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고(The New Thought Movement )에 점령당한 한국교회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요동치고 있다.
‘2016년, 개신교 개혁 500주년을 맞는다. 우리는 복음주의가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국인들이 성경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Break Point) 미국 성경공회와 바나 그룹(Barna Group)은 미국 시민 2/3가 성경에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담겨있음을 믿는다.’라고 했다.
세계 최대 기독교 정보제공단체 중 하나인 라이프웨이 리서치(LifeWay)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에 관한 47개 항목 설문 응답자 3,000명 중 70%가 ‘참된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데 동의하고, 3명은 3위1체 하나님을 믿으며, 586명은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는 미국 교회가 대부분 이단 사조에 휩쓸려있다는 하나의 단적인 예로 보아진다. 아주 충격적인 것은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국 기독교인은 실제로 이교도이다.’, 응답자의 64%가 하나님은 범신론을 포함하여 모든 종교의 예배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60%는 모든 사람이 결국 천국에 간다.’는데 동의 했다고 한다.
라이프웨이가 조사한 미국인의 신학적 관점에서 ‘하나님’(American Theological Views; God)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설문조사 응답자 | 성령은 힘이지만 인격적 존재는 아니다 | 예수는 하나님이 창조한 첫 피조물이다 | 비고 |
미국인 | 64% | 19% | 미국 기독교인 10명 중 7명은 3위1체 참 하나님을 믿는다. |
흑인 개신교인 | 75% | 28% | |
로마 천주교인 | 75% | 21% | |
복음주의 교인 | 58% | 17% | |
주류 개신교인 | 74% | 17% | |
비기독교인 | 52% | 18% |
자료출처: LifeWay Research, by Bob Smietana
한국교회는 어떨까?《교갱뉴스》(2016. 6. 21)에 실린 이의용 교수(국민대)는〈시민사회의 입장에서 본 한국교회와 사회의 개혁의 방향〉이라는 제하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한국교회’에 대하여 ‘한국 교회의 부패의 주연이 목회자라면, 조연은 어리석은 평신도들이다.’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교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한국 교회 신자들은 복을 받기 위해 신앙을 갖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한두 가지 꼭 찍어서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볼 때, 한국 교회는 신사고라는 거대한 그물망에 덧씌워졌다는 생각이다.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앞의 1, 2에 이어서 글을 계속한다.
자신이 주인 되는 신념
‘자신을 주인 되게 하기’(Making Your Self the Master), ‘신사고 기록 보관소’ 문서에서 발견한 말이다. 신사고가 던지는 하나의 커다란 질문, 그것은 바로 ‘우리는 주(主)를 어떻게 만들고 싶은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이 유도하는 정답은「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6:24)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자기 ‘자아’(the Self)에 적용시키고 있다. 자신에 대한 ‘주인’ 의식은 곧 ‘자기 발견’(Self-Discovery), ‘자기실현’(Sef-Realization), 자신을 믿는 ‘자신감’ 인 셈이다.
그래서 신사고는 인간의 가능한 잠재력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주인’되는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자아를 아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의 자아를 아는 것은 주인이 되는 주된 조건이다.’ 이를 위해 ‘자아 성취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신사고의 개념을 입력시켜 그 프로그램대로 반응하게 하는 의도로 보인다.
미국의 철학자·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1842-1910) 박사는『종교적 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Religious Experience, 1902)에서 신사고를 ‘건강한 마인드의 종교’(The Religion of Health Mindedness)라 보고,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특징을 갖는다고 했다. 이런 특징에 한하여 신사고는 종교의 형식과 신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말하자면 종교적 신조는 종교 간의 갈등을 유발하고, 오히려 화합과 평등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신사고는 종교적 신조는 없지만 그들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정신은 물질보다 더 현실적이고 강력하며 마음은 육체를 고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belief)을 갖는다. 이런 신사고에 대하여 정통교회가 예민한 경계 반응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신사고가 ‘기독교에 근거’ 한다는 명분과 성경에 대한 현실 타협적 재해석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사고운동의 기본 텍스트북은 성경이다. 그러나 신사고 지지자들에게 ‘성경은 화합의 기본 교과서(The Bible is Unity’s basic textbook)이며, 성경은 오늘날의 경험(today's experience)에 대한 명확하고 도움이 되는 지침으로 이해될 때 살아있다.’라는 해석에 멈춰있다. 신사고의 이런 성경에 대한 그릇된 태도는 행크 해네그래프가 성경적 사고 능력을 상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문화적 변혁의 모방자로 변질’되는 ‘미끼’가 된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서 행크 해네그래프는 현실 교회를 향하여 ‘대중문화가 조금만 움직여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덥석 미끼를 무는 어리석은 존재가 되었다.’라는 말로써 일침을 가했다.
행크 해네그래프는 신사고의 ‘전면적 위협’에서 신앙적 정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절박하게 요청된다.’ 면서, ‘하나님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인식하는 전환’을 강조했다. 모든 참된 기독교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the Self)를 발견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기실현의 체험을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신사고의 ‘새 천년의 원리’, ‘번영신학’(The Prosperity Gospel), ‘믿음운동’(Faith Movement), 유체이탈(遺體離脫, Out of Body Experience)이 어떻게 기독교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새 천년의 신사고 원리
신사고에는 하나의 뚜렷한 주관적 ‘신념’이 있다. 신념은 객관적 성경의 ‘믿음’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으로 이해된다. 신사고의 신(神) 개념은 일반 종교의 범신론적 개념이다. 신사고의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두 가지 개념은 ‘신은 모든 것에 편재해 있으며’(the Divine is in all things.), ‘마음은 물질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고 강력하다.’(the mind is much more real and powerful the matter.)는 것이다. 이 개념은 신사고의 ‘새 천년 원리 17개항’에 기초한다. 마이클 마데가 편집한 ‘새 천년을 위한 신사고: 21세기를 위한 열두 명의 힘’『New Thought for New Millennium』(1998)에서도 저명한 열 두 명의 작가들이 그들의 ‘개인적 신념’을 기술한 글을 편집하여 제시한 것이다. 신사고의 신념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원리를 추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신사고의 신성연합 7개 신념: 신성연합(Divine Unity)은 ‘마음과 정신과학’(Science Mind and Spirit)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하나님(God)이 많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생략)신성한 존재(Divine Being), 존재(Being), 부처님의 본성(Buddha Nature), 신성한 현존(Divine Presence), 위대한 성령(Great Spirit), 여신(Goddess), 성령(Holy Spirit), 브라흐마(Brahma), 고등 권력(Higher Power), 그것이 바로 사랑(Love)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이름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다음 7개항의 원리에 근거한다.
