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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와 차이

하나님아들 2021. 1. 9. 10:18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와 차이

 

(조동호 교수)

 

 

1.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

 

신약성서에는 구약성서와 연관된 말씀들이 참으로 많다. 신약성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모세와 그리스도의 연속성,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과 바통의 이동을 특유의 모형(유형)론과 그리스도 중심의 구약성서 해석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와 유대교를 모르고서는 신약성서와 기독교를 온전히 알 수가 없게 된다.

 

‘머리말’에서 언급하였듯이 본서의 저술 목적과 동기는 유대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알자는 데 있다. 유대교와 유대인들을 알면 구약성서는 물론이고, 신약성서와 기독교를 아는데 도움이 된다. 유대교와 유대인들의 전통은 성서를 보는 거울이다. 비록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유대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전통에는 변함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 분 하나님만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후로 지금까지 아버지가 믿었고, 할아버지가 믿었고, 증조할아버지가 믿었고, 증조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믿었고, 그 할아버지가 믿었고, 그 증조부가 믿었고, 120대가 넘도록 조상대대로 믿어왔으며, 하나님이 주신 언약서, 토라(Torah)가 모세이후 그들의 삶의 중심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토라와 직간접으로 연관된 글들이 구약 역사서요, 예언서요, 성문서이다. 그리고 이 성서를 경전으로 삼았던 유대인들에 의해서 기독교가 시작되었고, 적어도 한 세기 동안은 그들의 통제아래서 기독교가 발전해 나갔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고, 그분의 12제자와 70문도와 120문도도 모두 유대인들이었으며, 로마제국 전역으로 기독교 복음을 가져간 이들도 유대인들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구약성서와 유대교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기독교를 시작한 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조상대대로 믿어온 유대교가 몸속에 깊게 밴 이들이었다. 그들의 사상과 언어와 행동이 유대교와 깊게 관련되어 있던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무엇 때문에 유대교를 버리고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이어지는 장(章)들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만큼 철저하게 신(神)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있는 민족은 없다. 유대인은 자기 민족의 뿌리, 이동, 사상, 사명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세하게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유대인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다. 자기 민족은 떠돌이였었고, 노예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족장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셨고, 이삭의 하나님이 되셨으며,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이다. 또 자기 민족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노예였던 자기 민족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민족은 하나님에 관한 독특한 의식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민족의 구원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레위기 25장 38절과 민수기 15장 41절을 비롯한 수많은 성구들이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신앙고백을 보면, 유대인의 하나님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출 19:4), ‘홍해를 육지처럼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시 66:6, 78:13, 106:9), 떠돌이였던 그들에게 정착할 땅을 주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 그들과 특별히 언약을 맺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언약의 말씀인 토라(Torah)를 주시고, 그것들을 지키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의식이 수천 년 동안 유대민족을 지탱해온 믿음이자, 정신이며, 유산이다. 그 속에 통일된 의식이 있고, 사상이 있고, 행동이 있고, 문화와 관습이 있고, 교육이 있고, 철학이 있고, 가치가 있고, 세계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의 내용이 담긴 토라를 사랑하여 몸에 지니고, 입을 맞추며, 일 년에 한 차례씩 완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메마르고 척박한 땅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땅으로 여기며, 아득한 과거에 빼앗긴 땅, 주인이 수없이 바꿨을 그 땅을 목숨 바쳐 되찾고 지키고 가꿔서, 사막에 꽃이 피게 하고, 젖과 꿀이 흐르게 하고, 풍부한 종교적 유산과 수천 년간 이어오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신앙유산을 가진 유대인들이 신생 기독교에 추월당하고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위대한 신앙유산을 물려받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옛 언약공동체로 무시해버린 기독교신앙과 복음에 뒤진 이유가 무엇인가? 유대교가 기독교에 패배한 원인이 무엇인가? 이어지는 장(章)들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2.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

 

1) 종말관(終末觀)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라는 유명한 유대인 신학자가 1917년에 이런 글을 썼다.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그를 구원했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메시아가 분명히 미래에 오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다.”[Will Herberg, ed., The Writings of Martin Buber, p. 31.] 또 ?두 형태의 신앙?(Two Types of Faith)에서는 기독교가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믿고 있는 반면에 유대교는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론(futuristic eschatology)을 믿고 있다고 했다. [최한구, ?유대인은 EQ로 시작하여 IQ로 승리한다? (도서출판 한글, 1998)]

 

부버가 언급한 이 두 개의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대민족에게는 영적구원(종말)이 없고, 육적구원(종말)만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구원과 그의 재림 시에 육적 완성이 이뤄질 것을 말하는데, 부버는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大)구원이 이뤄졌고, 제2의 출애굽사건을 주도할 메시아(왕)가 오심으로 그 구원이 완성된다고 본 것이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이미 실현된 구원의 확신, 곧 종말에 주어질 축복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 미리 맛보고 누리는 영적인 축복이 있는 반면, 유대교에는 그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데, 유대교인은 미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다. 유대교인에게는 ‘이미’가 없고, 오직 ‘아직’만이 있을 뿐이다. 이점이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한 가지이다. '이미'란 것은 메시아가 가져오실 하나님의 왕국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이요, '아직'이라는 말은 완성될 하나님의 왕국이 아직 소망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현세적이면서 미래적이며,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성령님의 능력으로 종말에 주어질 축복된 삶을 맛보고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 복된 삶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침례 가운데서 선행을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삶이며, 성령님을 통해서 보증되고 인친 삶이다.

