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 7교회
1)에베소교회 (Efesus)현재 명: 셀축 에베소는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처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테네 왕자 안드로 클로스(Androklos)의 지휘 하에 그리스의 이주민들이 아나톨리아에 처음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가 현인들에게 그들의 새 도시가 어디에 세워질 것인가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현인들이 예언하기를 야생 멧돼지 한 마리와 물고기 한마리가 그들을 새 도시로 이끌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야외에서 안드로클로스가 생선을 굽다 그 중 한마리가 팬에서 미끄러져 가까운 숲속으로 떨어졌고 이와 함께 튄 불똥이 숲에 번지자 사나운 멧돼지 한마리가 불을 피해 뛰쳐나왔다. 예언자들의 말을 기억한 안드로 클로스는 도망치는 멧돼지를 쫓아 죽이고 바로 그 자리, 즉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서쪽으로 1200미터 떨어진 고대 에페소가 있던 곳에 그들의 새 도시를 세웠다. 기원전 7세기 에베소는 키메르(Cimmerian)인에 의해 아테미 신전을 포함하여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이곳은 그리스의 참주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기원전 6세기경 에베소는 리디아왕국의 군주 크로이소스(Croesus)의 지배를 잠시 받긴 하였으나 곧 페르시아에 정복되었고 다시 알렉산더 대왕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나톨리아 지방을 지나가던 알렉산더 대왕은 크로이소스에 의해 재건된 아르테미스 신전의 아름다움에 빠져 이곳을 정복, 에페소는 평온을 되찾고 융성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리시마쿠스(Lysimachos)는 피온산(Mt.Pion)과 코레쏘스산(Mt.Koressos) 중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높이 10미터, 총 길이 9Km의 성벽으로 요새화시켰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원형극장, 경기장과 체육관 등의 유적은 이 당시 지어진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에페소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제자 사도 요한과 관련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바울로 인해 복음이 왕성히 전해지고 있다는 에페소로 오게 되었다. 에페소에 도착한 요한과 마리아를 위하여 에페소 성도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 바오로 2세가 성모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여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곳은 카톨릭 교회의 성지로 지정되었다. 사도요한의 교회(Church of St.John) 전해져 오는 바에 의하면 이곳은 기원후 37년-42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도요한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았던 곳이자 사도요한이 복음서를 기술하고 또 생을 마감한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 위에 서기 4세기경 처음으로 나무로 된 교회가 지어졌으나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77-565 AD)시대에 재건되어 오늘날의 형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에페소가 아랍인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7, 8세기에 사도요한 교회는 20개의 타워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현재 여행객들이 출입하는 곳이 주 성문인데, 나머지 두개의 문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 나 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초기 기독교 시절 당시 경기장 내의 사자들의 먹이가 된 기독교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함인 듯 성벽 축조에 사용된 돌은 에페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은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성스러운 기독교 성지의 하나로 여겨 많은 기독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에는 오늘날까지도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셀수스 도서관 (Celsus Library)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히는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 유적가운데 전면 이 원형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에는 얼마나 화려했을 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여러 차례 많이 훼손되었 으나 최근에 재건되었고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그의 아버지,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이 도서관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상단은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정결한 여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셀수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있다. 