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使徒信經, Symbolum Apostolicum)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교수)
사도신경(使徒信經, Symbolum Apostolicum)은 신조중의 신조로서, 로마 카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회를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가 다 함께 고백하는 성경적이며 사도적인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이 세계교회 신조(Ecumenical Creed)는 웨스트민스터신조나 루터교회의 일치신조 등과 같은 교파신조와 달라서, 사도신경의 거부는 정통적인 기독교회로부터의 탈퇴로 간주되어 이단(異端)으로 정죄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이유로, 심지어 사도신경의 일부를 문자적으로 불신하는 자유주의적인 교회도 이를 거부하지 않고 자기들의 신학적 해석을 달리한 채 사도신경을 여전히 고백하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자기들의 신학과 배치되는 사도신경의 일부를 수정 혹은 삭제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세기 독일에서 자유주의신학이 발호하면서 사도신경에서 동정녀탄생 구절을 제거하려는 운동이 강력히 일어났으며, 오늘날에는 여성신학의 영향으로 "하나님 아버지" 구절을 수정하자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시적인 호응은 있었으나, 사도신경의 수정이나 삭제는 세계교회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사도신경의 삭제
그런데 한국 개신교회는 모든 교파가 공동으로 사도신경의 한 조항을 삭제(削除)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전 세계교회에 유례가 없는 일로서, 세계교회가 교파와 신학을 초월하여 고백하는 한 조항을 한국 개신교회가 고백하기를 거부하는 중대한 불상사이며, 세계교회와 보조를 같이하지 못하는 일면을 가지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이 한국교인의 절대다수가 이러한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교회도 한국교회의 사도신경에 한 구절이 삭제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나아가 이 구절을 삭제해야 될 분명한 신학적 이유도 없이 일종의 사고(事故)와 같이 삭제되어 한국적 신학의 문제도 아니며 이에 대한 신학적 변증도 연구도 없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국제 교회회의나 외국교회에 가서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에는 아무 문제없이 이 구절을 고백하면서도 이를 회복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음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바로 그 문제의 구절은 "음부에 내려가시고(Descendit ad inferna)"라는 구절로서, 사도신경 원문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로 되어 있다. 교회 역사상 예외없이 고백되어 왔으며 지금도 세계의 모든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들을 포함한 모든 세계교회들이 고백하는 이 구절을 왜 한국교회는 공동적으로 고백하기를 거부하는가? 일찍이 1938년에 박형룡교수도 이 문제를 지적하였으며, 최근에 김영재교수는 이 구절을 삭제한 이유가 아마도 "설명이 곤란해서 슬쩍 빼 버렸든지 아니면 문자적 번역을 피하여 의역한 것"이리라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보다 역사적인 설명은 김용준목사가 1963년 {기독교사상}지에 2회 연재한 "사도신경의 개역의 필요성"이라는 논문에서 발견된다. 그는 한국교회의 초기문서들을 분석한 결과, 이 구절의 삭제가 감리교회의 영향에 의한 것임을 발견하였다. 1894년 언더우드선교사의 사도신경 번역판이나 1905년 장로교선교사협의회에서 번역한 사도신경에는 이 구절이 들어 있는 반면, 1897년과 1902년, 그리고 1905년에 번역된 감리교회의 사도신경에는 한결같이 이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 그리하여 한국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이 구절에 대해서 상반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8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합동찬송가}를 발간하면서 사도신경의 통일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이 때 한국 장로교회는 양보해서는 안될 양보를 하고 말았다. 이후로 한국 장로교회는 부당한 감리교회의 삭제를 추종하고 있으며, 심지어 독자적으로 찬송가를 발행할 때에도 이를 회복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중대한 손실
역사적으로 1440년 Reginald Pecock이 이 구절의 삭제를 제안한 적이 있으며, 종교개혁 시대에도 Walter Deloenus가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면서 그의 {기독교강요} 2권 16장 8절에서 이렇게 경고하였다:
"이 구절은 우리 구원의 총체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만일 이 구절을 삭제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주는 은택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교회들은 이 구절을 중시하여 왔다. 비록 해석상의 차이는 존재하였고 중요성의 정도에서도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의 삭제란 생각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교리보다는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역사적인 정통교리 중에서 난해하거나 상식을 초월하는 일부 교리를 제거하는 작업을 감행하였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John Wesley가 1784년 작성한 감리교신조는 영국교회의 신조인 '39신조'에서 발췌한 25신조인데, 이때 칼빈주의적인 부분들이 많이 제거되면서 39신조의 제3항인 "그리스도의 음부강하에 대하여"가 전부 생략되었다. 한국 감리교회의 사도신경 번역에 이 구절이 삭제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음부강하의 의미
그리스도의 음부강하(陰府降下)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크게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그의 영혼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실제설(實在說)과 음부강하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상징설(象徵說)이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때 예수님께서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모여있는 Limbus Patrum에 가셨다고 주장하며 연옥설의 근거로 이용하는가 하면, 루터교회는 사탄의 세력에게 그의 승리를 보이기 위해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이해하고 이를 승귀의 제1단계로 본다. 그리고 영국교회는 낙원과 음부를 동일시하여 3일동안 낙원에 가 계신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상징적으로 이해한다. 즉 예수님께서 실제로 음부에 내려가셨다기 보다는 죽음의 상태를 묘사하거나 혹은 음부적인 고통의 경험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개혁주의의 상징적 이해에는 두가지의 입장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대륙에서 개혁교회를, 영국에서는 장로교회를 형성시켰다. 이 두 교회는 공히 칼빈의 신학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신학적 연대성을 가지고 있으나, 교회정치와 신조에서 다소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장로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신조는 사도신경의 음부강하 구절을 3일동안 죽어 있었다는 단순한 의미로 이해한다. 대요리문답 제50문,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의 낮아지심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의 낮아지심은 장사됨과 죽은 자의 상태를 계속하시고 제삼일까지 사망의 권세 아래 계신 것이니, 이를 다른 말로 '그가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표현한다."
