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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종교 ‘천리교’ 고찰로 본 신종교 의미와 한국의 천리교

하나님아들 2021. 11. 9. 23:11
일본 신종교 ‘천리교’ 고찰로 본 신종교 의미와 한국의 천리교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국내에는 많은 일본계 종교가 유입되었고, 활동해 왔다. 이에 대한 연구는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일본에서 형성된 종교인 '교파신도'가 어떻게 한국에 유입되고 활동해 갔는지에 대한 연구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신흥 종교의 천국이다. 정부 집계에 따르면 법인 숫자는 430개다. 실제론 19만 개가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자 규모 1위는 ‘신도(神道)’다. 일종의 전통 종교로 8만 개 단체와 7000만 명이 등재됐다. 2위는 신흥 종교의 선두주자인 ‘행복의 과학’으로 1100만 명이다. 3위는 창가학회다. 830만 명의 신자가 있다. 종합하면 일본인 중 신앙인은 30% 전후로 보는 게 타당하다. 약 4000만 명이다. 이 중 절반이 신흥 종교 신자다. 나머지는 신도와 불교 신자다. 기독교는 극소수다.     

따라서 일본 신종교 고찰을 통해 신종교를 집퍼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다. 한국에 유입된 일본 대표적인 신흥종교 천리교 고찰을 통해 신종교의 의미를 짚어보고 천리교한국교단의 현황을 정리한다. <편집자 주>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현재 교회 1만6천개소, 교사 16만 9천명, 신자 2백62만명의 일본 교세

천리교본부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소속교회가 거점이 되어 포교활동을 행하고 있다. 교회조직은 종적 계통이 강하며, 횡적으로는 교구가 있지만 그다지 구속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문서전도를 포함하여 개인의 포교활동이나 교회단위의 포교활등은 대부분 종적 계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밖에 의료․체육․출판을 통하여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전후에 이르러 새로운 많은 신종교 집단의 대두에 압도되어 포교의 성과는 크다고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기관지로서는 주간 “천리시보” 및 월간 “천리시보”․“기”가 각각 7만 5천부, 월간 “길동무” 및 계간 “거친 동료”가 각각 2만부씩 발행되고 있다. 교단조직은 교조의 혈통을 이른 진주에 의해 통리되며, 그 아래에 본부의 임원으로서 내통영․외통령․본부원이 있다. 교회에 있어서는 본부직속의 대교회, 그 아래에 분교회가 있다. 따라서 교단 통치는 진주-본부-대교회-분교회-신도의 도식이 되며, 분교회장 이상은 모두 세습제이다. 종교법인은 대표역원인 표통령은 진주가 임명하며, 임기는 재임중으로 한다. 책임역원 11명은 표통령이 선정하고 임기는 재임중이다.

사업은 게가로 불리는 병원이 있는데 의학․신앙․생활의 3방면에서 구원하려는 종합병원이다. 천리대학을 비롯하여 유치원․소․중․고에 이르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천리대학에는 일본최초로 한국학(조선학)과가 설치되어 일본에 있어서 한국학연구의 센터(조선학회와 “조선학보”)가 되고 있다. 이는 일제시대의 한국포교와 무관하지 않지만, 부속도서관에는 당나라 법장화상(643-712)이 신라의 의상조사(625-702)에게 보낸 편지 「기해동의상조사서」와 조선초기의 화가 안견의 작품인 「몽유도원도」 등의 귀중품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육영재단․아동보호시설․출판사․연구소 및 교인의 양성기관인 천리교교가 있다.

관련단체로서는 길의 교직원 모임(천리교관계 교직원의 모임, 기관지 “과연의 사람”), 천리교학생회, 천리시보사(인쇄), 양덕사(편집 출판), 동경천리교관(문화센터) 등 여러가지가 있다. 교세는 교회 16,558개소, 교사 169,312명, 신자 2,622,652명이다. 참고문헌에는 “천리교사전”(1977, 도우사), “교본천리교교조전”(1956, 도우사), 소요순자 “일본의 근대화와 천리교”(1969, 평론사), 촌상중양 “근대민중종교사의 연구”(1963, 법장관), 천리교교회본부편 “천리교년감”(매년 발행, 도우사), 안의치 “천리교용어사전”(1962, 양덕사), 준전태삼 “천리교 존명의 교조․중산미희”(1985, 강담사) 등이 있다.

