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3

하나님아들 2022. 7. 6. 23:41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3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5

 

들어가는 말

 

오늘의 주제는 왜 예수님이 오셨는가? 라는 주제다. 특별히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리고 "부활 사건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구원의 근거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피려고 한다.

Ⅰ. 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가?

 

1. 불트만의 비신화화(Bultman, Rudolf Karl 1884-1976)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예수님이 글로서 자신의 존재나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남겨놓으신 기록이 없다. 복음서가 쓰여 진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25년 내지 30년 후에 쓰여 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의 신빙성 문제로 “진짜 정확하게 예수님에 관해서 기록을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려고 했는데 그리고 그런 기록들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 성경의 기록은 정말 믿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참된 신앙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성경의 기록은 예수님의 원래의 모습을 그렸다기보다는 초대교회 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은 이랬으면 좋겠다고 그려낸 것이 성경이라고 주장했다. 그 기록을 보아서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존재했던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아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그것을 규명할 수도 없다는 주장을 폈다. 여기에 예수님이 이런 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려놓았는데 거기에서 그들의 간절한 소망 때문에 덧입혀진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다 걷어버리면 남은 기록들이 있을 텐데 그것들이 어쩌면(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역사적으로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그런 남은 부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비신화화 작업"이라고 한다. (그런 주장이 자유주의 신학계에서 활발히 전개되어 성경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서의 가르침을 불신하면서, 예수를 각각 자신들이 펼치고자 했던 가치관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 냈다. 결국 유대인의 왜곡된 메시아관으로 회귀한 것이다.)

 

2. 복음서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주장

 

제자들이 분명히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을 경험을 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메시아이셨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서 이제 그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기 시작했고 자기들만 믿을 수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파한 기록이 사도행전 이후에 교회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 된다. 그렇게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들에게는 예수님과 나누었던 교제의 희미한 흔적을 더듬으면서 그 예수님을 우리들이 경험한 예수님 이상의 어떤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려낸 예수님에 관한 그림이 바로 복음서라고, (자유주의 신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최소한 당신의 죄때문에 죽지 않았겠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이 참되었다는 사실과 보여주신 표적들이 참된 메시아로서 행하셨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주님의 부활과 함께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왜 주님이 죽으셔야 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의 핵심은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장 45절이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던 것임을 깨달은 것이며,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행적들을 생각나게 하신 성령님께서 감동감화케 하심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던 것이다. 이게 바른 복음서의 이해다.>

 

 

Ⅱ. 메시아사상

1. 유대인에게 전수된 왜곡된 메시아사상

 

a. 뛰어난 영적 존재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할 때 메시아라는 개념은 구약성경이 기록되고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 까지 약 4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데 그 때에도 메시아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발전을 해왔다. 즉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사상이었다.

 

‘크리스투스’(기름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세 부류의 인물들에게 주어졌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었다. 여기에서 메시아라고 하는 그 사상은 단순히 왕이나 선지자나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존재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해서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을 메시아라고 생각하며 믿게 되었다.

 

b. 부활사상이 없는 유대인의 메시아 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 메시아라고 하는 사상 속에 ‘메시아의 죽음’은 이야기 하지만 ‘부활의 사상’이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메시아가 뛰어난 존재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었다. ‘부활’에 대해서는 유대인의 사상 가운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그 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으로서의 그 사상에는 메시아가 부활한다는 게 없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부활하셨구나!’ 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트만의 주장은 옳지 않다.

 

2. 구약과 유대인의 메시아사상 차이점

 

a. 신약에서의 메시아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는 철저히 자신들의 민족인 이스라엘과만 관계가 있는 메시아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스라엘과만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필요 없고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이방 여인에게까지 은혜를 베푸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구원의 은혜가 민족을 초월하고 이스라엘 밖에까지 전파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b. 그 시대의 아들들

 

그런데 예수님이 단순히 부활하셨다는 사실만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그렇게 확신해서 그 신앙이 생겼을 것이라고 하는 그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신 적그리스도와 투쟁, 그리고 부활, 그리고 마지막 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 하나님의 심판주로 오시는 그 예수님의 심판 주 되심,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의 당시 사상에 의하면 메시아의 일이 아니라 메시아보다도 훨씬 뛰어난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시대에 태어나서 아직까지도 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명료한 이해를 못 가졌을 때에 그는 그 시대에 태어난 그 시대의 아들들이었다. 볼트만의 주장대로 그분의 부활의 사건 하나를 보고 메시아로 이렇게 믿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믿게 해주는 뭔가 근거가 있어야한다. 그것이 곧 주님 자신의 가르침이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 그 자체이다.

