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토라의 이해

하나님아들 2021. 4. 3. 23:06

토라의 이해

 

 

 

구약성서의 율법서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성경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해 있는 다섯 권의 두루마기를 분류하는 이름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율법의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다섯(penta) 두루마리(teuchos)에서 보통 '오경'(pentateuchos)이라 불리며, 모세가 오경을 저술했다는 전승에 따라 '모세오경'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1. 창세기 (Genesis, בראשית브레쉬트)

2. 출애굽기/탈출기 (Exodus, שמות쉬모트)

3. 레위기 (Leviticus, ויקרא바이크라)

4. 민수기 (Numbers, במדבר브밋바르)

5. 신명기 (Deuteronomy, דברים드바림)

 

출애굽과 하나님의 백성

-율법서 이해-

 

1. 출애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는 '성경이야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저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매우 깊은 의미가 있는 말로 보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야기형태로 전달되고 기록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체험, 즉 하나님 체험이 딱딱한 형태로 전해진 것이 아니고, 탁월한 이야기꾼들이 풀어나가는, 언제 들어도 생생한 이야기로 전해지고 기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생생한 이야기로 읽혀지고 전해져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그 속에 담겨있는 사건들을 현재 사건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성경은 재미난 이야기입니다. 특히 구약성경이 그렇습니다.

 

오경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만들어진 시대도 다르고, 배경도 다릅니다.

그리고 문학적인 형태도 다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들이 어떤 뚜렷한 줄기를 갖고 잘 엮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많은 이야기들 이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들려집니다. 그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줄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출애굽사건]입 니다. 오경 이야기들의 핵심은 출애굽사건(biblical and confessional exodus event)입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 국가의 기원이 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출애굽이 이스라엘의 신앙 의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을 만나고, 야웨가 구속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그들 의 하나님이시며, 그들은 야웨의 백성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나가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지주입니다. 출애굽 정신은 오경의 율법들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출애굽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삼대절기(무교절, 칠칠절, 수장절)에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출애굽의 정신은 이스라엘이 했던 하나님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또한 그들이 한 백성이고, 그래서 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들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 들어가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현시적인 추수와 물질세계를 넘어서 언제나 출애굽을 생각했습니다. 출애굽은 그들에게 과거의 사건만이 아니며, 그들의 미래의 삶의 지표였습니다.

 

2. 오경의 구성

그러면 이제 오경의 이야기들의 핵심인 출애굽을 중심으로 해서 오경의 이야기들을 나누어 볼까요?

 

창세기 1-11---+출애굽 이전

창세기 12-50---+

출애굽기 1-18장 출애굽

출애굽기 19-민수기 25--+

민수기 26-신명기 34--+출애굽 이후

 

오경을 이렇게 다섯개의 이야기들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오경의 맥이 잡히는 것 같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애굽 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들어갔을까요?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출애굽 사건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그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출애굽했느냐' 하는 것과 아울러 '왜 출애굽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출애굽기 318, 53, 716).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장소에서 하나님이 일러주신 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했습니다. 예배가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예배를 중심으로 보면, 창세기 1-11장 과 12-50장은 "이곳에서 예배하라"는 것이고, 출애굽기 19-민수기 25 , 민수기 26-신명기 34장은 "이렇게 예배하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에게 가나안 땅 을 약속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그 땅을 얻는 것이 출애굽 후에 되어질 것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출애굽 이전 부분은 "이곳에서 예배하라"로 제목을 붙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출애굽한 이후에는 하나님이 예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 시기 때문에, "이렇게 예배하라"로 제목을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1-11---+출애굽 이전 이곳에서 예배하라

창세기 12-50---+

출애굽기 1-18장 출애굽 예배하라

출애굽기 19-민수기 25--+

민수기 26-신명기 34--+출애굽 이후 이렇게 예배하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형성의 시작이며 역사의 시작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세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이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고, 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셨습니다 (신명기 265-9).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출애굽기 51).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을 직접 계시하여야만 합니다. 그래 서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특히 [시내산 현현]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은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고,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분임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시내산 계시는 바로 하나 님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출애굽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 출애굽 사건이 이 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인상깊은 사건이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출애굽 사건은 무진장한 이야기보따리였습니다.

 

율법서는 이 출애굽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택할 수 밖 에 없었는지를 말하고(창세기 1-11), 이스라엘 백성이 왜 애굽에 머물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고(창세기 12-50), 이스라엘은 하 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출애굽했고(출애굽기 1-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제사장, 제사예법, 성막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출애굽기 19-민수기 25). 구체적인 제사예법과 정결법,성결법 등이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함으로써 40년 동안 광야방랑을 해야 했습니다(민수기 1-25). 그리고 출애굽2세대들로 새롭게 이스라엘을 편성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민수기 26-신명기 34). [신명기]는 가나안으로의 진입을 앞 두고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단순히 과거회상이 아니고, 가나안진입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알기 쉽게, 도표를 사용해 볼까요?

