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신학!! 자유주의 !! 기타!!

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 정준모 목사

하나님아들 2020. 6. 13. 18:59

[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① WCC 역사와 신학] ‘오직 성경’ 최후 보호막마저 열었다
정준모 목사(대구성명교회·대신대 교수)

2010년 01월 19일 (화) 15:43:04 기독신문 ekd@kidok.com
▲ 정준모 목사

제10차 WCC 총회 부산 유치가 결정된 뒤 한국교회가 혼란에 빠졌다. WCC가 종교다원주의라는 성명서가 잇따라 발표되고, 심지어 WCC 총회를 반대한다는 입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본지는 WCC의 역사와 신학은 물론 종교다원주의와 개혁신학 등을 살펴보고 한국교회가 나갈 방향을 설정하고자 정준모 목사의 특별기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편집자 주〉

1. 들어가는 말

지난 해 9월, 제10차 WCC 총회가 대한민국 부산 개최로 선정된 이후 한국 교계의 신학적 뜨거운 감자로 이슈가 된 것은 바로 WCC에 대한 상반된 입장들이다. 본 교단 94회 울산 총회에서는 WCC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있었고, 이에 따른 10차 WCC 총회 대책위원회 구성, 세계개혁교회협의회 추진위원회 구성, 한기총 후보의 WCC에 대한 상반된 입장으로 파생된 갈등, 고신 교단을 비롯한 보수교회의 반대성명서 등 교파 간 큰 회오리 바람이 일고 있다. 우려되는 사실은 3년 이후 다가오는 제10차 WCC 총회를 앞두고 1959년에 있었던 보수, 진보 양측의 편가르기 악몽이 되살아날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최소한 신학적, 교회적, 선교적 대립 양상을 자숙하며 성숙된 신학적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들이 사전에 마련되어야 하겠다. 이런 목적과 입장에서 본고는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본 WCC 태동 이래 현재까지 역사적 발전과정과 그 신학적 입장, WCC의 종교 다원주의 입장과 그에 대한 개혁신학의 비판,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 연합 운동 그리고 한국교회의 교회 연합 운동의 현주소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2. WCC의 역사적 개요

WCC(세계교회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s)는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8년 8월 23일부터 9월 24일까지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구의 희랍 정교회를 제외한 대다수의 서구 프로테스탄 교회들이 모여 초교파, 범교회적 대표회의로 발족되었다. 세계교회협의회 헌장에 WCC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란 성경을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친교(Felloship)이다. 그러므로 세계교회협의회는 한분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을 위한 공동의 소명을 함께 성취하려고 노력한다”라고 되어 있다. WCC는 1948년 암스테르담 1차 총회 이후 지금까지 매 7~8년마다 총회가 개최된다. 현재 유럽, 남북미,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태평양 지역 110여 개국 정교회, 성공회, 장로교, 감리교, 루터교, 개혁교회, 오순절교회 등 349개 교회·교파·교단들이 가입해 있으며 5억 8000만 기독교인들의 대표적인 연합기관이 되었다. WCC 운동을 역대총회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1차 총회-‘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Man's Disorder and God's Design)’이란 주제로 1948년 네델란드 암스텔담(Amsterdam)에서 147개 회원 교단 351명이 참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무질서한 인간 세계를 하나님의 계획적인 다스림이 필요하다고 전제하 ‘국제난민국제기구’를 발족하였다. (2) 제2차 총회-‘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희망(Christ the Hope of the World)’이란 주제로 1954년 미국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Evanston)에서 161개 회원 교단 502명이 참석하였다. 세계평화 주창이 주된 내용이었고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을 극대히 표명하였다. (3) 제3차 총회-‘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Jesus Christ -the Light of the World)’이란 주제로 1961년 인도 뉴델리(New Delhi)에서 198개 회원 교단 582명이 참석하였다. 그리스도의 보편성을 주장하면서 종교 혼합주의, 세속주의, 용공주의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4) 제4차 총회-‘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니(Behold, I make all things New)’라는 주제로 1968년 스웨덴 웁살라(Uppsala) 235개 회원 교단 904명이 참석하였다. ‘인종차별’, ‘해방’, ‘경제 및 사회 정의’으로 강조하는 ‘인간화’, ‘새 인간성’ 실현을 촉구하였다. (5) 제5차 총회-‘자유케 하시며 하나되게 하시는 그리스도(Jesus Christ Frees and Unites)’라는 주제로 1975년 케냐 나이로비(Nairobi)에서 286개 회원 교단 747명이 참석하였다. 사회 및 정치적 해방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인권, 성, 인종차별 등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또한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베풀고 대화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WCC 총회 대변인 ‘로버드 브라운’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슬림, 힌두교, 불교, 공산주의자들의 말도 들을 수 있는 때가 왔다”라고 하였다. (6) 제6차 총회-‘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Jesus Christ-the Life of the World)’이라는 주제로 1983년 캐나다 밴쿠버(Vancouver)에서 300여 교단 930명이 참석하였다. 또한 이방종교 대표자들, 천주교 사제들과 바티칸 기자단 등 820명과 소련 대표 61명과 다수의 동구 공산권 대표들 등이 참석하였다. 제1세계인 서방과 제3세계인 후진국가 간의 평화와 정의의 갈등 문제 해결이 핵심의제가 되었다. 나이로비 총회 때보다 더 혁명적이고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급진적 성향을 띄었다. (7) 제7차 총회-‘오소서, 성령이여-만물을 새롭게 하소서(Come, Holy Spirit-Renew the Whole Creation)’라는 주제로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316개 회원 947명이 참석하였다. 구 소련 및 동구 공산권 붕괴로 탈 이데올로기 상황에서 ‘화해’의 색채가 강하게 나타났으나 반자본주의, 반서방주의를 강하게 표출시켰다. 또한 일치의 영, 타종교와의 화해와 마르크스주의 신봉자와 만남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특별히, 이 때 논의 된 성령은 삼위일체의 성령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 때 주장된 성령은 압제받고 고통받는 모든 ‘민중들의 영’을 대변하는 ‘영’이었다. 이 때, 한국의 정현경은 흑인 영성의 영, 무당들의 영, 토착민의 영, 순교당한 영들을 불러가며 ‘초혼제’를 드려 억울하게 죽은 영들을 달랬다. (8) 제8차 총회-‘하나님께로 돌아오라-소망중에 기뻐하라(Turn to God-Rejoice in Hope)’라는 주제로 1998년 짐바브웨(구, 로디지아) 하라레(Harare)에서 340개 회원 교단 960명과 5000여명의 옵저버가 참석하였다. 21세기 에큐메니컬 운동의 정체성과 교회 일치에 대한 논의가 주요의제였다. 그러나 상호간의 신학사상과 교리의 차이로 긴장과 갈등을 보였고 동성애 및 일부다처주의 허용하는 등 성 문제를 두고 천태만상의 논쟁이 있었다. (9) 제9차 총회-‘은혜 중에 계시는 하나님, 세계 변혁(God in your grace, transform the World)’이란 주제로 2006년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Porto Alegre)에서 348개 교단 4000여명이 모였다. ‘기독교 연합 일치’, ‘예전 의식의 일치’, ‘사회 경제 정의’, ‘종교다원화’, ‘청소년 폭력’ 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10) 제10차 총회-2013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3. 개혁신학과 WCC의 신학 : 평가 및 비판

