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이단성! 사이비성!

성경에 나타난 이단의 정체

하나님아들 2021. 10. 3. 16:18

성경에 나타난 이단의 정체

 

1. 서론


이 글의 목적은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이단(異端)1 또는 거짓 선생들의 정체와 그들의 가르침을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조망해 봄으로써 복음 진리와 이단사상 사이의 구분선을 찾아 그것을 교회의 삶에 적용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단으로 거론되는 종파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에2 그것들의 주장들을 낱낱이 살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각각 열거하면서 복음 진리와의 유사점과 상이점을 밝혀낸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연구는 참된 복음의 전승을 위해 꾸준히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고, 주요 논점들을 찾아 전문적인 연구를 곁들인다면 교회에 큰 유익이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그러한 작업보다는 교회론적, 실천신학적 관점에서 관련 본문들을 중심으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등장하는 대표적 이단 또는 거짓 선생들의 정체에 대해 일견함으로써 거짓 교훈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찰하고자 한다. 나는 이 작업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세상에 난무하는 거짓된 가르침들을 식별하는 데 조금이나마 유익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당부하신 일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그들을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지적하시며(마 24:5), 그들은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11). 또 예수는 세상 종말에 자칭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다(마 24:5). 예수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막 13:22)고 경고하셨다.


바울 사도는 세 차례에 걸친 광범위한 선교활동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로 갔다가 유대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벨릭스 총독 앞에서 심문을 받은 일이 있다. 이때 더둘로라고 하는 변론가는 바울에 대해 고소하기를 “이 사람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행 24:5)라고 주장하였다. 유대교에서는 바울을 이단자로 보았다. 과연 바울은 이 말을 수용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는 “당신이 이단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추론이 타당한 것은 바울이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행 24:14-15)라고 응수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주장은 그들이 자신을 이단이라고 하나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자신도 그들과 동일한 전통과 동일한 성경책을 가지고 있고 자신도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깊이 생각해 보면, 바울은 “당신들과 나는 성경 본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서로 다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레데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고 당부한다. 이 당부는 바울이 자기 입장에서 이단으로 분류할 만한 어떤 자들을 상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단”이란 말을 위해 사도행전 24:5 & 14은 하이레시스(명사. 여성. 단수)를 사용하고, 디도서 3:10은 하이레티코스(형용사. 남성. 단수)를 사용한다. 이 두 단어는 동사 하이레오마이에서 유래한 단어들로서, 이 동사의 의미는 “택하다, 취하다, 더 좋아하다”이다. 이 단어가 명사화 또는 형용사화될 때 그것은 상징적 의미로 발전되어 “이단, 분파, 종파, 논쟁, 교리” 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단”이란 용어는 “어떤 해석 입장을 취하느냐, 어떤 해석을 선택하느냐, 어떤 해석을 더 좋아하느냐”와 상관이 있다. 그렇다면 누가 자신이 택한 해석은 옳고 남의 것은 다 이단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이단 판별이 쉽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해석이란 스펙트럼이 넓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학자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초기교회의 핵심 복음(케리그마)이 무엇인지를 따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단” 용어에 관한 언급을 여기서 멈추려고 한다. 케리그마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신구약을 통틀어, 신약성경 케리그마처럼, 성경계시의 핵심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이 없이는 “이단” 문제에 대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 본다. 이것이 없이는 제각각의 주장 외에 그 어느 것도 정통(orthodox)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성경 연구(해석)에 있어서 소위 이단이 아닌 정통의 기준은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나라라는 큰 틀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 대한 구원 언약,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 언약, 하나님의 백성의 법으로서의 율법 언약,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회복 언약, 예수 스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귀, 성령의 오심과 임재와 동행, 하나님 나라의 대리 기관으로서의 보편 교회, 그리스도 재림이라는 일관된 언약적-구속사적 주제에 맞춰져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나는 이 글을 크게 두 부분, 곧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단”과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단”으로 구분하고, 각각에 독립된 번호를 붙이고 순서를 따라 연구 내용을 전개할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단”과 관련해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충격적인 3가지 사건(금송아지 사건, 바알브올 사건, 발람 사건)에 나타난 이단적 요소들이 무엇인지 고찰할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단”과 관련해서는 세 권의 교리서신(갈라디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과 골로새서, 베드로후서에 언급된 “이단”-본문들을 중심으로 각각에 대해 간명한 주해적 시도를 통해 신약 성경시대의 이단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단”이라는 주제가 신약시대적 현상을 구약시대로 끌고 가 억지로 이슈화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도 이단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의 어떤 사건들을 이단적 활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예수의 육신적 형제)는 교회 공동체에 은밀히 침투한 거짓 선생들(이단자들)이 있어 성도들에게 이들을 대적할 것을 독려하기 위해 서신을 쓰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한다(유 1:3-4). 그런데 유다는 이들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믿지 않았던 자들과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이 멸망한 것처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진술한다(유 1:5-7). 그는 또 거짓 선생들을 구약의 세 부정적 인물들 곧 가인과 발람, 고라에 비교하며 거짓 선생들의 불의를 고발한다(유 1:11).

이러한 사실은 구약성경 역시 “이단” 개념을 주제로 접근 가능함을 암시한다. 사도 베드로도 유다처럼 거짓 선생들을 발람의 길을 가는 자들로 간주한다(벧후 2:15-16). 사도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에서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면서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지적한다(계 2:14; 참조. 민 22-24장; 25:15; 31:8). 이는 버가모 교회 이단자들이 종교간의 대화니, 교류니, 전통문화 행사니, 풍속이니 하며 성도들이 우상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을 부추기면서 그 이면(裏面)에 발람처럼 물욕을 숨기고 있던 사실을 꼬집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나의 주장은 구약성경에서도 이단 사상의 존재와 그 특징들을 짚어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구약성경 자체 안에 어떤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나타나 이적과 기사를 보이며 유혹할지라도 그들을 따르지 말라는 당부가 기사화된 것을 보면(신 13:1-3) 구약시대에도 이미 이단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을 경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註)
1) 헬라어, 하이레시스; 라틴어, 해레식(Haeresic); 영어, 헤러시(Heresy). 나는 우선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단”을 “종교 사상이나 교리 또는 철학 사상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승인된 전통적 견해와 체계를 무시하거나 변형시킴으로써 다른 관점, 다른 압장에서 그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나타내는 새로운 주장, 주의 또는 새로운 사조(思潮)”라고 정의해 둔다.
2) 외국으로부터 유입된 것들: 몰몬교(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 여호와의 증인,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크리스찬 사이언스, 퀘이커, 뉴에이지운동, 빈야드운동, 알파코스, 프로미스 키퍼스 등; 국내에서 자생한 것들: 통일교,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구원파, 신사도운동, 다락방, 베뢰아, JMS 등과 그 외 잡다한 사이비 집단의 사설들과 저급하고 조악한 사적 주장들.




2.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단


1) 금송아지 사건에 나타난 이단적 요소
이 사건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旅程) 중 이들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들 중의 하나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세계가 다 네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나의 밑줄)고 선언하신 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내 언약”이란 곧 선포하실 언약의 말씀들(율법언약)을 가리킨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준행할 것을 다짐하였다(출 19:8). 이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곧 있을 언약 선포를 예고하시며 당신께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임하는 것은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출 19:9)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셋째 날(출 19:11, 16) 하나님은 시내산 꼭대기에서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 가운데 나팔소리와 함께 시내산 아래 운집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언약을 반포하셨다. 하나님은 먼저 십계명(출 20:1-17)을 반포하셨는데, 백성들은 시내산 광경이 너무도 무서워서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라며 애원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나아갔고(출 20:21), 하나님은 연이어 모세에게 율례 언약들을 주셨다(출 20:22-23:33). 율례의 내용은 제사법과 민사법, 부도덕 처리법, 시민법, 송사법, 절기법, 그리고 가나안 땅 정복에 관한 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제사법에서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라]”(출 20:23)는 명령이다. 이것은 은금으로 하나님을 형상화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다. 또 하나님은 “내게 토담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출 20:24상)고 명령하셨다. 양이나 소는 제물로 바쳐야 할 짐승들이지 하나님 대신 형상화해야 할 소재가 될 수 없다. 또 주목할 것은 가나안 땅 정복에 관한 약속으로, 그 내용은 가나안 토착민(아모리 사람, 헷 사람, 브리스 사람, 가나안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이 섬기는 그 어떤 신(神)에게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고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오직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 명령을 지키면 형통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하신다(출 23:23-25).


하나님은 특별한 언약 비준식 잔치를 계획하셨다. 모세가 십계명과 율례들을 구두(口頭)로 받아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언약 비준식 후의 잔치를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인지 지시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언약 비준식 후에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명과 함께 시내산으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되 모세만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고 백성은 데리고 올라오지 말라고 명하셨다(출 24:1-2, 9-11. 『홀리원바이블』, 118. 출 24:1 해설을 볼 것).
한편, 모세는 언약 비준식을 위해 먼저 시내산에서 받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십계명[출 20:1-17]. 참조. 출 20:1)과 “모든 율례”(출 20:22-23:33)를 백성에게 전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3)라고 응답하였다. 이어서 모세는 언약 비준식을 위해 먼저 언약서(십계명과 율례들)를 작성하였다. 언약 비준식은 언약 체결행사로 진행되었다. 모세는 아침 일찍 시내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수대로 열두 기둥을 세웠다. 이는 야곱이 벧엘에서 돌베개로 기둥을 세웠던 사건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청년들이 제단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번제와 소(oxen)의 화목제를 드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서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니, 백성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라고 고백하였다. 모세는 양푼에 담은 피의 나머지 반을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리며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라고 선언하였다. 언약체결식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언약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실 대속의 피를 예표한다(참조. 마 26:28; 막 14:24; 히 9:20; 10:29; 12:24).