 

1-11 왜 아브라함인가? 출애굽 이전-+

12-50 왜 애굽에 있는가? 출애굽 이전-+ 이곳에서 예배하라

1-18 왜 출애굽해야 하는가? 출애굽 예배하라

19-25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출애굽 이후-+ 이렇게 예배하라

26-34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출애굽 이후-+

 

이렇게 정리해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요. 출애굽은 후에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새로운 엑 소더스). 이처럼 출애굽 사건은 이처럼 이스라엘을 특징지워주는 사건이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고,하나님 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율법을 주셨습니다.이렇게 해서 야웨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야웨신앙은 철저히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개입은 때로 심판으로도 나 타나기도 하지만, 희망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창조이야기

-창세기1-11-

창세기는 성경의 첫번째 책입니다. 모두 50장으로 되어 있는 창세기는 크게 1장에서 11장까지와 12장에서 50장까지의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데, 1장에서 11장은 창조와 홍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어지는 원역사(原歷史) 부분이고, 12장에서 50장은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사 부분입니다. 이번에는 창세기의 첫번째 부분인 원역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1-11장은 우리가 얼마나 잘 아는 이야기들입니까? 성경의 다른 부분은 몰라도 창세기 1-11장은 눈감고도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들어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하나님의 놀라운 천지창조. 그리고 인간의 범죄와 그로 인한 심판들. 창 세기 1-11장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깊은 인상을 심어줍니다. 그런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창세기 1-11장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지요. 정말 그럴까요? 혹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 까요? 창세기 1-11장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할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지요.

 

창세기 1장에서 11장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1. 1-2장 창조

2. 3-5

3장 범죄-심판

4장 범죄-심판-족보

5장 족보

3. 6-10

6-9장 범죄-심판

10장 족보

4. 11장 범죄-심판-족보

 

"여러분은 이 구조에서 무엇을 봅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는 대로, 창세기(創世記- 세상창조에 대한 기록)는 그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세상창조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지 않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1장과 2장에만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창세기 1-2장을 누구에게나 분명한 객관적인 사건보도로 볼 것인지, 아니 면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볼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처음 기록에서 세상이 창조되는 자세한 과정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창세기 1-2장은 우리에게 이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상세한 과학적인 지식을 제공함 으로써, 우리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역사가의 학문적인 작업도 아닙니다.

 

창세기 1-2장은 그런 작업들과는 질적으로 구별됩니다. 창세기 1-2장은 그 어떤 이야기도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점을 갖고 있 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창조이야기와 홍수 이야기를 자 신들의 신앙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냅니다. 창세기 1장은 바벨론포로기에 완성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은 이사야서 40-55장 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당시 바벨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거기서 참으로 위대한 선언을 한 것이지요. 바벨론이 온 세계를 정 복하고 '팍스 바빌로니아'의 시대를 열어가는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온 세상이 바벨론의 신 마르둑을 창조주로, 역사의 주관자 로 믿고 있을 때, 몇몇되지 않은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그들을 멸망하도록 내버려둔 야웨가 참으로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관자라 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담하고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엿새 동안에 정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만들어졌고, 그리고 마지막 날에 바벨론 제국의 평화가 아닌, 마르둑의 복이 아닌, 하나님의 복주심과 쉼과 평화가 이 세상에 임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창세기 1-2장을 기록한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들과는 시간적으로 거리가 먼 과거 세상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과 그분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내실 것, 즉 바벨론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실 것(이사야서 429)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세상 창조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새로운 역사창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반대는 ''()가 아니고 '혼돈'(混沌)입니다. 당시 바벨론이 이룩한 평화를 거짓된 평화로, 그들이 이룩한 질서를 혼돈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부여로서의 하 나님의 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이 창조이야기에 담겨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의 독특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 니다.

 

이렇듯 창세기 1-2장은 창조사건 자체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창조신앙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창세기를 세상창조에 대한 이야기로만 보는 것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세 기는 오히려 기원에 관한 책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세상의 기원, 인간의 기원, 죄의 기원, 그리고 구속의 기원 등을 기 록하고 있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3-11장은 아브라함 이전 세계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창조에서부터 아브라함 까지는 아주 오랜 기간입니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로 아브라함까지만 해도 천오백년 이상의 기간입니다. 이에 비해서, 아브라함 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이야기는 얼마되지 않은 기간에 일어났는데, 분량으로 보면 12장에서 50장까지(39)를 차지합니다. 그 렇다면 창조에서 아브라함까지의 인류역사를 기록하는데 9장의 분량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기자는 9장만을 할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창세기 3-11장을 자세히 읽어 보면, 기록자가 아브라함 이전의 인류역사를 꼼꼼히 기록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음 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중요한 사실들은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지만,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에서 그치 고 있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3장에서 11장을 자세히 보면, "범죄-심판-족보"라는 동일한 패턴이 반복됩니다. 사람이 글을 쓸 때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쓰게 마련입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글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은 아주 용의주도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구조를 통해서 그 기록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3-11장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 부분의 기록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11장은 창조 이후에 반복되는 "범죄-심판-족 보"의 구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이후에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고 범죄했는지를 보여주고, 그래서 결국 심판을 받았음을 명시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몇차례에 걸쳐서 반복함으로써, 인간이 결코 죄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알려줍 니다.

 

그리고 이 [범죄-심판]의 이야기를 족보로 마무리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족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이 족보 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류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매시대마다 자신의 백성을 선별해내는 작업을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족 보들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인간들이 몇살을 살고 죽었다는 것을 동일한 문학양식으로 반복함으로써,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나 창세기 5 장은 이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녀를 몇 낳았는지 말하고, 그 자녀들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또 그 자녀들이 낳은 자녀의 이야기로 넘어감으로써, 인간의 희망찬 미래가 열려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창세기 1-11장은 아브라함의 족보로 끝납 니다. 이것은 창1-11장의 이야기가 그 다음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또 이 족보는 신약까지 이어져서, 마침내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귀결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인가 .

