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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공의회 이전의 이단들

하나님아들 2021. 10. 3. 16:12
니케아공의회 이전의 이단들


 


1. 영지주의


2세기와 3세기에 저술된 기독교 작품들의 대부분은 초기의 기독교 전통을 희랍적 사고와 동양의 신화에 연결시키려는 철학적이고도 환상적인 시도들에 대항하여 이 초기의 기독교 전통을 순수하게 보존하려는 노력의 결실들이었다.




교회의 저술가들에 의하여 작성된 이단자들에 대한 방대한 목록들은 대부분의 경우 단지 일반적인 유형의 이단의 변형들을 제시해 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발전적인 유형의 이단, 즉 기독교회의 이단성을 위협하던 전체적인 움직임을 영지주의라는 용어로 지칭할 수 있다.


영지주의란 단독적인 분파나 교의체계의 명칭이 아니라 오히려 사상과 실천의 한가지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까지 시도되어 온 이 영지주의의 현상들을 분류하려는 시도들은 그 어느 하나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는데, 이는 영지주의의 현상들이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때 기독교 신앙의 출현은 만물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다.


기독교는 하나의 신앙으로써 출현 하였으나 이제 기독교는 지식으로 고양 되어야만 했는데, 동양적 심상을 통하여 스며든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는 바로 이러한 일을 성취시킨 도구였다.






2. 오리게네스주의


기독교 내에서는 기독교적 영지주의가 출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적 영지주의의 중심부는 판타이누스에 의하여 설립된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였다.


바로 이 곳에서 유대인 필로는 은유적 방법을 통하여 히브리 전통을 플라톤 철학에 결부시키는 방법을 그의 기독교 제자들에게 가리켜 주었으며, 클레멘트는 비전의 사도적 전승에 관한 가설들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일련의 추상적 고찰들을 통하여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조직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 대부분이 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극히 축소되고 간략화된 영지주의적 교의들의 주요 부분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외관상 성경의 내용을 보존하고 일반적인 전승들과 신앙 규범을 수호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단지 후대에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오리게네스의 교의들의 특징들에 대해서만 고찰해 본다.


먼저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단일성과 우월성에 절충시키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아들됨의 실제성을 부인하지 않은 채 로고스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 함에 있어서 성자가 성부의 본질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점을 자명한 사실로 가정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의는 성자를 신격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성자를 성부에 종속시키고 있다.
 


여기서 후자의 견해는 후대의 정통 신앙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이단적인 것이었다.


둘째로 그는 만물의 근원을 가장 지고한 존재로 보고 또한 만물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만물이 마귀들 마저도 결국 하나님께로 회복된다는 점을 단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오리게네스의 교의들이 후기에 와서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에 관한 정통교리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을 고찰해 볼 때 오리게네스의 교의들 속에 나타난 영지주의적 이단들이 정통교리의 활로를 예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3. 마르키온주의


이처럼 만연해 있던 추론적인 경향에 대한 강한 반발은 일개 상인이었던 마르키온에 의하여 제기 되었는데, 그는 A.D 140년경에 폰투스(본도)에서 로마로 왔으며 분명히 바울 노선에 속한 반 유대적으로서 금욕주의적인 기독교를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운동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 결과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수백 개의 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마르키온은 복음이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은총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유대교의 의와 복수의 하나님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또한 끝까지 바울 노선에 따른 율법과 은총의 반립을 고수함으로써 구약의 야훼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홀연히 그 자신을 나타내신 사랑의 하나님과 동일시 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유대교의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이 세상은 악한 것이며 참된 기독교인의 삶은 천상에 속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교인들에게 결혼을 금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에 따라 열편의 정통적인 바울 서신들과 누가복음과 유대교적인 부분들을 삭제한 사도행전만을 기독교의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를 선하신 하나님과 동일시 한 마르키온의 견해는 정통교회로 하여금 기독교 정경을 확정짓도록 하였다.


마르키온주의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거부하였던 까닭에 필연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들의 도덕적 열의는 이들의 교회가 오랜 기간동안 이탈리아·이집트·팔레스타인·아라비아·시리아 그리고 그밖의 지역에 영향을 미칠 만큼 지대한 것이었다.






