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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칼 운동과 복음주의

하나님아들 2021. 9. 13. 15:39

    에큐메니칼 운동과 복음주의

 

 

I. 왜 이 문제가 논쟁의 초점인가?

        

최근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논쟁 가운데 하나가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논쟁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2013년 WCC 10차 총회를 유치하면서 불거졌다. NCCK는 이 총회를 유치하면서 이 총회를 한국사회 전체의 축제로 만들려고 했다. 그리하여 3부 요인이 참여하는 총회 유치 축하회를 갖고, 언론도 이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아울러서 NCCK는 WCC 총회를 이념을 초월한 기독교올림픽이라고 홍보하였다. NCCK는 특별히 이 총회를 한국교회 전체가 참여하는 총회로 만들려고 계획하고, 한국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참여를 요청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복음주의 교회들의 입장은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분열을 극복하고, 연합하자는 명분만큼 강한 것이 없다. 사회에서도 기독교가 연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복음주의 교회들은 여기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바로 복음주의 교회가 WCC가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하고, 용공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비판하면서 바로 WCC 탈퇴를 주장했는데, 무조건 WCC 총회에 참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필자는 오래전에 한 보수적인 신학교 교수로부터 이런 고민을 들었다. "WCC 총회를 반대하자니 속 좁은 사람이라는 비판을 들을 것 같고, 찬성하자니 신학적으로 용납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대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의 고민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보수장로교회 지도자들은 이 유치를 위하여 앞장선 통합 측의 태도에 매우 실망했다. 사실 한국의 여러 장로교파들은 오래 동안 일치를 주장하여 왔다. 그리하여 장로교의 주요 교단들이 함께 모여 제주도에서 예배도 드렸다. 한국교회의 일치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차이점을 피해가며, 공통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인 전통을 강조하며, 이슈가 되는 문제를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일치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 또 다시 분열의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반 기독교적인 정서가 강한 이 시점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좋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복음주의 교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여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WCC 총회를 반대하는 것이다. 사실 칼 매킨타이어는 오래 전에 국제기독교협의회(ICCC)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WCC총회 때마다 반대 시위를 벌였다. 아마도 보수적인 단체에서 이같은 행동을 할 가능성도 있다.

        

두 번째는 WCC 총회를 회원 교단의 모임으로 규정하고, 여기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사실 WCC 총회는 WCC 회원교단들의 모임이다. 그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문제를 토론하고, 결의하는데 다른 회원교단들이 왈가 왈부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WCC도 비회원 교단들이 여기에 참석하고, 참석하지 않고는 전적으로 그들의 결정에 따를 일이다. 사실 NCC는 한국교회의 다수가 참여하고 있지 않은 이 대회를 한국교회 전체의 모임으로 과대선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비회원 교회들에게 여기에 참여를 강요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서 비회원 교단들이 총회 자체를 방해해서도 안 될 것이다. 남의 집에 가서 감 내놔라, 대추 내놔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 WCC 총회에 참여하여 대화를 하는 것이다. 사실 WCC는 오래 동안 여러 단체들과 대화를 해 왔다. 공산주의, 타 종교, 천주교에 이어 최근 들어서는 오순절과도 대화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많은 대화에도 불구하고, 가장 잘 안되고 있는 것이 WCC와 복음주의와의 대화이다. 사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WCC 총회에 참여하여 대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1975년 나이로비 총회에서는 유명한 복음주의자 John Stott가 참여하여 복음주의 입장에서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국 복음주의 교단들이 여기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서로 사이에 너무나 많은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같은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한국에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복음주의가 어떤 관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에큐메니컬 운동과 복음주의는 상호 다른 길을 걸어 왔다. 우선 그 갈등의 역사를 솔직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필자는 복음주의의 입장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사실 복음주의가 WCC 총회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참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같은 문제제기에 에큐메니컬 진영이 어떻게 응답하는가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II. 역사적인 고찰: 냉전 시대의 WCC,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교회

        

우리는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전에 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서 WCC가 문제가 되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나오게 될 것이다.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은 WCC문제는 단지 교회 내적인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WCC가 교회문제만을 다루는 단체가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특별히 WCC는 근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WCC와 한국교회의 관계를 다룰 때, 우리는 한국사회와 국제사회를 다 같이 고려해야 할 것이다.

        

WCC와 한국사회의 관계는 크게 냉전체재라는 범주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곧 바로 이념전쟁으로 들어갔다. 미국은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세상을 만들려고 했고, 소련은 평등이 구현되는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1) 과연 어떤 이념이 보다 나은 이념인가는 당시로서는 판단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기독교인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 먼저 스탈린이 동구를 공산화하고, 얼마가지 않아서 모택동이 중국을 공산화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와 공존을 생각했던 미국은 이것을 보면서 소위 봉쇄정책을 썼다. WCC가 1948년 창립되었을 때, 세계는 본격적으로 냉전이 시작된 때였다.

        

1948년 암스텔담에서 WCC가 창립되었을 때에 이념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미국 장로교인 덜레스(나중에 국무장관이 됨)는 공산주의가 세계평화의 위협이라고 지적하였고, 체코 신학자  로마드카는 공산주의가 새로운 정의의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  하지만 WCC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단체의 범주에 머무르려고 했다. 그래서 WCC는 1948년 창립총회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다 같이 비판하였다. 그런데 결국 그 내용에서 보면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에게 많은 힘을 가져 다 주는 부정의에 반대하는 군중의 폭동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립총회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쪽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에 더 큰 비판을 하고 있다.3) 실제적으로 로마드카는 WCC의 중앙위원회의 일원이었으며, 공산치하 중국 기독교 지도자 챠오(T. C. Chao)도 의장단의 일원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미국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며, 대다수의 복음주의 신자들과 다른 점이다.