 

불교 4개, 신도 4개 종파 등 합방 전부터 들어와 경무국의 정책적 보호로 성장    

일본종교가 한국에 상륙한 것은 불교 외에도 신도, 기독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일본종교는 최초 일본제국의 정치세력 팽창과 함께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한다는 것이었다. 한일합방 이전만 하더라도 일본인들의 내왕이 빈번해지고 포교에 기반이 잡히자 점차 그들은 한국인 포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불교 4개 종파, 신도 4개 종파, 그리고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내왕이 있었다. 1915년에는 공포된 포교규칙에 힘입어 소위 공인교로서의 신도․불교․기독교는 사원과 포교소․교회 등 포교근거지를 증설하였고, 자연히 일본종교들은 각 방면에 포교의 성행을 보게 되었다. 당시 포교규칙에 의하면 신도․불교․기독교는 공인교로서 조선총독부의 학무국 종교과의 관리를 받았고, 이들 세 종교를 제외한 기타 종교, 즉 유교를 포함한 한국의 모든 종교들은 유사종교 혹은 종교유사단체로서 경무국에서 관리하도록 되었다. 따라서 이들 일본종교들은 정책적인 보호를 받아 급히 성장되었다.    

일본계 신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00년초 천리교이다. 해방 이후 일연정종, 천조광교, 래세구세교, 대우주신교 등이 들어왔다. 이 중에서 천리교와 일련정종이 크게 번창했다.

천리교는 대한천리교와 한국천리교연합회로 대분되어 있는데 대한천리교가 일본 본부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한국적 특성을 살리려는 경향이라면 한국천리교연합회는 대한천리교로부터 분립하여 일본 천리교와 관련을 맺고 일본의 지시를 받고 있다. 양파를 합해 한국의 천리교 신자는 45만명에 이르고 있다.     

일련종교는 초기에 창신동파 정능파 원남동파 부산파 여수파 대구파 등으로 나누어 각기 포교하였으나 현재 한국일련정종불교회 사무국 산하에 총합본부를 두고 80여만명의 신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실지로는 「한국일련정종불교회」 「대한일련정종법회강불교도회」 「한국일련정종본부」 등 3파가 크게 분립되어 있고 기타 군소종파들이 각기 독자적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일본 신도계 종단인 신리교, 대사교, 生長의 가, 선인회, 정토진종, 도덕과학연구회, 본문분립회, 세계구세교, 대우주신교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다.    