칼빈의 해석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해석을 다음 두가지 이유로 반대하였다. 첫째로 쉬운 말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 어려운 말을 쓰는 법이 없다. 음부강하의 의미가 단순히 바로 앞에 분명하게 언급된 "죽으시고 장사되며"를 반복설명하는 것이라면 그 보다 더 난해한 "음부에 내려가시고"란 말을 사용할 리 만무하다는 문학적인 반론이다. 둘째로 사도신경과 같이 압축되고 간결한 신경에 쓸데 없을 뿐 아니라 나아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중복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칼빈은 음부강하를 단순한 사망상태의 서술로 보지 않고 음부적인 고통의 영적 체험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십자가를 육적 고통으로 음부강하의 체험을 영적 고통으로 이해하고, 이 둘이 합하여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대속적 형벌의 완성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대륙 개혁교회의 요리문답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44문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사도신경이 '음부에 내려가시고'라는 구절을 첨가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가장 무서운 시험 중에도 나의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불안과 번민에서 건져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어디에?
물론 이러한 해석에 문제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음부강하가 단지 십자가상에서의 음부적인 고통의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왜 예수님의 비하와 승귀의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열거하고 있는 사도신경에서 음부강하를 죽음과 장사 이후에, 그리고 부활 직전에 배열하고 있는가? 정말 그런 의미라면 오히려 음부강하를 죽음 이전에 위치시켰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영혼이 무덤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적인 교리라면, 예수님의 영혼은 그 3일동안 어디에 가 계셨는가? 그곳이 낙원이라면, 사도신경은 왜 "낙원에 올라가셨다가"라고 하는 대신 "음부에 내려가셨다가"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벧드로전서 3장 18-20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아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웨인 그루뎀은 그리스도의 음부강하를 부정하면서, 이 구절은 노아시대에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20절의 '전에'라는 시간적 언급을 간과하고 있다. 과거에 순종치 않았으므로 멸망당한 자들에게 십자가로 육체의 죽음을 당한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이다. 물론 눅 23.43에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구절과 상충되는 듯하다. 그러나 둘 다 영감된 말씀이라면 하나를 부정하고 하나를 취할 것이 아니라 둘 다 신중하게 이해해야 한다. 베드로서의 언급은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왜곡해석을 하지 않는 한 다른 해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편, 누가복음의 말씀은 '오늘'의 개념에 따라 조정될 수도 있다. 여기서 오늘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론'은 일반적으로 오늘을 의미하지만 또한 '잠시 후에'라는 단기간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바로 앞절에 있는 강도의 간청, 즉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내용의 시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조화로운 이해가 가능하다. 강도가 3일동안의 행로와 부활까지 모든 과정을 그리스도와 동행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스도는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아직 많은 구속의 과정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원문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나 신경이나 해석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이 다양하거나 난해한 것이 삭제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사실은 사도신경의 다른 조항들에도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개신교회가 사도신경의 일부를 삭제할 권리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고 꼭 그래야 할 신학적 이유를 세계교회 앞에 제시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특별히 이것은 한국 장로교회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과제로서 습관적 보수주의를 지양하고 하루 속히 교회의 결의를 거쳐 원문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그리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교회의 하나됨을 열심히 추구해야 하는 이 말세에 한국교회는 자기성찰과 자기극복을 통하여 세계교회와 대오를 같이 하는데 장애가 되는 거침돌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한 신학자의 말처럼, 천국에서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사도신경을 고백하게 된다면, "음부에 내려가시고" 부분에서 한국 개신교인들은 당황하고 수치를 당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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