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영감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은, ‘성경’(Holy Scripture)이 아니다!

하나님아들 2021. 9. 20. 23:26

  영감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은, ‘성경’(Holy Scripture)이 아니다!

 

현재 보수적이라고 하는 장로교회들의 신학에 있어서의 특징은 흔히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혹은 ‘교의신학’(dogmatics)이라 부르는 신학적 체계를 연역적이라 보아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 혹은 ‘주경신학’이라 부르는 것을 성경을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성경신학도 다시 ‘구약신학’(Old Testament theology)과 ‘신약신학’(New Testament theology)으로 크게 구분되고, 또한 그런 구약신학과 신약신학 안에서도 다시 성경의 각권별로 세분화 되어 연구되고 가르쳐 지는 것이 현제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교육의 편제(curriculum)다. 

물론 이외에도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이라는 분과와 더불어, ‘실천신학’(practical theology), 그리고 더불어서 파생되는 수많은 과목들이 얼마든지 신학이라는 타이틀 가운데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 현대신학의 특성인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무한대로 파생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신학의 세분화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부정되거나 도태되는 과목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조직신학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직신학의 배제 이전에 이미 ‘교리’(Doctrine or Religious) 혹은 ‘신조’(Creeds)의 배제 가운데서 그러한 현대신학의 성격은 그 대지를 이미 오래 전부터 형성하고 있었다.

 

사실 현대신학에서 ‘교리’는 소위 ‘전제’(premise)로 인식되어 있는데, 이미 포스트모던(postmodern)에 젖어있는 현대의 문화에서 전제는 진행을 방해하며 창의성을 가로막는 부정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리 또한 성경의 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밝히는데 있어 오히려 방해거리가 되며, 그런 방해물조차도 제거하고 일체의 사전적인 전제도 없는 가운데서 비로소 순수한 원 의미를 도출하려 애를 쓰는 것이 성경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신학의 방법론적 특징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론을 사용하기 위해서 사전에 반드시 전제가 되거나, 아니면 동의가 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본문을 ‘정경’(Canon)으로 보지 않고 그야말로 순수하게 ‘본문’(Text)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정 본문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본문에 연계되는 수많은 사본들과 판본들을 대조하는 사본학적 방법이나, 특정한 성경분과 혹은 석의(exegesis)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더욱 세밀한 분석법이 선호되곤 하는데, 그렇게 해서 결국에 성경은 분석할 자료가 되며, 신학은 수많은 신학자들 개개의 견해들을 반영하는, 그야말로 포스트모던 한 양상으로 치닫고 만다.

 

그렇다면 그처럼 포스트모던으로 기울어버린 학문을 가리켜서 ‘신학’이라고 해야 하는가? 오히려 그처럼 다양한 학자들의 분석과 견해가 보장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인문학(humanities)이 아닌가?

 

이처럼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느냐, 그렇지 않고 분석할 본문으로 보느냐의 구분은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분기선을 형성하는데, 전술한 모든 설명들이 공히 후자에 속하는 입장이다.

 

반면에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입장, 더구나 원본 성경만이 아니라 사본들 가운데서 정립된 정경(Canon)이 현재 우리들이 가진 성경이라고 보는 입장은 이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분명하게 언급하여 지지되고 있는 입장이다. 즉 “성경(Holy Scripture), 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 아래, 구약(Old Testament)과 신약(New Testament)의 모든 책들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이 모든 책들은 신앙과 삶의 규칙(the rule)이 되도록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으로 주어졌다.”(1장 2항)는 것으로, 이 때에 첨부된 구약과 신약의 목록은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정경으로서의 성경의 목록이다. 단순한 목록만을 언급하지 않고 “이 모든 책들은 신앙과 삶의 규칙이 되도록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으로 주어졌다.”는 문구를 덧붙인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를 보장하는 문구인 것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의 성경에 관한 고백에서는 곧장 3항에서 “외경”에 대해 언급하는데, 특별히 “정경의 일부가 아님”을 분명하게 언급하며, 아울러 “보통 ‘외경’이라 불려진 책들은, 신적인 영감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하여, 그런 것들은 “다른 인간적 저작물들”과 다르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즉 외경은 ‘Holy Scripture’에 포함될 수 없고, 그저 인간의 저술(writings)일 뿐이며, 그것이야말로 ‘text’을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모든 신앙고백에 앞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를 철저히 전제하고서 모든 교리들을 진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text로 보는 전제가 아니라 Holy Scripture에 근거하는 결론적이고도 공적인 신앙의 표명[혹은 고백]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신앙고백을 전제로 여기고서 배제해 버리고, 성경본문을 text로 보아 결론을 도출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경과 다를 바 없는 저술에 대한 독자로서의 사견(personal opinion)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사견은 인문학의 한 분과로서의 철학이나 사상일 수 있을 뿐, 그 어떤 공적인 교리나 신조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을 어찌 신학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인문학만이 범람하므로, 마침내 동성애 문제나 여성 사역자의 문제와 같이 이미 그 판단이 명백한 현상들에 대해서조차 수많은 견해들과 일관성 없는 주장들이 범람하는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치 물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짖다가 입에 문 뼈다귀를 떨어뜨려버렸다는 이솝 우화의 이야기처럼, 우리 시대는 이미 명백히 제시된 결론들을 잃어버린 채 각자 자기 소견대로 짖고만 있는 어리석은 우화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마치 물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짖다가 입에 문 뼈다귀를 떨어뜨려버렸다는 이솝 우화의 이야기처럼, 

이미 명백히 제시된 결론들을 잃어버린 채 각자 자기 소견대로 짖고만 있는 어리석은 우화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장대선 목사/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argo3357&logNo=222084108986&categoryN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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