 

c. 극단적 유대주의

 

시대적인 배경이 유대 나라가 로마라고 하는 초강대국에 모두 점령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짓밟혀서 억압을 받고 있고 황제를 섬기라고 강요했다. 율법이 그야말로 법적 구속력이 없는 순수하게 신앙에 호소하는 문서가 되어버렸다. 유대인들이 로마 치하에서 밟혀 산다는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굉장히 불편한 것이었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선민의식이라고 하는 선택된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선택된 백성들이 이 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은 성경 전체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엄청난 부끄러움이었다. 그런 시대의 상황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 성경적인 사상이 뒤틀리기 시작하면서 아주 극단적인 유대민족주의로 발전을 한다.

 

d.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아관의 한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 바로 그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그리고 그들이 꿈에도 그리워하는 역사상의 화려한 나라가 있었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 영토가 최고로 넓었고 주위에 있는 작은 나라들은 전부다 다 다윗의 왕국에 복속되어서 그렇게 신하처럼 섬기면서 조공을 매년 바쳐오는 그런 영광스러운 왕권을 누렸다. 그 나라가 바로 진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영원히 이루고 싶으셨던 나라였다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 성경에서 그려내는 공정한 메시아 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자기들의 소망으로 성경이 그려내는 메시아사상에 덧칠을 한 것이다. (성경을 보는 오류의 예-오병이어의 사건 뒤 일어난 임금 삼으려는 군중,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께 대한 태도의 동기)예수님의 생애를 보면서도 그 예수님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라고는 판이한 인생을 사시다가 가신 분이기 때문에 부활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3.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케 한 이유

 

a. 시대의 잘못된 신앙지식 때문

 

그것은 부활하신 사실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주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강력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이 지상생애에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었다. 하나님의 교훈으로 믿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에게 그분이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평생에 가르치셨던 가르침이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이다. 왜 그러느냐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듣는 순간,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사고의 틀에는 맞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 예로 ‘우물가의 여인이야기’ ‘니고데모의 이야기’등등 그렇게 몰랐던 이유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은 분명했는데 이 속에 들어있는 것들이 성경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그 시대에 잘못된 신앙지식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이것들이 비칠 때 도저히 그것을 해석해서 정확하게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하고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b. 부활의 경험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셨다. 가르침도 잘 이해를 못했는데 돌아가셨다. 그런데다가 자기들은 예수와 함께 한 사람이었는데 아무 것도 주시고 간 것도 없고, 뭘 해야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은 사실은 구약에서도 별로 들어 본적이 없었다. 자신들 시대에는 기적이라는 게 가끔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같은 것은 본 일이 없었다. 그 부활의 모습을 보는데 아무리 눈을 비비고 예수님을 만져 봐도 확실히 부활이었다. 결론은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과 그분이 옳은 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가르친 게 참된 것이었다고 확신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부활 사건을 계기로 역 추적해간 것이다. 결국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확신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확신하게 되고 예수를 역으로 그려내어 주님의 어록이나 사건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한다.

<이렇게 되어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최소한 당신의 죄때문에 죽지 않았겠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이 참되었다는 사실과 보여주신 표적들이 참된 메시아로서 행하셨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주님의 부활과 함께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왜 주님이 죽으셔야 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의 핵심은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장 45절이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던 것임을 깨달은 것이며,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행적들을 생각나게 하신 성령님께서 감동감화케 하심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던 것이다. 이게 바른 복음서의 이해다.>

 

Ⅲ.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려주셨는가?

1.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들에게 어떤 분이라고 알려주셨는가?

a. 인자(人子)라는 용어의 배경(다니엘7:13)

 

예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준 가장 명료한 단 하나의 성경구절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오,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킬 때에는 항상 무슨 표현을 썼느냐하면 ‘인자’라고 항상 표현하였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에게는 다른 호칭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지칭하실 때는 “사람의 아들”(a son of man)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정관사를 써서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의 다니엘서와 이사야서에 대한 이해의 빛을 받지 않고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다.