        

필자는 WCC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기독교는 물론 특정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이데올로기 보다 더 크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 특히 동아시아에서 경험한 공산주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으로 단순한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신앙자체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와 기독교는 양립하게 힘들다.

        

이와 같은 WCC의 이데올로기의 모호성은 동시대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해방 후 한반도는 둘로 나뉘어졌고,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당시 절대다수의 신자들은 이북에 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의 실상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피난을 와서 자유대한민국 건설에 합류하였다. 그래서 1948년 대한민국이 건설될 때, 가장 강력한 반공 단체가 바로 기독교였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경험한 공산주의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WCC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 문제를 유엔이 해결하도록 권고했다. 이것은 당시 한국에 나와있던 미국 선교사들(이들 가운데 상당한 숫자는 중공에 의해서 추방되었다.)이 한국전쟁의 실상을 IMC(국제선교협의회)를 통하여 WCC에 알렸기 때문이다. 그 후 WCC는 전후 한국을 여러 가지로 도왔다. 특별히 WCC의 유관단체인 기독교세계봉사회(Church World Service)는 전후 복구사업을 도왔다. 이렇게 WCC가 한국을 돕는 것에 대해서 공산권에 속한 WCC 회원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특별히 이것으로 인해서 중국교회가 WCC를 탈퇴하였다.4)

        

하지만 1954년 에반스톤 총회를 지나면서 WCC에 공산권 기독교가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반대로 제 3세계의 소리가 크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당시 한국은 공산주의의 침략을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WCC는 점점 포용주의로 나갔다. 그래서 1961년 뉴델리 총회에서는 소련의 정교회를 비롯한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의 정교회를 정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WCC 내에서 공산권 기독교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바로 이런 와중에서 한국은 4/19 혁명을 거치면서 상당한 혼란기에 있었고, 이런 상황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5/16 군사혁명이 발생하였다. WCC는 포괄주의를 지향하는 반면, 한국의 철저한 반공국가가 되어 갔다. 

        

1960년대를 전후한 한국교회의 분열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WCC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세계가 바뀌어졌다는 것을 말하면서 WCC에 가입할 것을 권고했고, 선교사들도 여기에 동참했다. 하지만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서구의 구호품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통로였다. 하지만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이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신앙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물질의 도움을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이같은 WCC의 흐름을 매우 염려하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NCC자체도 마찬가지였다. NCC는 1959년 자신들의 복음적인 신앙을 분명히 하는 성명을 발표 하였다:5)

 

에큐메니컬운동은 세계 교회들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한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바라고 있으나, 무조건 교회를 합동시키는 단일교회 운동이나 비성서적인 신학사조를 주장하거나 용공운동을 용납하지 않을 뿐더러 공산주의, 로마 카톨릭주의, 그리고 신앙사상의 혼합주의 등을 절대 배척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그 이후의 에큐메니컬운동의 내용이었는가? 우리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사실 이후의 WCC는 이와는 정반대의 길로 나갔다.

        

이런 염려는 NCC 가입 교단 내에서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였다. 세계교회와 관계가 깊은 한경직목사는 60년대 WCC와 활동하기 보다는 빌리 그래함이나 밥 피얼스와 같은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사역하였다. 이것은 감리교신자이며, 이대총장이었던 김활란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WCC와 IMC가 통합하는 것을 반대했다. 원래 한국교회는 IMC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한국교회 연합운동은 이 IMC와 연결되어 이루어졌다. 그런데 김활란박사는 IMC와 WCC가 연합하면 전도의 열기가 식어진다고 생각해서 이 두기관의 통합을 반대했다.6)

        

60년대 WCC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이슈는 월남문제였다. 냉전체재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친미 독재자들이다. 상당히 많은 나라에서 반공을 내세우면서 독재를 행하는 나라들이 있었다. 이런 나라에서는 독재에 항거하는 운동들이 나타났고, 이것을 공산주의가 지원하였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자유세계의 수호하고,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 반공을 내세우는 독재자를 지원하였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월남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WCC는 미국에 반대하고, 혁명군의 편에 서게 되었다.7)

        

WCC의 이런 태도는 반공국가인 대한민국에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60년대 한국은 공산주의의 직접적인 위협아래 있었다. 68년 북한의 특수부대가 서울 청와대의 뒷산까지 침투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월남전에 참전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월남이 공산화된다는 것은 한반도가 공산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기독교신앙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70년대 월남이 공산화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꼈고, 월남 패망의 원인으로서 반정부 활동을 들었다.

        

한국의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WCC를 위험하게 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실제로 1968년 WCC의 웁살라 총회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주장을 하였다. 웁살라 총회는 지금까지 주장해온 책임사회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고, 이제는 혁명이라는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면 세상은 너무나 구조적인 모순 가운데 있어서 혁명을 통해서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장투쟁이라는 폭력도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신학에 근거해서 WCC는 전 세계의 무장해방운동에 많은 물질을 지원하였다.

