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三位一體)
초대 교회가 이해한 삼위일체 도표
삼위일체(三位一體) 1. 삼위일체의 용어와 형성 이단들은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그 용어는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한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삼위하나님은 상호교류와 상호구별된다는 성경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경 기록을 그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가운데 삼위일체라는 이론이 정립되어진 것이다. 히브리서 1:3에서 “휘포스타시스”(confidence essence, nature, person)라는 단어가 나타나는데 이 단어의 뜻은 “본질, 본체, 실체, 실상”이라는 뜻을 갖는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의 “휘포스타시스”인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이 단어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탄생하게 한다. [개역]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휘포스타시스)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공동번역]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표준새번역]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현대인의성경]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KJV] Who being the brightness of [his] glory, an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 and upholding all things by the word of his power, when he had by himself purged our sins, sat down on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NIV]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RSV] He reflects the glory of God and bears the very stamp of his nature, upholding the universe by his word of power. When he had made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이 단어는 단순한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또한 히브리서 외에도 빌립보서 2:6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 본질임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몰프헤)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6에서 “몰프헤”라는 단어는 “휘포스타시스”와 동일한 뜻을 가진다. 즉 “본체, 본질, 형상”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에서 동등하다는 결론을 갖음으로서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AD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는 예수그리스도가 "비존재로부터 피조되었으며,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고 주장하며 유사본질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알렉산더 감독과 대립하여 초대교회를 분열시켰다. 아리우스 장로는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쉽게 말하자면,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를 피조물로 보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선조라고 보면 맞다. 알렉산드리아 지방의 주교인 알렉산더감독은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알렉산더 감독이 죽은 후에 그 서기였고 집사였던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를 상대로 힘겨운 토론을 하여 결국 승리를 갖게 된다. 결국 아타나시우스가 예수가 하나님의 동일본질이며,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토론을 통하여 입증하고 승리함으로서 삼위일체의 초석이 니케야회의를 통하여 정립되었던 것이다. 2. 본질과 인격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에서 “삼위”는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발전되어짐에 따라 세 인격(위격, person)이라는 의미가 되어진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다. 그러나 성자도 한 휘포스타시스이고 성령도 한 휘포스타시스로써,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 이러한 용어에서 처음에는 본질과 인격이라는 단어가 혼동되어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세 인격(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인격(위격)은 동일한 한 본질(본체)을 공유한다. 실제로 고전적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본체와 본질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혼동을 일으켰다. 이 "휘포스타시스"가 셋 존재한다는 의미로서, “인격”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어가게 되는데, 헬라어가 라틴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서방의 교부들, 특별히 어거스틴은 이 “휘포스타시스”라는 헬라어를 번역함에 있어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 용어적인 차이에서 양태론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어지는데, “페르소나”라는 단어는 배우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연극(일인다역)을 한다는 뜻에서 일인다역의 양태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서방교회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가 페르소나로 번역되고 인격이라는 의미가 되자, 동방교회에서는 본질을 뜻하는 용어로 “우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고, 동방교회에서는 "한 우시아(본질)에 세 휘포스타시스(위격)가 있다"라고 정의되었고, (미아 우시아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 서방교회에서는 우시아라는 용어 대신에 “한 숩스탄시아에 세 페르소나가 있다”고 정의가 된다.(우나 숩스탄티아 트레스 페르소나) 페르소나는 영어로 person이 되고, 우시아는 essence로 번역되어지며, 숩스탄시아는 substance가 되어진다. 