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코로나 19와 뉴노멀에 대한 분석

하나님아들 2021. 10. 26. 21:10
 

코로나 19와 뉴노멀에 대한 분석

 

 

이 태 욱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실천신학(예배·설교학)

 

. 코로나 19와 뉴노멀에 대한 분석

 

A. 코로나 19에 대한 이해와 일상의 변화 분석

 

1. 코로나 19에 대한 이해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된 코로나 19의 정확한 명칭은 “COVID-19(Corona Virus Disease 2019). CO는 코로나(Corona), VI는 바이러스, D는 질병(Diease), 19는 처음 발생이 보고된 2019년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정한 공식 명칭은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홀로 생존할 수 있는 세균과 달리 숙주의 유전체에 올라타서 그 숙주가 성장할 때 함께 증식하는 생물로 엄밀하게 말하면 생명체가 아니다. 바이러스는 동물과 식물의 세포에 기생하면서 다양한 질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사실 우리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한 바이러스는 코로나 19가 처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2003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2년 메르스를 경험했다. 당시에도 바이러스는 여러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고, 인간의 건강을 해쳤지만,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코로나 19만큼 많은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코로나 19는 전에 없던 강력한 전파력으로 전 세계 모든 사람의 건강을 위협하고, 일상을 파괴하고 있다.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온 세계가 한마음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20 10 13일 현재도 정확한 치료법과 백신은 개발되지 않았다. 코로나 19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후 이에 대한 자료는 다양한 곳에서 접할 수 있지만, 가장 정확하고 간결하게 정리해 놓은 곳은 대한민국 질병관리청 인터넷 홈페이지다.

 

우리가 흔히 코로나 19라고 부르는 바이러스의 정확한 명칭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이후 코로나 19).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SARS-CoV-2 감염에 의한 호흡기 증후군을 말한다. 이 전염병은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 생기는 비말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나 동물에게 전파되기도 하고, 코로나 19에 오염된 물건을 만진 후에 눈, , 입을 만질 때 감염된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발열과 기침, 호흡곤란, 폐렴 등 경증에서 중증까지 다양한 호흡기 감염증이 나타나고, 가래, 인후통, 객혈과 오심, 설사도 나타난다. 바이러스 감염 후 증상이 발현되기까지 1-14일의 잠복기가 있으며 20 9 11일 현재 특별한 치료제는 없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병의 증상에 대응하면서 환자를 치료하고 있으며 전 세계 치명율은 약 3.4%(WHO, 20 3 5일 기준). 특히 나이가 많고 면역력이 약하며, 기저 질환을 앓고 있던 환자가 주로 사망하고 있다. 백신이 없기 때문에 손을 깨끗하게 씻고, 마스크를 착용하며, 기침할 때 입과 코를 가려 비말이 전파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최초 발생 원인에 관한 연구는 진행 중이며, 중간 숙주로 박쥐나 사향고양이, 천산갑이 지목되기도 했다. 만약 천산갑이 중간 숙주라면 중국 사람들이 천산갑의 비늘을 한약재로 만들기 위해서 가공하는 중에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 왔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천산갑 외에도 여러 희귀 동물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시식하고 있는데, “야생동물을 포획하고 요리하는 과정 가운데 동물들에 붙어있던 바이러스들이 인간에게 건너온다.” 바이러스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적응된 동물들은 바이러스로 인해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지만, 인간의 신체는 처음 맞이하는 바이러스와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인간의 면역 체계는 새롭게 침입한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이 과정에서 몸에 열이 나기도 하고, 통증을 느끼며, 폐에 출혈이 생기거나 물이 차 사망하기도 한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전염성이 높고,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는 고연령층 환자들 사이에서의 치명율이 높기 때문이다. 감기 인플루엔자의 경우 열 증상이 발현되기 1~2일 전부터 전파력이 있는 반면 코로나 19는 발열, 기침, 근육통, 호흡곤란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잠복기에도 전염력이 있고, 바이러스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전염성이 더욱 높다. 코로나 19가 현재 진행형이기에 치명율을 단정할 순 없지만, 20 7 24 0시 기준 한국은 2.13%의 치명율을 보이고, 나라마다 치명율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65세 이상의 노인과 임신부, 59개월 미만의 어린아이, 고도 비만자는 고위험군에 속하고, 장기 이식 후 면역억제제 복용 중인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 코로나 19 “20 3 18일을 기준으로 했을 때, 80세 이상의 치명율은 10.84%에 달하지만, 60대는 1.51%, 50대는 0.37%, 40대는 0.09%, 30대는 0.11%였다.”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도 모른 채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은 우리 모두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정부는 교회의 대면 예배를 금지했고, 밀폐된 공간에서 모이는 사업장을 폐쇄했으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되도록 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정부의 강제적 조치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인해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많이 변화되었고, 코로나 19는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코로나 19로 인한 일상의 변화

 

a. 경제적 변화

 

  코로나 19가 가지고 온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분야는 경제다. 코로나 19는 전 세계의 경제적 수요와 공급을 한꺼번에 무너뜨림으로써 전 인류를 위기 상황에 몰아넣고 있다. 장하준은 현재 상황을 1929년 세계 대공황보다 더 큰 위험으로 보고 기존의 경제 질서가 완전히 개편되리라 예측한다. 그의 말대로 현재 한국에서도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서비스업, 관광업은 큰 타격을 입은 반면 배달업과 택배업은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코로나 19가 현재 진행형이기에 앞으로 어떤 경제적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 정확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전염병이 인간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경제 활동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바꿀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먼저 코로나 19는 경제 활동의 주체인 노동자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제이슨 솅커(Jason Schenker)는 모든 노동자를 한 부류로 보지 않고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각 노동자에 따라 코로나 19로 인해 받은 영향이 다르다. 그가 일터에 나와야만 일할 수 있는 사람들로 꼽은 의료, 농업, 유통, 제조업, 공공시설 등의 필수 근로자는 코로나 19 상황에서도 현장에서 근무한다. 이들은 코로나 19 감염을 최대한 막기 위해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일하고 있지만,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전염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한다. 제이슨 솅커가 일터를 떠나 일할 수도 있는 지식 노동자로 분류한 금융, 기술, IT분야의 사람들은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근무한다. 마지막으로 현장에 나가야 일할 수 있지만, 필수 인력은 아닌 노동자들은 코로나 19로 인해 일자리를 잃어 생계가 막막해졌다. 특히 식당, 극장, 카페 등에서 근무하는 서비스업종 노동자들이 직장을 떠났고, 이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코로나 19는 본의 아니게 노동자들을 분류했고, 근무 환경을 완전히 바꾸었으며, 일부 노동자들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 19가 위협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은 바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들이 모일 수 없는 환경은 자영업자의 생계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정부에 의해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시설은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지속하는 동안 영업을 할 수 없고, 위험도가 높은 업종은 방역 수칙을 반드시 지켜가며 영업을 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외출과 외식을 자제하는 상황에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매출과 수입이 감소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많은 이들이 임대료를 내지 못해 고민하고 있고, 영업 중단을 고려하고 있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몰락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라고 볼 수 없는데, 이들의 경제적 위기가 가계 부채를 상환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경우 자산 폭락으로 인한 국가 경제 전반에 큰 손실을 입히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코로나 19는 개인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국가 경제까지 위협하고 있다.

 

b. 정치적 변화

 

  코로나 19가 정치 분야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투표다. 프랑스와 미국, 영국은 투표로 인해 코로나 19가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투표를 연기했다. 코로나 19는 민주주의의 꽃인 투표를 연기시킴으로써 각국의 정치적 상황에 변화를 야기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코로나 19가 진행중이던 20 4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코로나 19 방역 성공은 정치적 평가와 연결되기도 했는데, 코로나 19 방역을 잘 마친 국가의 여당은 지지율이 상승하기도 했다.

 

  또한, 코로나 19는 현실 정치가 누구에게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하는지를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바이러스는 건강하고 부유한 계층보다 연약하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치명적이라는 사실이 코로나 19로 인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파도 쉴 수 없는 사람들, 온라인을 통해 일할 수 없는 사람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장애인과 노인이 더 쉽게 바이러스에 노출되었고 생명을 잃었다. 코로나 19는 정치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 주었다.