성경관 문제 : 오직 성경 중심에서 전통수용으로 변질-개혁주의 성경관은 성경은 절대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학과 신앙의 객관적 원리임을 믿고 고백한다. 그러나 WCC 성경관은 범교단, 초교파, 종교다원주의 수용과 포용으로 성경만을 신학과 신앙의 절대 유일한 표준으로 삼는 절대 기초 교리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WCC는 신학적 포용주의 입장에서 성경뿐만 아니라 각 교단과 종교의 ‘전통’까지도 인정하고 수용한다. 이것은 상대방 입장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인본주의 발상으로 오직 성경이라는 개혁주의 전통을 외면하고 신학과 신앙의 최후 방파제에 종교다원주의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수문을 열리게 하였다. 더욱이 WCC가 출간한 〈성경과 타종교인들〉(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 1985) 책에서 저자 웨슬리 아리아라자(전 WCC 종교간대화워원회 의장)은 “절대적 의미의 진리는 어느 누구도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들을 성 요한과 성 바울과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하여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외면하였다.

구원관 문제 : 그리스도 중심에서 신 중심의 보편구원론으로 변질- WCC 구원관은 전통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고백과는 다르게 변질된 신(神) 중심의 구원론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적 문화 상황 속에서는 예수로 나타나지만 타문화권에서는 부처, 브라만만의 범 사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71년 WCC의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의 위원장인 인도 신학자 스탠리 J. 사마르다(S.J. Samartha)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 신앙은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기에 사람에게 강요되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989년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의 산안토니오 대회에서 총무 스톡웰은 타종교속에서도 하나님은 발견될 수 있으며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또한 1983년 WCC 제6차 밴쿠버 총회를 거치면서 타종교회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타종교에서 신중심으로 구원을 주장하면서 포괄적인 종교 혼합주의와 보편구원론을 가져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관이 급속도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선교관 문제 : 영혼 구원 복음 선교에서 사회 정치 선교로 변질-선교목적으로 시작된 에큐메니컬 운동이 점점 정치선교로 변질되었다. 순수한 복음 선교 목적 혹은 우선순위보다 사회봉사 중심의 선교로 변질하였다. 1968년 제4차 웁살라 총회를 방문했던 우탄트 유엔 사무총장은 WCC의 토의 내용에 UN의 토의 내용과 같으므로 서로 협력하자고 제안할 정도이다. 에딘버러 대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구원받은 사회질서 구현’으로 보았다. 선교는 단지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에 대한 제도개혁 우선순위를 둔 사회정치 선교로 변질되어 버렸다. WCC는 자본주의 병폐인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적 불의를 심각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인식하고 이웃 사랑과 사회적 책임의 차원을 넘어 해방신학의 선교 개념과 몰트만 식의 구원개념을 추구하고 있다. WCC는 세계 현존 문제 즉 환경, 인권, 핵, 전쟁, 테러, 폭력 등 인간 사회의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속화 신학과 사회 참여를 강조하였다. 네덜란드 선교 신학자 호켄다이크(J.C. Hoekendijk)는 〈흩어지는 교회〉 저술과 1968년 제4차 웁살라 총회를 통해 세속화 신학과 교회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였고 복음을 사회복음으로, 구원을 인간화 해방으로 발표하고 주장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유일한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용서와 구원, 영생과 천국 복음을 주창하는 개혁신학과 정통신학과는 동떨어진 신학적 발상이라고 본다.