우리는 모든 생명의 통일성(the unity)과 모든 생명의 단일성(the unity)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열매인 신성한 에너지(Divine Energy)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영적 진화(spiritual evolution)를 믿는다.
우리는 성령의 선하심과 우리의 본성적 선(innate goodness)을 믿는다.
우리는 책임과 연민(responsibility and compassion)을 믿는다.
우리는 치유(healing)를 믿는다.
우리는 모든 종교에는 진리가 있다(truth in all religions)고 믿는다.
우리는 영적 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를 믿는다.
‘우리는 죄가 실수임(sin is a mistake)을 가르친다.’
새 천년 신사고 원리: 다음은 신사고의 ‘새천년 원리’ 17개 항 중 중요한 몇 개만 소개한다. 신사고의 신념과 삶이 이들 원리에 근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신의 선(善), 마음, 무한존재, 영, 궁극적 실체인 것으로 확인한다. ①항
우리는 신성과 인성의 일치를 확인한다(the unity of humanity with the Divine). ④항
우리는 명상과 영적 실천의 힘을 확인한다. ⑤항:
우리는 보편적 인권을 확인한다(UDHR, 세계인권 선언). ⑦항
우리는 협력을 통해서(through co-operation) 정의된 창조적 신성을 확인한다. ➈항
우리는 육체적인 경험(a physical experience)을 가진 영적 존재이며 우주의 법칙에 부합할 때 균형을 이루고 평화롭게 살며 ‘번영’(prosper) 할 수 있다는 것을 단언한다. ⑪항
우리는 영적 진화의 진실을 육체적 진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을 확인하고, 이 진화는 우리의 신념에 의해 정의되고 반영된 진화 의식에 입증된 보편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다. ⑬항
우리는 건강과 조화에 초점을 맞춘 신사고 원칙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지상천국’(we are creating heaven on earth right now)을 창조하고 있다. ⑮항
이 원리에 기초한 신사고 운동가와 교사들은 기도를 강조한다. 그들에게 ‘기도는 신과의 단결을 경험하는 도구’이며,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한 방법이다. 그들은 긍정적 기도와 영적 마음(Spiritual Mind)의 치료를 위한 다섯 단계, 즉 ‘인식’(Recognition), ‘통일’(Unification), ‘실현’(Realization), 감사(Thanksgiving), ‘해제’(Release)를 통하여 치유의 경험을 한다.
그러나 신사고운동은 2000년~2016년까지 미국에서 17%~21%의 커뮤니티가 문을 닫을 만큼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 이유는 일부 신사고 운동가들이 이 원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자체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신사고운동 원리에서 주목되는 한 마디 말은 ‘일치’(unity)라는 단어다(이 단어는 다른 기회로 미루어 고찰함이 좋을 듯 하다). ‘일치’를 위한 다섯 가지 기본 신념에는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창조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영적 존재’, ‘우리는 사고방식을 통해 인생 경험을 창조’,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강화한다고 믿는 긍정적 기도의 힘이 있으며’, ‘이 영적 원리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그대로 살아야 한다.’라는 원리의 실천을 강조한다.
신사고의 천국과 지옥: 신사고에서 천국과 지옥은 ‘의식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에 불과하다. 다만 ‘지상 천국’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삶을 하나님의 편재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지옥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내면적 천국(하나님과 하나 된 의식)과 지옥(마음의 고통)에 대한 신념을 갖는다. 천국과 지옥은 신사고의 10개 영역 차원 가운데 4개의 상위 차원과 6개의 하위 차원으로 구분된다. 6개의 하위 차원에는 지옥(Hell; Naraka), 유물론(Materialism; Hunger), 본능(Animality), 거만함(Hubris; Asuras), 평온함(Tranquility; Humanity), 휴거(Heaven; Rapture)가 속하고, 4개의 상위 차원은 학습(Learning; Arhart), 실현(Epiphany; Realization), 보디사트바(Boddhisattva, 말레이시아 불교용어, 菩薩), 부다(Budda)가 속한다. 이들 10가지 차원에서 ‘지옥’은 ‘인간이 무력감을 느끼고(one feels helpless)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지각적 차원’이다.
신사고의 구원: 신사고의 ‘구원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사면이 아니라, 단지 신사고의 긍정적 축복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신사고의 사후: ‘신사고는 죽음과 보상 또는 판단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거부’하고, ‘하나님은 생명이며 지금 당신의 삶이다.’라고 가르친다.(God is life and that is your life now.)
신사고의 사탄: ‘성경적 사탄과 악마의 실제도 폐기된다.’ 신사고의 작가 도널드 커티스는 ‘물론 진짜 악마는 없다. 악마는 단지 걱정, 절망, 슬픔, 탐욕, 이기심 및 부정이라고 하는 것들이다.’
이상은 신사고의 신학이라고 이름을 붙일만한 내용으로서, 존 웰던(1948-1914) 박사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존 웰던 박사는 존 앵커버그 박사가 설립한 시카고의 앵커버그신학연구소(ATSI)에서 20년 간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베스트셀러를 포함하여 1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신학과 변증학,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한글로 번역된 저서 가운데는『왜 이슬람은 호전적인가?』라는 책이 있다. 신사고에서 또 하나 중요한 기본 원리는 ‘번영’(Prosperity, Blessed)이다.
번영복음
번영(축복)복음의 원산지는 미국이다. 현재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처럼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멀리는 동유럽 지역까지 수출되었다. 흔히들 번영복음을 20세기의 ‘유사 기독교 이단’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계보는 사실 19세기 신사고운동 철학의 혈맥을 잇고 있다. 이 철학은 건강(Health), 재부(Wealth), 성공(Success) 법칙을 가르친다.
