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역사신학에서 본 영성

하나님아들 2022. 1. 12. 15:28
역사신학에서 본 영성

*출   처|  영성신학원
            
1. 서론

영성의 정의

영성이나 영성 신학에 대하여 말하고자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영성에 대한 정의 문제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영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하고 있는 것을 찾아본다. 개신교에서 영성과 목회의 연결에 주안점을 두는 오성춘 교수는 아예 "영성(Spirituality)의 정의는 매우 다양하여 어느 하나를 대표적 정의로 내세울 수 없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다양한 정의들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정의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기본적으로 [프란시스 A. 쉐퍼]의 정의를 따르고자 한다. 그는 영적 실재에 대한 깊은 고민을 설명한 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우리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의미, 그리스도의 피의 의미 - 우리 그리스도인들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의 순간순간 마다의 사역의 의미 -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참된 영성이다." 이것은 여러 다양한 정의 중 하나이지만 역사는 곧 인간의 삶이고, 교회사 역시 신앙적 삶의 궤적을 연구하는 것이 근본적 목적이므로 영성 역시 실제적 삶의 문제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이것을 따르고자 한다. 결국 이 글에서 영성의 정의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매 순간 마다 사역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미"가 되는 셈이다. 풀어 말하면 나의 삶의 현장에서 함께 하시며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것, 순종하는 것, 되어지는 것 등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성을 교회사에서는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브로밀리에 의하면 역사신학의 기능을 첫째, 교회와 교회가 전파하는 내용들이 수세기 동안 또 여러 대륙을 넘어서 존재하면서 불연속에도 불구하고 연속성을 지니는지, 둘째, 교회가 전파하는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같은 것이면서도 다른 시대와 환경 속에서 성취되거나 타협되는 방식과 이유들의 사례를 보여주며, 셋째, 역사신학은 지금의 교회들에게 적합한 암시와 경고 또 지속적인 통찰들의 가치 있는 축적물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정의한다. 한편 영성의 역사신학적 접근의 필요성에 대해 정용석 교수는 "기독교 영성은 다양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시대와 장소에 따라, 또한 개인이나 그룹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와 특성을 지니고 나타난다"며 "바람직한 기독교 영성의 발전을 위해서는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다양한 영성들의 본질과 내용을 파악하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영성의 진정성을 판단할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사나 역사신학 입장에서 본 영성은 교회나 교회가 전파한 내용들 중 영성에 관계된 것들이 나라와 시대를 넘어서 오늘까지 전해진 것, 또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축적된 가치 있는 영성의 흔적들을 도출해 내고 이것을 통해 오늘의 영성을 정의하고, 잘못된 부분을 경고하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또 위에서 나름으로 정의한 영성의 정의를 가지고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펴보고, 이것을 근거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위에서 정의한 영성을 따라 각 시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인 초대, 중세, 종교개혁, 근현세시대를 나누고 이 시대마다의 하나님 이해와 경험, 이것들을 통해 나타난 변화와 외적인 특징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떤 때는 사람으로 나타날 것이고, 어떤 때는 사건을 통해서 설명될 것이다. 다만 방향이 "하나님 경험"이라는 구체적 체험에 맞춰진 만큼 시대가 갖는 전체적 특징을 갖고 그 틀 안에서 고려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함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두가지 측면으로 접근하고자한다.. 하나는 시대의 영성을 말할 수 있는 동시대의 하나님 경험과 그것으로 인한 사람(들)의 변화와 그 외적 특징을 다루고, 두 번째로는 이렇게 해서 나타난 영성들을 전체로 이어서 연결하고, 이것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영성의 의미나 특징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것을 "교회사적 영성"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교회사와 영성과의 관계를 살펴보므로 글을 맺고자한다.


2. 교회사와 영성

2.1. 동시적 영성(synchonistische Spritualit?)