도서관 터에 남겨져 있는 비문에 의하면 도서관을 지으라고 명한 C.Aquila는 이 건축물이 완성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이에 그의 후계자에 의해 건축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Aquila는 도서관에 소장될 서적 구입비로 2만5천 디나2만5천 디나르를 남겨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 에베소는 사도바울이 서기 53년부터 이곳에서 2년간 전도활동을 하며 강론을 펼쳤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사도바울의 방문 이후, 이곳에는 교회가 부흥하였고, 이것이 성경 상에 나타나 있는데 바로 사도바울이 로마에 투옥돼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바로 '에베소서'이다. 원형극장 (Efes Theatre) 2만5천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이 야외 원형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기 1-2세기경의 유적이다. 로마식 극장으로 재건된 것은 클라우디우 스(34-41 AD) 시대를 첫 시작으로 하였고 이후 극장의 3층이 네로 황제(54-68 AD)와 셉티무스 세 베루스(193-211 AD) 시대에 지어졌다. 3단 구조의 이 원형극장의 각 단은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높이가 18미터에 달하는 이곳의 실내 정면은 각종 부조와 원주, 창으로 장식되어 있고 최상위 단인 3층 윗부분에는 다양한 동상이 세워져있다. 2)서머나 교회(폴리캅 기념교회)현재 명: 이즈미르 성령의 불멸성 안에서 영과 육이 다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기 위하여 순교자의 반열과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로 인하여 나는 모든 것을 찬양 하 나이다. 폴리캅이 순교하기 직전에 한 기도문이다. 이 폴리갑 기념교회(서머나 교회)는 AD156년경에 순교한 사도 바울의 직전제자이자 서버나 교회의 초대감독이었던 폴리캅을 기리기 위해 17세기에 지어진 교회이다. 과거에 이즈밀은 서머나로 불려 졌으며 교역의 중심지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명에 의해 서머나로 파견되어 온 폴리캅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박해를 받으며 교회를 일으켰다. 그러다 AD156년경부터 황제숭배 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서머나(현재 이즈밀)의 원형경기장에서는 야수들의 이빨에 11명의 기독교인들이 순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때 폴리갑도 잡혀 많은 회유를 당했으나. 끝내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순교하여 서머나 교회(현 폴리갑 기념교회)는 성서에서 칭송받는 교회가 된다. 현재 폴리캅 기념교회는 이즈밀 시내 중심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 교회는 외관은 단순하고 검약해 보이지만 내부는 채색된 성화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보는 이들에게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3)버가모 교회(현재 명: 베르가마) 버가모는 높은 곳이라는 뜻에 맞게 에게해에서 24km 내륙으로 들어온 곳에 해발 300m 이상의 고원에 위치한 도시이다. 버가모는 과거에 페르가문으로 불리었다. 이 도시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시기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시아 원정 때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에 그의 대장 중 하나였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페르가문이 천연의 요새임을 알고 산의 정상에 성채를 세우고 아크로폴리스를 차례로 만들어 나간다. 그 후 페르가문은 리시마쿠스의 사후에 독립국가가 된다. 페르가문은 에우메네스 2세의 제위기간이었던 BC 197~160 년 사이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세계 최대 의 도서관이 세워지는데 무려 20만권의 도서가 있었으며 이를 경계한 이집트에서는 페르가문에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소아시아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이 된 페르가문은 높은 문화수준을 구가하며 그 시대 최고의 도시로 불리었던 알렉산드리아에 비견되었다. 