 

c. 사회적 변화

 

  박성원은 코로나 19가 가지고 온 사회적 변화를 환경파괴에 관한 관심 증가, 심리적 공포 확산, 국가 차원의 국민 감시 강화, 비접촉 커뮤니케이션의 확산으로 꼽았다. 여러 전문가가 코로나 19의 원인을 인간의 동물 생태계 파괴라고 진단하고, “환경 오염이 심각한 곳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높게 나왔다라는 주장은 더 많은 사람이 현재의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자연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지게 만들었다. 또한, 매일 발표되는 코로나 19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는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크게 증가시켰다. 이로 인해 코로나 블루(Corona Blue)라고 불리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코로나 19가 장기화하면서 우울을 넘어 화와 분노를 표출하는 코로나 앵그리(Corona Angry)도 나타났다. 코로나 19는 인간의 정서와 심리 상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코로나 19는 전염병 방역을 위한 국가 차원의 국민 감시를 정당화했다. 모든 국민은 특정 장소에 방문하기 전 자신의 개인 정보를 입력하거나 기록해야 하고, 정부는 이를 수집해 방역 활동에 활용한다. 코로나 19 이전이었다면 이를 과다한 개인 정보 수집및 자유 침해로 보고 많은 사람이 반발했겠지만, 코로나 19는 모두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정보가 수집, 사용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19는 우리나라 사회의 모든 사람을 최대한 만나지 않는 비접촉 사회로

만들었다.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권하고 있으며, 대면 회의는 지양하고 화상 회의로 대체하고 있다. 학교도 온라인 환경을 구축해 학생과 선생님이 만나지 않고 수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고, 사회 전반적으로 비접촉 커뮤니케이션이 증가하고 있다.

 

d. 종교적 변화

 

  코로나 19는 종교 생활과 인식에도 변화를 몰고 왔다. 황재일은 코로나 19가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영적 각성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진단한다. 그는 코로나 19를 통해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질의 한계를 자각하고, 과학적 담론을 신성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과 불안함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명상을 제시한다. 필자는 명상이 바이러스에 관한 두려움을 줄여준다는 황재일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코로나 19가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된다는 진단에는 동의한다. 코로나 19는 우리가 그동안 믿어왔던 종교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인의 경우 코로나 19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하심에 대한 회의를 가지는 사람도 생겼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있다. 코로나 19는 사람들이 내가 믿어왔던 종교가 진짜 진리가 맞는지 검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코로나 19가 종교에 미친 두 번째 영향은 종교 생활 방식에 대한 변화다. 함께 모이지 못하는 상황은 기독교의 예배, 가톨릭의 미사, 불교의 법회를 온라인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특히, 매 주일 모이기를 힘썼던 기독교와 가톨릭은 온라인 예배와 온라인 미사를 통해 성도에게 예배와 미사를 드리도록 했고 이러한 형식의 변화는 각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의 경우 온라인 예배가 예배당에서 함께 모여 드리는 현장 예배를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가 시작되었고, 온라인 성찬에 대한 찬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와 성찬이 기존의 예식과 아무런 차이가 없으니 그대로 진행하자는 의견도 있고, 온라인 예배와 성찬은 코로나 19라는 비상 상황에서 진행되는 한시적인 예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특히 온라인 성찬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성찬을 최대한 미루고 성도들이 함께 모일 수 있을 때 성찬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이같은 논의는 코로나 19가 기독교에 미친 큰 영향 중 하나다. 코로나 19는 예배와 성찬에 대한 신학적 사유와 정의에 관한 대화와 논쟁을 촉발했다. 어떻게 결론이 난다고 해도, 이 시간을 통해 예배와 성찬에 대한 성도들의 이해가 더욱 깊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코로나 19는 우리의 경제, 정치, 사회, 종교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이중 본 연구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종교적 변화이고, 그중에서도 설교의 변화다. 본 연구는 코로나 19가 설교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나, 이보다 앞서 언급해야 할 내용이 있다. 코로나 19와 함께 최근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인 뉴노멀이다.

 

B. 뉴노멀 시대의 출현

 

1. 용어의 정의

 

  코로나 19 상황 이후 이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용어들이 자주 사용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단어가 바로 뉴노멀이다. 신문과 뉴스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이 용어는 코로나 19 이후 우리의 일상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다. 뉴노멀이란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기준이나 표준을 뜻한다. 경제 위기 이후 5-10년간의 세계 경제를 특징짓는 현상으로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시점에서 등장한다.” “뉴노멀은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시점에 자주 등장하는 말로,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표준을 의미한다. 경제학에서는 새롭게 형성된 경제 질서로 통용되는데, 일반적으로 2007~2008년 진행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등장한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를 의미한다.”

 

뉴노멀은 본래 경제 용어다. 미국의 벤처투자가 로저 맥나미(Roger McNamee)가 자신의 저서 뉴노멀의 시대(The New Normal)의 제목에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을 때, 그리고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촉발한 금융 위기로 세계 경제가 흔들리던 2009년 핌코(Pacific Investment Management Company, PIMCO)가 발간한 보고서에서 이 용어가 다시 등장했을 때, 이는 미국을 포함한 서방 경제가 예전처럼 위기에서 빠르게 회복하지 못하고 저성장, 저소비, 저물가, 그리고 고실업률이 지속하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는 의미였다.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과 거대한 엔진 미국이 이끄는 고속 성장을 향유했던 올드 노멀을 대신해 저성장에 따른 불안정, 강력한 정부 개입, 그리고 작아진 미국 시장과 여러 신흥 시장이 성장 활로를 모색하는 상황이 일상화된 뉴노멀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진단이었다.

 

  처음에는 경제 분야에서 사용되던 용어였지만, 특정한 시기와 사건을 중심으로 사회가 급변할 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기준이 적용되어 사람들의 일상이 되는 것을 뉴노멀이라고 부른다. 이때, 새로운 기준인 뉴노멀이 적용되기 이전의 기존 기준들은 올드 노멀(Old Normal)이라 부른다.

 

2. 코로나 19 시대 뉴노멀의 의미

 

  코로나 19 이후 뉴노멀이란 바이러스가 인류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면서 새롭게 생긴 모든 기준을 뜻한다. 일상생활 수칙으로 자리 잡은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착용, 흐르는 물에 비누로 손 자주 씻기, 기침이나 재채기할 때 옷소매로 입과 코 가리기, 씻지 않은 손으로 호흡기 만지지 않기를 비롯해 인간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부분 등에서 바이러스로 인해 새롭게 형성된 기준을 말한다. 코로나 19가 새롭게 만들어 낸 기준과 변화는 예배와 설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본 연구는 코로나 19로 인한 설교의 변화에 집중한다.

 

. 뉴노멀 시대와 설교

 

A. 언택트 (Untact) 시대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사람들 사이의 접촉을 통해 전파되기 때문에 오늘날의 뉴노멀 시대는 서로 만나지 않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언택트(Untact) 시대가 되었다. 언택트라는 용어는 접촉하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단어 ‘contact’ 앞에 부정적인 의미인 언(un-)을 붙여서 만든 신조어로 원래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점원 등 사람과의 접촉 없이 물건을 구매하는 새로운 소비성향을 의미했다. 이제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이 우리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 가운데 많은 사람은 대면하지 못하게 되었고, 언택트라는 용어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도서관에서는 자동차를 이용해서 책을 대출해 주고, 배달 음식은 굳게 닫힌 문 앞에 두고 전화로 배달 여부를 알려주면 주문자가 음식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경기장, 체육관, 운동장에서의 모임은 금지되었고, 최대한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이와 같은 현실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기독교 예배의 정체성이 힘써 모이는 것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전염병 상황은 우리 모두를 모이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예배는 큰 위기에 처했다. 예배와 함께 위기에 처한 것이 또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들려주는 설교다. 설교가 곧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설교는 예배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많은 그리

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이다.

 

1. 공동체 예배 설교의 실종

 

  코로나 19는 무엇보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듣는 설교의 자리를 파괴했다. 코로나 19 이후 뉴노멀 시대가 되면서 많은 교회가 온라인 미디어를 통한 예배로 전환하여 설교의 내용 자체는 전달하고 있지만, 함께 모이지 못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설교는 설교자가 일방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설교를 함께 듣고, 각자의 삶을 변화 시켜 나가는데 설교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설교를 함께 들을 때, 청중은 나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동일한 설교에 대한 다른 그리스도인의 반응도 관찰한다.

