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4

하나님아들 2022. 7. 6. 23:38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4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5:10上

 

들어가는 말

 

본 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셔야 했는가?”에 대하여 다루었다. 인간이 모두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고 그 병원체는 죄라고 비유했다. 그래서 그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리면 증상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악과 고통이다. 아담의 범죄의 결과는 인류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았는데, 육체적 죽음과 영적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Ⅰ. 범죄의 결과, 하나님의 형벌로 비참한 죽음에 이름

 

1. 육체적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

 

육체의 죽음은 모든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 죽음의 지배 아래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히브리서에서는 죽음의 형벌이 죄에 대한 형벌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했다. 육체적 죽음은 하나님의 형벌인 동시에 사단의 무기가 되었다. 사단은 이 죽음이라는 히든카드를 내밀며 인간을 위협함으로써 죽기를 두려워하는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대신에 죽음을 주장하고 있는 마귀의 세력에게 복종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육체적 죽음”을 성도들에게는 다른 용도, 즉 “성화의 완성”이라는 용도로 선용하셨다. 아담이 범죄하고 즉각 육체적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육체의 죽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가운데서 잠시 집행이 유보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자손들을 남기게 됨으로써 이 땅에 인류가 멸절되지 않고 계속해서 생존하게 되었다. 그 생존의 기회는. 곧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을 기회를 주시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이 세상의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가운데 문화를 건설하고 문명을 이루며 살게 된 것이다.

 

2. 영혼의 죽음에 대한 이해

 

육체의 죽음은 확실하기는 했지만 잠시 집행이 유보되었으나 영혼의 죽음은 즉각적으로 찾아왔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들의 영혼은 이미 죽었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완전히 단절되게 되었다. 처음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당신과 교통하게 하시고 거기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셨다. 그는 그 자원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면서 사는 존재였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자 그런 관계가 모두 깨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들은 아주 비참하게 되었고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 견디기 힘든 존재의 괴로움이 계속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목에서 오는 어떤 평안도 누리지 못한 채 인간은 나날이 고통과 저주스러운 삶을 계속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우리 속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와 관계가 있다.

 

 

Ⅱ.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

 

1.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창1:27)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이 땅을 다스리게 하셨다. ‘형상’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첼레메’라는 단어이다. ‘모양’이라는 말은 ‘데무트’라는 단어인데 이 두 번째 단어는 바로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동침해서 가인을 낳았을 때 아담을 닮은 가인을 낳았다라고 사용된 단어와 같은 단어이다.

 

그래서 이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지만 대체로 성경적인 입장에 서 있는 많은 신학자들은 이 ‘첼레메’ 즉 ‘형상’이라는 말과 ‘데무트’(모양)라는 두 단어는 반복되고 있지만, 성경 전체의 의미로 볼 때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심장이나 장기와 같이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진 해부학적 기관은 아니지만, 인간 속에 하나님께서 이성을 주시고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감각을 주신 것처럼 인간 속에 있는 영혼 안에 실제 하는 그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형상’이라고 부른다. 이 형상은 본래 영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는데 그것들 중에 닮은 것을 인간에게 주셨다. 인간은 그 ‘형상’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교통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교통하심에 대해서 응답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로 만드신 것이다.

2. 자연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의 파괴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은 같은 말이고, 그 형상은 다시 2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자연적인 형상’이고 또 하나는 ‘도덕적인 형상’이다. 자연적인 형상은 이성과 관계된 형상이라고 생각되고, 도덕적인 형상은 신앙에 관계된 부분이다.

 

1) 자연적 형상

 

“자연적 형상의 기능”은 생각하고 추론하고, 선악을 분별하는 이성과 도덕적 작용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은 다 죽고 그것으로 끝났지만, 인간은 죽어도 죽지 않고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영혼은 영원히 살아서 믿는 자는 하늘나라로 가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간다는 사실이다. 이런 기능의 차원에서 ‘자연적 형상’이라고 부르는데,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이 ‘자연적인 형상’은 그 죄로 말미암아서 파괴되었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상당 부분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그런 반쯤 파괴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의 도덕적 기능은 잔존하게 되었다.