페르가문은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와 조각술, 건축양식 등을 받아들여 훌륭한 공공건물들과 유명한 학교 그리고 넓이 30㎡ 높이 12㎡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이 있는 제우스신전을 주축으로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오스, 아테네등 4대 신전 등을 만든다. BC 4세기에 세워진 아스클레피움은 세계최초로 정신치료를 실시할 정도로 소아시아에서 있어 최고의 의학중심지였다. BC 4세기에서 AD 세기까지 번성한 이 병원은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아직도 유적이 남아 있다. 이렇듯 문화도시로서 번성해 가던 페르가문은 아탈로스 3세에 이르러 그의 유언에 의해 왕국을 로마에 양여하여(BC 133) 그 후 페르가문은 로마의 소아시아 속주로서 번영을 하게 된다. 로마시대에는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지고 황제숭배의 기치를 세워 기독교세력과 많은 충돌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박해를 받으며 세워진 버가모 교회는 오히려 신앙의 순결을 지킬 수 있었으나,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세속화되기에 이른다. 이에 아시아의 7대 교회 중의 하나인 버가모 교회는 하나님에게 세속화에 대한 경고를 듣게 된다. 하지만 버가모 교회는 많은 유혹과 핍박에 일부 영향을 받으나 그 종교적 정절을 지켜 현대에 이르기까지 본받고 경고로 삼을 교회로 칭송받고 있다. 이렇게 번영했던 페르가문은 716년 아랍의 침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해서 현재는 인구 5만의 작은 소도시로 전락했지만 1878년 독일의 토목기사 칼 휴만(Karl Human)에 의해 철도부설 공사 중 유적이 발견되어 그 웅장했던 과거를 드러내게 되었다. 지금 버가모라 불리는 페르가문은 지난 100년 동안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앞으로 발굴할 것들이 더 많이 남아 있을 정도로 대규모의 유적지이다. 하지만 발굴 초기에 많은 유물들을 독일에서 가져가 현재 제우스의 거대한 제단을 비롯해 많은 유물들이 독일의 페르가문 박물관에 있다. 현재의 버가모는 과거와는 달리 언덕 위가 아닌 언덕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도시에서 아스클레피온 까지는 2km, 아크로폴리스까지는 6km정도 떨어져 있다. 4)두아디라(Thyatira)교회(현재 명: 악히사르) 두아디라(Thyatira)는 이즈미르에서 북동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현재는 Akhisar라 불린다. 두아디라는 알렉산더의 대장 중 한 사람이었으며 나중에 페르 가문의 지배자가 되는 셀레우코스 니카도르(Selucus Nicator)가 BC 3세기경 도시를 재 건립하기까지는 대수롭지 않은 곳이었다. 이 도시는 군사도시로 성채도시였다. 평지에 있어 방어하기가 어려운 도시였지만 지정학적 위치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건립할 때의 군사적인 목적은 서서히 잊혀져 갔으며 도시는 상업적인 성격을 강하게 띄어갔다. 두아디라에는 많은 장인길드 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양복길드, 목수길드, 도공길드, 제빵기술자들의 길드 등등 모든 분야의 숙련된 노동자들은 길드의 회원이었다. 이런 상업적인 길드들은 기독교도들이 이교라 부르는 종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은 아폴론(Apollo)이었다. 지금도 도시의 한편에 아폴론 신전 유적지가 있다. 그래서 아래의 요한 계시록에서 보이듯이 예수님은 이단의 득세와 교인들의 변절을 질책하였다. 계시록에서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로 보아 예수님은 신자들의 종교적 순결을 질책하신 듯하다. 그리고 아래 계시록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는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에서 빛난 주석은 두아디라가 주석(錫) 산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현재 두아디라에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아폴론 신전과 비잔틴 시대의 교회 터에 남아 있는 커다란 기둥들만이 있다. 순백의 솜의 성,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의 왕조였던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만들어져 로마 시대의 온천지로서 2,3세기에 가장 번영했다.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있다. 이에 아래의 코 스를 추천한다. 번화한 거리를 구경한 후 팔각형의 필립사도의 기념교회를 보고 야외 원형극장으로 가서 아폴로의 부조를 감상하는 것이다. 아폴로 신전 옆에는 '신성한 장소'가 있다. 이곳에서는 지면에 생긴 깊은 구멍으로 부터 유독한 가스가 분출되고 있는데 성직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겠지만 자신들은 괜찮다고 믿고 있었다. 이 내용은 '신성한 장소'의 옆에 있는 분수에 기록되어 있다. 