서방교회에서는 ‘휘포스타시스’를 ‘페르소나’(헬라어 프로소폰)라고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했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였는데, 로마사람들에게는 ‘우시아’는 잘 이해되지 않는 언어였고, 헬라인들에게는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삼위일체(Trinity)라는 용어는 터툴리안이 가장 먼저 사용하였으며, 초대교회는 용어적인 혼란으로 인하여 교회는 용어적인 개념을 정립시킬 필요를 갖게 된다. 그래서 칼케톤 회의에서 헬라어 휘포스타시스는 라틴어 페르소나와 동의어라는 결정을 하게 된다. 즉 한 본질(우시아, esence), 세 인격(페르소나, person)이라는 용어가 정립되어진 것이다. 즉 영어로 표현하자면 Three persons with One essence로 표현되기도 하였고 Three persons with One substance 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교회가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는 동의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은, 어거스틴이 죽은지 반세대가 지난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에서였다. 이리하여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에 휘포스타시스의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성격을 포함시키는 길을 열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이 위격들을 ‘존재양식’이라고 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영구성이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어휘선택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어휘는 그를 사벨리우스주의로 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이것은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얼굴이나 가면을 뜻하기 때문에 삼위가 한분 하나님의 세 얼굴로 이해되어 결국 양태론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역주)”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8쪽) 물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인격의 세 양태로 이해하는 양태론은 이단적인 주장이었으며 2000년 교회사를 통하여 단 한번도 정통신학이었던 적이 없었다. 단일신론 역시 초대교회부터 이단적인 주장이었다. 교회사를 통하여 살펴 보면, 정통신학은 항상 이단들의 주장이 먼저 나타났고, 그들을 반박하기 위한 과정에서 정통신학이 정립되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단들과 성경적인 근거로 토론을 했고, 토론에서 패한 자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어 도태되어 간 것이다. 정통신학은 인위적인 탁상공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목숨을 걸고 이단에 대항하고 토론을 하여 어랜 시간을 통하여 정립된 것이었다. 3. 삼위일체의 정의 그렇다면 삼위일체에 대한 정의는 무엇인가? 하나의 본질(essence, substance)을 공유하는 세 인격(persons)이 된다 영국 국교회 신앙신조 제 1조는 “이 신성의 하나됨 안에는 한 본체, 권능, 영원성을 가진 세 위격이 있다”로 되어 있으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신성의 하나됨 안에는 한 본체, 권능, 영원성을 가진 세 위격이 있다”라고 되어있다. 즉 하나님을 “우시아”(신적본질)로 볼 때에는 하나이지만, “페르소나”(인격, 위격)로 볼 때에는 셋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본질을 신격(Godhead)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칼케톤신조는 예수의 본질을 신성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으로 완전하시며(teleion), 그는 실제로 하나님이시며 또 실제로 사람이시며, 합리적인 영혼(Psyches logikes)과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신성에 관한 한 그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타고 나셨고 또 그의 인성에 관한 한 그는 다만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성경적인 내용에서 볼 때에 삼위의 인격은 동일하지 않으며 상호관계를 갖을 수 있었고 또 상호구별되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신적본질이란 무엇일까? 성부도 하나님이며, 예수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삼위는 동일한 신적본질을 공유한다. 성부의 본질은 성자와 같고, 성자의 신적본질은 성령과 같고 성령의 신적본질은 성부와 같다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러나 인격적으로는 서로 다르다. 인격적으로는 상호구별과 상호교류가 가능하여야만 한다는 것이 중요한데, 인격적으로는 성부는 성령이 아니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다. 인격과 역할과 기능은 모두 다르며 삼위는 서로 상호교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과연 정통신학에서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는 것을 부정하는가? 성자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정하는가? 당연히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당연히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예수님은 그것을 몸소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 역할과 기능은 모두 다르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보다 크다는 것은 본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동등하다는 것은 신적본질을 의미한다. 종속론이라는 주장이 초대교회부터 있었는데, 성부를 가장 큰 신적존재로 보고, 성자를 2위, 성령을 3위의 신적존재로 보았다. 정통신학에서는 질서적인 삼위의 관계를 부정한 것은 아니며, 삼위의 신적본질, 신성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한다. 삼위일체에서 일체는 본질과 영광과 권능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5절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라고 말한다. 비록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지 않고 종의 형체(성육신)로 오신 예수님이지만, 그가 창세전에 가졌던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그 영화이었다. 또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1:3의 영어성경은 RSV(그의 본성, 그대로의 각인)이며, NIV(그의 존재의 정확한 표현), KJV(그의 인격상의 표현)이라고 번역된다. 즉 예수는 신성으로는 성부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고, 그의 본질은 아버지의 본질이라는 것이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정리된 아타나시우스의 니케야 신조가 된다. 