[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② WCC 종교다원주의와 개혁신학] 타 종교는 품어도 ‘절대 진리’는 부정
정준모 목사(대구성명교회 대신대 교수)

2010년 01월 26일 (화) 10:59:49 기독신문 ekd@kidok.com

1. WCC 종교다원주의 역사적 발전
(1) 1948년의 제1차 암스텔담 WCC 총회: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연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교회간의 협력을 통하여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긍정적 면이 있었으나 명확한 신학적 교리적 진술이 선행되지 못하여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취할 여지를 남겨 놓게 되었다. (2) 1961년 제3차 인도 뉴델리 WCC 총회: 타종교를 다른 신앙체(Other Faiths)로 보고 그들과 대화(Dialogue)를 통하여 효과적인 복음 전달 방법을 소개하였다. 또한 이때, IMC를 WCC에 통합하여 세계선교와 전도분과 위원회를 창설하였다. 그 결과 선교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무시하게 됨으로 선교 사역의 위축을 가져오게 되었다. (3) 1968년에 WCC가 발간한 책 〈타자를 위한 교회와 세상〉책자에서 ‘그리스도의 현존’(Christian Presence) 개념을 도입하여 세상 속에서 살롬을 구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모든 세속기관과 타종교인들의 삶속에서 그리스도가 우주적 주님(Cosmic Lord)으로 현존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분의 뜻에 교회는 세속기관과 타종교인들과 함께 순종해야 한다고 하였다. (4) 1968년 제4차 스웨덴 웁살라 WCC 총회: 성령의 일반적 역사와 구속적 사역을 구분하지 않고 일원화 시키고 기독론은 수직적 차원에서 신학적이고 신앙고백적 기독론 즉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을 배제시키고 수평적이고 인본주의적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인간성의 모델로 제시하였다. (5) 1973년 방콕 세계선교와 전도 분과 대회: 웁살라에서 제기된 WCC의 선교 신학 정립을 위한 모임이었다. 이 때, 구원을 죄와 사망과 사탄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구원의 총체성을 강조하면서 개인과 사회 구조속의 압박에서 총체적으로 해방되어야 된다고 보았다. 이는 남미의 해방신학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또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로서 타종교간인에게 일방적 선포와 충돌이 아닌 대화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방콕대회는 선교개념을 하나님의 구원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세속기관과 타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종교적 혼합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로 향하게 되었다. (6) 1975년 제5차 케냐 나이로비 WCC 총회: 복음의 총체성을 논하면서 전인적 인간, 온 세상, 전체 교회를 논하였다. 개종없는 선교는 무의미하고 혼합주의는 배격한다는 등 복음적인 진술이 선명하고 진술되었다. 그러나 혼합주의를 배격한다고 하면서 타종교인의 영성을 인정하고 그 영성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WCC 중앙위원회 의장인 엠 엠 토마스((M. M. Thomas)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Christ-centered Syncretism)를 주장하였고, 모티머 아리아스(Mortimer Arias)는 불신자속에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우주적 그리스도의 개념을 주장하면서 종교 혼합주의 내지 종교 다원주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WCC 총회 대변인 로버드 브라운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슬렘, 힌두교, 불교, 공산주의자들의 말도 들을 수 있는 때가 왔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개혁주의 및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제5차 WCC 총회는 인간 중심적, 삶의 수평적 차원만 강조하는 신학적 노선을 따르므로 WCC의 신앙 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하였다. (6) 1980년 멜버른 세계선교와 전도분과 대회: 하나님은 교회로 하여금 투쟁하는 인간들 가운데 살게 하신다고 보았고 종교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권리 그리고 사회정의를 갱신시키고 평화와 해방을 가져온다면 하나님이 이미 그곳에 일하고 계신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말씀을 통한 전도보다 선행를 통한 전도를 강조하고 인간 불행의 근본 문제인 죄에 대한 복음적 치유와 회복보다 현세의 삶의 구조 개혁과 제도적 악을 타파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7) 1983년 제6차 캐나다 밴쿠버 WCC 총회에서는 중요한 신학입장이 담긴 두 종류의 문제 즉, ‘세례, 성만찬, 직제’(BEM)와 ‘선교와 전도:에큐메닉 입장’(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 등이 발표되었다. 이 문서는 수직적 신앙고백보다 수평적 친교교제를 강조하는 경향이 매우 짙게 드러났다. 본 총회에서는 이방종교 대표자들을 초청하였고 나이로비 총회 때보다 더 혁명적이고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급진적 성향을 띄었다. (8) 1991년 제7차 호주 캔버라 WCC총회: 일치의 영, 타종교와의 화해와 맑시즘 신봉자와 만남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특히, 성령은 삼위일체의 성령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 때 주장된 성령은 압제받고 고통받는 모든 ‘민중들의 영’을 대변하는 ‘영’이었다. 이 때, 한국의 정현경은 흑인 영성의 영, 무당들의 영, 토착민의 영, 순교당한 영들을 불러가며 초혼제를 드려 억울하게 죽은 영들을 달랬다. 이는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한 것 뿐 아니라 종교 혼합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9) 1998년 제8차 짐바브웨 하라레 WCC 총회에서는 21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과 교회 일치에 대한 논의가 주요 의제였으나 상호간의 신학사상과 교리의 차이로 긴장과 갈등을 보였고 동성애 및 일부다처주의를 허용하는 등 성 문제를 두고 천태만상의 논쟁이 있었다. (10) 2006년 제9차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 WCC 총회에서는 ‘기독교 연합 일치’, ‘예전 의식의 일치’, ‘사회 경제 정의’, ‘종교다원화’ 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2. 종교다원주의 발생 역사와 오늘의 실상

