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의 저주 갈라디아서3:10-14절을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전쟁을 합니다. 지금과 같이 첨단 무기가 있어서 피아간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시대면 좋은데 옛날에는 여러 나라가 함께 전쟁을 하게 되면 정말 적이 누군지 아군이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그때 적과 아군을 분별하지 못하다가는 자기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을 너무도 뻔 한 일입니다.
어찌 그것만 그렇겠습니까? 세상을 살다보면 너무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상대를 너무 신뢰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일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경상도 사람이고 또 어느 특정 정당을 너무나도 지지를 하는 발언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성도가 있습니다. 그 사람도 물론 경상도 사람이지만 사실 그 사람은 그 정당과는 반대 되는 정당을 좋아하고 있고 前 대통령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도 강해서 아주 열열이 지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교회 재정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그것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결국에는 어느 시점이 되니까 교회를 안 나오기 시작을 하더니만 결국에는 영영 안 나오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前 대통령을 너무도 비난을 하는 목사님을 보면서 늘 안타까운 표현을 하는 것을 저는 익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세상을 살면서도 그래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교회 안에서 목사가 어느 정당과 어느 대통령을 너무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는 것이 영혼에 대한 생각이 너무 모자라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굳이 발언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렇게도 정치에 관심들이 많은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진리에 관심이 있는 목사라면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목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전라도 출신인데 자기 교회의 교인들 대부분이 경상도 출신이라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전라도가 뭐며 경상도가 무엇이기에 목사가 그런 것을 안타까워하는지 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목회를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지 자기 직분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릅니다. 그가 내 지역 출신이라고 해도 또 나와 혈육을 나는 피붙이라고 해도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전쟁이 있었을 때 형제가 총부리를 대고 싸운 일이 비일비재하게 있었습니다. 서로의 사상에 미혹이 되어서 어느 것이 옳고 그런 것을 판단하지 못하고 형제간에 죽이는 싸움을 했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똑바로 보기 바랍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 때문에 중요한 것을 앓어 버린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진리를 사모하면서 그것을 알기 위해서 치열한 싸움을 하기도 부족하고 그것에 정열을 다 쏟아 주어도 모자란 판인데 왜 쓸 때 없는 사상에 미혹이 되어서 정치를 논하고 사회를 말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익히 배워 왔지만 공산당이 들어 왔을 때 아무 것도 모르고 부역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알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총부리를 겨누고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어 국군이 들어오니까 모두 몰살을 당하게 된 그 사람들입니다. 또 반대로 국군에 도움을 주었다가 공산당이 들어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익히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정말 그들은 사상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살기 위해서 이쪽이 오면 이쪽에 도움을 주고 또 저쪽이 오면 저 쪽에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 이쪽에서 죽임을 당하고 저쪽에서 죽임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을 하고 그것이 아직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시류에 따라 전쟁 중에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하다가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이며 아직도 그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갈대같은 보통의 사람입니다. 시류가 이쪽으로 가면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가고 또 저쪽으로 흐르는 것 같으면 저쪽으로 가서 어떻게 하든지 거기에 끼어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되어 지고 있습니다.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그랬습니다. 감리교와 장로교는 서로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면서 정죄를 하고 자기들이 정통의 교회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류가 바뀌니까 장로교가 무슨 소용이고 감리교가 무슨 소용이고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안 되고 서로의 교리가 치열하게 싸움을 했는데도 이제는 그것이 서로 간에 희석이 되어서 서로를 인정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교 화합이라는 측면에서는 좋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적입니다. 사실 감리교의 교리와 장로교의 교리는 서로 이단일 수밖에 없고 지금도 신학교에서 배우는 교리만을 가지고 논한다면 서로가 이단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감리교의 교리는 점점 굳어지고 있는데 장로교의 교리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장로교의 교리를 배운 목사들이 실제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는 감리교의 교리에 기초를 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을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도 이제는 그것을 지키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를 비난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43년 동안 감리교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장로교 신학을 하면서 성경을 기준으로 볼 때 감리교의 기초 교리를 따르는 알미니안주의 사상의 교회들은 다 이단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며 구원론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바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장로교의 