 

2) 도덕적 형상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과의 신앙적인 관계와 관련된 부분이다. 이에 관해서 성경은 “참 지식”과 “의”와 “거룩”의 본질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이 도덕적 형상이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고, 순종하고, 따르게 하는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통로였다. 그런데 도덕적 형상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파괴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물을 인식할 수 있도록 두 개의 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는 ‘이성’ 즉 ‘자연적 형상’이었고, 또 하나는 ‘신앙’ 곧 ‘도덕적 형상’ 혹은 ‘초자연적 형상’이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도덕적 형상, 즉 초자연적 형상이 철저하게 궤멸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서 자연적 형상도 상당부분이 파괴되어 버렸다.

 

 

3. 아직까지 남아있는 하나님 형상

 

‘자연적 형상’을 활용해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해내신 그 창조 속에 깃든 법칙들을 찾아서 일구어낸 업적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과학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법칙들을 찾아가면서 과학들을 일구고 이처럼 문명과 문화를 일구어 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도덕적 형상”,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관계된 부분이 완전히 궤멸되어버렸다. 더욱이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 하고 더듬거리면서 찾아가다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질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도덕적 형상, 즉 ‘초자연적 형상’이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인간의 참 모습이다. 이렇게 도덕적 형상은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넓은 의미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모든 인간들이다.

 

4. 불신자를 사랑으로 섬겨야 할 이유

 

 

여기에서 사랑의 원리를 적용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인도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아니다. 절망적인 죄인도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비록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대하듯 우리의 이웃을 향한 태도는 곧 영이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일치한다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게 되면,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갖게 된다. 기독교의 가르침의 핵심은 그런 사랑을 경험한 후, 비참한 인간들 속에 있는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구원 받아서 회복하도록 희생하면서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한다.

 

 

Ⅲ. 성경에 계시된 언약에 대하여

1. 죄와 언약의 대한 이해

죄가 그토록 심각한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깨졌다는 것이다. 유추하면 관계가 깨졌다는 것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의무를 위반해서 관계가 깨졌다는 것은 이미 관계가 세워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거기로부터 의무가 주어졌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고, 언약의 관계를 유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언약을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언약’이라는 말은 히브리말의 ‘베리트’라 말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희랍어에서는 ‘디아데케’라는 말을 옮긴 것인데, 우리말에는 사실 정확한 번역이 없다. ‘베리트’, 그리고 ‘디아데케’라고 하는 두 단어를 번역할 때 ‘계약’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한다. 계약은 너무 세속적인 것 같아서 언약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쌍방의 약속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계약의 형태를 가진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타락하게 되었고, 타락한 인간이 죄로 심각해진 것을 버려두지 않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당사자가 되어서 언약을 세우셨다. 우리와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우신 인간의 언약은 3가지 계약의 성격을 띠며, 모두 구원관 관련이 있다.

 

 

2. 성경의 언약제도 배경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시를 전달하실 때 그 시대의 문화를 사용하여 전할 때 사람들이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창세기가 쓰여 지던 당시에 특히 주전 15세기 경에 중근동 지방에는 어려운 말로 ‘벳셀트리티’라고 하는 말이 이었다. 이 ‘벳셀’이라고 하는 것은 ‘봉신(封臣)’을 의미하고, ‘트리티’는 ‘조약(條約)’을 의미하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큰 나라의 왕이 그 나라를 자기가 다 다스릴 수 없으니까 조그맣게 쪼개어서 맡겨둔 각 성의 성주와 이 두 사람 사이에 맺는 계약이다.

 

➊ 고대근동의 관습 : 계약은 대게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첫째는 역사적 서원이다. 약속을 쭉 하고 마지막에 이 약속을 지킬 것을 약속한다. 둘 중에 누가 이 약속을 어길 때에는 ‘천지신명의 저주가 있을 것이니라.’ 그렇게 해놓고는 커다란 짐승을 쪼개 놓는다. 그때 많은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 큰 나라 황제와 이제 성을 다스리게 된 작은 왕이 함께 약속된 계약서를 가지고 피를 밟으면서 그 짐승 사이를 지나간다.