사람에게 본질은 열명이 있다면 열명이 모두 다르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그 본질이 다르며 또한 그 인격도 다르다. 그러나 삼위하나님에게 그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그러한 동일본질이라는 용어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쌍둥이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한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성경구절은 많다. 성령과 하나님이 동일시된 성경구절도 많다. 더욱이 많은 성경구절은 하나님과 예수의 신적본질이 동등하다는 결론을 표출시킨다. 즉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삼위의 인격은 구별되어지며 상호교류를 하고 있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피송하고, 성자는 성령을 파송하며, 성자는 성부께 기도를 하고, 성령은 성자의 것을 기억나게 하며 가르치게 된다. 그런데 본질과 신성과 영광은 또한 동일하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동일한 본질인가?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동등하다는 구절은 있고, 성부하나님과 성령이 동일시되는 구절도 있는데, 그렇다면 성자와 성령도 동등하다는 뜻이 있는가? 더욱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성령은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며,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려지기도 하며, 예수의 것으로 오셔서, 예수를 증거하며, 예수가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할 것이요.”(요15: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다음 구절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과 성령,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구별이 사실상 없다.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은 같다. 그러나 성부하나님과 성자예수와 성령의 인격은 다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9-10) 4. 성경에서 나타나는 삼위의 동등한 표현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에서 일체는 본질의 동일성을 뜻하며, 그러나 삼위의 인격은 상호구별되며 상호교류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삼위의 인격적인 구별과 함께 기능, 역할에서도 구별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적지 않은 성경에서 삼위는 함께 언급되어서 동등한 위치와 역할을 제시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느니라”(엡2:18) “For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by one Spirit.” 예수님과 성령님, 그리고 아버지라는 세 인격적 관계와 그 각각의 사역이 잘 언급되어 있는 구절이다. For Jesus Christ(말미암아), by Spirit(의하여), to Father(께)를 의미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이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이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4-6)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 위 본문은 삼위를 말하지만, 이름은 단수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만일 하나님이 한 분, 한 인격이시라면 왜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하고 있을까? 이것은 상호 독립적인 관계성을 말한다. 실제로 양태론자들은 이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지 않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4) 윗문장은 믿는 성도들과 함께 서로 교통하는 삼위의 관계를 말하는 구절이다. 또 아래의 본문은 성도들과 삼위의 사역적인 관계가 각각 구별되어있다. 삼위가 각각 구별된 인격적 하나님이 아니라면 왜 성경은 삼위를 동등하게 대조하여 언급하였을까? 이러한 성경구절은 성경에 생각보다 많이 나타난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리심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벧전1:2)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 1:21-22)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고전 8:4-6) 5. 조직신학자들의 정의 모든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본질의 동일성”과 함께 “셋의 인격을 구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교화서적인 정의가 되어진다. “우리가 보통 말하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한 신성(godhead)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한다. 이 서로 다른 셋은 상호관계라는 관계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이해하여야만 본질의 동일성과 이 셋의 구별이라는 형식이 만들어진다.”(이종성박사의 삼위일체론, 81쪽) “삼위일체론이 바탕을 두고 있는 성경의 기본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세 위격이 각각 하나님(신)으로 인정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세 위격들 가운데서 각각 구별된(distintion)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가페 성경사전 776쪽) “왜냐하면 각 위격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각 위격 간의 차이는 존재의 차이가 아니라 관계의 차이이며, 그럼에도 각 위격은 실제적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웨인그루뎀의 조직신학 상권 366쪽) “하나님이 삼위이시라는 말은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또 성부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그리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같은 책, 333쪽) “성경은 한 하나님이 삼위(3인격)로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특별계시의 교리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은 교리이며, 인간이성으로서는 발견할 수 없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분이시나, 이 한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여러 사람들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혀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삼위는 오히려 신적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들 자기 구별은, 그들이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루이스벌콥의 기독교신학개론 85쪽) “성자는 본체에 있어서 성부와 성령과 동등하시지만 인격적 실체에 있어서는 그들과 다르다.