1900년 초 한국에 처음 들어온 천리교, 해방 이후 일연정종, 천조광교 등도 유입    

천리교의 교조(오야사마로 부른다.) 중산미기는 1798년 4월 18일 대화국 산변군 삼매전촌(현재 내양현 천리시 삼매전련)의 대장옥 각주에 대한 관서지방의 명칭으로 막부직할지의 련촌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장옥과 관인인 대관의 중간층에 해당되는 지방무사를 말한다. 신분은 련인이나 농민이지만 무사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으며, 대도가 승인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천반칠의 장녀로 태어 났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13세가 되어 고향에서 조금 떨어진 장옥부촌(현재 천리시 삼도련)의 장옥 중산선우위문에게 시집가서 평범한 주부로서 일생을 보내게 된다. 그녀의 시가는 주식중개업을 통해 부를 쌓은 촌에서도 한 두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녀는 시집에서 봉건적인 여성의 속박 윤리였던 삼종지도을 준수하며, 시부모를 공양하고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고 엄청난 가사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소작인에 대한 관리나 보살핌에도 충실하는 등 전형적인 봉건제하의 여성상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결흔한지 3년만에 媤母로 부터 주부권을 양도 받을 정도로 주부로서의 모범적인 생활을 하며 l남 5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모범적 생활태도와는 달리, 남편은 특별한 직업이 없이 무위도식만을 일삼고 게으름과 무절제한 생활로 물려 받은 가산만을 탕진하여 부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막부의 동요가 나타나고 있던 1830년과 1835년에 미끼는 어린 2녀 와 4녀를 잃는 슬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어 1837년 10월에는 장남 수사가 밭에시 보리 파종을 하던 중에 다리에 심한 통증을 느껴 기다시피 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다. 여러가지 치료를 해도 별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 집에 자주 염불기도를 해 주던 산복시병위가 마침 이웃 집에 들른 길에 가지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 때 산복의 전속 가지태  무녀로서 가지 기도 중에 신령을 잠시 불러들이는 접신의 대리인이 없었기 때문에, 미끼 자신이 목욕 재계하고 가지태가 되어 기도를 행하게 되었다. 기도가 진행되고 흥분이 고조되자 미끼는 갑자기 입신 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러면서 바로 이때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나는 천의 장군이다. 나가 본래의 참 신(원의신, 실의 신)이다. 중산가에 인연이 있어 지금 세상을 구하기 위해 천강했다. 나의 사신을 모신 건물 내지는 사당을 의미로 미끼를 쓰고 싶다. 신의 말이다. 승낙한다면 세계의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만약 승낙하지 않는다면, 중산가는 풍지박산날 것이다.”      

천리교에서는 이날을 입교일로 정하고 있다.

10월 26일 밤까지 지속된 그런 입신상태는 미끼의 남편이 미끼를 신의 지시대로 신사로 빌려 주기로 함에 따라 끝나게 된다. 그런 체험이 있은 후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가사에도 충실하지 않은 채 허송세월한다. 그 사이 남편도 세상을 뜨게 된다.

그녀의 첫 종교적 활동은 1854년 그녀의 삼녀가 첫 출산을 할 때 처음으로 「帶屋ゆろし」를 행하면서 시작된다. 차츰 순산과 각종 창병을 치료하는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 지역에 산실신으로 불리우며 사람을 모으게 된다. 그녀가 본격적인 포교에 들어가는 것은 1864년으로 나중에 본석(本席)이 된 목수였던 반강이장이 20평 남짓한 건물을 지어 근행장소로 마련해 주어 여기서 비로소 사람들을 모아 강을 연다. 이 때부터 1888년 4월 동경지사로부터 교회 설치를 인가받은 때 까지를 흔히 강사 시대라 한다. 특히 1867년에는 각종 강사로 부터 포교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길전가의 공인을 얻어 습합신도로 등록함으로써 천륜왕명신을 신앙하는 강사의 하나로 공식적인 사회적 승인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つとめ’의 형식과 내용을 차츰 정비하고, 이 때부터 「みかぐちうた」를 짓고 1869년 부터 15년에 걸쳐 계시의 책이라는 「お筆先」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875년 중산가의 집안에 친신 천리왕명이 인간을 창조한 지점으로 지바 정하고 여기에 처음 감로태 인류창조의 장소인 지바에 설치하여 하늘로 부터의 감로를 받아들이도록 마든 정육각형의 미끼의 13단으로 된 台이다. 이것과 더불어 지바에 1934년 부터는 미끼의 발자욱을 새긴 목조석형 간로다이를 설치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때부터 신자 조직인 강을 나라, 오사카, 교토 등지로 설치해 간다. 이렇게 미끼의 강이 점차 새로운 신자를 확보해 나가자, 신사 측이나 사원, 경찰 모두로 부터 감시와 간섭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1874년 당시 내부성하달로 공포된 금염기도를 금하도록 하는 조치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경찰로부터 어폐와 경 등을 몰수당하고 현청 사사과로 부터 조사를 받고 미끼는 정신질환 유무를 진단받는 등의 조치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미끼는 생존시에만 18차에 걸친 구류와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한다. 교조미끼는 1887년 1월 26일 90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러나 천리교에서는 그녀의 몸을 사라졌지만 혼은 영혼이 변함없이 원래의 집이 있는 지바에 머무르면서 존명하여 수호활동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敎祖 미끼 사후, 전국적 교세확산해 1928년 신도 409만의 가장 큰 신종교단체 