 

➋ 구약 성경의 기록(창15:9-17) :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를 선택해서 이제 열국의 아비로 삼고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고 내가 너를 복주고 복주리라’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이 그것에 대해서 믿었다고 했지만 얼마나 믿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간다. 탁월한 신이라는 인식을 갖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진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보고 짐승을 잡으라고 해놓고, 하나님이 불로 임하셔서 쪼갠 그 짐승 사이를 지나갔다. 이것이 결국 언약은 언약인데 죽기까지 준수해야 되는 맹약이다. 그래서 만약에 그 언약을 어기면 죽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 혹은 계약이라고 것이며 성경에 나온 언약사상을 이루고 있다.

 

3. 언약의 종류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언약에는 하나님,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를 대표로 하는 인간과 함께 맺는 세 가지 종류의 언약이 있다.

 

➊ 행위 언약 : 첫 번째는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행위를 담보로 했다고 해서 ‘행위언약’이다. 이 행위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안 먹으면 내가 계속 너희가 영생을 누리게 만들어주고 만약에 먹으면 너희는 정녕 죽이리라’ 하는 것이었다. 그때 당사자는 하나님과 아담이었다. 그런데 그 언약이 깨트려진 것이다. 그 결과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➋ 구속 언약 : 인간의 범죄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복원이 없이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회복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시 두 가지 언약이 나오는데, 그 하나가 ‘구속언약’이다. 이것은 슥6:13절에서 “평화의 의논”이라는 대목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논의였다. 이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다시 평화롭게 만드는 것에 대한 의논이다. 그 의논이 언약을 가져왔다. ○ 성부 하나님이 성자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그를 사람의 몸을 입혀 성령으로 잉태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 함께 하시고, 죽으시면 그를 다시 살려내셔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만드시는 것이었다. ○ 그리고 예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었고 인생의 고통을 다 당하시고 율법아래 복종하시고 그리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다. 성자인 네가 그렇게 하면 성부인 내가 저들과의 깨어진 관계를 고치고 그래서 다시 ‘저들과 화평한 관계를 맺고 인간의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다’고 하는 계약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구속언약을 따라 이행하셨던 것이다.

 

❸ 은혜 언약 :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언약이 ‘은혜언약’이다. 이것은 당사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다. 이 언약을 ‘은혜언약’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처음 아담언약과 대칭해서 부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행위언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 행위를 담보로 하였지만, 은혜언약은 행위를 담보로 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은혜언약’이라고 부른다.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죄를 넘어가 주시는 특별한 호의를 베푸시는 일환으로서 은혜언약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4. 은혜언약의 약속과 요구

 

‘은혜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를 머리로 하는 선택된 백성들이다. 그러데 우리도 그 ‘은혜언약’의 당사자가 된 것이다.

 

 

1) 은혜언약에 담긴 약속

 

은혜언약은 첫째로 약속은 렘31:33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 약속이 성경 66권 전체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것을 옛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구약(옛 언약)이고,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신약(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요3:16절이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고 불리는 것도,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 약속의 실현과정에서 나타나는 작은 약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서 죽음이라는 광범위한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그 상태는 실로 절망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다시 그들과의 언약을 복구하시고 회복하시기 위해서는 그의 백성들이 그 언약이 있다는 사실과 그 언약의 내용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어야 했다. 그들을 택하여 영적인 한 공동체로 발전시키시고 그렇게 해서 발전된 것이 바로 “교회”이다.

 

2) 은혜언약의 요구

 

은혜의 계약적 성격을 띤 언약이었기 때문에 은혜언약에서 요구되는 ‘행위’는 없다. 하나님이 선도적으로 그 계약을 주도하시고, 그 아름다운 은혜언약을 적용하시는 것이 이 언약의 특성이었다. 이 때 은혜언약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과 순종이다.

 

➊ 믿음 : 첫째는 “믿음”이다. 언약과 언약의 내용을 믿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언약의 요구였다.

