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 해설 제1장 1919년 이전 현대 신학의 창시자는 칼바르트이다. 그의 로마서 주석은 현대 신학의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근대 신학과 현대 신학의 차이는 차이라기 보다는 강조점의 차이요, 동일한 전제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1919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요 이미 200년 전 계몽주의의 왕자인 철인 임마누엘 칸트의 서재에서 비롯하였다. 1919년 이전의 계몽주의 정시과 거기에서 파생된 신학은 다음과 같은 흐름이었다. 새 종교적 전제들이 있어서 현대인의 생각을 형성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항상 자신과 하나님과 세계를 보는 범주를 설정한다. 이 정신은 인간은 완전히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격체로 거듭나야 할 것이며 자기 사고를 통제하는 어느 제약에서든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보다 더 나아가 인간 중심의 자율 주의가 일어났다. 이 종교적인 태도는 인간의 역량을 과대 평가하게 두었고 특별히 인간의 이성을 최고 권위로 진리에 대한 궁극적인 척도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칸트에 의하여 하나님은 방음된 지하실에 밀폐되었고, 현상계에는 오직 윤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관념이 필요하다는 칸트가 만든 비성경적인 줄로만 연관을 맺게 되었다. 역사적-비평적 방법이 수립되었다. 과거를 탐구함에 있어서 역사가는 자율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를 용납하지 않았다.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는 방법론적인 억측이 동반되었고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서 성경은 다른 고문서처럼 취급되어야 하고 다른 고문서처럼 오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방법론은 신앙과 역사의 분리를 가져왔다. 제2장 1919년 이후 칼바르트의 1919년 로마서 주석은 현대 신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우선 그의 신학과 그에 의해 이루어진 신정통주의 신학은 자유주의에 대한 반역이 초기 특징이었다. 그의 주석은 그의 이전 스승들을 저버리려 한 것이다. 자유주의는 종교의 문화적 가치를 고양했으나 바르트는 최고의 죄로 정죄하였다. 자유주의는 윤리의 기초 위에 신학을 세웠으나 그는 신학의 기초 위에 윤리를 세웠다. 그의 1921년 주석은 새로운 계시관을 나타낸 것이었다. 하나님과 성경과의 관계는 사실적이기는 하나 간접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본다. 그것이 실존적인 상황에서 우리에게 말하기까지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거의 계시의 기록이요 미래의 계시의 약속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초월성을 새롭게 환기시키려 한다. 그는 영원과 시간,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간에 있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주권적인 타자로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만 우리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견해들은 어느 정도 자유주의에 대항한 것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근대주의라고 부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치 않았다. 그리고 그의 계시관은 순전히 주관적이다. 단순히 책으로서의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구별짓는 요소는 그 책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고 한다. 또한 그가 하나님을 타자라고 강조한 것은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게 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한한 질적 차이의 강조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부활을 Geschichte의 영역안에서, 즉 사람이 자기 세계의 실존적인 현실과 부딪히는 곳, 인격과 인격 관계의 영역 안에서 참 의미를 갖게 되고 Historie의 영역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하므로 기독교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진정한 역사성이 의심을 받게 된다. 제3장 신정통 주의 이 운동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이후 그의 추종자들 특히 에밀 부른너 같은 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신정통주의 독특성은 계시에 있다. 바르트는 계시는 "위로부터 수직적이다"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는 사건이다. 동시에 계시는 성경과도 동일시 할 수 없다고 한다. 성경과 그 안의 진술은 계시의 증거요 표요 지시표다. 그리고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사실상 바르트는 이 점에 대하여 강력히 주장하고 나머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계시도 존재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계시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는 동일한 역사가 되었다. 