파묵깔레 모텔의 수영장에는 로마 시대의 목욕탕에 있었던 거대한 대리석 석판이 있다. 이를 본 다음에 바실리카로 향해 기둥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길을 통해서 비잔틴 시대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기념문을 지나 서쪽에 위치한 로마식 목욕탕으로 나와 마지막으로 공동묘지를 보면 된다. 이 공동묘지는 2km에 달하며 이곳에서는 특징적인 몇몇의 묘석 모양을 볼 수 있으며 아나톨리아 전 지역에서도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공동묘지이다. 5)사데(Sardis)교회(현재 명:샤르트) 사데 교회는 성경에서 라오디게아와 함께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한 교회이다. 그런 사데 교회가 있었던 이곳은 예전에 샤르디스(Sardis)라 불렸으며 현재는 샤르트(Sart)라 불린다. 이 샤르트 유적은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약 8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몇 몇 유적들이 있는데 아르테미스 신전과 체육관, 공공 화장실 등이다. 이 유적들이 지어진 pactolos계곡은 앙카라와 이즈미르를 연결하는 현대적인 도로와 수많은 리디안의 묘가 있는 천의 언덕 사이에 있다. 이곳은 리디아(Lydia)의 수도였다. 이곳을 지배했던 리디아 인들은 상업, 경제적으로 훌륭하고 창조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이 도시의 최대 전성기를 이끌었던 크로소스 왕(King Croesus)은 그 시대 가장 유복한 왕이었다. 아테네의 현명하고 유명했던 개혁자 솔론도 이 부유한 왕과 도시를 보기 위해서 방문했을 정도였다. 이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황금의 손을 가졌다는 왕의 이야기의 초석이 되는 것으로 이솝(Aesop)은 코로소스 왕의 통치기간 동안 사르디스에 살았던 푸리지아 사람(Phrygian)이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세계에서 최초로 동전을 만든 곳도 이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BC 4세기 경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B.C 2세기 때에 다시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앙카라와 이즈미르를 연결하는 현대도로의 북쪽에 위치한 유적지에는 공공화장실과 체육관 그리고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유태인들의 예배당이 남아 있다. 유태인 예배당의 남쪽에는 많은 상점들이 있던 도시의 중요도로가 있었다. 이 도로는 한 때 왕도의 한 부분을 이루기도 했다. 현재의 이곳의 유적지는 AD.4세기의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 중 유대인 예배당은 AD 3세기에 체육관의 일부분으로 쓰이던 것을 예배당으로 재건축한 것이다. 현재 체육관 유적의 메인 건물만 복원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거대한 복합단지였다. 6)빌라델비아(PHILADELPHIA)교회 빌라델비아(PHILADELPHIA)는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130KM정도에 떨어진 위치에 있다. 빌라델비아는 "형제의 사랑"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Pergamum(159-138 BC)의 Attalos II Philadelphos에 의해 세워졌다. 도시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BC 481년에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Xerxes는 그리스에 가는 길에 사데 쪽으로 여행을 했었다. 이를 기억한 알탈로스 2세는 동쪽으로 진출하여 프리지아(Phrygia)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곳에 도시를 세웠다. 이 도시의 위치는 매우 절묘 하다. 페르시아의 왕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언덕과 Hermuz와 Meander(Menderes)라 불리는 중요한 골짜기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AD17년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폐허로 변했다. 그래서 현재도 별다른 유적이 남아있지 않으며 주변에 이미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발굴도 어려운 형편이다. 하지만 이곳은 성경에 나오는 소아시아 7대 교회 중 하나인 빌라델비아 교회가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벽돌을 재료로 해서 지어진 건물로 6개의 기둥이 있는 직사각형의 건물이었다. 이 6개의 기둥 중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은 단 3개의 기둥이다. 4번째 기둥은 땅에 반이 파묻혀 있으며 가장 서쪽의 기둥은 근처에 지어진 현대건물의 아래에 있다. 기둥 위에는 11세기에 그려진 그림을 어렵게 확인할 수 있다. 7)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14~22] 현재 ALAHSEHIR로 불리는 라오디게아는 예전에는 에베소와 수리아의 중간에 위치하여 에게 해에서 아시아의 중심으로 뻗어나간 로마의 길이 관통하는 도시였다. 