➋ 순종 다음으로는 ‘순종’이다. 순종은 무엇인가 하면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것이 순종이다.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순종하면서 살도록 부르신 것이다. 원리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죄 가운데 살던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켜 순종할 수 있도록 그의 영혼에 상태를 놀랍게 바꾸어놓으신 것이다. 그에게 새 생명을 심으시고 하나님을 적대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본성이 단숨에 거듭남으로 깨트리시고, 그 속에 거룩한 성품을 심으셨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타락하기 전에 아담처럼 살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속에 넣어주신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하나님이 거룩한 성품을 우세한 성품을 넣어주셔서 순종하면서 살도록 하셨다. 그러데 여전히 그는 타락하기 전, 아담과 같이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여전히 “잔존하는 부패한 성품”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거듭난 신자에게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신다.(단지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는 사실을 함께 이해되어야 할 대목임)

 

Ⅳ.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1. 신자는 항상 의로우며 동시에 부패성이 본서에 잔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은 항상 의롭지만, 동시에 항상 죄가 있다. 거듭난 신자는 “항상 의로우나 항상 죄가 남아 있는 그런 존재다.”(Always just and a always sinful.) 마르틴 루터는 이를 “의로운 동시에 또한 죄인인, 죄가 남아 있는, 그것이 인간의 참 모습이다.”라고 했다.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형상을 회복시키시지만, 그 형상은 계속해서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더더욱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계속 씻기고 더 찬란하게 빛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빛나면 빛날수록 원래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셨던 인간의 그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속죄의 내용 :희생, 유화, 화목, 구속

 

그러면 하나님이 원래의 인간의 상태로 돌이키기 위해서 어떻게 하셔야 했는가? 그러기 위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의 고통이 문제나 죽음도 문제 아니라, 죄가 문제다. 그래서 ‘속죄’가 필요하다. 속죄는 본질적으로 네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희생’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유화’라는 말이다. 이것은 용서하고 부드럽게 한다는 좋은 의미의 뜻이다. 세 번째가 ‘화목’이다. 네 번째가 ‘구속’이라는 것이다. 네 가지가 속죄의 본질적 의미이다.

 

1) 그리스도의 희생

 

“희생”이라는 말은 영어로 “sacrifice”인데, ‘제사’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제사 자체가 희생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희생”이라는 의미는? 자기가 죄를 지어서 거기에 정당한 벌을 받는 것이 희생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했는데 그것을 뒤집어쓰고, 자기가 대신 고통을 당하거나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는 것이다. 죄를 지었을 때, 제사장이 짐승에게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죄가 이 짐승에게 옮겨가는 것이며, 그때에 그 짐승은 죽임을 당하고 피가 낭자하게 흘리며 죽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있는 죄의 값을 잠시 동안이라도 그 짐승이 치른 것으로 쳐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좀 어려운 말로 ‘속상(贖償)’이라고 한다. ‘속’은 ‘속한다.’는 ‘속’자고 ‘상’은 ‘보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짐승이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음으로 벌 받을 형벌에서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이다. 히9:11-12절에서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 제도의 핵심은 “죄의 전가”이다. 죄를 지은 사람이 따로 있고 형벌 받는 제물이 따로 있다. 그 제물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 그래서 그 진노를 받고 죄를 모르는 짐승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 해택은 죄를 지은 인간이 받는 것이 제사제도의 핵심이다.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독특하게 오셨다. 자신의 몸을 직접 가지고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하시는 대제사장인 동시에 제물이신 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참 하나님 되심”(신성 神性))을 “참 사람 되심”(인성 人性) 밑에 깊이 감추시고, 종의 형상을 갖고, 이 땅에 오셨고 때가 되매 우리를 위해 대속의 제물로 죽으신 것이다. 그 희생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2)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과로써 “유화”

 

➊ 유화 : “죄를 덮는다.”는 뜻

 

죄를 덮는다고 하는 것은 죄를 없앤다는 말과는 다르다. 죄가 이렇게 붉은 색인데 하얀 것을 덮어서 빨간 것이 아닌 것처럼 만들어 준다는 것, 이것이 바로 죄를 덮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유화’가 의미하는 첫 번째 성격이다. 죄가 있으면 반드시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따라오니까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다. 죄에 대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진노는 단순한 복수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반응이다. 그게 진노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을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은 일관되시다.