이 언약체결식 후에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아론과 나답, 아비후, 70인 장로들을 데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황홀한 광경 가운데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다]”(출 24:11). 이것은 언약체결 후에 벌인 비준식 잔치였다. 이 일 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이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들(또는 증거판. 출 31:18; 32:15; 신 9:9)을 줄 것이니 시내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셨다(출 24:12). 모세가 사십 주야를 시내산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은 성소(聖所) 건립을 지시하시면서,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되 기구들로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9)라고 명령하셨다. 이는 성막의 원형(原型)이 하늘에 있고 그 근원지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가 세울 성막은 하나님이 시내산 꼭대기에서 보여 주신 “[본래] 모양”(원형)의 모형(模型)이다. 하나님의 성막 건립 지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서 어떻게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제시라고 할 수 있다.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와 의의 통치의 상징이며, 또한 당신의 백성을 만나주심과 거룩한 교제의 상징이며, 또한 영원한 언약의 성취와 구속주 메시야의 도래를 예표하는 상징막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두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 모세의 손에 쥐어 주셨다. 이 첫 번째 두 돌판은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숭배로 인해 깨뜨려지지만 우여곡절 끝에 모세는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가 자기가 준비한 두 돌판에 새겨주신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온다(출 34:28). 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 중에 그들이 언약서와 두 돌판, 성막(법궤와 그에 딸린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 것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고 싶다.
본론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산 아래서 금송아지 숭배사건을 벌인 것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 가운데 언약서(십계명과 율례들)를 받고 공식적으로 언약체결을 끝낸 후였다. 더구나 그때는 모세가 두 돌판을 받기 위해 시내산 꼭대기에 40 주야를 머물고 있는 기간이었고, 하나님께로부터 성막 건립지시를 받고 있는 기간이었다. 그들은 언약서를 받고 감격하여 그 가운데 기록된 모든 조항을 준수할 것을 공언하였지만, 모세가 산 위에 있는 동안 상식과 상상을 초월한 추태를 벌이고 있었다(출 32:1-6). 즉, 그들은 아론을 선두에 세워 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신(神)이라고 외쳐대며 뛰놀았다(출 32:1-6).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사건은 심각한 이단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협박하였다(출 32:1). 이유는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모세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세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것에 불안하였고, 지금까지 모세와 하나가 되어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아론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하지만 아론의 변질은 백성의 위협에서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아론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백성의 그룻된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들과 타협하였다. 그가 백성을 결사적으로 말리려고 한 흔적도 없다. 그는 모세와 함께 선두에 서서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지만 다소 비굴하고 강고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단은 집단화된 다수의 불신앙자들과 타협적인 지도자와의 결탁으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 아론은 백성에게 금 고리를 모아 오라고 지시하고 그것을 녹여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이것은 아론이 금송아지 숭배사건의 전 과정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금”은 하나님이 성소를 지을 때 바쳐야 할 예물 중의 하나로 지정하시는 물질인데(출 25:3) 아론은 그것을 거두어 우상을 만들고 있다. 또 “소”는 본래 하나님이 화목제를 지낼 때 제물로 바치라고 지정해 주신 동물인데(출 24:5), 아론은 소를 형상화하여 우상을 만들고 있다. 또 우상 제작이나 숭배는 하나님이 제 2계명에서도 강력히 금하고 있고(출 20:4),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토착인들의 우상 신들에게 경배하거나 섬기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려 부수라고 명하신다(출 23:23-25).

셋째, 아론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는 백성을 향해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라고 공포하였다. 이것은 아론이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기 전 서론에서 모세에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라고 선언하신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아론의 선포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발언이었다. 넷째, 아론은 금송아지 숭배를 위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제단인 것처럼 위장하였다(출 32:5). 아론이 세운 금송아지 제단을 쌓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서를 받고 하나님과 언약체결을 위해 시내산 아래 제단을 쌓았던(출 24:4) 것과 정반대되는 행동이다. 아론의 행동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백성들로 언약의 제단(‘성막’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 제단을 통해 나아가도록 오도하였다.

다섯째, 아론은 백성을 향해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라는 선언으로 금송아지에게 제사하도록 유도하였다(출 32:5). 뿐만 아니라 그는 우상숭배의 선봉장이 되어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출 32:6).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서를 받은 후에 모세가 하나님과 언약체결을 위해 청년들로 번제와 소(oxen)의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언약서를 낭독한 후에 제물과 백성에게 피를 뿌린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아론의 행위는 하나님의 제단을 더럽히는 행위였고, 장래에 메시야를 보내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손상을 입히는 모독적 행위였다.

여섯째, 백성은 아론의 인도를 따라 금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출 32:6). 이 장면은 모세가 언약체결 후에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아론과 나답, 아비후, 70인 장로들을 데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황홀한 광경 가운데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던]”(출 24:11) 사건과 대조된다. 백성은 아론에 의해 순치되어 있었고, 아론은 그들이 우상의 축제를 즐기며 흥청거리는 것을 보고 흡족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론의 행위에 나타난 이단적 특징은 반언약적, 반하나님적 혼합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의 행위는 하나님의 언약적 의도와 상치된다. 그는 십계명 제1, 2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는 금송아지 숭배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배를 혼합시킴으로써 양자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아론의 이단적 행위는 매우 정교하고 기만적이다. 백성이 송아지 신상 앞에 앉아서 먹고 마시며 취하고 일어나 노래하고 춤추며 뛰고 놀았던 것을 보면, 아론은 금송아지 숭배와 여호와 섬김이 하나의 실체인 것처럼 세뇌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류(類)의 이단은 그 어떤 이단보다도 위험하다. 오늘날 가장 괴악한 이단은 이단 표식도 없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도록 만든다. 그 우상은 금송아지 신상처럼 보이는 우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우상일 수 있다. 아론 같은 지도자가 이런 우상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치명상을 입힐 것은 분명하다. 천만다행인 것은 아론이 모세의 추상(秋霜)같은 책망에 사실을 고백하고 모세의 중재로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고 회복되었다는 사실이다(출 32:21-24).


