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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이해와 비평

하나님아들 2021. 9. 13. 22:31

현대신학의 이해와 비평

 

 

신학이란 « 하나님에 관한 체계화된 지식 »이란 뜻으로 12세기에 처음 사용되었다.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인데,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이 바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의 원리는 계시이다.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은 성경의 절대무오성을 믿으며 하나님의 계시의 빛 아래에서 성경을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강조하며 개 개인의 이성을 따라 자유롭게 신학을 연구하는 « 자유주의 신학 »이 태동하게 되었다.[1]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교리를 무가치한 것으로 비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성경해석에서 가장 큰 문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신앙을 갖는데 많은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본 논술에서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을 살펴보고 정통주의적 관점에서 비평함으로 올바른 신앙을 가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I.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

 

1.  이신론 평가

 

자유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근대 계몽주의 사상은 모든 판단의 중심에 인간의 이성을 두고 있다. 근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중세를 교회와 전통이 지배한 암흑기로 보고 이성이 최고의 힘을 발휘했던 고대 헬라시대를 황금기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은 중세 암흑기를 타파하고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이성중심주의로 돌아가자는 문예부흥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인간 이성을 최고로 생각했던 문예부흥시대에 큰 역할을 한 철학자들은 합리주의의 창시자 데카르트와 경험론의 창시자인 베이컨이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이 계몽되면 인류는 계속 발전할 것이며, 이상적인 세계가 올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계몽주의의 사상은 이신론이라는 근대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다.[2] 이신론은 자연신론이라고도 불리는데 계시를 부정함으로 기독교의 신앙 내용을 오로지 이성적인 진리에 한정시킨 합리주의 신학의 종교관이다. 이신론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은 창조 이후 역사 하시지 않는, 자연과 피조물 위에 초월해 계시는 분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자연은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운행되고 그 법칙은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나 초월적인 것은 다 거부하였다. 그러다보니 도덕적인 면만 강조하게 되어 예수님도 단지 도덕을 모범적으로 실천하신 분으로만 이해하였다. 이신론자들에 의하면 종교는 단지 선행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이신론자들의 가르침은 윤리였고,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 중심적인 전통적인 신앙을 파괴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이신론은 감정적이거나 심미적인 요소가 없이 너무 메마르고 차갑고 논리적이였다. 따라서 이러한 이성의 종교는 공통의 의식의 예배나 함께 고백할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변형된 이성의 가르침 즉 낭만주의에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2.  칸트의 더 넓어지는 이성으로 부터 시작되는 낭만주의

 

1)  칸트의 양심의 소리에 기초한 신앙평가

 

칸트는 순수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며 «  실천이성비판 »에서 인간의 이성의 범위를 확장하여 양심을 강조하였다. 그는 양심의 음성을 신의 음성으로 이해했다. 칸트에게 있어 양심의 소리는 도덕법 그 자체였다. 따라서 그가 인정한 신앙은 도덕적, 윤리적 신앙으로 선행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양심의 소리에 철저히 복종한 분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신자들도 그를 따라서 도덕적으로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된다는 것이다. 이 도덕법은 성경이나 하나님의 계시에서 온 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요구에 의해서 이성으로 발견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이 발견한 하나님으로 보편 타당한 신이였던 것이다. 그의 영향을 받아 후에 양심뿐 아니라 감정, 직관, 상상력도 이성에 포함시키는 낭만주의 사조가 열리게 되었다.

 

트의 문제는 신앙을 도덕으로 본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양심의 소리 위에 있다. 양심의 정죄를 극복하는 길은 계시를 통해 나타나는 복음의 능력인 것이다. 자유주의 사상은 늘 인간 이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영역인 구원이 빠져있다. 칸트로 인해 기독교의 은총과 구원이 자력구원으로 대체되어 기독교의 인본주의화, 세속화가 시작된 것이다.

 

2)  낭만주의의 직관 위주의 신앙평가

 

낭만주의는 1780-1830년대에 유행한 철학과 예술사조이다. 바이런, 블레이크, 워즈워드, 콜러리지, 베에토벤, 쇼팽, 발자크, 괴테, 슐라이에르마헤르 등이 낭만주의 자들이다. 이들 낭만주의자들은 메마른 이성보다 인간 속에 있는 통찰력, 직관, 감성을 더 중요시 하고, 전통과 과거 및 신화가 다 나쁜 것이 아니고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주장했다. 콜러리지는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직관과 상상력을, 슐라이어마허는 직관과 감정(Feel)을 헤겔은 정신을 강조했다. 이들은 성경도 인정했지만 성경적인 신앙을 주장한 것은 아니고 성경 내용을 신화로 보았다.