종교다원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서구 기독교와 그 문화에 대한 반발 혹은 상대화 되어버린 역사적 상황 속에서 나온 자유주의적 종교 신학 운동이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 역사 초기인 초대 교회 시대 때부터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로고스에 대한 헬라 철학과 기독교 연속성 문제,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의 기독교와 타종교의 연속성 주장, 필로의 로고스와 성령 동일 사상, 알렉산드리아 영지주의자들의 기독론, 네스토리안의 기독교 불교화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이성에 근거한 종교론이 부상되면서 데카르트의 이성에 근거한 종교, 스피노자의 범신론주의, 영국의 자연신론의 종교적 보편주의, 이성과 과학의 조화를 주장하는 자연종교로 주장하였다. 루소의 자연과 감성, 흄의 경험과 관찰, 칸트의 실천이성 등에서 종교의 본질을 찾게 되었다. 트럴취의 종교사학파, 폴 틸히리의 문화신학, 비평주의, 다윈이즘, 비교 종교학 등 후기 계몽주의 독일 신학자들에 의하여 종교다원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현대신학에서 종교다원주의는 어네스트 트럴취, 폴 틸리히, 스미스 등에 의하여 기독교 절대주의 거부 및 상대주의 주장으로 일어났다. 현대 기독교 종교다원주의 사상은 1961년 WCC 제3차 뉴델리 총회 때부터 현대 종교다원주의 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칼 라너(Karl Rahner)의 ‘익명의 그리스도론’,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의 ‘보편적 그리스도론’, 존 힉(John Hick)의 ‘신중심의 신학’, 폴 니터(Paul F. Knitter)의 ‘신중심주의 그리스도론’, 웰프레드 스미스(Wilfred C. Smith)의 ‘신앙체험주의’, 스탠드 사마르타(Stanly Samartha)의 ‘타종교와 대화론’, 존 캅(John Cobb)의 ‘그리스도 중심의 변혁적 다원주의’, 로버트 벙크(Robert Funk)의 ‘예수세미나’ 등의 신학과 주장과 논리에서 종교다원주의가 수용, 확산, 정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종교다원주의는 유동식의 ‘범신론적 기독론’, 변선환의 ‘우주적 그리스도론 중심의 혼합주의’ 김경재의 ‘등정로 이론’, 홍정수의 ‘포스트모던 신학’, 길희성의 ‘보살예수론’, 김승철의 ‘탈구조주의 종교다원주의론’ 등이 있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범람으로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심각한 도전과 진리의 손상을 입고 있다.

3. 개혁신학과 종교다원주의: 개념, 정의 및 비판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개념과 의미
베른하르트(Bernhardt)는 “종교다원주의는 종교적 중심성을 타종교를 목적격으로 이해하지 않고 주격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서철원은 종교다원주의를 “기독교만의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고등종교가 다 절대자에게 이르는 동일한 길이어서 기독교는 그 종교들 가운데서 하나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았다. 김영한은 종교다원주의는 “단순히 종교문화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차원을 넘어서 성경적 신관,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을 상대화시킴으로 기독교 핵심 진리를 왜곡 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박용규는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전통문화 혹은 타종교와 융합시킴으로써 복음의 본질이 변질, 왜곡, 세속화시켜 기독교 유일신앙을 파괴하는 반기독교는 운동”으로 보았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는 절대 기독교 진리에 대한 반신학적 사상과 운동으로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고 궁극적 목적을 동일하다고 보는 보편구원론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 기독교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 고백, 니케야 신조(325년), 칼케돈 정의(주후 451년) 등에서 채택되고 고백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부정하고 다양한 종교들이 모두 동등한 구원의 길을 가진다고 본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하고 보편적 그리스론을 주장하거나 신중심의 신학을 주장하는 종교신학에 발생된 다원화 신학사상이다.


개혁신학과 종교다원주의:신학적 평가와 비판


개혁신학과 종교다원주의:신학적 평가와 비판타종교에 대한 입장은 다원주의, 포용주의, 배타주의 등으로 크게 구분해 볼 수 있다. (1) 다원주의(pluralism)는 계시의 근거를 성경보다 종교 경험에 근거를 두고, 성경은 타종교에 대하여 구속력이 없고, 성육신 교리를 신화의 산물로 보고,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고, 모든 종교의 명목상 신을 수용하는 입장으로 개혁신학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비성경적, 반성경적, 반사도신경고백적, 반정통적, 반역사적 기독교 주장이다. 2) 포용주의(Inclusivism)는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의 특별원리도 인정하지만 이런 구원의 원리가 모든 종교에도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란 주장을 부인하고 예수그리스도도 구원의 길의 한 종류이면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포용주의는 보편구원론, 만인구원론, 사후 전도, 익명의 그리스도인 구원 등 개혁신학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신학원리를 주장한다. 3)배타주의(Exclusivism)는 일명 제한주의(Restrictivism)으로 오직 성경 중심, 오직 그리스도 중심,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천하에 구원을 얻는 길은 예수 밖에 없다”는 개혁신학의 입장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개혁주의 신학을 배타주의라 칭하며 신학과 구원에 있어서 독선 혹은 광신을 부르짖으나 사실은 개혁주의는 ‘성경절대주의’, 혹은 ‘그리스도의 유일주의’이다.