2) 발람 사건에 나타난 이단적 요소

발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가까이에 당도했을 때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가 이단자의 한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신약성경 저자들이 그를 거짓 선생의 예로 언급하기 때문이다(벧후 2:15-16; 유 1:11; 계 2:14). 실제로 발람은 물질과 명예에 매수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할 목적으로 먼 출장길에 나섰으므로 그가 거짓 선생의 아류로 간주되는 것은 적절하다. 당시 발람은 브돌에 거주하였는데(민 22:5), 이곳은 유프라테스강 근처의 시리아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여기서 모압까지는 약 65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는 보통 “발람 선지자”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가 모압 평지까지 진격해 온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예언 활동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민 23:1-27). 더구나 민수기에 보면 발람은 선지자처럼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사자와도 만난다.
발람이라는 이름은 요르단의 데이르 알라 유적지에서 발견된 B.C. 8세기 비문에 나온다. 이 비문 초두에는 “신들의 예언자 브올의 아들 발람”이라는 문구가 나온다(『스터디 바이블』, 349. 민 22:1-6 해설). 많은 사람들은 이 인물이 민수기에 언급된 발람과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민수기의 발람을 “발람 선지자”라고 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자칫 구약성경의 거룩한 “선지자들”처럼 들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발람은 예언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호칭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선지자들과는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호칭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더구나 그는 복채를 받으며 점술활동을 한 자이기 때문에 그 호칭은 부적절하고, 따라서 나는 “복술가”라고 부르거나 여호수아서에 있는 대로 “점술가”(수 13:22)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발람 사건은 정치권력과 결탁한 점술가가 주술(呪術)을 이용해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운동(하나님 나라 운동)을 제압하려 한 사건이다. 발람 사건은 모압의 패권자 발락이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는 요청으로부터 시작된다. 발락은 자기가 지배하고 있는 영토에 이스라엘 군대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해치운 후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에 불안하였다. 발락은 이스라엘 군대가 아모리 왕 시혼을 처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고소하고 통쾌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시혼이 자기 영토를 침범한 일로 인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발락은 새로운 민족 세력(이스라엘)의 등장에 심히 당황하였다. 그는 자기가 가진 군력(軍力)으로는 대항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였다. 발락은 미디안 장로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아들들 중 하나인 미디안의 후손이고(창 25:1-2), 모압 족속은 롯이 자기 큰 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모압의 후손이다(창 19:37). 두 족속은 이와 같은 혈연 관계와 또한 사업관계(미디안 사람들은 장사꾼. 창 37:28)로 인해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디안 장로들은 브돌에 거주하는 발람에게 사신을 보내어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초청해 보라고 조언하였다.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5하-6).
이 조언은 팔레스타인이나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지역민들에게 있어 정신적으로 술사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는 것을 반영한다.
발락은 미디안 장로들의 조언을 주저함 없이 받아들였다. 발락은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꾸려서 복채와 함께 발람에게 보냈다. 사신들은 브돌에 있는 발람에게 찾아가 발락의 말을 전했다. 발람은 사신들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민 22:8)라고 말했다. 그날 밤 사신들은 발람의 집에 유숙하였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발람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거론한다는 것이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호와를 언급한 것은 그가 여호와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주술사(呪術師)로서 어느 신(神)이든 가리지 않고 다 수용하는 자였다. 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족속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모압까지 진군해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에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오가는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에 대해서 충분히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연히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점술을 행하다가 효과를 보기 시작했을 것이다(참조. 민 24:3-4, 16). 하지만 혹시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점을 볼 수 있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 말씀은 주의 이름을 빙자하여 이적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런 자는 불법자로 판정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날 밤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민 22:9)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 22:12)라고 말씀하셨다. 이 본문 역시, “하나님은 주술사도 선지자처럼 여기시나? 주술사에게도 계시하시나?”라는 의문을 품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처럼, 개입하신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일개 주술사의 저주가 무엇이 무서워서 위기가 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현 상황에 간섭하셔서 당신의 존재와 권능과 그들의 특별함을 드러내시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요단강 도하를 앞두고 가나안 땅에 가득한 그 어떤 토착신들도 그들을 대항할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시고자 했던 것이다.
발람은 모압과 미디안 귀족들과 동행하지 않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귀족들은 발락에게 돌아와 발람의 말을 전하였다. 아마도 발락은 귀족들의 전언(傳言)을 듣고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락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발람을 회유하기 위해 권력과 인력을 총동원하였다. 그는 발람에게 전에 보냈던 귀족들보다 더 지위가 높은 자기 측근들(신하들)을 더 많이 보냈다. 그러면서 전한 말은 “아무것도 거리끼지 말고 오라, 오면 높은 지위를 주어 크게 존귀하게 해 주겠다. 그리고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 단,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만 해 달라”(민 22:16-17. 나의 버전)는 것이었다. 발락은 때 묻은 정치술과 외교술, 회유술에 능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발람에게 어떤 부담도 지우지 않고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을 충분히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집요하게 “저주”를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락이 발람에게 이 정도까지 약속한 것을 보면 발람은 뛰어난 주술력(呪術力)으로 중동지역 일대를 주름잡았던 점술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람은 부귀영화와 권세를 약속하는 발락의 회유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발락의 신하들에게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민 22:18-19)라고 대답했다. 얼핏 보면 발람이 하나님의 뜻에 매우 충실한 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다. 그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단호히 그들을 되돌려 보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물질에 매도되어 눈이 어두워져 미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있다. 내심으로 그는 이미 그들을 따라갈 마음을 먹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는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마음을 바꿔주셨으면 하는 속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발람은 자기의 바람대로만 된다면 자기에게 은금이 쏟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는 대가를 받고 복술(卜術) 활동을 하는 주술사로서 왕의 권세를 가진 발락과 거래를 한다는 것이 천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날 밤 하나님은 발람에게 임하시어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민 22:20)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발람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계셨기에 그가 발락의 신하들과 함께 갈 것을 예상하고 계셨다. “함께 가라”는 말씀은 “신의 한수”(?)였다. 전에 가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가라는 것이다. 발람으로서는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나왔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마음을 바꾸신 것이 아니었다. 당신께서 이르시는 말씀만 준행하라는 단서를 붙이시기 때문이다. 이 단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절대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다.
발람이 “저주”의 주술을 요구하는 발락의 신하들과 동행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은 그 다음 장면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1) 발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을 대동하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발람의 이런 행위에 하나님은 진노하셨다(민 22:22 이하).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천사)를 그에게 보내셨다. 천사는 그가 가는 길을 막아섰다. 천사는 칼을 손에 빼 들고 길목을 지켰다. 나귀는 천사를 보고 밭으로 뛰어들었다. 발람은 나귀를 길로 올라가게 하려고 채찍질하였다. 이때 천사는 포도원 사이의 좁은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골목길 좌우에는 담벼락이 있었다. 나귀가 칼을 든 천사를 피하려고 담벼락을 거칠게 스치다가 발람의 다리를 비비어 상하게 하였다. 이에 발람은 다시 나귀를 채찍질하였다. 이에 천사는 좌우로 피할 수 없는 좁은 골목으로 다시 가서 정면으로 섰다. 나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화가 치밀어오른 발람은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세게 때렸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셨다. 나귀가 발람에게 말했다: “왜 나를 이렇게 세 번이나 때리는 겁니까?” 발람이 나귀에게 말했다: “네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다. 만일 내 손에 칼이 있었더라면 네 목을 베었을 것이다.” 나귀가 발람에게 항의하였다: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일생 타고 다니는 나귀가 아닙니까?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렇게 한 일이 있었나요?” 발람이 대답했다: “없었다.”
이때 하나님이 발람의 눈을 여셨다. 발람은 하나님의 천사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았다. 발람은 즉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납작 엎드린 발람에게 천사가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을 것이다.” 이는 나귀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이었다. 그제서야 발람이 천사에게 말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민 22:34). 천사가 발람에게 말했다: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민 22:35). 이것은 전날 밤에 하나님이 발람하게 하신 말씀이었다. 이 일관성은 하나님이 발람에게 그들과 동행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람은 은금과 부귀 권세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저주할 목적으로 가고 있으나 하나님은 그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실 목적으로 그가 모압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구원사의 중대 기로에서 하나님은 스스로의 결정을 따라 당신의 백성의 상황에 간섭하신다.
발락은 자기의 부탁을 받고 내왕한 발람을 먼 길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그는 모압 변경 끝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가서 그를 맞으며, 다시 한번 자기의 요구만 들어주면 그를 높은 지위에 올려 존귀하게 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민 22:36). 발람은 중요한 순간들을 절묘하게 잘 포착하여 사람의 환심을 사는 기술을 갖고 있다. 발람은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민 22:38)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두 가지 사항을 엿볼 수 있는 지능적 응수라고 볼 수 있다.
첫째, 발람은 겸손한 채 하고 있다. 겸손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이단들이 “꾸며낸 겸손”으로 교만을 위장한다고 지적한 것과 상통한다(골 2:18). 더구나 발락은 이미 자기를 능력자로 보기 때문에 손해 볼 일도 없고 혹시 자기에게 무슨 능력이 나가지 않아도 이렇게 말해두면 하나의 안전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발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선지자인 채 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신(神) 하나님으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발락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자신이 권능의 하나님과 친한 선지자인 것처럼 위장하여 그를 심리적으로 제압하고 있는 것이다.
발락은 발람을 기럇후솟으로 데리고 가 융숭히 대접한 후 그 다음날 그를 바알의 산당으로 안내하였다(민 22:41). 이곳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산당 중의 하나였다. 발람은 그곳에서 모압 평지를 뒤덮고 있는 허다한 이스라엘 백성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발람은 발락에게 7개의 제단을 쌓고 수송아지 7마리와 숫양 7마리를 준비하여 자기가 주술을 베풀 수 있게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이는 짐승의 번제로 하나님의 심사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방종교의 흔한 제의(祭儀) 방식과 같다. 발람은 발락에게 제물을 제단에 바친 후에 그의 번제물 곁에 서 있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혹시 여호와가 자기를 만나주시고 어떤 지시를 주시면 그대로 알려 주겠다고 했다(민 23:3). 발람은 발락이 여호와와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일관성 있게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발람에게 임하셨다. 발람은 여호와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민 23:4)라고 보고하였다. 하나님은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발락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 특수한 상황에서, 이미 나귀를 사용하여 발람을 책망하신 것처럼, 이제는 발람의 입을 사용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발람이 이스라엘에 대해 전한 말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이것은 발람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었다. 축복의 말의 근원지는 발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발람의 예언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 번째 예언. 발람은 발락이 억지로 자기에게 이스라엘에 대해 저주할 것을 요청하지만 자기는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저주할 수 없고,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 중의 하나가 아니며, 그들의 수효가 셀 수 없이 중다(衆多)하고, 자기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한다고 말했다. 발람이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한 말은 그들이 타민족과 비교 불가한 특별한 민족이라는 축복의 말이고, 이스라엘의 수효가 많다고 언급한 것은 그들의 세력이 누구도 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칭송이다. 만일,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한다는 발람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는 의와 불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주술사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나중에 이스라엘을 이방 신에게 절하도록 하고 음란행위를 하도록 유인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민 23:14; 31:16), 결국에는 미디안 왕들과 함께 처참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민 31:8). 발락은 발람의 예언을 듣고 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냐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민 23:11).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민 23:12)라고 응답하였다. 그는 여전히 “여호와”의 선지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주술사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예언. 발락은 이스라엘의 수가 잘 보이지 않게 발람의 시야를 바꿔주면 혹시 저주 예언이 나오지 않을까 하여 그를 비스가산 꼭대기로 데리고 갔다(민 23:13).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의 후미(後尾)만 조금 볼 수 있어서 그들이 초라하게 보이는 장소였다. 발락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제단을 쌓고 제물을 준비하였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발람에게 임하셔서 그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민 23:16). 발람은 발락에게 가서, 식언(飾言)이나 후회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고 하였다(민 23:19). 그는 발락에게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이나 반역을 보고 그들을 처벌하지 않고 용서하시며(민 23:21),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계시니 그들 가운데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으며(민 23:21), 야곱 곧 이스라엘을 해할 수 있는 점술이나 복술은 없으며(민 23:23), 그들은 암사자와 수사자 같이 일어나 맹렬히 땅을 정복할 것이라고 하였다(민 23:24). 여기서 특히 “왕을 부르는 소리”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소리”라는 뜻으로, 모세오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첫 번째 명시적 언급이다(참조. 『홀리원바이블』, 236. 민 23:21 해설).
세 번째 예언. 발락은 저주 예언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발람을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비스가산 북쪽의 브올 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바알의 산당 못지않게 바알 신 숭배가 성행했던 장소다. 발락은 모압 사람들이 바알 신 숭배를 위해(민 25:3, 5; 31:16) 즐겨 찾았던 이곳에서는 저주 예언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발람은 발락에게 이전과 똑같이 제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발람은 주술사였지만 여호와께서 자신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선히 여기신다는 것을 감지하고, 앞에서처럼 점술을 쓰지 않고 광야에 천막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예언할 자세를 취했다.
이때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셨다]”(민 24:2).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발람 같은 주술사에게 계속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느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발람은 저주 예언을 위해 발락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셔서 발람으로 축복의 예언을 하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역설적 지혜가 발람의 저주의 의도를 꺾고 축복으로 전환시키고 계신 것이다. 이 제3차 예언에서도 하나님은 발람의 입술을 빌려 이스라엘의 번영과 그의 왕국의 번영(繁榮)을 노래하게 하셨다(민 24:3-9).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민 24:9). 이 예언의 내용은 본래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때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여전히 기억하고 계시며 그것을 신실히 성취해 나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셨던 것이다.
발락은 분을 내며 발람에게 “내 원수”를 저주하라고 초청하였건만 왜 세 번씩이나 그들을 축복을 하는 것이냐고 호통쳤다. 그러면서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며 약속한 높은 지위와 존귀는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발람은 처음부터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만 전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대꾸하였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여호와의 선지자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가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현직은 주술사이지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다. 그리고 부귀와 권세를 꿈꾸는 그의 마음의 숨은 동기는 역시 여전히 그 안에 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한다”고 자평하며 속에는 탐욕을 품고 있는가? 발람이 저주가 아닌 축복을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지 발람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저주 예언으로 일확천금을 획득해 보려는 심사로 모압 왕 발락에게 왔던 것이다. 그가 기회만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 운운하지만 마음속에는 악의를 감추고 있었다. 이 사실은 그가 모압을 떠나기 전 발락에게 사적으로 마지막 남긴 말, 곧 훗날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하면 망하게 할 것인지 알려 주겠다고 한 말에서 엿볼 수 있다(민 24:14; 31:16). 우리는 발람의 사악한 음모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바알브올 사건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민 25:1-9).
네 번째 예언. 발람은 발락에게 밀담하듯이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어떤 비책을 제공할 것에 대해 언질을 준 후에 이스라엘을 향해 마지막 예언을 하였다(민 24:17-24). 그의 예언은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축복이었고, 그 내용은 너무도 방대하고 먼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어서 장엄하기까지 하다.
첫째, 야곱에게서 “한 별” 곧 “한 규”(a Sceptre, 왕의 권세를 상징하는 지휘봉 같은 ‘홀’[笏])가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 광활한 지역을 정복할 것이다. “한 별”은 일차적으로 다윗을 가리키나(삼하 8:2, 13-14) 그는 오실 메시야의 표상이므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참조. 계 22:16). “한 규”는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가리킨다(창 49:10; 시 45:6, 110편; 계 2:27).
둘째,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 대상은 구체적으로 에돔, 아말렉, 겐 족속이 될 것이다. 특히, 겐 족속은 훗날 앗수르2)에 의해 포로가 될 것이며, 앗수르와 에벨3)은 깃딤4)에 의해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이 예언은 주로 다윗시대에 이루어질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다윗은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이므로 이스라엘의 광활한 지역에 대한 정복 예언은 멀리서 장차 올 그리스도의 통치를 전망하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발람은 예언을 마친 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고, 발락 역시 자기 길로 갔다(민 24:25). 발락이 이스라엘을 축복한 발람을 해치지 않은 것은, 그와 같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인정받는 주술사를 해치면 자기에게 징벌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발락은 발람이 일관성 있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공포심으로 인해 그를 해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발람은 자기의 점술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복술가였고, 자기의 탐심을 철저히 감추는 탐욕가였고, 부귀영화 권세에 전혀 무관심한 것처럼 행동하는 위선자였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기만자였고,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인 양 행세하는 이단자였고, 제물로 하나님의 심기를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교도였다. 그는 한 마디로 출애굽 시대 말기에 점술로 명성을 날린 거짓 선지자요 이단사상의 종합세트였다.
주(註)
1) 이하 내용은 대부분 나의 버전으로 재구성한 것.
2) 시내 반도 북부에 살았던 족속(참조. 창 25:3, 18; 삼하 2:9).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앗시리아 제국(B.C. 7-10세기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패권국)이 아님.
3) “히브리인”의 시조로 알려짐. 아브라함의 7대조(창 10:21; 11:14-26).
4) B.C. 12세기경 가나안 지역 해안에 상륙했던 블레셋 족속.