        

박정희 정부 시절 이런 WCC는 위험집단일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에서 WCC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WCC의 이런 태도가 한국교회에서 받아들여 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런 WCC의 용공적인 입장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에게 직접적인 위험이 된 것은 WCC의 과격 노동운동에 대한 지원이다. 박정희는 강력한 경제 부흥정책을 폈고,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WCC는 한국 NCC와 함께 노동운동을 벌였고, 이것은 상당한 부분 과격한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아마도 현재 한국의 과격 노동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도시산업선교회를 통한 활동은 "도산이 오면 도산한다."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이같은 노동운동은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WCC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혁명운동을 지원하였다. WCC는 월남, 필립핀, 남미,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의 민주화운동을 도왔다. 그 가운데는 한국의 민주화운동도 포함된다. 실질적으로 WCC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세계에 알리기도 하였고, 재정적으로 돕기도 하였다. 이 같은 민주화운동은 60년대와 70년대 WCC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웁살라총회에 이어 1973년에 열린 방콕대회에서는 구원을 인간화라고 정의하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을 해방이라고 보았다. 여기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구원은 사리지고 기독교의 사명은 정치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런 민주화운동이 보다 강력하게 전개된 것은 80년대에 일어난 반미 통일운동이다. 박정희의 사망이후 등장한 전두환군사정권은 민주화운동을 탄압했으며, 이것은 미국이 전두환정부를 인정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따라서 미국이 독재정권을 옹호해왔다고 비판하는 NCC의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근대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은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견제해서 민주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80년대에는 미국이 독재를 지지해서 민주화가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같은 반미운동은 이제 통일운동으로 이어진다. 민주화운동이 좌절을 맛보는 것은 민주화운동을 이적운동으로 보며, 이것은 한반도의 분단상황 때문이다. 그래서 분단이 극복되어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민주화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일에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반공사상이며, 미군주둔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NCC는 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에서 한국교회는 반공을 회개해야 하며, 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 WCC는 이런 NCC의 활동에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9)

        

이것은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지금까지 한국의 NCC는 WCC의 반미운동과 공산주의 포용정책을 어느 정도 완화해서 한국교회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는 달라졌다. 미국을 공격하며, 반공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이후 공산주의와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이것을 위하여 주한미군이 주둔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복음주의 교회들은 여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해서 생긴 것이 바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이다. 한기총은 국제적인 연대가 없이 순수한 한국인의 모임이다. 그리고 국제적인 도움이 없이 순수한 한국인의 자금으로 움직여진다. 그런데 생긴지 얼마 안 되어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여기에 참여하였고, 그 규모에서 NCCK를 훨씬 능가하게 되었다.

        

NCCK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88선언이 발표된 88년은 냉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그것은 이 때를 시점으로 공산권이 붕괴되고, 냉전이 종식된 것이다. 이와같은 냉전의 종식에 큰 기여를 한 것이 바로 88올림픽이다. 이 올림픽에는 많은 동구권 국가들이 참여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자유대한의 발전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공산사회와 이것을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자신들이 선택한 공산주의가 잘못된 이념이었다고 판단하였다. 88올림픽은 공산권의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사실 88년 올림픽은 대한민국이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옳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NCCK는 반공을 회개하라고 한 것이다.

        

공산권의 붕괴는 48년 WCC가 공산주의를 용인하고, 그 뒤 미국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관대한 WCC의 역사가 잘못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도 많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공산주의는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더 많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었고,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했다. 그런 공산권은 자본주의의 공격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점 때문에 자멸하고 말았다. 그러면 이와같은 잘못된 역사적인 과오에 대해서 WCC는 이것을 시인히고, 그 과오를 뉘우쳤는가? 우리는 WCC의 역사 가운데 그런 시인을 찾아 볼 수 없다.

        

공산권의 붕괴이후 많은 공산권의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에큐메니컬 운동을 떠났다.10) 그것은 에큐메니컬 운동이 공산주의에 대해서 정당하게 비판하지 못했고, 공산정권과 타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러시아 정교회 대표는 WCC의 정책을 소련에 유리하도록 만드는 소련정부의 대리인 노릇을 하였으며, WCC에 공산권 기독교인들의 종교 박해에 대한 호소를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공산권의 붕괴이후 WCC의 주요의제는 무엇인가? 공산권이 붕괴되었지만 WCC의 자본주의와 미국을 반대하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공산권의 붕괴이후 세계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란 자유경쟁과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세계화라고 말한다. 이들은 이런 신자유주의가 과도한 경쟁을 부추기며, 빈자와 부자의 격차를 더 깊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WCC의 희년 총회인 잠바브웨의 희년 총회(1998)의 주제였다. 냉전 이후의 세계화는 무한정의 자본주의의 확장을 가져오며, 이것은 민족경제를 국제자본에 예속시키며, 따라서 국제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며, 결국에는 세계를 파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11)

        

하지만 한국은 이런 WCC의 주장과는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의 협력 가운데 국제무역에 뛰어들었고, 국제 자본을 끌어들여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사실 WCC가 주장하는 종속이론에 의하면 미국과 가까울수록 미국에 더 종속되어 가난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과 가까워 미국을 따라가 미국의 경쟁국이 되고 있다. 이것을 경제학에서는 캐치업 이론이라고 부른다.12) 이것은 한국이 국제화를 창의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한국은 이제 G 20의 개최국가가 되었다. 이제 한국은 미국의 종속국가가 아니라 세계질서의 창조자로 선진국 대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WCC의 국제화에 대한 비판은 한국과 맞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WCC가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 너무 일일이 다 발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WCC는 종교단체이다. 그런데 WCC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 대해서 발언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고, 사실 전문가들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WCC가 주로 좌파적인 성향의 발언을 쏟아 내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화에 대해서도 일부에서는 빈부의 격차를 확대한다는 견해도 있고, 일부에서는 세계경제를 발전시키는 견인차라는 주장도 있다. 필자는 WCC가 너무 사회적인 이슈에 매달리고, 그것도 반자본주의적인 성향만을 대변한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과 한국 기독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현재 과거 WCC의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미국의 몇몇 학자들은 WCC의 친 사회주의적이며, 반 미국적인 성향을 비판해왔다.13) 하지만 최근에 독일의 학자들도 여기에 가세해서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을 맞이하여 냉전시대의 WCC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이들은 공산권의 붕괴이후 공산권의 비밀자료를 포함한 새로운 자료들을 분석하여 냉전시대에 WCC가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서술하였다.

