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2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
들어가는 말
인간이 죄를 지어 관계의 파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간은 위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살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끊어져버렸다. 남은 것이라고는 인간밖에 없는데 인간과의 관계도 파괴되었다. 그 다음에는 자연 속에서 살아야지 되는데 자연도 자기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자기밖에 없는데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인간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도록 그런 모든 관계가 파괴된 가운데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생이 무엇이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면 그 인간 스스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관계 면에 있어서 죄의 결과이다. 또한 인간 자신 안에 이 죄의 심각한 결과가 남게 되었다.
Ⅰ. 범죄 함으로 말미암는 죄책
1. 죄의 실제적인 결과 두 가지 : 죄책과 오염
죄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문자 그대로 죄에 대한 책임이다. 그러면 죄란 무엇인가? 죄는 곧 하나님의 뜻을 어기거나 그것을 순종함에 있어서 모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 죄책이라고 할 때 죄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비참한 결과를 물려받게 되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금하신 종교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내가 아니었지만,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의 결과는 아담이 개인으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대표자로서 존재했다는 독특한 특성을 이해할 때 그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죄책까지 물려받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그 모든 인간들이 죄의 결과인 죄책과 오염을 함께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2. 죄의 전가와 인류의 대표
아담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이 아담은 죄를 범한 즉시 그 죄책과 오염을 받게 되었고 그 후에 자연적인 출생 원리에 의해서 태어나는 모든 자손들이 다 거기에 죄책과 오염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어떻게 하든지 이 원죄라고 하는 것을 부인해보려고 하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말한다. 특히 로마서5:19절 같은 곳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한 사람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한 사람을 통해서 의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런 오해들이 생겨나게 된 이유는 죄의 전가의 교리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왔다. 성경은 인류역사 전체에서 인류의 대표가 될 수 있는 딱 두 사람을 이야기한다. 한 사람은 아담이며 그리고 예수님이다. 첫 번째 아담과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고,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과도 언약을 맺으셨다. 처음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때는 그 아담 개인하고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그 아담, 그 후에 태어나게 될 모든 자손을 대표하는 머리로서 하나님이 그와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3. 죄의 발전
① 성경의 예 : 깨트려진 관계가 점점 아주 흉악한 방향으로 발전을 하는 것이다. 깨트려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냥 그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하게 발전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없다. 있다’고 ‘하나님은 지구를 떠나셔야지 된다.’ 심지어는 ‘하나님은 죽었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할 정도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이 극도의 악한 방향으로 발전을 하는 것이다.
② 역사 속에서의 예 :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깨어진 인간관계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극도로 발전해간다. 자연은 자기가 창조된 고향이다. 흙에서 창조되었으니까. 지금은 고향 같은 푸근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연에 대해서 극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생활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의 이 정신병동에 누워있는 사람들. 그래서 우리도 보면 남이 보기에 저 사람이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 자기와의 관계가 깨트려졌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말세가 될수록 들어온 죄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하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까지 이 죄악은 더욱 심각하게 발전되어 왔다. 죄의 발전은 한 사람의 개인 안에사나 사회 공동체 안에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Ⅱ. 죄의 오염
1. 원죄의 결과로써 죄책과 오염
둘 다 죄의 결과인데, 죄책은 사법적인 관점으로는 책임이고, 그 다음에 오염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인 관점의 결과이다. 오염의 두 가지 성격은 ‘선천성’과 ‘부패성’을 갖는 것이다.
① 선천성 : 선천성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오염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 오염이 우리들이 흔히 인간을 이해할 때 잘못된 교육, 그리고 나쁜 환경 이런 것들이 사람의 도덕성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 인간들이 그렇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그런 부패성을 타고 나는 것이다.
② 부패성 : 도덕적인 관점에서 부패성인데 여기서 부패성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될 수 있다.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이다. ‘전적인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성품 전체가 타락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도 없고, 또 순종하려고 해도 순종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후자는 무능이다.