 

콜러리지는 성경을 오류와 신화로 가득찬 책으로 보는 이성주의자들을 비판하였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무오하다고 주장하는 정통주의 입장에 서지도 않았다. 그는 성경을 주관적으로 실천이성적인 상상력과 직관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할 도덕적 가르침의 책으로 보았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실천이성인 상상력, 통찰력. 의지 등을 통해서 도덕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에서 진리를 끌어내지만 인간 속에 있는 반응을 더 강조함으로 기독교를 인간적인 종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헤르는 인간 속에서 나오는 감정을 신앙의 출발점으로 보았고, 이 감정은 성경을 통해서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성경은 보조적인 교과서이지 더 이상 절대 기준이 아닐뿐만 아니라 성경의 무오성과 절대성도 부인되었다. 그가 이처럼 종교의 개인적 경험을 강조함으로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향하게 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인간중심주의로 전락하여 소위 « 위에서부터 아래로 »를 거부하고, « 아래에서부터 위로 »의 신학이 되어버렸다. 그는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에 관한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국 그의 가르침은 성경 밖에서 시작한 또 하나의 인본주의적 유사기독교에 불과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낭만주의자들은 개인 각자가 느끼는 하나님을 강조하다보니 성경에서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수준에서 각자 체험을 통해 알아가는 하나님을 믿었다. 정통 신앙은 진리의 기준으로 성경 말씀을 강조한다. 내면의 소리도 주요하지만 성경의 인도를 받고 규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음에서 들리는 음성은 반드시 성경과 조화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은 진리의 기준이 없이 너무나 주관으로 흐르다보니 인간중심의 인본주의 기독교가 되었고, 다른 종교도 허용하는 종교다원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3.  헤겔과 그의 제자들

1)  헤겔의 세계정신

헤겔은 인간 정신의 힘을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은 그 정신의 집합체가 되고 말았다. 칸트가 하나님을 양심의 집합체로 본 것과 동일하다. 헤겔은 신을 세계 저편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고 세계 속에 임재하신 존재로서 생각했다. 이러한 헤겔의 절대정신 사상은 칸트나 슐라이에르마헤르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과 질적인 차이가 없었고 양적으로 더 많아지면 하나님이 되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3] 더우기 헤겔의 사상을 따르면 하나님은 우주와 동일시되어 범신론 수준으로 신관이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헤겔이 주장하는 하나님은 이신론에서 주장하는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으시지만 초월해 존재하시는 하나님보다 더 못한 하나님이 되고 만다.

2)  슈트라우스

슈트라우스는 복음의 메시지를 하나의 신화로 묘사하면서,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지만 그가 행한 이적은 신화이고, 복음서 중 마태복음만 중요하고 요한복음은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이적은 사실상 불가능하니 역사적 가치가 없으나 형이상학적 관념으로 보면 큰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그는 1835 « 예수의 생애 »를 펴냄으로 복음서 저자들이 헬라사상과 신화에 물들어서 묘사한 예수가 아닌 원색적인 본래의 예수를 찾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19세기 후반부에 « 역사적 예수 찾기 »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의 사상은 바르트에 영향을 준다.

3)  무신론자들

헤겔의 철학으로 부터 영향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 무신론이라는 반종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무신론의 극치를 이룬 포이에르바하, 막스와 니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의 제자로 정신의 힘을 강조하고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스승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변증법을 사용하였다. 포이에르바하는 원래 하나님은 없었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여 신이 나타나게 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사고에 의해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 인간은 먹는 존재이다 »라고 함으로 물질화된 인간관을 주장하여 칼 막스의 유물론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영향으로 실존주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에 영향)

 

마르크스는 « 종교는 인간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자신을 발견하기위해 만들어낸 자의식이다 »라고 하며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다는 포이에르바하에 동의한다. 따라서 종교는 허상으로 현실의 고통을 종교로 피하게 하니까 종교는 악이요 아편이다고 하며 기독교를 비판하였다.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서로 협력하고 있다고 보고 자본주의를 파괴하면 기독교가 소멸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으로부터의 구원은 혁명으로 보고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혁명하라고 강조한다. 그로 인해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서 기독교가 탄압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악 영향을 주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독실한 기독교 배경에서 자랐지만 쇼펜아우어의 무신론에 영향받았다. 그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선언하며, 하나님이 없는 세계는 절망만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각자가 스스로의 신이되어 삶을 개척하며 초월적인 삶을 사는 초인이 되도록 강조한다. 초인이 되기 위해 자기의 내적의지로 온전함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훈련하고 자기를 개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무한 경쟁시대에 들어갔다. 현대인들은 니체의 교훈처럼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초인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 실력을 갖추라 », « 능력자가 되라 »는 모토가 현대인의 삶의 양식이 되었다.

 

우리의 위의 세 사람을 통해서 인간 이성이 교만의 극치에 달한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가 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교만은 인간을 무질서와 절망의 깊은 늪으로 몰아넣게 되었다. 신을 잃어버린 인간은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수단의 노예가 되어 참된 인간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소외된 삶을 사는 것이 무신론이 지배하는 세계의 비극적인 현실인 것이다.

 

4.    역사비평학과 진화론

19세기 후반, 신학의 주요 주제는 과학과 신학의 갈등문제였다. 그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랑케에 의해서 시작된 역사비평학과 다윈에 의해 주창된 진화론이다.