 

  함께 설교를 듣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행위 자체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각의 개인이 아닌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고,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없다. 함께 모여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공동체는 서로 간의 동질감을 느끼고, 내옆에 있는 이웃이 누구인지를 돌아본다. 코로나 19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체성과 공동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인 예배와 설교의 자리를 파괴했다.

 

2. 심방 설교를 통한 위로와 권면 실종

 

  코로나 19는 그리스도인들의 평범한 일상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심방 설교를 파괴했다. 한국 교회에서 설교는 성도들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에게 기쁜 일이 있을 때와 슬픈 일이 있을 때 모두 선포되곤 했다. 개업, 이사(성도가 계획하고 원하던), 결혼, 돌잔치 등 기쁜 일이 있을 때 설교자는 성도와 함께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성도는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했다. 반대로 입원, 장례, 이사(성도가 계획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와 같은 슬픈 일이 있을 때, 설교자는 성도가 요청하기 전에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했다. 설교는 성도들이 기쁨을 누릴 때에 그들에게 기쁨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도록 했고, 성도들이 슬픔을 경험할 때 그 슬픔을 위로하시고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했다. 이처럼 설교는 성도들의 삶에 아주 깊이 천착하여 그들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이들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데 코로나 19는 이렇게 성도들 삶의 자리에서 선포되던 하나님의 말씀을 중지시켰다. 일상에서의 모임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기쁜 일이 있어도 최소한의 인원만 모여 축하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목사를 부르지 않는다. 목사가 기쁨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예배도 없고 설교도 없다. 결혼식, 돌잔치 등은 가족 단위의 행사로 변경되었고, 병원은 보호자 1인을 제외한 면회객의 출입을 전면 금지했다. 그나마 설교가 선포될 수 있는 자리는 장례식인데, 이마저도 횟수와 시간에서 제한이 생겼다. 코로나 19로 인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만나서 선포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의 자리를 크게 위축시켰다.

 

3.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관계 실종

 

  설교자와 청중이 만나지 못하는 코로나 19 이후 뉴노멀 시대가 초래한 설교의 위험은 비단 설교가 선포될 자리와 시간의 축소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는 진공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특별한 영감을 주셔서 쓰신 성경에서 시작되고 최종적으로 그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청중의 삶까지 연결된다. 설교자는 성경과 청중 사이에서 다리를 놓아 그때 거기에서 역사했던 말씀이 오늘 여기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때 필수적인 것이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긴밀하고 밀접한 관계다. 설교자는 청중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그들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그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따라서 설교자가 청중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때 그는 해당 청중에게 가장 적합하고 시의적절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설교자들은 코로나 19가 창궐하기 전 성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의 어려움과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심방은 설교자가 성도와 관계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였는데, 이 말 가운데도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가 드러난다. 우리말 심방(尋訪)은 한자어로 방문하여 찾아본다라는 뜻이 있다. 설교자가 성도들을 방문하고, 찾아보는 이유는 성도들 삶의 자리를 더욱 깊이 알고, 성도들이 처한 어려움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설교자가 청중의 문제와 고민, 삶을 알고 이해할 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할 수 있고, 청중의 삶에 적확한 설교를 선포할 수 있다. 설교는 성경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청중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모든 설교자가 마주한 코로나 19는 설교자와 청중의 친밀했던 관계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서로 만날 수 없는 언택트 시대에 심방은 사라졌고, 설교자는 청중의 삶에서 유리되었다. 미디어와 기술의 발달로 전화 혹은 화상 전화를 통해 대화는 할 수 있지만, 직접 만나 삶을 나누고 서로의 감정과 정서를 나누었던 일은 추억이 되어 버렸다. 설교자는 더 이상 성도들의 삶을 날 것 그대로 확인하고 그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그들의 고민을 들어줄 수 없게 되었고, 그만큼 설교는 청중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삶의 그늘과 어두운 면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밝혀줄 힘을 잃어가게 되었다.

 

B. 미디어 시대

 

  코로나 19로 인해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는 현실은 모든 교회의 예배를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으로 진행하도록 설교 환경을 변화시켰다. 특히, 수도권에서 코로나 19가 확산되자 정부는 온라인 예배를 명령했고, 이를 위해 데이터 통신 비용을 보조해 주는 지원책도 등장했다. 코로나 19 시대에 온라인 예배는 교회가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형태가 되었다. 예배가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 청중에게 전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설교 또한 미디어를 통해 청중을 만나게 되었다.

 

1. 예배자에서 설교 소비자로

 

  온라인 예배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 청중에게 전해지면서 성도들을 예배자에서 설교 소비자로 변화시켰다. 대면 예배를 드릴 때 성도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인내심과 참을성을 가지고 설교를 들었다. 성도들은 평소 자신 생각이나 신앙에 부합하는 설교를 듣기도 하고, 본인의 생각과 다른 설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설교를 들었다. 이를 통해 청중은 본인이 듣기 싫어하는 메시지도 들을 기회가 있고, 이런 시간을 통해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경우 어떻게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온라인 환경을 통해 선포되는 설교는 이와 같은 청중의 고민과 성찰의 시간이 존재할 여건을 완전히 파괴했다. 이제 청중들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얼마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고, 듣지 않을 수도 있다. 청중은 설교를 듣다가 자기 생각과 다르면 언제든지 멈출 수 있고, 내가 원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의 설교만 마음껏 들을 수 있다. 온라인 예배 환경은 청중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설교만 언제든지 골라 들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성도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설교만 골라 듣는 설교의 소비자가 되었다.

 

2. 설교 쏠림 현상의 극대화

 

  청중이 설교의 소비자가 되면서 특정 설교자에게 성도들의 관심이 몰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온라인 예배 이전에도 많은 성도는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설교를 듣고, 추가로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경우가 있었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온라인 설교가 일반화되면서 일부 대형교회 설교자의 설교를 더 많은 사람이 듣게 되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모든 설교자는 설교 무한 경쟁의 자리로 내몰렸다. 이전까지 설교자들의 경쟁자는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존재하는 교회의 설교자였다. 자동차로 인해 성도들이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접근성은 성도들이 교회를 선택하고 설교자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온라인 설교 시대는 이와 같은 물리적 제약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이제 모든 설교자의 설교는 인터넷과 유튜브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성도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상품이 되었고, 설교 무한 경쟁의 시대가 도래했다. 성도들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서 어떤 설교를 들을 것인지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목회자의 설교를 꼭 듣지 않아도 되는 상황은 성도들에게 좀 더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를 접할 기회를 제공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설교를 듣고, 다른 교회의 설교를 추가로 듣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유튜브의 구독자 수를 비교해 봄으로써 대략 추정할 수는 있다.

 

<설교자별 유튜브 구독자 현황>

 

                                        유튜브 채널명                         설교자 명                       구독자 수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15 1천 명

                                       김동호 목사 아카이브               김동호 목사                     15만 명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                     8만 명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                     5 5천 명

                                       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                     5만 명

                                       여의도 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                     3 3천 명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                     2 8천 명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                     2 4천 명

                                       지구촌교회                              최성은 목사                     2만 명

                                                              (이동원 목사)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1 2천 명

 

 

  이를 통해 우리는 정말 많은 사람이 소위 유명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고, 코로나 19로 인한 온라인 설교가 지속되면 더 많은 사람이 온라인을 통해서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설교가 아닌 다른 설교를 들을 가능성은 더 커진다. 이제 한국 교회의 모든 설교자는 위에 언급한 유명 설교자들과 설교로 경쟁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설교 환경은 청중이 특정 설교자의 설교를 청취하는 상황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3. 설교 사각지대의 출현

 

  코로나 19로 인해 온라인 예배가 일반화되면서 모든 성도가 다양한 설교를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19는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온라인 예배를 위해서는 온라인 예배에 접속할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과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한다. 설교를 집에서 시청할 경우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휴대폰을 사용할 경우 스마트폰과 설교를 시청하는 데 사용할 인터넷 데이터가 있어야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앞서 언급한 기본적인 인프라를 갖추지 못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설교 사각지대가 출현했다.

