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구원 받아아야 하는가?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들어가는 말
신자에게는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총체적이고 참된 지식이 필요하다. 신자의 인생에 있어서 신앙은 전부이다. 그래서 이 신앙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 교회를 출석하면서도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알거나, 편협 되어 있고 아니면 아는 것이 현저하게 없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그 진리를 보관할 수 있는 지식의 틀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기독교 신앙의 총체적인 지식은 우리가 살아야 할 ‘풍성한 삶’을 위하여 필요하다. 복음을 간단하게만 전하여도 그 복음진리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 구원받는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 스스로 탐구해가면서 거기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훌륭한 신앙생활이 나오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전체적인 지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깊이 가슴에 담고, 일평생 그것을 책꽂이 삼아서 거기에다가 주님의 말씀들을 이제 채워 넣는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서 풍성한 삶을 사실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가?
이 세상은 너무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인간들이 그렇게 간절히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는 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깊이 동의하는 바이다. 인생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고민했더라면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을 잠시만 살펴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1. 인간의 고통의 원인
세상은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 환경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원인은 인간들이 경험하는 불행의 표현이다. 가난이라든지, 질병이라든지, 그리고 또 무지라든지, 또 파괴된 인간관계라든지 이런 것들 속에 궁극적인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가난으로 인해서 배가 고파서 죽어가고 굶주림 속에서 아우성을 치게 되면 인간에게는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 그리고 교육이 있고 교양이 잘 갖추어진 사람들은 얼마나 주위에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지로 인해서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 질병은 고통스럽고 그리고 견디기 힘든 괴로운 일이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인간이 불행해 질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깨트려짐도 이렇게 인간에게 절망으로 이끌어서 죽음으로 몰고 가는 힘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원인이라기보다는 인간이 경험하는 불행한 것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면 이 모든 고통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일까?
2. 모든 피조물과 인간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 흙으로만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 코에다가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생기를 불어넣으신 과정이 바로 인간을 제외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의 창조와는 구별이 되는 지점이다. 영혼을 불어넣으셔서 영혼과 육체가 만나서 그래서 영혼과 육체가 하나는, 속사람이 되고 하나는, 겉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그 두 가지가 함께 결합되어 있는 동안에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 영혼에 의해서 육체의 생명이 주장되도록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측면으로 볼 때에 인간은 살아있어도 죽어 있을 수가 있고 죽었어도 살아있을 수 있다.
① 타락한 인간의 실존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겉 사람과 속사람이 모두 살아있는 상태에서 창조가 되었다. 그런데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의 속사람이 죽어버린 것이다. 인간의 속사람이 죽어버리고 이제 인간의 겉 사람만 살아남은 것이다. 죄를 범해서 속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겉 사람도 죽어야 마땅한 인간인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 다음에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들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속사람은 죽었는데 겉 사람을 어느 정도 살아있게 끔 해주시는 것이다. 다시 속에 죽어 있는 영혼이 예수님을 믿고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시기 위해서 인간이 살아있게 하시는 것이다.
②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
동물의 죽음과 똑같이 숨이 끊어지고 혈액이 더 이상 돌지 않고 그래서 몸이 굳고 생명을 위한 모든 기능이 끝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죽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실제로 분리되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그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이렇게 홀로 존재하게 될 때 영혼은 죽음의 상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간을 보는 시야가 이런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달라진다. 다시 말하면 속사람이 죽은 상태이다. 사람이 무엇인가 죽어 있는 영혼의 상태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서 인간의 그 원래의 창조될 때 겉 사람과 속사람이 함께 살아있던 그런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동물이 살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 인간의 이 비참한 모습이다.
3. 죽음이라는 병에 걸려있는 상태
① 악이란 무엇인가?
남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행동을 죄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에 대한 견해이고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 악이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난 죄의 결과이다. 이런 구체적인 질병의 근원은 죄라고 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악은 죄의 증상이다.
② 죄가 성립하려면 그 판단기준이 필요하다.
죄가 성립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된다. 판단을 해서 죄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죄라고 판단되는 기준이 장소에 따라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다르다. 하나님이 인간 속에 보편적인 ‘양심’을 주어서 그렇게 살아가게 만드셨다. 사람들 속에서 이런 기준들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시대에 따라서는 무너진다. (예화: 호주에서 열린 ‘전 세계의 동성애자의 대회’) 이런 기준들이 애매모호하다.
③ 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분명히 “하지 마라.” 혹은 ”하라”고 하셨는데, 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죄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법에 온전히 순종하기에 모자라는 것이다. 일반의 경우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그 하나님의 법을 안 지키겠다고 하는 강인한 의지가 있는 것이지만 후자는 자기 자신 속에 능력이 모자라서 하나님의 법인 하나님 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다.
