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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의 동향

하나님아들 2021. 9. 13. 22:29

현대 신학의 동향

 

 

우리는 오늘날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광범하고도 급격한 변화를 전 생활 영역에서 체험하고 있다.1) 불과 수년 전까지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결과를 미처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파장을 우리 개인과 민족 공동체에까지 미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가까이 세계를 양분했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을 주축으로 한 동구 공산권의 몰락, 독일의 평화적 통일, 걸프 전쟁, 우르과이 라운드 협정 타결에 따르는 쌀을 위시한 농산물 개방 문제, 국제적 냉전기류의 소멸에 부응한 러시아와 중국과의 수교, 북한의 김일성 사망과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북-미 회담의 성공과 양국 대표부 설치 등등 민족과 인류의 장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엄청난 사태진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실정이다.

우리는 2000년대의 전야(前夜)이자 여명기(黎明期)에 해당하는 현 시점이 역사상 미증유의 획기적 전환기임을 느끼고 있다. 오늘날까지 개인과 민족사회를 오랜 세월 지배해 온 사고(思考)와 행동양식들이 새롭게 형성된 상황 속에서 대두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홀연 등장한 도전들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체험되고 있다. 예컨대, 우르과이 협정에서의 농산물 개방에 수반되는 문제나, 올해 현실적 가능성으로 급부상한 민족통일문제에 대한 저간의 대응책들이 졸속적이고 효과적이지 못한 것으로 많은 국민들이 감지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적 입장에 대한 염원이 절박하게 발해지면서도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는 거시적이고도 포괄적인 새로운 비전과 방향제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과 인류 공동체와 전 우주 안에서 일고 있는 현 역사적 변화의 조류가 어떠한 방향으로 흐르고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다.

차제에 인류와 세계 구원을 원하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구원행업에 관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동향을 일별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세계적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서구사회에서 정착되면서 신학 역시 금세기까지 서구인들에 의해 정립되고 주도되어 왔다. 그런데 교회와 신학계 안에도 과도기적인 6,70년대를 거치고 2000년대를 마지막 앞둔 90년대를 맞이하여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징후들이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우리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대 서구신학의 동향을 소개하고 이어서 탈서구적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신학계의 동향과 함께 90년대에 들어서 신학계 안에서 범세계적 차원에서 요청되고 있는 ‘생태학적 신학’을 간략히라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 한국 교회가 2000년대를 맞이하여 택해야 할 바람직한 진로를 모색하는데 자그마하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I. 현대 서구신학의 동향

 

오늘날까지 한국 신학계에 영향을 미치는 서구 신학계의 동향을 1980년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한다.

 

1. 6,70년대 인간중심적 ‘역사의 신학’ 정립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집을 계기로 하여 신학계도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전통적 스콜라 신학(theologia scholastica)이 퇴조를 보이고, 그 대신에 기본 취지와 방법원리 면에서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다양한 신학사조들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2) 스콜라 신학은 고대 내지 중세의 정적(靜的) 우주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형성된 ‘구원철학’(久遠哲學, philosophia perennis)이라고 일컬어지는 토미즘(Thomismus) 내지 신 토미즘(Neo-thomismus)의 기본통찰에 의거하여 역사적 그리스도 신앙의 절대적 진리를 해설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6,70년대에 꽃피기 시작한 현대 신학사조들은 소위 ‘인간학적 전환’(人間學的 轉換)을 이룩한 서구의 인간중심적인 철학사조의 기본취지와 방법원리를 원용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성을 파악하고 제시하려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1. 금세기 최대의 가톨릭 신학자로 간주되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칸트-마레샬 노선의 인간중심적 ‘초월철학’(超越哲學)의 취지와 방법원리를 원용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진리를 초월-인간학적(超越-人間學的)으로 새롭게 파악하는 ‘초월신학’을 전개하고 있다.3) 라너와 그의 신하에 동조하는 제자들의 사상 이면에는 헤겔(G. W. F. Hegel)에게서 절정에 이른 ‘독일 관념주의’의 기본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의 감각론적인 대화철학적 통찰, 독일-유다계 사상가들인 부버(M. Buber), 에브너(F. Ebner) 그리고 로센즈바익(F. Rosenzweig) 등에게서 이론화된 인격주의(人格主義) 사상의 기본취지와 방법원리에 입각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교리를 성서-인격주의적으로 파악하는 발타사르(H.U.v. Balthasar, 1905-1985)나 오트(H. Ott, 1929- ) 등의 신학 입장이 1960년대 이래 전 세계 신학계로 확산되었으며, 70년대 중반이래 한국 신학계에도 소개되어 왔다.4)

이러한 서구 신학사조들이 현대 세속사회나 비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해 취하는 입장이 동일하지는 않다. 실존론적이거나 인격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성서에 입각한 ‘하느님 말씀’ 위주의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들은 이 현대철학사조의 기본통찰을 그들의 신학사상 정립에 원용은 하면서도 탈(脫)그리스도교적이거나 비(非)그리스도교적 세계에 대해 여전히 비판적이고 대결적인 자세를 드러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K. Barth; R. Bultmann; H. U. v. Balthasar). 이들은 특히 비성서적, 비그리스도교적 문화와 종교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경향을 노출시키고 있다. 그런데 라너가 주도하는 초월신학은 탈그리스도교적 서구 세속문화와 비그리스도교적 종교세계에 대해 긍정적이며 개방적인 성향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신학에서도 비그리스도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絶對性) 내지 우월성이 선험적으로 고수되고 있다. 그래서 교회 밖에서 발견되는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가치들은 복음을 준비하는 사전 단계로 규정된다.

 

2.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 신학계에도 실존주의적, 초월주의적, 인격주의적 신학사조들의 비역사성과 비사회성을 비판하는 ‘희망신학’(希望神學)과 ‘정치신학’(政治神學)과 같은 ‘역사의 신학’ 범주에 속하는 사조들이 폭넓게 소개되기에 이르렀다.5) 이 신학사조들은 역사(歷史)를 개인과 사회, 그리고 자연세계 사이의 관계가 아직 채 종결되지 않은 개방된 과정으로 파악하면서, 이를 보편적으로 포괄적 실재로서 이해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진리의 보편성을 역사의 지평(地平)하에서 신빙성있게 제시하려는 취지를 거의 공동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떼이야르 드 샤르댕(P. Teilhard de Chardin, 1881-1955), 라너, 판넨베르그(W. Pannenberg, 1928-), 큉(H. Küng, 1928-), 카스퍼(W. Kasper, 1933-) 등과 같은 신학자들은 근본적으로 낙관적 성격을 띤 진화론적 역사관을 보편역사의 주(主)로서의 그리스도관에 매개시킴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진리를 현대의 서구중심적 세계관에 적응시키려는 기본취지를 드러낸다. 이 신학노선들이 인류의 역사를 하느님의 현현(顯現)이자 역사의 장(場)으로 파악하는 한에서 모든 문화와 종교적 가치를 포함하는 역사현상 일반에 대해 긍정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신학사조들은 그리스도 신앙의 절대성 내지 우월성을 고수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희망의 신학’이나 ‘정치신학’을 전개하는 몰트만(J. Moltmann, 1926-)이나 멧츠(J.B. Metz, 1928-)와 이들의 동조자들에게서는 역사관 및 진리관의 변모를 지각할 수 있다. 이들은 역사일반을 다분히 헤겔 우파적인 역사관에 입각하여 그리스도 중심적 완성을 지향하는 과정으로서 낙관적으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앙진리를 현실에 적응하는 입장의 신학사조들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로부터 이탈해 나간 현대 세속사회나 그리스도교에 흡수되지 않은 비그리스도교적 세계를 그리스도교적 실재로 해석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소외’(疏外)현상에 더 많은 시선을 돌리고, 현실세계 속에서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그리스도 신앙의 적절성(適切性)을 새롭게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복음의 요청에 부응하여 현실을 변혁시키는 데 주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역사의 신학’의 유형 중에서 ‘과정신학’(過程神學)이나 ‘보편사 신학’(普遍史神學) 등이 현대의 새로운 역사의식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 신앙의 정론(正論)을 정립하려는 현실적응의 성향을 다분히 드러내는 데 비해, ‘희망의 신학’이나 ‘정치신학’은 네오마르크스적인 블로흐(E. Bloch, 1885-1978)나 프랑크 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의 현대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적 기본통찰의 취지를 원용하여, 고난과 갈등으로 점철된 소외현실을 변혁시키려는 정행(正行) 위주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6) 이 신학들은 소외된 현실을 구원된 실재로 해석하면서, 이렇게 이해된 세계 안에서 국교화되었거나 시민종교화된 기성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예언자적으로 비판하고 현실의 소외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복음의 힘으로 이 소외상황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변혁을 위한 실천위주신학들의 주된 관심은 정치, 사회, 경제 차원에서의 소외현실을 변혁시키려는 데에 있기 때문에 세계의 각 문화권에서 역사 초기부터 발견되는 문화와 종교적 가치에 대한 평가작업이 심도 깊게 또한 체계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실정이다.