 

다니엘서 7장13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이상 중에 다니엘이 보았는데 “인자 같은 분”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다니엘서 7장13절에 “인자 같은 이” 라는 애매한 표현이 나온다. 그 인자와 같은 이라는 것이 여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서에도 나오고 또 시편 8편에도 나오고 구약에 여러 군데 흩어져서 인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안 나온다. 다만 무엇을 알 수 있는가하면 “그 인자”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인자”라고 소개할 때, 그냥 “인자”라고 소개하지 않고 정관사를 붙여서 “그 인자”라고 소개를 해주신 것이다. 이것은 구약이 애매하게 ‘사람의 아들’로 명시했던 많은 ‘그 사람의 아들’이 바로 주님 자신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그 인자”라고 표현하셨던 것이다.

 

b. 이사야 53장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

 

이사야 53장에서는 목숨을 버리는 이야기는 안 나온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유명한 메시아의 고난의 장이 53장에 나온다. 거기에서 나오는 그 고난 받는 메시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다. 메시아가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내야 되는데 자기가 그렇게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으면서 끌려 다녀서 그렇게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을 읽을 때 사람들은 크게 혼돈이 생겼다. 그래서 그렇게 성경의 토씨하나 바뀌기 싫어하는 사람(유대인)들이 뭐라고 읽는가 하면 “그는” 이라고 된 것을 살짝 바꾸어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우리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오, 그러면서 ”우리“라고 바꿔서 읽어서 그것이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고난 받는 자기의 민족의 한탄이라고 그렇게 읽어가는 것이다.

c. 인자의 의미

 

다니엘 7장 13절과 에스겔서나 시편 8편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어떤 인자가 있고 이사야 53장에서 자기가 고난을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는 인자가 나오는데 바로 그 인자가 누구인지를 구약에서는 명확하게 표현을 안 했지만 그 인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첫째는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름을 타고 온다고 그럴 때는 신적인 존재이다. 올라가실 때도 구름을 타고 올라가시는 장면이 나온다.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주어진다. 그게 결국은 예수님이 신적인 존재,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2. 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표현하지 않으셨는가?

 

a. 삼하 7:12-13절

 

사무엘하 7장을 우리들이 이해해야 된다. 12절 1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위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이 다윗을 축복하시면서 이 후에 이어질 다윗의 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이것이 지역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나라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고 우주적으로는 이제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만들고 왕이 되심으로서 그 위상이 영원까지 계속될 예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처저히 '육적인 이스라엘'로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b. ‘하나님의 아들’ 사상, 삼하7:13절 중심으로

 

이 사무엘하 7장 12절과 13절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전통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이것을 순수하게 육적으로만 이해를 해서 다윗의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의 나라를 온갖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기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준다. 또한 정치를 잘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해주는 용사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 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상이 그 당시에 있던 ‘하나님의 아들’의 사상이다.

그들이 구약에서 쭉 알고 있었던 그 하나님의 아들, 사무엘하 7장 12절 13절 이하서부터 약속되어서 전통적으로 수립된 그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큰 지도자가 되어서 무력과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수많은 나라를 창칼로 복속시켜서 그들을 무릎 꿇게 만들고 조공을 바쳐오게 하는 다윗 시대의 영광을 제현 할 그 하나님의 아들, 그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이렇게 하면 즉각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사상, 하나님의 아들 사상에다가 예수님을 꿰어 맞추려고 할 것이다. (자신들의 메시아관이나 하나님 아들 사상은 철저히 유대주의, 시온주의 사상에 얽매여 있었던 것이다.)

3. 왜 “인자”라는 표현을 쓰셨는가?

 

그러면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야. 그러면 이 분을 또 믿을 수가 없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데 어떻게 구원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그 인자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내가 그 인자다.’ 이정도만 하면 내가 누군지 알겠지. 그게 마음속에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먹혀들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인자"다. 이렇게 표현을 하신 것이다. 인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당신이 분명히 신적인 존재다. 하나님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렇게 나라나 부강하게 하고 이스라엘을 잘 먹여 살리는 뛰어난 정치가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소개 하실 때마다 "그 인자"라고 하셨던 것이다. 자신을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면 유대인들의 왜곡된 사상에 혼돈과 오해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Ⅳ.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조성

 

1. 언약관계

 

a. 율법수여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의 그 아들들이라고 불려졌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 언약관계는 모세를 대표자로 해서 맺은 그 율법으로 맺은 언약관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서 제일먼저 시내 산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때에 율법을 거기에서 받는다.