4.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그렇게 하나님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창조하셨는데 당신을 닮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을 인간에게 심으셨다. 그래서 서로 하나님과 이렇게 교통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다.
만물은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과 창조의 질서를 가지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그 법칙에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들을 보존하시고 그렇게 붙들고 계시면서 온 우주 세계를 다스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풀잎하나 꽃 하나도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이 없다. 모두 혼자 자라게 하시지 않고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을 맺고 자라게 하시는 것이다. 처음 창조는 밖으로부터 이루어져서 그 창조의 질서들이 쭉 형성이 됐는데 그렇게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을 다시 재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오셔서 영혼을 살리시는 창조를 통해서 그렇게 구속받은 사람들이 함께 연결이 되어 나가고 그 사람들이 함께 연결이 되고 그렇게 해서 인간의 구속의 그 날에는 모든 창조세계까지 이렇게 구속이 되어서 온 피조 세계가 다시 하나로 연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독립성이 있습니다. : 존재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의사결정면에서 볼 것 같으면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독립성은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에게는 비슷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무엇인가?
① 첫째 ‘통치명령’을 통해서 : 하늘에는 하늘을 창조하시고 거기에는 당신의 성품을 닮은 천사들을 두어서 하늘을 다스리게 하시고, 땅 아래는 하나님이 땅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셔서 땅을 다스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 위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펴고 또 땅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가 모두 통합되어서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한 무리가 되어 온 우주를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채우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하셨다.
② 가족관계, 하나님이 생각했던 관계 : 인간은 단순히 객관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나님과 한 가족의 관계가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점에서는 하나님과 가족관계이다.
5. 그렇다면 어떻게 이 가족의 관계가 파손되었는가?
인간의 불순종 : 인간이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금하신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를 했습니다. 독립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 가장 나쁜 죄입니다. 더 본질적인 죄는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죄의 본질 : 창조될 때 인간에게 허락된 그 의존의 관계에서 이탈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 태도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다.
6. 하나님과의 파손된 관계의 결과
☞ 본래 ‘하늘자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인간의 모습대로 살아가려고 할 것 같으면 위로부터 부어지는 자원이 필요하다. 위로부터 부어지는 생명의 연합을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어떤 에너지가 필요하다. 죄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끊어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는 도저히 살수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그 자원을 채우기 위하여 비참한 상황을 만나게 된다. :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그 자원을 부당하게 뺏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도저히 자원이 될 수 없는 그릇된 것을 자원으로 삼는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삶의 자원을 뺏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원’이라고 하는 것은 내 안에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들을 빼앗고 그렇게 하면 내 삶이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당한 방법으로 취한 것이고 개인 간의 부당한 방법으로 취한 것이 범죄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라와 나라가 충돌을 일으키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난다. 이것이 계속되어 인류의 역사를 이루었다.
☞인간을 철저하게 자기 밑에 예속시키거나, 자신들이 허탄한 곳에 굴복한다. : 인간이 ‘허탄한 것’에 굴복한다. ‘허탄하다’는 말은 가치가 없고 허무하다는 것이다. 거기에 굴복하는 것이다. 소중한 인생의 기회를 정작 자기가 창조된 목적이 자기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한번도 섬기고 한 번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채 그렇게 허망한 일에 굴복하다가 죽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그 모든 일이 모두 허탄한 것이다. 직장생활하고 돈 벌고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그 모든 일은 그렇게 다 허탄한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생명의 뿌리가 잘려버린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다 허탄한 것들이다.
☞결과적으로 죄로 인하여 네 가지 면에서 관계가 파괴되었다. :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세 번째는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으며 네 번째는 자아와의 관계가 파괴된 것이다. 인간이 범죄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그리고 또 인간관계도 파괴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다 파괴된 것이다.
7. 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가?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그 약속, 언약과 관계 지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① 문화명령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그래서 이미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들이 계속 생육하고 번성하며 자라고 인간도 계속 생육하고 번성하며 자라서 하나님이 맨 처음에 지어 놓으신 사람의 마음과 신앙을 가진 똑같은 많은 사람들과, 그러니까 아담 하나만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인 많은 사람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하나 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한 가족관계가 되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문화명령’이라고 말한다.