보편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신정통주의 가운데 가장 논쟁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선택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또한 택함을 받은 자이다. 예수는 사실 유일한 택함 답은 자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선택되었고, 모든 사람이 버림받았다. 바르트는 이중 선택이란 고전적인 개념 곧 개연을 두고 말하는 선택 개념을 부인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선택받은 사람으로 살지 않으며 설혹 어떤 사람이 그렇게 산다 할지라도 부분적으로밖에 그러지 못함을 인정한다. 선택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신분인 아니다. 선택은 행위며 하나님을 위한 봉사다. 고로 버림받은 데서 선택으로 건너가는 경계선은 없다. 있다면 선택에 대한 몰인식과 그에 대한 인식만이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우선 인간이 주관적 경험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계시는 만남이요, 대면이요, 대화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계시가 아니라 한다. 이로써 계시 자체의 개념 자체를 파괴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정통신학의 언어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것을 재해석한다. 원죄, 아담의 타락,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부활, 재림 등을 부룬너는 신화, 바르트는 사화(saga)라 부른다. 이러한 교리들은 일찍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이나 상태들이 아니라고 한다. 오직 만민이 항상 처하고 있는 역사적인 상황일 뿐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별도로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어느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보편구원설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분명히 일종의 신보편구원설이다. 예수는 만인을 위한 구원사라고 부르면서 구원의 원은 심히 커서 불교도나 유교도나 신도교도들을 포함하며, 선택과 유기간의 분계선은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다고 한다. 제4장 양식 비평-불트만의 방법 디벨리우스가 양식비평이란 이름을 처음 썼고 칼 엘 슈밑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비평적 성경 연구의 선두 주자는 불트만이었다. 양식 비평은 성경을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생애와 교훈의 신빙성 있는 기사로 믿을 수 없다고 전제하고 출발한다. 그리고 복음서들은 무엇보다도 초대 교회의 편집의 산물이라는 것이 기본 가정이다. 복음 기자들은 신약서가 쓰여지기 전에 교회내에 돌아다니던 여러 가지 독립적이며 서로 상충되는 구전을 합쳐 연결짓기를 꾀하였다. 이 구전들 자체가 완전히 믿을 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양식 비평의 목적은 기록된 복음서들의 배후에 있는 구전들의 역사를 분석하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복음서들의 복음"을 찾으려는 우리의 연구를 위하여 사용하는 원 자료일 뿐이다. 그 원복음를 찾으려고 우선 복음서 안에 있는 문서, 시간, 장소 등의 표시는 비역사적이며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각각의 구절들은 이적 이야기, 변론적인 교훈, 예언, 명언 등으로 분류된다. 이 각각은 고정된 특유한 형식이 된다. 이것들을 서로 비교하여 시간대별로 순서를 정하여 초기 전승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사건을 연대기별로 수록한 것이 아닌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아무런 역사적인 개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넓은 역사적인 개략의 범위 내에서 각 복음서 기자들은 자기 목적에 맞게 자료를 배열하였다. 그리고 복음서들은 기본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다. 실제로 여러 복음서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상이한 구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 복음서들이 완전히 보전하지 못한 그리스도의 생애의 단일한 구조의 어떤 국면들에 대한 증거라 봐야 한다. 또한 복음서들의 산출 배경에 기독교계가 있는 게 아니다. 교회는 바울이나 그의 동료 사도들과 같이 증인이요 창조자가 아니다.(고전4:1-2) 그리고 초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전승의 수호자로서 사도들의 존재를 무시해선 안된다. 그들은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사실 및 교리들에 관한 권위있는 보도의 출처로서 복음서가 쓰여질 때 사도들과 목격자 중 다수가 생존하고 있었다. 제5장 비신화화 : 볼트만의 메시지 비신화화 작업의 중심은 신약에는 두 가지 곧 기독교 복음과 신화적인 성격을 지닌 제1세기 세계관이 있다는 주장이다. 신화의 목적은 세계의 됨됨을 객관적으로 인식을 표현하려는데 있다. 그런데 신화는 인간의 이 자이해의 확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세계로부터 취한 이미지와 용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세계가 신화적인 변형을 겪으므로 예수도 변형되기에 이르렀다고 불트만은 말한다. 