1)  랑케(1795-1886)평가

랑케는 역사를 과학적으로 보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헤겔식의 관념론적 사관이 과학적인 자료와는 너무 거리가 먼 주관적이라고 비판하며, 역사를 실제 일어난 그대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려보려고 시도했다. 랑케의 의하면 역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자료들을 통해서 사건들이 가능성이 있는 설명으로 연결된 것이여야 했다. 따라서 그는 과학적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하려고 개연성을 가지고 fact중심으로 자료를 재 검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를 통해서 성경을 과학적으로 일반 역사처럼 보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2)  다윈의 진화론 평가

다윈의 진화론은 1859년에 발간된 « 종의 기원 »으로 시작되는데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존엄성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신학과 자연과학의 조화를 이룬 낭만주의 시대에서는 창조주는 곧 자연의 법칙이였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에 의해 하나님은 사라지고 자연법칙만 남게 되었다. 다윈은 자연 선택이 창조나 섭리의 개념보다 진화 단계에 더 적합한 이론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창조를 주장하는 성경을 거부해야 했다.

다윈의 진화론을 따르면 인간이 진화하는 동물의 한 과정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적자생존 이론은 물질주의 사고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동물과 같은 차원에 인간을 두게 되면 인간은 참으로 무의미하고 가치없는 존재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5.  성서 비평학

역사비평학의 영향으로 신신학자들은 성경도 같은 방법으로 비평하기 시작했다. 어떤 문서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 실제로 일어난 사건 »만을 역사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신 신학자들은 처음에는 사본간의 차이점, 문맥, 배경설명 등을 위주로 하는 본문비평 즉 하등비평에서 시작하여 성서의 고등비평으로 발전해 나갔다. 고등비평은 성경도 일반 고대 종교 문서와 같은 조건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어떻게 문서가 만들어졌으며 어떤 것이 믿을 수 있는 것인지 가려내는 비평이다. 신신학자들은 이렇게 성서비평을 함으로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성경의 내용을 거부함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였다.

 

복음서에서 초자연적이거나 영적인 내용은 다 빼버리고 나니 예수는 초자연적인 면이 완전히 제거된 보통 인간에 불과했다. 그래서 예수의 중요성은 주로 그의 윤리적 가르침이라고 가르쳤다. « 역사적 예수 »운동은 보통 사람 예수를 그려내는 흐름이였던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초이성적인 기적이나 계시를 신화로 취급해버리면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해주고자 하는 참 진리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성서비평학을 중심으로 신학을 한 대표적인 신학자는 리츨과 그의 제자 하르낙이다.

1)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

리츨은 역사비평학에서부터 신학을 시작한다. 그의 신학은 신칸트입장의 신학으로 신학에서의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즉 그의 신학사상은 헤겔주의의 종말과 칸트의 입장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그는 슐라이에르마헤르처럼 종교를 직관이나 감정으로 보는 것을 너무 주관적이라고 반대했다. 그는 역사를 먼저 역사비평을 통해 객관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고, 그 역사적 사실 뒤에 있는 도덕적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님은 직관이나 형이상학을 통해서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도덕적인 필요로 꼭 있어야 할 존재라고 주장했다. 칸트의 실천이성과 같이 리츨은 윤리를 중요한 실천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분이 되시며, 어떤 가치가 있는가 ? »라는 « 가치판단 »의 질문에서 그의 신학을 시작하고 있다. 역사비평으로 희생된 예수의 가치와 유용성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과 용서, 칭의를 부인하고 예수님은 단지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신 분으로 소개한다. 따라서 그를 본받아 모범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단지 정신적인 것으로 그리고 영적인 진리가 도덕적인 감화로 축소되고 만다. 그의 이러한 신학적 성격은 나중에 « 문화 개신교 »라고 규정한다.

 

그의 신학은 예수님을 인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 즉 죄와 죽음, 구원의 핵심적인 문제를 다룰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사상을 따르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조금도 다를바 없는 인본주의 종교로 전략하고 만다. 

2)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

하르낙은 그의 교리사에서 « 기독교의 복음이 현대 세계에서도 살아 있는 힘이 되려면 교리로 부터 자유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즉 교리를 필요에 의해서 교회가 여러 절차를 거쳐 만든 것으로 판단하고, 신앙고백이란 개인적인 것이기에 교리에서 자유로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리츨의 역사방법론을 도입하여 역사적 사실에만 가치를 부여하였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역사적 사실이 없으니 가치판단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르낙은 그의 유명한 저서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에서 기독교를 단지 윤리적인 종교로 설명하였다. 성경에서 가장 가치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산상보훈으로 보았다. 그는 산상보훈이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모든 인류의 형제됨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하르낙은 이처럼 복음의 본질을 윤리와 사회운동으로 바꾸어 버렸다. 하르낙의 신학을 따르게 되면 우리는 전혀 다른 기독교를 만나게 된다. 기독교를 단지 윤리적인 종교로 설명함으로 기독교의 본질인 구원과 영생의 진리는 사라지고 오직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종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영향으로 기독교는 20세기의 시대정신에 각색한 기독교로 살아남기는 했지만 결국 기독교의 침체와 세속화의 길을 재촉하였다.