(하지 조직신학 303쪽) “I and the Father are one. - 웨슬레는 사벨리우스나 아리우스의 설을 아래와 같이 반박하였다. 요한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라는 본문을 웨슬레는 are가 복수형이다. (are)는 인격의 복수를 실증함으로서 사벨리우스는 반박하는 반면에, 하나(one)는 하나님 안에 본성의 일치를 실증함으로서 아리우스를 반박한다.”(웨슬레 조직신학, 50쪽. John Wesley's Theology Today 1960. P91)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본질 (‘우시아’ 'essence', 라틴어로는 essentia)과 각 위격 (‘휘포스타시스’ hypostasis) 간에 명확한 구분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칼빈은 본질과 위격을 확연히 구분하여 사용하라고 강력히 주문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삼위의 각각의 인격이란 한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 (in Dei essentia) 내재적인 위격, 혹은 실재이며 (subsistence, 라틴어로는 subsistentia), 서로 간의 관계에 있어서 다른 인격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며, 서로 바꿀 수 없는 독특한 요소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때에 ‘실재’ 혹은 ‘실체’ (subsistence)라는 의미는 ‘존재’ (being)라는 용어와는 좀 다른 말로 쓰여졌는데, ‘존재’와는 분리할 수 없는 용어이지만, 존재와 연관을 갖고 있는 한 위격이라는 말로 이해되어진다. ‘수브시스텐티아’라는 말은 존재 내에 있는 관계성을 드러내는 단어이며, ‘에센티아’라는 말은 존재 그 자체 (esse in se ipso, a se ipso)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칼빈의 강조점을 다시 한번 인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김재성교수의 캘빈의 삼위일체, 8. 위격과 본질의 명확한 구별) 켈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이란 이름으로는 오직 하나이신 단일한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그 안에서 세 인격(persons) 혹은 세 본체(hypostasis)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하지 않고 언급될 때에는 언제나 성부를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연합될 때, 양자가 관계를 갖게 되며, 그러면 우리는 각 위격(位格)을 구별하게 된다.”(기독교 강요 제1권 제13장 20. 삼위일체 하나님) “왜냐하면 말씀이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라면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없었기 때문이고, 또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면 아버지와 영광을 더불어 가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자신을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이가 따로 있다"(요 5:32 ; 8:16 등)고 말씀하신다. 또 다른 곳에서 성부께서는 만물을 말씀으로 말미암아 만들었다고 한 말(요 1:3 ; 히 11:3)도 이것과 일치한다. 성부께서 말씀과 어떻게 해서든지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는 이러한 일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상에 내려오신 분은 성부가 아니라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은 성부가 아니라 성부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분이었던 것이다. 이 구별은 성자가 성육신(成肉身) 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전부터 그는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였다는 사실 또한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요 1:18). 성자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인성(人性)을 취하기 전에는, 아버지 품속으로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전부터 아버지 품속에 계셨으며 또 아버지의 현존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지녔던 것이다(요 17:5). 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성부께로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시면서(요 15:26; 참조, 요 14:26), 성령과 성부의 구별을 암시하신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또 다른 보혜사(요 14:16)를 보낼 것이라고 알려주실 때와, 또 다른 곳에서 종종 성령을 "또 다른" 어떤 분이라 부르심으로써 성령과 자신이 구별됨을 암시하고 계신다.” (기독교강요, 삼위의 구별성과 단일성, 17 삼위성) 루이스 벌콥의 본질과 인격에 대한 진술은 다음과 같다. a. 신적실유에는 구분할 수 없는 오직 하나의 본질이 있다. b. 이 하나의 신적실유에는 세 인격 또는 개별적 실체들, 즉 성부, 성자, 성령이 있다. c. 하나님의 구분하지 않은 온전하신 본질은 세 인격들의 각자에 동등하게 속한다. d. 신적 실유 안에 있는 세 인격들의 실체와 역사는 명확하게 정해진 순서로 표식이 된다 e. 세 인격들(삼위)이 구별되는 명확한 인격적(위적) 속성들이 있다. (루이스벌콥의 조직신학 상권, 기독교문사, 311-314쪽) 6. 양태론의 오류 1) 양태론의 정의 양태론이란 결국 단일신론이다. 즉 성부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예수로 와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오순절에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동일한 한분의 인격(위격)의 하나님이 세가지 양태로서 나타나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사역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되므로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정통삼위일체가 세 인격(위격)과 한 본질(본체)을 말하는데 반하여, 양태론은 한 인격과 한 본질을 말하므로, 그들이 말하는 삼위일체는 사실 실제적인 삼위라고 볼 수 없다. 양태론적인 설명을 잘 표현하는 비유가 곧 “한 사람의 세가지 사역적 직분”과 “물과 얼음과 수증기”에 대한 비유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교회에서는 장로이며, 집에서는 아버지이고, 회사에서는 사장이라는 비유는 매우 적절한 양태론이 되어진다. 