죄를 덮을 때 효과는 정결해지는 것과 용서받는 것이다. 내용적으로 정결해진 것이 아니라 덮었으니까 하나님이 정결한 사람으로 여겨 주시고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유화의 일, 즉 죄를 덮는 일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그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 그 자체가 하나님을 대항한 절대 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덮여진 것이다.그것이 유화의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여전히 죄가 남아있는 것이다.

 

➋ 유화 : “마음을 풀어준다”는 뜻

 

두 번째는 이 유화에는 마음을 풀어준다는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마음이 확 풀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유화’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물론 인간을 사랑하고 계셨지만 분명히 인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이것이 아직 풀어지지 않았는데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었지만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대신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그 죄의 형벌을 제가 받겠습니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고난당하신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의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으면서 마음을 푸는 것이다. 이게 ‘유화’이다.

 

3)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과로써 “화목”

➊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불화의 상태 : 적대와 거리감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괴되어 관계가 깨트려진데서 오는 불화였다. 범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된 것이다. 예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깨트려졌을 때 불화한 관계가 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변화된 관계의 성질은 ‘적대(敵對)’와 ‘거리감’으로 변했다.

 

➋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화목의 효과

 

첫 번째 견해로, 하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불화로 말미암아 적대감과 거리감을 두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장렬하게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던 우리의 무한한 거리감을 좁히고 아버지께로 가게 되었다는 이것이 첫 번째 견해다.두 번째 견해로,첫 번째 견해와 정 반대로 하나님 마음이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적대감과 거리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해소시켜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마음을 푸시고, 적대감을 해소하시고, 거리감을 좁히시고 어찌할 수 없는 인간에게 오셨다는 견해다. 결국 성경은 후자의 견해를 인정한다. 어떻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거룩함에서 오는 적대감을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대신 고난을 당하셔서 해소시키셨고 거리감도 풀어주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이 ‘속죄’의 세 번째 요소인 화목이다.

 

4)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과로써, “구속”

 

‘구속’이라고 하는 말은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노예제도 하에서는 사람들이 노예를 짐승처럼 돈을 주고 사고팔았다. 노예를 대신 값을 주고 사서 자유하게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구속’이라고 하는데 그때 지불했던 돈을 ‘속전’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속전’이라고 부른 것이다. 죄 때문에 우리들이 마귀에게 팔린 사람들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셨다.

 

➊ 구속의 3가지 성격

 

첫째,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려고 했던 사역의 목표가 바로 이 “속량”이었다. 또한 우리를 속량하는, 둘째는 대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이런 철저한 계획 속에서 비참한 노예처럼 죄에 매여 사는 우리를 구해내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속전으로 지불하셨다. 셋째로, 그것은 대리적인 것이다. 우리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해 주신 것이다. 죄는 지었지만, 죄의 대가를 하나님 앞에 지불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➋ 무엇으로부터의 구속이었는가? ; 율법과 죄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구속인가? 하나는 율법으로부터 이고, 또 하나는 죄로부터의 구속이다.

 

a. 율법으로부터 구속(3가지 면)

: 첫째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구속(갈3:13)이다. :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해 낸 것이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고, 그래서 형벌을 받게 된 상태였다. 그 결과 우리는 둘째로, 각종 “의식적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셨다.(갈4:5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모든 의식 법으로부터 우리들이 완전히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셋째로, 행위의 율법으로부터 우리가 구속함을 얻은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조건으로서 율법의 의무를 준행하면서 살아야 할 그 책임이 사라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롬5:9)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말한다.