전적으로 타락해서 인간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이렇게 소생을 해서 다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 수 있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이 철저하게 타락해버렸다.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절대로 선한 것이 있을 수 없고 다시 인간 자력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도덕적 인간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전적인 타락과 부패는 교육과 환경에 의해서 상당한 부분은 개선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개선되는 것이 속에 있는 본질적인 죽음이 몰고 온 타락이라고 하는, 그 현상을 본질적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교육을 잘 시키면 이 타락성이 발전을 해서 더 흉악하게 만들지 않도록,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인간을 보호해 주는 기능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육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Ⅲ. 죽음이라는 질병
1. 죽음이라는 이 질병에 대한 인간의 한계
인간이 궁극적으로 불행해지는 것은 영혼이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전히 해결이 안 된다. 아무리 인간을 교육하고 환경을 개선할지라도 그 죽음이라는 질병을 가져다준 죄라는 병균이 아직까지도 퇴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질병적인 결함이 여전히 남아있다. 병에 걸린 사람들, 특히 암에 걸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듯이 교육에 의해서 약간 뭐가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죽음이라고 하는 그 사람 안에 있는 궁극적인 질병이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궁극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2. 인간은 벗어날 수 없는 두 가지 죄
① 원죄(original sin)의 결과적으로써 죄책, 오염 :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에 대한 책임이 죄책이다. 원죄는 우리에게 죄책만 아니라 죄의 오염을 가져왔다. 죄의 오염으로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태어나며, 오염된 인간의 부패성을 날로 발전하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죄악된 부패성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제 실제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② 실행죄(자범죄 actual sin) : 원죄의 (도덕적 관점)오염으로 말미암아 선천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이제 실제적인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자범죄(또는 고범죄, 실행죄)라고 하며, ‘자범죄’라고 하는 이것은 세 영역으로 크게 나뉜다. 첫째, 마음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로써 마음속에서 품고 있는 이기심, 시기심, 미움, 질투, 원망, 이런 것들이 마음으로 짓는 죄들이다. 둘째, 언어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로써 욕설, 저주, 원망하는 말, 이런 것이다. 셋째. 행동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 폭력, 살인, 간음, 사기, 협박 등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원죄의 그 뿌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 원죄 안에 죄책과 오염이 있는데 이 죄책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의롭다 칭함으로서 해결이 되고, 남아 있는 도덕적 오염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은혜를 받으면서 끊임없이 이제 남아 있는 죄와 싸우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감으로서 이 사람이 이제 그 죄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화’라고 말한다. 결국은 인간이 그래서 원죄의 뿌리와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자범죄, 본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가 원해서도 범죄 하지만 원하지 않아도 어찌할 수 없이 범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파괴되고 인간과의 관계도 점점 더 파괴되고 자연과 자아와의 관계도 점점 더 파괴가 되어서 죄를 자꾸 짓게 됨으로 이번에는 물려받은 죄에 보태어져서 외부적으로 자기가 짓는 ‘자범죄’에 의해서 죄들이 계속해서 유입되어 들어오면서 이 오염을 점점 더 확대시키고 오염을 점점 더 고질적인 오염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3. 죄의 궁극적인 치료책, 복음의 필요성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질병’은 점점 더 깊어져간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질병이 점점 더 깊어져 가니까 증상도 점점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처음 질병에 걸렸을 때는 아주 사소한 징후가 나타난다. 그래서 성경에 의하면 마지막 때가 되면 이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고 점점 더 타락해서 인간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기본적인 관계들마다 모두 파괴된다.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앙을 두려워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하나님을 기억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는 오히려 하나님을 금수와 버러지만 못한 형상과 바꾸면서 살아가는 그런 극도의 죄악 된 삶이 보편화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는데, 그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죽음이라는 질병이 점점 더 깊어질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하는 것에서 인간들이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을 시키고 돈을 많이 벌고 복지제도를 많이 하면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무지한 자의 생각이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궁극적으로는 이제는 정말 그 고통을 가져다주는 이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죽음이라는 질병을 이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치료되어야 할 필요성이 마지막 때가 되면 점점 더 절박하게 다가온다.
Ⅳ. 하나님의 구원 계획
우리가 들은 여기까지의 내용은 어두운 면을 생각한 것이다. 이제 밝은 면을 생각하도록 하자.
1. 하나님의 은총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언약적인 관점으로 생각해 보자. ‘은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구원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총’을 어떤 방식으로 베푸시는가 하면, 범죄한 인간에게 이제 베푸신 은총이 있었다. 그 첫째가 무엇인가 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다. 그러면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된다. 그것이 언약이고 그것이 계약이다. 그런데 그 대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죽음이었다.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는 히브리 성경에 ‘무트 타므트’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것은 어법 가운데서 ‘필연적 강조용법’이다.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하고 있는 화자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죽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간은 이 명령을 어겼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사람이 겉 사람과 속사람으로 나뉘어졌는데 범죄 한 그 순간 속사람은 죽었다.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은 속사람만 죽는다는 뜻이 아니다. 속사람이건 겉 사람이건 모두 죽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그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즉시 속사람이 죽은 것처럼 겉 사람도 죽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죽는다고 말씀하실 때 그 시간은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먹는다면 그렇다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러면 넌 죽는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속사람은 죽게 하셨는데 겉 사람은 살려두시는 것이다. 만약에 인간이 범죄 했을 때 인간을 즉시로 죽여 버리고 나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너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인간이 없는 창조 세계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들어놓으신 이 세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지 보여주시는 대목이다.