역사적인 인물인 예수는 원시 기독교에서 조만간 신화화하였으므로 인간 예수의 역사적인 지식은 기독교 신앙에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약에 있는 예수에 대한 이와 같은 표현은 모두 역사가 아니요 신화 곧 자신들을 더 잘 이해키 위하여 이런 신화를 창작한 사람들의 사고 형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신약에서 이 신화를 벗겨내고 그 뒤에 있는 원래의 목적을 발견해야 한다고 본다. 이 과정은 신화를 실존적으로 풀이하는 것, 곧 인간이 자기 존재를 이해하는 식으로 현대인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식으로 풀이하는 것을 뜻한다. 그의 이런 "비신화화"는 실존주의라는 철학의 일파에 힘입은바 크다. 그리고 역사에 근거한 기독교의 기초를 파괴한다. 성경의 종교가 신화에 기초한 종교가 된다. 그리고 그에 의해 원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의 영향으로 날조되었고 고전적인 기독교의 초자연적 주의의 완전 배제를 가져왔다. 그러나 성경은 불트만이 신화라고 부르는 것을 사실이라고 말한다. 끝으로 복음의 적응성이 현대인에게 명백히 되리라는 그의 가상은 인간의 부패를 간과한 것이다. 죄인으로 복음을 보게 하는 것은 성령이지 비신화화가 아니다. 제6장 구속사 오스카 쿨만이 대표적 인물로 그의 구속사의 개념은 역사에 임하는 태도에 있어서 칼바르트에게서 많은 기본적인 사상을 받았다. 이 파가 강조하는 것은 역사와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다. 시간은 사람의 구원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투기장이다. 그러나 역사를 계시의 매개로 강조함은 성경이 기독교의 궁극적인 근거 자료가 아님을 뜻한다. 이 구속사의 중심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로서 오신 초림이다. 모든 역사와 모든 시간은 세계적인 드라마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연극의 중심인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뜻한다. 쿨만에게 종말론은 성육신에서 시작하여 재림으로 종결짓는 모든 구속사건을 모두 총괄한다. 역사의 해석자는 그 역사와 하나가 되어야만 이 역사를 알 수 있다. 만일 이 역사의 탐구자가 이 역사에 신앙으로 참여치 않으면 역사는 역사로 남고 계시가 아니다. 이런 양식 비평은 우선 성경이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산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전적으로 믿을 만한 기사가 아니라고 본다. 궁극적으로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신정통주의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사람이 믿지 아니하면 그것은 계시가 아니라는데서 잘 나타난다. 쿨만은 또 시간과 역사 철학을 그리스도 안에 건설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존재론적인 신성을 부주의하여 부인하며 따라서 성경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영원에 있어서 쿨만은 영원은 다만 끝없는 시간이라 주장한다. 이와같은 논법으로 그는 시간과 영원간의 의미있는 구분을 없애려 한다. 또 시간은 단순히 인간과 창조를 제한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아울러 하나님 자신도 무시간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이 입장은 하나님과 사람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다. 제7장 세속화 신학 이 사상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세상의 문제들이 그리스도의 주된 관심사라고 본다. 본훼퍼, 죤 로빈슨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어느 생활 영역도 없으므로 그리스도는 교회라는 구별된 사회에만 갇혀질 수 없다고 본다. 또 우리의 신학도 이 세속화 정신을 표현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교회와 세계의 구별은 철폐되어야 하고 새복음은 정치적인 활동이요 가난한 자를 위한 사회사업이라고 본다. 그리고 초자연주의를 최소한으로 감소시키려 한다. 예수를 하나님께 가까이 살았던 사람이라 하는 구식의 자유주의 견해가 소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현대 공학의 업적과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무비판적으로 흠모하고 성경이 말하는 현대의 죄의 실재를 간과하고 있다. 또 교회의 독특한 표지를 잊으려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고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없게 만든다. 순전히 기능으로서의 세상에서의 봉사, 세상을 위한 봉사로서 교회가 정의된다. 그리고 장차 오실 나라에 뿌리박고 있는 성경의 종말론을 일관되게 거절한다. 유일한 실재의 나라는 현재 있는 나라라고 본다. 결국 이러한 사상은 바르트와 불트만 그리고 쿨만이 사상의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계몽주의 사상체계를 여전히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중심이다. 제8장 상황윤리 상황 윤리는 종전의 윤리와 비교하여 행위의 지침으로서 옛도덕적 규율과 원칙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처하고 나선다.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가 반 인간주의며, 인간보다도 초자연적 원칙에 우위를 주고 사람은 환경여하를 불구하고 거기에 맞춰야 한다고 공격한다. 새도덕은 그 이름이 표현하듯이 "상황" 곧 현금의 철학자들이 실존적인 실재라 부르는 것을 강조한다. 한 행위가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고 상황에 의하여 그릇된다고 한다. 