미끼사후 그 후계자로는 교조를 대신하여 신의를 중개하도록 인정받은 반강이장이 본석으로 오르고 미끼의 외손인 중산진지양은 초대진주로 취임한다. 그리고 1888년 천리교는 본부를 일시 동경으로 이전하여 동경부지사로부터 교회설치를 인가받아 중산진지양을 교회장으로 하여 신도본국 소속의 천리교회로 출발함으로써, 교파신도의 체제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해 바로 다시 본부를 원위치시키고 천리교 소속 지부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교세는 확대되기 시작하고 1891년에 월간지를 창간한다. 동시에 당국의 천리교에 대한 간섭과 단속은 이어져 이를 피하고 독립교파로 공인받기 위할 목적으로 1893년 군함 한 척의 건조비로 1만엔을 정부에 기부하기도 한다. 또 이 해에 천리교의 포교사 이견반치랑이 단신 부산에 들어와 포교를 하기 시작함으로써 해외 포교활동의 문을 열기도 한다. 1896년은 마침 교조10년제를 두고 대대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오끼나와를 제외한 전국의 부현에 교회를 설치할 정도로 교세를 크게 확장하고 있었다.

이 해 4월 6일 내무성은 「훈령갑제12호」를 비밀리에 전국 경찰서와 경찰분서에 하달하여 남여혼숙을 자행하고 금염기도로 의료행위를 하는 등 음사사교 집단으로 규정하여 천리교에 대한 단속을 철저히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동시에 각종 매스미디어를 이용해 대대적인 반음사사교 캠페인을 벌기리도 했다. 이에 천리교 측은 5월에 교단개혁조항을 발표하고 신명을 천리대신으로 바꾸고 활동도 제한할 뿐 국가신도 체재에 맞는 교의와 의례로 변경을 서둘러 교단의 존속을 도모하게 된다. 그해 12월에 본부 신전과 교조전을 완성하고, 1915년에는 이대 진주 중산정선이 취임하여 1921년부터는 1926년의 교조40년제에 맞추어 교세 배가운동을 전개 1928년 통계에 공칭 신도수 409만 3천명을 포괄하는 대교단이 되었다. 당시교회 숫자가 10,430개소로 가장 큰 신종교 단체로 발전하고 있었다.

일제의 패전으로 당국의 제약이 풀리자, 우선 당장 천리교는 교조의 가르침에서 빗나가 있던 교의나 의례를 「복원」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원 위치시키는데 주력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49년에는 원전에 충실한 “천리교교전”을 간행하고 1956년에는 교조의 전기로 「교본천리교조전」을 간행한다. 그리고 1967년 삼대진주로 중산선위가 취임하면서 다시 교조년제에 맞춘 포교방침을 내고 또 최근에는 교의연구나 신자의 교육, 복지, 의료 등의 시설로 사용하기 위한 「おゃさたなかた」를 건설하는 중에 있다. 현재 교세는 1989년 “종교년감”에 따르면, 신자 175만4천여명, 교사 18만5천명, 법인 15,417개로 매우 방대한 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미키의 포교는 사원․신사․山伏 등의 압박을 받았으나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길전가의 공인을 받아 최초의 교전(敎典) 「미기구라우다」를 만들었다. 이것은 막부가 망하기 직전의 격동기에 민중에서 고조되었던 세직(세상을 평정함)의 대망 분위기를 반영하고 친신에 의해 이상한 힘을 얻어 병도 재난도 부자유도 없고 양기만이 있는 이 세상의 극락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명치유신후 천리교는 대판으로 진출하였고, 미티는 「오후데사끼」란 교의를 지었다. 천리왕명을 인간세계의 창조주 친신으로 삼고 창조의 성지를 중산가의 집터로 삼았다. 친신은 시간․사람․장소, 3개의 인연에 의해 신사로서 하늘에서 내려와 세계는 구제한다고 하며, 모든 인간에게 평화와 풍부한 양기의 삶을 약속했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욕심 등의 여덟 가지 애(惡心)를 버리고, 자신의 몸은 신이 준 것, 신으로부터 빌린 것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신앙하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천리교는 명치 전기에 현세중심, 인간 본위의 구제종교로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의 가르침에는 인간은 모두 신자로서 평등한 형제이며 죽음은 새로운 탄생에 불과하고, 집은 부부가 중심이 되며 조상숭배나 가부장제 가족 도덕을 부정하였다. 국가 신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천리교는 끊임없이 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미키는 고산(권력자)의 몰락과 곡저(民家)의 융성을 예언하고 독자로 창조신화「고후끼」(이해고기)를 지었다. 고후끼는 친신가 이해에서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을 위해서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하고 인간이 양기 생활을 즐기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친신의 소원에 따라 인간세계가 창조되었다고 하는 어디까지나 인간 본위의 신화였다.