노먼 핀센트 필: 번영복음은 뉴욕 마블협동교회 노먼 핀센트 필(1898-1993) 목사가 그의 책 ‘적극적 사고방식의 힘’『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1952)을 통하여 미국 대중에게 신사고의 아이디어와 기법이 소개되면서 기초를 다졌다.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과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은 그는 1922년 감리교 목사가 되어 50여 년간 목회했다. 그리고 철학자 랄프 왈도 트린(1866–1958)과 같은 저명한 작가들의 활동을 통해서 번영복음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섹 윌리엄 캐년: 신사고는 ‘베델성서연구소’(BBI) 설립자 감리교의 E. W. 캐년(1867-1948)에게 신학적 접근 동력을 부여하여 ‘번영복음’의 기초를 다지게 했다. 이로써 E. W. 캐년을 20세기 번영복음의 대중화 ‘원조’(元祖)로 주목하는 것이다. 해긴이 E. W. 개년을 대중화 했다면, 프레데릭 프라이스와 케네스 코플랜드 등은 해긴을 대중화한 공로자들이다. 해긴은 ‘레마성경훈련원’(RBTC, 1974) 창립자이기도 하다.
그랜빌 오럴 로버츠: 남침례회신학교 교수 러셀 S. 우드브리지 박사는 E. W. 캐년이 현대 번영복음 운동의 기초를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 목회 현장에 접목시키는 고리 역할을 했으며, 1940년대 말 신오순절 계통의 방송 전도사(Televangelist) 그랜빌 오럴 로버츠(1918-2009)가 ‘치유와 재정번영’(healing and financial prosperity) 사역을 통하여 목회 현장에 번영복음이 활성화 되게 했다고 한다. 1980년대 로버츠의 방송 프로그램은 미국 TV 종교 프로그램 중 대중적 시청률을 정점으로 이끌었다.
캐네스 해긴: 로버츠가 번영복음을 확산시키고 있을 즈음 케네스 해긴이 E. W. 캐년의 사상을 잇는 ‘현대 믿음 운동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해긴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캐년의 설교와 출판물을 대중화하고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2년 케네스 해긴은 자신의 신념을 선전하기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1937년 남침례회에서 ‘출교’당한 것과는 상관없이,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런 영향력으로 해긴은 E. W. 캐년의 사상을 대중화 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의 제자 프레데릭 프라이스, 케네스 코플랜드, 로버트 틸톤, 베니 힌, 찰스 캡스, 제리 사벨 등은 케네스 해긴 선전에 앞장섰다.
번영복음이 무엇인가? 케이트 보울러 박사는 ‘미국의 종교적 장면의 대부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가장 큰 교회 중 일부를 차지하는 영적, 육체적, 재정적 지배의 격렬한 대중적 기독교 메시지로 정의’ 했다. 그러나 번영복음은 미국의 기독교 변증단체(AIA, Ankers In Action; CRI, Christian Research Institute, 행크 헤네그래프, 편집을 맡고 있는 엘리엇 밀러, 그 외 The Federalist.com)들로부터 기독교 메시지와는 다른 것으로 비판되고 있다. 번영은 ‘축복’을 대신하는 표현이다. 번영의 네 가지 구성 요소는 ‘믿음’(Faith), ‘재부’(Wealth), ‘건강’(Health), ‘성공’(Success)이다.
많은 기관과 단체의 지원에 힘입어 활동하고 있는 번영복음은 ‘믿음의 말씀’(WOF, Word of Faith) 운동이라고도 하는데 교단 조직은 없지만, 그 파급 효과와 신속성을 고려한, 미디어를 통한 전 세계에 번영복음 선전에 거의 독보적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번영복음의 영향력: 초기의 번영복음은 오순절교회, ‘긍정적인 고백’(긍정적 이론) 이론을 전개한 E. W. 캐년 목사 등에 의하여 제시된 세 가지 신념, 즉 모험적 생각인 ‘상향이동’(upward mobility), 개인주의(individualism), 재부(wealth)와 같은 전형적인 미국인의 세속적 가치관이 가미된 사고(思考)에서 비롯된다. ‘믿음의 말씀’(WOF)의 ‘근사체험’(Near-Death Experience) 설교가 케네스 E. 해긴, 유대인 출신으로서 이스라엘 TV 방송인, ‘기적 십자군’ 부흥(‘Miracle Crusades’-revival meeting)의 베니 힌 목사, 은사와 ‘믿음의 말씀’의 운동가 케네스 코플랜드, 미국 TV 방송 전도자 폴 크라우치, 캘리포니아의 C.C.C.(Chrenshaw Christian Center) 설립자 프레드 프라이스와 같은 인물 대부분이 캐년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은 번영복음 나팔수들이다.
1973년 설립한 세계 최대의 기독교 TV 네트워크인 TBN(Trinity Broadcast Network)은 ‘전 세계 최대의 신앙채널’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TBN은 전 세계 70개의 위성채널, 18,000개 이상의 TV, 케이블 계열사에 방송되고 있다. 이렇게 신사고운동이 전 세계를 점령하다싶이 한 상황에서 개신교는 너무 안일한 시간들을 보냈다는 자책감이 든다. 이는 과거 유럽에서 개혁교회들이 200년간 교리 논쟁을 하고 있을 때, 유럽에서 선교 지반을 상실한 로마천교가 남미와 아시아 등, 해외 선교지를 선점했던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미어진다.
1980년대, 번역복음은 이른바 텔레비전 전도사(Televangelist) 전성시대의 제리 파웰, 지미 스와가트, 팻 로버트슨, 짐 바커, 로벗 H. 슐러, 오럴 로버츠 목사 등의 활약으로 미국 교회를 점령했다. 지미 스와가트 목사는 매주 3,000개 이상의 방송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신사고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한 때 매춘 스캔들로 곤경에 처한 적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TV 채널을 활용하여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다른 복음」(갈1:6~10)을 전송하고 있는 것이다. 짐 바커 역시 성 스캔들로 몰락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 20세기 미국에서 대중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번영복음 운동 인사들 일부는 성과 돈의 스캔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번영복음의 성경배경: 미국의 저술가 놀만 빈센트 필 목사는 이단으로 평가된 ‘긍정적 고백’(The Positive Confession)인 ‘긍정적 생각’『Positive Thinking』(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 1996), 또는 ‘긍정의 힘’,『The Positive Power of Jesus Christ』(1980),『Positive Thinking Every Day』(1993)을 통해서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필은 추종자 로버트 슐러 목사와 함께 ‘긍정적 사고’로써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인물이다. 그의 ‘긍정적 사고’ 혹은 ‘긍정적 고백’을 일러서 ‘건강과 재부’라고도 하는데, 그 성경 배경이 바로 빌립보4:8절이다. ‘긍정적 고백’은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 기대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이루어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주문하듯) 입으로 반복하여 말하는 형식이다. 이 형식에 어떤 이의를 제기할 그리스도인이 과연 있을까? 그러나 표현 형식에는 무서운 함정과 덫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소원을 비는 반복적 행위인 말 자체의 마력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이를 ‘매력의 법칙’(Law of attraction) 개념이라고 하는 것인데, 성경과 배치되는 개념이다. ‘긍정적인 고백’은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다.