 

혼돈과 공허의 현장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1-2

본문은, 짧으면서도 탁월한 세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꾸밈이 없어 지극히 소박하면서, 간결하고 명료하게,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를 담고 있는 이 구절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읽을 때마다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감동케 하는 이 위대한 문장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기쁨을 이 시간에 맛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이 말만큼 우리에게 신비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이, '옛날에'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들뜨는 것처럼, '태초에'는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 태초라는 것이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밝혀진 것처럼, 사십오억년에서 칠십억년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때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태초에''사오십억년전에'라는 말이 갖지 못하는, 그런 과학적인 수치와는 도저히 견줄 수 없는 신비스러움을 갖고 있습니다.

삼천여년 전에, 성경기자가 정확한 과학적인 지식을 갖고 있어서, 창세기를 '사오십억년전에'로 시작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그랬다면, 창세기는 지금의 매력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태초에'는 참으로 애매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태초에'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 여러가지 주장들을 합니다.

이렇듯 '태초에'라는 말은 지극히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말입니다.

그러나 불확실하고도 논란이 많은 이 말이 우리에게는 그지없이 소중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어서

태초의 신비를 풀어낸다고 해도, 지구의 탄생의 신비를 밝혀낸다고 해도, 창세기는 여전히 '태초에'로 시작해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말을 '사오십억년전에 지구가 만들어졌다'는 멋대가리없는 말로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오십억년이 우리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낼 천문학적인 수치라고 해도, '태초에'라는 이 비과학적인 말에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태초에''사오십억년전에'라는 말이 갖지 못하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를 신비스러운 창조의 세계 속으로 이끌어들입니다.

'태초에'.

이 말에 의해서 우리는 현실세계를 초월하게 됩니다.

성경을 펴는 순간, 우리는 일상세계를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태초에'는 타임머신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말에 의해서 현실세계를 벗어나, 창조의 신비스러운 세계에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경이로운 세계에로 우리를 초청하는 이 말,

'태초에. '

이 말을 어찌 감동없이 읽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태초에'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말입니다.

태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성경기자는 우리를 잔뜩 긴장시켜 놓은 다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또 신학자들이 그토록 메달리는 하나님의 존재증명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학적인 논의를 이 한 구절로 잠재워버립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그래서 우리는 이 위대한 구절을 감격없이 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바벨론 제국에 떨어진 폭탄과도 같은 선언입니다.

당시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말입니다.

물론 광활한 바벨론 제국에서는 세미한 음성이었지만, 그 당시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거부하며, 그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항거의 외침이었습니다.

세상은 야웨께서 만드셨다는 신앙.

포로들의 그 오골스러운 외침.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너희들의 사상이 세계를 지배하고, 너희들의 경제력, 문화, 정치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너희들에 의해서 주도되어서, 모든 것이 다 너희들 것이라고 해도, 우리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지.

아무리 너희들이 날뛰어도,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이 신앙만큼은, 이것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이 한 마디로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것입니다.

외치고 싶은 말을 다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모를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닌 이미 태초에, 하나님이 이 바벨론 땅떵어리를 포함해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너희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야웨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광활한 바벨론 천지가 울리도록 이렇게 소리쳐 외친다.

그것이 비록 세미한 음성으로 들릴지라도, 우리는 목청껏 외칠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그 이방의 땅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둘째 구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 구절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창조사역이 시작되기 전의 땅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음.

그런데 이것은 창조 이전의 상황이며,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멸망한 다음, 포로로 끌려간, 그 비극적인 시대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함,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음.

이것은 그 시대를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평가입니다.

그들은 당시의 세계를 그렇게 보았습니다.

바벨론이 세계를 지배하고, 위대한 바벨의 제국을 만들어가는 시대에, 그 영광스럽고 찬란한 순간에, 그 땅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내린 평가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음. '

그들은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어쩌면 이렇게 짧은 구절로 함축시켜서 표현할 수 있었을까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그 문학적인 탁월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들이 포로로 살아가는 그 시대를 그토록 간단명료하게, 그리고 그렇게도 정확하게 지적해낼 수 있다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음. 이것은 창조 이전의 상황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살아가던 시대의 상황이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인간은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을 만들어냅니다.

공해로 지구를 망쳐가는 것이 그렇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는 것이 그렇고, 갖가지 이기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어려움에 처하게 만드는 것이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이 땅을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구절.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우리는 여기서 또 다시 창세기기자의 놀라운 문학적인 능력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는 이 위대한 순간을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는 이 짧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막 시작하시려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창공을 날기 위해서 그 큰 날개를 힘차게 펼치면서, 갈구리와도 같이 옹골진 발로 땅을 박차 오르려는 그 순간처럼,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이 시작되는 장면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의 긴장감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땅, 형체없이 뒤얽혀있는 땅, 그 땅을 가슴에 품고, 새생명을 잉태케 하고, 출산케 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황은 바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서 운행하시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위대한 사건은 반드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황을 전제합니다.

인간이 만드는 혼돈함과 공허함, 그리고 깊은 흑암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게 만드는 근거가 됩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절망적인 순간.

그 절망의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순간입니다.

모든 가치관이 무너진 순간.