 

3. 6,70년대의 서구 신학은 서구 그리스도교 중심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주위의 탈그리스도교적 세속세계나 주변의 비그리스도교적 세계를 향해 일반적으로 개방적 대화의 자세를 보이면서 그리스도 신앙의 현실적응화(現實適應化) 내지 현실변혁화(現實變革化)를 기도하고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 신앙의 복음적 진리를 서구의 특정사조의 기본통찰과 연계시켜 현대에 적합한 언어로 신학화하려 시도한다. 그런데 이 신학사조들은 비서구적 정신문화나 종교에 대하여  개방된 대화의 자세를 보여주면서도 역사적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불가침적 우위성과 절대성을 부여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80년대 여성신학의 등장

 

70년대 이래 서구 신학계에서 그릇된 남녀 관계의 역사적 현실 안에서 여성들의 숙고와 체험을 바탕으로 싹트게 된 여성신학이 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전 세계 신학계에로 확산되고 있다.7) 메리 데일리(Mary Daly)와 엘리사벳 슈쓸러-피오렌자(E. Schüssler-Fiorenza), 그리고 로즈마리 류터(Rosemary R. Ruether)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여성신학은 재래의 신학이 모두 가부장제적 사고와 남성중심의 언어로 이룩된 남성신학임을 비판하면서 그동안 일반 사회와 교회 안에서 차별받고 소외되어온 여성의 관점에서 신학의 주제를 전반적으로 다루면서 탈가부장제를 통한 전인적 구원관을 이룩해내고자 한다.

 

1. 여성신학은 오늘날까지 서구세계에서의 지배적인 남성중심적 가부장제 문화, 사회구조, 역사인식에 대한 근원적 회의와 이의제기로부터 출발한다. 이 신학은 남성을 인간의 전형적 모델로 제시하면서 여성을 남성에 의해 규정시킴으로써 본래의 상태로부터 소외시켜 온 교회와 기존 신학 입장을 비판한다. “교회는 자유와 충만한 인간성을 갈구하는 인류 절반의 깊은 염원을 거절 내지는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한편, 교회의 구조를 현대의 여성조건에 알맞게 고치기를 거부하며 아직까지도 여성들에게 순명, 복종, 양순 등의 수동적인 덕행을 가르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시대착오와 편견의 마지막 요새로 나타나고 있다.”8) 로즈마리 류터는 교회가 성차별 제도의 정착에 기여했다고 지적한다. “고대문명이 영혼-육체의 이원론과 남성-여성의 이원론을 동일시하고 따라서 여성의 예속을 새로운 형태로 재규정함으로써 여성해방의가능성을 진압했으며 그리스도교는 이 점에서 볼때 고대 사회문화의 상속자이자 담지자로서 가부장제적 체제의 확립과 유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9) 그래서 여성 신학은 여성의 관점에서 역사와 종교, 세계가 신학적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하느님께 대한 여성체험과 그 이야기가 권위있게 공개되고 선포됨으로써 남성문화를 상대화시켜 남성적 문화와 신학을 보완함으로써 전 인간 해방과 온 우주의 구원을 이룩해야한다는 기본 취지를 드러낸다.

여성신학자들은 성서가 고대에 여성해방을 위해 비록 일익을 담당하고 기여한 면이 있지만, 성서자체가 바로 가부장제적 남성문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성서가 지닌 한계성을 예리하게 비판한다. 여성신학은 교회 안에 정착되어 있는  가부장 제도가 여성을 인간이 아닌 전혀 별개의 것 또는 비존재로 보아왔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여성이기에 억압과 예속을 인내하며 참아야 한다는 식의 가부장제적 설교는 반인간적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여성신학은 여성전체를 남성전체의 대립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부장제적 권위를 고발한다. 여성신학은 종교적 억압체제로서의 가부장 제도를 극복하고 여성교회가 출현함으로써 기존교회와 문화전통이 정화되고 보완되고 완성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교회는 결코 분리주의적 발상에 의한 것이 아니고 여성들의 품위를 기존 종교 문화권 속에서 강조하여 여성들을 남성들의 영적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여성을 보호하고 완성시키기 위한 하나의 대응적 방법의 모색이라는 주장이다.

 

2. 성서에 대해 근원적 물음을 제기하는 여성신학자들의 주장은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성서전승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전승의 진위를 가리어 여성해방을 위한 근거를 나름대로 성서에서 찾고자 하는 부류이며, 둘째는, 가부장제의 산물인 성서는 그 자체로 여성억압적 전승의 원천이기에 여성해방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주장과 함께 성서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부류이다.  어쨌든  양편 모두 성서를 나름대로 논증적 자료로 인용하고 성서의 권위에 호소하고 있다.

여성신학의 입장과 상반되는 기존의 성서해석의 입장을 보면, 첫째는 교리적 성서해석 유형으로 전통적 해석방법인데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자 계시의 완성이기에 진리의 무류성으로 어떤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규범으로 파악된다. 둘째 유형은 역사적-사실적 해석으로 실증주의적 해석방법을 따른다. 이 해석 유형은 성서적 기록과 신학적 진리를 역사적 사실과 동일시하고자 한다. 셋째 유형은 양식사적-편집사적 비평을 통해 이루어진 대화적-다원적 유형이다. 즉 성서는 당대의 공동체의 다양한 삶과 상황, 그리고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 상황과 과정을 생각하며 재 해독되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여성신학자들도 성서해석의 여러 유형을 따라 나름대로 성서의 본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어떤 불변의 규범을 찾고 있다. 그러나 왜곡된 요소들이 성서 안에 잔존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면서 과감하게 새로운 해석 유형을 찾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여성해방론적 성서해석이다.

여성해방 해석학은 성서를 낱낱이 분석하여 비판한다. 이제 성서는 여성해방의 관점에서 그 참 가치가 확인되고 구원적 기능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여성해방 해석학은 성서를 영구적 원형으로 보지 않고 역사적 모범 또는 신앙의 참 삶을 이룩하는 뿌리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성서 본문은 본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는 데 이를 모든 시대와 문화에 보편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불변하는 규범으로 파악되어 왔다. 여성해방 해석학자들은 성서의 본문을 여성의 현실 상황, 여성의 해방체험이라는 권위 다음에 둔다. 여성들은 성서적 유산을 기억하며 그 변혁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슈쓸러 피오렌자는 성서는 불변적 권위의 원천(source)이 아니고 여성해방을 위한 풍요로운 자료(resource)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남성 지배적 성서 해석학을 통한 성서이해를 영구적 원형으로 보는 입장이 배격된 것이다.