4. 모나르키아니즘


영지주의에 대한 또 다른 반동 세력들은 마르키온주의와는 반대로 예수에 관한 단순한 초대교회의 견해와 합리적인 유대주의로 되돌아 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운동은 추론적이고 은유적인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대항하여 안디옥에서 일어난 비판 역사적인 해석학파에 의하여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반동세력의 주요한 양태는 모나르키아니즘과 몬타누스주의였다.


우리는 이 모나르키아니즘을 오늘날 우리가 소위 가톨릭 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는 모나르키아니즘은 우주에 대한 유일신론적인 통치를 수호하는데 지적이고도 도덕적인 관심을 기울였던 반면에 가톨릭 주의는 오늘날의 가톨릭 신학의 계기가 되었던 구원의 군주성과 완전성을 수호하는데 감정적 종교적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주의"는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각기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모나르키아니즘은 비록 때로는 가현설적인 경향을 지니기도 하였으나 예수의 인간적인 삶의 사건들의 실제성을 강조하는 한편 그 당시에 만연해 있던 다신론적 경향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돌려진 지극한 고귀성과 탁월성을 신앙으로 보존코자 하였다.
 


이들의 기독론은 예수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들리워진 인간이었다는 양자설이거나 혹은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 이상의 존재로서 그 안에는 하나님의 선재적인 영이 거하고 계셨으며 따라서 그는 인간을 구원할 능력을 지녔다는 영성론이었는데, 전자는 에비온주의에 스며들어간 반면에 후자는 그 당시에 만연해 있던 추론적인 경향을 띤 것이었다.
 


A.D 170년경에 소아시아 지방에서 출현한 "알로기파"는 이러한 후기 양자론자들 중에서 가장 주요한 분파였다. 이들은 몬타누스주의에 반대하였으며 예수의 인간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로고스에 관한 논리를 거부하였으며 아마도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제4복음서를 요한의 작품으로 보지 않고 영지주의자였던 케린투스의 작품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후기에 와서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한층 더 강력한 양자설을 제시하였다.


양성론적 기독론은 이 기독론이 그리스도를 신의 영역에서 제거시키느냐 아니냐에 따라 양식론적 기독론과 신력론적 기독론으로 나뉘어졌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두 기독론 모두에 있어서 매우 어려운 난제였는데, 신력론자들은 그리스도가 사망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주장했던 반면에 양식론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완전히 동일시 하였으며 따라서 테르툴리아누스로부터 "성부수난론자"라는 별명을 부여 받았다.






5. 몬타누스주의


기독교 사상의 추론적인 경향에 맞선 두 번째 주요한 반동세력인 카타브루기아주의, 혹은 몬타누스주의라는 이단의 명칭은 브루기아의 기독교 예언자인 몬타누스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몬타누스는 부루기아인들의 광적이고도 도취적인 성향을 초기 기독교의 비 세속적인 도덕성과 영감설과 단순성에 조화시키려 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보혜사에 대한 약속의 성취(몬타누스는 이 약속이 자기에게 성취되었다고 주장하였다)와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과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왕국이 브루기아에 있는 페푸자에 세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단언하였다(A.D 156년경).
 


그리고 그는 성령을 받은 자들은 모두 다 예언자가 되며 이들은 이로 인하여 완전해진 까닭에 죄없는 삶을 살 수 있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결혼을 금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러한 이상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천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하여 신앙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결혼을 허용해 주었으며 죄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와 용서받을 수 있는 죄로 나누었다.
 


몬타누스주의는 분명히 지고한 도덕적, 영적생활을 그 목표로 삼고 있었다.


몬타누스주의는 두 번째 회개를 부인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방종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며 교회적인 권위를 직접적인 영감의 권위 하에 예속시킴으로써 그 당시에 만연해 있던 형식주의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자신의 만년에 몬타누스주의로 돌아선 사실은 몬타누스주의가 지대한 도덕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이 몬타누스주의 운동은 크게 발전하였으며 5세기에 종결된 오랜 논쟁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다소간의 망설임과 불안 가운데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그리고 이와같이 몬타누스주의가 이단으로 제거됨으로써 교회의 교권은 강화되고 정경의 수립이 촉진되었으나, 가톨릭 주의는 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두 계급의 기독교인과 두 부류의 죄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옛 이단들 중에는 위에 언급된 유형의 모든 이단들과 다소 분리된 두 가지 유형의 이단들, 즉 바울과 마니교가 있다.