번영복음의 요점: 반복하지만 번영복음은 건강, 재부, 성공과 같은 세 가지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자극시켜, 잃어버린 것과 아직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자신의 잠재력으로 충족케 한다는 함정과 덫이 있다. 만일 건강과 재부, 성공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면, 이런 추구가 바로 기독교를 종교화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건강과 부(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히려「자기를 비워」(빌2:7) 인간의 조건을 담당하시고 섬김의「종」(빌2:7; 막10:45)이 되어「죽기까지 복종」(빌2:8)하여「고난」(히2:17~18; 5:8)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그의 산상설교에서도 ‘가난한 행복’(마5:1~16, 필자의 표현)을 가르쳐주셨다. 번영복음은 예수를 믿으면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을 왜곡하여 사람들의 환심을 싼다. 만일 하나님과 성령,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목적이 아닌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수단화 한다면,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된다.
그러나 이 잘못이 교회의 부흥 모델로 수단화 된다면 더 큰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영복음은 역사적으로 초대교회 시대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다른 교훈」(딤전6:3)에 대하여 디모데에게「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한」(v.3) 자들은「마음이 부패」(v.5)하여「경건을 이익의 방도」(v.5)로 삼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v.9) 되는 것을 엄중히 경고한 바 있다.
건강: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 그의 위대한 사랑과 큰 자비 가운데서 모든 신자가 병들지 않고 세상에서 살다가 마지막에 예수님 안에서 잠들 것을 믿는다.’ (케네스 E. 해긴). 누구나 이런 소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과 범죄한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는 고통이 피치 못한 질병일 것인데, 모든 질병이 다 죄로 인함은 아니며(요9:2~3), 믿음이 없어서 병을 고침 받지 못함은 더욱 아니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삶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성숙된 신앙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시119:71, 72). 간혹 병 고침을 받고 예수를 믿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병 고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적 환희를 체험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건강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은 곧 번영신학의 미끼다. 성경은 예수 믿는 것보다 더 큰 복이 따로 없음을 확실하게 가르치고 있다. ‘축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하나님은 복」되시다.(딤전6:15)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욥이 아내에게 당한 모욕이다.「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욥4:7), 친구들의 조소적 비난이었다. 그러나「욥이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2), 가진 것 다 잃고 병든 몸이 된 욥의 모습은 참아 눈으로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라고 고백했다. 욥은 가난과 고독과 고난 가운데서 그가 믿는 하나님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이런 욥에 대하여 욥기42:12절은「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라고 했다. 아마도 욥의 믿음이 ‘처음보다 더’ 한데 따른 결과였을 것이다.
재부: 번영복음을 외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가 신약성경 요한3서 2절의「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이다. 물론 케네스 코플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케네스는 1974년 초판을 낸 후 28번이나 판을 거듭한 그의 ‘번영의 법칙’『The Laws of Prosperity』(1974) 역시 이 성경구절에 근거하며, 이는 ‘번영을 지배하는 영적 법칙’으로서,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는 위대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작성되었다.’라고 구미를 돋우게 하는 책이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영적 번영과 성숙이 물질적 축복으로 가시화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물론 억지 해석이다. 이단의 함정과 덫이다. 케네스의 아내 글로리아 역시 영적 축복과 물질적 축복이 정비례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물질적 축복이 영적 번영의 표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요일2:15; 16, 17). 예수님은 물질이 영혼에 미칠 해악을 경고하시면서(눅8:14),「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는 말씀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cf.벧전3:17; 히4:19). 사도 바울은 건강(cf.고후12:8~12), 재부(cf.빌4:12), 세상적 성공(cf.빌3:2~14),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얻지 못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인생 승리를 고백한 것이다.(딤후4:7~8)
좀 오래된 자료이긴 차지만 참고할 가치는 있다고 생각된다. 2006년《퓨포럼》(Pew Forum) 조사에 의하면, 미국 기독교인 응답자의 46%가 ‘하나님은 충분한 신앙을 가진 모든 신자들에게 물질적 번영을 주실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설문조사에 응한 전 세계 10개국 중 비교적 하위 수준인 8위에 묶인 셈이다. 조사에서 칠레 기독교인들은 미국보다 더 적극적인 반응이었다. 중요한 것은 응답자 중 46%가 인간의 본능적 욕구 충족에 기대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성장 가도를 달리면서 이른바 ‘삼박자 신앙’, 즉 마음의 평안, 물질적 축복, 육체의 건강과 같은 번영복음에 휘말린 채 신앙과 신학적 궤도를 이탈해 버렸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즈음하여 한국교회가 살 길은 성경의 나침반을 앞에 놓고 진로 궤도를 바로 수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공: 번영복음에서는 ‘성공’을 부추긴다. 러셀 우드브리지 박사는 건강, 재부, 성공적 안전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라는 것을 전제하고, ‘이들 욕구는 본질적으로 죄가 아니지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대신한다면 죄가 된다.’ 라고 했다. 우리의 안전과 신뢰를 예수 그리스도 외 다른 어떤 것에 두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가 된다. 번영복음이 미국에서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메리칸 드림’(the American Dream)의 이민자들에게 성공에 대한 ‘복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非) 물질적인 신앙이 물질적 현실로 가시화 되었을 때 이민자들은 추상적인 ‘성공’을 실제로 체험하는 기적이라고 이해되었을 것이다. 번영복음이 비물질적 신앙을 물질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증명하거나 상징화 하는 것은 분명 성경의 왜곡이다.