그것은 삼위를 단지 사역적으로 구별할 뿐, 인격적으로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한 물이 기후나 조건에 따라 수증기와 얼음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타난다는 주장도 양태론적인 이해와 가깝다. 동일한 물이 세가지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비유들은 삼위일체를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가 되므로 가급적 사용하지 말아야만 한다. 2) 양태론의 오해 많은 성도들과 심지어 목회자들까지도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양태론적인 오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필자는 두가지로 구별하고 싶다. ①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양태론적으로 이해함 ② 양태론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이 있지만 고의적으로 양태론적인 주장을 함 1번의 경우 정확한 지식을 알려 줌으로서 그것을 수정하도록 가르쳐야만 한다. 평신도는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할지라도, 신학교육을 거친 목사가 이것을 착각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실수나 착각이라면 수정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2번의 경우는 우리는 이단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만약 2번의 경우를 인정하거나 방치한다면,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모두 뒤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첫번째 단추를 잘못 꿰면, 마지막 단추를 채울 수가 없어진다. 이 양태론은 숱한 성경적인 모순과 오류를 초래하며, 단 한번도 기독교 교회사에서 정통교리로 인정받았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왜 양태론이 비성경적이며, 왜 성경적인 모순과 오류를 초래하는지를 살펴보자. 3) 양태론의 오류와 모순 ①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단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였단 말인가? ②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누구에게 바쳐진 제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였단 말인가? “하나님은 불사(不死)의 존재”라는 성경이 오류가 된다. 그래서 양태론은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리워졌던 것이다. 딤전6:16은 "오직 그[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③ "아버지여 내 영혼(spirit)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눅23:46)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누구에게 자기 영을 부탁한다는 것인가? ④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되어진다(마 22:43). 다윗이 본 구별된 예수와 하나님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1)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되었다(동시대에 공존하셨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예를 들자면, 신약에서 마22:43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⑤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은, 다른 보혜사가 곧 동일한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구별된 인격으로 다른 보혜사를 말하는가?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면서 왜 3인칭 대명사 “그”라고 하셨는가? ⑥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르키는가? ⑦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인격인가? 또 요한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인가?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예수님 자신의 소리인가? ⑧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이 삼위는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인가? ⑨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지상에 사역을 하시면서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⑩ 사도행전 10:37-38 성경본문...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인격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다음은 한 인격이라는 주장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 4) 양태론의 문제점 (1) 예수는 곧 성부 자신과 동일한 인격이 되므로, 불사의 성부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던 시간이 있게 된다. (2) 다시 오겠다고 하신 예수님이 곧 성령 자신이 되기 때문에 예수 재림을 부정하게 된다. (3) 성도들 안에 있는 성령이 곧 하나님자신과 동일한 인격이 된다면, 하나님과 예수는 더이상 하늘에 계시지 않는다. 실제로 양태론자들 중에는 하나님이 예수로, 예수가 성령으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며, 천국 자체를 부정하는 곳도 있다. (4)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바쳐진 예수와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신 성부하나님이 구별될 수 없다면, 십자가 대속과 구원의 개념이 전혀 달라진다. (5) 양태론은 수많은 성경적인 오류를 발생하게 하며, 그 오류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삼위 혹은 이위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를 모른다고 하여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 예를 들어 교회의 80세 되신 할머니 권사님이 어떻게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삼위일체와 다른 교리를 고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다. 특히 양태론이 그들에게 중요한 교리가 되는 곳은 이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심장이라고 불리워지며, 이것을 부정하면 모든 교리와 신학 체제가 다 바뀌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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