미키는 18회 검거되었고 탄압 속에서 다난한 90년생 생애를 끝냈다. 그녀는 유언에서 신앙은 모든 정치 권력이나 법률을 초월한다고 가르쳤으나 그가 죽자 천리교는 구가신도에 종속하고 탄압을 면하여 활동을 합법화하는 길을 걸어, 1908년 교파신도의 최후의 독립교파로서 공인되었다.     


천리교란 어버이신님을 신앙하는 종교로 어버이신님을 천리왕님이라고 부른다. 천리교가 신봉하는 천리왕님(일명 어버이신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은 신인의 공락하는 즐거운 삶을 누리는 것이며, 그 삶을 잘살고 못사는 것은 인간들의 마음 씀씀이에서 온다고 한다. 인간은 다같은 형제이니 서로 도와 상부상보하면서 살아가게 되어있고 또 그렇게 살아갈 때에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제신은 친신, 천리왕명이다. 교조신앙으로 천리교를 낳은 교조 중산미희를 그렇게 부른다. 교전은 신이 내려 기술한 “신약가”와 “어필선”, 그리고 여기에 “어지도”를 합하여 3원전이라 한다. 전후 새로운 시대에 부응한 교전의 작성에 힘을 기우려 1949년 10월 26일 제정된 것이 “천리교교전”(천리교교회본부편, 도우사)이다. 의식행사는 항례제로 불리는 것에 월차제(매월 26일)․춘계대제(1월 26일, 교조 명일)․추계대제(10월 26일, 입교일)․교조탄생제(4월 18일)․춘계영제(3월 27일)․추계영제(9월 27일)의 육제전이 있고 그 밖에 원단제(1월 1일)․어린이 모임(7월 25일-8월 4일)․교조경축순간(4월 18-27일)․청년회총회(4월 19일)․부인회총회(4월 20일)․체육제(4월)․학생생도수양회(8월 7-18일) 등이 있다.

<천리교 3원전>    

신약가: 근행을 위한 손춤의 지가로서 팔수의 노래가 1장에서 12장까지 각각 10수씩의 수가형태로 되어있는데 교조가 직접 지은 것이다.
어필선: 교조 미끼가 ‘어버이신’의 뜻을 받아 적은 것으로 1711수의 노래가사 형식의 17권으로 되어있다.
어지도:타인이나 교회 용재를 비롯하여 신상사건 등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어버이신님께 여쭈면 어버이신님께서 마음가짐이나 핼할 바 처신 등을 교조 미끼에게 지도해 주신것으로 1887년 초부터 1909년까지 20년 간의 지도말씀을 기록한 것이며 총 8권으로 되어있다. (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

 


 

 

 