 

  온라인 예배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가장 대표적인 계층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는 노인층이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 자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노인은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지만, 혼자 사는 노인에게 온라인 예배는 그림의 떡이다. 온라인 예배가 일상화된 현재, 컴퓨터와 스마트 폰을 사용할 줄 모르는 독거노인은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싶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어도 건강하기만 하면 예배당에 나와 들을 수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코로나 19 시대의 노인들에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코로나 19로 인해 설교에서 소외된 두 번째 계층은 저소득층이다. 집에 컴퓨터를 설치하고 인터넷을 사용할 만큼 여유가 없는 사람들, 스마트폰을 살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 스마트폰을 보유했지만, 설교를 들을 만큼의 인터넷 데이터를 구매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있다. 코로나 19는 하나님의 말씀마저 온라인 설교를 들을 만큼의 경제적 수준을 갖추어야 하는 일종의 장벽을 만들었고, 이 장벽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씀에서 소외되고 있다.

 

4. 가정 예배를 통해 대체되는 설교자의 자리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인한 온라인 예배와 함께 증가한 예배의 형태가 가정에서 드리는 가정 예배다. 일부 교회는 온라인 예배 대신 예배 순서지를 미리 작성해서 교인들에게 배포했는데, 설교를 한정된 순서지에 인쇄해 가정 예배 인도자가 읽도록 했다. 코로나 19는 설교자가 직접 설교하지 못하고 설교자가 작성한 설교를 다른 사람을 통해 청중에게 전달하는 완전히 새로운 설교 환경을 만들었다. 코로나 19 이전 설교문 작성자와 전달자가 다른 경우는 다른 사람의 설교를 표절해서 설교할 때뿐이었지만,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는 현재의 가정 예배 상황은 설교문 작성자와 설교자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가정 예배를 인도하는 설교자는 설교문을 작성한 설교자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단순 전달하게 되었고, ‘설교자가 곧 메시지라는 설교에 대한 이해에 변화가 생겼다. 가정 예배에서 만큼은 설교자가 자신이 경험하고 발견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목회자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대신 전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설교 전달 상황의 변화는 설교에도 변화를 가지고 왔는데, 설교문 작성자는 자신의 설교를 누가 전달할지 모르기 때문에 누가 전달하더라도 청중이 쉽게 이해하고 도전을 받을 수 있도록 명료하게 설교를 정리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되었다.

 

  이처럼 코로나 19로 인한 설교 전달 환경의 변화는 설교의 형식과 내용에도 변화를 가지고 왔고, 많은 사람은 설교 메시지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C. 의혹의 시대

 

1. 코로나 19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해석

 

  코로나 19로 인해 고통받는 많은 사람은 전염병으로 인해 일상이 파괴되고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은 과연 어디에 계신지?’ 묻고 있다. 이 질문은 인간의 삶에서 고통과 고난을 만났을 때, 비리와 부조리를 확인할 때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속해서 던져왔던 질문이었지만, 코로나 19는 질문의 강도와 횟수를 더욱 증폭시켰다. 특별히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잔인하게 다가오는 전염병의 참혹함은 설교자와 신학자의 답변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여러 신학자와 목회자가 나름의 답을 내놓았는데, 본 연구에서는 존 파이퍼(John Piper)와 이도영, 이정규,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존 레녹스(John Carson Lennox)를 통해서 코로나 19에 대한 답변을 살펴본다. 본 연구에서 이들을 선정한 이유는 이들이 코로나 19에 대한 빠른 답변을 내놓았고, 많은 독자에게 선택받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의 코로나 19에 대한 해석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존 파이퍼는 자신의 책,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Coronavirus and Christ)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크게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의도 아래 있다라고 말한다. 이같은 존 파이퍼의 전제에 따르면 코로나 19로 인한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은 코로나 19를 계획하셨고, 우리에게 보내셨으며, 통제하신 후에 끝내실 것이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그렇다면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은 코로나 19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이에 대해 존 파이퍼는 여섯 가지의 해답을 제시하는데, 그중 두 가지의 해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하나님은 코로나 19를 통해 끔찍한 도덕적 현실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제시한다. 존 파이퍼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불행이 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존 파이퍼에 따르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고통과 괴로움을 보내신 이유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죄의 끔찍함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현재 우리의 삶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님의 표지이자 비유이다.” 결국, 코로나 19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님의 표적이다.

 

  둘째, 하나님은 코로나 19를 통해서 특정한 사람을 심판하신다. 이 부분이 코로나 19에 대해 존 파이퍼가 주장하는 바 중 많은 사람에게 큰 관심을 받는 부분이다. 그는 개인의 모든 고통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아니지만, 특정한 사람에게는 심판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존 파이퍼는 이와 같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헤롯과 동성애자 같은 특정한 사람의 예를 든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의 죄를 보시고 그들을 심판하신다. 존 파이퍼는 코로나 19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적용되는 부류가 누구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

이 분명히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존 파이퍼는 코로나19는 인간인 우리의 죄를 다시금 확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표적이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정리한다.

 

  반면 코로나 19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도영은 자신의 책, 코로나 19 이후의 시대와 한국 교회의 과제에서 코로나 19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는 박유미의 말을 빌려 구약에 등장하는 전염병은 예언자를 통해 심판을 예고하고, 그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만, 코로나 19는 그 누구도 예고하지 않았고 정확한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 하나님의 심판에서 비롯된 전염병은 인간의 힘으로 절대 치료할 수 없지만, 코로나 19는 방역을 통해 예방및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심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도영은 코로나 19가 하나님의 심판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고, 그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니라, 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도영이 특히 비판하는 목회자는 존 파이퍼인데, 그는 존 파이퍼가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지금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도영은 존 파이퍼가 코로나 19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를 끝내실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십자가 안에 담긴 피해자의 탄원을 신원하는 능력을 알지 못하고 개인적 고난으로 인한 신앙고백을 사회적 재난에 대입했기 때문에 초래한 결과라고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이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다라는 진리를 방어하기 위한 강박적인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이도영은 지금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며 코로나 19를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주장할 때가 아니라, 코로나 19로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다고 말할 때라고 거듭 밝힌다.

 

  코로나 19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회개하라는 요청이 담긴 심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사람은 영국의 신약학자인 톰 라이트다. 그는 자신의 책, 하나님과 팬데믹(God and The Pandemic)에서 코로나 19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님을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준 비유 말씀을 통해 논증한다. 톰 라이트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주신 마지막 예언자이고 표적이기 때문에 예수를 제외하고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을 해석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이전까지는 여러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그의 아들을 통해서 단번에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회개 요청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단초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톰 라이트는 예수를 통해 코로나 19를 바라볼 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코로나 19는 우리에게 회개를 요청하는 하나님의 표적이 아니다. 예수는 포도원 소작인 이야기( 12:1-12)를 통해 이를 분명히 보여주시는데, 자신의 포도원에서 과실을 얻기 위해 종들을 보낸 주인은 자신의 아들이 죽자 더 이상의 종을 보내지 않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수가 우리에게 회개를 요청하는 최종 표징이다. 따라서 코로나 19는 우리에게 회개를 요청하지 않는다.

 

  둘째,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이 그의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고, 나사로의 죽음을 보며 너희가 회개하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셨다. 우리는 코로나 19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은 인간인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따라서 코로나 19와 같이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누가 회개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나셨는가? 와 같은 원인을 찾는 질문이 아닌 지금 누가 가장 고통받고 있는가? 이들을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와 같은 질문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을 던진 후에는 그 자리에 가서 우리가 직접 도와야 한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자신의 책,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Virus as a Summons to Faith)에서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보내시는 세 가지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브루그만이 구약성경을 통해 제시하는 전염병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 보내신 전염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을 집행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신다. 브루그만은 율법( 26:23-26)의 말씀과 인구 조사를 실시한 다윗(삼하 24:12-13)을 인용하면서 율법을 어기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벌이 내린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벌 가운데 전염병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시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전염병을 만났다면 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불순종이다.

 

  브루그만은 이같은 추론이 매우 합리적이지 않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 안에 믿을만한 질서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이 질서는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를 쉽게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우리 삶의 기준을 세워주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기 어렵다. 여기까지 들으면 브루그만이 존 파이퍼와 같은 의견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브루그만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경에 등장하는 전염병의 또 다른 면을 소개한다.

