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비판-1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학적 자유주의화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아주 무서운 이단 사상인데, 이러한 이단 사상이 오늘날 개신교(Protestant)의 역사적 대교단들 속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한 기본적 특징은 성경의 신빙성과 그것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하는 데 있다. 자유주의는 또한 하나님의 진노하심, 즉 그의 형벌적 공의의 속성을 부정하며,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및 처녀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형벌적 대속, 그의 부활, 그의 재림 등을 부정한다.
이러한 사상은 명백히 이단이다. 예수께서는 성경을 폐할 수 없다고 친히 단언하셨다(요 10:35). 또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은 홍수심판 때부터 증거된 성경의 기본 교리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사상은 적그리스도의 사상이며(요일 4:2, 3), 초자연적 사건들의 부정은 사두개인들의 오류이었다(마 22:29). 또한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을 부정함은 복음의 핵심을 부정하는 것이요(롬 3:24, 25), 그의 부활과 재림을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적 신앙의 핵심(롬 10:9)과 근본적 소망의 내용(계 1:7; 22:20)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는 참된, 불변적 교리들 위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바른 교리들을 보수해야 하고 이러한 이단들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1:13, 14, "너는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 안에 용납될 수 없는 이단 사상이다.
* 목차
자유주의 신학의 근원은 무엇인가?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에 대해 맹목적으로 순종해야 했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가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와 이성의 권위를 발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비평적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소위 성경의 고등비평이라고 불리우는 연구 방식이었다. 과학의 발달과, 촬스 다윈이 주창한 진화론의 등장 등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회의적인 눈으로 보게 하였다. 더욱이,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세계와 및 창조와 종말에 대한 지식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한 칸트(Kant)의 지식론은 지성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쉴라이엘마허와 릿츨과 하르낙 등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던 불신앙적인 신학 사상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밥죤스 대학교의 스튜어트 카스터 박사는 그것들을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표는 본서에서 인용된 인물들임.)
1. 구(舊)자유주의 - Adolf Harnack, Harry E. Fosdick, Henry P. Van Dusen, L. Harold DeWolf,
Nels F. S. Ferre
2. 후(後)불트만 학파 - *Rudo Bultmn, Hans Conzelmann, Erich Dinkler, Ernst Käsemann,
Günther Bornkamm, Ernst Haenchen, Reginald H. Fuller
3. 해석학파 - Gerhard Ebeling, Ernst Fuchs, James M. Robinson
4. 불트만 급진 좌파--Herbert Braun, Manfred Mezger
5. 편집 비평학파--Willie Marxsen
6. 급진파--*Dietrich Bonhoeffer
7. 과정 신학--Schubert Ogden, John Cobb, Charles Hartshorne, Norman Pittenger
8. 세속화 신학--Paul van Buren, Harvey Cox, John A. T. Robinson
9. 신 죽음의 신학--Thomas J. J. Altizer, William Hamilton
10. 진화론 신학--Pierre Teihard de Chardin
11. 신정통주의--*Karl Barth, Emil Brunner, Karl Heim, [영국] *C. H. Dodd, Peter T. Forsyth,
[미국] *Reinhold Niebuhr, Richard Niebuhr, William Hordern, *Paul Tillich,
[스칸디나비아] Anders Nygren, Gustave Aulen,
12. 독립파--Helmut Thielicke, Ethelbert Stauffer, *Joachim Jeremias, Jürgen Moltmann
13. 판넨베르크 학파--*Wolfhardt Pannerberg, Rolf Rendtorff, Trutz Rendtorff, Ulrich
Wilckens, Klaus Koch, Martin Elze, Dietrich Rössler
14. 구속사 학파--*Oscar Cullmann, W. D. Davies, Werner Kümmel, Otto A. Piper, Eduard
Schweizer, Alan Richardson, A. M. Hunter
15. 신(新)자유주의--Millar Burrows, Floyd V. Filson, George E. Wright, Carl E. Braaten, Paul
Minear, *Krister Stendahl, Charles C. Anderson, Hugh Anderson
자유주의 신학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극히 작은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 새 사상은 20세기 말에 와서 전 세계의 역사적 대 교단들 속에서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역사적 대교단들의 신학교들은 자유주의 신학들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자유주의적 신학교들이든지, 아니면 적어도 자유주의 신학들을 포용하는 넓어진 신학교들이 되었다. 오늘날 세계의 다수의 교회들은 자유주의적 교회들이든지, 아니면 적어도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다. 오늘날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적 교회들은 숫적으로 다수가 아니고 소수인 것 같다.
성경적 기독교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단지 지엽적 문제들에 있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 이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이것은 1920년대에 미국에서의 소위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간의 신학적 논쟁'에서 잘 드러났다. 미국 북장로교회의 보수적 지도자이었던 메이천은 당시의 논쟁을 표현하기를,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 현대는 싸움의 시대이다. 항상 기독교로 알려져 왔던 저 위대한 속죄적 종교가 전혀 다른 형태의 종교 신앙과 싸우고 있는데, 이 종교 신앙은 전통적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더욱 파괴적일 뿐이다. 현대의 이 비속죄적(非贖罪的) 종교는 '현대주의' 혹은 '자유주의'라고 불리운다"라고 하였다(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p. 2).