6.  라우센부시(1861-1918)와 사회구원

라우센부시는 하르낙의 영향을 받아 개인구원보다 사회를 향한 책임을 강조하였다. 역사적 예수를 거룩한 공동체, 즉 하나님 나라의 창시자로 보고, 개인적이고 영적인 구원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얻어야 하는 사회적인 의미의 구원을 주장하였다. 라우센부시가 강조한 것처럼 사회의 복지와 발전을 위해서 사랑으로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구원이라면, 성경에서 다루는 개인의 구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왕국이 이땅에 건설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실현된 종말론 뿐 아니라 미래적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죄와 죽음, 부활과 재림사상을 믿는 전통기독교와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것이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믿지 않고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는 인본주의의 극치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학사상은 나중에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의 토대를 마련해 준다.

7.  트렐취(1865-1923)와 종교사학파

종교사학파는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들을 다 같은 것으로 비교분석하는 비교종교학의 이론에서 출발한다. 모든 종교가 범신론에서 출발하여 가장 성숙한 유일신론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종교사학파는 이렇듯 종교가 사회와 문화 그리고 윤리적인 상황에 의해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독교가 주위 사회와 타협이 잘 되면 계속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사회나 문화의 흐름에 잘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따르다 보면 결국 절대진리는 없고 시대와 상황에 맞는 도덕밖에 남는게 없게 된다.

8.  실존주의

 

1960년대까지 철학, 정치, 교육, 문학, 신학 등 모든 분야에 실존주의가 지배하였다. «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 » 는 말은 실존주의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준다. 본질은 객관적으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는 개념이요, 실존은 주관적으로 개개인이 경험하는 삶인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개념보다 실존적인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니체로 부터 시작해서 하이덱거, 샤르트르, 부버가 발전시킨다.

 

1)  키에르케고르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를 대표하는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진리는 주관이라고 하며, 신앙은 주관적인 결단이 필요한 모험이요 새로운 세상으로의 도약으로 보았다. 무엇을 인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신의 존재를 파악하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결단도 실존하는 개개인이 주관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결단해서 경험하는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강조한다.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 실존의 의미를 강조한 후 결국 종교로의 귀의를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다. 신앙의 문제를 인간의 실존과 연계한 그의 사상은 이후 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의 길을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칼 바르트의 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의 신학의 가장 큰 약점은 개인의 실존을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및 인간과의 관계 등에서의 균형의 부족함이 나타난다.

 

2)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하이데거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 그는 « 존재 » « 존재자 »를 구별하여 그냥 살고 있지 말고 존재를 넘어서기 위해서 투쟁함으로 « 존재자 »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즉 실존은 탈존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유와 초월을 꿈꾸는게 인간이며, 이러한 노력이 바로 인간을 존재하고 있도록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실존은 « 시간 내에 존재 »이다. 즉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존재하고 있는게 바로 인간의 실존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불안한데,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참되게 존재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따라서 열려진 미래를 진지하게 결정해 나가야 한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음으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며 실존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즉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희생을 통해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참된 존재로서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을 지각하고 죽음을 앞서 결의하고, 같은 두려움을 갖는 이웃을 돌보며 할 일을 하는 것이 본래의 실존을 되찾는 길이라고 했다.   

9.  신정통주의(위기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은 19세기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자유주의 신학과 문화 개신교주의자들의 인간에 대한 큰 신뢰가 팽배해 있었지만 1차 세계대전으로 서구문명이 초토화되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전쟁 동안 행한 말과 태도를 통해서 그들의 신학 사상이 결코 인간의 문제를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파악하게 되었다. 파괴적인 전쟁의 결과와 전체주의 국가들의 발흥은 인류의 앞날에 대한 낙관주의 태도에 심각한 도전을 주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위기의 시대에 나타난 신학자들이 있는데,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 등이다. 이들의 신학은 또한 정통신학과는 다른 위태로운 신학을 형성하였고, 자유주의 보다 더 나쁜 영향을 정통주의 신학에 미쳤다.