모든 희망이 끊겨진 묵시적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을 질서잡힌 곳으로 만드셨던 하나님께서, 그들이 처한 그 혼돈스럽고 공허한 삶의 현장을 새롭게 만들어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

그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확신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창조는 그들에게 있어서,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고,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오늘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갈등과 번민이 많고, 생활여건이 어려워질 때마다,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순간,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하심의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창조와 심판이야기

-이스라엘과 바벨론 이야기 비교-

1.인간창조이야기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여기서는 그 다음 장면을 보도록 하지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하셨다.

 

여기에 보면,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복은 그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즉 명령문으로 된 구절과 연관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주심은 하나님의 명령과 불가분리의 관 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고 복받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섯째 날에 어류와 조류를 만드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것들에게 복을 베푸 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하셨다"(122).

 

하나님께서 어류와 조류에게 하신 말씀과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선 하 나님께서 조류와 어류들에게 하신 말씀과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과 주변 세계와의 연관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어류와 조류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깊은 관심 을 두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선상에서 사람과 어류, 조류는 연관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류와 조류들에게는 하지 않은 말씀을 사람들에게는 하십니다. 그것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 은 명령입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독특성을 말합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별되어지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사람은 이 땅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땅을 관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은 단지 이 땅을 관리하는 하인에 불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만드시고, 그리고 여러 식물, 동물들을 만드신 다음에, 그것들을 관리할 사람 이 필요해서, 갑작스럽게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첫째날에서 여섯째날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전개됩 니다. 당혹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치 오랜 동안의 연습을 마친 후에 숙련된 연기를 보여주는 연기자처럼, 하 나님께서는 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아주 편안하게 하고, 깊은 감동에 잠기게 만듭니다.

 

물론 이스라엘에만 창조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나라에 창조와 홍수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 에도 사람창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구약의 사람창조이야기와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신들만 있었고,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신들도 위계질서가 있어서 지위에 따라서 여러가지 일들을 분담했습니다. 그런데 신들도 외면적으로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음식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신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서, 농사를 짓는 신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농사를 짓는 신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농기구를 다 던져버리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습 니다. 자기들만 고생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신들 가운데 지도자들-당시 신들의 세계는 칠인의 집단지도체제를 취하 고 있었습니다-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맨먼저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로 하고, 주모자를 가려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한참 논의를 하다가 지혜의 신이 굳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농사짓는 신들 대신, 농사를 지을 자들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정에 없던 사람들을 만들게 됩니다. 바벨론 신화에 의하면,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만들어집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당혹스러움이 이야기 속에 짙게 깔려있음을 느낍니다. 신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 들은 농사짓는 신들이 파업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장 자신들의 생계가 어렵게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대비책도 세워두지 못했습니다.

 

신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직면하고서, 매우 난처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참 우습지요?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러움, 그런 숙련된 연기, 물흐르는 듯이 이어지는 그런 부드러움이 바벨론의 사람창조 이야기에는 없습니다. 우체국 을 만들면서 정작 우체통은 하나도 마련하지 못해서 개국하는 날 겪는 당혹스러움처럼, 그런 난처함이 본문을 지배합니다. 사람 들은 사태해결을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집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시고, 또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람의 손에 선물처럼 주시는 데 비해서, 바벨론의 신들은 사람을 자신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일군으로 만들어냈습니다. 구약성경은 사람이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있는가를 말하지만, 바벨론 이야기는 사람의 고귀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고귀하기는 커녕 인간들은 신들의 노예입니다.

 

물론 구약의 사람들도 경작을 해야 합니다. 이장 오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25-9).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을 만드셨는데 , 그 땅을 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땅을 갈 사람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에덴동산은 가꾸어지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을 가꾸고 경 작하는 것은 사람에게 맡겨질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땅을 가꾸어도 거기서 식물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 서 에덴 동산은 사람과 하나님의

합작품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힘을 합쳐서 만들어낸 그 아름다운 동 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고대근동의 창조이야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2. 심판이야기

 