 

b. 피 뿌림의 의미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시니까 그 율법을 받으면서 율법을 모세가 낭독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멘‘ ’아멘” 했는데 아멘 하기 전에 거기 피를 뿌리는 일이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 피는 죽음을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피를 뿌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죽도록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죽음을 당해도 좋습니다. 라고 하는 죽음까지 내건 맹세가 바로 이 언약의 피를 뿌리고 ‘아멘’ ‘아멘’ 하는 것이었다.

 

 

c. 이스라엘의 언약의 파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후로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했으면 좋을 텐데 불순종했다. 그것도 현저하게 불순종해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당신의 선지자들을 보냈다. 그렇게 살면 안 되고 ‘하나님의 법’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외쳤다. 그들은 그 선지자들의 피어린 외침을 비웃기나 하듯이 더 악을 행했다. 결국 하나님이 이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망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포로로 끌려간 것이다. 그것이 북 왕국 이스라엘은 722년의 일이고 남 왕국 유다는 586년의 일이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나라를 잃어버렸다. 그 시기를 지나면서 바벨론과 메데, 바사, 희랍을 거쳐서 그래서 로마에까지 계속해서 나라와 나라를 이어가면서 계속 속국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었다.

 

d.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은 이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하시고 새로운 영적인 이스라엘을 만드실 것을 작정하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 때 대표자가 바로 '그 인자'가 대표자가 되는 것이다. 모세가 자기의 백성들을 다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언약을 받았던 것처럼 이 ‘인자’가 그 자기로 말미암아 만들어지게 될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물론 그 속에는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믿는 사람이 들어오지만 이제는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상은 이미 출애굽기 32장 10절에도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범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보고 말씀하시기를 나 좀 내버려두라. 이 백성들을 내가 다 정리하겠다. 그리고 너를 조상으로 해서 새 민족을 만들겠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미 벌써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하면 어느 순간에 그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쓸어버리고 거기에서 인자라고 부르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육적 이스라엘 혈통에 속한 이스라엘이 아닌 메시아를 믿는 믿음으로 영적으로 하나 되는 민족과 혈통에 얽매이지 아니하는 신앙으로 새 언약 속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모두 묶어서 영적 이스라엘로 만들고자 하는 소원이 하나님에게 벌써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우리들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2. 새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a. 대속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던 그 잘못된 메시아사상은 창칼을 가지고 주변의 나라를 정복함으로서 그래서 세워지는 나라였는데 이 새 이스라엘은 그렇게 된 나라가 아니다. 그 ‘인자’라는 분이 오셔서 그 백성들이 될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고난을 받고 형벌을 받고 죽음으로서 ‘그 백성들의 머리’가 되셔서 그들을 그 죽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들어오게 만들어 ‘새 백성’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무리들을 보시면서 그들을 다 당신에게로 이끌어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셨다. 그 소원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의 죄를 위해서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 이 세상에 등장하셨을 때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당신이 이제 역사 속에 나타나신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인자인 자기를 통해서 구원받은 무리들이 막 생겨나도록 만드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b.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의 의미는?

 

당신이 오셨다는 것은 사탄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있는 세상에 그 죄와는 관계없는 한분이 나타나신 것이다. 이 분이 말씀을 선포하고 그분이 자기가 메시아라고 하는 신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면 이제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 이후에 고난을 받고 죽으신 다음에 성령이 임하면 강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텐데, 그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 나라는 이제 절대로 죽음이 지배할 수 없고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죄와 사망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 사단의 세력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나타나고 그 왕국이 완전히 궤멸되어버리고 이제는 패잔병들이 여기저기 도망 다니는 그런 아주 창조의 버금가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암시하시는 것이다. 심지어는 너희 가운데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까지 말씀하셨던 것이다.