3) 바알브올 사건에 나타난 이단적 요소
이 사건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지 거의 40년이 되어 갈 무렵에 발생한 일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바른길(소위 정통)을 걷고 있느냐의 기준을 언약(공식적으로 명문화한 것으로는 ‘율법과 율례들’)에 두고 있기 때문에 브올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이단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대표적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 서편(西便)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싯딤에 머무르고 있었다(민 25:1; 33:49). 그들은 출애굽 여정의 대미를 장식할 요단강 도하 직전 지점에 있었다. 싯딤은 사해 북단의 모압 평지 한 곳에 있는 성읍이다. 이곳은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로서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정탐꾼을 파견했던 성읍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여정 막바지의 중요한 시점에 싯딤에 머물면서 모압 여인들과 음란행위를 하기 시작하였다(민 25:1). 그들은 광야에서 죽은 제1세대 사람들이 아니라 제2세대 사람들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적으로 벌인 이 음행 사건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제1세대 사람들의 원망과 불평, 애굽 복귀 운동, 하나님께 대한 반역, 지도자 모세에 대한 저항도 문제였지만, 제2세대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도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였다. 모세가 이 사건의 심각성을 두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고(민 31:16; 신 4:3-4), 시편 기자가 이때의 일을 뼈아프게 회상하고 있고(시 106:28-29), 호세아 선지자가 그때의 사건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고(호 9:10), 바울이 그때의 사건을 성찰하며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음행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그때의 사건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얼마나 심각하고 위험한 사건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요단강 도하(渡河)를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이 음행에 빠진 것은 복술가(거짓 예언자) 발람의 음모로 시작된 일이다. 발람은 발락의 요구에 응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의도에 압도되어 그들을 위해 네 차례나 축복하였다. 발람은 세 번째 축복 예언을 마친 시점에 발락이 매우 실망스러워할 때 나중에 그들을 무너뜨릴 비책을 알려주겠다고 하였다(민 24:14). 발람이 생각해 둔 비책이란 미인계를 써서 이스라엘 백성을 음란에 빠지게 하고, 그들을 바알 제사에 유인하여 그들의 신(神) 여호와를 버리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모세는 발람의 꾀를 따라 미디안 여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다]”(민 31:16; 비교. 민 25:1-9)라고 진술한다. 바알브올 사건을 다루는 오경(五經) 기사에(민 25:1-5) 미디안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했다는 직접적 언급은 없으나 미디안 여인들도 모압 여인들과 합세했던 것으로 보이며, 바알브올 사건기사의 연장으로 “미디안의 한 여인”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민 25:6), 미디안 여인들도 바알브올 사건에 크게 협력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 타락을 넘어 다른 족속과 영적으로 연합한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음행이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행위이며(고전 6:18),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이 된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고전 6:16). 언약 백성이 이방 여인들과 음행하는 것은 제7계명을 범하는 행위이며(출 20:14), 그들의 민족적 특별성 곧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출 19:6)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그들의 행위는 민족적 참변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모압 여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들의 제사 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즉,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경배하는 제사에 함께 동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여인들의 초대에 응하여 바알브올 곧 브올 산의 바알에게로 나아갔다. 바알은 셈족어로 “왕, 주인, 소유자”라는 뜻이며, 고대 가나안 지역의 토속신(또는 주신[主神])으로 풍요와 다산과 풍우(風雨)의 신이다. 브올산은 발락이 발람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기 위해 데리고 올라갔던 산으로 7개의 제단을 설치해 놓은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브올의 제사에 참여하여 우상의 제물을 함께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였다(민 25:2).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40년 동안 광야의 고통을 이겨내며 가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까지 온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그들이 다시 가나안의 토착신 바알신 제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여인들을 따라 브올산 바알 신당으로 가서 그들의 제사에 가담하였다(민 25:3). 이것은 그들이 바알 신과 결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행위는 시내산 금송아지 숭배사건과도 유사하다. 바알신 숭배의 특징 중 하나는 음행이다. 모압 여인들은 브올산 바알 신당의 창기들이었던 것 같다(참조. 왕상 14:23; 왕하 17:20). 하나님은 이 바알브올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감염병이 돌게 하셨다. 이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하나님은 모압 여인들과 함께 브올산 바알 숭배에 가담한 이스라엘에 대해 격노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알브올 제사에 가담한 수령들을 붙잡아 태양을 향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셨다(민 25:4). 이는 당대에 중대 범죄를 저지른 자를 처형하는 방식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명하여 브올 산의 바알 신과 결합한 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고, 백성들은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 회막 문에 서서 통곡하였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유별난 행동을 하는 한 이스라엘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는 모세와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드러내놓고 미디안 여자 하나를 자기 막사로 데리고 들어갔다. 남자의 이름은 시므리이고 미디안 여자의 이름은 고스비였다(민 25:14, 18).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던 비느하스(아론의 손자)가 손에 창을 들고 그 남자를 좇아가 여자와 함께 배를 뚫어 죽였다. 이 일 후에 감염병이 그쳤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비느하스가 취한 행동이 이스라엘을 “속죄”하는 행동이었다고 칭찬하셨다. 이스라엘 백성 중 감염병으로 인해 죽은 자의 숫자는 24,000명이나 되었다.
바알브올 사건은 몇 가지 이단적 특징을 보여 준다.
첫째, 모압 여인들에게 미혹된 자들은 바알의 산당으로 올라가 바알에게 절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는 오직 여호와만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명한 언약서(십계명) 제1, 2계명을 어기고 바알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시 106:28). 그런데 그들이 지금까지 자기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모세의 영도하에 있었다. 그들은 얼마 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이런 모순된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하는 무분별한 다종교주의적 행동이었다.
둘째, 바알 신 숭배에 가담한 자들은 음란행위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이 모압 여인들의 바알 숭배 초대에 주저함 없이 응한 것은 산당에서 그녀들과의 음란행위에 가담한 것을 의미한다. 이 음란행위는 바알에게 자기 몸을 바치는 일종의 종교의식과 같은 것이었다(호 9:10). 더구나 한 이스라엘 남자가, 감염병에 의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애곡하고 있는 상황 중임에도, 최고 지도자 모세와 모든 회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골적으로 미디안 여인을 자기 침실로 끌어들인 것은 음란행위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음란행위는 이단자들에게 거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셋째, 백성의 대표자들인 두령들도 바알 숭배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도덕적, 영적 해이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었는지 시사해 준다. 백성의 대표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감독하는 기능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커녕 자신들이 음란한 바알 숭배에 나섰으니 그들의 행위는 이스라엘의 타락을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잠시 뒤에 요단강을 건너 정복전쟁에 돌입해야 할 중대 시점에 중간급 대표자들이 행한 바알 신 숭배는 이스라엘의 전투력를 약화시키는 것은 물론 가나안 정복의 의지를 크게 훼손시키는 행위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은 24,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감염병으로 인해 죽도록 내버려 두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셨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이 숫자는 고라의 반역 사건으로 인해 모세를 거역했던 250명의 반역자들이 땅에 삼킴을 받고 죽은 후에(민 16:1-2, 31-33)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며 백성을 죽인 자라며 저항할 때 감염병이 퍼져 죽은 14,700명보다 큰 숫자다(민 16:49).