동시적(同時的)이란 Egger의 견해를 빌려 해석하자면 외적인 모양을 해석하는 것이다. 즉 성경이 주어진 형태의 원전을 그대로 놓고 그 의미와 내용을 추적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따라 동시적 영성을 정의하면 외형적으로 나타난 모습을 따라 영성을 분류하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보통 "영성은 이러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정의하는 것이 고전적 표현이다. 그리고 영성을 소개하는 상당히 많은 책들이 이러한 정의에 익숙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도 이러한 정의를 따라 각 시대의 영성을 정의해 보기로 한다.

2.1.1 초대교회의 영성

초대 교회의 영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초대교회라는 시대 배경과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 나라에 번역된 몇 몇 초대교회사 책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이 눈에 띈다. 먼저 공통점은 초대교회는 기독교가 처음 시작의 때이니 기독교의 중요내용인 교회의 시작, 신학의 시작, 이단과 정통교리의 시작 등 기독교의 시작에 관한 것들과 당시의 국가와의 관계 이를테면 박해나 박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차이점은 어떤 책들은 기독교 주변 상황이 바뀌면서 나타나게된 교회의 변화에 중점을 두고 설명한 반면, 다른 책들은 기독교가 가진 교리와 신학의 발전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초대교회사의 이러한 서술 경향들은 사람들이 초대교회사의 중요성이나 특징을 어디에서 찾고 잇는지 분명하게 드러나게 한다. 그들은 기독교의 시작점의 특징과 고유성을 찾아내고자 하는데, 이것을 찾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역사와의 관계성 속에서 기독교 발전 과정을 추적하고자하며(베른트 묄러),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의 고유성인 신앙과 신학이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중심으로 기술하고자한다(헨리 채드윅, 윌리스턴 워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초대교회는 시작이라는, 기독교의 정립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있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즉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기독교의 형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나타난 여러 체험들은, 그것이 어떤 체험과 경험이든 간에, 기독교를 형성시키고 정립시키는 한 점으로 모아졌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모든 기독교 요소들은 형성과 관련되어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독교 형성의 영성"은 위에서 정의한 "하나님 경험"과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가? 초대교회를 예루살렘의 원시공동체나 소아시아와 로마 제국에서의 초대교회의 둘로 나눈다면 원시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관심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예수와 함께 승천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그들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예수의 재림시 함께 승천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받은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구원받은 자들로서 이 땅에서 예수가 가르친 대로 사는 것이 곧 구원받은 자들의 의무이고 이렇게 사는 것은 재림과 승천에 대한 준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바울 신학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죄의 종되었던 자가 해방되는 것 등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에 대한 감사와 확신이 곧 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이 감사와 확신은 다른 면으로는 부활이나 예수의 재림시 함께 승천 등에 대한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곧 그들의 영성의 특징이 된다.

물론 이런 재림 준비에 대한 의식은 종말론적 시각, 곧 현실을 부정하고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따라 방랑 생활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예수의 재림이 지체되자 세상에서의 삶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결과로 성경이 쓰여지고 신학이 나타나는 계기도 되었지만 그들이 가진 근본적 신앙태도는 별로 변화가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자신들이 성령을 받고 있다는 것은 장차의 영광을 담보잡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흐름은 초대교회 전체에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지배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세상에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특별히 금욕이나 고행적 삶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을 준비하고 몰두하는 과정에서 광야 금욕가들이 생겨나고 이들은 금욕과 고행의 삶에서 구체화되고 명상적이 되면서 개인의 신비한 체험을 중시하는 쪽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금욕의 단계를 실제적 삶의 단계, 관조의 단계로 나누기도하고, 또는 수덕적 삶에서 신비적 삶으로 나간다고 하고, 또다른 사람들은 정화의 단계에서 시작하여 계몽단계를 거쳐 합일의 단계에 이른다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흐름이 나타난 것은 3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곧 수도원이 생긴 시기이다. 수도사의 삶이 "인간의 삶의 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꿔서 하늘로부터의 위로를 가지고 살며, 오로지 하나님께만 봉사한다"고 설명되는 것은 바로 실제적 삶에서의 예수 재림과 부활 승천에 대한 준비가 좀더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초대교회의 영성을 정리할 수가 있다. 초대교회 영성은 예수의 재림, 그리스도인들의 부활 신앙, 또 승천에 대한 소망을 향한 준비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고행적이고 금욕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이자 감시의 표현이기도 했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모아져서 초대교회의 영성적 특징을 형성했다. 초대교회 영성은 그러므로 "종말론적 특징을 가진 교회 형성의 영성"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2.1.2. 중세교회의 영성.

