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연구
- 마태복음 6장 5~14절 연구 - 1. 사람을 의식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 무엇을 교훈하십니까? 기도(祈禱)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5절 상) 또한 어떤 방식으로 교훈하셨습니까? 기도 시 주의사항에 대해 먼저 말씀하신 후(5~8절), 소위 ‘주기도문’이라는 모범을 제시하심으로써(9~15절) 그들의 기도생활을 지도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표적인 주의사항 둘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5절 중) 보통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회당에 올라가 기도했는데(행3:1; 10:9; 눅18:9~14), 만일 외출 중에 기도 시간을 맞게 되면 길가에 서서라도 기도하곤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로 이리 하였으나,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식적 행위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더러는 기도 시간에 일부러 외출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5절 중) 예수님은 이와 같은 자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경고하셨습니까?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으며(5절 하), 더 이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받을 상이 남아 있지 않다(1절 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賞)을 이미 받았느니라.”(5절 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賞)을 받지 못하느니라.”(1절 하) 대신 어떻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6절 상) 물론 골방(헬, 타메이온)이란 ‘템노’(자르다)에서 온 단어로, 잠시 세상 모든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과만 은밀한 대화할 수 있는 모든 공간을 뜻합니다. 또한 어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절 하)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을 의식해가면서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부터라도 각자의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2. 중언부언 하지 말라! 둘째,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7절 상) 당시의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여야 신들이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대인들마저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여야, 중언부언하여야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절 하) 여기서 ‘중언부언’(헬, 밧톨로게오)은 ‘공허한 것을 반복하여 중얼거리다’란 뜻으로, 진실치 않은 태도로 이미 했던 말들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아 알 수 있듯,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다 중언부언은 아니라는 점 역시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마26:44) 그렇다면 어찌 구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태도와 자세로 기도하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즉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구하더라도, 진실한 태도로 그리하면 참된 기도이지만, 만일 ‘진실치 못한 태도로’ 그리 한다면 중언부언(重言復言)이 되고 말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어찌 경고하셨습니까? 그들을 본받지 말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8절 상) 어떤 부연설명과 함께 말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점입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절 하) 즉 무슨 말씀입니까?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고로, 굳이 이방인들처럼 말을 많이 하여야, 중언부언하여야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다만 진실된 자세와 태도로 그분 앞에 구하되,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구하라! 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말이 많이 하여야 하나님께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깐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게 되었던 것이구요. 이제부터라도 중언부언 하지 말고, 오직 진실된 자세와 태도로 그분 앞에 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구하되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주기 원하신다는 점을 명심하면서 말입니다. 할렐루야! 3. 기도의 간극을 좁혀나가라!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고로, 굳이 이방인들처럼 말을 많이 하여야, 중언부언하여야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다만 진실된 자세와 태도로 그분 앞에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구해야 합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주기 원하신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람의 장군 나아만은 매우 언짢았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자신이 기대했던 바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온 주술사들이나 의사들처럼, 선지자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그 신(여기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환부 위에 손을 흔들면서 병을 고쳐줄 줄 알았는데, 엘리사가 나오기는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의 사환을 보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라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왕하5:11,12)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나아만처럼,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따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생각엔 이렇게 진행되었어야 했는데... 내 생각대로라면 지금쯤 이 정도까지는 왔어야 하는데, 뭐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겠어?’ 라고 말하면서 원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순종하기만 하면 씻은 듯이 나을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5:14)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실제로 기대한 것보다는 우리가 기대했어야 하는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찌 합니까?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의 기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기대했어야 하는 것을 주신다는 점을 모르고 있거나 간과한 채 말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뜻대로 안되면 이내 실망하고, 자신의 기대에 어긋난 결과들을 직면할 때마다 고생 아닌 고생을 하게 되구요. 명심하십시오. 제임스 패커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뜻’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실제로 구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구했어야 하는 것을,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는 우리가 기대했어야 하는 것을 주신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 줍니까?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과 ‘우리가 구했어야 하는 것’이 다를 수 있으며,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말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기대에 어긋난 결과들에 직면해 있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일들과 조우(遭遇)하고 있습니까? 무척이나 곤혹스럽고 난감해 하면서 말입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에’ 직면하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과 조우하는 것.