3.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단


1) 갈라디아 교회의 이단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중이던 A.D. 50-51년경에 고린도에서 1년 6개월간 머물면서(비교. 행 18:11)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힌 이단자들에 대처하기 위해 쓴 글이다.1) 당시 “갈라디아 교회”로 통칭되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은 대다수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참조. 갈 4:8), 유대인들도 소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자기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갈 1:5)에 분통을 터뜨린다.
“그리스도의 은혜로2)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9).
바울이 볼 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인 것처럼 포장하여 그릇된 교훈을 베푸는 이단자들이었다. 그들의 포장지는 왜곡된 “율법”이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복음이다. 본래 바울은 사도가 되기 전 유대교 골수분자였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스승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교육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신분과 학문, 지위, 정치적 능력을 총동원하여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고, 심지어 그들을 죽이는 데까지 가담하였다. 그의 유대교 신봉은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였노라고 고백하면서,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갈 1:13-14)고 진술한다. 이는 그가 얼마나 율법에 집착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그는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지지해 주는 최후의 보루이며, 율법의 행위는 구원의 보장이라고 믿었다. 그는 한 마디로 율법주의자였다.
이런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계획 가운데 그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셨다. 바울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직접 듣고 소명을 받았으며 이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았다. 이에 대해 그는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그가 깨달은 복음의 핵심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할례를 전하는 자가 아니다(갈 5:11).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이단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형태의 복음으로 변질시켜 “다른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강조하였는데, 복음에 율법적 요소를 첨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유대교가 곡해한 율법이 복음인 것처럼 둔갑시켰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율법주의 사상에 기독교 복음을 접합시킨 새로운 율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위대한 율법 선생일 뿐 그리스도(메시야)가 아니었다. 그들은 겉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표방하였지만 사실은 유대교적 율법주의를 견지하는 자들이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분이시다(갈 1:4). 그러나 이단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도외시하고 율법을 강조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들은 특히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에 대해 바울은 두 가지를 강조하며 당부한다.
첫째,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참 자유를 얻은 자들이니 다시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갈 5:1). 만일 누가 할례를 받고 구원을 받으려 한다면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진 자다(갈 5:3).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누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으려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다(갈 5:4).
둘째, 믿는 자의 삶의 주제는 할례냐 무할례냐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뿐이므로(갈 5:6) 성령을 따라 행하라. 믿는 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자다(갈 5:6, 13). 믿는 자는 육체의 욕심을 물리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갈 5:16). 이것이 바로 율법의 지배를 벗어나 참 자유인으로 사는 길이다(갈 5:18).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는 자들은 성적 부패(음행, 더러움, 호색), 종교적 부패(우상 숭배, 주술), 인간 질서를 무너뜨리는 인격적 부패(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파당, 분열, 이단, 투기), 그리고 행실상의 부패(술취함, 방탕 등)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예수를 믿는 자는 근본적으로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요, 성령을 따라 사는 자다(갈 5:24). 그러므로 믿는 자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그의 뜻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 바울은 계속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단자들의 교훈을 좇아 율법을 추구하며 살 것인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것인지 결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자들 곧 율법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다(갈 5:10). 그는 복음을 훼방하는 이들이 스스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으면 좋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갈 5:12). 또한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는 말로 부화뇌동하는 성도들에게 경고를 보낸다. 바울은 이단자들이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는 속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피하고 육체로 자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자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한다(갈 6:12-14).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더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오직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새 창조함을 받은 사실이라고 강조한다(갈 6:15).


주(註)
1). J.D.G.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16. 비교. R.H. Gundry는 제1차 선교여행이 끝난 직후인 A.D. 49년경 시리아 안디옥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2). 또는 “은혜 안에서.”



2)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훈

바울이 고린도를 처음 방문한 것은 A.D. 50년경 그의 제2차 선교여행 말기였다(행 18:1). 그가 고린도의 유대인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회당장 그리스보가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다(행 18:8). 고린도 사역 초기에 주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10)라고 하셨다. 이에 그는 그곳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때 로마에서 쫓겨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곳으로 와서 함께 동역하였고, 후에 베뢰아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실라와 디모데도 합세하여 함께 고린도 교회를 섬겼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풍성한 영적 은사들을 체험하였다. 얼마 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떠나 에베소로 갔는데 거기서 그는 고린도 교회가 세상적 지혜를 추구하는 거짓 선생들과 도시의 들끓는 사악함으로 인해 성도들이 유혹에 빠져 큰 시험과 시련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행 18:1-17).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거짓 선생들의 그릇된 교훈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울을 대적한 거짓 선생들의 정체에 관해서는 그들이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적 기독교인들, 영지주의자들, 헬라적 유대인들이라는 세 가지 견해가 유력하다. 나는 이 중에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교회와 연루된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아마 교회 내부자 중에도 이들과 합세하여 바울을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바울의 대적자들에 대한 언급은 주로 고린도후서에 나타난다. 하지만 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도 자신의 대적자들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참조. 고전 4:1-8)이 높다고 판단하여 두 책 모두를 근거로 거짓 선생들의 정체를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죄 사함이다(고전 2:2; 15:1-4).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고백한다. 그는 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도 헛되고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고전 15:14-17). 바울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또한 그의 구속(救贖) 사역에 의한 죄 사함의 은총을 믿고 산다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소위 “오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라고 확언한다(고전 15:19).
바울은 자신의 복음 안에 있는 이러한 확신들의 진정성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자기가 셋째 하늘 곧 낙원으로 이끌려 올라가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을 체험하였노라고 조심스럽게 간증한다(고후 12:1-4). 또한 그는 자기에게 “사도의 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린도 교회에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고후 12:12)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의 대적자들은 어떠한가?
첫째,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다(고전 15:12).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다(참조. 고전 15:13, 17). 이들은 결국 세상 지향적이 되고 따라서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삶의 행태를 나타낼 것이다(고전 15:32). 바울은 이들을 “악한 동무들”에 비유하면서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므로 이들에게 속지 말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한다(고전 15:34).