        

먼저 보엔스(Armin Boyens, 전 WCC 직원)는 유진 블레이크와 그 이후의 WCC 총무들이 동서 사이의 균형을 잃고, 공산권 국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인권문제를 무시하고, 미국의 약점인 인종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역사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투쟁으로 이해하는 해방신학을 받아들이고, WCC 산하에 인종차별반대 투쟁 프로그램을 신설하여, 미국과는 투쟁하고, 동구권 국가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베지어(Gerhard Besier,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수)는  미국의 NCC를 연구했는데, 그는 미국 NCC는 50년대에는 비교적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60년대 부터는 혁명의 프로그램을 지원했고, 혁명의 대리인으로 행동을 해서 대부분의 미국기독교인들로부터 심각한 거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이런 미국 NCC의 행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미국 NCC를 더 이상 미국교회의 주류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14)

        

이같은 평가를 종합해 볼 때, WCC는 자본주의와 미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공산주의와 급진해방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III. WCC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문제제기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WCC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주의가 WCC에 대해서 갖는 의구심이 해소되어야 한다. 복음주의가 WCC에 대해서 갖는 근본적인 의문은 첫째, WCC가 공산주의를 포용하는 것은 분명하고,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냉혹하며,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관대하다는 것, 둘째, WCC는 맑시즘의 영향을 받아서 가난한 자를 위한 혁명을 지지하는 급진세력이라는 것, 셋째, WCC는 타종교와의 평화와 대화를 강조한 나머지 종교다원주의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며, 넷째, 이와같은 WCC의 신학과 활동은 결국에 가서는 복음전도의 열기를 식게 만들어서 기독교의 쇠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WCC 총회를 초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통합측은 이것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WCC가 용공이 아니며, 급진혁명사상이 아니며,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며, 복음주의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까지 WCC에 대해서 했던 말들이 다 거짓말이며, 근거 없는 이야기란 말인가? 따라서 필자는 우선 복음주의자들이 WCC에 대해서 제기했던 의문을 다시 제기하고자 한다. 여기에 대해서 WCC와 복음주의자들은 진정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

        

필자는 이와같은 대화가 WCC에 대한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다. WCC는 단지 종교행사가 아니다. 이것은 세계 기독교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모임이다. 무조건 참여해서 축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그 방향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것이 성서적인지, 그리고 그것이 한국교회가 바라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1. WCC, 공산주의, 그리고 한국교회의 자유수호

        

먼저 용공이라는 말을 정의해야 할 것이다. 글자 그대로 용공이란 공산주의를 용인한다는 것이다. 사실 냉전체재에 있는 한국에서는 용공은 큰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이것은 우리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차분하게 언급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 NCC와 WCC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한국 NCC지도자들은 한국기독교의 일원이며, 반공국가의 국민이기 때문에 용공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솔직히 내면으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표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지로 한국 NCC는 누차 자신들은 용공이 아니라고 강조하여 왔다. 이것은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대부라고 말할 수 있는 강원용목사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WCC는 다르다. WCC는 처음부터 이념의 초월을 이야기 했고, 이 말은 WCC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다 포함할 수 있으며, 다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48년 암스텔담 회의에서 이것은 분명하게 밝혀졌다. WCC가 한국전쟁에서 남한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것은 WCC가 반공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북한이 불법으로 침략했기 때문이다. 그 후 뉴델리 대회에서 공산권국가의 교회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고, 이것은 WCC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으로 공산주의를 용인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공산권국가의 교회지도자들은 일찍이 WCC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국의 챠오는 처음부터 WCC의 의장단의 한 사람이었으며, 체코의 공산주의 신학자인 로마드카는 처음부터 중앙위원이었고, 소련의 니코딤은 나이로비총회때 WCC의 총회장이 되었다.

        