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째서입니까? ‘나의 기대’와 ‘하나님의 기대’가 매번 같을 수 없고, 언제나 일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둘 사이의 간극(間隙)이나 격차(隔差)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뜻밖의 일과 예상치 못한 일들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생각하지도 못한 일, 예상치 못한 일, 뜻밖의 사건 등을 ‘우리가 구했어야 하는 일, 생각했어야 하는 일, 기대했어야 한 일 등으로 불러봅시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 내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기대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부지런히 살피면서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말이 많이 하여야 하나님께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깐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게 되었던 것이구요. 이제부터라도 중언부언 하지 말고, 오직 진실된 자세와 태도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간극을 점차 좁혀가면서 말입니다. 할렐루야! 4. 예수님이 제시하신 기도모델을 따라 기도하자! 여기서부터는 소위 ‘주기도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꼭 이렇게만 기도하라고 만들어 준 유일한 틀이 아니라,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여주신 하나의 모델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앞서 ‘사람에게 보이려 한 기도’(5,6절)나 ‘중언부언하는 기도’(7,8절)를 비판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너희는 이것을(what)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너희는 이렇게(how) 기도하라’(9절)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절 상) 그러므로 이 시간은 소위 ‘주기도문’을 토대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기도문’이 예수님께서 꼭 이렇게만 기도하라고 만들어 준 유일한 틀이 아닌,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여주신 하나의 모델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또한 이와 같은 기도의 모델을 토대로 균형 잡힌 기도생활을 해나가고 있느냔 말입니다. 5.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라! 먼저, 기도의 분명한 대상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9절 중) 그런데 그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곧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절대적이고 무한하시며 성결하신 분 말입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의 ‘하늘’에만 계시다는 의미는 아님) 또한 ‘우리 아버지’입니다. 참된 부성(父性)을 지닌 우리의 인격적인 아버지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방향 없이 허공을 향해 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명심하십시오.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제라도 모든 기도의 유일한 방향과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곧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심을 향해 기도와 간구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오직 그분 앞에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6. 수직적, 수평적 기도의 조화를 이루라! 하나님을 향한 기도, 곧 하나님의 이름, 나라와 의(뜻)를 위한 기도입니다. 사실 주기도문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 3문장과 (뒤에서 다루게 될) 개인의 현실 문제를 위한 기도 4문장 총 7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십계명이 처음 4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의무를, 나중 6계명은 인간을 향한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수직, 수평 문제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기도문이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인의 현실 문제만을 간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기도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까? 또한 어떻습니까? 십계명이 구현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삶 역시 수직, 수평 문제가 균형 있게 다루어지고 있느냔 말입니다. 7.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기도하라! 우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사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히 그분의 ‘성호’(聖號)를 넘어서, 궁극적으로 그분 자신을 의미하므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 이름 역시 이미 거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이 기도해야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분명 십계명 중 세 번째 계명과 관련지어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 곧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오늘날 나의 생각이나 말, 행동 등에 의해 망령되이 불러지거나, 또는 경멸함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이 나의 생각이나 말로 인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그분의 이름이 행동과 삶에 의해 경멸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삼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또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것이 아닌, 오히려 그분의 이름에 영광이 돌려지는 삶을 날마다 구하고 또한 그리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8.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뜻)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여기서 ‘나라’는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이 주권이 미치는 전(全)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는 기도는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종말론적 축복을 미리 누림에 따라 하나님의 왕권적인 구원의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 달라는 기도임과 동시에 속히 천국이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속히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즉 (마6:31~33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의 이방인들처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만 구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의 그 의(뜻)를 먼저 구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개인의 현실 문제만을 위해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아닌 썩을 양식을 위하여(요6:27), 위의 것이 아닌 땅의 것을 위하여(골3:1,2) 말입니다. 물론 개인의 현실 문제 역시 구해야겠지만, 그보다도 앞서 땅의 것이 아닌 위의 것, 썩을 양식이 아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구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내 자신, 내 가정,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또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말입니다. 할렐루야! 9. 필요를 아뢰되, 일용할 것들로 구하라! 여기서부터는 개인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직접적이고도 실제적인 기도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어떤 기도입니까? 매일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1절) 여기서 ‘양식’(bread)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모든 음식물, 나아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헌데 어떤 ‘양식’입니까? 