1903년 부산서 포교 시작, 해방때 국고 귀속-영락교회가 해방전 천리교 건물

천리교는 그 성립이 이르고 교세가 신장됨에 따라 사회적 영향력도 컸던 관계로 분파가 적지않게 일어났다. 자료에 의하면, 이 밖에도 1944년 회전히데에 의한 세계도심회본부즉 현재의 세계도심교단, 1946년 좌전팔중에 의한 성정도교단, 1950년 강본쓰에에 의한 일본신성강, 1961년 상출 후사에에 의한 천진교, 그리고 1962년 홈미치에서 대서옥 외에 의한 미륵회 즉 현재의 홈부싱이 파생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천리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03년 「구로시다로」가 부산에 와서 포교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971년 4월 서울 용산구 동자동 「천리교포교소」를 설립, 활발한 포교를 했으나, 8․15해방 직후 왜색종교로 몰려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9월 21일 미국 조선주둔 24군사령부 종교담당 책임자 ‘밋첼’ 중위는 천리교를 일본제국과 천황가를 받드는 일본의 국가신도의 한 분파로 규정하고 11월 12일 폐쇄와 함께 대한민국에 있는 ‘재단법인 천리교 조선유지재단’에 속한 건물을 국고로 귀속시켰다. 영락교회가 해방전 천리교 건물이었다.     

1948년 「천경수양원」이란 이름으로 재출발, 1965년 신도 60만명 전성기    

1948년 「천경수양원」이란 이름으로 군정청 공보처에 등록하고 재출발을 시작했다. 1952년에는 「대한천리교련합회」로 개칭했고 초대 교통에 김진조가 부임했다. 1963년에는 「재단법인대한천리교」로 다시 이름을 바꿔 문공부에 등록했다. 1964년 제2대 교통에 최재한이 부임하면서 활발한 포교활동이 전개되었다.

1965년경에는 신도가 50여만명에 달하는 번창을 가져왔다. 1974년에는 최명진이 교통이 부임했고 1983년에는 서울 용산구 청파동 1가 121-3에 본부를 옮겼다. 1987년에 6대 교통으로 김기수가 피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한국 천리교는 교조의 근본정신에 따른 한국적 천리교를 만들려는 「대한천리교」와 일본식 천리교인 「한국천리교련합회」의 두파가 형성되어 있다. 「한국천리교련합회」는 1996년 「천리교 한국교단」으로 교단명칭을 변경했다.

일본의 천리교는 명치 이후 신도 천리교가 되어 신앙상징이 교조 당대의 감로대가 아니라 일본 신도의 상징물인 쇠거울(神鏡) 「야따노가마미(팔경)」를 예배의 목표물로 삼고 「리노마루」를 그린 빨간 부채를 들고 「하오리하까마」를 입고 천조대신의 부모신을 모시고 있다. 이같은 신앙은 그간 한국에서도 그대로 따르고 있었는데 1985년 신앙상징물을 신경 대신 감로대로 바꾸고 기타 신도적 요소를 모두 제거시켜 버렸다. 이유는 일본의 민족신앙이 아닌 세계종교로서의 천리교를 믿고 교조의 근본정신에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일본 민족신앙 아닌 세계종교로서의 천리교를 믿고 교조의 근본정신에 돌아가자”

 그런데 여기서 반발하여 1987년 일본식 천리교를 고집하면서 마산 진해 지역의 천리교인들이 독립하여 진해시 여좌동 「한국천리교련합회」를 조직 독립해 나갔다. 현재 교세는 두 파를 합하여 8개 교구 5백여 교회와 1천여의 포교소가 있으며 신도수는 약 45만명에 달한다.

최재한은 1927년 16세로 일본에 와 한센씨병으로 고생한 끝에 1947년 천리교에 입신했다. 그는 한동안 큐슈(九州)북부 및 히로시마(廣島)의 재일교포 지역에서 포교한 후, 1955년 한국에 밀항, 눈부신 포교성과를 올렸다. 이 최재한이 죽은 1988년까지 원남성교회에서 17개소의 교회가 발생될 정도였다. 이리하여 최재한 이후, 재일 한국인들에 의한 모국방문과 포교가 줄을 이었다.     