② 종교 명령
그 종교 명령은 동산 중앙에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선악과를 심어 놓으셨는데 그 나무는 보통의 나무였다. 그런데 그 나무를 ‘선악과’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악이 없었던 상태이니까 사실 선한 것 밖에 없는 상태였으니까 선과 악을 대비해서 알게 된다는 이야기는 쉽게 예기해서 악이 악을 알게 된다는 말과 동의어란 말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언약의 당사자는 하나님과 인간 이었다. 그 때 당사자는 하나님과 인간이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동산 중앙에 심어놓은 선악과를 먹지 마라. 그걸 지키지 않으면 형벌은 죽는 것이다. 지키면 끝도 없이 영생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친교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약의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악과’는 ‘은혜의 방편’이다. 그것을 보고 매일 깨달으면서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그곳에서 이탈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그것을 따먹고 범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먹은 것이다. 그게 바로 한사람이 죄를 범한 것이다.
③ 성경의 대표사상
아담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성경이 온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두 사람을 예로 드는데, 한 대표는 아담이었고, 또 한사람이 예수님이었다. 그러므로 이 아담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해놓으신 사람이 아니라 태어날 모든 인류의 대표자였다. 그게 성경의 대표사상이다. 그래서 이것을 따먹지 마라.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아담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게 아니라 모든 후손의 우두머리로서 맺은 것이다. ‘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모든 신학자들이 영원히 있을 그 시험은 아니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 아담을 시험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그것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것이었다.
만약에 아담이 그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아담은 그것을 보면서 유혹도 이겼을 것이다. 따먹고 싶은데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혹도 이기고 어째든 뭔가 순종의 대가를 지불했다. 그런데 만약에 아담이 그것을 안 따먹었다면 우리는 먹고 싶은 선악과를 안 먹도록 참은 적도 없고 그것을 이기려고 애를 쓴 적도 없는데 여전히 영생을 누리면서 살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그런 대표의 원리가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④ “에이스 엘던”(들어오고)이라고 하는 희랍어
그렇기 때문에 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한 그 순간에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온 세상에 죄가 확 밀려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이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을 로마서에서 ‘에이스 엘던’이라고 하는 희랍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게 무엇인가 하면 뭐가 확 밀려들어온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방 터지면서 물밀 듯이 그 엄청난 흙탕물이 들어와서 한 동리를 모두 물바다로 만들어버린 것,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죄 아래 모두 잠겨버리게 되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⑤ 그 범죄의 결과로 네 가지 결과가 일어남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창조해놓으신 사람의 위치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이 세상에 남아 있고 그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위치에서 온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영광스럽게 다스리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이 세상의 통치자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모든 자원들이 공급되는 통로가 막혀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인간은 견디기 힘든 고통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인간이 고통이 생기면 그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습관이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오랫동안 죄 가운데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본성적인 기능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고 사이좋게 선악과 나누어먹었는데 3장에서 갈등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찾아오셨을 때부터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이 여자가 주었기 때문에 내가 먹었다고 생각한다.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요” 그런 고백은 다 사라지고 그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범죄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렇게 관계가 파괴된 것이다. 그렇게 관계가 파괴된 것들이, 그 이후 모든 인간들이 유전을 받고 태어나면서 인간들의 관계가 깨진 것이다.
세 번째,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 시절에는 파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무슨 자연에 의해서 손해를 본다든지, 무슨 산사태가 나서 거기 깔려 죽는다든지,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서 죽어버린다든지 그런 것 없다. 모든 자연과 인간이 안전한 조화와 합의를 이루면서 살아갔다. 그러니까 자기와 똑같이 창조되었다는 면에서는 동창생이니까 같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서로 교통하면서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된다. 그런데 그것을 막 파괴하고 부서트리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나중에 복수하는 것처럼 그 악영향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이 끊임없는 갈등, 공생에 관계가 아니라 갈등의 관계에 있게 된다.
네 번째,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깨트려진 것입니다.
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기능이다. 그런데 뛰어내려서 막 죽어버리는 것이다. 자기의 생명과 역행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혼란시켜 마치 자기 속에 또 다른 자기가 있는 것 같은 정신적인 혼란 속에 빠져서 자기 안에 통일성을 잃어버려서 자기 속에 말할 수 없는 갈등들을 서로 일으키면서 외부에 원인이 없어도 자기 속에 갈등을 일으켜서 정신병의 원인이 되고 죽어가는 그 자체가 모두 죄에서 누리게 된 결과이다. 이것은 모두 파괴된 관계에서 오는 결과들이다.
그 범죄의 결과로 인간에게는 총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 죄책과 오염
죄책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져야 하는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오염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도덕적인 오염 내지는 선천적 부패성을 의미하는 것.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죄책과 그 다음에 이 오염을 숙명적으로 타고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이 되었고 이것이 이 모든 인간의 고통의 근원이 되었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고통의 근원이 이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출처]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01】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❶|작성자 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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