 

  둘째, 하나님은 전염병을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특별하게 사용하신다. 브루그만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후 기적을 일으켜 그들을 구출하시고, 이를 통해서 당신의 이름을 높이신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연을 활용한 다양한 기적을 보여주시는데, 가축의 죽음, 우박, 처음 난 것들의 죽음 등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개입은 이사야 2 12절부터 17절까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힘과 의지를 볼 수 있다.

 

  결국, 브루그만이 말하는 두 번째 요지는 전염병과 같은 자연적 재해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특별한 의지가 무엇인지 브루그만은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을 특별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보내셨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셋째,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한 자유로 거룩하심을 드러내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는 그 어떤 행동을 하실 완벽한 자유가 있다. 브루그만은 이와같은 하나님의 자유를 드러내는 성경 본문으로 욥기를 소개한다. 욥은 하나님의 무한한 힘을 결코 이길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통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인 우리가 생각하거나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일들을 행하실 수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질문을 던질 자격이 없고, 이 땅 위에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께서 하시는 일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인간이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신다.

 

  결국, 브루그만은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생각을 정리해 보자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은 지난날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심판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병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진짜 의도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코로나 19 안에 담긴 당신의 뜻에 관해 설명해 주지 않으시고, 당신의 자유를 인간인 우리가 넘볼 수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길 원하신다. 앞서 살펴보았던 두 명의 목회자와 신학자와는 달리 브루그만은 코로나 19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분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지금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라고 말한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수학과 명예교수인 존 레녹스는 자신의 책, 코로나 바이러스 세상,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Where is God in a Coronavirus World?)에서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그는 코로나 19를 만난 전 세계의 사람들이 지금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고,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궁금해 한다라고 말하며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존 레녹스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고통과 고난은 자연재해와 질병으로 인한 것이 있고, 이에 대해 인간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인간의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고통인데, 이에 대해서는 인간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 그는 코로나 19는 자연적인 이유로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이기 때문에 인간인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는 성경에서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이 분명히 드러나긴 하지만, 모든 재해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심판은 아니고, 이 세상에 악이 분명히 존재하긴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존 레녹스는 우리에게 큰 고통을 주는 코로나 19를 통해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원인이나 이유가 아니라, 이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찾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코로나 19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틀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친히 체험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끝이 아니다.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살펴본 것처럼 존 레녹스는 월터 브루그만과 같이 코로나 19가 하나님의 심판이냐? 아니냐? 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코로나 19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님을 전제한 후, 지금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설명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고 계시고 결국에는 이 고통을 치유하실 것이다. 하나님만이 코로나 19를 비롯한 모든 전염병을 완전히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정규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나, 이 어려움이 우리의 잘못이나 죄로 인해서 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고통없이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이 우리의 선함이나 공로 때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덕분인 것처럼, 우리가 마주하는 고통 또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정규에 따르면 우리의 고난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이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사용하셔서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드시며, 결국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가신다. 정리하면, 이정규는 하나님이 코로나 19를 왜 지금 우리 모두에게 주셔서 수많은 사람의 삶을 끝내시고 모두를 고통 가운데 몰아 넣으시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거나 괴롭히기 위함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는 코로나 19의 원인을 우리가 다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자고 요청한다.

 

  코로나 19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관해 목회자와 성서학자,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다양한 생각을 살펴보았다. 같은 코로나 19 상황을 마주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살펴본 목회자와 성서학자들의 견해 가운데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도 존재한다. 과연 이 중에 진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결코 대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코로나 19에 대한 각자의 해석을 기반으로 하여 선포되는 설교를 성도들이 들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을까? 같은 상황을, 성경을 근거로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는 설교를 들으며 성도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을까? 코로나 19로 촉발된 이와 같은 질문 앞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혼란스러워하며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대한 의혹을 키워가고 있다.

 

2. 하나님은 과연 정의로우신가?

 

  하나님이 정의로우신가? 라는 신정론의 문제는 코로나 19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악과 부조리가 드러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문제다. 김균진은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관한 문제 안에 네 가지의 요소가 전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첫째,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둘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 셋째, 불의하고 부조리한 현실로 인한 피조물의 심각한 고통, 넷째, 이 고통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함이다.” 우리는 고통과 고난을 만날 때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이 고난을 왜 그냥 두시는가? 인간인 우리의 능력으로 이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왜 그냥 계시는가?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을 운용하시는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이와 같은 질문은 언제나 있어 왔지만, 코로나 19 상황은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관한 더 크고 강력한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전 세계의 코로나 19에 감염된 환자는 26,183,883명이고, 사망자는 867,370명이다. 대한민국에서는 20,644명이 코로나 19에 감염되었고, 3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이 지금도 바이러스로 인해 야기된 질병과 싸우고 있고, 지금 이시간에도 생명을 잃고 있다. 코로나 19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이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손을 깨끗하게 소독하고, 마스크를 잘 쓰고, 불특정 다수와 접촉하지 않는 것뿐이다.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신정론의 질문을 더 강하게 불러일으킨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이 바이러스의 강력한 전파력은 우리 모두의 일상을 파괴했고, 코로나 19가 영향을 미친 범위는 그야말로 우리의 삶 전역이다. 전염성이 높지 않은 병의 경우 그 질병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제한적이다. 적어도 병에 걸린 사람들과 가까운 가족들, 환자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코로나 19의 높은 전염력은 많은 사람을 모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병에 걸린 사람은 물론이고,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까지 고통 받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이 자체적으로 만든 방역지침인 사회적 거리두기는 그 단계에 따라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고통을 주었다. 코로나 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조치이지만, 2.5단계의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하고 있는 20 9 3일 현재 수많은 자영업자는 폐업의 위기에 몰려 있고, 학생들은 학교에 등교해서 공부하지 못하고 있으며, 수많은 회사원은 회사에 출근하지 못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전 세계가 감당해야 할 경제적 손실은 엄청나고, 마음껏 외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코로나 블루(Corona Blue)’라고 명명된 우울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고, 온라인을 통해 예배드리고 설교를 듣고 있다. 또한, 코로나 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대한민국 질병관리청은 확진자가 발생한 장소를 다녀간 사람들을 역학 조사해서 감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검사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일에 정말 엄청난 인력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실정이다.

 

  이처럼 코로나 19는 정말 많은 사람에게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안겨주었기에 이로 인한 신정론의 질문은 더욱 크게 제기되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생할 때마다 교회를 비난하고, 교회에 다니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큰 수난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 묻는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백신과 치료제를 속히 허락하셔서 우리의 일상을 되돌려 주셔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을 보며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을 의심한다. 코로나 19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완전히 뒤흔드는 출발점이 되었다.

 

3. 추락하는 설교의 권위

 

  코로나 19는 설교자가 전하는 하나님이 말씀인 설교에 대한 회의와 질문도 촉발시켰다. 뉴노멀 시대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대해 의문을 가짐과 동시에 설교자가 선포한 설교에 대해서도 의심한다. 특히, 코로나 19에 대해 의문이 있지만, 현대 과학이나 이성에서 답을 찾지 못했던 사람들이 종교에서 답을 찾으려 시도하기도 하는데, 한국 교회의 몇몇 설교자는 이와 같은 사람들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했고 청중들이 코로나 19 이전 설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존경심과 권위는 크게 하락했다.

 

  코로나 19에 관한 설교자의 설교가 설교의 권위를 떨어뜨린 대표적인 사례는 20 3 7일 강남금식기도원을 섬기는 김성광 목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김성광 목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늘에서 신선한 공기가 내려와 영혼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고, 순수한 정신을 주며, 생각을 새롭게 한다.”라고 말하며 마스크를 벗어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렸지만, 코로나 19에 감염된 수많은 사례를 알고 있고, 이와 같은 설교 내용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사람들은 설교와 설교자, 교회 모두를 비웃었다.