또 행위의 궁극적이요 유일한 표준은 윤리적인 준칙이 아니고 자아가 없는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이라 한다. 이 아가페 사랑은 좋아하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이웃의 선을 원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기독교 윤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새윤리는 어떤 목적이 있어 정당화 해주지 않으면 아무 행위도 의미없다고 한다. 도덕적인 판단을 하나님의 계명의 권위와 객관적인 도덕적법칙에서 해방시키므로 이 새도덕은 계속적으로 아가페를 에로스로 전락시키려 한다. 또 윤리적 의무를 순간 순간의 직면과 반용으로 좁힘으로 새도덕은 일관되고 예측할 수 있는 형식의 생활을 기독교가 요구하는 것을 좌절시킨다. 그리고 전 도덕적 의무를 아가페 사랑으로 축소시킴으로 새도덕은 사회정의에 대한 개인의 책임감을 반영하는데 실패한다. 그리고 새도덕은 윤리 이론을 초자연적인 창조주와 성경의 구속주로부터 분리시킨다. 하나님은 이제는 시비를 가리는 주권자가 아니요 단순히 모든 존재의 근원일 뿐이다. 이 상황 윤리의 하나님은 너무 작고 제한되어 그의 사랑 윤리에 대한 충분한 능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제 9 장 소망의 신학 몰트만이 대표적 신학자이다. 몰트만의 미래의 시학을 이해하는 열쇠는 하나님이 시간의 과정에 굴복한다는 사상이다. 이 과정 중에서, 하나님은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의 일부이기 때문에 완전히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누구이신지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미래에 어떤 분이 되실 것인지를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약속으로만, 소망중에서만 임재하신다. 그의 말하는 종말론은 무엇인가? 그는 해석하기를 미래에 대하여 열려진 것이요, 미래의 자유라 한다. 하나님이 이미 영원 가운데 존재하시는 초자연적인 영역이란 없다. 미래의 분량은 사람과 하나님에 다 같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게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의 문제는 정당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갈보리로부터 새예루살렘을 쳐다보아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의 무제한한 미래로부터 뒤로 갈릴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에게 마지막 부활이 예수의 부활의 근거다. 그리고 사회에서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과거의 범주들은 사회에서 떨쳐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이 창조시에 주신 일정한 형식이나 구조가 없다. 여기서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주적이고 사회적인 화목을 이루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 사상은 바르트주의를 아주 추종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Historie-Geschichte에서 Historie의 "이미"를 부정하고 "아직"에 의하여 삼켜지는 역사관을 내세운다. 바르트가 역사와 신앙간의 진정한 상관성을 파괴하여 버린다면 몰트만은 역사 자체의 가능성마저 파괴한다. 그의 종말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미래를 내다보는 인간중심의 체계다. 그의 종말론은 미래론에 가깝다. 또한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와 혁명에 의하여 도입된다. 제 10 장 역사의 신학 1950년대 말에 새로운 신학의 경향으로 느껴질만한 것이 독일의 신학잡지에 실리기 시작했다. 첫 단계에서는 "판넨베르그 군"이라 불리더니 차차 "역사의 신학" 또는 "부활의 신학"이라 불리운다. 1. 몰트만과 같이 판넨베르그는 역사와 신앙의 기본적인 문제로 돌아가기를 주장한다. 신앙은 그 역사적인 기초와 내용에서 분리된 케뤼그마로는 살 수 없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이런 일이 바로 바르트와 몰트만이 하고 있는 것이다. 케뤼그마에서 역사를 분리시킴으로, 그들은 신앙이 진리로 이르는 생명선을 제거한다. 2. 판네베르그는 하나님의 계시가 사람에게 이를 때에 직접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항상 역사적인 사건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계시가 일어나는 이 역사는 신앙으로만 알 수 있는 특별한 구속이 아니라 한다. 오직 역사적인 행동을 통한 간접적 계시만 있다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 3. 그리하면 보편적인 역사만이 계시의 매개체가 된다. 역사의 어느 특정한 부분이나 줄기가 아니라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교사다. 4. 역사의 의미는 그 중심에서가 아니요, 그 종국에 가서야만 발견케 된다. 이 강조로 인하여 판넨베르그의 사상을 "부활의 신학"이라 부르게 했다. 5. 몰트만과는 달리 판넨베르그는 대체로 부활을 비신화화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을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부르기를 주저치 않는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를 "보수주의자" 혹은 "복음주의자"로 분류함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리라. 그의 사상체계는 결코 역사적이요, 성경적인 기독교에의 귀환이 아니다. 1.비록 판넨베르그가 신앙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바르트와 불트만의 입장을 공격하지만, 여러 면에서 판넨베르그는 여전히 신정통주의자의 상속자요, 그 적수와는 멀다. 