 

 

Ⅴ. 십자가 사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나라

 

a. 방법

 

예수님이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외치셨는데 결국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백성들이 있어야 했다. 나라가 있기 위해서는 영토와 주권과 국민이 있어야 된다. 주권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고 영토는 이 땅이지만 국민은 이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새 백성들을 만드는 방법들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사람들을 모으시는 방법은 그들의 죄가 문제였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서 이 백성들을 모아야지만 이제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b. 대속: 십자가에 죽으심

 

그 죄가 이미 실질적으로 사망이라고 하는 무기를 가지고 죄의 병균을 많은 사람들에게 퍼트렸다. 그 손아귀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슬을 끊지 않고는 도저히 사람들을 구속해서 자유로운 사람, 그래서 처음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들을 창조하셨을 때에 사람이라면 참 이런 존재가 되고 내가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이런 사람으로서 내가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을 관리하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꿈꾸시던 기대를 따라서 살 능력도 없고 살 수도 없을 정도로 타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모종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는 그 백성들을 만드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백성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시는 대속이다. 그 대속하시는 방법, 죽으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사상’은 창과 칼을 들고 나라를 강력하게 만듦으로 메시아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지만 진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메시아는 그게 아니라 찔림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그 백성들의 죄를 지고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씨들을 모두 모아서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들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짊어 죽음으로서 형벌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된 새 이스라엘 영적 백성들 속에는 그 죄가 주관하지 못하도록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c. 유월절의 의미

 

유월절은 바로 구약으로 넘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포로 생활을 할 때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나는데 아홉 가지 재앙이 일어났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가 놓아주지 않았다. 마지막 재앙이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는데 그때 장자뿐만 아니라 처음 난 것은 짐승의 새끼까지도 다 죽였다. 이스라엘 백성도 예외가 아니라 사실은 다 죽어야 했다.(죽음의 보편성을 의미)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죽음이 건너뛰어넘게 하셨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유월절이다. 그때 죽은 어린양이 사실은 예수님이 되는 것이 맞다. 그러니까 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유월절에 안 죽이려고 했어도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에 돌아가시게 하는 것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아귀가 딱 맞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월절에 죽으셨다.

 

2. 십자가의 죽음

 

a.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 이유 두 가지

 

하나는 당신의 죽음이 유월절 사건의 성취라는 것을 보여줌으로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육적 이스라엘을 깨트리시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형성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명료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택하신 것이다. 또 하나는 실제적인 이유인데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 앞에 인간들이 모두 지은 그 죄, 선택될 백성들이 짓는 그 모든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서 그 죄에 대해서 형벌을 받는 순간이다.

 

b.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담긴 십자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있는 그 동안에는 하나님의 눈에 아들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진 재물로 보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공의의 성품을 따라서 그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서 죄를 짊어진 당신의 아들을 심판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형벌은 인간이 고안해낸 사람을 죽이는 방법 가운데 가장 잔혹한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죽음은 생명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통을 느끼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끔찍한 고통이다. 그래서 못을 박고 그 다음에 매달렸는데 온 몸이 늘어지면서 못에 길게 늘어지면서 이 살이 계속 찢어지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못이 점점 안쪽으로 들어와서 팔목에 박히게 된다. 팔목에 박으면 동맥을 건드리지 않으면 박을 수가 없다. 동맥이 터진다. 터지면 동맥에서 피가 출혈이 되고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두통과, 그리고 견디기 힘든 갈증이 온다. 그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예수님도 6시간이나 매달려 계셨다. 그 방법을 예수님께서 택하신 것이다.

 

 

Ⅵ. 새로운 복음의 빛

 

1. 유대인들이 계속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네가 그리스도인가?’ ‘네가 메시아인가?’ 그것을 묻고 싶었던 것이다. 메시아는 메시아인데 저들의 머리에 있는 그 메시아는 완전히 아니다. 그래. 나 메시아다. 그런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메시아하고는 틀리다. 그렇게 부분적으로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게 놓고 이야기하면 그 설명을 사람들이 다 들어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들이 의도하고 싶었던 것은 메시아에 대한 새 개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나는 메시아다.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러면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는 왕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통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온 왕이라는 것이다.