여성신학은 성서를 남성중심적 해석에 의해 규정된 영구적 원형(perduring archetype)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원형(historical prototype)으로 이해하여 다음의 네가지 입장에서 새로운 해석방법을 전개한다.

첫째,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 입장이다. 여기서는 성서 본문의 기록자들과 그 해석자들이 남성들이었기 때문에 성서 본문과 해석들이 남성중심적으로 이루어졌으리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의심의 해석학은 성서와 그 본문의 내용들이 가부장제적 남성위주의 산물이기에 여기서 은폐되었거나 무시된 과정들을 재조명하면서여 남성위주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의심의 해석학은 성서의 원문 내용 뿐 아니라 번역된 현대어 성서에 대해서도 같은 의심과 이의를 제기한다.

둘째, 역사적 사실성의 해석이 아닌 선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proclamation)을 전개한다. 선포의 해석학은 성서가 지닌 해방적 메시지, 특히 여성을 위한 해방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선포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여기서 모든 성차별적 진술들은 신적 계시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평가와 선언이 이루어진다. 남성만을 표준적 인간으로 취급하고 남성위주의 문화를 보편타당한 표본으로 여기는 관점에 비판을 제기하는 것이다.

셋째, 회상의 해석학(hermeneutics of rememberance)이다. 성서 공동체에서 또는 신학에서 잊고 있었던 초대 교회 여성들의 남성들과 동등했던 참여와 지도력을 상기하고 되찾는 일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여성들에 관한 성서내용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여성의 관점에서 성서의 모든 내용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한다. 회상의 해석학은 가부장제적 전승이라 하여 그것을 모조리 제거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 역사-비판적 방법을 통해 여성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낸다. 은폐되고 망각된 여성해방적 전승을 기억의 해석학은 생생히 되살려내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다시 살아 숨쉬는 초월적 힘을 작용케 한다. 기억을 통하여 그동안 망각되었던 억압과 불평등을 재발견하여 참 된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 그것은 또한 중립주의의 방관적 해석학이 아닌 창조적 실현의 해석학(hermeneutics of creative actualization)을 지향한다. 성서의 남성중심적 전승과 해석을 가려내어 비판하는 근본 이유는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이다. 창조적 능력을 지닌 인간은 기억의 상상력을 통해 성서적 과거의 현장에로 되돌아가 선조들의 삶, 특히 여성들의 고통의 삶을 실감한다. 창조적 해석학은 여성경시의 가부장제적이고 권위적이며 부정적인 전승들 안에서 오히려 미래를 위한 창조적 가치와 건설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서의 메시지는 여성해방, 나아가 전인적 해방이라는 척도를 통해서만 그 참 뜻과 진가가 확인된다는 입장이 피력된다.

 

3. 여성신학은 교회와 신학, 종교와 사회문화의 가부장제적 질서 안에서 종속되고 억압되어 온 여성존재에 대한 깊은 사색, 성서 전승에 대한 창조적 재발견, 기존문화 질서에 대한 근원적 회의를 전개하였다. 여성 신학은 여성 억압적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여 새로운 인간성의 실현을 추구한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과 자유로 이룩될 새로운 인간성은 모든 유형의 차별을 극복하는 평동한 세계건설을 지향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성신학이 지닌 창조적 가치로서 탈가부장제를 통한 전인적 구원관을 이룩해내고자 한다. 따라서 여성신학이 시대의 표징 속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현대 신학 사조 중에서도 모든 유형의 기존신학에 대비되는 새로운 신학이란 점에서 획기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신학이 기존 남성중심적 신학을 보완시킬 수 있다고 간주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II. ‘제3세계’의 현대 신학동향

 

70년대 이래 제3세계 신학계는 신학을 주체성 확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전개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나름대로 모색하고 있다. 소위 제 3세계에 속하는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 일고 있는 신학사조의 특징을 파악하고자 한다.

 

1. 라틴 아메리카 신학의 동향

 

라틴 아메리카는 제3세계의 일부이면서도 서구인들처럼 주민 대다수가 그리스도인들인 그리스도교적 대륙이다. 그런데 이 대륙은 16세기 이래 서구 및 북미 제국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줄곧 예속되어 왔다.10)

 

1. 라틴 아메리카가 처한 저개발 상태가 바로 식민지적 상황의 결과라는 것이 1950년대 이래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과학자 및 신학자들에게서 의식되기 시작하였다. 라틴 아메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 제국들이 서구 및 북미 제국이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는 현대 세계의 주변부로 밀려나 정치-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주체적인 발전도 이룩하지 못하고 있음이 이들 학자들에 의해 간파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한 정상적 성장을 이룩하지 못하듯이, 한 민족 내지 국가 역시 결정의 중심을 자체 안에 갖지 못하고 외부의 세력에 의해 간접적으로 갖게 될 때에, 그래서 외부로부터 추진되는 개발 사업의 계획에 피동적으로만 참여해야 할 때에, 자체 내의 진정한 개발이란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다. 이 점을 간파한 라틴 아메리카의 일부 지성인들이 제3세계의 저개발의 상태를 종속관계와 노예관계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한 격렬한 반감을 표명하게 되고, 따라서 서구 세계로부터의 정치,문화,사회-경제적 ‘해방’을 거론하기에 이른 것이다.

반서구적 성격을 띤 라틴아메리카 신학은 1968년을 기점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해에 콜럼비아의 메델린(Medellin)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총회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을 새롭게 태동케 한 결정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회의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들은 빈곤과 억압으로 충만한 불의한 사회구조 안에서 ‘참된 죄악의 결정(結晶)’을 보고, 이 죄악의 상태로부터 아메리카인을 해방시키려는 강력한 원의를 표명하였다. 여기서 이미 해방신학 사상이 표출되고 있는 셈이다. 이 주교 총회에서 서구 선진국의 식민주의 내지 신식민주의가 탄핵되고 있었던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자들은 교회 안에서 부단하게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해 온 서구 신학에 불신뿐만 아니라 반감을 표명한다. 이 신학자들은 서구 세계에 의한 사회-경제적, 문화적 종속(從屬)에 대한 혐오감과 함께 서구 교회에 의한 종속에 대한 혐오감도 함께 느끼게 된 것이다. 사실상 서구 신학은 서구 문화와 사회 체제의 영향하에서 형성 발전 되었다. 서구 신학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서구의 정신사조, 정치, 문화, 경제 구조와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은 주지된 사실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자들은 식민 체제가 내포하는 문화적 자기 소외는 신학적 자기 소외를 내포하고 있음을 지각하며, 식민주의가 교회마저 식민사회의 통합된 부분으로 전락시켰음을 인지한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는 4, 5백년의 역사를 지니면서도 독창적인 사상을 형성하지 못하고 서구 신학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신앙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러나 서구 사회의 토양 위에서 형성된 서구 신학은 결코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조명하여 신앙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없다는 점이 인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신학자들은 라틴 아메리카 세계의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개방된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 이 세계의 현실에 부응하는 독창적인 신학 사상이 절실하게 요청됨을 파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자기 세계의 문제 해결을 서방 신학으로부터 수입하기를 중단한 것이다.