중세라는 개념은 정확히 정의되기가 어렵지만 보통은 교황제가 확립되는 6세기 전후에서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는 1453년이나 루터의 교회에 대한 저항사건이 일어난 1517년으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중세의 특징은 게르만족과 기독교 정신이 결합하여 새롭고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것에서 찾을 수 있고, 이것의 특징은 이중적 지배형태 곧 게르만적-기독교 황제지배와 교황지배이다. 이것을 특징으로 삼는 이유는 세속의 지배자인 황제가 기독교 사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것은 일반 역사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와 교황은 제도와 권력이라는 틀로 기독교를 정의하기 때문에 체험적이고 경험적인 내용을 특징으로 하는 영성 부분은 제도권 교회나 국가의 비호를 받는 제도 안에서는 발전하거나 활성화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중세의 영성은 주로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비록 6세기에 이미 서방에 수도원이 전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성향은 초대교회의 수도원 모습을 그대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만의 영성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다만 서방 수도원의 대표적 수도원인 베네딕트 수도원이 순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초기 중세 (수도원) 영성은 순종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역시 동방교회에서 배워온 내용을 그대로 전수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므로 중세의 영성으로 분류하기에는 좀 어려울 것이다.

서방에서 영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발견되는 것은 12-13세기 때부터이다. 이때 소위 평신도 경건운동, 또는 중세 종교운동이 시작되는 시기인데 이것은 중세 수도원 개혁운동기와 맞물려서 중세의 영성을 구현한 시기로 분류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들 모습의 특징은 보통 금욕주의, 청빈 사상, 개인 신앙의 중시 등으로 나타난다. 특히 봉건주의와 맞물려서 거대한 권력집단으로 변한 제도권 교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도 이들 운동의 특징으로 분류해야할 것이다.

이들의 영성, 즉 하나님 경험은 특별히 자신들만이 옳은 신앙을 가졌다는 배타적 신앙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이유는 제도권 교회나 성직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신앙적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권력집단으로 변한데 대한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은 제도권 교회에서 해답을 얻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기를 원했으며 신비한 경험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흔히 그렇듯이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신앙적으로 살기를 노력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그 뜻을 스스로 알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교회는 성경을 가지는 것을 금했고, 또 그들을 종교재판을 통해서 막고자했다. 하지만 교회 역시 그들이 가진 신앙적 열정은 좋은 것으로 인정했으므로 이것을 제도권 교회에 받아들여 이들의 이상을 기진 몇몇 수도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이후, 즉 13세기 이후에는 대부분의 영성가들이 수도사들이 된다. 우리가 아는 도미니크, 성 프란시스, 보나벤츄라, 게르송, 클레르보의 버나드, 토마스 아퀴나스, 또 심지어 신비가 엑크하르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수도사였던 것이다.

이들의 영성 역시 하나님 체험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한 방법을 개발해 놓고 이것을 따라 훈련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동방교회 영성(헤지키아 영성)의 영향인 듯하다. 이들의 체험 역시 초대교회 때처럼 실제적 삶에서 관조적 삶으로,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과 하나되는 체험을 하므로서 영성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런 것을 잘 정리한 사람들이 보나벤츄라와 클레르보의 버나드로 알려져있다. 클레르보의 버나드는 신학과 이런 체험을 연결시키려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의 하나님 체험은 대부분 교리나 신학과는 관계가 없다. 자기만의 세계나 체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영성가들 대부분에 나타나는 특징인데 다만 제도권 교회를 부정하면 이단 판정이 되고, 제도권 교회와 신학을 인정하면 수도원이나 신앙단체로 인정을 받았다.