이들은 정통신앙을 고수하며, 자유주의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신정통주의라고 한다.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죄성, 계시의 실재성 및 종말론 »등을 배제하였음을 비판하고, 이러한 요소들이 기독교 신학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통적 신학이론에 동의하면서도 정통주의의 반이성적, 반세속적, 도그마주의적 태도를 지양하고 신학에 있어서의 과학적, 이성적 연구 방법을 수용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역사비평학을 통해 성경을 연구함으로 성경은 오류가 많은 책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정통주의 신앙을 주장하며 자유주의 성경관으로 말씀을 해석했다. 이들은 진리를 주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역사적 사실과는 별도로 역사적 사실의 진실성과는 관계없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정통과 자유주의 중간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한 그들은 계시로부터의 신학이 아니라 이성으로부터의 신학을 강조했음으로 이들의 사상을 « 신자유주의 »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바르트는 한 때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으나 세계 제1차 대전(1914-1918)후 자유주의가 아무 대답을 해주지 못함과 자유주의 교수들의 무력함을 보며, 자유주의 신학이 더 이상 해답이 될 수 없음을 확신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가 양의 차이가 아니라 질의 차이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차이 및 인간의 타락을 인정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역사비평학에 근거해서 성경은 오류가 많은 책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성경의 모오성을 인정하지 않고 정통신앙을 하고자 했기 때문에 신정통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너무나 애매모호하다. 성경의 역사를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그속에서 주관적인 진리를 추구해내는 것이 참된 신앙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부활은 실제 역사냐 아니냐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각자가 어떤 의미를 이끌어 내고, 또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가 중요한 것이였다. 이처럼 그의 신앙은 너무나 주관적이여서 구원은 여전히 인간이 선택하고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인본주의 적인 행위의 결과가 되고 만다.  

2)  루돌프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

불트만은 역사비평으로 신학을 한 바르트와 성경관에 있어서 일치하는데 그는 특히 « 신약성경의 비신화화 »로 유명하다. 그는 양식 비평의 선구자로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 초대 교회가 복음서에 적용한 다양한 양식 속에서 보다 깊이 분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 객관적인 용어로 표현된 신화적 세계관 속에 사로잡힌 신앙을 해방시킬 필요가 있었다 »고 말했다. 그는 «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는 « 현재 신자들의 경험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처럼 신앙의 근거로서의 객관적인 지식을 거절하고 철저히 주관적인 신앙을 강조하였다. 그의 신학은 철저히 실존주의적 접근으로 시작과 끝이 모두 너무나 주관적이였다. 따라서 계시에 기초한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관적으로 선택한 믿음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기에 과연 구원이 있겠는가 ?

 

3)  틸리히와 새 존재

폴 틸리히(1886-1965)는 철학과 신학을 서로 보완하는 « 연결의 방법 »으로 알려졌다. 철학으로 질문하고 신학으로 대답하기를 시도했다. 인간은 비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용기있게 존재를 선택해야 한다. 그는 존재를  « 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 »라고 했다. 그렇지 않고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비존재로 떨어진다고 했다. 비존재로서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 실존적 절망 »이다. 그는 « 사람은 직접 개인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행동 속에서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고 했다. 이 궁극적 관심이 유한하고 실존적인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대답이다고 했다.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이지만 보통의 여러 존재와 같은 의미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는 존재이지만 존재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틸리히는 하나님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며, 바로 이 예수님이 새로운 존재라고 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기독교의 기초이듯이 각자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가 된다고 한다. 즉 성경을 역사적으로 검증하고 그기서 발견한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고백함으로서 새로운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인간은 실존의 문제를 극복하고 참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면 비존재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신앙도 구원도 모두 객관적 진리가 아닌 주관적으로 결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가 사라진 신학이 주관적인 결단 외에 무슨 초자연적인 구원을 주겠는가 ?

10.   본훼퍼 (1906-1945)와 급진신학

본훼퍼는 지금까지 정통기독교에서 부정적으로 보았던 계몽주의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인간 이성이 중심이 된 계몽주의 사회는 발전하여 성숙한 세계가 된다고 믿었고, 이 성숙한 세계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성숙한 세계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스런 상황에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 짐을 지고 가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그의 뜻을 깨닫고 믿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 것이다. 그는 세상 일로 부터 물러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 속에 함께 계신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지시는 하나님은 강한 승리자로서가 아니라 무능한 자로서 함께 고난받은 자로서 계신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또한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일치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상황가운데서 형성된 그의 사상은 신죽음의 신학, 세속도시, 정치신학, 과정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등 각종 새로운 방향의 주제를 제공해 준다.

11.    사신신학

가장 최초로 일어났던 급진신학은 사신신학으로 윌리엄 해밀턴과 토마스 알타이저가 선두에 서 있었다. 토마서 알타이저는 초월자이며 초자연적이며 전능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믿지 않고 인간 속에서 내재하시며 함께 고통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내재적인 하나님이 되었고 이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전혀 관여하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었다고 한 것이다. 윌리엄 해밀턴은 하나님의 죽음을 선언하고 세속적인 세상은 지적이요 윤리적인 것으로 그 사실을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인류는 성숙해졌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에게 나타난 문제들을 해결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신신학은 이후에 설득력을 잃고 사라졌지만 이후로 각종 급진 운동이 과감하게 일어나 인간적인 입장에서 신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세상에 내재하는 하나님은 인간 속에서 그것도 앞장서서 투쟁하는 인간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12.    존 로빈슨(1919-1983) « 신에게 솔직히 »

존 로빈슨은 진리는 계속 변해가는 상대적인 것 임으로 현대인에게 맞도록 계속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기독교도 계속적으로 새로워져야만 현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초자연적, 신화적, 종교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며 인간 속에 있는 사랑과 자유에서 초월하신 하나님을 찾으라고 강조한다. 결국 하나님의 초월성을 거부함으로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역할을 해야 했던 것이다.