하나님의 창조이야기는 이제 에덴 동산이라는 한 특정한 장소로 촛점이 맞추어집니다. 지금까지는 어느 한 지점이 특별히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모습이 전면적으로 보여지다가, 이제 한 곳으로 촛점이 모아집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보여주다가 중앙을 보여줍니다. 그곳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다른 나무들의 이름은 알 수가 없습 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만이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창세기 이장 십오절에서 십칠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어느 공동체에나 계약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를 맺게 되었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서 법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이라는 게 특정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 원시적입니다만, 실은 매우 중요한 법입니다. 우 리가 고조선 시대에 여덟가지의 법이 있었습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여기에는 법이 하나만 있는 사회입니다. 어느 사회나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법의 준수와 집행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만드는 것이 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법의 공정한 집행에 대해서 누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열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도록 금한 법에 촛점을 맞추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본문에서는 선악과가 무엇이었는지 생명나무열매가 무엇이었는지 보다는, 그리고 왜 못먹게 했는지 보다는, 하나님께서 아담과의 사이에 법을 제정하시고 그것을 지키도록 규정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질서부여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혼돈스런 것에 질서를 부여하십니다. 질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 다. 그 질서를 지키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법을 깨뜨립니다. 그 과정은 3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3장 은 법원에서 재판하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그 아름답고 평화롭고 사랑스럽던 에던동산에서 온갖 치사스러운 일들이 벌어집니 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판결이 내려집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은 에덴 동산 이외의 지역 을 가꾸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범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은 창조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범죄 와 심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범죄하고 심판받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은 매우 윤리적이고 합당합니다.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법대로 처리하신다는 믿음을 여 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 확신이 본문 곳곳에 진하게 배여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시켜 줍니다. 우리가 갖는 근본적인 믿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깨뜨려버리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혼돈스러운 현상만을 보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구약 이야기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바벨론에도 사람을 심 판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벨론 심판의 이야기는 사람창조의 이야기만큼이나 우리를 심란하게 만듭니다.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에 연속되는 이야기 입니다. 신들이 사람을 농사짓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예기치 않았던 문제가 발생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수가 불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신들이 전혀 고려치 않은 것입니다. 그저 자기들이 먹을 식량 을 조달해주는 것만 생각했지, 사람이 점점 그 수가 불어나리라고는 생각치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사람의 수는 기하급수 적으로 불어났습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여러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량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신들에게는 귀찮기만 했습니다. 신들은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서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닙니 다. 자기들의 편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 숫자가 많아지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 다. 그래서 세상이 온통 소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신들도 점심먹은 다음에는 낮잠을 자야하는데, 사람들이 서로 티격태격하느라고 시끄럽게 해서 도저히 낮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신들은 사람들의 문제해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만든 사람이 이제는 편의보다는 불편함을 더 주 었습니다. 낮잠도 못자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사태해결을 위해서 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거기서 여 러가지 안()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비밀이 새나가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온 대책이 홍수를 일으켜서 사람들을 모조리 진멸시켜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홍수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홍수로 인해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습니다. 전무후무한 홍수였습니다. 신들조차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홍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마저 그 홍수를 보고 겁에 질릴 정도였습니다. 신들은 이렇게 자신들에게 거치장스럽게 된 사람을 싹쓸이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심판이 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창세기의 심판이야기와 비교해보십시오. 얼마나 유치합니까? 전혀 윤리적이거나 법률적이지 못합니다. 바벨론 의 신들은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고 통제할 기준이 되는 법을 세운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심판은 전혀 예기할 수 없었던 일입니 다. 세상은 혼란스럽고, 어떤 일관된 법칙이 없이 그때그때마다 임기응변식으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불편하다고 해서 사람을 죽여버립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합니까?

 

하지만 구약성경은 세상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윤리적이고 법률적인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공정한 법집행을 강조합니다 .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범죄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시면서도, 나뭇잎을 엉성하게 두르고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양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직접 옷도 만들어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줍니다. 아담에서부터 시작되 는 범죄의 역사. 그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역사는 아브라함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범 죄하는 이야기를 한차례 더 한 다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을 만나보도록 하지요.

 

 

 

인간의 악함과 하나님의 파토스

-창세기 65-8절을 중심으로-

 

I. 범죄의 현장에서 읽는 새로운 창조이야기

 

다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본문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본문의 문학적인 기교에 의해서 입증됩니다). 앞뒤 문맥에서 보면,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한 인간들의 범죄에 대한 하 나님의 심판의 서곡에 해당합니다. 본문의 정황은 범죄한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장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범죄와 심판의 암울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창조이야기와 연속성을 갖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상창조를 전제하고 있으며, 또한 새로운 창조를 지향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현재의 범죄와 심판을 넘어서는 미래의 이야기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 없는 극심한 범죄의 현장에서 다시 읽는 새로운 창조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본문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II. 본문의 구조

 

5야웨( )께서

사람( )이 땅( )에서 많은 악( )을 저지르고,

그의 마음( )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들이

내내 악할( ) 뿐임을

보셨다.

6그래서 야웨( )께서

자신이 사람( )을 땅( )에 만드신 것( )

후회하시고( ),마음( ) 아파하셨다.

7그런 다음,야웨( )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

사람( )을 땅( ) 표면에서,

사람으로부터( ) 짐승까지,기어다니는 것까지,

아니 하늘( )의 새까지

흔적도 없애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 것을

후회하기( ) 때문입니다.

8하지만 노아는 야웨( )께서 좋게 보셨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습니다.

 

5 하나님의 고소-----+ 재판양식

6 하나님의 탄식-----+--+

7a 하나님의 판결-----+ |하나님의 파토스

7b 하나님의 탄식--------+

8 노아소개 새로운 창조암시

 

본문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형태를 보이는데,그것은 중요한 단어들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접속사 '바우'( )를 제외하면,모두 52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야웨(4),사람(4),( ,4),악함(2),만드심( , 3),후회 함( , 3),마음(2) 등의 단어들이 반복됩니다. (이 외에 4, 3, 2, 2회 반복됩니다.) 여기서 '야웨''사람',''이 각기 4회씩 반복되고 있음이 특기할 만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항상 연관되어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행동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야웨께서 보셨다(5; )

야웨께서 후회하셨다(6; )

야웨께서 말씀하셨다(7; )

 

5,6,7절은 이렇듯 '야웨'가 주어로 사용되는데, 8절에서는 '노아'가 주어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어떤 전환을 보여줍니다. 본문 은 전반적으로 암울한 분위기인데, 이러한 분위기가 8절에 들어가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의 가능 성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5절과 6절에 나오는데, 5절에서는 인간의 마음을,6절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대조시킴으로써,극적인 효과 를 높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땅에서 많은 악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나서, 바로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일평생 내내 악한 것 만을 생각한다고 극단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악함을 점층적으로 강조합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화법으로 처리합니다. 그럼으로써 창세기 126-29절에서와 같은 하나님의 내면적인 결심을 드 러내 주는데, 하나님의 감정이 매우 고조되어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6절에서 하나님의 후회하심과 마음아파하심이 강조 되다가 7절에 들어서는 하나님의 결심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결심이 매우 고통스러운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 님의 고통스러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진멸해야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창조한 인간'이라고 하시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인간 뿐만 아니고, 인간으로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 또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아니 하늘의 새 들에 이르기까지로 말씀을 번복하면서 심판의 범위를 확장하시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더욱 명확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과격함보다도, 인간에 의해서 땅 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극심하게 파손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드신 것들을 손수 파괴해야 하는 하나님의 고통스러움이 더욱 강조되는 것입니다.