중세 영성의 가장 대표적 존재로 여김을 받는 성 프란시스의 경우를 살펴보면 중세 영성의 개략적 특질을 알 수가 있다. 프란시스의 영성은 그의 제자였던 보나벤츄라가 프란시스의 전기를 쓰면서 정리해 놓은 것을 통해서 알려졌는데, 그는 프란시스의 영성을 3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정화의 단계로 자신을 깨끗케 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조명의 단계로 사랑과 순교의 열망을 가지는 단계이고, 세 번째 마지막 단계는 완덕의 단계로 성경에 대한 이해력과 탁월한 영이 깨어나서 영적인 통찰력과 설교와 치유에서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프란시스의 영성은 관상적인 삶과 활동적인 삶을 조화시킨 것을 특징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나타났던 은둔 상태에서의 관조적 삶을 중시하던 영성이 사회적,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함께 하는 영성으로 발전해 간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상의 살핀 것으로 중세의 영성을 정의한다면 사회적이고 이타적 사랑을 나타내 주는 특징을 가진다 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중세의 영성은 특별히 가난이나 극단적 금욕, 타인을 위한 절대적 사랑 등이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중세의 영성은 이웃 사랑의 영성, 또는 체험적 사회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1.3. 종교개혁기의 영성

종교 개혁기는 전체적으로 중세 카톨릭의 해체기이자 교회와 성직자들의 권위가 실추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중세 동안 제도와 조직으로 묶여있던 신학과 신앙이 개인의 생각과 고백을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시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루터에 의해서 교회가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신앙, 또 행위나 외적인 노력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을 얻는다는 개신교 신학이 정립된 시기이기도하다.

그래서 종교개혁기의 영성은 특별히 개혁 성향이나 성경 자체에 대한 이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특히 이런 분위기는 루터가 교회가 갖는 권위나 교황의 지상 대리권을 찾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를 찾는 것으로 개신교 신학의 기초를 세움으로서 그 시작점을 열었다. 이런 설명은 종교개혁의 영성을 설명하는데는 물론 종교개혁 이후 근대교회의 영성을 설명하는데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루터가 이렇게 성서를 원래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이후 개신교 신학 특히 독일의 정통주의와 칼빈주의 경향은 성서를 문자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므로서 현대의 성서해석이 영적인 방향과 거리가 멀어지는 식의 발전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신교적 스콜라주의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관심사는 계속 살아남아서 얼마 후에 경건주의와 청교도 신앙을 통해서 다시 나타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을 성경 해석적 전통에서만이 아니라 전례와 전통을 통한 영적 훈련이 성경을 통한 개인의 영적 훈련으로 변화시킨 사건이라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해석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대로 교회나 성직자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는 칭의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의 두가지 특징은 십자가의 신학과 개인의 신앙적 자유이다. 그래서 루터의 영성은 은혜의 하나님을 발견하며 자신이 체험한 자유에 초점을 둔다.. 한편 종교개혁자로서 루터와 쌍벽을 이루는 칼빈은 영적인 훈련을 강조하는 경향을 갖고 있으며, 이것은 그가 성도의 삶을 "신자와 그리스도의 합일"에다 초점을 맞추는 신학적 경향과 맞물려 그의 영성에 대한 태도를 알려준다. 칼빈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강조해서 성화를 중시하는 경향을 갖지만 칼빈주의에서는 오히려 하나님 주권을 강조해서 강조점이 약간 변한 듯한 느낌을 준다. 어쨌든 칼빈의 영성은 훈련, 또는 성화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 또는 그 외 다른 종교개혁자들도 마찬가지로 이들은 다른 전거는 인정치 않고 성경만을 근거로 신앙적 삶을 주장했다는 것에서 종교개혁기의 영성을 정의해 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기의 영성은 성서영성이라는 말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 자체가 성서 영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약간은 제한적 의미로, 제도나 권위 또는 어떤 기관에 의해서 기독교가 제한되던 것이 성경이라는 기본적 전제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의미, 그리고 성경은 기본적으로 영적이라고 주장했던 루터와 그 외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에 근거한 것이라는 좁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1.4. 근현세교회의 영성.