13.   하비 콕스와 세속화신학

사신신학을 뒤따라 나온 것이 세속화신학 운동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삶의 세속적인 모습에 대한 새로운 이해였다. « 세속화 »란 역사와 사회에 대한 세상적이고 실제적이며 책임적인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반종교적이고 과학적이며 물질적인 개념인 세속주의와 다르다. 세속화는 신을 인정한다. 초자연적이고 다른 세상의 실체 곧 전통적 신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내재되어 있는 신이다. 하비 콕스는 세속과 도시의 합성어인 세속도시를 설명하며 현대 도시인들은 전적으로 세속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삶이 변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 세속도시는 성숙과 책임을 요구한다고 한다. 이러한 세속도시에서는 종교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 인간은 이제 성숙한 단계에 와 있기 때문에 초월적 존재의 도움없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이 없는 것 처럼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죽음의 한계 때문에 구속이 필요하고 구속자가 필요한 정통적 종교의 개념과는 다른 자력구원을 강조하는 복음없는 기독교가 되었다.

14.   몰트만의 « 희망의 신학 »

1964년 위르겐 몰트만은 « 희망의 신학 »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이책에서 몰트만은 신앙을 기본적으로 희망으로 보았다. 희망은 고통을 이기고 미래를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 나간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종말론은 막연히 기다리는 « 미래 그 차체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능동적 가르침이어야 했다. 그는 억압당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희망이 세상에서 해방을 얻도록 동기를 주는 힘으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그의 종말론은 현재에 대한 혁명과 변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 희망의 신학 » 속의 종말론은 전통적인 의미의 종말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장차 올 현세적이고 이 세상적인 미래인 것이였다. 현재에 힘을 주는 희망인 것이였다. 하나님은 단지 세상의 희망 자체일 뿐 인간은 스스로 그 희망을 잡고 자기 힘으로 투쟁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행동하는 운동권 신학(행동신학)들이 나온다. 해방신학, 정치신학, 여성신학, 과정신학, 환경신학, .

15.   포스터모더니즘

포스터모던이란 현대이후란 뜻이다. 모던의 특징이 이성이라면 포스터모던이란 이성이후를 뜻한다. 즉 포스터모던은 현대이전의 하나님 중심의 사상과 현대의 이성중심의 사상 모두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는 철처한 상대주의 사상이다. 따라서 포스터모던의 신학은 전통적인 가치 체계의 해체로 전개되어 신학을 건설하기 보다는 파괴하였다. 철저한 상대주의에 기초한 포스터 모던신학은 기독교의 배타적인 교리를 거부하고 성경적 계시와 영감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기독교를 다른 많은 종교 중의 하나로 보았다. 따라서 포스터모더니즘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홀로 선 현대 이후의 인간의 사고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이성 모두를 거부한 현대 이후의 인간에게는 허무와 혼란으로 가득찬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II. 자유주의 신학의 비판

 

이상에서 살펴본 자유주의 신학 전체를 아우러는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과 사상적 전제를 정리한 후 자유주의 사상을 비판하고자 한다.

 

1.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 및 사상적 전제

 

1)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

 

첫째, 순수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이고 초이성적인 부분을 다룸에 있어 지나치게 인간의 느낌과 상상력, 직관을 강조함으로 위로부터의 신학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신학으로 발전하여 주관적이고 실존적인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둘째, 계시보다 이성을 중시하며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역사비평학을 따라 성서비평을 하였다. 따라서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사건을 다 빼버리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교훈만 찾아서 강조한 인본주의적인 신학으로 발전했다.

 

2)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전제

 

첫째,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한다. 이전까지 계시중심적이던 정통신학을 부인하고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모든 진리를 파악하는 유일한 척도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신학연구에 있어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게 하였다.  따라서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이성을 기초로한 철학, 과학, 학문을 강조하며 초자연적인 요소를 무시했고, 기적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를 배제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계시를 부인함으로써 정통신학의 교리에 전면적인 비판을 가하였다.[4]

 

둘째,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전제는 자연주의에 있다. 자연적인 것은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인정치 않고 인간은 과학적 인과관계의 자연적 삶에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초월자 하나님은 약화되고 대신에 인간이 신학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내재성(Immanence)를 강조한다. 내재성이란 초월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며 또한 자연을 통하여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에 초자연적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시지 않고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는 질이 아니라 양의 차이이다. 빛나는 이성은 계속 발전하기 때문에 인간도 도덕적으로 선을 많이 쌓으면 신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범신론적인 가치가 그 저변에 있다. 따라서 종교간의 관용을 주장하는 인본주의적인 종교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인간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만 강조하다보니 신앙이 주관적이 되고 인본주의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넷째, 진보를 강조하며 낙관적이다. 그들은 중세는 교리와 전통에 매여 천년동안 변함이 없었는데 이성이 다스리는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빛나는 이성은 합리적임으로 이성이 충만한 세계는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고 한다(New age도래 기대)