번영복음이 미국에서 신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적 부(富)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창출해 내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편이라고 말할 명분이 될 수 있다. 그럼 가난한 사람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목회자와 교인들은 종종 자기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 세상과 사회에서 교인들은 세속적 가치와 문화에서 초연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행복, 기쁨, 성공을 세상적 가치와 문화의 기준으로 정의할 때가 많다. 거룩함과 신실함, 말씀에 대한 순종보다 권력과 지위, 재부의 기준에서 성공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이것이〔신사고에 점령당한 한국교회〕에 대한 러셀 우드브리지의 책『건강, 재부, 행복: 번영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늘지게 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는 이제 한국 교회가 옷깃을 여미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성공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나 단순하게 말하면 인간의 ‘욕구 성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간에 개인적 욕구 성취를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ADDICTED 2 Success》, ‘성공조언’(Joel Brown), ‘성공으로 이끄는 15가지 생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긍정적 생각’이다. ‘긍정적 사고는 삶의 밝은 면에 초점을 맞추고 긍정적 결과를 기대하는 정신적, 정서적 태도’로 간주된다. 존 S. 할러 박사의 ‘신사고의 역사; 정신 치료에서 긍정적 사고 및 번영복음에 이르기까지’,『The History of New Thought: From Mind Cure to Positive Thinking and The Prosperity Gospel(Swedenborg Studies)』(2012) 역시 긍정적 사고의 의학적 효능을 반증하는 것이라 말할 것이다.
유타 주 사우스 마운틴 커뮤니티교회의 드레이퍼 캠퍼스의 릭 핸더슨 목사가 쓴 ‘번영복음의 거짓 약속’은 조엘 오스틴, 조이스 마이어 목사를 조준하여 ‘그들의 오류가 너무 뻔뻔스럽다.’고 비판했다. 번영복음은 번영하기 위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수단화 한다는 측면에서 기독교가 아닌 일반 종교의 형태인 것이다. 소원 성취를 위해 교회와 신앙을 수단화 하는 것은 성경적 신앙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여 말해야 할 것 같다. 성경적 신앙은 자신의 소원 성취가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나라」와「그의 의」(마6:33)가「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이다.(마6:9~13)
그리스도인이 부자가 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부자가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다만 부를 자신을 위해 얼마나 사용해야 하는가는 개인의 신앙에 따라 한계를 결정할 일이다. 한 마디 충고가 필요하다면, 최대한의 절제가 필요할 것이다. 물질적 축복이 결코 영적 축복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는 평소 사도 바울의 성공적 삶에 대하여 감탄을 금치 못한다.「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3:12)는 말씀이다. 기독교인은 물질적 여유가 있을지라도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는 최대한 절제하고 베풀며,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는 삶이다. 이를 단순한 삶이라고도 말한다.
번영복음 교회들의 번영: 필자는 글을 쓰면서 신사고에 점령당한 교회와 목회자들의 실제적인 부(富)를 추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마침 미국 듀크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캐서린 보울러 박사의 전문 5장으로 구성된 257쪽에 달하는 학위 논문 ‘축복: 미국 번영 복음사’〔Blessed: A History of the American Prosperity Gospel〕(2010)라는 논문 한편을 발견했다. 이 논문은 2013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20세기 한 세기 동안의 ‘번영 복음운동 전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첫 번째’ 책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논문은 미국 번영복음 교회로 분류되는 대형교회는 최대 2만 명, 전체 회집 인원은 평균 6,834명으로 조사되었다. 다음 표는 논문에서 미국 번영복음 교회의 발전 양상을 나타낸다.
참가인원수 명 | 대형 번영복음교회 % | 전체 번영교회 % |
2,000~2,999 | 16.2 | 53.8 |
3,000~3,999 | 12.8 | 19.1 |
4,000~4,999 | 9.3 | 11.1 |
5,000~9,999 | 40.7 | 12.0 |
10,000~이상 | 21.0 | 4.00 |
대형 번영복음 교회들은 주로 미국 동·남부에 포진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주에도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를테면 텍사스 주 11개, 캘리포니아 주 9개, 조지아 주 8개 등이다. 번영복음 교회 중 오순절 계통의 하나님의 성회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눈길을 끈다.
번영복음 목회자들의 번영: 미국의《NewsMax Media》(2017.1.5)가 선정한 북미주 50대 대형교회는 캘리포니아의 새들백교회, 텍사스 주의 포터스 하우스, 레이크우드교회, 일리노이 주의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오클라호마 주의 라이프교회(실제로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 순위로 이어졌다. 이들 대형교회 목회자의 사례비는 얼마일까? 일반적으로 교회는 목회자에게 은근히 가난을 강요하는 것 같다. 목회자가 가난해야 ‘은혜’(?)가 된다거나 ‘존경’스럽다는 말을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목회자가 고급 승용차를 타면 입방아에 오르기 십상이다. 언젠가 서울의 한 대형교회 목회자의 고급 승용차를 두고 언론이 무차별 씹은 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거룩한 위선자들’(Holy Hypocrites), 번영복음을 지지하는 목회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번영복음을 외치는 목회자들의 실제 생활은 어떨까? 미국 미네소타 주 온라인 뉴스인 《가제트 리뷰》에 의하면(2016.2.27) ‘2017년 세계 10대 부자 목회자’ 상위 그룹에는 나이지리아의 데이비드 오데데포 주교 1억5000만 달러(약2천억 원), 미국의 토마스 제이크 목사 1억4천700만 달러(약1,800억 원), 나이지리아의 크리스 오야크롬 목사 5천만 달러(600억 원 정도), 유태인계 미국인 베니 힌 목사 4,200만 달러(500억 원), 나이지리아의 에녹 아예 보데 목사 3,900만 달러(약500억 원)로 각각 이름을 올렸다. 케네스 코플랜드 목사는 2,500만 달러(약330억)로 세계 7위,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2,500만 달러(300억 원 이상)로 8위에 머물렀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에서 상위 15명의 부자 목회자다.《Before it's NEWS》(2016.1.9)에 따르면, 케네스 코플랜드가 순자산 760만 달러(약93억 원)로서 최상위, 그 다음 팻 로버트슨 1억 달러(1,200억 원), 베니 힌 4,200만 달러(500억 원 이상), 조엘 오스틴 4,000만 달러(500억 원), 크레플로 달러 2,700만 달러(약35억)로 나타났다. 이 순위는 《VIRALWORLD》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발표되었다.
