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존재 증명
1. 필요성
기독교 변증의 약화
현대 기독교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실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변증학(apologetics)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마르크시즘이나 진화론 등을 비롯한 이념 체계들이 기독교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여과 없이 강력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학문의 영역뿐만 아니라 각종 언론 매체들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표현되는 데 반하여,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기독교계의 이론적 변증은 크게 위축되어 왔다. 그 결과는 매우 처참하게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초중고등부 주일학교에서 복음으로 교육받아 온 순수한 기독청소년들이 기독교에 대한 이론적 비판과 조롱을 난무하는 반면에 기독교에 대한 이론적 변증이 거의 없는 대학문화 속에 들어가면 상당수가 신앙을 잃거나 심각한 회의에 빠져 방황한다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변증적 노력이 약화된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현대의 시대사조, 현대자유주의신학의 방법론, 그리고 도덕적 행동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현 시대사조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요약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론, 나아가서는 이성의 보편적 진리성을 거부한다. 이성의 보편적 진리성을 거부하는 한 이론을 통한 변증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도가 사실은 매우 위선적이고 모순적이라는 점이다. 현대사회구조 전체가 실제적으로는 합리주의의 기반 위에 서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너무나 무력하여 이 기반은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이성비판은 개인의 도덕적 인식과 결단의 영역 정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현대자유주의신학은 청중들이 기독교교리에 대하여 반감을 보일 경우에 기독교교리의 타당성을 적극적으로 변증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청중들의 반감을 그대로 받아 들여 기독교교리를 수정하거나 폐기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입장에서는 변증학이 전혀 발전할 수 없다. 따라서 자유주의신학의 교육과정에서는 변증학이라는 과목 자체가 없으며, 변증학을 엉뚱하게 정치적으로 곡해하여 기독교가 자신을 제국주의적으로 확산시키려는 음모로 간주하여 경계하기까지 한다.
도덕적 행동주의란 도덕의 진정한 의미는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이론이 기독교에 들어오면 기독교가 진리임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은 실천이지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어느 기독교철학자이자 윤리운동가는 이론적인 변증을 통하여 기독교를 설득시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실천만이 기독교를 설득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론적 변증을 아예 무시해 버린다.
이렇게 하나님의 실재하심에 대한 이론적 변증을 무시하는 것은 기독교학자로서 성실하지 못하고 게으른 태도로서, 성경의 원리에도 어긋나고 선교전략상으로나 기독교교육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잘못된 것이며, 기독교의 힘을 약화시키는 주범이다.
기독교 변증의 필요
먼저 성경을 살펴보자. 로마서 1장 19절과 20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이 본문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두 차례에 걸쳐서 강조한다. 첫째로, “그들”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은 신 인식 능력을 가리킨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가 만드신 만물 안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만물”은 자연 혹은 우주를 가리키지만 이 안에 인간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인간 안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로마서의 본문은 모든 인간 안에 신 인식 능력이 있음을 명확하게 말한다. 이 본문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타락한 이후의 인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타락한 이후에도 모든 인류에게는 신 인식 능력이 있다.
이론의 구성은 주로 이성을 통하여 수행되는 인간의 문화 활동이며, 인류문화 활동의 핵심이다. 인류문화 활동의 핵심을 좌우하는 기능인 이성 안에 신 인식 능력이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타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이성적 설명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이성적 설명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타당할까? 당연히 전자가 더 타당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설명하는 것을 무조건 비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없다고 예단하는가? 온 인류의 마음에 신 인식 능력이 보이는데도 말이다.
기독교 학자들은 이성적 활동을 통하여 신 존재 증명 논리를 개발하고 신 존재 증명을 전개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아야 하며, 이론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공격하는 자들이 걸어오는 논쟁을 피하지 않고 치열하게 참여해서 논리의 허구성을 드러내야 한다. 기독교학자들이 이것을 피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신앙과 학문을 이원화시키는 것이며, 학문적인 게으름의 소치다.