신전통과 한가지로, 그는 실재에 대한 견해를 "칸트의 실천이성의 우의 사상에서 나오는 것과 실재적으로 동일한 견해를 가진다. 계시가 "설명되어져야 할 행위"로 주어지기 때문에 기독교 전통은 항상 비롯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2.이 번증법으로 인하여 판네베르그의 전 성경을 계시와 동일시하기를 거부하는 이론이 나온다. 3.그의 부활론 역시 몇 가지 중재한 흠을 지닌다. 부활 기사들을 완전히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께서 자기의 몸의 부활이 세상의 끝과 모든 믿는 자의 일제 부활과 동시에 일어나리라고 잘못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4.판넨베르그는 신앙을 역사적 탐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역사에만 의존시킴으로 보통 사람은 스스로는 믿을 수 없고 오직 역사가의 권위에 승복하는 때만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따르게 된다. 5.판넨베르그가 이러한 근거 위에서는 불신의 이유를 만족하게 설명하여 내지 못함을 비평가들은 지적한다. 만일 신앙의 역사의 지식에만 기초한다면 신앙과 보는 것과의 대치점은 있을 수 없다. 제 11 장 진화론의 신학 1. 떼이야르 사상의 출발점은 그가 "모든 사실을 조명하는 빛이요, 모든 선이 좇아 갈 굴곡"이라 부르는 진화이다. 2. 이 진화과정은 그가 "복잡한 성향의 법칙"이라 부르는 법칙을 따라 진행된다. 3. 진화론의 이 단계에서 떼이야르는 신학을 끌어들여 진화의 미래과정을 예고한다. 4. 이 진화과정의 중심이요 그 내적 원리는 그리스도라 한다. 5. 중심인 그리스도, 오메가 포인트에로의 이 운동은 사랑의 과정이다. 사랑의 세력에 끄려서 세계의 파편들을 서로를 찾아서 마침내 세계가 존재하게 된다. 떼이야르의 원칙들은 칼빈주의자로서 동정적인 평가를 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1.떼이야르의 설계의 근본적 오류는 토마스의 사사에 일반적으로 흐르며 자기 자신의 것의 특징인 자연과 은총으로의 양분이다. 각 분야마다 계시의 근원이 다르다. 2.이 종합의 뿌리에서 그 여타의 떼이야르의 성경진리와의 상반점들이 나온다. 다른 진화론들과 같이 그의 진화론의 변호는 여전히 생명의 지원을 하나님의 명령 창조로 돌리는 성경의 묘사와 분명히 상치된다. 3.다른 진화론들과 같이, 때이야르의 사상도 역시 인간이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그의 참 위엄과 영적 완성에 이른다고 가상한다. 이것은 은혜의 계시에 정반대 한다. 4.다른 진화론자들과 같이 떼이야르의 사상은 진화의 이해를 "역사상에 기록된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사건"이라 묘사한다. 역사상 최대의 사건은 진화의 발견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란 것도 잊고 있다. 5.다른 진화론들과 같이 떼이야르의 "진화론의 신학"은 너무나 낙관적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일에 아무 관계없이 만민이 낙관적인 종말을 약속한다. 6.이와 관련되지만 떼이야르의 견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되지 못하게 하듯이 또한 그는 사람의 죄로 죄되지 못하게 한다. 옛 스콜라주의의 파멸에 이르는 영향을 볼 수 있다. 7.우주가 형성 도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유지적 몸이라는 떼이야르의 견해는 적어도 두가지 큰 결함을 나타낸다. 곧 기능적이요, 유기체적인 창조물의 신격화와 성경의 그리스도를 신화같은 변형이다. 결국 우리는 세상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두 잃게 된다. 제 12 장 과정 신학 여러 부류의 세속주의의 신학은 하나님께 대하여 세속적인 방법으로 이야기하며, 창조주와 피조물, 하나님과 세계와의 형이상학적인 분계선을 지울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마당에서 한 파의 신학자들이 일어나 이회의적인 세상에 신에 대한 교리를 재수립하려고 한다. 다분히 미국 소산인 "과정 신학"이라는 이 새로운 추이는 시카고 대학과 챨스 하트쇼온과 연관된 듯 하다. 중심되는 교수가 있다면 알프레드 노오스 화이트해드일 것이다. 1. 떼이야르와 같이 과정신학자들도 그들의 종말을 가져올 출발점을 택한다. 현대인의 존재들 곧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자연과 그 세상을 자신의 범주에 예속시키는 인간의 자유의 종합. 자멸적인 이 종합이 그들의 출발점인 것이다. 2. 떼이야르와 같이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킨다. 3. 과정 신학은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이란 생각을 말소시키려 한다. 하나님은 사물 총체의 주관 국면으로 되어 버린다. 4. 과정 신학이 그 신론에 성경적 색체를 나타내려 애쓰지만 이것은 그 체계의 기초가 되지 못하고 겉치레밖에 못된다. 그리스도는 세계 내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의 상징에 불과하게 보이고 "뚫고 들어온 간섭"이 아니라 그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일을 하신 분이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은 주장할 수 없다고 과정 신학자들은 말한다. 5. 과정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한다는 말을 그의 초자연성과 절대적인 초월성을 부인함으로 스스로 부인한다. 6. 과정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을 택한 자인 예수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퍼지는 우주의 법칙으로 변질시킨다. 그렇다면 칼 헨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어떻게 그처럼 잘 지내셨는지 물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제 13 장 존재의 신학 1. 