 

2.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자들은 독자적인 결정권을 박탈당한 소외 상황을 극복하려는 취지에서 구체적인 실천 행위의 규정에 결정적인 비중을 부여한다. 서구 신학은 전통적으로 신앙의 자기 이해로서 인식론적 성격을 강렬하게 지녀왔다. 말하자면 신학은 ‘신앙의 지성’(intellectus fidei)으로 파악되어 오면서, 소여된 계시진리에 대한 교리체계의 형식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요청되는 실천행위 자체는 신학적 사유(思惟)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자들은 구체적 상황하에서 요청되는 실천 행위를 구명하는 작업을 신학 사유의 주된 관심사로 삼는다. 이들에게서 신학은 신앙 실천 행위의 사유로서 신앙인이 구체적 상황하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신학자들은 교회가, 정착된 불의한 사회 체제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일고 있는 정치적 긴장 상태에 대해 비정치적으로 처신하기를 종용하는 서구 신학의 입장은 불의한 사회 체제에 대한 지지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초월적이고, 실존론적이며 인격주의적 경향을 지닌 현대의 서구 신학이 비판되고 있는 것이다. 서구 신학이 불의한 세계 구조의 기반과 이 사회로부터 추출되는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는 한, 서구 세계의 지배권 내지 종주권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머문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자들은 불의한 사회 체제의 존속에 기여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서구 신학을 배격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자들은 교회가 사회 안에서 자신의 원의와 상관없이 정치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신학자들은 교회와 신학 활동의 정치적 차원과 정치 행동의 구원적 차원을 함께 보고 있다. 이들은 신앙과 신학의 사사화(私事化) 경향을 탈피하고 구체적 실천 행위를 통하여 신앙을 활성화 시키려고 진력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신앙을 불의한 사회 체제의 포로로 만드는 모든 요소로부터 정화시키려 한다. 그래서 이 신학은 실천 행위와의 직접적인 접촉하에 철저한 사회분석 내용과 관련을 맺기 때문에, 신학과 정치적 윤리와의 구별을 배격한다. 여기서는 멧츠나 몰트만 등이 전개하는 서구의 정치신학에서 보다 더 직접적으로 정치적 차원이 신학적 사유의 중심으로 세워진다. 이 신학은 불의한 사회 현실에 직면해서 중립적으로 처신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보고, 억압받는 민중을 위한 해방 운동의 길을 기꺼이 택한다. 이 신학은 전체 교회로 하여금 불의한 사회 체제를 극복하고 자신의 독립성과 예언자적 자유를 되찾도록 기여하려고 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자들은 그동안 구원개념, 교회의 본질과 기능, 하느님과 그리스도, 은총과 죄악 등의 여러 신학 주제를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새로 조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재조명 속에서 서구 신학의 서술 양식과 개념의 문제성을 지적하였다. 교회가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해방을 위해 투신하려면 서구 신학에 포함된 서구 세계의 지배권 및 종주권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의 폭로는 불가피하다고 간주된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 신학은 예수와 그의 구원 행위의 역사적 의미를 참으로 진지하게 해석하고자 한다. 서구 신학은 대개는 비신앙인으로부터 도전받는 신앙의 처지에서 출발하여 오늘을 위한 복음의 메시지를 정식화(定式化)하려고 추구한다. 그런데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비신앙인으로부터가 아니라 비인간, 즉 인간다운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빈곤하고 억압받는 인간의 처지에서 출발하면서, 이들을 위한 복음의 의미를 천착하려는 것이다.

 

3. 서구 신학자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신학이 오랜 전통을 지닌 서구 신학에 비해 이론적인 치밀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구 신학의 문제성은 라틴 아메리카 신학에 의해 간과할 수 없이 명백히 지적되었다. 이 라틴 아메리카 신학이 다른 제3세계 교회로 하여금 주체적 입장을 정립하도록 기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 아프리카 신학의 동향

 

아프리카는 수세기 동안 지속된 서구 세계의 식민통치로부터 금세기 중엽 이래 해방된 대륙이다.11) 그러나 정치적 독립을 쟁취한 아프리카 신생국들은 도처에서 학살과 폭동, 내전에 시달리고 있고, 여전히 기아와 질병의 늪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70% 이상의 문맹자를 가지고 있어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낙후된 상태에 처해 있기에, 일부 학자들은 이 대륙을 ‘제4세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1. 아프리카의 그리스도 교회와 신학은 서구인의 지배로부터 아프리카 대륙이 해방된 이후에도 난국은 계속되고 있으나, 자신의 주체성을 점차 강력하게 의식하고 있다. 아프리카 교회는 서구 선교사들의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신앙의 문제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1977년 가나의 악크라(Accra)에서 개최되었던 제3세계 신학자들의 범아프리카 회의는 아프리카 교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 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고유 아프리카 신학을 정립하려고 시도한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아프리카 신학이 완성된 면모를 드러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실재(實在)의 이해와 신학 주제에의 접근 양식에서 탈서구식 경향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서구 신학은 전통적으로 종교와 세상사를 구분 내지는 분리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 신학자들은 인간의 삶 자체는 종교적이고 세상적인 2개의 범주로 분리시킬 수 없는 단일성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서의 인간의 역사(歷史)는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세상적이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언어에는 ‘종교’(宗敎, Religion)라는 고유한 말이 없다고 한다. 예컨대 동아프리카에서 종교를 뜻하는 말로 쓰이는 ‘dim’이라는 단어는 아랍 세계로부터 유입된 말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종교는 모든 삶의 영역에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종교적 삶을 전통적인 아프리카 유산의 개별 요소로서 따로 분리시키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아프리카인이란 삶을 종교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종교적 인간임을 의미할 정도이다. 삶을 종교적인 것과 세상적인 범주로 분리시키기를 거부하는 아프리카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아프리카의 종교자산과 복음을 조화시킬 수 있으므로 아프리카 세계권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롭게 이해토록 하는 데 기여하리라고 본다.

 

2. 현대의 아프리카 신학자들은 아프리카의 전통 유산과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이들이 과거에로의 회귀를 주장하지는 않으나, 오늘날 아프리카의 현실 속에서 대하게 되는 전통적 유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촉구한다. 선교 교회들은 서구 신학의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아프리카 현지에서 관심사가 되는 문제들을 거의 외면하다시피 하였다. 아프리카 신학자들은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종교 문제들에 대해 만족할만한 해결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 물음들은 주로 전통적인 아프리카 종교들로부터 제기되지만, 이 아프리카 전통으로부터 주어지는 해답들이 모든 인간을 풍요케 하는 영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그들은 믿는다. 이 아프리카 신학은 아프리카라는 맥락 안에서 전개되는 생생한 그리스도교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아프리카 종교들이 지니는 가치들을 ‘복음을 위한 준비’라고 보지만 이 종교들의 신앙 내용과 실천들이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을 풍요케 하는 데 기여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아프리카 신학자들도 ‘해방’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북미의 ‘흑인신학’의 취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인들은 식민주의하에서 억압과 착취 등 온갖 수모를 체험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은 현재에 와서도 신식민주의가 작용하고 있음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 신학에서 말하는 해방은 정치적, 사회-경제적 차원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그 이상의 실재를 내포하고 있다.

전통적 아프리카 종교들은 악의 문제를 깊게 취급한다. 마법(魔法)에 대한 공포, 조상(祖上)의 영(靈)들과의 바른 관계, 한발(旱魃), 불행, 일상적 비극 등의 문제는 전통적 아프리카 종교의 주요 주제들이다. 종교의 주요 목표 중의 하나는 악의 방향을 역전시켜 불행을 행복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아프리카 신학은 앞에서 열거한 갖가지 악의 세력들로부터 아프리카인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구원으로 보고 있다. 이에 억압적인 정치와 사회-경제적 체제로부터의 해방이 첨가된다. 서구 신학에서 강조된 죄, 다분히 내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거론되는 죄로부터의 해방이 무시된 것은 아니나 절대적 의미를 더 이상 지니지 못하고 있다.

 

3. 오늘날 아프리카 신학자들은 이 대륙이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나름대로 보편적인 그리스도 신학을 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들이 전통적인 서구 신학의 일방성을 의식하고 독자적인 신학 사상을 정립코자 하면서도, 자세면에서 경직성보다 유연성을 보다 더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바람직한 신학 사상 형성에 기여한다고 믿는다.