왜 우리는 신 존재 증명을 적극적으로 책임 있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가 이론적인 신 존재 증명을 하는 목적은 불신자를 감동시키고 변화시켜서 거듭난 새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불신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이론보다는 실천이다. 또한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하는 주체는 성령이시며, 도구는 성경말씀이다. 이론적인 신 존재 증명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러면 이 시도를 왜 해야 하는가? 이 시도를 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이며 곧, 로마서 1장 19절과 20절이 살아 있는 진리라는 사실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불신자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아니하든, 그것은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불신자들이 받아들이는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성경의 진리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구원과 복음의 증인들만 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반계시도 진리임을 증언하는 중요한 부분의 문화적 소명 의식도 인식해야한다. 논쟁이 필요하면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말로 싸워야 한다. 그래서 무신론이 팽배하는 현장에 기독교 변증가가 용기 있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론적으로 맞장을 뜨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론이 더 타당한지, 아니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론이 더 타당한지 한 번 이론적으로 맞장을 떠 보자!”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면 상대방은 당연히 끝까지 자기 입장을 고집하면서 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 변증적 논쟁은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일하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타당한 방법이라고 고집스럽게 믿고 있는 교만한 불신자들의 고집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복음전도의 여정에 있는 장애물 하나를 제거하는 데 유익하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있는 것이 대학문화에 들어온 믿는 대학생들이나 믿는 평신도 신자들에게 아주 큰 힘과 위로와 버팀목이 된다. 반기독교문화가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미국 철학계에 알빈 플라팅가(Alvin Platinga)라는 한 사람의 기독교 철학자가 들어가서 꾸준히 변증 활동을 한 결과 미국 철학 교수들의 30%가 기독교 철학자로 채워졌다는 놀라운 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이론적 논증은 초 신자를 포함한 평신도들의 신앙이 성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들이 복음전도를 듣고 감동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 신자의 삶을 시작할 때는 감정적인 요소들이 강하게 작용하며, 먼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고 부러움을 느끼고 그대로 본받고 싶어 하면서 출발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의문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은 믿는데 그 증거가 과연 무엇일까? 생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동정녀 탄생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부활 시에 입게 되는 몸은 어떤 몸일까? 등등 이성적인 설명이 필요한 많은 의문들을 갖게 된다. 이런 의문들을 갖는다는 것은 이 평신도의 신앙이 한 단계 올라설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의문들이 일어날 때 이론적으로 설득력 있게 잘 설명을 해주어 납득이 되면 막힌 하수구가 뻥 뚫려서 물이 원활하게 흐르는 것처럼 신앙의 흐름이 원활하게 잘 흐르면서 신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힘차게 앞으로 쭉쭉 전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의문들이 명쾌하게 해소되지 않으면 하수구가 막혀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인 채 썩는 것처럼 신앙생활이 도약하지 못하고 정체되거나 시험에 들 수가 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바로 이런 평신도들에게 신 존재 증명을 잘 설명해 주었을 때 자신들이 품고 있던 의문이 풀리면서 신앙이 크게 도약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또한 평신도들이 바로 이런 논리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직장에서 불신자를 만나 대화할 때 “하나님이 실재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한 번 말해 봐라”는 요구에 직면할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말문이 막혀서 당황하고 답답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이 칼럼을 이용하여 몇 차례에 걸쳐서 몇 가지 유형의 신 존재 증명들을 순차적으로 소개할 계획이다.
2. 존재론적 논증과 우주론적 논증
신 존재 증명(1. 필요성)에서도 이미 강조한 것처럼 신 존재 증명으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만 확인하면 된다. “말이 되는가?”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말이 된다는 것이 확인되면 신 존재 증명은 성공한 것이다. 신 존재 증명을 통하여 사람을 예수께 인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 존재 증명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이성적으로 말이 되거나 경험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있음을 보여 주면 된다.
I.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존재론적 논증이란 인간 존재의 특성으로부터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논증해내는 논증 방법을 말한다. 이 논증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전개된다.
첫째, 모든 인간은 자신이 유한하고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안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무한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무한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유한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완전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불완전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무한과 완전의 관념이 있다.
둘째, 그러면 이런 관념들은 어디서 왔는가? 인간이 유한하다거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인간 존재를 잘 관찰해보면 어렵지 않게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인간 신체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관찰과 경험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동차를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인간의 정신적인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관찰과 경험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은 숫자 계산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복잡해지면 계산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하여 알며,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며, 단 몇 분 뒤에 일어날 미래의 일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더욱이 인간은 자기 신체의 수명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하여 안다.
그러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한이나 완전이라는 관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인간이 무한이나 완전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 존재는 무한과 완전이라는 관념을 담을 수가 없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을 관찰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다.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을 관찰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다. 그것은 큰 건물의 작은 방안에서만 있었던 사람이 방안의 풍경만 알 수 있을 뿐, 건물 전체의 모습을 알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이처럼 인간은 무한과 완전을 한 번도 경험한 일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데도 무한과 완전이 무엇인가를 안다. 이 말은 인간은 방안에만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건물 전체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 사람은 어떻게 방 안에서만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건물 전체의 모습을 알게 되었는가? 방법은 하나다. 건물 전체의 모양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건물 전체의 모양을 방안에 있는 사람에게 알려 주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인간 안에 무한과 완전의 관념이 있다는 말은 누군가가 무한과 완전의 관념을 인간 안에 넣어 주었다는 뜻이다. 그 누군가가 누굴까? 그 “누구”는 무한과 완전을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자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조건을 갖춘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관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 관념은 관념일 뿐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관념 자체가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특성은 완전성인데, 실재하지 않고 관념만 있는 존재는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하나님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완전한 존재라면 하나님은 실재해야만 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형성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은 실재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인간 존재의 특성으로부터 하나님의 실재를 논증해내는 방식을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한다.