1992년 미국 하원에 제출된 보고서에 의하면 소련은 WCC를 자신들의 정책과 이념을 세계에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15) 이 문서에 의하면 무신론국가인 소련이 러시아정교회를 이용하여 WCC에 접근하였다. 러시아정교회는 국제관계부에 100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비해서 교육부 직원은 10명 남짓하다.) 이들을 동시에 KGB 직원이다. 이들은 정교회 대표로 WCC에 들어가서 1983년 에밀로 카스트로를 WCC 총무로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 문서는 카스트로가 소련에 합당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카스트로는 소련의 후원아래 만들어진 공산권과 제 3세계의 교회연합체인 기독교평화대회(Christian Peace Conference)의 부의장으로 활동했으며, 이 단체는 WCC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16) 이렇게 해서 소련은 WCC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 문서는 소련이 어떻게 소련에 방해가 되는 국제여론을 바꾸는 가를 알려 주고 있다. 소련이 아프칸을 침공하였을 때, WCC는 여기에 대해서 즉각적인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산권에서 온 대표들은 만일에 WCC가 소련의 외교정책에 반대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면 자신들은 앞으로 WCC에 참석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 결의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이와같은 자료로 볼 때, WCC는 단순히 공산주의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이 정교회 인사들을 통해서 친소활동을 하는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한국 NCC는 WCC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WCC의 입장은 NCC에 전달되었다. 특히 1980년대 초, 카나다 뱅쿠버에서 모인 6차 WCC 총회는 평화를 강조하고, 이것을 구현하기 위한 첫 번째 장소를 한반도로 정했다. 이와같은 영향아래 한국 NCC는 통일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이런 용공적인 통일운동은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반공을 비판하였다. 특히 이것은 88년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17)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의 이데올로기를 종교적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한 죄를 고백한다." 다시 말한다면 반공이 죄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반공을 강조해온 한국교회에 대한 전면도전이다.

        

이와같은 NCC의 선언은 같은 NCC 교단인 장로교 통합측 내의 큰 반발을 일으켰다. 아직도 북한의 위협이 현존하는 가운데 반공을 회개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와같은 NCC의 입장은 한국교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경직목사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감리교와 기장을 제외한 한국의 대다수의 교단이 참여하고 있다.18)

        

한국교회는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자유를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WCC는 이것을 단지 냉전 이데올로기로 폄하한다. 그리고 NCC는 이것을 회개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와 사회는 우리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막았기 때문에 오늘의 민주화, 경제성장,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우선 이 문제에 대해여 WCC와 진지한 대화를 해야 한다.               

 

2. WCC, 혁명의 신학, 그리고 성령의 희망

         

WCC가 처음 출발했을 때, WCC는 책임사회를 강조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의 무질서를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책임으로 극복하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잘사는 나라들은 못사는 나라들을 위한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WCC에 60년대 들어서면서 맑시즘에 근거한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특별히 소위 제 3 세계 국가들이 WCC에 가입하면서 가속화되었다. 그들은 서구자본주의 국가의 도움으로 발전하기 보다는 서구자본주의 국가들과 투쟁함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제 3세계의 생각은 전략적으로 소련의 정책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다같이 자본주의가 적이었다.

        

여기에서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남미의 해방신학이다. 해방신학은 근본적으로 맑스의 계급구조를 전제한다. 즉 세계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이며,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자를 착취하며,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와 싸워서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WCC는 웁살라대회에서 이것을 공식화하였고, 이런 원칙에 의해서 세계의 수많은 투쟁사업을 지원하였다. WCC는 1970년에서 1979년까지 산하의 인종차별투쟁투쟁사업(PCR)에 3,063,545달러는 보냈다.19) 이런 WCC의 과격한 행동에 반발해서 구세군과 몇몇 교단들은 자신들의 회원권을 정지시켰다.

        

이와같은 WCC의 제 3세계 지향은 WCC의 중공에 대한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중공은 제 3 세계의 지도자였다. WCC는 계속 중공이 UN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부 WCC 간부들은 중공이야말로 인민해방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였다. WCC는 오래 동안 중공의 피비린내 나는 인권탄압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5년 겨우 중공의 인권문제를 언급했는데, 그것도 아시아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는 식이었다.20)

        

WCC의 이와같은 혁명의 신학은 친 서방 국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도록 만들었다. 미국은 공산권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반공을 내세우는 독재자를 지원하였고, 그 독재자는 자신의 정당성을 위하여 경제발전에 매진하였다. 특별히 한국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미국은 반공정권인 박정희 정부를 지원하였고, 박정희 정부는 개발독재를 시행하여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노동문제를 야기 하였다. 한국 NCC는 WCC와 그 연관단체들의 도움으로 독재에 대한 민주화 운동, 그리고 산업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운동을 진행하였다. 

        

필자는 WCC의 이와 같은 노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자 한다. 만일 NCC를 중심으로 하는 이런 민주화운동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이루어 질 수 없을지 모른다. 여기에 대해서 유신시대 독재정권에 대해서 단지 순종적이었던 복음주의 교회는 심각한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된 것은 단지 민주화 운동 때문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한국은 근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세계 안에 있었고, 또한 민주주의를 감당할 수 있는 경제발전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21)

        

미국은 일시적으로 독재정권을 지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은 끊임없이 독재정권에게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적어도 70년대 까지 미국은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미국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희망과 긍정적인 생각을 전함으로서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였다. 특별히 복음주의적인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근면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희망을 말함으로서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를 역동성있게 만들었다.22) 필자는 이런 점에서 산업화과정에서 노동운동만이 아니라 복음주의도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이제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제 3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줄 것이다. 사실 조용기목사가 전 세계적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그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한국이 어떻게 가난을 극복했는가를 제 3 세계에 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23) 만일 WCC가 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한다면 우리는 한국이 어떻게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 돋음 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복음주의 교회가 어떻게 빈곤극복을 위한 노력을 했는지 세계 교회에 알려 줄 수 있다.