 

3. 아시아 신학의 동향

 

아시아 대륙에서 그리스도 교회는 여전히 외래종교의 면모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 종교로서의 면모를 지닌 아시아 교회 안에서도 70년대 이래 고유한 신학사상을 정립하려는 노력이 국가별로 강도의 차이를 보이는 가운데에서 나름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대륙에서 전개되는 탈서구적 신학의 성향을 80년대 전후로 나누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1) 70년대의 아시아 신학

70년대에 아시아 지역 교회 안에서의 고유한 신학사상의 정립작업은 대체적으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준하여 착수되었다.12) 이 신학작업들은 해당지역의 토착문화와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재래사상과 체험범주를 원용하여 복음의 진리를 아시아 지역 교회 안으로 뿌리내리려 한다. 그래서 그 지역의 문화와 종교적 풍토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접합시켜서 복음의 힘을 활성화시키려는 취지를 함축하고 있다.

 

1. 70년대 아시아의 대화신학은 재래의 비그리스도교적 전통문화나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토착문화와 종교의 표현범주로 파악하고 언어화하려는 현실적응의 의도를 밀도 짙게 노출시키고 있다.13)

여기에는 재래종교의 주요주제나, 전체 체계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와 연계시켜 양자의 비교나 융합을 꾀하려는 시도가 포함된다. 이러한 대화신학은 토착종교와의 대화를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 그분의 세계내 현존과 구원역사를 보다 광범위하고 심도있게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성서의 내용을 다른 종교적 전통과의 해후를 통해서 보다 새롭고 깊이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전통적 가정생활과 공동체생활의 고유한 풍습을 제시하면서 교회와 성인들의 통교 주제를 토착문화에 젖어 있는 방인들에게 친밀하게 만들고자 시도한다. 성사생활이 토착문화 속에서 과연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 그리고 동양의 영성사상과의 해후를 통해서 새로운 신심형식이 계발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숙고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현실적응을 위주로 하는 신학작업들은 아시아 민족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교적 계시의 하느님이 초기부터 현존하고 역사하였음을 의식화하고, 재래종교의 창설자들이나 성현들을 이들 민족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한 예언자로 파악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들 종교 속에서 이미 현존하고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인도의 파니카(Raymond Panikkar, 1918- )는 힌두교를 진실한 대화정신으로 이해하고자 추구하면서 그리스도가 힌두교 안에서 이미 현존한다는 주장을 피력한다.14) 물론 힌두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정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전모를 드러내지 않았고 과업을 완수하지도 않아서 좀더 성장하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다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고, 유다교와 희랍종교가 함께 죽었듯이 그리스도교도 힌두교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그리스도가 부활한 힌두교로서의 그리스도교로 부활할 수 있기 위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장춘신(張春申, 1929-) 역시 중국 그리스도 신학이 하느님의 계시 전모를 기술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처음부터 중국민족의 삶과 긴밀하게 유대되어 있음을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15) 그래서 중국문화와 종교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공자와 같은 위인은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빛을 준비한 인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믿기 때문에 공자가 성부와 성자의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모세에게 표하는 경의를 중국인들은 공자에게도 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은 중국문화의 메시아니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에 이른다는 점을 제시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현실적응의 성격을 지닌 신학작업들은 그동안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보편적임을 강조하면서 인류의 역사 초기부터 현존해 온 종교와 세계질서를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역사적 성취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타종교들 안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이 현존한다고 간주되며, 여러 종교 전통의 경전들과 예전들은 각기 상이한 정도로 하느님 현현의 표현일 수 있고, 인간들을 구원에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타종교가 ‘복음을 위한 준비’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절대성과 우월성이 자명하게 전제되고 있거나 고수되고 있는 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일치하며, 현대의 주류적 서구 신학자들의 입장과도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2. 아시아 신학계에는 재래문화와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아시아의 토양에 부식시키려는 현실적응 성향보다는 현실변혁을 강조하는 신학조류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16) 이 신학들은 경제적 빈곤, 사회 정치적 불의, 갖가지 유형의 예속과 억압상태가 일반화되어 있는 아시아의 현실상황 속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을 그리스도 신앙의 힘으로 해방시키려는 현실변혁의 신학으로 도처에서 전개되고 있다.

아시아의 현실변혁적 신학 역시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처럼 신학사유의 출발점이 해석하고 연역해서 사변하기 위한 성서 텍스트나 교의의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 부자유와 경제적 빈곤으로 특징지어지는 아시아 대다수 민중의 소외상황이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신앙의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 소외된 현실세계를 변혁시키려는 행동지향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민중의 현실적인 빈곤과 억압상황으로부터 신학사유가 출발하면서 신학자들이 현실의 소외체험에 동참하면서 민중들의 상황을 의식화하는 가운데 감지하거나 포착이 가능한 하느님의 소명에 의한 행동동기와 방법을 발굴하여 이 소외상황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행동을 촉발하고자 노력한다.

아시아의 현실변혁적 신학은 현실적응적 신학과 마찬가지로 서구문화의 산물인 서구 신학의 보편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를 구분해서 그리스도교의 특수성 내지 우월성을 자명하게 전제하는 서구 신학의 기본입장이 여기서는 포기되면서, 하느님의 역사가 아시아의 현실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입장이 대신 들어선다. 그래서 고난과 희망으로 점철된 아시아의 역사가 바로 하느님 역사의 실상을 밝혀주는 신학자료로 평가된다. 그래서 아시아의 현실변혁적 신학은 아시아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정체를 구명하기 위해서 아시아 주민의 대다수에 해당하는 민중의 고난과 열망의 한가운데서 신학적 사고를 시작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신학은 아시아의 역사, 혁명운동, 민간신앙과 가면극 등 민중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문화, 종교 유산에 대한 이해를 깊이할 것을 촉구한다. 민중의 삶에 깊이 개입해 들어가 이들의 고뇌와 욕구불만을 폭넓게 이해하는 가운데, 민중들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의 좌절과 열망에 동참하는 가운데, 민중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고난을 극복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개현해 주었던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변혁적 신학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 메시아의 사랑에 입각한 메시아적 친교의 공동체 건설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신학은 민중의 지혜와 유산, 그리고 억압상황을 심각하게 취급하는 가운데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도 공통점 및 구별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셈이 된다. 이 아시아의 현실변혁적 신학에서는 고난 속에서도 나타나는 민중적 삶의 질적 우수성의 신학적 의미가 천착되어 있다. 즉, 민중들은 갖가지 억압과 차별, 불의를 겪고 있으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예지를 지니고 있다는 통찰이 이 신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민중들 사이에서 형성 가능한 친교의 공동체 속에서 바로 하느님 사랑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현실변혁적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들로서 스리랑카의 피어리스(Aloisius Pieris, 1934-)17), 대만 출신인 송천성18), 한국의 서남동, 안병무 등의 개신교 신학자들을 열거할 수 있겠다19). 이들은 아시아 민중신학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취지와 목표에서 서구의 ‘정치신학’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신학에서 자명하게 전제되는 하느님,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이해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소외계층인 민중의 성격이 문화와 종교 전통의 상위성에 따라 다르다는 차이일 뿐이다.

 

3. 현실적응위주의 아시아 신학이 재래문화나 종교의 긍정적 가치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계 안으로 수용함으로써 신앙의 진리를 재래의 아시아 토양에 부식하려는 과거지향적 성향을 많이 노출하고 있는 데 비해서, 현실변혁적 아시아 신학은 과거나 현재상황에 신앙을 적응시키려는 데에 일차적인 관심사가 있지 않고, 고난으로 점철된 아시아 민중의 소외상황을 비판적이고 예언자적으로 다루는 가운데 구원된 미래를 지향하려는 열망을 강렬하게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대조적인 이 신학노선들이 오늘날까지 포괄적인 신학사상 안에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고는 보기 힘든 실정이다.