II.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이란 우주 안에서 진행되는 모든 운동에는 원인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해내는 논증 방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보자. 자동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한다. 자동차 바퀴가 구르는 이유는 차축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차축이 움직이는 이유는 엔진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엔진이 작동하는 이유는 시동 모터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동 모터가 작동하고 있는 이유는 시동 스위치가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동차 내부에서 운동의 원인을 추적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시동 스위치가 돌아갔는데 그 원인이 자동차 내부에는 없다. 그러면 우리는 운동의 원인 추적을 중단해야 하는가? 여기서 원인 추적을 중단하면 우리는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다. 우리는 자동차 밖에 있는 어떤 인격적인 존재(운전자)가 시동 스위치를 돌리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마음속의 추론을 끝낼 수가 있다.
이제 우주로 우리의 눈을 돌려 보자. 우주 안에서는 끊임없이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이 운동은 원자나 세포와 같은 미시적인 세계에서부터 우주와 같은 거시적인 세계에 이르기까지 단 한 순간도 중단없이 진행된다.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는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자는 단 한 순간도 정지됨이 없이 핵 주위의 궤도를 돌고 있다. 생명체의 기본 단위인 세포 안에서는 끊임없이 자기복제와 단백질 생성이 진행된다. 우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고, 모든 행성들이 공전과 자전을 한다. 미시적인 세계로부터 거시적인 세계에 이르기까지 진행되는 모든 운동의 원인을 물질의 세계 안에서 밝혀내는 작업을 하는 학문이 과학이다. 그런데 과학은 이 운동을 설명할 때 일정한 한계를 넘지 못한다.
원자의 운동을 아무리 세밀하게 관찰해보아도 원자 안에는 이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없다. 원자 안에 원인이 없다면 원자 밖에 원인이 있다는 말인데, 원자 밖에는 다른 원자가 배열되어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빈 공간이다. 원자 밖에 있는 원자에도 다른 원자를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없으니까 우주 안에는 원자를 움직이게 하는 원인 운동이 없다는 말이 된다.
세포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복제와 단백질 생성도 마찬가지다. 세포 안에는 자기복제라는 운동의 원인이 되는 운동이 없다. 그렇다면 운동의 원인은 세포 밖에 있다는 말인데, 세포 밖에는 또 다른 세포들이 있을 뿐이다. 모든 세포 안에는 운동의 원인이 없으므로 운동의 원인은 세포 밖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세포가 없는 곳에는 빈 공간이 있을 뿐이다. 세포 밖에 원자들이 있을지라도 원자 안에는 심지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에 대한 원인 운동조차도 없으므로 어떤 원자도 세포 안에 있는 운동의 원인을 제공할 수 없다.
세포의 자기복제가 진행되면 인간수명의 열쇠인 텔로미어가 조금씩 떨어져 나가다가 텔로미어가 다 떨어져 나가면 인간은 수명을 다한다. 그런데 초기 배아에게는 떨어져 나간 텔로미어를 복원시켜 주는 유전자가 켜져 있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꺼지는데 이 유전자를 끄는 원인 운동이 세포 안에는 없다. 또한 특정한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고 있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켜지는데, 그 유전자를 켜는 원인 운동이 세포 안에는 없다.
지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전과 공전을 하게 하는 원인 운동이 무엇인지, 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전과 공전을 하게 하는 원인 운동이 무엇인지, 모든 행성이 끊임없이 자전과 공전과 팽창을 하게 하는 원인 운동이 무엇인지, 별들의 집단인 은하가 끊임없이 팽창 운동을 하게 하는 원인 운동이 무엇인지 우주 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원자 안에서 일어나는 전자의 끊임없는 회전,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복제, 단백질 생성, 유전자 발현,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행성들의 자전, 공전, 은하의 팽창 등과 같은 운동들의 궁극적인 원인 운동이 우주 안에는 없으며, 과학은 이 궁극적인 원인 운동을 우주 안에서 영원히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원인 없는 운동은 없으므로 이 모든 운동의 원인 운동이 우주 안에 없다면 우주 밖에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주 밖에 있는 원인 운동은 무엇일까? 이 원인 운동은 스스로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인격적 의지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우주 전체를 담을 수 있는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여야 하는데, 이 조건에 맞는 존재는 하나님뿐이다.
이처럼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에는 원인 운동이 있다는 우주의 특성으로부터 하나님의 실재를 추론해내는 논증 방식을 가리켜서 우주론적 논증이라고 한다.
3. 목적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teleological argument)은 우주가 무질서하게, 목적도 없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극히 정교한 질서에 따라서 배열되어 있으며,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질서구조는 일정한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관찰결과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해내는 논증 방법이다. 이 논증 방법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정서(定序)론적 논증(eutaxiological argument)이고, 다른 하나는 의장(意匠)론적 논증(design argument)이다. 우주의 정교한 질서에 초점을 맞춘 논증이 정서론적 논증이라면, 우주의 목적과 기능에 초점을 맞춘 논증이 의장론적 논증이다. 그런데 우주의 정교한 질서는 일정한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논증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보잉 747기는 약 4백만 개의 부품들로 구성된 정교한 질서와 구조를 가진 기계다. 이 기계의 목적은 하늘을 나는 것이다. 이 기계가 땅속에 묻혀 있던 철가루, 알루미늄 가루, 플라스틱 가루 등이 한곳에 모이기를 수억 년 동안 수천억 번 반복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특별한 방법으로 모인 결과라고 설명하면 사람들은 수긍할까? 전혀 수긍하지 못한다. 어떻게 설명해야 수긍할까? 기계 밖에 있는 어떤 인격적인 존재가 이 기계 구조에 대한 설계도를 머릿속에 그린 다음, 이 설계도에 따라서 제작했다고 답변하면 모든 사람이 수긍한다.