틸리히에 의하면, 우리는 종교를 재정의 해야 한다. 사람이 종교적일 때는 그가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을 때"이다. 2. 무엇이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돼야 할 것인가? 이 궁극적인 것은 존재자체이며 우리가 전통적으로 하나님이라 불러오던 것이다. 3. 틸리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은 어떤 사물도 아니고 어느 존재자도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며 존재의 능력이며, 존재의 근거이다.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나 꼭같이 무신론적이라고 틸리히는 말한다. 왜냐면 존재 자체는 존재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4. 동일한 이해에서 틸리히는 죄를 존재와 존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란 기준에서 재정의한다. 5. 틸리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멀어진 것이 극복된 상징이여, 하나님과의 연합을 파괴하려는 모든 소외의 세력이 그 안에서 소멸된 "새 존재"의 상징이다. 틸리히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일체의 정통적 해석을 거부한다. 6. 사람은 어떻게 이 존재로부터의 소외의 극복에 참예하는가? 전통적인 해답인 중생, 칭의, 및 성화는 재해석된다. 1.성경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거부하는, 이 세대에 공통된 과오가 틸리히의 실채에 기본적이다. 그의 오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대치시킨 것이다. 2.틸리히의 "상관관계의 원칙"은 철학이 인간 상황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다고 변론하나 "구원받은" 이성만이 상황에 대한 해결을 밝히 볼 수 있다. 3.틸리히의 신론은 성경교리와 거의 아무 관계가 없다. 4.틸리히의 기독론은 예수를 하나의 상징으로 떨어뜨린다. 예수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5.틸리히는 구원론은 사랑 계신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실존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도 하나의 상징이란 것 외에는 아무 구체적인 의미가 없다. 제 14 장 신비주의 대부분 현대 사상으로부터 신비주의로, 틸리히의 "존재의 신학"에서 선불교가 내세우는 표어로 옮아가는 것은 멀리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두가지가 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분계선을 말살하는 오류를 범한다. 신비주의는 근동, 극동 또는 아시아의 극단적인 종파에만 특별한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온 세계를 통하여 다 찾아볼 수 있으며, 특별히 주관성과 계시의 직접성의 요소가 강한 점이다. 운동이라기 보다는 요소들을 살펴봄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그 중심되는 특징은 성경 이외의 특별계시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 말씀하신다는 신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2.객관적인 표준을 잃고서 신비주의는 주관주의와 정서주의를 고조한다. 3.신비주의는 보통 기성교회를 헐며 한 지도자 중심이다. 4.신비주의는 종종 신기한 것을 강조한다. 5.신비주의는 종말론을 극히 제한된 의미로 강조한다. 신비주의의 영을 시험하는데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위험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신비주의가 성경을 떠나서 특별 계시를 강조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 할 것을 지시하는 유일한 규칙"인 것을 잊고 있다. 2.신비주의는 우리가 정서를 사용할 때는 균형을 유지해야 함을 잊는다. 3.신비주의가 교회를 공격하며 한 사람의 지도력으로 교회를 대치하려 함은 성경의 교회와 사역자들에 대한 교훈을 의곡시킨다. 4.신비주의는 성령의 희한한 은사를 강조하는 나머지 평범한 은사가 더 지속적인 가치를 가진 것을 잊게 된다. 5.신비주의가 성경의 종말론의 어떤 특징만을 강조함은 성경의 균형을 왜곡시킨다. 성서적 종말론의 중심은 죄인의 심판도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도 아니요, 몰트만이나 불트만 식으로, 성경의 전망을 현재의 관심사에 국한시키는 어느 과정표도 아니다. 종말론의 중심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과 영광으로 오심이다. 천년 왕국에 대한 강조까지도 종말론의 큰 사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최종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대치할 수 없다. 제 15 장 경건주의 경건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성경의 완전 무결성을 믿고 있다. 경건주의는 생명 없고 비인격적인 종교에 대한 산 신앙의 항의로서 일어났다. 스페너의 책을 통하여 당시의 약점이 분석이 되었는데 그 약점은 부패한 행습, 세상적인 교역자, 형식주의, 선교열의 결여 등, 다섯 가지 시정책을 제출하였다. 1.하나님의 말씀의 광범한 사용 2.영적 제사장의 부지런한 시행 3.믿음을 전파할 것 4.토론에서 사랑의 정신을 나타낼 것 5.신학도들의 경건 훈련과 목자가 되는 훈련 경건주의 적극적인 공헌은 목양훈련을 개선하였고 그리고 메마른 정통주의에 영적 생명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최대 규모의 복음 전파와 선교를 주도하기도 했고 교회의 위대한 찬송가를 영감하였고 세계 최대의 음악에 공헌했다. 