종교개혁 이후 근세 교회의 개신교의 흐름은 다음 세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친다. 제일단계는 종교개혁 이후 교회와 성직자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고백시대, 그 다음 시기는 개인 신앙을 성경이라는 틀에서 행하고자하는 노력이 지나치게 본문해석의 방법론에 집착하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등장과 이에 반대하는 경건주의적 흐름, 그 다음에는 영적이고 신앙적 흐름을 인간의 윤리와 도덕과 접목시키려는 계몽주의 시대로 발전한다. 이 중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성은 보통 경건주의적 흐름과 관련해서 설명한다. 경건주의는 사실 루터 이후 정통주의 신학이 갖는 문자주의와 문법적 지식에 매어서 성경을 해석하고자하는 경향에 반대해서 영적인 흐름과 하나님과의 직접적 체험을 중시하는데서 생겨났다. 물론 경건주의는 그런 이유로 서방 신학에서 정통주의의 자리를 차지해 본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옳은 신앙의 대표적 표현이라고 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앙은 신학 갖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에서 주어져야하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경건주의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연구되고 이것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또한 청교도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약간은 극단적이고 열광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고 이런 열광적 흐름 때문에 크롬웰을 대표로 하는 혁명에서 정권을 잡기도 했지만 역시 영국에서 정통적 흐름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오히려 당시의 미개척의 땅이자 식민지였던 미국을 통해서 성장 발전한 것은 신학이나 영성의 흐름상 어쩌면 당연한 흐름일 것이다.

이들 두 흐름은 공통적으로 우리가 위에서 영성으로 정의했던 하나님 체험과 성령의 인도를 강하게 주장했다. 이것은 경건주의를 주도했던 슈페너의 "경건한 열망"이나 조지 폭스, 친젠돌프, 또 청교도적 삶을 주도했던 요한 웨슬레나 죠나단 에드워드 등의 삶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의 대표적 경우인 조지 폭스를 통해 근세교회의 영성적 특징을 살펴본다. 조지 폭스는 신앙적 고민을 하다가 기성의 제도권 교회에서는 만족을 얻지 못하고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직접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체험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생에 내적인 광명이 필요하며 사람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즉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심령에 임재하고 또 사람의 심령이 하나님의 심령에 이르러 거기에 부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때부터 폭스는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과 아주 친밀한 접촉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후 그는 순회전도사로 일하다가 교회 집회에 가서 성경을 옳게 이해하려면 성령의 내적 광명이 있어야한다고 외쳤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워커에 의하면 폭스는 무든 것을 배제하고 오로지 "성령의 내적 경험"만을 중시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내적 감동과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운동은 퀘이커, 스웨덴보리 또 요한 웨슬레, 죠나단 에드워드 등을 지나 드와이트 무디에 이르기까지 그 맥을 유지했다.

이것은 근세 교회의 영성을 경건주의 영성이나 청교도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다만 이렇게 정의할 경우 지나치게 개신교적 측면에서 교회사를 보는 것이므로 이것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이지 않고, 개신교와 관련한 정의라는 제한이 언급되어져야할 것이다.

하지만 근세이후 경건주의적 영향으로 인해 종교적 체험이나 신앙적 삶에의 관심이 고양되다가 이것이 계몽주의의 합리적 영향, 이성주의적 경향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이 되면서 18, 19세기에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20세기 들면서,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주의적 경향에 대한 낙관적 견해가 퇴조하면서 영성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개신교에서는 펠라기우스적이라는 이유로, 또 특별한 소수의 성직자나 신비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서 거부되어왔고, 그래서 개신교는 영성이라는 표현보다는 경건이나 헌신 또는 성화라는 표현 선호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영성이 어떤 도덕적이고, 행위적인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하는 견해가 일반화되면서 개신교에서도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현대에 와서 특히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운동이 영성운동의 고유의미인, 기독교를 영적으로 이해하고 기독교 본래의 영적인 흐름을 회복하는 경향으로서보다는 부흥 운동이나 배가운동의 수단으로 잘못 이해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피터 와그너 같은 사람들이 영성운동과 현대의 자본주의 논리를 결합시킨 결과가 아닌가 싶어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현세에도 많은 영성적 사람들이 삶을 통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영성적 흐름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해서 근현세의 영성은 개인과 인간의 이성이 가장 중시되는 시대에 기독교와 신앙의 정체성을 추구하고자하는 자기정체성 추구의 영성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2.2. 통시적 영성(diachronische Spritualit?)