 

2) 80년대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등장

80년대에 이르러 스텐리 사마르타(Stanley J. Samartha)와 파니카와 같은  일부 아시아 신학자들이 존 힉(John Hick)이나 폴 니터(Paul F. Knitter)와 같은 소수의 서구 신학자들과 함께 엄격한 의미에서의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를 표방하기 시작하면서 아시아 신학계는 새로운 상황으로 접어들게 된다.20)

 

1.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주창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적 서구 신학의 ‘패러다임’(paradigma)이 전 실재 영역 안에서 광범하고도 급격한 변화를 동반하는 현금의 범세계적 상황 속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을 요청하고 있다고 규정한다.21)

여기서 사용된 ‘패러다임’이란 말은 1962년에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라는 제명의 저서를 통해서  급변하는 과학의 발전을 ‘패러다임’ 개념으로 해명하려고 시도했던 미국 물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 토마스 쿤(Thomas Kuhn)의 통찰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것이다.22) 쿤 자신은 정확한 의미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시킨 ‘패러다임’ 개념을 그의 저서 초판 발간 후 7년째 되던 해에 발표한 “후기(後記)-1969”(Postscriptum 1969)에서 ‘일정한 공동체의 성원들에 의해서 공유되는 믿음, 가치, 기법 등의 전체 구성체’(an entire constellation of beliefs, values, techniques, and so on shared by the members of a given community)라고 포괄적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23) 쿤의 패러다임론에 따르면 결정적으로 새로운 과학의 가설(假說)이나 이론(理論)들은 단순히 실험적 검증 경위를 통해서라기보다는 기왕에 과학계에서 통용되어온 설명모델 내지 패러다임들이 새로운 설명모델 내지 패러다임에로 전이(轉移, transference)를 이룩함으로써 형성된다. 통상적으로 과학 문제들은 일정한 ‘모델’ 내지는 ‘범례’(examples), 또는 ‘견본’(samples)의 채용을 통하여 해결된다. 여기서 과학적 문제 해결을 위해 채용된 ‘모델’, ‘범례’ 내지는 ‘견본’들이 과학적 지식의 구성체로서의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과학자들은 종래의 지식의 구성체로서는 더 이상 해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나 사건에 직면하게 될 때에  통용되고 있는 기존 패러다임을 확장하거나 수정을 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만으로 해명될 수 없는 문제들이 누적되기에 이르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전통적인 낡은 패러다임을 대치하게 되는 소위 ‘과학혁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당수의 신학자들이 쿤의 패러다임론이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서도 널리 적용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오늘날의 신학계는 생태계 위기와 제3세계인의 종교성과 절대빈곤의 문제에 직면해서 신학 패러다임의 전이를 요청하는 새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 신학자 존 힉이 신학 패러다임의 ‘코페르니크스적 전환’을 제창한 바 있다.24) 그는 자신의 입장을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ios, +70년경)의 지구중심적 천동설(天動說)에서 코페르니쿠스(Nikolaus Kopernikus, 1473-1543)의 태양중심적 지동설(地動說)에로의 전환을 비유로 들어  전개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는 다른 혹성들이 지구의 주위를 공전하여서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으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이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종교세계의 중심으로 간주되어서 타종교들이 그리스도교의 주위를 맴돌면서 그리스도교와의 원근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해 태양계 우주 중심에 있는 것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지구중심적 우주관이 포기되었던 것처럼, 신학에서도 그리스도교 중심적 입장으로부터 신(태양) 중심적 신학에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힉은 주장하는 것이다.

이제 파니카나 피어리스를 비롯하여 아시아 신학자들 - 이 중에는 한국 감리교 신학자 변선환 박사도 포함된다 - 역시 아시아적 종교성과 절대빈곤의 문제, 그리고 생태계 위기문제는 서구 신학의 기존 입장으로는 해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신학 패러다임의 새로운 코페르니크스적 전환이 요청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25) 아시아의 그리스도교는 과감하게 서구신학이라는 프톨레메우스적 시각(지구중심)에서 아시아 신학의 관점(태양중심)에로의 급격한 전환이 요청되는 전환기를 살고 있다는 견해가 아시아 신학계 안에서도 점차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2. 종교다원주의의 신학 관점에 따르면 종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상위성 내지 구별성은 세계 안에서 현전하거나 현존하는 모든 존재사물의 기본법칙이다.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실재들은 각기 고유성을 지니면서 상호관련을 맺고 보완하면서 유한한 실재들을 초월하는 하나의 근거와 목표를 지시한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관점에서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실재의 원초근거이자 중심이며 목표인 하느님과의 관련을 맺고 있으나, 종교 자체가 바로 하느님 자신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종교가 일반적으로 인간의 최종적 가치들이 구현되는 전인적 행동양식이면서,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수단의 표현 내지 표징이라 할 수 있지만, 이들은 현실적으로 주변에 존재하는 타종교나 사상체계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유한한 실재들이다. 종교들은 상호관계에서 부분적으로는 상반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보완적이기도 하고 유사하기도 하다. 어떠한 특정종교도 타종교적 요소에 의해서 결코 추월되거나 능가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우월성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의 많은 종교들이 상이한 교리와 의식(儀式) 및 취지가 상호간에 긴장을 유발하기는 하지만, 낮이 밤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고, 밤이 낮을 지양시키지 않듯이, 종교들이 상대방을 폐기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신학자들은 종교 사이의 관계를 획일적 기준에 입각하여 우열의 관계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상위성의 차원에서 비교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유다교, 그리스도교, 마호멧교처럼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만나는 예언자적 종교가 절대자에 대한 내면적, 신비적 체험을 중시하는 힌두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보다 우수한 종교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언자적 종교나 신비적 종교나 하느님께 이르는 도정에 있어서 서로 다르므로 획일적인 기준에 입각하여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께 이르는 도정으로서 나름대로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니카는 종교간의 관계가 “동화(assimilation)의 관계도 대체(substitution)의 관계도 아니고(후자는 ‘개종’을 잘못 표현한 것이다), 서로가 풍요로워지는 관계(mutual fecundation)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본다.26)

 

3. 이렇게 비그리스도교적 종교들을 그리스도교와 동등한 종교로 간주함으로써 여기서 전통적이거나 현대 주류적 서구 신학의 기본입장이 의문에 처해지고 있다. 이러한 성격의 아시아 신학에서는 신학의 기본주제들이 전혀 판이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의 본성으로 규정되는 선교란 타종교가 지배적인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부식하여 타종교의 신봉자들을 개종시켜 교회 안으로 영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들과의 개방적이고 진실한 대화를 통하여 통교와 친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활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란 세계를 그리스도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역사의 원천이자 목표를 지향해서 나아가도록 인간들을 서로 촉구하고 격려하는 종교 상호간의 해후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의 일부가 그리스도교의 상대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절대성 요청을 실질적으로 부인한 것은 신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다. 비그리스도교적 문화와 종교에 대한 이러한 현실적응적인 대화신학의 입장이 신학계에서 일반적인 기본입장으로 수락될 경우에, 신학 일반이 전통적이거나 현대의 주류적인 서구 신학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판이한 기본성격을 지니게 될 것이다.