현재 한국의 천리교 신자 가운데, 이처럼 재일교포의 귀국에 의해 설립된 교회 계통에 속한 신자들이, 패전 이전부터 존속했던 교회의 계통에 속한 신자들보다도 수적으로 더 많다고 한다. 패전 후 한국 천리교의 교세확대는 최재한이 설립한 원남성교회의 발전과 보조를 맞추어, 1960년대 및 70년대에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내 천리교 가운데 대한 천리교의 성직자(교직자)양성기관인 대한천리교 수강원은 천리교 한국교단의 유일한 용재(용재:교역자) 양성기관이다.

현재 서울 용산구 청파동을 비롯하여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 대구, 진해, 광주, 제주 등지에 수강원이 있으며 3개월 간에 천리교의 교리와 기본적인 신앙체제를 확립하여 교역자를 양성한다.

수강원에서 청강할 수 있는 자격은 남녀 만 17세 이상의 신자로서 학력 불문하고 합숙생활을 원칙으로 하는데 3개월 동안에 천리교 교의원전, 교전, 교조전, 신악가해설, 종교사 예전, 신무 등의 교과과목을 이수한다. 수업방법으로 오전에는 주로 강당에서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개인적인 신앙정진에 전념한다.

수강생들은 교육을 통해 제전악기․연습도 하고 특히 신상(질병), 사정(고민) 등으로 고난과 역경에 처해 있는 불우한 사람들의 갱생의 기쁨을 맛보게 하며 나아가 가정과 사회의 즐거움을 베푸는 사람으로의 인격수양을 한다.

수강원을 마친 후에는 교역자(천리교에서는 용재라 함)가 될 수 있으며 현재 국내에 산재해 있는 1천여개의 천리교 포교소의 포교사로 활동하게 된다.

현재까지 대한천리교 수강원 수료생은 3만여명을 헤아린다.

천리교가 기구조직은 교통을 정점으로 하여 교의회가 있고 그 아래 교정집행기구로서 교무원을 두고 있으며 교무원 산하에 8개 교구가 직할시, 도 단위로 있다.

교역자 양성기관으로 수강원이 있고 그외 교정기관으로 감사위원회, 심사위원회, 번역위원회, 징계위원회가 있으며 유지재단으로 재단법인 대한천리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복지후생을 맡고 있다.

특기할 것은 천리교의 봉사활동을 ‘히노끼싱’(양기생활)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나날이 살아가고 있은데 대한 감사와 즐거움에서 어머이신님께 바치는 일체의 인간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어버이신님이 즐겨하는 것과 바라는 것을 스스로 행하는 행위가 어버이신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이며 그래서 즐거운 생활 양기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리교 신도들은 매달 거리에 나가서 청소도 하고 교통정리, 유원지에서의 어린의 보호활동 등 봉사활동을 정기적으로 실시한다.

교주격인 교통은 4년만에 한번씩 최고의 결심의 기구인 교의회에서 선출되며 교단을 대표하는 직위로서 초대 교통은 김진조, 2대 교통은 최재한, 그리고 최명진씨가 3∼4대 교통직을 역임했고 1983년 8월 13일자로 제5대 교통으로 취임한 김기수씨 지난 1987년 4월 18일 자신들이 속해 있는 대한천리교본부를 제외한 한국천리교련합회등 유사단체들은 日本의 국수적 신앙의 대상인 신각봉안하는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기수는 1904년 제주도 출신으로 1920년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1925 서울법정학교 법학과를 수료하고 1933년에 천리교에 입교하여 천리교 교의강습소 제33기 수료를 했고 해방 후 성동구에서 천리교 혜성교회를 설립하였다.

1946년 대한 천리교단의 모체가 되는 천리수강원 결성에 참여하였고 1954년 대한천리교 교정부장, 1955년 대한천리교 수강원장이 되었으며 1983년 8월 13일에 재단 이사장 및 교통(교통)으로 피선되어 1984년 1월 14일에 취임식을 가졌다.

대한천리교 조수현 교통은 86년 한국천리교연합회로 갈라져 수차 재산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1993년 2월 11일 교단본부(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소재)을 전격 접수하면서 업무 개시와 동시에 ▷ 일본본부 간섭 배제로 자주교단 운영 ▷ 천리신앙의 한국 토착화 ▷ 교단의 민주체제 전환 등을 내세우고 일본과의 종숙관계 단절을 주장하고 있다. 1993년 2월 기준 3개교파 2백 60여개 교회에 50만신도(자체집계)가 있다.