[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③ 개혁신학과 교회연합운동] 칼빈 교회관 중심은 ‘연합과 일치’
정준모 목사(대구성명교회·대신대 교수)

2010년 02월 01일 (월) 11:10:00 기독신문 ekd@kidok.com


교회 연합과 일치는 WCC 전유물인가? 교회 연합과 일치 그 자체는 비성경적이고 반개혁신학 운동인가? 개혁신학입장에서 교회 연합과 일치의 기준과 방향은 무엇인가?


1. 개혁교회 역사 뿌리와 교회연합 운동

1529년 말부르크 첫 개신교 교회 연합 종교회의
개신교 첫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종교회의가 1592년 독일 헷세에서 개최된다. 당시 회의에 대표적인 신학자들이 대부분 참석하였고 교황으로부터 파면을 당한 루터도 죽음의 위협을 무릅 쓰고 참석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최초의 개신교 종교회의는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은 상호간의 지나친 불신이었고 그 중심에는 루터의 선입견이 있었다. 그는 스위스와 독일 남부 개혁자들과 교회에 대하여 “우리와 다른 영을 가진 자”들이라고 선언하면서 매우 불신적이고 적대감정을 가지게 된다. 루터는 이러한 신학적 적대감정 때문에 비텐베르그 개혁의 귀한 동지 교수였던 칼슈타트와 분열(1521~1522)되는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또한 농민들의 혁명적 봉기(1524~1526)와 인간 의지에 관한 논쟁으로 그 귀한 믿음의 동지인 에라스무스와 결별(1524~1525)의 역사적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루터는 로마교 추종자가 아닌 개혁을 추구하는 동반자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가르침이나 입장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 자들을 ‘광신자’(schw mer)로 비판하고 경멸하는 불행한 일을 자행하였다. 루터의 지나친 신학적 배타성 때문에 최초로 시도되었던 개신교 연합과 일치를 위한 종교회의는 안타깝게도 결렬되었다.

부써: 개혁교회 연합 운동의 열정적 헌신자
1959년 말부르크 첫 개신교의 교회 연합과 일치의 실패 현장을 목도한 부써는 교회의 하나됨이 교회의 본질임을 깨닫고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헌신적 노력과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와 몸이기 때문에 결코 둘이 될 수 없다는 교회의 일치에 대한 강력한 입장을 가진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그리고 세상적으로 한 몸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루터와 그의 동료들을)을 우리의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강하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교회의 하나됨을 주장하였다. 교회 연합과 일치에 대한 부써의 끊임없고 끈질긴 노력으로 1536년 루터와 합의하여 〈비텐베르크 일치신조〉(Wittenberger Konkordie) 결실을 맺게 된다. 부써와 루터는 지난 1529년 말부르크 회의에서 일치를 보지 못한 성찬론에 대한 신학적 입장들에 대하여 합의점을 돌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과 일치 운동이 북부독일, 남부독일 그리고 스위스까지는 확대되지 못한 안타까움을 남겼다. 그 이유는 첫째는 부써를 두고 ‘위대한 열린 정신’, ‘넓은 가슴’의 소유자라고 부써에게 극찬과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었던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 외콜람파디우스가 1531년 죽음을 맞이했으며, 둘째는 츠빙글리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가 그의 선임자보다 북부 독일의 신학자들에 대하여 부정적 시작을 가지고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대하여 츠빙글리와 달리 부써 입장을 이해하고 동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신하고 배척했기 때문이다. 후대 일부 개신교 역사가들은 부써를 ‘중재신학자’, ‘타협신학자’라고 맹공을 퍼붓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부써는 그리스도의 한몸을 역사적 상황에서 이루기 위하여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헌신과 열정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로 역사적 정황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칼빈: 개혁교회 연합 운동의 선구자
16세기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교회연합과 일치를 위한 쌍두마차격 두 인물은 바로 부써와 칼빈일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된 이후, 1538년에서 1541년까지 약 3년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체류하게 된 동기는 부써의 요청 때문이었다. 칼빈은 그곳에 프랑스 난민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였다. 이 때,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2판과 〈신앙교육서〉를 집필했다. 특별히 칼빈은 그곳에서 부써와 많은 교제를 나누면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 등 교회론에 대한 많은 도전을 받았다. 칼빈이 부써의 신학적 입장을 전적 동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칼빈은 부써를 가리켜 “이 시대에 가장 으뜸이 되는 그리스도의 종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극찬하였다. 종교개혁 역사가인 쨩 꾸르부와저는 “부써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칼빈이 있을 수 없다”라고 평가할 만큼 돈독한 관계를 잘 설명하였다. 칼빈은 1539년 멜랑흐톤을 만나 프랑크푸르트 종교회의에서부터 1541년 개신교와 로마교 사이의 일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교회 연합과 일치에 대한 칼빈의 열정과 노력으로 1549년 볼링거와의 〈취리히 일치신조〉(Consensus Tigurinus)를 작성 채택하여 스위스 지역 개신교 연합의 결실을 맺었다. 멜랑흐톤을 제외한 극우파 루터 후계자들은 스위스 개혁가들에 대한 극심한 반발과 칼빈에 대한 도전과 응수 때문에 칼빈의 의도와 전혀 관계없이 루터파 개혁교회들이 이탈함으로 교회 일치의 꿈이 무산되어 버렸다. 그 결과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 개혁교회와 루터파 교회 등 두 개의 큰 주류 교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라이프니치 대학의 교수인 칼 리컬은 〈개혁교회의 원리〉에서 “개혁교회의 창설자는 츠빙글리가 아니라 칼빈이다. 개혁교단은 칼빈적 제도이다. 츠빙글리주의는 독일과 스위스에 제한되고 성공회는 영국과 영국식민지에 제한된 반면 칼빈주의는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2. 칼빈의 교회연합과 일치 신학론