 

 

3. WCC,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한국의 종교 간의 평화

        

WCC의 중심 과제 가운데 하나는 타종교와의 대화이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IMC에서도 언급되었던 것이지만 WCC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1년 뉴델리 대회에서였다. 그 후 이 문제는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1975년 나이로비 대회에서는 다른 종교의 지도자 5명이 참석하여 이 문제를 놓고 같이 토론하였으며, 뱅쿠버 총회에서는 타 종교 지도자 15명이 참석해서 그 중 5명은 주제강연을 하였다. 여기에서는 타종교와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24) 1989년 샌 안토니오 대회에서는 타종교인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다종교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자문을 받았고, 그 결과 1991년 캔바라 총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25)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나온 것이 바로 전현경의 초혼제이다. 그는 온갖 영들을 불러 궂을 하였다. 그 이후에도 WCC 내에서 이와같은 타종교와의 만남은 지속되었다.

        

그러면 WCC는 타종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원래 전통 기독교는 타종교를 죽은 신앙이라고 불러왔는데, 1970년대 부터 "살아있는 신앙"(living faith)으로 불렀다. WCC가 대화에 깊이 들어 갈수록 WCC는 점점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양보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에 나온 WCC의 가장 복음적이라고 불리는 문서인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컬 확언"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원이 다양한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자들에게 미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리스도인은 아직도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26) WCC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주장할 신학적인 확신을 갖지 못한 것이다. 이 같은 입장은 2000년에 발표된 "일치를 통한 오늘의 선교와 전도"문서에도 계속 반복되었다:2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외에는 다른 구원을 이야기 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어떤 제한을 둘 수 없다." 다시 말하면 WCC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하면서도 다른 구원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WCC 계열의 학자들의 글에서 잘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는 아예 그리스도 밖에 구원의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구원에 이르는 많은 길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이 폴 니터이다. 하지만 이것은 천하에 예수의 이름 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다른 이름을 준적이 없다는 성서와 배치된다. 둘째는 기독론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다. 이름은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그리스챤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종교인들에게 아직도 기독교제국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을 받는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이 천주교 신학자 칼 라너이다.28)

        

하지만 분명한 것은 WCC가 다른 종교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WCC 문서들이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제국주의적인 편견이라고 비판하는데서 잘 드러난다.29) 실질적으로 WCC 문서들은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다원주의는 신학자들을 통해서 한국에 전달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감리교 신학대학의 변선환교수이다. 그는 현재 WCC에서 진행되는 종교 간의 대화에 민감하였고, 이런 논의를 한국교회에 소개하였다.30) 그는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태도이며, 구원의 길은 여럿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교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래서 1992년 감리교에서 출교 당했다. 그 후 한국교회에서 종교다원주의 논쟁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현재 종교 간의 대화는 여전히 WCC의 매우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WCC가 타종교와의 대화를 주장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종교 간의 평화에 있다. 사실 이 지구촌에서 수많은 분쟁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쟁이 바로 종교 간의 분쟁이다. 이것은 특히 한국처럼 다종교 사회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에는 세계의 주요 종교가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럽이나 중동에서 볼 수 있는 종교 간의 갈등이 없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복음주의 기독교의 답은 정교의 분리이다. 종교 간의 갈등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되어서 다른 종교를 박해하기 때문이다.31) 이것은 종교개혁 이후 수많은 전쟁에서 이미 입증된 내용이다. 하지만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게 되었고, 따라서 종교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국가권력은 종교문제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 복음주의는 처음부터 정교분리를 주장해 왔고, 따라서 국가권력과는 관계없이 성장하여 왔다. 필자는 바로 이같은 정교분리에서 오히려 진정한 종교 간의 평화가 주어질 수 있다고 본다.32)       

 

 

4. WCC, 대화, 그리고 복음전도33)

        

오늘날 에큐메니컬 운동의 출발이 되는 1910년 에덴버러 세계선교대회는 세계복음화가 그 주제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에큐메니컬 운동은 세계의 복음화라는 본래적인 주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WCC의 역사를 들쳐 보거나 WCC의 홈 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정의, 인권, 해방, 대화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되고 있지만 세계의 복음화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보기 힘들다.

        

그래서 복음주의에서는 세계 복음화라는 연합운동의 본래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 로잔언약을 만들었다. 로잔 언약은 세계 복음화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분명히 하면서도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려고 노력하였다. WCC도 이같은 비판에 응답하기 위하여 1982년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컬 확언"이라는 문서를 발표하였다. WCC문서 가운데 가장 복음적이라는 평을 듣는 이 문서는 어느 정도 전통적인 개념의 복음전도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곧 이어서 WCC가 원래 강조하던 내용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가난한 자의 해방이다. 그리하여 복음전도라는 단어만 언급될 뿐 실제에 있어서 WCC의 프로그램 가운데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게 WCC가 복음전도를 소홀히 하는 이유는 WCC가 구원을 인간해방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1970년대 WCC의 방콕 대회에서는 오늘의 구원을 주장하였고, 여기에서 구원은 인간화라고 규정하였다. 즉 인간을 억압하는 가난과 독재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1982년 문서에서 여기에 영적인 축면도 덧 붙였지만 이것이 WCC의 실질적인 프로그램으로 나와 있지는 않는다.

        

WCC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WCC는 모든 종교 속에 궁극적인 실재가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대화는 이것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이지 선교를 위한준비가 아니다. 또 타종교 내에 궁극적인 진리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다원주의는 전도를 무력화시킨다.