그러면 우리 주변의 자연계로 눈을 돌려 보자. 파리는 보잉 747기보다 몇백 배 이상 정교한 비행 기계다. 보잉 747기는 어렵게 이륙하여 앞으로 날아가는 것 정도밖에는 할 수 없으며, 회전하는 것도 매우 힘들고 착륙하는 것도 매우 힘들다. 보잉 747기는 아주 굼뜬 비행체다. 그러나 파리는 전후, 좌우, 위아래, 비틀어 날기, 급격한 회전과 속도전환 등과 같은 고난이도 비행기술을 갖추고 있는데, 이 비행기술은 보잉 747기를 월등히 능가한다. 그런데 파리가 몇 마리가 있을까? 이런 비행체가 파리 하나뿐일까? 모든 날개 달린 곤충들이 같은 방법으로 날고 있지 않은가? 또 새들은 어떤가? 천문학적 숫자의 비행체들은 우주 안에 산재해 있는 정교한 장치들 가운데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낸시 피어시(Nancy Pearsey)가 그녀의 책 <완전한 진리>에서 소개한 두 가지 사례는 이 논증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는 미시적 차원의 예이고 다른 하나는 거시적 차원의 예다. 미시적 차원의 예로 제시된 것은 박테리아의 편모다. 박테리아의 편모 안에는 연결고리, 구동축, O자형 링, 고정자, 산(acid)의 힘으로 돌아가는 추진체가 있는데, 이 추진체를 확대해 보면 자동차 엔진과 같다. 자동차 엔진이 분당 2~3천 회 회전하면서 동력을 내는 반면에, 이 추진체는 1분에 10만 번 회전하면서 동력을 낸다. 거시적 차원의 예로는 골디락스 딜레마(Goldilocks dilemma)가 소개된다. 골디락스 딜레마란 우주가 마치 칼날 위에서처럼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복잡한 균형 안에서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에 맞추어져 있으며, 이 균형으로부터 약간만 벗어나도 별들이 모두 적색 왜성이 되거나 청색 왜성이 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천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질서들이 우연히 생성된 것일까?
보잉 747기가 이 비행체 밖에 있는 인격적인 존재의 설계도에 따라서 의도적으로 제작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100% 합리적으로 타당한 것이라면, 보잉 747기보다 몇천 배, 몇천만 배 이상 정교한 장치들로 가득 차 있는 이 우주는 우주밖에 실재하는, 우주보다 크고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정교한 장치들을 고안해 낼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인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하여 기획되고 그 기획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도 100% 합리적으로 타당하다.
하나님이 완성품으로 창조하신 세상
진화론자는 우주 안에 실재하는 극히 정교한 장치들의 등장을 돌연변이 이론으로 설명했다. 예컨대, 생물은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예측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나서 이전보다 훨씬 더 정교한 생물로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초파리의 염기서열을 어떤 방법으로 바꾸어 놓아도 모두 기형으로 나타났다. 기존의 염기서열을 조작하여 더 나은 생물체로 바꾼 결과는 단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 이 말은 돌연변이를 통하여 더 정교한 생명체가 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화론자들은 돌연변이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이 이론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이 이론을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돌연변이 이론을 포기하는 것은 곧 진화론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은 돌연변이 이론과 진화론을 살려내기 위하여 누적적 자연선택론이라는 것을 고안해 냈다. 누적적 자연선택론이란 돌연변이가 한 번, 두 번, 아니면 100번 정도 진행하면 더 좋은 생물체를 생성해낼 수 없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횟수만큼 돌연변이를 반복하다 보면 더 정교한 구조를 갖춘 생물체의 등장이 가능하다는 추론이다.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두 가지 유추를 제시한다. 하나는 원숭이의 타이핑 유추다. 원숭이에게 아무렇게나 타이핑을 하도록 기회를 주면 “Me thinks it is like a weasel”이라는 의미 있는 문장이 나올 수 있을까? 진화론자들은 원숭이가 이 문장을 칠 수 있는 확률은 10의 40승 중의 1이므로 10의 40승만큼 타이핑이 누적되면 이 문장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바이오모프(biomoph)의 유추다. 바이오모프는 초현실주의자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동물을 닮은 형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진화론자들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바이오모프를 만들어낸다. 아무 생각이나 사전 구도 없이 무작위로 나무 모양을 닮은 극히 간단한 도형을 그린 후에, 이 그림 위에 같은 그리기 명령을 반복하여 제시하면 복잡한 기계장치를 갖춘 그림들이 형성된다. 같은 원리에 의해 돌연변이가 수십억 년 동안 반복되어 누적되면 한 번 정도는 정교한 구조를 가진 생물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적적 자연선택론은 몇 가지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다.