신학이나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을 신비사상이라고 말하는 E.S. 모이어는 다음과 같이 잘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위에서 영성의 정의로 사용한 것과 내용상 일치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생활에 있어서 참된 신비사상은 언제나 그리스도교 신앙 경험의 중요한 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생활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초대 교회생활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이것은 변함없이 중세교회를 지나서 종교개혁 시대까지 계속되어 내려왔다. 이 신비 사상의 영향은 개혁자들의 생활과 교훈에도 잘 반영되어있다. 모든 진정한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환상을 보게 되고, 참된 회개를 하게 하며, 그들의 마음이 이상스럽게도 뜨거워짐을 느끼게 하고,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하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개혁자들이 되게 한 것은 그들의 생활 속에서 일어난 신비적 경험 때문이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자기들의 권위의 최고 원천으로 삼게 하는 것도 신비적 요소이다"

이것은 바로 통시적 영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시대를 넘어서 전해지고 지금까지 가치 있는 것으로 남아있는 영성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것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나 제도를 중심으로 나온 영성과 생활 중심의 평신도 영성이다. 이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2.2.1 현재와의 관련성

통시적 영성을 살펴보기 위해서 각 시대마다의 공통점으로 제일 먼저 지적할 수 잇는 것은 시대적 특징을 나타내 주는 영성이 언제 어떤 것을 계기로 나타났는가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의 뚜렷한 특징은 각 시대마다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 물음이 나타났을 때라는 것이 나타난다. 즉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기독교가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되어야하는지, 기독교인의 삶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추구할 때에 나타났다. 이것은 곧 바로 시대의 문제를 신앙과 결부시켜 생각할 때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자신들의 삶이 예수님 재림의 준비이자, 재림시 예수와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준비로서 자신들의 삶을 이해했기에 종말론적 영성, 순교적 영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초대교회를 형성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것이 발전해서 제도권 교회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것은 중세나 근현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세 초기에 나타났던 특징은 제도권 교회를 통한 평신도 지배의 특징을 가져서 순종과 모방의 특징을 가지다가 (이것은 어거스틴 신학이 무조건 답습되던 중세 초기의 경향이 잘 보여준다) 중세 중기 이후 사회적 변화를 신앙적으로 수용했던 수도원 개혁운동이나 프란시스 가난운동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근현세에 와서는 철학이나 사회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의 이성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자기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이 영성의 특징이 된 것이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에 영성이라는 주제가 기독교 신학에서 새로운 담론이 되게 하는 계기로 나타나 있다.

2.2.2. 체험적 영성

그런데 이러한 자기 정체성이나 기독교 본질에 대한 관심이 시대적으로 환경적으로 하나님과 구체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며 인도함을 받을 환경과 조건을 제공하긴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구체적으로 체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영성이 나타날 수가 없다. 그들 개인은 하나님과 직접 만나고 교통하면서 그들의 영성을 계발시키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위의 책 "기독교 영성" 19장에 실린 쟈크 폰텐의 탁월한 논문 "기독교적 삶의 실천: 평신도 계층의 탄생"에서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평신도들은 영성의 가장 앞선 집행자들로서,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 여기서 부정적이란 현대 개신교에서 옹호하지 않는 순례라든가, 순교자 숭배, 성인 숭배, 행위를 통한 구원 노력을 포함한다 -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체험을 시와 노래로 표현하기도 했고, 설교를 통해서 받은 말씀을 생활에서 실천하는데 앞장섰던 계층이며,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삶과 연결시켜 성령의 인도를 받기를 노력했던 계층들이다. 이들의 신앙적 열정은 어떤 때에는 순교로 나타났고, 어떤 때는 수도원에서 자신들의 생 전체를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의 영적 열심은 가끔씩 이단이나 극단적 열광주의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것은 영성이란 교의적이거나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가 완성과 초월을 향한 부름에 독창적이고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는 정용석의 정의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들이 바로 제도권 교회가 영적으로 고갈되었을 때, 영성의 흐름이 막혔을 때 터져나와 기독교가 영적인 종교임을 일깨워 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통시적 영성의 또다른 중요한 것은 바로 평신도를 중심한 체험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통시적 영성, 즉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에서 영성으로 정리하라고 한다면, 제도권 교회에서의 자신들이 성령을 받아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고백을 하는 영적인 공동체로서의 영성과 이런 고백을 현실 생활과 연결시키는 평신도 영성이 가장 중요한 흐름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본다면 개인적 체험이 공동체의 틀 속에서 방향을 갖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지켜져온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통시적 영성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바로 개인의 영적인 체험인 것이다.