 

b. 죄로부터의 구속(2가지 면)

: 죄로부터 구속하셨다고 할 때,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신분상태’로부터, 또 하나는‘내적효과’로부터 구속이다. 첫째, 우리는 “신분” 자체가 죄인이었다. 죄를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던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었고, 죄를 좋아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죄인의 신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제 신분적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내셨다. 둘째, “내적효과’ 면에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속이다. 우리가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다 했더라도, 도저히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 내면의 세계가 죄의 원리에 철저히 얽매어 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의 소원대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거듭남을 통해서 우리의 사슬을 모두 풀어주어서 이제는 죄가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 성령의 법에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이제는 믿고 순종하며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면 이 마음에 얽매인 사슬들을 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

 

그러면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위에서 말한 대로, 속죄의 본질이 그렇다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반드시 그 속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 통로가 존재한다. (1)하나는 한시적인 통로이고, (2)또 하나는 영원한 통로다.

 

 

1. 한시적 통로 : 제사를 통해

 

한시적인 통로는 구약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제사가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제사의 제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구체화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단순했지만 나중에는 제사가 점점 복잡하고 구체적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속죄 주에 대한 계시를 담게 되었다. 언제부터 이 제사가 주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즉시 제사 제도가 주어졌다고 본다. 하나님이 완전히 그 인간들을 폐기처분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교통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제사라는 제도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제사를 통해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이다.

 

○ 제사의 3가지 요소

 

: 짐승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3가지 요소가 있어야 했는데 첫째는 ‘순종’의 요소였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규례대로 제사를 드려야 했다. 두 번째는 ‘믿음’의 요소다. 제사에 믿음으로 참여해야 되는데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 것과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는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다. 세 번째는 ‘희생’이 필요했다. 그것은 곧 제물이 죽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짐승의 죽음은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 했다.

 

2. 영원한 방편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원한 방편이 있는데 그것은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방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이신 동시에 희생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사를 드리신 것이다. 당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서 당신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면서 당신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과 범죄 한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했다. 즉 아담이 지은 죄를 대속해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는 죄 없는 상태의 아담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물을 바칠 때에는 흠 있는 제물은 절대로 받지 않으시고 흠이 없는 제물만 받으신 것이 바로 이런 의도에서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 했다. 그런데 완전히 하나님이시기만 했다면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기 때문에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셨다.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죽음은 일시적인 효과밖에 가져올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죄가 없으셨고 인간으로서 흠 없는 제물이 되셨다. 때문에 그분의 속죄의 효과는 완벽하고 영원하고 최종적인 효과를 가져 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속죄의 필요성

 

그런데 문제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1) 가설적 필요론

 

: 하나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속죄하시기 위해서는 꼭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실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왠지 모르지만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아멘 할 따름이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이것이 ‘가설적 필요론’이다.(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그러나 개신교 신앙에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냈다고 하는 사상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구절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2) 결과적(절대적) 필요론

 

: 또 다른 의견은 성경적인 견해인데,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셨지만 그렇게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하면 안 된다. 능력이 없어서 안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있고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대표적인 성품이 거룩한 공의의 성품과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성품이다. 인간이 범죄 했을 때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성품은 저희를 용서해주고 구원해주라는 것이다. 거룩의 성품은, 아무렇게나 하실 수가 없게 하신 성품이다. 그래서 하신 것이 자기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사람대신 형벌을 받게 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공의를 만족 시켜드리고 또 한편으로는 죄지은 인간들이 공로 없이 용서받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만족시켜드린 것이다.

 

결론과 적용

 

결국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져온 놀라운 사실은 이제 우리가 옛 언약인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새 언약 아래로 부르셔서 ‘믿음’을 통하여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거룩한 적대감과 거리감을 완전히 버리시고, 하나님이 먼저 이 더러운 인간에게 다가오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죽게 하심으로써 이 모든 적대감과 거리감을 파하셨다. 무너진 죄악의 담장 위에서 우리와 같이 아무 쓸모없이 죄를 지었지만, 그 자신이 홀로 죄에서 헤어날 수도 없고, 주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망가트렸지만, 그것을 복구할 수도 없는 이 더러운 죄인들에게 다가오셔서 뜨겁게 끌어안으시고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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