첫째, 누적적 자연선택론이 전제하는 수조 회의 반복, 또는 수십억 년 동안의 지속적인 그림 그리기 후에 새로운 것이 등장할 확률은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0이다. 십진법에서 소수점 이하의 숫자를 반올림하여 1로 계산하려면 0.5 이상이어야 한다. 0.5 이하는 0으로 환원된다. 0.6은 1로 계산되지만 0.4는 0으로 환원된다. 그렇다면 0.00000000001은 1로 반올림해야 하는가, 아니면 0으로 환원되어야 하는가? 0으로 환원해야 한다. 따라서 수십조 회나 수십억 년 동안의 그림 그리기 후에 새로운 것이 등장할 확률은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0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누적적 자연선택론에 의하여 복잡한 기계장치가 등장할 확률은 없다는 뜻이다.
둘째, 진화론자들은 누적적 자연선택론이라는 용어 그 자체에서 이미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 속에 빠져들어 간다. 진화론자들이 우연 발생을 말하려면 어떤 경우에도 “선택”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선택”은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 진화론자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온 우주가 인격적 존재자들에 의하여 형성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 수조 횟수만큼 타이핑을 칠 수 있는 원숭이는 없다.
넷째, 진화론자들은 어떤 하나의 기계장치가 10% 갖추어진 상태에서 작동하다가 수억 년 이상 지난 후에는 20% 갖추어진 기계장치로 진화되고, 계속하여 30%, 40%… 80% 등으로 복잡한 구조를 갖추어 가면서 지속적으로 작동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기계장치는 마지막 부품 하나가 맞추어져서 100% 완성품이 되어야만 비로소 작동하며, 완성품이 되기 전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100% 완성품으로 창조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근거다.
목적론적 논증 반론에 대한 답변
어떤 사람은 목적론적 논증에 대하여 이런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 우주 안에는 목적과 기능을 가진 정교한 구조도 존재하지만, 목적이 없는 무질서한 부분도 존재하지 않느냐? 목적과 기능을 가진 정교한 구조를 볼 때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지만 무질서한 부분을 보면 하나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 질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첫째로, 우주 안에서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부족하여 무질서하게 보이는 것일 뿐, 과학이 좀 더 발전하여 연구가 이루어지면 목적과 질서를 가진 부분으로 바뀔 수 있다. 예컨대 바다에 높은 파도가 일어나고 미칠 듯이 천둥과 번개가 치는 광경은 무질서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다에서 높은 파도가 일어났다가 되돌아가면서 공기 중의 막대한 양의 산소를 바닷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면, 물고기들이 산소 부족으로 죽는 일이 없게 된다. 하늘 가득히 번개가 치면, 막대한 양의 질소가 생산되어 온 땅에 떨어지고, 땅에 떨어진 질소는 산천초목을 위한 좋은 비료가 된다.
둘째로, 만에 하나 우주의 99%가 무질서 속에 있더라도 단 한 건이라도 목적이나 기능이 있는 정교한 질서가 존재하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해변에 조개가 살고 있는가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조개 한 개만 발견하면 된다. 그러나 해변에 조개가 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변 전체를 뒤져 봐야 하고, 조개의 유생들이 바닷물에 떠다니므로 바닷물을 다 조사해 봐야 하고, 조개는 바위 밑 1미터까지 파고 들어가므로 해저를 다 탐사해 봐야 한다. 이것은 지난한 작업이다. 이처럼 이 우주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딱 한 건의 정교한 구조물만 있어도 된다. 그러나 이 우주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이 우주를 다 탐사해 봐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따라서 무신론은 영원히 증명이 불가능한 거짓말이다.
4. 인류학적 논증
인류학적 논증은 인간의 인격이 지닌 자아 개념, 자유 개념, 도덕법 개념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논증법을 가리킨다.
첫째로, 인간에게 자아가 있다는 사실이 인격적인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슈퍼마켓을 생각해 보자. 슈퍼마켓 안에 있는 물품들은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일목요연하게 분류되어 정리되어 있다. 슈퍼마켓의 물품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슈퍼마켓의 주인이 있음을 증명한다.