둘째, 그들은 바울을 육신적 이득을 취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기 대적자들이 자기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매도하고 있다고 반격한다(고후 10:2). 사실 바울은 결코 물질을 탐하는 사도 아니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어떤 비용도 받지 않았다(고후 11:8). 그는 선교 비용이 부족하였지만 누구한테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오히려 마게도냐에서 온 사람들이 채워주는 것으로 지탱하였고,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하면서(고후 11:9) 천막 만드는 일(행 18:3)로 부족한 비용을 충당하였다.
그는 복음 사역을 위해 교회의 지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 자기의 권리를 다 쓰지 않았다(고전 9:12). 그는 외부에서 침투한 대적자들의 영향으로 자신을 배척하는 자들을 향해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후 12:13)라며 역설적 질문을 던진다. 바울은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라고 자문하면서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라고 정리한다.
셋째, 그들은 오직 자기들만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매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고도의 학문을 내세워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사건을 해석하고 오직 자기들만의 해석이 옳고 다른 사람들의 것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과 그리스도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진 자신들만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유일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넷째, 그들은 스스로를 칭찬하며 자랑하는 자들이다. 대적자들은 자신들을 표준으로 삼아 자신을 헤아리고 자신들 스스로와 비교하는 지혜 없는 자들이었다(고후 10:9). 바울은 자신의 일행이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려고 고린도로 간 것이거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의 한계를 넘어 과신하는 자세로 갔던 것이 아니라, 절제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던 것이라고 진술한다. 바울은 자기 일행의 태도와는 판이한 대적자들의 행태에 대해 진정으로 인정받는 자는 스스로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께 칭찬을 받는 자라고 일침을 가한다(고후 11:18).
다섯째, 그들은 하와가 뱀의 간계에 미혹된 것 같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심히 우려되는 자들이다(고후 11:3). 바울이 볼 때,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면, 최초 인간(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인류에게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것처럼 교회에 치명적 해악을 끼칠 것이라고 보았다. 바울은 교회의 이러한 상태를 진단하면서 어떻게든 그들로 정결한 아내와 남편의 관계처럼 그리스도와 참된 연합을 이루게 하고자 “하나님의 열심”으로 열의를 다해 사역하였다(고후 11:2).
여섯째, 그들은 바울 일행이 전파한 적이 없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고후 11:4). 바울이 부족함 없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복음”(고후 11:7)을 전파하는 사도였던 반면, 대적자들은 예수와 영과 복음을 말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만큼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바울 일행과 같은 일을 한다고 자랑할지 모르지만, 바울의 판단에, 그들은 그런 자랑의 기회조차 가져서는 안 될 자들이었다(고후 11;12).
일곱째, 그들은 “거짓 사도들”이요, “속이는 일꾼들”로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다(고후 11:13). 바울은 대적자들이, 사탄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처럼, 기만전술로써 자기의 실체를 숨기고 가장하는 “사탄의 일꾼들”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고후 11:15). 이들은 자신들을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기독교 내부 깊숙이 침투하여 그 중심을 휘젓고 다니는 무지하고 사탄적인 반기독교적 이단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혼합주의나 율법주의보다도 더 위험하고, 독선적이고, 위선적인 기독교 세속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3.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단
1) 갈라디아 교회의 이단(지난 시간)
2)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훈(지난 시간)

3) 로마 교회의 거짓 교훈
로마 교회에 출몰했던 이단의 정체에 대해서는 로마서를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는 상태에서 그의 제3차 선교여행 끝 무렵인 A.D. 57/58년경 고린도 가이오의 집에 3개월 머무는 동안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1)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 복음을 거슬리는 자들이 있음을 암시한다(롬 16:17-18). 바울은 그들이 분열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고 지적한다(롬 16:17). 로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다. 하지만 로마서 16장에 나타나는 로마 교회 성도 26명에 대한 바울의 문안 인사는 그가 로마 교회에 대해 얼마나 소상히 알고 있었는지, 성도들과 인편을 통해 얼마나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로마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2) 하지만 유대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라든지(롬 9-10장) 아브라함 언급(롬 4장), 빈번한 “유대인과 이방인” 언급, 그리고 수많은 구약 인용들은 교회 안에 유대인들이 있었을 개연성을 보여 준다. 로마 교회의 이러한 인적 구성은 양자 간 갈등 기류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실제로 로마서는 교회 안에서 유대인들이 인종적 자긍심을 강하게 표출하였고 이방인들은 이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이 복음을 위한 사도로서(롬 1:1)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직무로 인식하고 있다(롬 1:5).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가 원문에는 “믿음의 순종을 하게 하나니”(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테오스)로 되어 있다. 즉, “믿음”과 “순종”의 두 명사의 조합으로 되어있다. 이는 바울이 “믿음과 순종”을 단일체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마지막 부분에서도 바울은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롬 16:26)라고 말하는데, 이 어구 역시 원문에는 “모든 민족이 믿음의 순종을 하게 하시려고”(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테오스)로 되어있다. 즉, “믿음”과 “순종”의 두 명사 조합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서신 처음 부분과 끝부분의 수미쌍관은 일종의 지환기법(指環技法, inclusio)으로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내내 믿음과 순종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참고로, 히브리서 저자도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파신 토이스 휘파쿠신 아우토 아이티오스 소테리아스 아이오니우. 히 5:9)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 사실도 함께 기억해 두면 좋을 것 같다.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 순종을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언급하나 사실은 일찍이 “믿음”의 결정적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히 4:2). 이는 히브리서 저자가 “순종”을 언급할 때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론으로 돌아와, 바울이 로마서 전체를 통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롬 1:1-4; 9, 15-17).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의(義)를 받아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롬 3:21-31). 우리는 보통 이것을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말로 압축하여 묘사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信)은 순종과 분리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어떤 학자는 로마서의 핵심이 이신칭의가 아니라고 강변하나 로마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의 순종의 비결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롬 8:2). 성령은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영적 능력을 공급해 주실 뿐 아니라(롬 8:4), 넘치는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베푸신다(롬 15:13).
하지만 바울의 가르침과 달리 로마 교회에는 성도들이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건전한 복음 진리(“배운 교훈”)를 거슬러 분쟁을 유발하고 거침돌 노릇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롬 16:17상).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이런 자들을 떠나라고 명령한다(롬 16:17하). 이와 같은 강한 어조의 권면은 그들이 주도적 그룹에 속한 위협적 존재들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이 거짓 선생들에 대해 두 가지 특징을 언급한다.
첫째, 그들은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기들의 배만 섬긴다. 거짓 선생들이 겉으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처럼 위장하지만 그들의 주된 관심은 물질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이기주의자들이었다(참조. 딤전 6:5).3)
둘째, 그들은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롬 16:18). “교활한 말”(크레스톨로기아)은 공교하게 꾸민 말을, “아첨하는 말”(율로기아)은 친절한 칭송의 말, 추켜세워 주는 말을 뜻한다. “순진한 자들”(아카코이)은 악함이 없이 선량하고 마음이 단순한 자들을 뜻하고, “미혹하다”(엑사파타오)라는 말은 완벽하게 속이다라는 뜻이다. 거짓 선생들은 간교한 속임수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자기 사람들을 만드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성도 공동체를 사설 집단화하여 그 안에서 자기가 왕노릇하는 자들이었다. 바울은 이런 거짓 선생들의 배후에서 이들을 조종하는 세력을 “사탄”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4)
그럼 로마 교회 거짓 선생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들의 정체를 직접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이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바울이 복음의 진수를 논리적으로 차분히 전개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암시해 주고 있다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유대주의자들로, 또 어떤 사람들은 반율법주의자들(antinomians)로, 다른 사람들은 영지주의에 경도된 자들로 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복음을 이용하여 물질적 이득을 챙기려는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이라고 본다. 바울은 이들이 정통한 지식을 갖춘 논쟁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 대체로 유대교적 입장을 견지하는 위험한 존재들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자신의 복음 논단에 직접 등장시켜 대등한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단지 그들의 존재에 대해 묵시적으로 알리는 정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복음 체계 진술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그들이 위선적이고 물질을 탐하는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이라고 보는 이유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로마서 16장에서 로마 교회에 악영향을 주는 위험한 인물들에 대한 언급(롬 16:17-18)이 근접거리에 있는 9-11장과 무관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원사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놀라운 특권들을 지닌 민족임에도(롬 9:4-5)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들의 행태를 안타까워하며 마음의 고통을 토로하는데(롬 9:1-3; 10:1), 16장의 언급은 바로 그들 가운데 어떤 지도적 그룹에 속한 자들이 있어 그들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또한 9-11장에서 바울의 이스라엘 민족의 특별성에 대한 인정(롬 9:4-5)은 2-3장에서 거론된 유대인들이 가진 인종적 자부심과 율법과 할례에 대한 자랑감(롬 2:17; 3:1)과 무관하지 않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책망하는 것은 그들의 표리부동함에 대한 것이지(롬 2:17-29) 그들의 민족적 자긍심 자체에 대한 책망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16장에서의 거짓 선생들에 대한 언급은 9-11장에서의 유대인들의 특권에 대한 언급과 관계가 있고, 2-3장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나는 2-3장에서 유대인들의 죄악됨을 신랄하게 폭로하는 내용(롬 2:1-3:20) 가운데 로마 교회 거짓 선생들의 정체가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로마 교회의 거짓 선생들은 다음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첫째, 그들은 율법을 내세워 다른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고 단죄하면서도 자기들도 똑같이 행동하는 모순적 비판자들이다(롬 2:1-3, 12).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엄혹한 율법의 잣대를 갖다 대며 욕하며 비판하지만, 자기들 역시 동일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이중인격자들이다. 그들 자신에게 율법은 거의 무용지물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롬 2:13)라고 선언한다. 믿음과 행위의 불일치를 지적하는 내용이다.
둘째, 그들은 율법에 밝은 자들이었지만 자기기만적이고, 표리부동하고, 부도덕한 위선자들이다(롬 2:17-24). 그들은 율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도 아는 자들이다(롬 2:17-18).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맹인의 인도자요 어둠 속을 걷는 자들의 빛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어리석고 수준 낮은 자들의 선생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을 가르칠 줄을 모른다. 그들은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남몰래 도둑질한다. 그들은 우상을 가증히 여기면서 신전 물건을 도둑질한다. 그들은 그토록 율법을 자랑하지만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게 한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할례의 유익을 무효화한다. 그들에 대해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고, 마음에 표식을 낸 영적 할례가 진정한 할례라고 일침을 가한다. 그들은 율법에 수 많은 세부사항들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옭아매면서 자신들은 은밀하게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칭찬보다는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무자비하고 위선적이고 세속적인 자들이다.
셋째, 그들은 억지 논리를 펴는 데 능한 궤변자들이다(롬 3:1-8). 그들은 이신칭의라는 것이 유대인 신분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고 할례를 무익한 것으로 단정 짓는 주장이 아니냐고 항변한다. 하지만 이것은 유대인들의 반감을 선동하는 궤변일 뿐이다. 바울의 주장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 자체만으로도 유익하다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도 구원사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특별한 위치를 충분히 인정한다. 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거짓 선생들은 사람이 믿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항변한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인간이 그분의 언약(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폐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답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의라는 것이 불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냐는 억지 주장을 편다. 이에 바울은 이런 궤변에 장황한 논리로 대응하지 않고 불의에 대해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 없다고 답한다.
넷째, 그들은 자신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을 더욱 풍성하게 하여 그 결과 그분이 영광을 받는다면, 왜 자신이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고 모독적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에 바울은 이런 주장은 “선을 도모하기 위해 악을 행하자”라고 하는 주장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
결론적으로, 로마 교회의 거짓 선생들은 탐욕스럽고 자기중심적이며, 윤리적으로 저급한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기독교 진리를 일부 공유한 자들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복음의 핵심 진리를 거부하는 위험한 궤변가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멀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불복종하는(롬 10:2-3)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주(註)
1. 김정훈, 『바울서신 연구』(서울: Th. & E., 2014), 13.
2. Jung Hoon Kim, The Significance of Clothing Imagery in the Pauline Corpus, JSNTSS, Vol. 268, ed. Mark Goodacre(London/New York: T. & T. Clark, 2004), 133-34.
3. 비교. C.E.B. 크랜필드, 『로마서 주석』, 문선희·이용주 역(서울: 도서출판 로고스, 1997), 573.
4. 비교. 톰 라이트, 『로마서』, The New Interpreter’s Commentaries, 장용량·최현만 옮김(서울: 에클레시아북스, 2014), 646.