 

 

2. 유대인의 두 가지 간계(奸計)

 

a. 정치적 반역자로 몰아감

그들은 메시아는 나사렛에서 난 저 젊은이가 구약에서 그렇게 꿈에도 그리고 있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는 그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는 정치적인 그 훌륭한 용사로서의 그 구원자일 수가 없다고 믿었다. 아울러 자기들의 종교적인 체계를 자꾸 허물어트리고 아무리 봐도 가르치기는 가르치는데 우리가 가르치는 것하고 연관선상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귀찮은 존재라서 없애버려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없애버리는가? 백성들은 그를 선지자나 메시아로 보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자신이 메시아라고 그러면 왕이라고 그러는 것이다. 로마의 대한 반역자로 몰아서 죽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b. 나무에 달아 죽게 함

 

그래서 생각한 게 무엇인가하면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것이다. 나무에 달아 죽인 자는 신명기 21:23절에 의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다. 그러면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성취한다. 하나는 골치 아픈 그의 존재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를 따르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저주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하여 따르던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서게 하는 것이 그 유대인들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 십자가를 택했던 것이다.

 

3. 유대인들의 모습과 참 이스라엘

 

요한복음 19:15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그랬다. “네가 왕이냐?”그랬더니 대답을 안 하신다. 재판하는 사람(빌라도)에게는 뭐라고 협박을 하는가 하면 네가 만약에 이 예수를 살려주면 스스로 왕이라고 자칭하던 사람을 살려주니까 로마를 등지는 것이다. 그렇게 협박을 하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가이사 당신에게만 지배를 받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뭘 암시하는가 하면 이제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된 백성들로 하나님과 정치적으로 관계를 맺는 그 모든 관계는 끝난다. 이제는 그 육적 이스라엘의 껍질은 깨트려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들어온다. 이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끝나고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의 출현이 예고되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속죄함을 얻은 많은 사람이 믿음을 통해 구속을 얻은 많은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들은 죄악 된 세상에 사는데 이 세상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의존하며 하나님이 자기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흐려졌지만 어떻게 하든지 은혜를 받고 순종하고 의존하면서 처음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셨을 때 절대적인 의존의 관계로 살아가려고 하는 새 백성이 된다.

 

 

4. 제자들의 혼란

 

a. 부활의 경험

 

제자들이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렇게 못 박아 죽인 그 예수가 그대로 돌아가셨으면 조용하게 모든 것이 끝났을 텐데 죽은 지 사흘 만에 예수님이 죽으면서 부활하신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부활하셔서 살그머니 승천하셨으면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르고 그냥 끝났을 텐데. 예수님이 그렇게 안하시고 부활하셔서 당신의 모습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생전에 있었던 것처럼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교제하시고 잡수시고 다니시고 하면서 사십일을 이 지상에 계셨던 것이다.

 

제자들이 제일 먼저 뭐라고 했는가 하면 헛것일 거야. 그거 환상일 것이야. 그런데 환상이 아니라 만져보면 정말 예수님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생생하게 가르치시는데 그 가르침도 옛날에 그 목소리, 그 음성, 그 톤으로 옛날에 가르치셨던 것과 똑같은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시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께로 가르침을 받았을 때에 그때 그 느낌하고 똑같은 느낌이다. 다만 그때 그분은 죽기 전에 그분이었고 이분은 다시 살아나신 분이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문으로 들어오실 수도 있고 벽을 통과하실 수도 있다. 시간에 얽매이실 수도 있고 안 얽매일 수도 있고, 사라지실 수도 있고 나타날 수도 있고 제자들과 함께 손잡고 걸어 다닐 수도 있고 홀연히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이게 아주 분명히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인데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것을 도저히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적인 사상으로서는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부활 자체가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그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에게 와 닿았던 것이다.

 

b. 죄 없이 죽으심

 

로마서 1장 4절에 보면 무슨 표현이 나오는가 하면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무엇인가 하면, 그 죽음의 의미가 아직 무엇인지 부활한 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확실하게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가 아닌 게 분명했다. 뭐냐면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린 그 죽음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서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매달리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랬다면 하나님이 왜 살렸겠는가? 만약에 당신이 싫어서 저주해서 죽여 버린 사람이라면 자기의 죄 때문에 못박혀죽으신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그렇게 죽여 놓고 하나님이 다시 살린 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그 때에 어렴풋이 제자들의 마음에 이 죽음의 의미가 결코 유대인들이 교묘하게 조작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은 것이다.” “왜 나무에 매달아죽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저주를 안 받은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죽은 거 봤냐?” 이렇게 한 것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었는데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c. 약속의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러면 분명히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은 아닌데 왜 죽으셨을까 하고 생각을 하니까 이제 성령이 강림한 다음에 이제 깨닫게 되었지만 예수님이 하시던 말씀이 명료하게 생각이 난 것이다.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일관되게 전해 내려오는 게 무엇인가 하면 “인자의 온 것은 오히려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 인자가 죽으면 너희가 살리라” 한 이런 많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약속들 가르침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이 정신세계 속에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메시아사상이 깨트려지면서 단숨에 폭발적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무엇인가 하면 “그렇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이 능력으로 다시 살리셔서 그 죽음이 자기의 죄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셨고 그렇게 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매달려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구나.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렇게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자신의 자원으로 도저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도록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셔서 다시 당신의 품으로 불러 모으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에 그들이 경험했던 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변화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였다.