2. 하나님께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 은총
일정 기간을 살아있게 하셨는데 그 사이에 자손들을 낳았다. 그래서 자손을 남기고 죽고 그 자손이 다시 자손을 남기고 죽고 하면서 부모의 대와 자식의 대가 걸치면서 계속 이어지게끔 하나님이 놔두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원받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기회를 남겨두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당신께로 돌아와서 타락하기 이 전에 인간을 이 땅에 창조하셨던 원래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이제 그 기회를 두 가지로 사람들이 활용한다. 한 사람들은 진짜 그렇게 주신 기회를 활용해서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전혀 하나님을 기회를 줘도 안 믿는 백성들이 나타난다. 그 백성들은 어떻게 사는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즉결 심판하셔서 죽이시고자 했지만 구원받도록 은총의 기회를 베풀어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주어진 기간들을 선용하지 않는다.
① 은총의 첫 번째, 육체적 죽음의 유보 : 하나님을 믿을 기회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향해서 인간의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인 죽음이라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데 이는 영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이 지금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형 집행을 유예하신 상태를 살고 있는 것이다.
② 은총의 두 번째, 메시아를 약속하심 :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무엇인가 하면 ‘메시아’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맛사’라고 하는 히브리어 동사에 피동태이다. ‘맛사’는 ‘기름붓다’는 뜻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간단하게 얘기하면 이 메시아는 그들을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빠지게 된 이 절망적인 죄의 질병의 상태로부터 구원해낼 어떤 분을 약속하셨다. 그분이 메시아다.
여자의 후손이 창세기3장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성경의 사상도 남자가 아이를 낳는다고 되어 있는데 하필이면 여자의 후손이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이게 훨씬 더 뒤로 넘어가서 마태복음에 가서 의문이 풀린다. 마태복음1장17절로 넘어가면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남자의 후손으로 계속 나오다가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난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연적인 생육법이 아닌 성령으로 마리아가 잉태해서 태어나게 될 것을 미리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③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 : 죄라고 하는 본성은 하나님과의 의존의 관계를 깨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강함은 철저한 의존의 관계에서 나온다. 아담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명료하게 알지 않았는데 아주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1)‘여자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이다. (2)그 아이가 태어나서 뱀을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단의 머리를 깬다는 것은 죽여 버린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렇게 타락으로 말미암아 밀려오게 된, (3)이 비참한 상태로부터 구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를 아담은 아주 명료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보내실 그 어떤 메시아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구속하실 것이라고 믿는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은총을 베푸셨지만 현재적으로 즉각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을 연장한 것은 즉각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인데 그런데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앞으로 오시겠다고, 그러니까 이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④ 메시아의 오시기까지 :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좀 어려움 말로 말하자면 ‘진료의 창조’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한 번에 빛, 바다, 하늘, 땅 이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지으실 수 있는 재료들을 창조하셨다. 그게 재료의 모습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는 그 상태"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이 천지 창조할 재료들을 쌓아놓으신 상태이다. 그 선택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심으로서 이제 당신의 선택을 구체화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백성들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제도?
구약의 제사제도는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시는 것이다. 인간이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 죄인과 교통할 수 없기 때문에 죄 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이다. 그래서 제사는 하나님을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죄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가 하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는 궁극적인 설명이 하나님 안에 있는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라고 설명이 되는 것이다.
Ⅴ.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가?
1.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간
여전히 인간들은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노력들이 얼마나 헛되고 의미 없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못을 박을 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구원 하나만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이 대치될 수 없다고 하는 분명한 인식을 우리들이 갖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을 붙잡고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
예수님을 붙들지 않는 이유는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죽음 이후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이시다는 사실을 붙들지 않는 사람은 기회가 닿으면 반드시 예수님을 배반한다. 또 하나가 필요한 것이 있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유혹이 워낙 강하고 우리 안에 죄가 훨씬 강하면, 생각은 그렇게 해도 실제 우리의 삶은 생각대로 안 살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하신 분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 존재할 그리고 지금 나를 포함해서 이 모든 인간들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는 확신을 소유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라고 하는 것을 내가 실질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된다.
3. 악과 고난에 대한 세상의 어리석은 접근
현재적인 인간의 고통의 원인? 인간의 악과 많은 고난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증상들일 뿐인데 그 증상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씨름을 하면 이 세상이 나아지고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인간의 궁극적인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이 없이 자신만의 자원을 가지고 살아야지 되는 것에서 비롯되는 비극이다. 결국은 궁극적으로 모든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하나님께로 공급되는 그 은혜의 힘에 의해서 살도록 되어 있는 그 공급되는 자원의 통로가 막힌 데서 비롯되는 고통이 바로 이런 이 세상의 죄와 끊임없는 고통이다. 인간의 이런 모든 불행 자체가 한정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으로 살게 되어 있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그것이 끊어진 가운데 자기 안에 자원도 별로 없지만 자기 안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데서 오는 잘못된 것이다.