6. 바울교


팔미라의 여왕인 제노비아의 궁중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안디옥의 주교였던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양자설과 오리게네스주의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반-형이상학적인 견해와 결합시켰다.
 


그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서 비 인격적인 로고스에 의하여 영감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격적, 도덕적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시면서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뜻과 하나님의 뜻과는 완전한 일치는 절대로 다시 풀려질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부활시에 영원한 신적인 위엄을 지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파울로스는 A.D 268년(혹은 269년)에 안디옥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순교자 루키아누스에 의하여 얼마동안 지지되었던 그의 견해는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즉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에는 그의 제자들이 수 없이 많이 있었으며 아르메니아로부터 그의 교의들을 트레이스와 불가리아에 전래시킨 이주민들은(이들은 그들 자신의 교단을 바울교라고 지칭하였다) 중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대폭동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8세기에 스페인에서 이들의 견해는 그 유명한 알퀸이 가담했던 극히 중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이러한 교의들을 지녔던 종파들이 종교개혁 시대까지 존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즉 최근에 촌락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서 "진리의 열쇠"라는 문헌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헌은 금욕주의와 혼합된 이들의 복음주의적인 특성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7. 마니교


마니라는 이름의 메소포타미아 사람이 여러 지방을 여행하다가 245년에 페르시아의 수도에 도달하였으며 이 때부터 새로운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선교활동은 그가 왕의 총애를 받게 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다른 왕이 즉위하자 '마기'의 반발로 인하여 왕의 총애를 잃고 279년에 십자가 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교의들은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었던 까닭에 소멸되지 않고 급속히 유포되어 갔다.


그의 교의들은 이탈리아와 북아메리카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획득했으며 결국에는 프랑스의 카타리와 스페인 그리고 그 인근 지역들을 휩쓸어 훗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전조가 된 문화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하는 강력한 종교 단체로 발전하였다.
 


마니교는 다시 소생하는 영지주의 같다.


마니교는 유대교와 바벨론 종교와 조로아스터교와 불교의 신조들과 우주관들을 병합하여 이를 기독교 용어로 표현하였다. 마니교는 신자들을 방청인과 선민, 혹은 완전자의 두 부류로 나누었으며 가공적인 우주관과 우주적 구원론과 이원론적인 윤리관을 제시하였다.


특히 마니교의 교의는 위의 마지막 항목에 있어서 신플라톤주의를 능가하고 있는데 이는 이 이원론적 윤리관이 악의 실체성과 영원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니교는 물질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이 그 근본에 있어 하나이며 각기 사단과 하나님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는 어두움의 왕국과 빛의 왕국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단에게 항거하시기 위하여 원초적 인간(이 인간은 지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을 창조 하였으나 이 인간은 사단에게 패배를 당하고 말았으며 또한 이 인간은 비록 하나님과 천사들에 의하여 구조되었으나 이와 동시에 빛의 요소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의 악한 세상은 이 빛의 요소들이 어두움과 혼합됨으로써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마귀들은 빛의 요소를 감금시키고 보존하기 위하여 이에 알맞은 인간을 창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감금되어 있는 빛의 요소들을 되찾고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그 빛의 저장소가 될 천상계-태양·달·별들-을 창조하심으로서 구원의 방편을 마련하셨다.
 


여기서 예수-비 역사적인 예수-와 선택받은 자들은 인간을 돕는 구실을 한다.


이러한 과정은 죽음 이후(연옥)에까지 계속되는데, 구원을 받지 못한 영혼들은 이 세상의 종말시에 어두움의 군주에게로 예속된다.


이러한 인상적인 철학의 배후에 깔려 있는 도덕적인 진지함과 엄격한 금욕주의와-이들은 결혼, 세속적인 욕망, 더러운 말, 육식, 육체적인 가해 등을 엄금하였다.
 


간결한 제의 행사는 많은 숭고한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은 관대함에 대한 교의로 인하여 약화되었는데, 이 마니교의 영향은 중세기의 유케파, 광신파, 보고밀파, 베가프회 등에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