분파주의가 아닌 연합운동의 선구자 칼빈
칼빈에 대하여 독선주의, 분파주의, 파벌주의, 왜곡주의자로 오해하고 극한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칼빈 시대의 목회현장과 그의 교회론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진정한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 온 열정을 다 쏟았는지를 알 수 있다. 칼빈 저술가 빌렘 네이언하위스(Willem Nijenhuis)는 칼빈을 “개혁자 중 연합운동의 선구자”라고 다음과 같이 호평을 하였다. “칼빈은 그의 교회론을 통해 유럽교회의 종교개혁에 아주 특별한 기여를 하였다. 교회의 일치성과 보편성에 대한 신념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가견적 일치의 회복을 위해 지칠 줄 모르게 일하도록 하였다. 바로 이 점이 그로 하여금 개혁자들 중에 교회 연합 운동의 선구자가 되게 하였다.” 칼빈의 신학 사상의 보고인 기독교 강요 4권 1, 2장에 그의 교회 연합과 일치에 관한 신학적 입장을 잘 서술되어 있다.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 강요 4권 1장의 29개 항목 중에서 19개 항목에 걸쳐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거듭 강조할 만큼 그의 교회관 중심에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 사상이 굳게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칼빈은 참된 교회는 오직 하나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교회 연합과 분리의 신학적 기준: 오직 하나님 말씀
칼빈은 교회 연합과 분리의 평가 기준을 하나님 말씀으로 본다. 칼빈은 말씀을 떠난 교회, 말씀을 표지로 가지지 않는 교회를 이단적 교회, 배교적인 교회로 보고 이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교회분리(schism)로 보지 않았다. 칼빈은 개혁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톨릭 교회가 진리의 표준인 말씀을 떠나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떠나 새로운 형태로 분리되었다고 본다. 칼빈은 교황과 재세례파를 분파(Sects)로 단정한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를 교회의 절대유일한 토대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분파로 보았다. 그러나 참교회가 아닌 이단 집단, 이단 교리를 수용하거나 참된 핵심 교리를 부정하는 교회에서 이탈하는 것을 결코 분리로 보지 않았다. 칼빈은 로마가톨릭의 문제점을 그들의 악행과 부도덕 문제보다 하나님 말씀을 떠난 잘못한 신앙고백과 교리에 근거를 둔다. 칼빈은 그들은 신성한 진리의 빛이 끊어지고, 하나님 말씀이 파묻히고, 그리스도의 덕이 까마득히 잊어진 결과로 신앙에 대한 교리가 혼합되어 순전함을 잃고 의식들은 오류에 빠지고 거룩한 예배에서 사소한 부분까지도 미신에 더럽혀졌다고 질타하였다. 칼빈은 진리와 거짓을 분간하는 교회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 칼빈은 로마가톨릭 교회와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대전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 교회 연합과 일치의 근거를 찾았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연합과 일치, 교회순결과 분리의 토대로 삼았다.

칼빈의 교회 연합과 일치론
1) 칼빈은 교회를 ‘성도의 모임’으로 하나됨을 강조한다. “온 시대에 걸쳐 온 세계를 뻗쳐, 하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한 영(the one doctrine and the one Spirit of Christ)으로 결속된 믿음의 하나됨과 형제의 일치를 기르고 유지하는 모임이다. 이 교회 안에 불일치란 없다”(사돌레토에게 보낸 칼빈의 답신). 2) 칼빈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교리 즉 진리를 가장 중시한다. “이 교리에 대한 지식이 사라진 곳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끊어지고, 신앙이 없어지고, 교회는 깨어지고, 구원에 대한 소망은 아주 뒤집어진다.”(사돌레토에게 보낸 칼빈의 답신) 3) 칼빈은 순수한 교리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였다. “분열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가장 사악하고 가장 해로운 악이다…분열로 교회를 찢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하지 않으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거룩에서 단절되는 것에 동의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 낫다.”(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4권) 4) 칼빈은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 헌신적 열정을 가졌다. “우리 사이의 형제다운 우정을 강화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무엇입니까?…모든 기독교 교회가 참된 연합으로 일치 되는 것…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참된 사역자들과 연합과 친교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하나님이 전파되는 교회들이 신실하게 서로 일치되어야 합니다.”(볼링거에 보낸 편지) 5) 칼빈은 다음 세대에게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유산을 물려주고자 했다.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만나서 서로 다른 조항들에 대해 충분히 논의한 다음…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몇몇 특정한 규칙을 만들고자 합니다…이러한 목적을 위해 나 자신은 열 개의 바다를 건너는 것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분열된 교회들을 연합시키기 위해 성경의 권위와 무게로 작성하는 것이라면 나는 고초와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영국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에게 보낸 편지) 칼빈의 입장에 양면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이 허용한 문제들: 루터파 예배의식의 허용 문제, 우상숭배가 아닌 의식들에게 대한 낙스에게의 권면, 스트라스부르그 재세례파의 용납 등이 있다. 또한 칼빈이 허용하지 못한 문제들: 카스켈리옹 사건(1543), 제롬 볼섹 사건(1551년), 세르베투스 사건(1553)등을 들 수 있다. 칼빈은 교회 순결과 일치를 함께 중시한다. 진리의 순결을 외면한 연합과 일치에 분노할 것이며 연합과 일치가 없는 진리의 순결도 역겹게 생각할 것이다.