 

또한 7절에서는 전치사 '아드'( )를 세번 사용함으로써 일종의 점층법적인 효과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인간에 의한 하나님의 심판이 점점 더 확장되어가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고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그런데 7절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동물, 기어다니는 것들, 새들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파손의 책임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그것들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하고 후회하시는 분으로 묘사 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노아'라는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제시함으로써 범죄한 '하아담'과 대조시킵니다.

 

III. 본문해설

 

1. 야웨의 판결

 

본문은 야웨께서 '보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심은 우리에게도 이 파괴된 자연세계를 냉철히 살피도록 촉구 합니다. 하나님의 보심은 이 세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의미하는데, 그 평가는 부정적인 것으로 내려집니다. 5절의 형태는 창세 기 1장에서 반복되는 형태를 연상케 하는데, 그러나 평가는 정반대입니다.

 

65절 야웨께서 보시니 사람의 죄악이 땅에 가득차 있었다.

14절 하나님께서 빛을 보시니 좋았다.

65

14

 

하나님이 만드셨던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행위 는 '악한 것'입니다. 좋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성격을 말하는 것인데, 그래서 인간의 행위가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본문비교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 다고 말씀하셨습니다(131).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아름다운 세상을 부패시키고 말았습니다(612).

 

612

131

 

본문은 재판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본문을 읽는 우리를 하나님의 법정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준엄한 재판을 받도록 합니다. 본문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고소를 당한 피고들입니다. 하나님은 인 간이 이 땅에서 행한 소위를 자세히 살핀 다음, 인간이 악을 저질렀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7절에 들어가서는, 악을 행한 인 간에게 판결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사형이라는 최고의 형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벌은 바로 사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단순히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고, 아예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판결은 하나님의 재판정에 선 우리 모두에게 내리시는 판결입니다.

 

그런데 사형선고를 받고 있는 인간은 원래 어떠한 존재였는가? 창조이야기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 며, 그래서 피조된 세계를 관리할 책임을 맡았습니다(126-29). 이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곳입니다. 인간은 이 땅을 잘 관리하고 가꾸어가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보전되도록 할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인간'''이라는 단어가 각각 네번씩 사용되었으며, 또한 '인간'''은 서로 연관을 갖고 나타납니다(5,6,7). 이것은 인간과 땅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창조기사에서도 분명히 나타나지만, 땅에서 취한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27, 317-19). 그리고 땅은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삶의 장입니다. 이 땅이 인간에 의해 서 파괴됩니다. 인간들은 이 땅을 폭력이 난무하는 곳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인간착취와 억압,그리고 자연파괴와 억압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61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썩었고,

땅이 폭력으로 가득차게 되었다(무법천지가 되었다)

 

과거에 기독교인들이나 아니면 기독교적인 사회에 살던 극히 비기독교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창세기 128절이 어떻게 이해되어 왔든지 간에, 이제는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 결코 땅을 파괴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하라는 중대한 명령이라고 우리는 읽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임무를 소홀히 한 정도가 아니고, 오히려 그 명령에 거역해서 하나님께 서 맡겨주신 세상을 파괴해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하나님의 적대자입니다. 이것은 5절과 6절에 나오는 인간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의 극단적인 대조를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파괴되며, 이러한 인간의 행위는 다른 피조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인간 뿐만 아니고 모든 것에 하나님의 심판이 미칩니다(7). 결국 인간은 자신 뿐만 아니고, 세상을 온통 파괴해버리는 파괴자입니다. 그 래서 본문에서는 인간이 아주 비관적으로 묘사됩니다.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로 나타납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비관적인 견해는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가서 구체적으로 신학화됩니다. 예레미야서 1323. 이것은 묵시사상의 단초입니다. )

 