그러나 경건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서양 교회와 동양 교회를 동시에 괴롭히고 있었다. 1.체험에 대한 강조는 쉽사리 주관주의와 체험 주의, 신비주의에까지 전락할 위험이 있었다. 2.감정이 경건주의에서 중시한 나머지 지성의 역할은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3.정치, 경제, 사회, 노동의 분야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광범한 의무를 보지 못한다. 4.경건주의는 종종 교리를 무시하고 실제적인 것을 너무 강조한다. 5.경건주의는 역사적으로 "교회 내의 작은 교회" 배출하는 경향을 있어 왔으며, 소란과 영적인 교만에 빠질 위험성이 있었다. 6.경건주의는 성경 읽기와 기도와 교회 출석을 충분한 그리스도의 실행인 것처럼, 그 내용으로 삼도록 하려는 경향이 있다. 제 16 장 세대주의 19세기에 새로운 성경 해석 운동이 보수주의권 내에서 일어났다. 형제단은 그들의 형식에 매이지 않는 예배를 참석시켰고 성직 제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예배 순서가 없는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의 모임 가운데 새로운 해석 방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세대 주의인데 이 것은 복음주의에 속히 퍼졌다. 무디성경학교, 스코필드 관주성경이 바로 세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세대주의자들과 역사적 전천년설과는 혼동이 되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는데 이 역사적 전천년설은 그들과 같이 독특한 교리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전천년주의자들이다. 1.세대주의자들은 항상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을 고집한다. 2.모든 구약예언은 문자적으로 풀어야 하므로 세대주의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간에 아무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3.세대주의는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일곱의 다른 세대들의 역사라고 한다. 4.세대주의는 역사적 전천년설과는 달리 소위 율법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계시가 없었다고 한다.그래서 그들은 십계명의 순복이 없다고 말한다. 5.세대주의는 예수께서 유대인에게 전했던 나라는 신령한 나라가 아니요, 구약 다윗 왕국의 지상적인 힘이었다고 한다. 6.세대주의자들은 마지막 날의 대환난 전에 교회는, 비밀한 가운데, 공중으로 끌어 올려 예수를 영접할 것이라고 한다. 이 부분들은 세대주의자들이 전통적인 부분과 다르게 부장하는 것들이다. 제 17 장 근본주의 근본주의는 단순히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 곧, 초자연적인 복음의 변호와 전파에 대한 또 하나의 이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특수한 운동으로서 근본주의는 좀 더 좁은 의미를 가졌다. 역사적 현상으로는, 그것은 기독교의 20세기의 표현이요, 미국의 표현이다. 라고 정의할 수있다. 근본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어떠한 요소들, 기본적인 것들을 다시금 주장하기 위하여 일어났다. 칼빈주의는 이 격노하는 논쟁 중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여 할 것인가? 1.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성경적 신학과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편에 확고 부동하게 서는 근본주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흐리게 하여서는 안된다. 2.동시에, 후기 근본주의를 그 기질과 운동의 성격이 독특하므로 독특한 이름을 불러 그 경향을 초기 근본주의와 구별함이 옳다고 하는데도 일리가 있다. 3.이 신근본주의의 단계는 초기 근본주의의 위험점 곧 칼 헨리가 " 근본주의자의 축소"라고 부르는 그 점을 확대시켰다. 4.이 근본주의 때문에 신학 연구의 열의가 생겼다. 5.경건주의와 세대주의의 영향으로, 근본주의 운동은 하나님의 뜻 전체를 축소시키고 기독교 계시를 문화와 사회생활에 연관을 시키지 않으려는 경향이었다. 제 18 장 신근본주의 20세기에 일어난 신 근본주의라고 불리는 운동은 성경적인 기독교의 선포와 변호를 위하여 연과논 무리였다. 이것들은 혼합된 것인데 경건주의, 세대주의, 칼빈주의, 알미니안, 감독교회와 독립교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은 새로운 혼합, 옛 요소들의 배합상의 변화로 인하여 "보수"신학 내의 새로운 경향이 생겼는데 이것을 신 근본주의라고 하였다. 신근본주의 특징과 위험성이다. 1.초기 근본주의와 같이 신 근본주의는 복음을 전파하고 옹호하기를 도모한다. 그러나 옹호하려는 면이 점점 더 전파하려는 면보다 우수하다. 2.신 근본주의는 근본주의와 더불어, 성경적인 기독교를 강하게 표방하나 "교리적인 상이점을 논하는 데는 의도적인 유예기간"을 선포한다. 3.신 근본주의는 개인적인 종교 경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적인 경향을 보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을 무시한다. 4.신 근본주의는 진화론에 대한 정당한 불신은 때로 과학 일반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난다. 5.초기 근본주의와 같이 신 근본주의는 기존의 교단들의 자유주의를 지적하며 보수주의자들 간의 단합 협동을 촉구한다. 6.신 근본주의는 , 초기의 근본주의를 따라 성경적인 교회론을 강조한다. 7.신 근본주의는 초기 근본주의를 따라 개인적 및 사회적 윤리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개개인이 초자연적인 중생을 경험함으로써 해결된다고 정당하게 주장했다. 