4) 골로새 교회의 이단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는 아니다. 아마도 바울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복음사역을 할 때 골로새가 위치한 리커스 벨리(Lycus Valley)1)에서 온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가서 골로새에 교회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에는 바울이 잘 아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2) 골로새 지역 교회에 침투한 이단자들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골로새서 본문을 연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된 동기는 그가 로마 감옥에 있을 때 약 1,000마일(1,609km)이나 되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 에바브라로부터 이단 침투 소식을 듣고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 중이던 A.D. 61/62년경에 골로새서를 기록하였다. 그는 골로새 이단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를 자세히 알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교묘한 말로 성도들을 속이는 자들이 있다는 언급과(골 2:4) 이에 준하는 유사한 언급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골 2:8, 18-19) 골로새 교회에는 이단자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 골로새 교회에 침투했던 이단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철학과 세상의 교훈들이 인간의 영육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은 인간의 전통과 세상의 초보적 원리(타 스토이케이아 투 코스무 골 2:8, 20)3)를 따르는 헛된 행위일 뿐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한다(골 2:2-3).


둘째, 그들은 유대교의 할례를 강조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믿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의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 곧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다고 진술한다(골 2:11). 즉, 그들이 영적 할례 곧 세례를 받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고 주장한다(골 2:12-13). 이는 바울이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믿는 자의 영적 신분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다. 믿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고 새로 태어난 사람이다.
셋째, 그들은 율법과 그것의 세부 조항들을 중시여기는 율법주의적 경향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율법과 그 조문들을 지켜야만 구원의 소망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범죄한 인간에게 죄의 대가를 지불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채무증서 곧 율법을 하나님이 그 조항들과 함께 지워버리셨다고 선언한다(골 2:14). 이는 하나님이 “공식 주류 유대교”(특히, 바리새주의)에 의해 곡해되고 오용되고 있는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아 끝장내 버리셨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율법의 완전 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 율법 폐기론(antinomianism. 반율법주의)이나 율법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율법에 따르는 삶을 무시하는 율법경시론을 의미하지 않는다.4) 바울은 골로새서 1장에서 이미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속량(贖良)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복음 진리”를 믿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흑암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이라고 선언하였다(골 1:5, 13-14).
골로새 이단의 율법주의적 경향은 유대적 율례들 곧 금식 규정들과 각종 절기, 초승달 축제, 안식일 규정을 강조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골 2:16). 그들은 이것들을 지켜야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러한 율법 조항들을 이유로 아무도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한다. 그런 형식적 율법준수에 집착하지 말고 복음적 차원에서 율법을 이해하고 행동하라는 권면이다. 바울은 구약의 율례들은 단지 장래 일에 대한 그림자일 뿐 실체는 아니라고 하면서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진술한다(골 2:17). 이는 바울이 구약의 율법에 대해 모형론적 이해를 시도하는 것을 뜻한다(참조. 히 9:23-24; 10:1). 즉 율법 조항들은 하나의 모형이지 그 자체가 원형은 아니고 원형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모형”과 “원형” 개념을 직접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자”와 “실체” 개념은 바로 그런 뜻이다. 원형을 도외시하고 모형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넷째, 그들은 마음에 숨은 교만을 “꾸며낸 겸손”으로 위장하는 자들이다(골 2:18). 이것은 그들의 성품에 대한 진술로 바울은 그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속임수에 능한 자들이었는지에 대한 암시다. 나는 그들의 가식적 겸손은 교만의 변종이라고 생각한다. 거짓 겸손은 이단들의 강한 특징 중의 하나다. 그들은 겸손한 체하며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사고 그들의 마음을 점령한 후에는 그들의 목을 밟고 통치자 노릇하려 한다.
다섯째, 그들은 “천사 숭배”5)를 조장하는 자들이다(골 2:18). 그들은 자기가 본 것들에 집착하여 자기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는다(골 2:19). 1세기 유대교가 천사를 지극히 높이고 숭배했던 사실을6) 생각할 때 그들은 당대 유행하는 것들을 끌어들여 사람들의 어리석은 마음을 현혹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기들이 본 것, 즉 신비 상태에서 본 환상들에 집착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기록된 계시의 말씀보다 자기들이 신비 체험 속에서 본 것이나 들은 것을 더 중시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악령의 조작일 때가 많다. 실제로 많은 이단들이 자기가 환상 중에 무엇을 보았다거나 들었다고 헛되이 과장하며 청중들을 기만하며 휘어잡을 때가 많다.
이상과 같이 바울은 골로새 이단을 생각하며 그곳 교인들을 향해 포괄적 개념을 사용하여 “세상의 초보적 원리”(타 스토이케이아 투 코스무, 골 2:8, 20)에 굴복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세상의 초보적 원리란 이단자들이 중요한 것처럼 내세우는 철학이나 율법의 가르침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단자들이 율법에 규정된 음식법 같은 규례를 강요하는 것에 왜 순종하느냐고 반문한다(골 2:20).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믿음 안에 굳게 서려면 이런 것들을 과감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이런 것들은 다 일시적으로 쓰이다가 사라지는 것들이므로 결코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고 호소한다(골 2:21-22). 나는 결론적으로 골로새 교회의 이단은 헬라 철학적 가르침과 율법준수를 강조하는 유대교적 가르침을 결합한 신비주의적 혼합주의(syncretism)7)라고 본다.


6) 결론
지금까지 나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사건 곧 금송아지 숭배사건과 발람 사건, 바알브올 사건을 통해 그 안에 담긴 이단적 요소들을 살피고, 신약성경 다섯 서신에 나타난 이단과 거짓 선생들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종합해서 볼 때, 이단이나 거짓 선생들은 여러 가지 주의해야 할 특징들을 보여준다.