파묵깔레에서 서쪽으로 6.5km,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72km, 에베소에서 남동쪽으로 160km정도 떨어진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최고의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는 몇 번의 대지진을 만나게 된다. 현재의 유적지도 대지진으로 인해 모두 땅속으로 함몰되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런 대지진인 AD17년에도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라오디게아가 모두 파괴되자 로마에서 도와주고자 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는 이를 거절하고 순수 라오디게아 인들의 힘만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이 정도로 라오디게아는 엄청난 부를 갖춘 도시였다. 이런 부의 근본이 된 것은 물론 무역과 통신이었지만 기관 산업인 양모와 목화 또한 주축이 되었다. 이 지역의 양모는 광택이 나는 검은색 양모로서 가격이 높았으며 인기가 좋았다. 이들의 부는 로마의 키케로가 거액의 신용장을 라오디게아에서 현금화 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에베소의 동쪽 150㎞ 지점에 있는 살바쿠스 산(Mt. Salbacus)북쪽 기슭에 있는 충적층의 평탄한 구릉에 있으며, 메안데르 강(R. Maeander, 오늘날의 Menderes Chai)의 상부 지류인 류고스 강(R. Lycus, 오늘날의 Churuk su)의 유역을 내려다 보고 있다. 처음에는 디오스폴리스'(Diospolis) 또는 `로아스'(Rhoas)라 불리우고 있었으나(안티오코스 Ⅱ세 데오스(AntiochusⅡ Theos, BC 261-246)에 의해 재건되고, 그의 처 라오디게(Laodice)의 이름에 따라 `라오디게아'라 명명했다. 안티오코스 Ⅲ세(BC 242-189)는 많은 유대인(석방된 성인 7,500명)을 여기에 식민시켰고, 그들은 이 유력한 요소로 되었다. 빌라델비아와 마찬가지로 헬레니즘 문화의 보급을 지향(志向)했으며, 다른 헬레니즘 도시와 마찬가지로 신전, 극장, 열주가로(列柱街路)로 장식되어 있었다. 라오디게아는 한 때 버가모 왕국에 속했으나, BC 133년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에게 해와 유브라데 강을 잇는 대 통상로를 끼고 있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상업도시로서 전성하여 금융의 한 중심지로 되었다. 소아시아 부루기아의 수도이며 골로새에서 서쪽으로 16마일, 에베소에서 180km 떨어진 지점으로 알렉산더가 죽은 후 SELEUCID왕가의 ANTIOCHUS 2세가 그의 부인 LAODICE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게아라 불렀다. 성서시대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프리지아(Phryghia, 성서상의 부르기아)의 수도로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발전했다. 라오디게아는 근처의 히에라볼리에서 흘러내리는 온천물이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귓병을 치료하는 특효약과 콜로니온이라 불리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하여 의료도시로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곳에서 6.5KM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게아의 온천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물이 되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발전하여 인류최초의 Medical Center가 건립되었고 제약회사가 세워져 안약과 위장병 및 피부병에 좋은 약들을 제조하였다고 하는데 파묵칼레(히에라폴리스)에서 자연적으로 솟아나오는 이 온천물은 섭씨 35도로 염화칼슘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특히 심장병, 위장병, 신경통, 피부병 등에 특수한 효과 있고 그 외에 안약은 너무도 탁월하여 안질이나 각종 눈병에 특효약으로 알려져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이 약을 사기위해서 금을 들고 모여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시대에는 로마의 황제와 귀족들이 이 온천을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계3:18에 보면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고 기록하고 있다. 라오디게아는 금이 많아 부요한 도시었고 이렇게 금이 많게 된 것은 안약이나 기타 약을 판매하여 부자가 되어 위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 로마에서 건축비를 후원하려고 했지만 사양하고 자체적으로 도시를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재정적으로 부요한 도시가 되자 라오디게아교회의 성도들에 신앙의 열정이 식어져 책망을 받은 교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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