 

  또한, 여러 설교자가 코로나 19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이나 견해를 드러내는 데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던 성도들이 경험하는 혼란은 더욱 커졌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성도들에게 설교가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설교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설교가 최소한의 이성과 지성을 사용해 합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의 이야기라면, 설교자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생각을 청중에게 주입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라면, 청중은 그런 설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청중이 설교에 집중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설교가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코로나 19가 변화시킨 설교의 환경과 선포되었던 설교 메시지들을 함께 살펴보았다. 뉴노멀 시대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위와 같이 설교했다면, 교회의 역사 속에서 전염병을 만났던 설교자들은 어떻게 설교했을까? 그들의 설교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엇이 있을까?

 

D. 교회 역사의 설교 분석

 

  코로나 19로 인해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일상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와 같은 전염병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볼 때 전염병은 예전에도 있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 역시도 전염병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전염병이 유행하는 시기에도 예배와 설교는 계속되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은 전염병을 어떻게 이해했고,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어떻게 설교했을까? 이를 살펴보는 것은 코로나 19 이후 뉴노멀 시대에 설교가 지향해야 할 설교 신학을 정의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당시의 설교자료가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기에 고대의 설교자들이 이렇게 설교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확한 설교문 혹은 설교에 관한 자료가 없다고 해서 당시 설교자들의 설교 메시지에 대해 전혀 유추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비롯한 여러 고대 문헌, 편지, 사회적 기록 등을 통해 전염병 시대에 설교자들의 메시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시대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그들의 메시지를 살펴본다. 두 시기가 교회 역사에서 전염병이 창궐했던 대표적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1. 초대교회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 그리스도인들의 대응과 설교자들의 설교 메시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최근에 출간된 책, 재난과 교회, 전염병과 마주한 기독교가 유용하다. 전염병과 마주한 기독교에 따르면 초대교회 시대에는 두 번의 큰 전염병이 발생했는데, 165년 시작된 역병은 15년간 로마 제국에서 크게 유행했다. 이 병으로 인해 로마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사망했고 아울렐리우스(MarcusAurelius) 황제도 목숨을 잃었다. 이 병의 정확한 명칭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미국의 세균학자 한스 진저(Hans Zinsser)는 천연두라고 추측한다.

 

  두 번째 역병은 249년 시작되어 262년까지 계속되었고, 후대 학자들은 이 역병이 홍역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가 설교를 통해 역병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키프리아누스 역병이라고 불리는 이 병 또한 로마 사람들의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왜 이런 재앙이 찾아왔는지?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모든 질병은 인간의 죄 때문이고, 역병을 보내신 분도, 멈추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대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설교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돌보고 보살피면서 이 질병을 이겨내야 한다고 설교했다. 이런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실제로 자신의 안위보다 이웃의 건강과 안전을 더 먼저 생각하며 환자들을 돌봤고, 환자로 인해 병에 걸리면 아픔과 고통을 감내했다. 전염병 당시 설교는 전염병의 원인에 대한 답과 함께 그리스도인이 질병과 주변의 환자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도 주었다.

 

2. 종교개혁 시대

 

  전염병은 종교개혁 시대에도 발병해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1511년부터 발병하기 시작한 흑사병은 수천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갔고, 수많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시작했다. 전염병의 원인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은 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527 7월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살고 있었던 비텐베르크(Wittenberg)에도 흑사병이 돌았고, 루터는 도망치지 않고 병에 걸린 환자들을 집에 불러 간호했다. 루터가 당시 어떻게 설교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의 편지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는 전염병이 도는 상황에서 목회자가 교회와 교구를 지켜야 하는지, 떠나야 하는지를 묻는 한 목회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먼저 루터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목회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기상황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라는 주의 명령을 잊지 말고 죽음을 피해 달아나지 말아야 하며, 이웃이 환난당했을 때는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고 썼다. 루터는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정성스럽게 돌보았던 사람이 전염병에 걸렸지만 완쾌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동료 목회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루터는 전염병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했고, 믿음을 잃지 않았으며, 묘지를 교외로 옮기자고 제안하며 지혜롭고 이성적으로 병을 예방하려 했다.

 

  이런 루터의 편지로 미루어 볼 때 루터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치고, 최선을 다해 병에 걸린 이웃을 돌보라고 설교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루터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이성과 지성을 사용한 방역에도 최선을 다하라고 설교했을 것이다.

 

  루터와 동시대에 살았던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는 본인이 흑사병에 걸려 죽을 뻔한 위기를 경험한다. 흑사병은 츠빙글리가 목회하던 스위스에 1517년부터 1520년까지 성행했고, 츠빙글리는 1519 9월 말에 흑사병에 걸려 10월쯤 크게 아팠다가 11월에 회복했다. 이때 그는 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자의 심정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후 츠빙글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면서 말씀이 중심인 예배를 드렸다. 죽음에서 살아난 이 경험은 그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츠빙글리가 정확하게 어떻게 설교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기도문과 이후의 여러 편지를 살펴보면, 전염병이 닥쳐왔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 결과는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라고 설교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츠빙글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따라야 할 진리이고, 하나님의 주권은 그 무엇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릇이니, 만드시든지, 부수시든지 당신의 마음대로 하시도록 모든 주권을 내어드리라고 설교했을 것이다.

 

  종교 개혁자 장 깔뱅(Jean Calvin) 또한 흑사병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했다. 깔뱅의 어머니는 그가 6살 때 역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1523년에는 고향에 퍼진 흑사병을 피해 파리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 깔뱅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봐야 했고, 역병에 걸린 가족들을 위로해야 했다. 흑사병은 깔뱅이 죽은 1564년 이후, 1568년에 또다시 유행해서 당시 제네바(Geneva) 아카데미의 교수들까지 직장을 잃었다.

 

  깔뱅은 전염병을 심판과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는데,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악한 원수들에게는 심판을,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훈련을 주신다. 따라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염병은 더 깊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고 이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 그들을 돌보신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우연이란 없고, 모두가 전염병으로 인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깔뱅은 역병을 당신의 자녀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하나님께서 보낸 심판이라고 생각했고, 전염병의 원인을 하나님에게서 찾았지만, 구체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가운데 있는 심판이라고만 말했다. 깔뱅은 모든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해야 한다고 권면했다. 결론적으로 깔뱅은 자신의 삶 가운데 큰 전염병과 지속적인 고통을 겪었지만, 이런 어려움을 그저 고난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신앙 성숙과 성화의 기회로 삼았다. 깔뱅은 전염병을 하나님께서 주신 훈련의 시간과 기회로 삼아 넉넉히 이겨내자고 설교했을 것이다.

 

  츠빙글리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도 흑사병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했다. 1564년부터 1565년까지 유행한 흑사병이 정말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갔는데, 불링거를 비롯한 가족들이 감염되었고 그의 친구들도 질병을 피하지 못했다. 불링거는 당시의 참상을 자신의 일기장에 상세하게 적어 두었고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어떤 치료를 했는지도 알 수 있다. 불링거는 종기 안에 고여있는 피를 빼고, 음식을 가려 먹고, 여러 약초를 상처에 발랐다. 흑사병은 불링거에게서 사랑하는 아내와 둘째 딸, 손자를 빼앗아갔고 그는 큰 슬픔에 빠졌다.

 

  불링거를 비롯한 당시 설교자는 오늘날 현대 의학과 같은 과학적 지식이 없었기에 흑사병을 하나님이 보내신 징계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삶 가운데 만연한 죄에서 벗어나고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링거는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인간이 맞이하는 종말에 대해 깊이 천착했고, 병에 걸린 채 죽음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라고 가르쳤다. 그는 성도들이 지금 겪고 있는 흑사병과 이어지는 죽음은 저주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불링거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과 의사를 통해 치료받는 일을 분리하지 않았고, 환자들이 최선의 의학적 치료를 받도록 권면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잃으면서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가슴 아파했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기대했다.

 

  1519년에 태어나 1605년에 세상을 떠난 종교개혁자 테오도르 드 베자(Theodore de Beze)도 다른 종교개혁자와 다름없이 흑사병을 경험했다. 베자는 아아르베르크(Aarberg) 개혁교회 목사였던 크레스토프 뤼타르트가 흑사병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병이 발병한 지역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 그는 다른 종교개혁자와 같이 흑사병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노의 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소중한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베자는 우리의 죄를 벌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흑사병을 보내셨다고 생각했고,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흑사병은 우리의 삶을 돌아볼 기회였다. 베자는 성경을 그리스도인이 가진 양심에 맞게 해석하여 적용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 흑사병이 창궐한 마을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닌 마음속 깊은 곳의 동기를 보고 판단하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흑사병에 대한 지침과 대응책이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따라 행동하라고 말했다. 베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성경 말씀을 해석하라고 권면했고, 흑사병이라는 절대적 위기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고 가르쳤다.