자유주의 잡지인 크리스챤 센츄리 1924년 1월 3일자 사설은 두 파의 차이를 더욱 인상적이게 이렇게 말하였다:
근본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요, 현대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다른 한 종교이다.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는 오는 세대들을 위해 우리 세대에 의해 아마 해결될 문제이다. . . . 근본주의자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요, 현대주의자의 하나님은 다른 한 하나님이다. 근본주의자의 그리스도는 한 그리스도요, 현대주의자의 그리스도는 다른 한 그리스도이다. 근본주의의 성경은 한 성경이요, 현대주의의 성경은 다른 한 성경이다. 교회, 하나님의 나라, 만물의 종말--이것들이 근본주의자들에게와 현대주의자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각각 다르다. 어느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인가, 어느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그리스도인가, 어느 성경이 기독교의 성경인가, 어느 교회, 어느 하나님의 나라, 어느 구원, 어느 종말이 기독교의 교회, 기독교의 하나님의 나라, 기독교의 구원, 기독교의 종말인가? 미래가 말해 줄 것이다("Fundamentalism and Modernism: Two Religions," Christian Cen- tury, January 3, 1924, pp. 5, 6).
자유주의 신학에 의하면, 기독교는 교리와 별개의 한 경험 혹은 생활이며, 교리는 기독교적 경험 혹은 생활을 한 시대의 사고 방식으로 표현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며 따라서 교리는 시대마다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한다고 한다.
교리를 경시하는 이러한 태도는 자유주의 신학의 초기로부터 볼 수 있는 태도이었다. 19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쉴라이엘마허는 말하기를, 종교는 감정이나 직관에 근거하며, 종교의 핵심은 이성적 증명과 토론이 아니고 감정이며 항상 그러하였고, 종교인에게 하나님은 하나의 경험,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라고 했었다. 19세기 중엽, 릿츨도 좀 다른 각도에서이긴 하지만 말하기를, 종교는 이론적이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은 사람의 가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원리이며, 구원받는다는 것은 새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19세기 말, 하르낙도 주장하기를, 사람이 스스로 경험한 종교만 고백될 수 있으며, 다른 모든 신조나 신앙고백은 예수의 견해에 의하면 위선적이고 파멸적이라고 했다(Adolf von Harnack, What Is Christianity?, p. 159).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요 모든 사람이 서로 형제라는 데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했고,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간주하지 않았다(Ibid., pp. 21, 22).
이들은 모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이었다.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기독교의 본질을 교리와 별개의 경험 혹은 생활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들에 의하면, 기독교 교리, 더 정확히 말하여 전통적 교리들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되었고 현대의 철학적, 과학적 도전 앞에 변경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윌리암 호던은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적 태도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자유주의의 방식은 기독교 신학을 현대화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함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기독교계의 초기 신조들이 작성되었던 이후 세계는 급격히 변해 왔고 그래서 그 신조들은 현대인에게 낡고 비실제적이게 들린다고 한다. 우리는 기독교를 현대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사고 방식들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해리 E. 포스딕은 주장하기를,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 즉 '영속적 경험들'을 표현해야 하고, 이것들을 과거에 표현되었던 '변하는 범주들'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예를 들어 기독교의 영속적 경험은 하나님께서 악을 이기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으며, 이것은 전통적으로 악을 파괴하고 선을 세우기 위해 구름을 타고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범주로 묘사되어 왔고, 우리는 더 이상 이 낡아빠진 범주[재림]를 보존할 수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고대의 사고 방식이 표현하려고 했던 진리를 믿을 수 있다고 했다(Hordern, p. 74).
메이천은 자유주의 신학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현대 자유주의가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기독교의 특수한 점들, 즉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기독교 교리들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救贖)의 교리들에 대해 과학적 반론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자는 이 특수한 점들을 단지 종교의 어떤 일반 원리들의 시대적 상징들로 생각하며, 그 일반 원리들을 건지려고 하고, 또한 그것들을 '기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한다(Machen, p. 6).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기독교는 교리와 별개의 어떤 경험이나 생활이 아니고 교리에 근거한 경험 혹은 생활이며, 또한 기독교 교리는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기독교는 어떤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 교리는 기독교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여기에서 교리란 단순히 진리의 진술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어떤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기원을 고찰함으로써 확인된다. 최초의 기독교 전파자들은 단순히 어떤 신비적 경험이나 하나의 생활 교훈을 전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전했는데, 이 사실들의 설명이 곧 교리이다.
예를 들어,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2, 23에서 그가 전파한 내용을 표현하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했고, 고린도전서 15:3, 4에서 복음의 요지를 언급할 때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속죄의 교리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그 시초로부터 교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교리가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다.
교리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은 바른 교리를 보수하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교훈에서도 확인된다. 로마서 16:17, "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원문 직역). 디모데후서 1:13,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의 본을 굳게 붙들라"(원문 직역). 요한일서 4:2, 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원문 직역). 성경의 이러한 교훈들은 바른 교리가 본질적임을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불변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거짓말과 거짓 증거를 미워하시고 정죄하신다. 출애굽기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잠언 6:16-19,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또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시편 102:26, 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기독교 교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성격들에서도 확증된다. 첫째로,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에 기초하였다. 고린도전서 15:3, 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러므로, 만일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면, 그것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로,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기적들로 확증되었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표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확증하는 표임을 보인다.
세째로, 기독교 복음은 목격한 증인들의 증거들에 의해 확증되었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순교의 피는 그들의 목격자적 증거들의 최후 확증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진리와 교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 성격들에 의해서 확증된다.
덧붙여, 성경에는 기독교 진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이 분명한 말로 선언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1:8, 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 .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 즉 사도 시대의 교회들이 받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기독교 복음은 명확하고 고정된 내용이다. 아무도 그 내용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그 고정된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고 확신하고 후시대에 전수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성경적 기독교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 개념에 있어서 서로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두 사상 체계의 차이는 실로 심각하다.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들을 경시하고 쉽게 부정하거나 재해석한다. 여기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異端性)이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것이나 그러한 포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큰 실수요 불성실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