위일체론의 본래 자리인, ‘성경적 신론의 시작이자 결론’이라는 위치를 벗어나 그 자체로 하나의 영역을 확보했음을 알게 된다 ― 삼위일체론이 일종의 비유요, 화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성경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동원되는 여러 보족물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성경의 증거 아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삼위일체’론’과 삼위일체 하나님은 엄연히 다르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어떻게’ 삼위일체이신지를 ‘성경을 따라’ 해명한 것에 불과하다. 삼위일체에 있어서 존재론적 언명들은 ‘성경을 따라’라는 가이드라인 안쪽에 있어야 한다. 아나타시우스신경은 초두에, 이하의 내용들이 모두 ‘보편신앙’에서 출발하고 거기에 근거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 보편신앙은 제 19항에서는 ‘기독교의 진리’와 동일시된다. 따라서 보편신앙이라 함은, 단순히 ‘보편교회가 정했다’에 강조점이 있기보다는 ‘성경에서 도출되었다’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보편신앙은, 성경 위에 있는 교회가 임의로 정한 게 아니라, 성경 아래 있는 교회가 성경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3. 이것이 보편신앙이다 ― 우리는 셋(삼위) 안에 계시는 한 하나님과 하나 안에 계시는 셋을 예배한다, 4. ()들을 섞거나 본질을 나누지 않고. 5. 이는 아버지의 위가 다르고 아들의 위가 다르고 성령의 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6.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성은 하나고 영광은 같으며 위엄은 모두 영원하다.

 

나는 아타나시우스신경이 삼위일체론의 성경적 토대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구조와 개념틀을 취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나는 아타나시우스신경이 신중하게, 혹은 암시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개념들을 명시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타나시우스신경은 ‘한 하나님[unus Deus/unitas]-개체로서의 삼 위(位)[Trinitas/persona]’, ‘한 본질[substantia]-세 격(格)[예를 들면 성부의a nullo, nec creatus, nec genitus]’라는 개념틀을, 용어를 달리하여 각각 구별해서 쓴다.

[註: ‘위(位)’에는 ‘지위’, ‘자리’ 등의 ‘개체가 차지하는 공간’의 의미가 강하고 ‘격(格)’에는 ‘격식’, ‘인격’ 등의 ‘개체에 담겨있는 내용’의 의미가 강하다. 사람의 성품을 보고 ‘인격(人格)’이라고 하지 ‘인위(人位)’라고 하지 않는다. 또, 경기에서 일등한 사람을 보고 ‘일위(一位)’라고 하지 ‘일격(一格)’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곡용(曲用)문법에서 ‘제 일격(第一格)’, ‘제 이격(第二格)’ 등은 다 같은 사람 명칭이나 ‘담기는 내용’이 다름을 표시하기 위해 쓰는 말들이다. 여기서는 ‘격(格)’을 쓴다. 그러므로 ‘위격(位格)’이라는 합성어는 적어도 아타나시우스신경의 틀을 반영한다면 모호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신경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한 본질과 세 (위)격으로 계신다’가 아니라 ‘한 하나님, 한 아버지, 한 아들, 한 성령이 계신다’이다. 즉 아타나시우스신경은 ‘하나님은 한 본질과 세 (위)격이다’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하나이다’라고 접근한다. 이 넷의 관계가 바로 ‘셋(삼위) 안에 계시는 한 하나님과 하나 안에 계시는 셋’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우리말에서는 모두, substantia 내지는 essentia의 번역어로서 동의어로 여겨지는 ‘본질(本質)’과 ‘본체(本體)’를 의도적으로 구분하여 쓰고자 한다. ‘질(質)’과 ‘체(體)’가 엄연히 다름에도 삼위일체론에서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신경이 제시하는바 ‘위’와 ‘격’에 대한 인식이 모호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이렇게 보면, ‘한 하나님’은 본질이 아니라 본체를 의미한다. 즉 본체가 삼위, 삼위가 본체라는 것이다. 삼위 중 하나만 없어도 그 본체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삼위로 존재해야 한다. 또한 이 본체 말고 삼위로 된 다른 하나님 본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한 하나님’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선언은 본질과 위격을 구분하기 이전의 사태를 서술한다 ― ‘개체로서의’ 성부, 성자, 성령, 즉 Trinitas 바깥에는 어떤 신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삼위 안에만 존재하고 하나님 안에는 삼위만 존재한다. 한 위라도 모자라거나 넘치면 이 본체는 하나님이 아니다. 본체의 지배자 내지는 시작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 만약 그러하다면 양태론이다.

 

그러니까 3항은 ‘본질-격’이라는 틀과 별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신경의 의도라 할 수 있고 사실 이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타나시우스신경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이해된 후, 5항이 말하는 바가 위들의 개체성이며, 6항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본질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섞일 수 없는 위들이며, 신성, 영광, 위엄은 모두 하나님의 본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