인간에게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정보들이 마음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아마도 하루에도 수만 가지 이상의 정보들이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 정보들은 어떤 질서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들어온다. 만일 마구잡이로 들어온 이 정보들이 마음 안에 들어오는 그대로 쌓인 것이 인간의 마음의 전부라면, 인간의 마음은 거대한 쓰레기산과 같은 것이 될 것이며,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서 분열된 상태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청난 분량의 무질서한 정보들이 주제별로 혹은 시간별로 잘 분류되어 정돈되어 있어서 필요할 때 꺼내다가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불필요한 많은 양의 정보들은 마음의 기억에서 퇴출당하기도 한다. 이것은 아주 놀랍고 경이로운 작업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슈퍼마켓의 물품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인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정보정리 현상은 우리 안에 인격적인 주체가 실재함을 증명한다. 이 인격적인 주체를 자아라고 부른다. 자아는 놀랍고 경이로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자아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각기 다른 많은 무질서한 정보들이 몰려 들어와도 분열되지 않고 인격적인 통일성을 견실하게 유지하면서 이 모든 정보들을 장악하여 분류하고 정리하고 자기 목적에 맞게 사용한다.
그러면 이 자아는 어디서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 자아를 만들어서 넣어 준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세계가 이 자아를 나에게 넣어 준 기억도 없다. 자연은 인격체가 아니므로 인격체를 넣어 줄 수가 없다. 이 자아는 내가 아닌 어떤 인격적인 존재로부터 온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동료 인간이 이 자아를 나에게 넣어 준 기억도 없고 또 넣어 줄 능력이나 방법도 없다.
그런데 이 자아는 하나가 아니다. 자아를 가진 존재는 현재에도 수십억 명 이상이며, 과거에 이미 등장했던 인간들을 합하고 또한 미래에 등장하게 될 인간들까지 합하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된다. 이 모든 인간들의 자아를 만들어 넣어 줄 수 있는 존재는 어떤 존재라야 할까? 스스로가 인격적인 주체이자 천문학적인 숫자의 모든 자아들을 어거(馭車)할 수 있는 존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무한하시면서도 전능하시고 인격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밖에 없다.
둘째로, 인간의 자아의 특징은 선택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들어오는 정보들을 자유롭게 분류하고 정돈할 수 있는 것도 자아가 선택의 자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선택의 자유를 나에게 넣어 준 기억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이 선택의 자유를 나에게 넣어 줄 수도 없다. 선택의 자유는 인격적인 존재에게서만 가능한 것인 반면에 자연 그 자체는 비인격적인 사실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를 넣어 줄 수 있는 존재는 일단 본인 자신이 인격적인 존재로서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가진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온 세상의 모든 인류가 선택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류가 모두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천문학적인 숫자의 이 모든 인간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넣어 줄 수 있는 존재는 무한하고 전능하시며 동시에 인격적인 존재로서 스스로가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가진 존재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간들의 숫자가 천문학적으로 많아도 이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선택의 자유는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이 선택의 자유는 한 존재로부터 왔다는 뜻이다. 이런 조건에 맞는 존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능하시고 무한하시며 동시에 인격적이시고 주권적이신 기독교의 하나님밖에는 없다. 주권적이라는 말은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완벽한 자유를 구사한다는 뜻이다.
셋째로, 인간에게 도덕법이 있다는 사실이 인격적인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어떤 일이 “옳다” 혹은 “그르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양심이라고 한다. 양심은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기능들 – 이성, 감성, 의지, 감각 등 –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으로서, 인격적 주체로서의 자아가 지닌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런데 어떤 일이 옳다거나 그르다고 판단한다는 것은 판단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판단기준이 없이는 옳다 또는 그르다는 판단을 할 수 없다. 옳은 일은 해야 하는 의무이고 옳지 않은 일은 해서는 안 되는 금기다. 온 인류의 마음속에 있는 이 판단기준을 “마음 판에 새겨져 있는 도덕법”이라고 한다.
도덕법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문헌이 모세의 율법인데, 모세의 율법만큼 명확하지는 않지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도덕법과 매우 유사한 도덕법이 모든 인류의 문명권에서 확인된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문명권에도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관념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하늘의 개념이나 사랑의 개념에 있어서 성경적 개념과 타 문명권의 개념이 상당한 의미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늘은 경배의 대상이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라는 틀은 같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이 성경에 명확히 나와 있는데, 이 원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등장한다. 서양의 경우에 칸트의 정언명령 제1항은 어떤 도덕적인 격률이 바른 격률이 되기 위해서는 나 혼자의 경우에만 적용하여 타당성을 인정받아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의 입장에 서서 적용했을 때도 타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황금률의 세속적 버전이다. 동양에도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격언이 있는 바, 이 격언이 바로 황금률이다.