 

다섯째, 자율 및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주의이다. 인간 이성을 가만 두면 조화롭게 움직여서 세상이 풍성하게 된다고 한다. 이들은 인간 이성에 한계가 있음을 무시하고 각 개인이 이성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이성의 법칙에 순응해서 나가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섯째, 이렇게 절대적인 가치가 없이 상대적인 가치에 기초하며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다보니 삶에 있어 상당히 관용적이 된다. 자기 주장을 위해 싸움만하지 말고 서로의 생각과 자유을 존중해서 용납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 용납하고 사랑함으로 참된 공동체를 형성하자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랑과 덕과 관용은 레씽이 « 예언자 나단 »에서 세 반지의 비유를 통해 강조한 바와 같이 각 각의 종교는 서로 다투지 말고 오직 덕을 쌓아서 참된 종교임을 스스로 증명하라고 한데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관용정신은 절대가치가 있는 기독교를 훼손하고 종교다원주의 사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2.  자유주의 비판

자유주의 신학은 이성으로 신학을 하려는 문제점이 있는데, 가장 강조해야 할 것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1923년 미국에서 자유주의 논쟁이 치열할 때 정통신학의 대부였던 그레샴 메이천은 그의 저서 « 기독교와 자유주의 »에서 자유주의는 기독교와 뿌리를 같이 하고 있지 않은 위험한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카톨릭은 변질된 기독교이지만 그 뿌리는 같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그 출발점부터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종교이다. 기독교의 출발점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서부터, 그의 부활, 승천 등 초자연적인 사건들이다. 즉 기독교는 시작이 초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내용도 죄사함, 구원, 영생, 하나님 나라 등 모두가 초자연적인 영역의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초자연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주의에 그 사상의 근거를 두고있다. 즉 자유주의의 뿌리는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인과법칙이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을 철저히 신봉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기독교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정통종교는 위로부터 종교이지만 자유주의는 아래로 부터 진리를 추구하는 철저한 인본주의 종교인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유사 기독교인 것이다.

 

1)  인간관의 차이 

 

정통신학은 인간을 모두 죄인으로 보지만 자유주의신학은 인간은 비교적 선하고 인간이성은 완전하다고 본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양심과 상상력, 직관들을 개발하여 선하고 도적적인 삶을 살면 신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죄관의 차이

 

정통신학은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 죄다고 본다. 반면 자유주의신학은 인간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죄라고 본다. 따라서 이성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고 노력하면 인간이 개선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자력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중생을 통한 거듭남이 없이는 절대로 완전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3)  신관의 차이 

 

정통신학은 하나님을 절대자, 초월자이면서 인간적인 하나님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믿는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인간의 내적인 감정이나 직관을 통해서 느낀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는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양적인 차이임으로 인간도 노력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4)  성경관의 차이

정통신학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쓰여졌고 무오한 책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역사비평학의 관점에 따라 성경을 문서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으로 성경을 비평하다보니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기적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적, 합리적, 논리적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즉 성경의 표적들을 상징, 신화, 전설로 해석하려고 시도함으로 기독교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설명이 되어버린다. 성경에 나오는 계시적인 진리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만을 부각함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도 부활의 의미를 마음에서 찾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을 도덕적 모범을 보인 분으로 생각하고 그의 삶을 본받고자 시도하였다. 이렇게 성경적 진리에서 의미만 도출해내다 보니 복음의 핵심을 벗어나서 여성해방, 흑인해방, 노동자해방, 환경문제 등의 사회참여적인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복음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앙을 각자가 느끼는 감정, 직관 등으로 이해하다보니 진리의 절대 기준이 없이 너무나 주관으로 흐르게 되었고 결국 종교다원주의로 빠지게 된 것이다.

 