 

3. 전염병 시대 설교자의 설교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의 설교자들은 일반 성도들과 같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지만, 성도들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들의 편지와 책을 통해 그들이 전했을 설교의 메시지를 추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설교자들은 전염병의 원인을 인간의 죄로 보고 회개하라고 설교했다. 살펴본 것처럼 대부분 종교개혁자는 전염병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징조로 해석하고 성도들의 불순종과 방종을 회개하도록 설교했을 것이다.

 

  둘째,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다. 특히 츠빙글리에게서 돋보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와 인간의 순종에 대한 권면은 모든 종교개혁자 사이의 공통된 견해였다. 이들은 전염병을 보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병을 고쳐주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현재의 고통과 고난을 이겨내라고 설교했을 것이다.

 

  셋째, 설교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병에 걸린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라고 설교했다. 흑사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병이 나을 때까지 치료해 주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라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먼저 모범을 보임으로써 성도들에게 전염병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이웃 사랑이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접근은 아니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루터와 베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이웃을 간호했고, 병이 창궐한 마을을 떠나야겠다고 판단했을 때는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성도들에게 남겨주었다.

 

E. 한국 교회의 설교 현황

 

  지금까지 초대교회와 종교 개혁시기의 전염병에 대한 설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코로나 19가 확산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 전염병에 대해서 뭐라고 설교했을까?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설교자가 있기에 이들의 모든 설교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화제가 되고 주목을 받았던 설교자들의 설교를 통해 전염병 상황에서 선포된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은 가능하다. 신천지로 인해 코로나 19가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을 때 한국 교회 설교자들이 어떻게 설교했는지 인터넷 기독교 매체인 뉴스앤조이의 2020 2 25일 기사는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코로나 19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심판이다. 일부 설교자는 코로나 19가 처음 시작된 중국 우한 지역의 상황을 예로 들고 이 전염병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중국 공산당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했다. 또한, 코로나 19가 대구에서 신천지를 중심으로 확산하여 국민들의 지탄받는 상황을 예로 들며 코로나 19는 신천지를 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둘째, 코로나 19는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우리에게 보내신 징조다. 일부 목회자들은 코로나 19가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설교했다. 설교자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3)”를 인용하며 지금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중국 우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신천지 성도들처럼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코로나 19 확산의 큰 책임은 이단인 신천지에 있으니 우리는 이단을 조심해야 한다. 일부 설교자는 신천지와 본인이 속한 교단의 차이점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신천지의 잘못된 점을 부각했다. 설교자는 이번 기회를 통해 성도들이 이단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바른 믿음을 가지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넷째, 코로나 19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인간인 우리가 모두 알 수 없으니 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일부 목회자는 코로나 19가 하나님의 심판이나 징벌이라는 목회자의 해석을 경계하며 전염병으로 인한 하나님의 뜻을 신중하게 분별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설교자는 현재 코로나 19가 이단인 신천지를 통해서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지만, 병에 걸린 자들을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악인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설교자는 다른 이의 잘못을 비판하고 정죄하기보다 현재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조용히 기대하자고 설교했다.

 

  다섯째, 누군가를 정죄하기보다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자. 일부 목회자는 코로나 19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섣부른 판단을 보류하고, ‘신천지의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우리의 죄와 허물을 돌아보자라고 설교했다. 설교자는 모두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이 시기에 아무 말 없이 기도하며 침묵의 미덕을 지키자고 말했다.

 

  여섯째, 전염병이 창궐하는 위험한 시기일수록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역할을 묵묵히 해내자. 한 설교자는 초대교회 전염병이 돌았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돌본 예를 들며 우리도 이들처럼 고통당하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자고 말했다. 또 다른 설교자는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어려운 이들과 아픔을 나누고,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고 설교했다.

 

  이와 같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으면 당연하게 뒤따라오는 의문은 과연 진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다. 똑같은 위기 상황을 두고 어떤 설교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왔으니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른 설교자는 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섣부르게 판단하기 전에 고통 가운데 있는 이웃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권면한다. 일부 설교자는 전염병 확산을 이단 정죄의 기회로 받아들여 성도들에게 경각심을 높이고, 다른 설교자는 남을 정죄하기보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자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대부분 설교자가 성경에 기초를 두고 설교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설교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같은 현상을 두고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설교자로 인한 성도들의 혼란과 혼동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어진다. 코로나 19가 야기한 현재의 위기는 과연 설교가 무엇인가? 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질문을 던지게 해주었다. 성도들은 같은 상황을 성경을 근거로 다르게 해석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접할 때마다 이런 질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코로나 19는 이런 궁금증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일까? 코로나 19는 하나님의 심판일까? 아닐까? 하나님은 코로나 19를 통해 이단인 신천지를 징벌하길 원하실까? 아니면 신천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길 원하실까? 결코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설교자들은 자신의 해석에 맞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대며 이야기하기에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과연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진짜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답을 내리기 전 설교의 정체성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혼란은 하나님의 뜻을 설교자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인데, 과연 설교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뜻은 단순하게 한가지로 수렴될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다양한 설교자를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어떤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 코로나 19는 우리의 설교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했다.

 

F. 뉴노멀 시대의 설교 신학

 

  코로나 19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해석한 설교자와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 자신의 해석이 옳으니 나의 해석에 동조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해석에 손을 들어줄 것인지는 전적으로 청중에게 달려있고, 무엇이 진짜 하나님의 뜻인지 가늠할 기준은 모호하다. 청중은 같은 환경을 두고 다르게 선포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며 어떤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늠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이와 같은 현실은 더 나아가 인간인 우리가 애초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가늠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설교자가 모두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라며 자신 있게 선포한 설교가 서로 어긋나고 상반된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또한, 코로나 19가 야기한 설교 환경의 변화는 설교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고 온라인을 통해 개인에게 전달되는 설교를 우리는 여전히 설교라고 부를 수 있을까? 환경의 변화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되고,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관계가 멀어진 상황에서 설교자는 무엇을 선포해야 할까?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설교의 홍수로 인해 예배자가 설교 소비자로 변화되고, 특정 목회자에게 청중의 관심이 집중되고, 일부 청중은 설교를 접하지 못하게 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설교를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까?

 

  필자는 이와 같은 현실 가운데서 설교가 지향해야 할 설교 신학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이라고 주장한다. 설교는 설교자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논증하는 장이 아니다. 설교는 설교자가 확인한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확인시키는 자리가 아니다. 설교는 설교자가 성경을 통해 들은 하나님의 음성, 성경을 통해 만난 예수의 행동, 기도를 통해 경험한 성령의 일하심을 고백하는 자리다. 따라서 코로나1 9가 하나님에 대한 심판이다라고 외치는 설교자의 말은 저는 코로나 19가 하나님의 심판임을 믿습니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자리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장소로 변경할 때,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나눌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코로나 19 이후 설교가 처한 환경의 변화를 이처럼 설교의 정체성으로 접근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코로나 19는 설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촉발했고, 이런 상황과 질문은 우리에게 낯익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정말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맞이하면서 설교의 자리를 위협했던 질문이다. ,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설교자의 다양한 해석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청중들이 마주했던 질문이다. 우리는 서로가 진리라고 외치는 수많은 주장 가운데 무엇이 진리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양한 진리 속에서 그리스도가 참 진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본 연구는 미국의 설교학자 데이빗 로즈(David J. Lose)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 상황 가운데 설교가 가져야 할 설교 신학으로 제안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코로나 19 이후 뉴노멀 시대에 바람직한 설교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 데이빗 로즈의 설교 신학에 대한 이해

 

설교 신학의 출발점

 

  데이빗 로즈는 2017 7월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네소타(Minnesota)주의 미에나폴리스(Minneapolice) Mount Olivet 루터교회의 담임 목사로 섬기고 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의 루터교 신학교(The Lutheran Theolo gical Seminary)의 총장을 지냈고, 재직 중 자매 학교였던 필라델피아 루터교 신학교와 게티스버그(Gettysburg) 루터교 신학교를 통합하여 2017 7월 연합 루터교 신학교(The United Lutheran Seminary)를 출범시켰다. 14년 동안 미네소타의 성 바울 루터교 신학교(The St. Paul Luther Seminary)의 교수로 학생들에게 성경적 설교를 가르쳤다.

