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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신경[Symbolum Athanasianum] 해설 2

하나님아들 2022. 10. 8. 17:31

아타나시우스신경[Symbolum Athanasianum] 해설 2

작성: 구본승 2011년 10월 4일 화요일 오후 10:18

7. 아버지가 그러하면 아들도 그러하고 성령도 그러하다. 8. 아버지는 창조되지 않았고 아들도 창조되지 않았으며 성령도 창조되지 않았다. 9. 아버지는 헤아릴 수 없고 아들도 헤아릴 수 없으며 성령도 헤아릴 수 없다. 10. 아버지는 영원하고 아들도 영원하며 성령도 영원하다. 11. 그렇다고 해서 ‘세 영원자들’이 아니라 ‘한 영원자’다. 12. 이와 같이 ‘세 창조되지 않은 자들’, ‘세 헤아릴 수 없는 자들’이 아니라 ‘한 창조되지 않은 자’, ‘한 헤아릴 수 없는 자’다. 13. 아버지가 전능하신 것 같이 아들이 전능하며 성령 또한 전능하다. 14. 그렇다고 해서 ‘세 전능자들’이 아니라 ‘한 전능자’다. 15. 아버지가 하나님인 것같이 아들도 하나님이며 성령 또한 하나님이다. 16. 그렇다고 해서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다. 17. 아버지가 주님이신 것 같이 아들도 주님이며 성령 또한 주님이다. 18. 그렇다고 해서 ‘세 주님들’이 아니라 ‘한 주님’이다. 19. 이는, 기독교의 진리가 각 위를 따로따로 하나님과 주님으로 고백하도록 몰아가는 것처럼 20. 그렇게 세 하나님들, 혹은 세 주님들을 말하는 것이 보편종교에 의해 금지되기 때문이다. 

 

7항의 앞의 표현은 ‘Qualis Pater, talis Filius’인데, 이것은 우리말의 ‘부전자전’에 해당되는 라틴어 속담이다. 즉, ‘부전자전령전’으로 번역해봄직하다. 따라서 이것은 6항의 내용을 단순히 재진술한다기보다는 8항 이하의 내용의 틀을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바로, 한 하나님 안에서 각 위들이 관계를 맺고 있다는 틀이다.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보편신앙에 우선 필수적인 것은 각 위가 따로따로 하나님과 주님이어야 하며, 따라서 각 위를 따로따로 하나님 본질(신성, 영광, 위엄, 창조되지 않았음, 헤아릴 수 없음, 전능함 등)로 일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질은 각 위에 있어서 차이가 나지 않는다. 모두 ‘하나님’과 ‘주’라 불릴 수 있을 정도의 충만함을 지닌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성은 하나고 영광은 같으며 위엄은 모두 영원하다”(6항). 따라서 각 위는 따로따로 (동등)본질이며 또한 그렇게 불릴 수 있다. “아버지가 하나님인 것같이 아들도 하나님이며 성령 또한 하나님이다”(15항).

 

그러나 동등본질인 세 하나님, 세 전능자 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아타나시우스신경이 이 언명에 대한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동등본질의 유일성’이 아니라 바로 ‘보편신앙’이다(19항). 즉 ‘한 하나님’은 우선, 동등본질의 유일무이함이 아니라 하나님 본체의 유일무이함에 근거한다 — 이러한 신은 오직 성경 말고는 없다. 이 사실은 각 조항들이 취하고 있는 표현을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제 11항을 보자 ― “그렇다고 해서 ‘세 영원자들’이 아니라 ‘한 영원자’다.” “그렇다고 해서 ‘세 영원함’이 아니라 ‘한 영원함’이다”가 아니다.

 

만약 ‘세 영원자들’이라면 세 영원자들 중 하나나 둘이 없어도 영원자(들)는 존재한다. 즉 ‘세 하나님들’이 가능하다면 세 하나님들 중 하나나 둘이 없어도 하나님(들)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따로따로 충만히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시다는 것은, 어떤 위(들)가 제 아무리 스스로만으로 충만히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다른 위들이 충만히 하나님이지 않다면 하나님은 없다는 선언인 것이다. 세 위들은 각각 따로따로 충만히 하나님이되(19항)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며(20항), 한 위라도 충만히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은 없다(7항). 여기까지 와서야 비로소 각 위 간의 동등본질은 유일본질이라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다.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겠지만, 굳이 ‘신성의 근원’을 말한다면, 아타나시우스신경에 따르면 신성의 근원은 성부의 위가 아니라 ‘삼위’[Trinitas]다. 한 위가 충만히 하나님이기 위해서는 나머지 두 위 역시 충만히 하나님이어야 한다. 두 위가 충만히 하나님이기 위해서는 나머지 한 위 역시 충만히 하나님이어야 한다. 한 위가 충만히 하나님이면 나머지 두 위 역시 충만히 하나님이다. 두 위가 충만히 하나님이면 나머지 한 위 역시 충만히 하나님이다. 한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은 삼위를 함께 뵙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삼위가 한 하나님이다. 셋을 뵙는 자는 하나를 뵙는 자요, 하나를 뵙는 자는 셋을 뵙는 자다. 충만히 하나님인 한 위 안에는 세 위가 동거(同居)하고[εἶναι μετά/περιχώρησις] 이 세 위 안에는 한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이 보편신앙이다 ― 우리는 삼위 안에 계시는 한 하나님과 하나 안에 계시는 셋을 경배한다”(3항).

[註: 나의 강조점은 περιχώρησις에서 ‘동일본질을 본다’에 있지 않고 ‘한 위를 뵙는 것은 세 위를 뵙는 것이다’에 있다. 그러함에도 동일본질은 세 위 외에서는 볼 수 없으므로 결국은 περιχώρησις에서 동일본질을 보게 되는 것은 틀림없다. περιχώρησις를 말할 때 주의할 점은 위적(位的)인 측면에만 국한해야 된다는 것이다. 격의 περιχώρησις는 존재하지 않는다. 격의 περιχώρησις를 말하면 양태론이다.]

 

그러함에도 제 7항의 표현에서 요약적으로 드러나듯이, 위들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고려한다면 성부가 ‘기준[ἀρχή/ἀιτία/principium]’이 된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이제 제 21항부터 다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