[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④ 한국교회 연합 운동의 방향] 본질 굳게 잡고 진리 안에서 일치 이뤄야
정준모 목사(대구성명교회·대신대 교수)

2010년 02월 09일 (화) 13:02:38 기독신문 ekd@kidok.com

▲ 정준모 목사
1. 개혁신학의 연합운동 원리

한국교회는 성장의 갈채 속에 분열의 상처가 크다. 한국교회사는 괄목할 숫적 증가 속에 뼈아픈 사분오열의 찢어진 자국이 깊다. 한국교회는 장로교는 물론 모든 교파가 분열 되었다. 현재도 진리가 아닌 교권주의, 지역주의 문제로 마치 폭력의 아수라장이 된 정계처럼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합동은 무엇이며 통합은 무엇인가? 예수교는 무엇이며 기독교는 무엇인가? 예수와 그리스도를 갈라놓은 이 분열의 현장에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자성의 매질을 스스로에게 할 때가 이미 지나지 않았는가?

진리 안에서 연합과 일치
교회는 진리의 순수성과 교회의 연합성이 항상 병존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진리를 훼손해서는 결코 안 된다. 칼빈은 잘못된 교리와 생활에 대항하는 싸움은 연합과 일치를 파괴하는 분리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하나됨을 보존하는 일로 보았다. 오토 베버(Otto Weber)에 따르면 칼빈은 개신교의 공통적 교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상호간 차이에 대한 관용적 입장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 연합과 일치는 진리가 왜곡되거나 이탈된 상황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오직 진리 안에서 진리를 근거로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 안에서 연합과 일치가 아니면 참된 연합(unity)이 아니라 획일적 일치(Uniformity)가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아닌 교파나 교단의 결정을 절대적 규준을 삼고 연합과 일치를 제한시키고 교류를 단절하는 등 극단적이고 폐쇄적 행동은 결코 개혁주의 신학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분별한 분리는 절대 불허용
칼빈은 참된 교회의 표지를 말씀과 성례로 보고 교회가 이러한 표지를 이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일이며 반역자요 배도자로 간주하였다. 물론 칼빈이 주장하는 교회의 표지는 칼빈의 시대의 정황이고 현 한국교회 상황에서 재조명되고 재평가되어야 할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날 진리를 주장하면서 진리가 아닌 독선, 아집, 편견, 왜곡으로 말미암은 교회 분리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개혁교회는 “가장 좋은 것은 모든 문제에 대하여 완전하게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신앙의 총체에 해가 되지 않고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용인해야 할 것이다…사소한 의견차이 때문에 분별없이 교회를 저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는 칼빈의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교단 우월주의 극복
교단 절대주의, 타 교단 배타주의를 극복하고 성경적 교회로 돌아가 하나 되어야 한다. 자신이 속한 교단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을 가지되 타 교단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관용과 이해를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의 분쟁과 분파는 다른 진리 때문에 갈등과 분리의 길을 걷기보다는 대체로 편협과 왜곡과 이해관계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이 교회사가들의 일반적 평가이다. 교회의 분열은 쉬워도 연합은 어렵다. 한번 분리되어 고착되어 버린 때에는, 다른 형제 교단으로 이해, 관용, 교류하기 보다는 이단적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부정적 입장들 때문에 다시 연합하기 결코 쉽지 않다. 또한 진리 문제를 제외하고는 타 교단의 정서, 입장, 특징을 최대한으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기 위하여 열린 자세로 상호 연대성을 가지고 연합과 일치를 위해 힘써야 한다. 그 좋은 역사적 사례는 26년 만에 이뤄진 합동 교단과 개혁 교단의 합동이다.