        

또한 WCC는 천주교나, 정교회 같은 기독교의 다른 그룹과 함께 활동한다. 그런데 이들에게 속해있는 신자들 가운데 상당한 숫자는 단지 명목상의 신자에 불과하다. 복음주의 선교사들은 진정한 신앙인을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여기에 대해서 천주교와 정교회는 WCC를 통하여 이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래서 결국에는 이것은 개종 강요로 분류되어 금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복음전도를 상당하게 제약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WCC가 복음전도를 강조하지 않고, 전도를 시대에 뒤떨어진 개종강요로 생각하기 때문에 WCC의 가맹교단은 성장하지 못하고 쇠퇴하고 있다. 과거 에큐메나컬 계통의 교회는 미국의 주류교회였지만 지금은 점점 쇠퇴해서 비주류가 되고 있다. 그러나 복음전도를 강조하는 복음주의와 은사주의 교회들은 계속 부흥하고 있다. 이런 교회들은 변화하는 사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새로운 전략을 세워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한다.34)

        

한국은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원조수혜국에서 이제 원조제공국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선교에 있어서 더욱 분명하다. 한국교회는 선교를 받던 나라인데 현재는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나라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믿고, 불신자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복음전도에 열심인 교회였으며, 이런 전통은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었다. 한국교회는 WCC와는 다른 복음주의 신학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5. WCC, NCC, 그리고 한국교회

        

우리는 이상에서 WCC의 주장과 그것이 어떻게 한국교회에 반영되었으며, 여기에 대한 한국복음주의 교회의 반응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사실 WCC의 신학과 정책은 NCC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전달되었다. 많은 WCC의 문서들이 한국말로 번역되었고, 잡지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교회에 다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특별히 반공문제와 다원주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게 나타났다. 한국 NCC의 주요교단인 장로교 통합은 반공문제로 NCC 및 WCC와 갈등했고, 감리교는 종교다원주의로 WCC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를 파직시켰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WCC와는 다른 노선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업선교도 온건한 노조운동을 지지하는 한국교회에 의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사회의 혁명 보다는 인간의 변화를 주장하며,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통하여 종교간의 갈등을 해결하며,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신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모습은 매우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필자는 이번 WCC 총회가 한국교회의 실질적인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아젠다들이 얼마나 지역교회에서 외면당하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주제에 몰입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한국교회를 방문하여, 한국교회의 복음적인 신앙을 배우고, 그것이 돌이켜 죽어가는 소위 주료교회를 살릴 수 있다면 WCC총회는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IV. 맺는 말: WCC와 복음주의자들의 대화를 제안하며      

        

WCC는 2003년 부산총회에 회원 교단만이 아닌 전체 교단의 참여를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WCC가 용공이며, 혼합주의이고, 과격한 혁명사상이라고 생각하고 갈라섰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한 자리에 앉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과거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 그 내용은 매우 실망스럽다. 현재 에큐메니컬 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되는 것을 보면 복음주의자들이 WCC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오해라는 것이다. 즉, WCC는 용공이 아니며, 과격한 혁명이 아니고, 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하고, 복음주의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복음주의자들이 WCC를 비판하는 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WCC가 충분하게 복음전도를 강조했으면 왜 로잔언약이 나오게 되었는가?

        

현재 한국복음주의 교회를 WCC에 참여시키기를 원한다면 오히려 지금까지 WCC가 한국교회의 흐름과는 달리 진보주의 로선에 있었으며, 이것은 냉전시대의 종식과 더불어 잘못된 길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므로 이제 복음주의적인 방향으로 가려고 하니 한국 복음주의 교회에 여기에 힘을 보태 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이것은 WCC 대회를 한국에 유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통합측이 해야 할 일이다. 대부분의 통합측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복음주의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지금 통합측은 WCC가 아무런 문제가 없고, 복음주의이니 WCC 총회에 참석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WCC가 복음적이라고 믿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통합측 교인들이 복음주의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WCC와 NCC의 주도세력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통합 측은 WCC 로선은 진보주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한국 부산총회를 통해서 WCC 로선을 복음주의로 바꾸는 목표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국의 보수/복음주의교회와 협력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WCC는 온갖 대화를 주도해 갔다. 천주교, 정교회, 공산주의, 타 종교와도 열심히 대화를 한다. 하지만 WCC가 이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복음주의자들과 얼마나 진지하게 대화를 했는지 의심스럽다. WCC는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지극히 개방적이면서도 복음주의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WCC는 근본적으로 교회일치운동이고, 그 기원은 개신교이다. 그렇다면 WCC가 가장 힘써야 할 대상은 같은 개신교회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WCC는 동료 복음주의 교회들에게는 상처를 주면서 다른 집단들에 대해서는 인정받기를 원했다. 이것이야 말로 WCC 연합운동의 모순이다. 교회가 연합하려면, 그 교회들끼리의 공통분모를 찾아야 할 것이며, 그 기초 위에서 연합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에큐메니컬 운동은 타 종교, 타 집단과의 공통분모를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같은 개신교내의 여러 교파, 특별히 복음주의교회들과 공통분모를 찾지는 못 하였다.  

        

지금 현재 중요한 것은 WCC 총회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니다. 양쪽이 모려서 진지한 대화를 통해서 WCC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따져 보며, 거기에 기초해서 WCC 대회에 참여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1) 여기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최신의 연구는 존 루이스 개디스, [냉전의 역사] (서울: 에코 리브르, 2010) 가 있다.

2) Ans Van Der Bent, "Hromadka, Josef Lukl,"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Geneva: WCC Publications, 2002), 546-547.

3) 세계교회협의회 엮음, [세계교회협의회 역대 총회 종합보고서], 이형기 옮김 (서울: 장로교출판사, 1993), 53-57

4) 말린 벤엘데렌, [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 이형기 엮음 (서울: 장로교출판사, 1993), 55; 김흥수, "한국전쟁과 세계교회협의회, 1950-1953," [한국기독교와 역사] (2001), 107-144.