제 19 장 신 복음주의와 그 메시지 신 복음주의는 과거의 근본주의에 복음주의 신학의 새면을 관련시키고 동시에 과거의 어떠한 요소들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려는 시도였다. 그들의 특징은 근본주의의 참뜻을 정당하게 반영하려고 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 그것은 " 신학적, 역사적 전망의 결여, 교리 표현의 모호성, 학자적 자질의 결여, 적절한 문서 운동의 결여, 반 교파 주의, 세대주 의의 입장에 서는 일, 문화나 사회와의 관련 결여, 반동적인 부정주의 및 계투, 복음을 개인적인 종교체험으로 축소시킴"등이었다. 신 복음주의는 현대주의자들이 받아들이는 교리체계에 반대하여 전적으로 정통적인 교리 체계를 수락하므로 자유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있다. 신 복음주의자들에게서 일어나는 가장 격심한 토론 제목은 성경의 권위와 모호성이었다. 성경이 전적으로 진리됨을 증거하고 있어야 할 신학자들이 '무오'리고 하는 말을 회피하여 서로 맞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며, 그 대신 '진리'를 재정의하여 성경이 사실상 역사적 정확성 없이도 그 절대적인 계시의 진정성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 제 20 장 신 복음주의와 그 실패 신복음주의 이 다양성을 감안할 때, 가장 현명한 일은 " 신복음주의"가 신학이기보다는 한 기운이요, 기질이요, 신학적인 이방이기보다는 한 성향으로 보는게 당연한 것이다. 신 복음주의에 대한 반 지식주의에 대한 의구는 칼빈주의자들이 오랫동안 경성하며 가졌던 의구이다. 신 복음주의가 기독교를 생의 어떤 영역에만 축소시키는 것에 대한 신복음주의에 대한 공격은 칼빈주의자들이 하여 오던 공격이다. 여기에 신 복음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잇다. 동시에 신 복음주의가 기독교를 절충할 위험중에 있는 듯 보이는 점들이 있다. 1.신 복음주의 권내의 지도자들이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복음주의의 토론을 재계하고 있다. 2.신 복음주의자의 진영내의 지도자들은 교회론의 연구를 고려할 것을 요구해 왔다. 교제와 분리에 대한 연구, 검토를 촉구했다. 3.신 복음주의는 과학과 성경의 관계를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이것대문에 성경을 과학에 예속시키려고 한다는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4.신 복음주의는 사회적인 필요에 대한 확실한 반응과 성경적 사회윤리를 강조한다. 이 부분에서 사회복음주의로 되돌아간다고 하는 비평을 받았다. 5.신 복음주의는 자증하시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변증을 보이지 않는다. 제21장 개혁신앙 원래 개혁이라고 하는 단어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지배했던 오류와 폐단들에 대하여 항의하여 일어난 교회들의 성격을 묘사했던 것이었다. 넓은 의미에서는 종교개혁의 모든 교회들에게 적용할 만 하였다. 근래에 와서 이 용어는 제한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말은 전적부패, 무조건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말과 동일시된다. 이것은 칼빈주의의 5대교리이다.이 새로운 변이는 흔히 칼빈주의나 개혁신앙이라고 불리기 보다 "보수주의"라고 불리운다."피선교교회"의 상황이 정의한 대로 보수주의 신학은 제도화된 관료주의 신학이고 고립된 신학이다. 보수신학은 피선교교회가 정의한 대로 수세적 신학이다. 이 모수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애기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개혁신앙은 칼빈 시펠트 박사가 말한대로"3대 성경적 사실"이라고 부른 것에 의하여 16세기의 유럽에서 20세계에서도 그 소임을 다한다. 보수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1.교회는 교회 신자들의 집합이 아니요, 한 몸 그리스도의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며, 성령의 교통이다. 2.신약 교회 생활은 전 생활을 포괄하였다. 공동생활에 대한 것이다. 3.신령한 생활은 교회 생활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강력히 받아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산 편지가 되었다.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동을 의미하며, 성도의 교제를 가정에서 ,교육에서, 정치에서, 신문에서, 예술에서, 과학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될 것인가? 성경적인 "칼빈주의"인가? 아니면 보수주의인가? ◎ 저자소개 간하배 박사는 미국 칼빈대학,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고,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구한 후 제네바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2년간 미국 정통장로교(OPC) 한국 주재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총신대학교 신약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72년부터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선교학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가 1999년에 소천 하였는데, 그는 도시선교의 이론을 학문화하고 있다.「현대도시교회의 전망」을 비롯한 12권의 저서와 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였고, 계간 도시선교 연구지「Urban Mission」편집인으로 사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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