목사들이 오히려 감리교의 교리인 알미니안주의를 따라가고 있고 자기들이 배운 칼뱅주의의 교리는 이미 신학에서만 존재를 하는 유명무실한 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칼뱅이라는 인간을 따라가겠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실 칼뱅에 의해서 그 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대표하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그렇지 칼뱅주의는 이미 초대교회 사도와 교부들로 부터 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교리를 정립한 교리의 기초가 되고 있었고 그것이 종교개혁과 함께 정리를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교리는 100여년이 지나면서 점점 흐려지더니 이제는 신학에서만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다수는 알미니안주의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장로교의 목사들의 사상에도 뿌리 깊게 파고 들어와 이제는 그 흐름을 아무도 돌려놓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은사 주의나 신사도 주의와 혼합하여서 모든 교인들은 시류를 따라가고 있고 그 시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모르고 그저 큰 물결에서 자기가 탈락이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어느분이 우리 카페 질문란에 질문한 것을 보면 요즘 한국교회가 천주교인지 예수교인지 구분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입니다. 거대한 세력에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을 하고 그것이 자기를 지켜주는 보호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권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고 또 교회는 점점 대형화가 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형화되어 있는 시류의 교회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큰 국가에 그리고 큰 교회에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는 사람들의 심리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전쟁의 위헙이 느껴질 때마다 미국이라는 국가에 살기를 원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을 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세상의 일이지 주님의 일과는 별개라는 사실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스라엘은 시류를 따라 갔습니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 그것을 지키는 자신들의 행위를 보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를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사상인가를 모르고 있었고 사도 바울을 통해 로마서에서 율법을 이스라엘에 왜 주셨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모릅니다. 율법을 왜 주셨는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야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예수그리스도를 안다고 자부하고 있으면서도 율법을 왜 주셨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성경에서 중심이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말씀은 기초가 되어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되는 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말씀이 양면성을 가지는 순간 교회는 타락을 하고 진리는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3:20절을 보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이스라엘에 주신 분명한 이유입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지킴으로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징으로 삼았으며 그것은 지금 이 시대도 변함이 없이 똑 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시류로 삼고 있습니다. 자기가 율법의 어느 것을 지키는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미혹이 되어서 자기들의 육체를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를 했던 것 같이 이 시대도 역시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의 모습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들을 기르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 머리가 나빠 공부를 못하는데 일등을 하라고 강요를 하겠습니까? 아니 그 아들이 운동 신경이 둔한데 마라톤을 해서 세계적인 선수가 되라고 강요를 하겠습니까? 세상의 아버지도 그렇지 않은데 하나님을 세상의 아버지만도 못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대 교인들입니다. 율법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분명히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갈3:10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을 지키는 분명한 조건입니다.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행해야 합니다. 율법 책에 무엇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안식일을 안 지키는 여러분은 자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안식일과 주일도 지키고 다하셔야 합니다. 또 돼지고기를 먹고 비늘이 없는 생선 종류를 먹고 하는 자는 모두가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면 이것을 다 행해야 합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율법은 지키고 나머지는 버리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책에 기록 된 모든 것을 항상 다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율법에 정한 강제적인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지키고자 한다면 율법 책에 있는 모든 것을 항상 다 지키지 않는다면 분명히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지쳤지만 제가 율법을 버린다 해서 방종을 하고 죄를 마음대로 지면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버려도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자들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선하고 의롭게 살 수 있다는 것과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는 이미 알고 있고 그렇게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저주를 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고 마치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이 하늘나라에 가는 보증 수표라도 되는 듯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율법 책에 있는 모든 것을 항상 다 지킬 수 없다면 반드시 율법을 버려야 살 수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지 어중되게 시류를 따라가다가는 분명히 저주를 받게 됩니다.