 

  데이빗 로즈가 고백으로서의 설교를 처음 고민한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 때문이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불러온 설교의 위기를 위기가 아닌 기회라고 생각했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설교는 새로운 설교 신학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의 고민은 결국 고백으로서의 설교를 창출해 냈는데, 그는 이 고백이 세속주의와 다원주의 상황에서도 큰 의미가 있음을 발견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 세속주의의 환경에서 탄생한 고백으로서의 설교는 코로나 19로 인해 뉴노멀을 맞이한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1. 포스트모더니즘

 

  데이빗 로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큰 위협과 도전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신앙의 본질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더욱 담금질하여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과 순종심을 더욱 강화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데이빗 로즈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인식론에 관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각자가 자신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의견을 우리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정직하고 명료하게 그것들을 분류하고 파악해서 말할 수 있는 능력에 회의를 가진다. 모더니즘 시대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믿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이같은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불변하는 완전한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이다.

 

  데이빗 로즈는 고대 세계가 제시했던 진리를 검증하는 수단을 일관성과 합리적인 검증의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설교자가 선포하는 기독교의 진리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설교 안에 논리적 모순이 없어야 하고, 설교 메시지를 설교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검증할 수 있어야 하며, 검증 후 동일한 결론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지하듯 설교의 메시지는 일관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검증 불가능한 것들도 존재한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설교자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절대 불변하는 유일한 진리일 수 없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데이빗 로즈는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실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진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가 선포하는 진리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완전하고 영구적인 진리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라는 요구임을 밝힌다. 다시 말해서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설교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신들은 진리를 선포할 수 없으니 침묵하라가 아니라, ‘당신들이 지금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은 진리라 생각될 수 있더라도, 새로운 정보와 연구, 경험을 통해서 수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데이빗 로즈가 이야기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과 주장을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코로나19 상황에 대입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이야기는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은 무엇이 참 진리인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19에 관해 설교자가 말하는 다양한 주장들은 그저 개인의 생각과 주장일 뿐이지, 그것이 절대 진리가 될 수는 없다.

 

  둘째, 설교자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관적인 주장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진리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설교자의 말이 신이 전해 준 절대불변의 진리라면, 코로나 19가 하나님의 심판이든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 진리는 일관성을 지니기 때문에 코로나 19가 하나님의 심판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닐 수는 없다.

 

  셋째, 설교자들이 말하는 코로나 19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합리적인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대부분 설교자가 코로나 19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면서 근거로 삼는 것은 성경이다. 설교자는 성경에 기록된 여러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전달하려는 설교 메시지의 증거를 제시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성경의 진실성을 포스트모더니즘은 인정하지 않는다. 데이빗 로즈는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더니스트는 성경의 본문이 하나의 의미가 있음을 전제하고 성경 말씀이 원래의 청중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파악하고 설명한 후, 이 구절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고 공유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는 텍스트(Text)의 의미가 그 텍스트 자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와 공동체의 상호작용 사이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단일할 수 없고 다원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데이빗 로즈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촉발한 설교의 도전을 고백이라는 새로운 설교 신학으로 넘으려 했고,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오늘날 코로나 19 시대의 설교에 대해서도 의미가 있다.

 

2. 세속주의

 

  데이빗 로즈가 고백으로서의 설교를 제안하는 배경에는 세속주의도 자리한다. 그는 세속주의에 대해 진리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진리가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에 반발하여, 진리는 우리 주변의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세계 안에서 찾을 수 있다라는 주장이라고 정의한다. 데이빗 로즈에 따르면 세속주의는 인간의 희망과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보지 말고, 인간이 추구하는 성취와 번영의 탐구로 인해 개발되는 내적인 것으로 보라고 촉구한다. 이와 같은 이해에 따르면 세속주의는 설교 안에 진리가 담길 수 없고, 인간 삶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는 진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의미한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데이빗 로즈는 설교를 향한 세속주의의 공격과 도발에 대응해서 기독교의 진리와 희망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고 밖에 존재하며, 성경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고백 되고 선포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세속적인 모든 것이 제공할 수 없는 희망을 사람들에게 준다. “기독교적 희망이 세속적 낙관주의와 다른 점은 낙관주의는 언젠가는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에 불과하지만, 기독교적 희망은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든, 나쁜 일이 일어나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승리할 거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생겨나는 이 희망은 증명되거나 검증할 수 없으며 오직 고백을 통해서만 사람들에게 전달되기에 고백으로서의 설교는 세속주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데이빗 로즈가 말한 세속주의 현실은 코로나 19 이후 뉴노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도 닮았다. 많은 사람이 코로나 19의 종식은 결국 백신과 치료제의 개발로 인해 찾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고, 이는 인간의 과학 기술과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은 참 진리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의 방증으로 해석될 수 있고, 진리가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고 해도 물질로 현실화되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의 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은 우리 모두에게 어떠한 희망도 주지 못한다. 코로나 19 치료제의 개발이 실패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코로나 19 백신을 인간이 찾았지만, 또 새로운 바이러스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인간은 궁극적으로 모든 질병과 위협을 스스로 완벽히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가?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한가? 이 지점에서 데이빗 로즈가 말하는 기독교적 희망의 고백이 의미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고, 지금의 어려운 시간을 견뎌낼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세속주의 시대의 고백으로서의 설교는 코로나 19 이후 뉴노멀 시대에도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3. 다원주의

 

  데이빗 로즈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를 그 어떤 것도 스스로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최고의 자명한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이야기들의 경쟁 시대라고 정의하며 다원주의 의미를 종교적인 분야에 한정하지 않는다. 그는 오늘날 스스로 진리임을 주장하는 다양한 것들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디지털 수단을 통해 전해지는 방대하고 다양한 이야기와 세계관으로 인해 형성되는 의미와 정체성이라고 주장한다. 데이빗 로즈는 이같은 현실을 디지털 다원주의라고 부르며,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선택의 과잉을 초래했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하게 만들기보다는 수많은 선택 속에서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전에는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성별, 교육, 민족성, 소득 등의 한정된 요인이었지만, 디지털 다원주의 시대에는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훨씬 다양한 원인이 생겼다.

 

  결국, 이와 같은 현실은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 다른 원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동기가 되었고, 데이빗 로즈는 성경의 이야기를 잘 모르는 세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자의 신앙을 고백하여 그들을 성경의 세계로 초청하자고 제안한다. 다시 말해 그는 고백으로서의 설교를 통해 디지털 다원주의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정체성으로 형성하려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자고 권면한다.

 

  데이빗 로즈가 관심을 가졌던 디지털 다원주의 시대는 오늘날 코로나 19를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현재 가장 유명하고,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유튜브에 접속해보면, 디지털 다원주의가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유튜브에서는 무한에 가까운 사람들이 코로나 19에 대해 분석하고 정리한 내용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는 설교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인데, “코로나 설교라는 열쇳말(Key Word)로 검색하면 수많은 설교를 앉은 자리에서 접할 수 있다. 시간을 투자해서 들어보면, 설교자마다 코로나 19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과연 무엇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해 내기는 쉽지 않다. 코로나 19 이후 뉴노멀 시대를 사는 우리는 데이빗 로즈가 말했던 디지털 다원주의의 한복판에 서 있다.

 

  살펴본 것처럼 데이빗 로즈가 고백으로서의 설교를 주장했던 현실과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코로나 19 이후의 뉴노멀 시대는 많은 부분이 맞닿아 있다. 뉴노멀 시대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리(설교)에 대한 회의와 세속주의의 물질(치료제와 백신)에서 희망을 찾는 시각과 다원주의의 무한에 가까운 주장들의 경쟁이 모두 존재한다. ‘고백으로서의 설교가 포스트모더니즘, 세속주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의미 있는 설교 신학이었다면 뉴노멀 시대에도 분명히 동일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