이상 소개한 목회자들의 자산은 주로 방송활동, 영화감독, 저술, 유산 상속 등의 수입으로 형성되었으며, 일부 목회자들은 신사고의 번영복음을 지지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그의 논픽션 책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2002)은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초교파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다음’(second only to the Bible)의 베스트셀러였던 점을 고려하면, 그 인세(印稅) 수입도 만만치 않으리라. 독자들은 아마도 릭 워렌이 신사고에 경도된 목회자라는 것을 알리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번영복음 활동 전위대는 ‘우리의 신앙은 우리 안에 있는 선한 것들을 인정할 때 가장 효과적이다.’라는 말을 한 조엘 오스틴 목사, 대형교회 포터하우스의 토마스 덱스터 제이크 목사, 저명한 기독교 작가 조이스 메이어(Joyce Meyer) 등이다.
성경에서 찾는 번영: 가난이 경건의 척도는 아니다. 물질적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번영’을 뜻하는 영어 ‘프로스퍼리티’가 구약성경(NIV)에 32번(신28:11~슥1:17) 사용되었는데, 개역개정 한글 성경은「많게 하시며」(신28:11,「모든 것이 풍족」(28:47; 욥20:22),「복」(신30:15; 욥22:21; 시122:9; 렘32:42; 렘39:16; 렘가3:17),「행복」(욥21:16; 전6:3, 6),「형통」(욥36:11; 시73:3; 106:5; 128:2),「선」(시4:6),「평안」(시25:13; 사45:7),「풍성」(시37:11),「평강」(시72:3,7; 잠3:2),「번영」(시128:5),「부귀」(잠18:8),「공의」(잠21:21),「좋은 일」(렘17:6),「평안」(렘29:7; 33:9; 단4:27),「풍부」(슥1:17) 등 매우 다양한 말로 번역되었다. ‘번영’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본주의 가치관에서 취급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이 세상의 모든 환경에 감사와 은혜로 처할 수 있게 가르친다.
번영을 말한다면, 예수를 믿는 것보다 더 큰 번영이 있겠으며, 성공을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 이상의 더 큰 인생의 성공이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죄 용서함을 주셨다. 이 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있을까? 다윗은 남다른 번영과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백은「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cf.시1:1~6)라고 했다.「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73:25~28). 삶의 과정에서 수없이 만날 수 있는「푸른 풀밭」(시23:2),「쉴만한 물가」(시23:2),「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믿음이 바로 축복된 삶일 것이다.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438),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390)라는 가사에서 그 축복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믿음운동
믿음운동(FM, Faith Movement)은 20세기 말 오순절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원조(元祖)는 역시 E. W. 캐년, 그는 최면 요법의 대부 피니어스 큄비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깊이 연구했다. E. W. 캐년의 믿음운동을 대중화시킨 인물이 바로 케네스 해긴이다. ‘믿음의 말씀’(WOF)운동은 ‘믿음의 힘’을 강조한다. 일반적 신앙에서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에서「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한다면 번영복음이 강조하는 ‘믿음의 힘’의 올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믿음의 말씀’운동은 기본적으로 정통 기독교와 신비주의의 특별한 혼합이다. ‘믿음의 힘’(The ‘force’ faith)은 비성경적 신앙의 시각이 ‘믿음의 말씀’의 신학적 기초이다. 신사고의 믿음운동에서는 신사고운동가들에게 주어진다는 특별한 ‘계시 지식’(revelation knowledge)을 성경보다 우위에 둔다. 이는 성경의 완전성(히1:1,2)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믿음이 과연 힘일까?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이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이다. 믿음운동에서 비상식적 오류들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실예로 든다.
하나님: ‘하나님은 주권이 없다.’(God is not sovereign.).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배하시고 계심을 확인시켜 준다.(롬9:14~16)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예수를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창조의 근본」이심으로 결코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으신다.(계3:14,17).
속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고, 지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다시 태어나 풀려났다.’ (이는 ‘속죄’에 대한 신사고의 재작성과 재정의, rewritten and redefined).
그러나 그ㅜ리스도는 다시 태어나시지 않았다.「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나신바 되었으니」 (벧전1:19~20; cf.눅23:42~43; 요19:30).
사람: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한 신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복사본’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지어졌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열등의식 없이 하나님 임재 안에 설 수 있다.’(케네스 해긴)
그러나 사람은 신이 아니며, 결코 신이 될 수도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참 하나님」(요17:3)은 한 분 뿐이다.「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43:10).
믿음: ‘믿음(신앙)은 힘이다. 그것은 실제적인 힘이다. 믿음의 힘은 말로 풀린다. 믿음으로 충만한 말은 생명의 영을 작동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힘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히11:1)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때 그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거듭남: ‘다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성육신이며, 기독교는 기적이다. 신자는 나사렛 예수처럼 성육신한 화신이다.’(E. W. Kenyon).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요1:14)은「근본 하나님의 본체」(빌3:6)로서「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v.7)되시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v.8)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난 신분과 성화(聖化)의 과정 단계이다. 신자의 거듭남이 단연코 화신(化神)이 아니다.
미국 기독교 연구소의 행크 해네그래프는 ‘믿음운동’에 관하여 ‘이 운동이 정통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시대의 위협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말을 전제하면서, 오류와 믿음의 기적, 위조된 그리스도는 모두 믿음운동의 ‘공통분모’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믿음운동은 E. W. 캐년의 형이상학적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으며, ‘내가 고백하는 것, 내가 소유하는 것’(What I confess, I possess)과 같은 용어들이 대부분 캐년에 의하여 유포(流布)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초청하여 마지막 설교한 내용이 사도행전 20:17~35절에 기록되어 있다. 바울 사도는 설교를 하면서 특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v.27)는 말을 강조했다. 왜냐하면「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vv.29~30)는 경계심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뜻이 아닌「하나님의 뜻」이 에베소 교회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했다. ‘번영복음’의 ‘믿음운동’ 혹은 ‘믿음의 말씀’(WOF)은 실제로 성경을 교묘하게 인용하기 때문에「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신사고의 이단 함정과 덫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체이탈
한 때 일부 야당 국회의원들이 여당 의원이나 대통령 발언에 대하여 ‘유체이탈(OBE., Out-Of-Body) 화법’(遺體離脫話法) 이라는 표현으로 비판한 말을 들은적이 있다. 저속한 표현을 빌리자면 조금은 비아냥거림의 ‘정신 나간’ 허튼 소리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유체이탈’ 은 정신(혼)이 몸을 떠난 상태에서 느끼는 감각적 체험을 일컫는다.