5) 이덕주, 조이제 엮음,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서울: 한들, 1997), 209.

6) 김준영, "에큐메니컬운동과 한국감리교회,"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컬운동], 박상증 편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116.

7) John C. Bennett and Paul Albrecht, "Cold War,"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213. 

8) 박명수, “반공, 통일, 그리고 북한선교,” [성결교회와 신학] (2009년 봄), 126-127.

9) 말린 벤엘데렌, [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 170-171.

10) Paul Mojzes, "Socialism,"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049.

11) 김용복, "기독교신앙과 경제," [에큐메니컬 신학과 운동] (서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99),177-201. 이것은 2000년에 발표된 "일치를 통한 오늘의 선교와 전도,"에도 그대로 나오고 있다 . 세계교회협의회,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124. 이 문서는 내부에서도 세계화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위의 책, 147쪽의 주 14번 참조.

12) 김영호 편, [건국 60년의 재인식] (서울: 기피랑, 2008), 제 6강, 대한민국 건국의 경제사적 의의 (안병직) 참조.

13) 어네스트 W. 레훼버, [암스텔담에서 나이로비까지: WCC와 제 3 세계]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1) 참조.

14) Thomas Wieser, "Reviewing Ecumenical History," The Ecumenical Review (April 2000).

15) 아래 정보는 주로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였다. "Soviet Active Measures in the 'Post-Cold War' Era,  1988-1911," A Report Prepared at the Request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by the 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June 1992. Appendix: Recent Revelations About Soviet Active Measures, Manipulation of the Russian Orthodox Church and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http://intellit.muskingum.edu/russia_folder/pcw_era/sect_16e.htm

16) Ans J. Van Der Bent, "Castro, Emilio,"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47; Milan Opocensky, "Christian Peace Conference,"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72-174.

17) 이덕주·조이제 지음,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402.

18) 여기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정성한, [한국 기독교통일운동사] (서울: 그리심, 2003) 참조.

19) 레훼버, [암스텔담에서 나이로비까지: WCC와 제 3 세계], 147.

20) 레훼버, [암스텔담에서 나이로비까지: WCC와 제 3 세계], 66-68.

21) 김영호 편, [건국 60년의 재인식], 168.

22) 김용기장로의 가나안 농군학교가 한국 산업화에 미친 영향은 오래동안 간과되어졌다. 오성현, "현대 한국복음주의와 윤리운동: 한경직, 김용기, 장기려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2010년 봄호) 출판예정. 한국의 경제성장과 오순절운동의 관계에 대해서는 Harvey Cox, Fire from Heaven: The Rise of Pente4costal Spirituality and Shaping of Religion in 21st Century (Cambridge, MA: De Capo Press, 1995), 228-234.

23) 여기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박명수, "한국 오순절운동의 세계화: 조용기목사의 국제사역," [영산신학저널] (2008), 7-63.

24) 세계교회협의회, [역대총회종합보고서] (서울: 장로회출판사, 1993), 431.

25) S. Wesley Ariarajah, "Dialogue, Interfaith,"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314-317.

26)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컬 확언," 41, 42; 세계교회협의회 지음,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62-63.

27) "일치를 통한 오늘의 선교과 전도," 58; 세계교회협의회 지음,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135.

28) Geoffrey Wainwright, "Uniqueness of Christ,"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661-1663. 

29) "일치를 통한 오늘의 선교과 전도," 65; 세계교회협의회 지음,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138.

30) 변선환, "타종교와 신학," [신학사상] (1984년 겨울), 687-717; 이정배, "종교신학의 역사와 전망," [에큐메니컬 신학과 운동] (서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99), 161.

31) John Locke, 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John Horton and Susan Mendus, ed. (London: Routedge, 1991) 참조.

32) 한국종교와 국가권력의 문제에 관해서는 박명수, "다종교사회에서의 국가권력과 기독교," [종교연구] (2009년 봄) 참조.

33) 여기에 대해서는 곧 출판될 필자의 [목회와 신학] 2010년 4월호 특집논문, "WCC와 복음전도: WCC는 과연 복음전도를 강조하는가?"를 참고하기 바란다.

34) Roger Finke and Rodney Stark, The Churching America, 1776-1990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92).

 

 박명수 교수
   서울신학대학교대학원
   미국보스톤대학교신대원(Ph.D)
   서울신대 신대원장

 

 

  •  이성민 
  • 복음주의 신학(-神學, evangelical theology) : 에반젤리컬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근본적 교리를 믿고 그 위에 신학을 세운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과 그 본질은 같으나 드러남에 있어서 소극적이고 내면화된 경향의 신학이다.

    근본주의는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악하다고 하는 성속 이원론을 주장하고 지나치게 영혼 구원과 개인 신앙생활에 치우치게 되자
    이를 보완하려는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  이성민 
  • 에큐메니칼(ecumenical)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누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파생된 말로서
    ‘전 세계적인 교회’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교회들을 연합하는 운동을 지칭하게 되었으며,
    특히 이 단어는 세계 교회협의회 즉 W.C.C.(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와
    그 산하 기관의 신학적 경향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들은 교파들의 교리적인 차이들을 서로 인정해 준 상태에서,
    모두가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믿음만 가진다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협의회는 자유주의나 민중신학의 개념을 넘어서, 종교다원주의로까지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