복음이 훼손되지 않는 종교 대화
1961년 WCC 뉴델리 총회, 1968년 웁살라 총회를 거치면서 종교다원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할 때부터 종교간 대화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1983년 WCC 밴쿠버 총회에서는 타종교인을 초청하여 종교간의 대화에 관한 신학적 주제 발표가 있었다. 더욱이 1990년 WCC 바아르 선언문(Baar Statement)은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면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공식 선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포기해버린 그들과 종교적 대화가 가능한가가 참으로 의문시 된다. 더욱이 WCC가 추구하는 로마가톨릭과 일치, 종교간의 대화를 넘어선 종교통합의 목표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타종교와 대화는 진리 교리와 복음 진리가 없는 인본주의적 만남은 결국 기독교의 꽃밭이었던 유럽교회가 황폐화되어 이제는 가장 절실한 선교 대상지역이 되어버린 그 비극적 역사 현장을 한국교회는 재현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1973년 WCC 방콕대회 이후 서구 제국주의 선교가 오히려 선교지를 억압했기에 이제는 더 이상 선교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선교 모라토리움(Moratorium)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위대한 선교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아름답고 위대한 하기아 소피아 교회당에 십자가가 사라지고 이슬람교의 초승달이 달려있는 모습이 내일의 한국교회의 투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역동성을 가진 개혁교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타 종교인들에게 복음의 위대성과 진취성을 가지고 열린 자세로 국가 현안문제, 남북통일, 사회봉사 등을 위하여 독선적 외골주의 내지 폐쇄적 절뚝발이가 되지 말고 열린 자세로 만남과 대화의 길을 열어 놓아야 된다. 그러나 숙지해야할 사실은 WCC가 주장하는 연합은 단지 참다운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뿐만 아니라 타종교까지 포함된 연합이다. 또한 WCC의 그리스도의 구원 개념을 기독론적 구원 즉, 십자가 복음과 죄 용서의 수직적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교 입장에서 사회구조악으로부터 구원인 수평적 차원에서 인본주의 연합일 뿐이다.


2. 신학적 경계선 선언: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차별화

한국 교계 내에서 복음주의라는 용어만큼 가장 신학적 전문용어로 애매모호하게 사용되는 말은 없을 것이다. 한국 교계에서는 현실적으로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신학적 입장이 가장 성경적이고, 정통적이고, 건전하고,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을 지향하고 있다는 방편으로 복음주의를 신학적 정립 없이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고착해 버렸다. 개혁주의라는 말을 쓰면 시대에 뒤 떨어지는 구식 같고, 자유 혹은 진보주의라는 색깔을 보이면 신학적 시비에 휩싸일 것 같아 신학적 회색지대를 서성거리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신학적 진보주의를 추구하고 내적으로 개혁신학 미온주의 내지 교권 내 겁쟁이들이 됐다. 이처럼 신학적 타협추구자들은 신학적 회색지대에 머뭇거리면서 복음주의라는 옷을 입고 결국은 세속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향하여 군침을 흘리고 있다. 이처럼 건전하고 건강한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한국 장로교 상황에서는 개혁주의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자유주의, 진보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이 신학적 중용주의자, 신학적 회색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의 “기독교의 가장 큰 위협은 반기독교 세력이 아니다. 이슬람이 아무리 칼을 들이 대도 기독교를 없앨 수는 없다. 아무도 불교가 기독교를 삼킬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시대마다 등장하는 타락한 기독교야말로 기독교의 생명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존재다”는 말을 뼈아픈 말로 기억하고 우리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목회자, 신학자, 성도들은 각성과 자성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위기: 신학교육의 재앙〉 이란 명저에서 꼬집은 존 리이스(John Leith)의 주장처럼, “교회 내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없는 것이다”는 말을 심각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미국 교회의 위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배제되고 포용주의와 다원주의 바탕을 둔 신학교육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신학교육이 정통교리보다 사회윤리, 사회참여, 인도주의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세상문화와 차별화된 명확한 기독교 비전을 갖지 못했고 교회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신랄하게 질타한 그의 결론을 한국교회는 겸손히 듣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메이쳔(John Gresham Machen)은 신학적 포용주의는 “적의 장수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 적과 내통하는 아군 병사이다. 의심받지 않는 가운데 어느 순간 성문을 열어주는 자이다. 이단자와 거짓교사와 자유주의 신학자는 정체가 뚜렷하기에 교회가 경계태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 또한 자유주의 기독교에 교회의 문을 개방하는 사람은 이단자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유해하다”는 경고는 작금 한국 개혁주의를 표상하는 교단내의 현실이 아닌가?


3. 제 10차 WCC 부산 총회: 갈등 극복 및 발전적 제언

한국교회는 2013년 부산개최 WCC총회를 마치 신이 내린 축복처럼 들뜬 축제로 이끌어가는 진보측이나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로 시위를 하고 집회장을 탈취하는 등 세상 사람들에게 진부하거나 추악한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가 급선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신학적 과업이요 작업이다. 또한 목회자와 성도들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교육과 이해가 요청된다. 교단적으로 우리의 개혁주의 신학의 탁월성, WCC 신학의 문제점, 한국교회의 복음 전도 사명 고취를 위한 특별 교육과 기도 운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복음적인 개혁주의, 개혁주의적 복음주의를 주장할 만큼, 한국 개혁신학에는 앞뒤에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형용사가 붙어야만 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 정통적,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의 탁월하고 역동적인 신학임이 분명하다. 다만 그 고귀한 신학은 세속화되고 타락한 교권주의들이 스스로 개혁의 원리에 따라 개혁되어져야 개혁신학과 개혁교회의 진면목이 되살아날 것이다. 정통 개혁신학은 결코 현실과 역사의 실제성과 현실성을 외면한 채 과거집착의 복고신학이 아니라 구체적 역사 현실에서 성경 진리와 복음의 역동성을 구체적으로 삶의 정황에 적용시켜 하나님 나라가 현재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변혁적, 역동적, 진취적 신학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교파를 초월하여 진정한 교회 연합을 추구하려면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간구하셨던 ‘대제사장 기도’를 묵상하고 명심하여야 하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