제5계명인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원리는 모든 문명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제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원리도 모든 문명권에서 공통적으로 인륜의 길로 제시된다. 제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도 모든 문명권에 공통으로 나타난다. 물론 각 문명권마다 합법적인 결혼제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문명권에서는 일부일처를 말하고, 어떤 문명권에서는 일부다처를 말하고, 또 어떤 문명권에서는 다부일처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 밖에서 행하는 성관계가 바른 인류의 길이 아니라는 원리는 모든 문명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제8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는 원리도 모든 문명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제9계명인 이웃에게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명령과 유사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도 모든 문명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사실을 사실 대로만 말하라는 뜻은 아니고 이웃을 상해하고자 하는 의도로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경우를 특정 한다는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제10계명은 탐내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욕심꾸러기가 나쁜 사람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이처럼 모든 문명권에 바른 인류의 길의 원리들에 대한 인식이 공통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도덕법이 새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도덕법은 누가 새겨 준 것일까? 내가 도덕법을 내 마음 안에 새겨 넣은 기억이 나에게는 없다. 나에게 없다는 말은 모든 인류에게 없다는 뜻이다. 모든 인류가 자신의 마음속에 도덕법을 새겨 넣은 기억이 없으니 이 도덕법은 인간으로부터 –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 온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으로부터 이 도덕법이 올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자연은 비인격적인 사실의 세계로서 인격적인 관계에서라야 통용되는 도덕법의 근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욥은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 인고”라고 물은 후에(욥 28:12, 도덕법이 어디에서 기원하는가에 대한 물음),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고(욥 28:13, 도덕법이 어떤 인간으로부터도 기원하지 않았다는 뜻), 그렇다고 해서 깊은 물과 바다와 모든 생물과 공중의 새 곧, 자연세계에서 찾을 수 없다(욥 28:14,21, 자연에서는 도덕법의 기원을 찾을 수 없다는 뜻)고 한탄한다. 도덕법을 새겨 준 자는 인간이 아니고 자연도 아니면서 어떤 인격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완전한 도덕법의 소지자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천문학적인 숫자의 모든 사람들에게 도덕법을 심어 줄 수 있는 분이라면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존재여야 한다. 이 조건에 맞는 존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밖에는 없다.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 천문학적인 분량의 무질서한 정보들에 휘둘리지 않고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분류하고 정돈하여 요리하는 자아,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인 도덕법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전능하고 무한하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한다.
5. 종교적 논증
종교적 논증은 모든 인류에게 신을 숭배하는 생활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논증이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모든 인류에게는 시대적으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지리적으로는 북극의 에스키모인들로부터 열대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신을 숭배하는 관습이 나타남을 증언한다. 그러면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신 숭배 관습은 도대체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첫째로, 볼테르(Voltaire)는 원래 사람들은 신에 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우연히 제사를 드리다 보니까 신에 대한 관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을 제사기원설이라고 한다. 인류가 신에게 제사를 드려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제사가 신을 향하여 드리는 예식이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제사 드리는 장면을 보는 사람은 신의 존재를 믿던, 믿지 않던, 제사 드리는 시간에 신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제사라는 관념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인데, 이 질문에 대하여 제사기원설은 아무런 답변도 주지 못한다. 제사 드리는 자 자신이 제사라는 관념을 자기 자신에게 넣어 준 일이 없다. 아마도 누군가로부터 제사에 대하여 배웠음이 분명한데, 제사 드리는 자 자신의 경우를 미루어 생각해 볼 때 그 누군가도 그 자신이 그 관념을 자기 자신에게 넣어 준 일이 없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인간에게 신에 관한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제사 개념을 넣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사의 관념은 인간으로부터 올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인간 안에는 제사 관념이 있다. 누군가가 이 관념을 인간에게 넣어 주었으니까 이 관념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누군가는 첫째로, 인간이 아니지만 인격적인 존재이어야 하며, 둘째로, 인간 안에 들어온 신 관념을 넉넉히 다룰 만한, 인간보다 더 크고 깊은 존재일 수밖에 없는데, 그 존재 후보로서 가장 적절한 자는 하나님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재하신다.
Thomas Hobbes (1588-1679)
둘째로,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와 흄(David Hume)은 이른바 공포기원설을 주장했다. 인류는 불, 지진, 폭풍우, 맹수와 같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자연의 힘을 보고 공포를 느끼고 이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기 마련이다. 인류가 자신의 힘으로 이 해로운 힘들을 정복해 버리면 최선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한계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러면 이제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전략은 그 해로운 힘을 주인으로 모시고 철저하게 주인에게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너무나 크고 강력하여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이 해로운 힘들을 주인으로 모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나온 것이 신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어떤 힘을 보고 그 힘이 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 이 질문에 대하여 공포기원설은 답변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약초꾼이 약초를 캐기 위하여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풀을 보고 “이것은 약초야”라고 알아본다고 가정해 보자. 이 약초꾼이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 그 풀을 보는 순간 그 풀이 특정한 기능을 가진 약초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아보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람 머릿속에 이미 “이런 색깔을 띠고 있고, 이런 냄새가 나고, 모양은 이렇게 생긴 것이 바로 약초다.”라는 교육을 받아서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있고, 이 입력된 정보에 대입시켜서 들어맞으니까 그 풀이 약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해로운 힘들을 보고 이 힘들을 신으로 규정했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신 관념이 표준적인 틀로 이미 내장되어 있으니까 이 틀에 대입시켜 보고는 이 힘들이 곧 신이라고 규정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만큼 크고 강력하며, 인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세력이 곧 신이다.”라는 관념의 틀이 인간의 마음속에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속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이 신 관념의 틀은 누가 넣어 주었을까? 인간 자신이 그것을 넣어 준 기억이나 경험이 없다. 나에게 그런 기억이 없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인류에게 그런 기억이나 경험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은 누구일 수밖에 없는가? 인격적인 존재이면서 신 관념을 아우를 수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데, 이 조건에 맞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재하신다.