그러면 인간들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자행되어진 악은 무엇인가? 우리는 창세기에서 몇가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 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바벨탑 건립도 문제지만, 우선 대도시 형성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이 대도시를 이루면서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대도시를 이루면서 사는 것은 언제나 많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특히 인간의 통 치문제와 식량문제, 그리고 환경문제가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최초에 인간들은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점차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간들이 급격히 증가함으로써, 상류지역에서는 살지 못하고, 물이 많은 하류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인구가 급격히 증가함으로써, 식량문제가 발생해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릴 만한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서 관개수로를 만들어야 했으며, 식수가 많이 사용되어서 페르시아만의 수위가 크게 줄어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대도시는 언제나 환경문제를 일으킵니다. 바벨탑과 같은 대형토목공사와 도로확장공사가 대도시에서는 필연적으로 행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도시 는 인구의 과밀로 인해서 억압과 착취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대도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도전의 상징물처럼 여겨집니다. 우 리는 쟈끄 엘룰처럼 도시에 대해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도시를 지향하는 것은 여러가지 면 에서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 예는 창세기 41장 이하에 나오는 식량의 무기화입니다. 창세기 41장 이하의 사건은 당시의 심각한 기근에서 비롯되었으 며, 강대국인 이집트가 식량을 무기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강대국이 농산물시장개방을 요구하는 오늘의 상황에도 잘 들어맞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서 기아로 인해서, 또 질병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가뭄은 자연적인 원인도 있지만, 기근이 생기는 이유는 인위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의 정치, 경제적인 차원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환경오염은 매우 복합적인 문제입니다. 숀 맥도나휴는 '교회의 녹화'라는 책에서, 필리핀의 자연파괴를 외채문제에서부터 기원하는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식물을 각각 그 종류대로 만드셨는데(이것은 생물다양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외채를 갚 기 위해서 무분별하게 벌목을 하고, 농촌인구의 이주로 인해서 도시가 확장되고, 녹지와 농지를 침식하는 스프롤 현상이 심화되 며, 또한 높은 수확을 단기간에 올리기 위해서 단일품종만을 경작하도록 함으로써, 이러한 생물다양성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생물다양성의 파괴는 환경파괴의 결과가 아니고,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국제경제와 정치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환경문제연구가들의 견해입니다. 그리고 공해문 제에 대처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오존층을 파괴하는 매체사용을 규제하고, 대체매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실제로 선진국의 경제이익과 관련되어 있어서, 앞으로 3세계 국가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예는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창세기 18-19)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당시에 상당히 수준높은 문화를 이루고 있 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문화를 바람직하지 못하게 사용했습니다. 소비지향적이고 향략적인 문화가 형성되었습 니다. 이런 상황은 소수 사람들의 맹목적인 상업적 이익추구가 그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환경에 대한 극단적인 이기심에 서 비롯합니다. 모든 것을 이용하려고만 하고,자기의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무책임합니다. 소련에서는 핵폐기물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책임하게 아무 곳에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께서 주신 땅을 극도로 오염시켜서 영구히 회복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 다. 그리고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과학적인 업적들을 상업적인 측면에서 오용함으로써, 오히려 인간들을 얽어매게 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분명히 놀라운 인간의 작품이며, 인간에게 많은 유익을 주지만, 그러나 자동차 생산자들의 맹목적인 이윤추 구로 인해서, 인간을 얽어매어서 이제는 자동차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죽게 하는 괴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동차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는가? (도로확장을 위한 녹지와 농지의 침식, 대기오 염, 에너지의 과다소비, 교통마비,정신적 장애 등등). 이것은 자동차를 만들어낸 기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따라서 현재의 환경문제로 인해서, 모든 과학적인 업적을 파괴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인류의 문제는 지혜신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과학적인 업적들에 의해서 해결되어질 것입니다), 앞으로 발생될 문제를 전혀 고려치 않고,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세상에 대해서 자신들이 책임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무엇보 다도 그들이 하나님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그들은 이 세상을 주인없는 집과 같으며, 누구든지 먼 저 취하는 사람이 임자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임의로 취해서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고, 그것을 함부로 탕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비싸게 대여함으로써 이익을 챙깁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파토스

 

본문은 우리에게 환경파괴자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보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혼자 소리를 직접화법으로 들려줌으로써, 본문을 읽는 독자들에게 파괴된 자연의 모습을 보시고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이 파괴한 자연의 비참한 모습을 다시 한번 냉철히 보도록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파토스는 하나님의 고소와 판결에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파토스를 강조하기 위해서 문학적인 기교를 사용합니다. 인간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 즉 언제나 악한 것만을 생각하 는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의 마음아파하시는 모습과 대조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후회하심과 마음아파하심을 반복함으로써 강 조하며, 독자에게 창세기 1장에서 기뻐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또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고 마음아파하시는 것을 묘사한 다음 바로 하나님의 결심을 말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짐작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파토 스에 동참케 합니다. 그리고 애초에 인간에 대한 심판에서, 동물들과 기어다니는 것들, 공중의 새에까지 심판을 번복해서 확장하 는 하나님의 당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파토스를 더욱 강조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모습보다 는 고통스러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고 오히려 세상을 파괴한 인간과는 달리,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부모와도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부여된 책임을 통감하 게 만듭니다.

 

3.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8절은 문체면에서 극적인 전환을 이루며, 자연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하아담( )과 대조되는 '노아'라는 특 정한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대조라기 보다는 인격의 전환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독자로 하여금 '하아담'에 서 '노아'로 인격적인 전환을 하도록 촉구합니다. 노아는 소위 '남은 자'입니다. 69절에 보면,노아는 당대에 누구보다 의롭고 온전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께서 행하도록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622, 75, 9).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준행하는 노아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하아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합니 다. 결국 여기서도 인간이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인간에 의해서 창조의 질서가 파괴되었는데, 또 다른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려고 합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서 모든 피조세계에 미치는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십니다( 9). 이것은 인간의 범죄에 의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것에 미쳤던 것과는 대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또 다시 자연 의 관리자로 임명받습니다. 이것은 '하아담''노아'로 전환되었을 때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하여금 동물과 새들을 보전하게 하십니다. 이렇듯 새로운 인간 노아는 파멸에 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 조의 질서를 보전하려는 사람이며, 그래서 노아는 범죄한 세상과 대결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이러한 사람을 필요로 하 며, 방주로서의 교회는 인간 뿐만 아니고, 다른 피조물까지 보호하는 곳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IV. 위기의 시대에서 다시 읽는 창조이야기

 

이스라엘의 창조 이야기는 모든 것이 공허하며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창조를 대망하면서 기록되었습 니다. 그래서 창조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고, 현재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창세기 65-8절 역시 범죄와 심판의 현실에서 읽는 새로운 창조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상황을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위기의 상황으로 묘사하면서도, '노아''방주'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 희망의 이야기로 읽도록 촉구합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아담에서 노아로 인격적인 전환을 하게 하시고, 다시금 이 세상의 관리자로 임명하시며, 우리를 통해서 온 피조세계에 미치는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게 하십니다.