3. 교회사와 영성 (결어) 그리고 미래를 위한 제언

오늘날 영성이라는 단어는 매우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의 객관적 실체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영성의 실체는 앞으로도 계속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체험은 체험하는 사람에 따라 계속해서 다르게 나타날 것이고 그것은 곧 각 시대나 사람마다 영성을 다르게 정의할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나타난 영성의 모습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막연하나마 어떤 실체를 그려볼 수 있다. 그것은 초대교회는 종말론적 영성의 특징을 가지고 금욕과 고행을 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중세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특징을 갖는 하나님을 만나고 합일하는 가운데서도 이웃사랑과 실천적 덕목이 중요한 수덕과 이웃사랑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고, 종교개혁은 말 그대로 성경을 통한 영성의 회복을 주장하는 개혁적 영성이었고, 근현세는 정통주의나 신학적 흐름에 반대하는 체험적인 것을 강조하고, 개인적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개인적 체험적 영성이다.

이것의 전체적 공통점은 그런데 대부분의 시대에 영성의 흐름은 평신도들에 의해 형성되고 주도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쩌면 교회가 갖는 속성상 당연할런지도 모른다.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가르치는 일과 행정적인 문제들, 그리고 교인들의 일신상의 문제를 따라다니기 위해서 바쁘다 보면 영성을 계발하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삶의 문제를 성령과 상의하는 것은 평신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특히 이론화되고 조직화되어있는 현대교회에서도 영성의 문제는 역시 평신도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교회사에서 본 영성은 이것이 결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중적 구조 때문에 기독교의 영성적 흐름이 교회사 전체에서 교회를 주도하는 흐름으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삶이 일반화되고 시대정신이 되었던 경우가 별로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과 신앙을 동일시하는 아타나시우스의 견해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영성은 신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영성을 가져야하고 이것을 계발해야한다.

역사에서 영성이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개신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개혁도 영성적 흐름에서 설명할 수 있으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교회사에서 밝혀주는 모습은 영성을 따로 떼어내서 특별한 체험과 은사 운동만을 영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가 영성을 하나님과 만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나타나는 모습으로 설명한다면 오히려 영성의 폭을 많이 넓혀서 기독교 신앙은 육적이요 인간적인 것을 넘는 영적인 것을 갖고있고, 가져야만 한다는 것으로 정의하기를 기대하고 싶다. 그렇게 하므로서 우리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가 되고, 기도가 육적인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가 되고, 그리고 삶에서 육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영성의 본모습이 아닌가 싶다.

제언

사실 영성이란 신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갖고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영성 운동이 나타나게 된 것은 참된 신앙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를 찾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현실적 문제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자하고, 자신들의 삶을 한구석의 빈틈도 없이 신앙 안에서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영성 운동은 시대적 당위성을 가진다. 현대 사회나 국가, 또 기독교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인 오늘날에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앙이 그 대안일 수 있다면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인의 가치관과 삶의 모습을 고민하는 것은 필수불가결의 요청 사항이고, 이런 고민의 모습은 곧 영성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노력이 될 것이고, 이것은 곧 기독교 영성 회복의 대전제를 향해서 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영성운동에 몸담고 있다거나 관심을 갖고 잇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특별한 것을 한다거나, 다른 신앙인들과 비교하여 자신들만이 옳은 신앙을 가졌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고, 영성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영성이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에 대한 고민이며, 기독교가 기독교이기 위해서 영성이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본적 전제라는 사실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