지키려면 다 지키세요.
그렇지 못할 것이면 완전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지 만약 자기들이 지킬 수 있다 해서 율법 중에 어느 것 한 가지라도 살리는 순간 그는 분명히 저주 아래 있게 됩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그것으로 의로워 지려고 하는 자는 분명히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갈3:11절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사람의 생각입니다. 조금 나쁜 것과 많이 나쁜 것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하든지 조금 나쁜 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들의 아주 어리석은 생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빛 가운데 어두움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조금 어둡다 많이 어둡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대 낮에 강렬하게 태양 빛이 비추고 있는데 조금 어두운 것이 있고 많이 어두운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조금 더 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바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모든 종교의 생각입니다.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잘 해야지 그러면 나를 신이 기뻐하시겠지 하는 생각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지 못하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고 저주를 받게 됩니다. 교회 안에 그런 사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고 그것이 바로 알미니안주의에서 나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개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행한다 해도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성자라 칭송을 받는다 해도 역시 죄인임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합니다.
율법으로 의로워 지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버려도 얼마든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성도라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는 그 사고에 사로잡히게 되는 순간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게 됩니다. 저주를 받고 싶으면 율법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방법을 택하십니다. 내가 잘해서 천국 보내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천국갑니다.
천국을 가고 싶습니까?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의 모양을 취하고 있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정말 율법을 지키고 싶다면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버리고 살 것인가 아니면 다 지키고 살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 가를 스스로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참으로 안타까운 말을 합니다.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면서 믿음의 증표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는데도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면서 믿음의 증표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율법의 행위는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데 율법을 행하면서 그것을 믿음의 증표라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행하면서 믿음의 증표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율법을 항상 다 지켜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모두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아직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지 만약 믿음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다면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믿음과 율법은 대적을 합니다.
마치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단과 같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 가를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항상 다 행해서 살아야 하고 다른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다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느 한 가지만 취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둘을 다 취하는 것을 성경은 바로 음행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자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습니다. 값으로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단에게서 값으로 사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값으로 사셔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지켜야 하는 모든 율법을 대신 지켜 주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내가 지켜야 하는 율법을 대신 지켜 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아직도 자기가 율법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부탁드립니다. 율법은 여러분을 살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 아래 있게 만들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내가 지켜야 하는 율법을 예수님께서 다 완성을 하셨는데 내가 또 지켜야 하는 율법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세요. 율법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의롭고 선하게 살 수 있습니다.
믿는자에게 선하다고 선포하여 주셨기에 선한 것입니다. 깨끗하게 살아서 선한 것이 아니고 죄인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선하다고 인정하셨기에 선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 교인들을 보면 율법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육체로 폐하신 그 율법을 지키면서 마치 그것이 표징이라도 되는 듯 자랑을 하고 있는 한심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달리심으로 나를 값으로 사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인의 피 값으로 우리 죄인을 사셨다는 것을 믿는 성도는 율법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성도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방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었고 나 역시도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됩니다. 복을 차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키고자 하는 단 한 가지 율법이 아브라함이 받은 그 복을 차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저주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율법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고 이 세상에서 더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그 가운데 임하셨다면 그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단 한 가지만 보아도 압니다. 그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그가 율법의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을 받은 표징이기도 합니다.
율법은 저주를 가져 옵니다. 이제 그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아브라함이 받은 그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선했습니까? 흠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고 선하다고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덕법을 말하는데 그것은 율법이 아니고 교회법 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해가 되는 일을하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디모데 2장11-14절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아브람과 동시대에 살았던 흠이 없는 욥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지 않으시고 흠이 많은 아브라함을 택하사 믿음의 조상 삼으신 것은 아브라함처럼 흠이 많아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천국의 복을 받았고 나 역시도 믿음으로 천국의 복을 받는다고 믿는 성도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예수가좋다오/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