 

미래를 체험하면서 살았던 사람들

창세기 12-50

 

창세기의 두번째 부분인 12장에서 50장까지를 우리는 '족장사'(族長史)라고 합니다. '족장'은 말 그대로 어떤 씨족이나 부족의 장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2장에서 50장의 주인공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에서) 등이 씨족의 장이었 다는 말입니다. 씨족은 작은 마을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족장사'는 한 씨족의 장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 이지요.

 

먼저 이 족장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지요. 창세기 121절에서 2518절까지가 아브라함의 이야 기입니다. 2519절부터 27장까지는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여기에 이삭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삭과 더불어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28장부터 36장까지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주로 야곱에게 촛점 을 맞추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며, 36장은 에서의 부족인 에돔의 계보입니다. 그리고 37장부터 50장까지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족장사는 이렇듯 네 사람의 이야기로 이루어집니다.

 

이 족장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흥미로운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서 아브라함과 사라가애굽으로 내려가던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는 장면, 백세된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고, 또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던 이야기,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 에서와 야곱의 갈등과 극적인 화해, 그리 고 요셉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족장사는 우리의 시선을 붙들어두기에 충분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몇번이고 읽고 또 읽 어도, 언제나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우리는 족장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이 살았던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게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가 만들어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무리가 얼마나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려 고 318명의 군사를 출동시켰던 것을 보면, 대략 삼백 가정(1500명 이상)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땅이 없었고, 사람 수도 적었기 때문에 한곳에 국가를 이루고 살지 못했으며, 여기저기를 유리하는 '나그네'였습니다(신명기 265-9). 족장들은 한곳에서 몇년 동안, 또는 그 이상 살기도 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그곳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들이 어떤 곳에 '정착'했다고 하지 않고, '우거'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머무는 곳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본업은 유목이었습니다. 당시 국가들의 주변을 맴돌면서 얼마 안되는 양떼를 쳤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적 인 기준에서 보면, 참으로 보잘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이 신앙의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평가하는 대로,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족장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으로 시작되 고, 그것이 계속 반복되며 확인됩니다. 아브라함에 하신 약속이 이삭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야곱에게, 그리고 요셉에게, 또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집니다. 족장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굳게 믿 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현재의 어려움을 넘어서는 미래지향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묻힐 땅마저 없이 떠돌아다니는 그들에게 가나안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나그네인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들 이 국가를 세울 땅을 얻기를 얼마나 바랬을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랜 세월 살아온 이 가나안땅 을 어떻게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인가? 당연히 의심해 볼 만도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지 않았습니다. 아무 리 생각해보아도 자기 생전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 대로 믿었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리. 실제로 가나안땅이 척박하고 황량해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었기 에, 그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귀한 땅이었습니다. 꿈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후손을 많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수가 적은 그들에게는 이것도 중요한 약속입니다.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지극히 적은 수의 무리가 어떻게 그토록 많은 수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인지 그들은 묻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되려 우리가 그들에게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신 앙의 눈으로 현재를 넘어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은 남의 땅인 가나안땅을 걸어다니면서도, 그곳 이 자신들의 후손들로 가득차 있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먼 훗날에 이루어질 일을 그 당시에 미리 경험하면서 살았던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믿음인가.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121절이 얼마나 우리를 감격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그 부르심의 반열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던 그 음성이 지금 우리 귀에 들려오는 듯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땅으로 들어온 것은 아브라함 개인의 일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을 읽으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아브라함만을 생각하는데,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그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 이야기에 감 동을 받고 그것을 기록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로 만들어냈던 사람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바벨론, 즉 갈대아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이 장엄한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이며, 또 페르시아에서 의해서 바벨론이 멸망당하고, 고레스가 발표한 칙령에 따라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이고, 이 시대에도 고국을 찾아서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족장들에게 約束을 하신다는 사실입니 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에게 [후손의 약속][땅의 약속]을 하십니다. 이 약속이 출애굽의 근거가 됩니다.

 

42 내가 너희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고 43 거 기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 (에스겔서 2042-43)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후손의 약속만이 아니고, 땅의 약속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 만큼 바다의 모래만큼 많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살아야 할 곳을 지정해주십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곳에서 너희 후손들이 나에게 예배드리면서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요지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출애굽 이후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경의 이야기들이 출애굽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창세기는 출애굽에 대한 확신으로 끝납니다.

 

22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 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창세기 5022-26)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창세기 1-11장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을 지향하고, 족장들의 이야기(창세기 12-50)는 다시 출애굽을 지향합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그곳에서 예배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창세기로 끝나지 않고, 출애굽기로 이어지고, 출애굽기가 있어야만 창세기도 온전한 책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