 

3) 아시아의 여성신학

서구 신학계, 특히 미국 신학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여성신학의 영향을 받아 아시아 신학계 안에서도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성신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제1세대에 속하는 여성신학자들이 서구 여성신학자들의 입장을 신학계에 소개하고 그대로 수용하는 수준에 머무는데 비해서 제2세대에 속하는 젊은 신학자들은 아시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자각하면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두드러진 여성신학자로 한국의 정현경이 현재 전 세계 신학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세계 신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영어판 저서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 아시아 여성신학의 현재와 미래」(STRUGGLE TO BE THE SUN AGAIN. Introducing Asian Women's Theology)에서 아시아 여성신학이 걸어야 할 미래 진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27)

 

첫째로, 아시아 여성신학자들은 그들 자신이 신학의 텍스트(Text)이고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을 콘텍스트(Context)로 대해야 한다. 아시아 교회들이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에 너무나 많은 권위를 부여해 왔기에 아시아의 민중전통은 거의 간과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의 성서 해석이 민중들의 경험이 지니는 진리를 측정하는 잣대가 되었기 때문에 서양 교회에 대한 아시아 교회의 문화적 의존성을 영속화시켰다는 것이다. 성서는 아시아 민중들의 마음에 와닿을 때에만, 성서의 가부장제적 가르침으로 인해 깊이 상처입은 여성들의 마음을 두드릴 때에만 의미있게 되며, 민중들의 일상적 삶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만 자주성과 통전성을 향한 민중의 투쟁 속에서 살아 있는 책이 된다. “하느님은 서양 선교사들이 아시아에 성서를 전해 줄 때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아시아 여성들에게 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오레 전부터 우리 역사를 통해 늘 우리와 함께 하셨다. 하느님의 계시의 자리는 우리들의 삶 자체이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텍스트이며, 성서와 교회 전통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우리의 전거가 된 콘텍스트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계속 성장해 가는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삶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의 본문으로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28)

 

둘째로, 아시아 여성신학은 제도화된 종교가 아니라 여성들 사이의 대중적 종교(popular religiosity)로 신학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 아시아의 제도 종교들은 거의 남성들에 의해 창시되고 지배되었으며, 여성들은 소외되었다. 정현경은 아시아 여성들이 추상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제도 종교들을 변화시켜 여성을 긍정하고 몸을 사랑하며, 자연을 존중하는 영성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서 이러한 영성의 실천을 대중적 종교성으로 대하고 있다. 아시아 여성들의 대중 종교는 지상에서 우주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적 종교라 지칭될 수 있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고등종교들은 초우주적 종교들로서 현세의 물질 세계를 초월하여 더 순수한 형태의 영적 실재를 추구한다. 그런데 여성 중심의 우주적 종교는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종교의 기층으로부터 나왔으며, 정부와 제도 종교로부터 박해를 받았지만, 여성의 지도력을 거룩하게 보고 존중했던 종교들이었으며, 여기서 아시아 여성들은 우주의 리듬에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영성을 이루어 나갔다. “이제는 우리 아시아 여성들이 생명을 주는 선조 할머니들의 대중적 종교의 지혜를 재발견해서 강간 유형의 기술과 핵전쟁으로 인해 점점 더 위협을 받는 어머니 대지 위에서 생존해야 할 때다.”29)

 

세째로, 아시아 여성신학은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하고 종교간 대화를 하는 것을 넘어서 종교적 연대와 해방을 위한 민중들의 투쟁의 혁명적 실천으로 나아갈 것이다. 신성의 다양한 현시 속에서 다원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배타주의의 파시즘적이고 제국주의적 성향과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시아 여성들의 신학은 다른 아시아 여성들이 불의한 사회-정치, 종교-문화 구조를 변화시켜 우리 모두가 이 세상 안에서 철저한 상호성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힘을 주는 혁명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30)

 

넷째로, 아시아 여성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교리적 순수성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 생존-해방 중심적인 혼합주의(survival-liberation centered syncretism)로의 모험을 감행할 것이다. 아시아의 가난한 여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교리적 정통성이 아니라 그들 자신과 공동체의 생존과 해방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예수나 석가모니, 모하메드, 공자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의 인간됨을 주장하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는 생명력이었다. 아시아 여성들은 그들의 문화와 종교로부터 생명을 주는 요소들을 선택해서 새로운 종교적 의미를 살려냈다.”31) 혼합주의는 서구 신학자들에게 서로 다른 종교적 유산들을 아무 원치 없이 결합시키는 나태하고 무책임한 태도이다. 정현경은 마치 자신들만이 그리스도교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전통적 서구 신학자들과는 달리 아시아 여성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강요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민중들의 종교적 지혜에 의해 변화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옛 정체성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 참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로 그리스도 교회와 신학교들에 대해, 또 우리들 자신에 대해 힘든 질문들을 해야 한다. 누가 그리스도교를 소유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교는 불변한가?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참으로 아시아적이면서 동시에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이 되려면 우리 스스로 얼마나 자신을 열어야 하는가?”32)

정현경은 아시아 여성신학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희망적으로 전망한다. “아시아 여성들의 영성과 신학의 미래는 틀림없이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나 생명 중심으로 옮겨갈 것이다. 더 이상 우리 아시아 여성들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씨앗이 뿌려질 수동적인 밭이 아니라(이 상징은 아시아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특수하게 아시아적이며, 제3세계적이고 여성적인 우리의 특성을 담아 줄 새로운 영성과 신학의 탄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어머니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한’ 가난한 아시아 여성들의 투쟁에 힘을 불어넣어 줄 새로운 영성과 새로운 신학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33)

 

III. 90년대의 생태학적 신학의 출현

 

90년대에 접어들어 ‘생태계 위기(生態界 危機)’로도 표현되는 환경 파괴의 위협에 직면하여 하느님과 피조물 일반, 그리고 인간과 자연세계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여 ‘창조세계의 보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생태학적 신학’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신학사조가 형성되는 중이다.34)

 

1. 오늘날 환경오염이 악화되면서 자주 사용되는 ‘생태계(生態界) 위기’라는 말이 많이 거론된다. 생태학(生態學, oecology; Ökologie)은 어원상 ‘집’(οικοs)과 ‘학문’(λογοs)이라는 단어의 복합어로서 ‘집에 관한 학문’으로서 인간을 비롯한 만물이 생활하는 터전으로서의 환경과 인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를 구명하는 학문을 의미한다.35) 생태계 위기란 생활의 터전으로서의 자연환경이 파괴되면서 재난에 처해지게 된 인간과 다른 모든 생물의 처지를 뜻한다.

생태계 위기는 2000년대에로의 전환기인 현금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평가되고 있다. 지상의 생물들을 유해한 자외선, 우주선, 그리고 감마선 등으로 보호해 주는 성층권(成層圈)에서의 오존층의 파괴, 인구증가와 산업발전에 따라 증가하는 탄산가스나 메탄가스로 말미암은 지구의 온실 효과, 건강에 해로운 아황산가스의 농밀화로 말미암은 대기오염, 그리고 상수원과 지하수 및 해양 오염과 같은 수질오염 등이 부분적으로 치유 불가능한 단계로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1990년 3월 서울에서의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세계대회 공식 문서”는 생태계 위기상황을 충격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매분마다, 전세계의 국가들은 미화 천 8백만 달러를 군사무기에 소비하고 있다. - 매시간, 1500명의 어린이들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 - 매일, 한 종류의 종(種)이 멸종되고 있다... - 매달, 세계의 경제체계는 제3세계 국민의 등에 이미 짐지워진 1조 5천억 달러 (미화)의 엄청나게 감당할 수 없는 부채에 750억 달러를 추가하고 있다. - 매년, 한반도의 3/4정도 크기의 열대림 지역이 황폐화되고 있다. - 십년마다, 현재 전세계의 고온현상의 결과로 바다의 해수면이 1.5미터 정도씩 높아져 지구 특히 해안지역에 파괴적인 결과를 경고하고 있다.”36)

이 생태계 위기가 지구상에 있는 만물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라는 공감이 현금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있다. 그리고 적정한 해결책이 제시되어 광범위한 변화가 조속히 일어나지 않는다면 미구에 전인류의 ‘총체적 재난’의 파국적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도 전망되고 있다.