일용할(daily) 양식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시되 일용할 양식으로 그리 하셨으며(출16:16~18), 아굴 역시 잠언에서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자신을 먹여 달라’(but give me only my daily bread)고 하나님께 구한 바 있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출16:18)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30:8하)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매일의 필요를 아뢰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직 매일의 필요만을 구하고 있습니까?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자신을 먹여달라고 구하고 있습니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고서 말입니다(마6:34). 사실 우리는 혹 배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 부인하기 쉬우며, 혹 가난하게 되면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 10. 죄 사함을 구하되, 나 역시 용서하라! 또한 사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시편 기자는 우리가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신다고 했으며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선지자 이사야 역시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59:2) 이는 무슨 말입니까? ‘죄(罪)’야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유일한 장벽이자,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모범대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사죄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죄(헬, 오페일레마)는 ‘부채, 빚’(debt)에 해당하는 말로,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해결할 수 없는 채무 관계를 야기 시켰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어찌 해주셨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한편, 본 기도는 사죄와 더불어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용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12절 상) 이는 14,15절에서 다시 한 번 보충되고 있구요.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절) 어째서 입니까? 사실 우리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마18:21~35)에 등장하는 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즉 우리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만일 엄청난 빚을 탕감해주신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작은 빚을 진 자(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결국 이는 나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18:32,33) 따라서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구할 때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죄를 탕감 받은 존재임을 재차 확인함으로써,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해 나가길 힘써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다른 이들 역시 사랑하고 계시기에 나 역시 그들을 사랑하면서 말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1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구하라! 또한 시험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사실 두 종류의 시험이 있습니다. 곧 성도의 신앙을 한 단계 성숙(upgrade)시키기 위한 테스트(test)가 있는가 하면,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유혹(temptation)이 있습니다. 또한 테스트(test)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지만, 유혹(temptation)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인 사탄에 의한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바로 약 1:13~15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3~15) / “When tempted, no one should say, "God is tempting me." For God cannot be tempted by evil, nor does he tempt anyone; but each one is tempted when, by his own evil desire, he is dragged away and enticed."(James 1:13,14) 그렇다면 본절의 ‘시험’은 어디에 해당합니까? 테스트(test)가 아닌 유혹(temptation)입니다. 또한 본절은 어찌 해석될 수 있구요? 만일 이 시험이 우리의 신앙을 한 단계 성숙(upgrade)하기 위한 테스트(test)라면 은혜 중에 잘 통과하게 하시나(고전10:13),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를 타락으로 이끄는 유혹(temptation)이라면 여기에 들지 않게 하시며, 만일 어쩔 수 없이 유혹(temptation)에 들었더라도, 피할 길을 내사 능히 이겨내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temptation)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한편,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와 더불어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악에서 (또는 악한 자들에게서도) 구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but deliever us from the evil one." 여기서 악은 누구이며,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사단(악령)이며, 우리는 그 세력 앞에서 연약하고도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누가 사단(악령)을 이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사단(악령)의 세력을 이기려면 어찌해야만 합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되 날마다 사단(악령)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선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말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12. 찬양과 송영으로 마무리하라! 끝으로, 찬양과 송영입니다. 사실 고대의 유력한 사본이나 누가복음에는 이 부분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눅11:2~4). 따라서 이 부분은 기도의 끝에 반드시 송영이 뒤따랐던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 후기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문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첨가 내지는 삽입한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오래전 다윗의 송영을 축약해 놓은 듯한 인상을 줍니다. “...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0~12) 결국 이 같은 송영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지금껏 기도한 내용이 이루어질 것을 미리 확신하고 감사하는 동시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영원한 주권을 찬양함으로서 기도를 마무리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지금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매번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송영으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까? 자신이 기도한 내용이 이루어질 것을 미리 확신하고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한편, 우리가 흔히 송영 앞에 붙이는 ‘대개’(헬, 호티)라는 단어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 때문이다”(because, for)는 뜻을 지니고 있어, ‘지금껏 기도한 내용이 이루어질 것을 미리 확신하고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정도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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