첫째, 반언약적 태도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주신 가나안 땅(하나님 나라 상징)의 약속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 심오한 뜻을 알지도 못한다. 이러한 태도는 십계명 제1,2 계명을 늘상 무시하는 경향으로 발전한다.
둘째, 많은 경우 마음속에 음란한 동기를 품고 있다. 처음에는 대체로 더러운 욕망을 숨기려 하나 나중에는 점점 드러내 놓고 합리화, 정당화하며, 결국에는 교리화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호색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 자들이 기독교 가면을 쓰고 있을 때 교회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음란한 행위는 기독교 복음증거에 큰 장해가 된다.
셋째, 물질적 욕망 충족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겉으로는 물질에 깨끗한 것처럼 위장하나 마음속 깊은 곳에 탐심을 품고 있으며, 기회만 있으면 물질을 차지하려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부귀영화와 일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발람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는 일에도 가담한다.
넷째, 대단한 하나님의 선지자인 것처럼 가장한다. 항상 하나님과 소통하며 특별한 계시를 받는 것처럼 행동한다. 자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 전한다고 주장하나 저급하고 꾸며낸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자기가 말한 대로 실현되지 않을 때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돌린다.
다섯째, 다종교주의를 수용하고 자신이 관용과 사랑의 화신인 것처럼 행동한다. 모든 종교에는 구원의 원리가 있고, 바알과 여호와를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세속원리들도 수용한다.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주장들도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교회가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인권과 화해라는 이슈를 이용하여 반인권적, 반평화적 교설로 교회를 위협하기도 한다.
여섯째, 대체로 율법주의를 지향한다. 왜곡되고 저차원적인 율법 해석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단죄하는 일이 많다. 또한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여 추종자들을 제압하고 노예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스스로 고도의 윤리성과 정의로움과 성결을 갖춘 자처럼 행세하나 그 이면에 부도덕함과 불의함과 불결함을 숨기는 일이 많다.
일곱째, 대체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데 능하다. 사람들 앞에 항상 진실하고 정직한 자처럼 행동하나 거짓되고 사기성이 농후하여 좀처럼 신뢰하기가 어렵다. 더 심각한 것은 간교한 속임수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교회 공동체를 사설 집단화하며, 그 안에서 왕처럼 군림한다. 교인들을 존중히 여기고 사랑하기보다 거의 습관처럼 그들에게 험한 말을 하며 횡포를 휘두른다. 많은 경우에 제왕적 권세로 재산을 갈취하기까지 함으로 심각한 경제적 손상을 입히기도 한다. 자신의 배후에서 성령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신다고 주장하나 사탄에 의해 조종되는 경우가 많다.
여덟째, 복음 진리에 대한 지식이 박약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한다. 복음에 대한 기초지식조차 결여되어 비진리를 진리인 양 오도한다. 하나님께 열심 내는 자처럼 행동하나 “올바른 지식”을 추구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한다. 내세우는 주장들은 논리성이 결여되고 유치하여 교리체계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저급한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고도한 성경지식을 갖춘 선생으로 여기며 교인들을 어린아이 취급하고 무시하기까지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성장을 멈춘 어린아이들과 같다. 대체로 기독교 복음과 기복신앙을 동일시하며, 물질로 하나님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홉째, 복음을 위한 교회의 참된 일꾼인 것처럼 행세하고 자랑을 많이 한다. 복음을 훼방하는 “사탄의 일꾼”임에도 자신만이 “의의 일꾼”인 것처럼 행세한다.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는 사탄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성령의 일을 행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자신들의 행위가 반복음적이고 반성경적이고 반교회적임에도 자신들은 교회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교회를 위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수고를 한 자들인 것처럼 자랑한다. 자신들은 신령한 지혜와 지식을 갖춘 특별한 자들이며 가장 뛰어난 은사와 능력을 갖춘 자들인 것처럼 과신한다.
열째,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환상을 보았다거나 하나님을 만났다거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은연중 자신을 신격화한다. 자신은 마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행동 배후에는 자신의 권위를 극대화시키려는 동기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열한째,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다. 오직 자기들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참 그리스도인들인 것처럼 행세한다. 기존 교회는 교리든 삶이든 본받을 것이 없고, 자기들 집단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기존 교회들의 가르침은 잘못되었고, 자기들의 해석만 옳다고 주장한다. 기존 교회를 경계하며, 기존 교인들을 자기들 집단으로 유인하려 한다.
열두째,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한다. 이교도들의 경전을 사용하지 않고 교회사 속에서 공인된 성경을 사용하나, 참된 복음을 전하지 않고 허탄한 생각과 그릇된 사상, 이교적 교리를 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를 전한다고 하나 다른 예수를 전하고, 성령을 전한다고 하나 다른 영을 전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다고 하나 다른 복음을 전한다. 겉으로는 기독교 진리를 가르치는 것 같으나 성경에 없는 비진리를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으나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를 전한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나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고 이단의 교주가 있다.
이상과 같은 특성을 나타내는 이단들과 거짓 교훈자들이 교회 대내외적으로 활동을 계속하는 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천국의 기관으로서 견고히 설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과 대결하는 자들이며, 교회를 위하는 것 같으나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것 같으나 교회를 붕괴시키는 자들이며, 성도를 사랑하는 것 같으나 성도를 위해(危害)하는 자들이다. 지상에 있는 교회가 이단들과 거짓 선생들을 물리치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려면,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 진리에 천착해야 한다. 교회가 진리의 푸른 초장으로 세상에 남아 있으려면, 예수의 십자가 복음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순종을 통해 자신이 참 신앙인임을 입증해 보이며 미래적 소망 가운데 전진하려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시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지하여 진리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註)
1. 골로새는 메안더 강(江) 지류인 리커스 연안의 리커스 벨리(Lycus Valley)에 위치한 도시로 에베소(Ephesus) 동쪽 약 100마일 지점, 라오디게아 동쪽 약 19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다. 이 도시는 동방의 신비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곳에는 토착인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브루기아인, 헬라인들이 함께 섞여 살았다.
2. 에바브라,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 오네시모 등.
3. 이 헬라어구에 대한 RSV의 번역 “the elemental spirits of the universe”는 부정확해 보인다.
4. 바울은 그의 서신서(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여러 곳에서 “율법”에 대해 공격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 이것은 그가 극단적 반율법주의의 폐단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반율법주의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반율법주의자들은 도덕 폐기론자들이었다. 이들은 율법을 전면 거부하고, 이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율법이 악하여 인간을 범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5. 원문에는 “천사들의 숭배”(쓰레스케이아 톤 앙겔론).
6. W. Hendricksen, 『골로새서, 빌레몬서』(서울: 아가페, 1992), 183을 볼 것.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정보가 소개되고 있다. Josephus, Jewish War II.viii.7는, 초심자가 에센파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려면 엄숙한 선서를 할 것을 요구받았는데 그것은 “종파의 회원들에게 아무 것도 감추지 말 것이며, 고문을 당해 죽음에 이른다 하여도 절대 그들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들 종파의 문서들과 천사들의 이름을 극진히 수호할 것 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A.D. 63년, 라오디게아 공의회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교회를 버리고 곁길로 나가 천사들을 숭배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신조 XXV)고 선언하였다. 1세기 후 데오도렛(Theodoret)은 골 2:18을 주석하면서 “사도 바울이 탄핵하는 이 병폐는 브루시아와 비시디아에서 오랫 동안 존속하였다”고 기술한다. 아이레네우스(Irenaeus, A.D. 182-88)는 그의 저서 Against Heresis, II.xxx.5에서 이단설 유포자 진영에 천사숭배가 널리 퍼져 있는 것과 이 악습에 대한 초대교회의 단호한 입장을 시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교회는 천사의 기원을 통해 또는 주술(呪術)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사술(邪術)의 힘을 빌어 무슨 일이든 성취하지 아니하며,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주께 직접 기도를 올리는 교회는 사람들을 미혹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유익을 증진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천사장 미가엘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숭배되고 있었으며 이 숭배 또한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A.D. 739년에 사라센 사람들을 꺾은 대승리가 미가엘에게 봉헌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가엘 숭배는 갈라디아 지방에서 발견된 비문들에도언급되어 있다. 아울러 그는 기적적 치유의 영적 효험을 지닌 존재로 신봉되었다(W.M. Ramsay,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 477-80).
7. 골로새 이단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들을 볼 것: J. Lähnemann, Der Kolosserbrief (Gerd Mohn: Gütersloher Verlagshaus, 1971), 100-107; F. Zeilinger, Der Erstgeborene der Schöpfung: Untersuchungen zur Formalstruktur und Theologie des Kolosserbriefes(Wien: Verlag Herder, 1974), 25-27; J.B. Lightfoot, Colossians and Philemon(London: MacMillan, 1900), 71-95; F.F. Bruce, Paul: Apostle of the Free Spirit(Carlisle: Paternoster, 1977), 413; R.P. Martin, Reconciliation: A Study of Paul’s Theology(London: Morgan & Scott, 1981), 112-14; Wright, Colossians and Philemon, 23-30; R. Yates, “Colossians and Gnosis,” JSNT 27 (1986), 49-68; R.A. Argall, “The Source of a Religious Error in Colossae,” CTJ 22.1 (1987), 6-20.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List.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