 

2. 오늘날 자연에 대한 인간의 그릇된 생활양식이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를 결정적으로 초래한다고 일반적으로 시인되고 있다.37) 현대 산업사회 안에서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지배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18세기 산업 혁명 이후 서구 과학-기술 문명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금세기 후반기 이래 소위 제3세계로까지 확대되어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인류 공동체의 ‘총체적 위기’로 파악되는 생태계 위기는 이를테면 ‘힘’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에 기인한다. 인간은 힘을 추구하는 자신의 욕구를 과학 기술을 통하여 실현시킨다. 그리고 현대  과학 기술 문명은 언급한 바와 같이 서구 세계로부터 400년 이래 발전되어 왔다. 서구세계가 금세기 초엽까지 과학 기술에 의한 자연정복에 열광하였음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현금의 생태계의 위기 발생에는 당시 서구 세계의 ‘지배적 가치’가 크게 작용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과학을 통한 자연의 대상화가 기술을 통한 자연의 이용, 더 나아가 착취를 초래하고 있음이 현실적 귀결이다. 현대 산업 국가들에 있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자연의 힘들의 소유와 자원의 착취를 통한 지배의 관계이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과학과 기술을 통한 자연의 지배능력은 엄청나게 증대되었다. 그러나 자연 지배 능력의 증대와 함께 인간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정비례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자연 지배의 능력이 증대되면서 인간 생명마저 경시(輕視)하는 개탄스러운 풍조가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생태계의 파괴 과정이 힘을 추구하는 욕망이 통제되지 않는 사회에서 급속도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 과정들은 서로 의존하며, 서로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욕구 충족과 함께 요구가 증가한다. 증가하는 요구들은 증가하는 생산의 추진력이다. 과소비 현상이 그치지 않고 확산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생태계 위기를 악화시키는 소비성 생산을 촉진시키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3. 금세기 중엽까지 서구사회를 지배해 온 가치체계가 성서-그리스도교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자연의 정복이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전승되어 온 하느님과 세계의 구분에 의하여 종교적으로 정당화되었음이 역사적 사실이다. 서구 그리스도교계의 신앙이 오늘의 생태계 위기에 대하여 공동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서구 출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도 오늘날 시인되고 있다.38)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신앙은 인간과 자연세계의 피조물성을 분명히 하고 그의 능력과 자연자원의 한계를 드러내게 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케 하는 데에서 오늘날도 여전히 정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하느님과 창조물의 관계를 ‘지배자적 군주(君主)와 피지배자적 종(從)’의 관계로 파악해 온 전통적 서구 그리스도교의 ‘유일신론적 신관’이 오늘날의 역사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 적절하지 못함이 드러난다. 과거 서양사회에서 거의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러한 신관이  인간에 의한 인간지배와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를 재가하고 정당시한 점에서 하느님에 의한 인간과 세계의 해방적 구원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현금의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관건이 되는 문제는 인간에 의해 인식되고 지배되며, 이용될 수 있는 자연을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로 이해하고 자연과 새로운 친교적 관계를 맺는 일이다. 지구를 포함한 자연세계가 자체 안에 조화와 균형을 갖추고 있음은 학문세계에서 주지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주의 질서도 인간 존재 자신도 스스로의 힘으로 생성되지 않고 하느님에 의하여 생성되었다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리스도교적 하느님 신앙이 오늘날의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는 데 관건이 되는 사고와 행동양식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힘을 간직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러한 취지에서 하느님과 창조물 사이의 관계, 그리고 같은 창조물로서의 인간과 자연 세계의 상호 관계를 새롭게 파악하는 생태학적 신학이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생태학적 신학의 기본통찰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39) 그리스도교적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은 하느님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불가분리적인 관계로 파악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세계 안에 거하며, 세계가 하느님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 자체임을 믿는다. 세계의 창조 속에서 하느님은 피조물들 안에 임재하면서 기쁨과 고통 속에서 모든 피조물들과 결합되어 있다. 하느님이 창조세계 안에 임재하여 있다면, 그분의 인간과 자연세계와의 관계는 더 이상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친교의 관계’로서 이해되게 마련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만물이 하느님에 의하여 삼투되고 있으며, 모든 것은 고유한 양식으로 서로 안에서, 서로를 위해서, 서로로부터 산다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 확신이다.

이와 같은 창조 신앙은 인간에게 자신을 창조의 일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하늘과 땅이 인간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인간이 ‘창조의 왕관’이라는 상념이 성서적 전통이라고 오랫동안 주창되어 왔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은 창조에 있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연의 소유주일 수 없다. 인간 역시 자연 세계와 함께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자연 세계가 인간의 소유물일 수는 없으며,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관리해야 할 실재이다.  이처럼 생태학적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 안에서 창조물이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과 그리고 상호간에 평화로운 공존상생의 삶을 영위하도록 소명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IV. 전망

 

2000년대에로의 전환기에 즈음하여 6,70년대 이래 형성되어 한국 신학계에도 알려지고 영향을 미치는 신학의 동향을 간략히라도 소개하고자 시도하였다. 여기서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등장한 신학노선들에서 나름대로의 취지와 특징이 드러난다.

 

1. 60년대초까지 신학계는 과학과 기계기술의 발달에 의거 약동적으로 발전하는 면모를 보이는 현대의 낙관적 사회조류를 근세 이래 금세기 초까지 보여준 자세처럼 단죄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세계의 원천이자 중심이요, 정점으로서의 그리스도상 안에로 통합시켜 비추어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평가하는 극적 자세변화를 보여 주었다. 이 입장은 미완으로 그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진화론적 그리스도관이나 치밀하고 정교하게 정립된 칼 라너의 인간학적 초월신학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이래 선진 구미세계에서는 과학기술 문명에 의해 이룩되는 성장의 한계에 대한 통찰과 산업사회가 지니는 비인간성에 대한 비판이 프랑크푸르트 사회학파를 중심으로 예리하게 가해지는 한편, 극도의 정치적 부자유와 경제-사회적 불의로 특징지어지는 소위 제3세계에서의 냉혹한 소외 현실에 대한 자각이 일부 서구 신학자들과 제3세계 신학자들에게서 일기 시작하면서 그리스도 신앙의 관점에서 정치-사회적 소외를 지양하려는 현실 참여적 신학 사조가 신학계 전면에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희망의 신학, 정치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사조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구인들에 의해 ‘제3세계’로 통칭되는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교회 안에서 그동안 일방적으로 신학계를 지배해 온 서구신학의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고유한 신학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해방신학으로, 아프리카에서는 토착화 신학으로, 아시아에서는 토착화 신학과 종교해방신학의 형태로 구체회되어 나타난 것이다.

80년대에 그동안 이룩된 사회발전에 기인한 여권신장에 입각하여 신학계에도 여성신학이 등장하여 기존신학의 가부장적 성격을 비판하면서 신학의 새로운 정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다원화되어가는 사회추세에 부응하여 종교다원화에 대한 각성이 확산되면서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20세기가 끝나면서 냉전기류가 소멸되면서 더욱 크게 부상한 우주적 재앙으로서의 ‘생태계 위기’에 직면하여 신학계는 원천으로부터 신학의 기본입장을 새롭게 정립하라는 시대적 과제를 부여받기에 이른 것이다.

 

2. 우리는 불과 5년 후에 또 하나의 새로운 세기이자 새로운 천년대를 맞게 된다. 한국 교계와 신학계는 거시적 안목을 가지고 이 역사적 전환기에 ‘시대의 징표’에 부응하여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상호 관계에 관하여 포괄적이면서도 심도있게 숙고하는 가운데 체계적으로 신학화하고 민족과 인류의 보다 밝은 앞날을 이룩하기 위해 알찬 결실을 맺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와 신학계가 이 시대적 과업을 올바로 수행할 때에 다음의 기대어린 말이 바로 우리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빛은 동방으로부터!”(Lux ex Oriente).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http://www.kcti.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