천리교의 교리적 특색과 한국 무속과의 연관성

천리교의 교리적 특색으로는 천리교는 어버이신 천리왕님을 신봉하는 종교이다. 그리고 천리왕님이라 함은 온 세계의 인류를 비롯하여 세상만물을 창조하여 주재(主宰)하고 섭리하는 어버이신님을 찬양하여 기념(祈念)해 받드는 칭호이다. 즉 천리왕님은 없던 세계, 없던 인간을 창조해 주신이 우주의 본원(本元)이 되는 어버이신님인 동시에 영원히 변함없이 만물에 생명을 주시고 자라나게 하는 실재(實在)의 어버이 신이다. 

어버이 신님이 남긴 유품으로 교전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붓을 잡고 친필로 1711수와 신악가(神樂歌)등 어버이신님의 계시 말씀을 직접 써 남겼다. 

인간의 질병이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천리에 맞지 않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고, 인간의 마음의 성인(成人)에 따라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신 것이다. 

죽은 후에 있는 어떤 세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出直)하는 내생(來生)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내생을 믿는 이상, 물론 이 전생(前生)도 믿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인생은 전생, 금성, 내생으로 이어지는 삶의 연속인 것이다.

우리인간은 창조주이신 어버이신님에 의해서 태어나게 된 신의 자녀이며, 우리 인간의 주체가 되는 영혼을 그 본성에 있어서는 매우 맑고 깨끗한 명성을 지닌 것이다.

<은혜> 
1. 어버이신님의 은혜(神恩)
2. 나라의 은혜(國恩)
3. 어버이의 은혜(父母恩)
4. 스승의 은혜(師恩)
5. 사회의 은혜(象恩)  
 
천리에 맞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고치게 하여 115세의 정명(定命)까지 살게하며, 또 더 나아가서는 병들지 않고 죽지않고, 쇠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겠다고 일러 주시고 있다. 그러나 미끼는 1887년 1월 26일 90세 나이로 죽었다.    

마호메트가 40세에 천사를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종교생활을 시작했듯 천리교의 창교조 미끼여사도 41세에 신을 만난다. 두 사람 공히 배우자가 있었으며 나름 정상적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마호메트가 상인으로 살면서 접한 외래문물과 성장과정에서 느꼈을 것이다. 가난하고 병들고 나이든 주류적 삶과 거리가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유일신 사상이 전제되고 있다.    

미끼 역시 신장대를 잡았다는데 찬찬히 생각해보면 우리 조상들은 돌아가신 분이 있으면 무녀를 불러 진호기라는 의식을 치른다. 쌀을 놓고 그때 대나무를 잡는다. 꼭 돌아가신 분과 관련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된다. 대나무를 신장대라고도 하는데 그곳을 통해 망자와 접신하게 된다. 접신자의 입을 통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살아서 섭섭한 이야기를 못다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화해의 장을 펼쳐진다. 소반 위에 쌀에는 무당이 설명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보인다. 그러면 무당은 그 모양을 통해 새가되고 사람이 되고 짐승이 되었다는 진단을 한다. 이때 잡는 사람말은 신장대를 잡고 불,징 그리고 무당의 유도신문에 자신도 모르게 대나무가 움직였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교인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신장이 잘 내리지 않으면 무당은 주변에 기독교인이 있는지 유무를 확인 후 혹 기독교인 있다면 자리를 피해줄 것을 주문한 후 재차 시도한다.     

부흥회가 사람들을 극도로 흥분시키고 주변사람들이 은총을 받고 감사의 예물을 내놓으면 그 궁중심리에 의해 비자발적 참여를 하듯 신장대를 잡은 사람도 이와같은 유사한 분위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

 

출처 http://www.dailywrn.com/10456

[출처] 일본 신종교 ‘천리교’ 고찰로 본 신종교 의미와 한국의 천리교 |작성자 청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