4. 그릇된 인간의 구원관
첫째는 그릇된 방법으로 그 자원을 조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죽여서까지 상속할 유산을 빼앗고 사기를 쳐서 재물을 뺏고 명예를 가로채고 그렇게 하면서 부당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는 자원을 자기의 자원으로 활용을 해서 그 인생의 고갈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것들이 방법에 있어서 부당할 뿐만 아니라 성격에 있어서도 부당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계속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고통의 문제가 부족한 자원 때문인데 이 부족한 자원은 뺏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정복의 역사고 이것이 인간의 피비린내 나는 생존 투쟁의 역사이다. 인간 자신 안에게는 그렇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① 다양한 종교 : 종교를 통해서 자기를 수양하고 뭐 덕을 쌓고 뭘 하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결국은 그 속에 있는 죽음이라는 질병에 궁극적으로 인간이 치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코 이 세상에 있는 참된 진리가 결핍된 종교들을 가지고는 결코 이 세상이 구원 얻을 수 없다.
② 유사종교 :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적 성격을 가진 사상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공산주의, 자본주의 이런 것들이다. 공산주의는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경제 구조를 개선해서 다 벌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는데 공산주의가 그것이 헛것이라는 게 뭔가 하면 청렴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모두 더러운 부정이 가득 온상처럼 번져있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너무나 몰랐던 것이다. 마르크스나, 엥겔스나, 레닌이나, 스탈린이나 이런 사람들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그런 식으로 인간이 불행에서 구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존재인데 그런 것을 너무 모른 것이다.
자본주의로 해보니까 되는가, 했더니 자본주의는 유물론을 배격하는 것이 아닌가? 유물론을 배격하고 세워놓은 자본주의는 또 어떻게 되는가 하면 돈 주고 사람을 팔아 인신매매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공산주의와 서로 이런 식으로 서로 상통하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그랬더니 결국은 이런 식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국가에서는 ‘자본주의’하고 ‘사회주의’하고 결합해서 ‘수정자본주의’라는 것을 한번 만들었다. 그랬더니 또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세금을 많이 거두어서 노숙자가 없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아! 이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먹고 일은 안 하는 것이다. 결국은 인간이 이렇게 뭔가 사상을 가지고 인간의 불행을 궁극적으로 해결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할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캐 들어가 보면 그것들이 인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을 못한다는 것이 입증이 된 것이다.
③ 낙관적 문명론 : 역사관은 크게 두 형이 있는데 역사가 이렇게 계속 반복을 하면서 점점 더 비참해진다고 하는 비관적 문명론이 있고 스펭글러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그러나 역사가 순환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역사가 계속 배우면서 뭔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18세기 합리주의가 들어오고 19세기에 한참 인간의 아주 놀라운 구체제, 그러니까 독재정치와 왕정, 이런 탄압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내서 자유롭게 교육을 시키고 모든 것이 억압이 아니라 이렇게 자유로운 가운데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이런 사회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의 문명 안에 존재하는 놀라운 균형감각 때문에 이 사회가 아주 아름답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게 소위 이야기하는 경제적으로는 ‘아담 스미스’의 ‘레제스베르 정책’이나 ‘자유방임론’이나 국부론 같은 곳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사고자하는 사람이 있고 공급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이렇게 만나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더 늘어나면 더 생산을 하고 더 생산을 하면 덜 값이 떨어지고 값이 떨어지면 더 살려고 하고 값이 떨어지면 생산을 덜하고 그러면서 이게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완벽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시고 죽음의 병에 걸려 있는 인간의 상태가 인간 자신의 힘으로 절대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들이다.
5. 이제 우리들의 궁극적인 희망은 무엇인가?
결국은 무엇인가 인간 스스로에게서는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왜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이 견디기 힘든 고통의 증상들이 있는데, 이 고통의 증상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도 인간에게는 없지만, 어느 정도 이것들을 개선해보기 위해서 인간이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런 고통스러운 증상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변화도 우리들이 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서 살다가 행복해지려고 하는 꿈은 다 꿈에 불과하고 그리고 결국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 해진 것이다.
맺는 말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이제는 우리 안에는 우리를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고, 증상을 치료하는 그 정도를 가지고는 우리의 이 고통스러운 상태로부터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의 질병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우리를 건져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이런 죽음이라는 질병과 궁극적인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낼 수 있는 구원이 내 안에서가 아니라, 또 이 세상 속에서가 아니라, 내 밖에서, 이 세상 밖에서 나를 위해서 이 세상 속으로 오는 어떤 제 삼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위해 오셨다. 그것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부른다.
[출처]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02】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➋|작성자 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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