몇 년 전 필자는 ‘죽음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가 쓴 25권의 책 중 13번째 책인 ‘사후생: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최준식)『On Life After Death』(Celestial, 1991)를 관심 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저자는 스위스 취리히 태생 미국 정신과 의사, 호스피스운동의 선구자, ‘죽음의 연구가’, 미국 시사주간지《Time》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폭넓은 학문적 연구와 축적된 임상 경험을 통한 환자들의 죽음에 임하는 다섯 단계, 즉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 단계를 거친다는 내용을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저자가 쓴 책들 대부분은 죽음에 관한 내용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은 죽어가는 환자들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퀴블러 로스는 그의 책에서 ‘유체이탈’, ‘근사체험’(near-death experience), ‘영성’(교회에서 이 말을 쓰는 것이 올바른지는 다소 의문), ‘환각’ ‘산티 닐라야’(Shanti Nilaya)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 퀴블러 로스의 자서전 격인 ‘생의 수레바퀴’(강대은, 황금부엉이, 2010)『The Wheel of Life』(1997), 그리고 미국에서 30만권 이상의 판매 기록을 올린 ‘유체이탈’의 선구자 로버트 몬로(1915-1995)의 ‘유체이탈 여행’『Journeys Out of the Body』(1971), 빅터 프랭클린(1905-1997)의 ’의미를 찾아서‘(이시형, 청아, 2007)『Man's Search for Meaning』(2005)에서 ‘실존 분석적 정신요법’의 ‘로고테라피’(Logoterapy, 언어치료)의 공통점은 신사고의 개념이 짙게 깔려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퀴블러 로스의 ‘생의 수레바퀴’『The Wheel of Life』(bhavacakka)에서는 불교의 교의인 ‘법륜’(法輪), 육체를 떠나 돌아가야 할 ‘궁극적인 평화의 집’으로서의 “산티 닐라야”(Shanti Nilaya,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용어들은 신사고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판단이다.
‘유체이탈’은 ‘아스트랄 여행’(Astral Travel, 삼하 7:4ff. 행16:6ff. 18:9), ‘아스트랄 프로젝션’(Astral Projection)이라고도 하는데, 동·서양에서 유사한 개념과 형식이 전해지고 있다. (Michael Raduga). 이 개념과 형식에는 ‘영혼 교류’ 사상이 담겨있다. 우리나라 토속문화에 ‘초혼’(招魂)은 사자(死者)의 옷을 지붕위에 얹거나 사람이 직접 지붕위에 올라가서 사자의 옷을 흔들면서 육체를 이미 떠나버린 혼(魂)을 불러들이는 의식이 있다. 이는 한국적 영혼교류 민속 사상일 것이다.
한 때 한국 사회에서 ‘전생체험’, ‘유체이탈’ 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 역시 신사고 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 교회와 사회가 온통 신사고에 점령당했다는 생각이다. 신사고는 정치, 종교, 문화예술, 음악, 나이와 성별의 범위와 한계를 넘어서, 개인의 일상적인 생활 영역으로까지 골고루 퍼져있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신사고의 최면과 세뇌(洗腦)에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사고는 최면과 세뇌의 방법으로 무의식 상태에서 특정 조정에 의하여 의식적 반응을 보이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체험했다.(고후12:4). 그것은「주의 환상과 계시」(고후12:1) 체험이다. 결코 ‘유체이탈’ 체험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주의 환상과 계시」의 체험을 말하기에 앞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고후11:3),「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v.4),「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v.4),「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v.4),「기회를 찾는 자들」(v.12),「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v.13, 14)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 사도 자신이 체험한 영광을 조심스럽게 말한 것이다. 위대한 사도로서 놀라운 체험을 자랑하지 않았다.(고후11:21, 29, 30)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12:1~4)라는 구절을 혹자들은 ‘유체이탈’과 연계시킨다. 무리한 적용이다. 사도 바울은「환상과 계시」체험을「무익」(고후12:1; cf.고전2:1~5)하다고 했다. 구약의 선지자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체험한 계시를 비롯하여 성경 이외 또 다른 계시의 체험이 과연 필요할까? 사도 바울은「성령을 거스리」(갈5:17)는「육체의 욕심」(v.16)인 ‘마법’에 대하여「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0, 20)라는 말로 단호하게 경고했다.
‘유체이탈’에 대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임상실험적 증명은 본고가 언급할 사안이 아니다. 다만 ‘유체이탈’을 성경과 연관 시켜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라는 것을 지적할 뿐이다. 성경은 인간 구원을 위한 성경 이외 다른 어떤 환상과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체이탈 체험을 위한 정신 집중, 명상과 같은 단계는 신사고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동시에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마무리 글
신사고운동은 ‘서방세계의 종교 역사에 있어서 낡고 틀에 박힌 교리에 저항하는 반란이다.’라는 말이 왠지 마음에 켕긴다. 단순한 말로 받아들이기에는 마음이 개운치 않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현실 교회의 현장에 대한 불안을 지울 수 없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일까. ‘저항하는 반란’은 어디서든지 발생할 수 있기에 긴장된 성찰과 회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거듭된다.
이제야 늦게나마 돌이켜보면, 그동안 한국 교회는 아픈 마음을 부여안고 통곡해야 할 시대 상황에서 고통당하는 이웃의 눈물을 외면한 채 에둘러 웃었다. 교회와 교인들이 모이는 집회에는 어김없이 호탕한 웃음이 터졌다. 마치 1994년 ‘토론토 축복’(The Toronto Blessing)의 ‘웃음부흥’(Laughing Revival)인 듯 착각하리만큼 말이다. 이에 질세라 기독교 TV 방송 매체는 작심이라도 한 듯 ‘만담류’의 강사들을 고정 프로그램에 내세웠다. 신·불신 간의 많은 사람들이 TV 앞에서 웃는 재미를 느꼈다. 웃음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사고의 바람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온 그릇된 ‘종교문화’가 교회를 점령했다는 비통한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왜 죄에 대한 통분과 불의에 대한 정의로운 외침이 들리지 않을까? 그래서 웃음에 도취된 교회와 교인들을 대신하여 광화문의 촛불함성이 열한 번째나 북악산을 울리고 있는 것일까?