셋째로, 어거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인간들 가운데는 어떤 특정한 물건들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거나 이 물건들이 자기의 수호신이라고 생각하는 습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바, 이 습성을 반복하다가 자연스럽게 신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을 주물숭배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설명도 주객이 전도된 설명이다. 자기를 수호해 주는 물건을 신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은 신에 대한 관념이 이미 그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가능한 것이다. 제사기원설이나 공포기원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물숭배설의 경우에도 인간 안에 있는 신 관념이 어디로부터 기원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명도 하지 않는다. 앞의 두 이론의 경우와 같이 주물숭배설도 하나님만이 이 관념을 넣어 주시기에 유일하게 적합한 후보라고 말해야 결함이 보완된다.
Herbert Spencer (1820-1903)
넷째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신 관념이 인간의 꿈으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앞의 세 이론들 – 제사기원설, 공포기원설, 주물숭배설 – 이 한결같이 신 관념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스펜서는 신 관념의 기원을 밝힌다. 그러면 신 관념이 꿈으로부터 기원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사람이 꿈속에서 이미 죽은 자를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꿈속에서 나타난 이미 죽은 자는 살아 있는 사람과 다르다. 첫째로, 꿈속에 나타난 죽은 자는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다. 현실 속에서 죽은 자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사람이 꿈속에서는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기도 한다. 둘째로, 꿈속에 나타난 죽은 자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은 적어도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셋째로, 꿈속에 나타난 죽은 자는 몸이 없는 존재다. 꿈속에 형체를 가지고 나타나지만, 그 형체의 몸은 어디에도 없다. 이처럼 죽은 자로서 몸이라는 형체가 없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면서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 – 이 존재를 우리는 귀신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꿈속에서 귀신을 본다. 사람들은 꿈속에서 귀신을 만나는 경험을 통하여 신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령기원설이라고 부른다.
스펜서는 신 관념의 기원을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는 앞의 세 이론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으나, 스펜서도 여전히 또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다면 꿈속에서 보는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는 또 어디서 기원했느냐 하는 것이다. 꿈속에 나타나 몸은 없이 형체만 가지고 영원불멸하는 존재로서 활동하는 귀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
꿈속에 이런 장면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 장면을 발생시킨 근원이 되는 자료가 인간 안에 있다는 뜻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Zigmund Freud)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심리적 기재로 환원시켜 설명하고 인간의 모든 문제를 심리적인 조작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마치 증명된 것처럼 설명함으로써 기독교적인 인간관에 끼친 해악이 큰 심리학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기독교적 인간관의 이해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프로이트 이전에는 인간의 영혼은 이성 또는 의식의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견해는 사실이 아니며 인간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본 관점임을 증명했다. 프로이트는 세 가지 현상에 주목했다. 하나는 언어학습이다. 아이들에게 단어나 문장을 가르쳐 주면 다 잊어버린다. 단어들이 의식의 세계 안에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몇 년 지나고 나면 놀랍게도 말문이 트이는데, 이때 엄청난 분량의 단어들을 구사하면서 말을 하기 시작한다. 만일 의식의 세계가 인간의 영혼의 전부라면 이 현상은 설명될 수가 없다. 두 번째는 정신질환자의 횡설수설이다. 횡설수설은 이성의 세계 안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성의 세계에는 없는 횡설수설이 나온다는 것은 그 내용의 단편들이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셋째는 꿈이다. 꿈속에서는 현실 속에서 곧, 의식의 세계 안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세계가 전개된다. 이 세계를 형성시킨 자료가 인간 안의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세 가지 현상에 근거하여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의 세계 밑에 의식으로는 감지가 안 되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어떤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관점은 인간의 영혼이 이성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본 서양철학의 관점보다 훨씬 더 성경에 가까운 이론이다. 특히 바울은 인간은 겉 사람(이성 또는 의식의 세계에 해당)으로만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더욱 깊은 차원인 속사람의 차원에까지 뻗어 있다고 보았는데, 바울이 생각하는 겉 사람과 속사람의 구도와 프로이트가 보는 의식과 무의식의 구도는 대체로 상응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꿈속에 나타난 세계는 인간 안의 어딘가에 실재하는 것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귀신의 관념 곧 신의 관념이 이미 인간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귀신이 꿈속에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귀신을 보고 그 특징을 간파하여 그것이 곧 신이라고 판단한다는 것도 이미 인간 안에 신의 관념이 실재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면 그 관념은 누가 넣어 주었는가? 그 적절한 후보는 앞의 세 논증의 경우에 이미 말한 것처럼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실재하신다.
이상원(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https://theworldview.co.kr/archives/13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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