III.      참된 신학을 위하여

1.  신학에서의 계시와 이성의 역할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신학의 대상은 내재하시면서도 또한 초월해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신학의 원리는 오직 계시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성의 능력을 강조하다보니 정통신앙과는 전혀다른 인본주의 신학을 강조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신학에서의 계시와 이성의 역할을 살펴보면서 올바른 신학 방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계시란 하나님께서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나타내주는 것이다. 성경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역사를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능동성 그리고 주도권이 언제나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계시가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참된 신앙은 언제나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면 신학에서의 이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초월적인 계시는 인간에게 전달되어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성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이성의 도움으로 우리의 신앙을 객관적으로, 지적으로 체계화한 것이 교리이다. 그러므로 신학을 하는 데 있어 이성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계시를 인지하는 기관으로서 계시를 이해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이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성은 계시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야지, 그렇지 않고 인식을 위하여 나름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할 경우 도구인 이성이 내용인 계시를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이 계시를 해석할 때, 그 기준은 철저히 성경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최고의 권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것으로 증명될 수가 없고, 성경이 성경 그 자체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영선 목사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계시의존적 사색을 하도록 주장한다. 계시의존사색이란 « 계시된 내용을 일단 내용으로 감수해서, 이성의 방법으로 합리성을 추구하며 인식을 하고, 논리를 전개해 나가기는 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해가는 데 상호모순되거나 충돌해 보여도 내용을 가감하지 않으며 성경이 가라는 데까지 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는 것을 말한다 [5] 즉 계시 의존적 사색이란 이성적 차원에서 논리성에 상충이 생겨도 내용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다. 반면 자율주의적 사색은 이성이 갖는 합리성을 위해서라면 내용을 가감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역사비평학을 기초로 성경비평을 하는 것이 바로 자율주의적 사색인 것이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신학의 원리를 계시가 아니라 이성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은 이성의 한계를 무시하고 있다. 이성은 그 자체의 폐쇄성의 체계(closed system), 즉 합리성의 체계 때문에 인과의 법칙을 벗어난, 경험할 수 없는 초월에 대해서는 판단 기준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계시보다 이성을 중시하며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역사비평학을 따라 성서비평을 한후 실존적인 감정과 내적 경험을 따라 신학을 하려고 하니 도덕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신학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  참된 신학을 위한 길

 

따라서 참된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성은 학문의 방법으로 필요한 것이지, 이성 자체가 신학의 원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를 합리성을 뛰어넘어서라도 수용하는 개방성의 체계(open system), 즉 계시의존적 사고가 절대로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성경관이 중요하다. 아래에서는 올바른 성경관을 가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3.  올바른 성경관을 위하여

 

첫째, 복음주의 성경관을 옹호하기 위해 우리는 축자영감의 교리를 기초로 하여 성경의 무오성을 믿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으로 무오하며 완전한 권위를 가지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필드는 축자영감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저작하신 하나님의 책이라고 믿어 왔고, 성경에 있는 말씀은 어떤 종류의 말씀이든지 실수가 없는 진리요, 또한 실패 없는 권위의 말씀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저작하신 줄로 믿어 왔다. » 또한, 딤후 3 16절에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고 밝히고 있다.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오류가 없고, 완전함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둘째, 성경 해석을 위해 계시 의존적 사색을 해야 한다. 이성이 진리를 발견하는 최고의 척도라고 주장하는 계몽주의 사상에 기초한 신신학자들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교리를 무가치한 것으로 비평하였다. 신신학자들은 이성을 강조한 철학, 과학, 학식을 기초로 초자연적인 요소를 무시했고, 기적을 믿지 않았다. 그런 것들과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과학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를 배제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계시를 부인함으로써 정통신학의 교리에 전면적인 비판을 가하였다.[6]

 

 

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최대의 착오는 인간의 이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은 노력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완전한 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율주의자들이다. 자율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를 하나님의 권위와 같은 권위에 앉혔다. 따라서 자율주의적 사색은 하나님을 절대의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가는 사색이다. 자율주의자들은 인간이 자기의 지능으로 중립적 처지에서 편견 없는 연구를 통하여 우주를 참되이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도 알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 신이심으로 인간은 그 첫걸음부터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아래 있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지식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사색에 있어서 하나님 의존 사색을 유일한 사색방법으로 삼아야 한다. 피조물인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계시에 의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고와 판단을 하나님의 계시의 빛, 즉 성경을 기준으로 해석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신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율주의적 사색을 부인하고 하나님 의존 사색을 해야만 한다.

 

셋째, 일관된 성경 해석의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고등비평가들은 구약의 어떤 책들의 저작자와 그 책의 역사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이성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판단하고 비평함으로 계시의 올바른 뜻을 놓칠 수 있다. 따라서 계시를 해석할 때 이해되지 않고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 때문에 이성으로 계시를 제한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을 기초로 계시를 해석해야 한다. 벧후 1 :20-21절에서 베드로는 계시를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계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자체적으로 모순이 없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의 말씀은 다 짝이 있어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이사야 34:1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 이 말씀에 의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성령께서 이것들을 편집하시고 모으셨다고 한다. 따라서 계시를 해석할 때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데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란시스 쉐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성경은 스스로 성경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문자를 빌려 전달하는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한다. »[7]

 

넷째, 문자로 쓰여진 성경들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성경의 저자인 성령의 조명이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의 계시는 초이성적인 것임으로 이성으로 이해가 안 될 때는 진리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성령님의 조명에 의존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 (고전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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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에 발전한 현대신학의 한 흐름이지만 여기서는 자유주의 신학과 현대신학을 같은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2]근대의 시작은 베스트팔렌조약이 체결된 1648년부터이다. 그 이전은 종교개혁 시대인데 전근대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시작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부터이다.

[3] 도덕적으로 선행을 많이 행하면 예수님과 같이 완전해질  있다.

[4]김영재, 기독교교회사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586.

[5]박영선, 평신도를 위한 신학입문 (엠마오,1992), 56.

[6]김영재, 기독교교회사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586.

[7] 프란시스 쉐퍼, 이성에서의 도피, 김영재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6),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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