 

d. 하나님의 구원방법에 대한 이해 : 복음

 

그 다음에 예수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철저하게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깨진 가운데 불운하게 살고 일시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제사라는 길을 열어주셨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궁극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데서 자신들을 구원해내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이었다. 그래서 그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5장 3잘과 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나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바울이 전수받은 것은 저절로 깨닫게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직접 전해주셨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도 누구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받았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복음 선포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나사렛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아니라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 하나님의 아들을 바로 하나님께서 그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셨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도 오직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가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결코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생명의 근원이었다.

 

e. 십자가 사건에 대한 바른 이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죽으시고 거기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 바로 나의 구원과 직결되는 사건으로, 과거에 우리들이 잘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건이 아니라 바로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숨겨 있어서 예수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고 거기서 와르르 무너졌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유대인이었고 잘못된 신앙을 가졌지만 마음속에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살아가고 싶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껏 까지 잘못된 길을 갔던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보면서 아! 정말 하나님을 범죄 해서 철저히 떠났던 그래서 주님이 창조해놓으셨지만 창조의 목적대로 조금도 살아보지 못한 그 비참한 인간들 거기에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해도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더 어떻게 할 수 없고 점점 더 왕성해가는 이 죽음의 근원이 되는 죄의 병원균을 퇴치할 수 없어서 죽음이라는 질병의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이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구원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고 깨닫게 된 것이다. 백성들이 충격적으로 지성과 그들의 영혼을 찢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5. 복음의 빛 아래서의 삶

 

a. 사도들의 설교주제: 예수는 그리스도

 

그래서 이 경험에 붙들려서 그들이 생명을 바꾸면서까지 외쳤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다. 베드로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외쳤던 것은 너희가 나무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리셨으니 그분이 곧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다. 너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라. 그래서 너희들이 신자가 되라. 그게 목숨을 걸고 외쳤던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외쳤던 사람이 스데반이다. 마지막에 설교를 다 끝냈지만 마지막에 그렇게 외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들이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메시아였다. 너희들이 못 박아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죽음을 통해서 너희를 구원해낸 것이 너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고난을 받는 것도 그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든 사도들이 이 공통된 고백 속에서 생명을 걸고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b. 성도의 삶

 

초대교회의 백성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한 사람들을 땅에 창조해놓으시고, 하늘에는 천사들을 두어 다스리게 하셨지만, 땅에는 그 사람들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당신이 지어놓으신 이 세계를 다스리게 하시고 싶어서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당신의 형상을 그들 안에 조각해놓으시고 심어놓으시고 그들에게 맡겨주신 그 사람들이 죄 아래 달려들고 지옥의 불길 아래로 떨어지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이 어떤 종류의 고통에 시달리든지 간에 이 고통 하는 세상에 대한 영원히 변치 않는 답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의 복음 이외에는 도무지 또 다른 해결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맺는 말

 

그렇게 캄캄한 세상에서 죄로 무지하게 살아가는 그 무지한 백성들, 죄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단칼에 생명을 거두셔야지 만 정당한 것인데 그들을 이 땅에 살려두시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기쁘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원대로 하시자면 그들은 모두 쓸어버리셔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단 하나 기대를 걸고 계신 것은 누군가가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단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다가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만물의 영장답게 다스리기 위해서이다.

 

지금도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동구 밖에서 그 타락한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사랑을 알고 당신의 품에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흉악한 죄를 위해 죽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그 숙명적인 죄에서 건져내서 이제 참사람으로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셨으니 부지런히 예수님을 믿고 옛사람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으며 성화되어서 정말 예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신 보람을 안겨드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아버지의 마음에 무한한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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