지금 대한민국이 대내외적으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것은 교회가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과 나라 위해 진심어린 기도를 뜨겁게 하지 못한 탓이며,「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한 주기도문의 삶을 바로 실천하지 못한 탓이며,「좌우에 날선 검 보다 예리」(히4:12) 한「하나님의 말씀」으로써「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못한 탓이리라. 설교자들은「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마6:33)를 추구하는 열정 보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데 더 열심하지 않았을까! 신사고운동 목회자들처럼 말이다.
목회자들 가운데 누군가는 ‘미국의 희망의 목소리’로 불리는 조엘 오스틴 목사를 흠모했거나 하고 있을지 모른다. 323쪽에 달하는 그의 ‘최고의 삶’『It's Your Time』에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구속적 은혜가 투명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믿음은 긍정적인 것을 믿으라고 말한다.’라고 강변한다. 인간의 잠재적 에너지 계발에 전체 분량을 할애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나님 중심 자리에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나님 중심에서 ‘자아’ 중심적 사고에 사람들은 대게 고개를 끄떡였다.
신사고운동의 핵심- ‘우주의 본질은 정신(god)이며, 인간의 본질도 ‘정신’이다. 인간의 정신과 우주의 정신이 조화를 이룬다면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운행하게 된다. 정신적 조화는 ‘정신의 적극적인 태도’이다. ‘긍정적인 생각’에 긍정적인 결과가 깃든다. 이것의 구체적인 적용은 ‘명상’이고, 이를 추구하는 목표는 ‘평안’이다.’ 결국 인간의 의지와 잠재력을 강조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유대인 정신 의학자 빅터 프랭클(1905-1997)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 의해 그 악명 높았던 다카우와 아우슈비츠『죽음의 수용소』(이시형, 청아출판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인 ‘자기 인식’적 ‘책임감’에 의한 ‘의지적 믿음’, 곧 ‘로고테라피’(Logotheraphy) 기법의 ‘자기초월’적 자신감이었다. 이 말은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주는 대단한 격려가 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인생의 동기는 ‘의미와 목적을 찾는 것’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신 의학자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로 이해된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었던 20세기의 수난을 가장 극한 상황에서 체험했지만, 20세기 인류에 가장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졌다.’(뉴욕타임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사고의 ‘정신’과 빅터 프랭클의 ‘의지’는 서로 인간을 중심한 공통점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16:30)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번영복음 지지자들은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는 부분을 유독 강조한다. 그래서 교인들은 ‘믿습니다’라는 말을 연발하며 화답하고, ‘아멘’으로 ‘믿음의 말씀’이 강조하는 ‘믿음’을 확인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 신사고운동에 점령당했다.
신사고는 그 경계선을 구분하거나 정체를 확인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것이 이 시대 교회들의 고민일 것 같다. 왜냐하면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설교자 역시 자신이 신사고에 홀렸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어려운 점도 있을 것이다. 서점에 분간 없이 널려있는 신사고의 책들을 분별해 내기도 쉽지 않다. 사이버 공간에 떠 있는 신사고의 사이트를 잡아내는 것도 쉽지는 않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한국 교회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혁해야 할 것인가? 몇 가지만 제언한다.
로마 천주교의 형식들을 청산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생사를 걸어야 할 개혁 교회가 아직도 가시적인 형식에 매여 개혁을 머뭇거린다면, 개혁은 불가능할 것이다. 형식이 중요하지만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형식은 전통과 관습일지라도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이다. 피렌체의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교황에 저항, 로마 천주교의 부패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아픔을 ‘황금 잔’(성찬)으로 마신다고 절규하듯 비판했던 그 개혁의 목소리가 한국 교회에서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일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
설교자가 설교 중 사용하는 용어는 그 파급 효과가 상상외로 크다는 것을 알면, 용어 선택에 신중할 것이다. 아직도 방송 설교와 설교집, 설교에서는 일본 식민지 잔재어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로마 천주교의 용어도 걸러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기도문이 바르게 실천되어야 한다.
교회는「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기도 실천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의 소원’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의 정신이며,「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일 것이다.
개혁교회의 정체를 확인해야 한다.
장로교 제도는 ‘민주적’이긴 해도 ‘민주주의’는 아니다. 교회의 모든 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보호하고 이 땅에서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도록 운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교회 안에서 바르게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는 직분자가 서로를 위한 선의의 ‘견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 안에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장로교 제도 운영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지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이다. 목회자와 장로, 교인은 서로를 세우기 위한 선한 ‘견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학교가 개혁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교단 직영 신학교인 경우 신학교 교수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차가운 개혁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것이다. 목회자들은 또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후원금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가정할 때 개혁은 불가능하다. 서로 현실적 이해관계로 엮이면 개혁은 애당초 될 수 없을 것이다. 교단은 신학교 교수를 존중하여 신학교가 개혁의 동력이 되도록 개혁의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언제부턴가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보혈」,「은혜」「십자가」,「회개」,「하나님의 진노」,「심판」,「재림」과 같은 단어를 대신하여 ‘행복’, ‘적극적 생각’, ‘긍정의 힘’, ‘성공’, ‘의지’, ‘자신감’과 같은 신사고 개념의 용어들이 채워지고 있다. 한국 교회 안에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망이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민11:6)라는 말씀에서 한국 교회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교회가 신사고에 점령당하게 되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잠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13:25)라는 말씀은 단순한 명언이 아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잘못 가라지를 뽑다가는 알곡까지 뽑을 수 있다. 예수님은 가라지를 뽑으려는 제자들에게「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13:29)고 말씀하셨다.
한국 교회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혁해야 할 것인가?
개혁이라는 말을 조소라도 하듯 현실 교회들이「각기 제길」(사53:6)로 너무 멀리 나가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이 있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남은 자들」(사6:13)이 많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의 보귀한 신앙의 유산과 정통성을 굳게 지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성경적인 시대사조에 켜켜이 퇴적(堆積) 되었을 이끼(苔蘇)를 걷어내야 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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