 

유대교인들은 2500여 년 전부터 두 가지를 희망하고 있었다. 첫 번째가 메시아가 나타나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그 메시아가 가져올 ‘올람 하바’(Olam Ha-Ba)이다. ‘올람 하바’란 ‘메시아 시대’ 혹은 ’다가올 세계‘(World to Come)를 뜻한다. 이 ’올람 하바‘ 곧 ’다가올 메시아 세계‘는 흔히 말하는 ’종말시대‘ 또는 ’마지막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 ’다가올 마지막 세계‘가 2천 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인류의 대속을 위한 것이었고, 그분이 승천하시고 대신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의 활동은 다가올 마지막 세계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다.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가 ’올람 하바‘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힘입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과 성령님의 ’중생과 씻음과 거룩하게 하심‘을 받은 사람은 이 ’올람 하바‘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500여 년간 몹시 고대하던 그 마지막 세계 혹은 종말시대가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교회‘라는 새 언약 공동체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영적으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이 시대를 교회시대, 혹은 성령시대라고 부른다. 또 이 시대를 다른 말로는 시작된 종말시대 또는 실현된 종말시대라고 부른다.

 

시작된 종말이나 실현된 종말이란 말은 영적인 종말을 뜻하는 것이고, 종말의 완성을 뜻하는 것은 ‘아직’ 아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말, 혹은 ‘칭의’나 ‘중생’이란 말은 종말이 완성되는 때에 주어질 완전한 구원의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고, 성령님으로 보증 받고, 인침 받고, 그 축복들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과 보호하심과 변호하심과 치료하심 속에서 맛보고 누리며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대표적인 축복은 하나님의 평강이다.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이 평화가 있는 곳에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지, 끝은 아니다. ‘끝’ 곧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이뤄진다.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3절에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축복이 유대인들에게는 없다. 그들에게는 시작된 종말이나 실현된 종말의 축복이 없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조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뿐이고, 성령님으로 보증 받고, 인침 받고, 그 축복들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과 보호하심과 변호하심과 치료하심 속에서 맛보고 누리며 경험하는 것이 없다.

 

유대인들에게 시작된 종말의 축복이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다가올 시대‘란 그들 민족만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올람 하바‘는 유대인의 제2의 출애굽 사건, 곧 유대인의 대 구원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은 영적인 사건이 아니고, 육적인 사건이다. 문자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완전한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 국가가 건국되었는데, 건국된 지 60여년이 흘렀어도 이스라엘 왕국이 완전하게 회복되었다고 믿는 유대인은 없다. 아직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세계를 통합할만한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2) 메시아 관(觀)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2천 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유대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메시아닉 주(Messianic Jews), 곧 소수의 기독교인 유대인들이 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다수의 비기독교인 유대인들이 있다. 기독교가 처음 시작된 장소는 예루살렘이고, 시작한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주후 30년 5월 28일이었고, 대표적 지도자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다.

 

이들 기독교인 유대인들을 보는 신학자들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먼저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기독교인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들을 유대교 안에서의 개혁운동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제사를 드렸고, 안식일을 지켰으며, 할례를 행하고, 절기와 음식에 관한 법들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겼고, 예수님을 선지자나 교사의 한 사람으로 보았으며, 신적이나 반신적 존재로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예루살렘에 집중된 기독교인 운동이 할례를 행하고, 성전제사를 드리고, 절기와 음식에 관한 법들을 지킨 것을 제외하고는 바울 라인의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고, 삼위일체의 한 인격으로 보았으며, 메시아와 구세주로 보았다고 말한다.

 

진보 보수 신학자들이 말하는 두 가지 견해의 유대인들이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공통점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였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기독교인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이해를 우리 기독교인들과 달리 한다. 그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다윗 왕처럼 그들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우리가 말하는 ‘구세주’(救世主)도 아니고, 죄가 없으신 삼위일체 신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게 해줄 다윗과 같은 영웅이자 제2의 출애굽 사건을 이끌 모세와 같은 인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 같은 인물이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킴으로써 정치적 영적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며, 이스라엘에 한 정부를 세울 것이고, 그것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전 세계 정부의 중심에 세울 것이며, 성전을 재건할 것이고, 성전예배를 다시 세울 것이며, 이스라엘의 종교법정 체계를 회복시킬 것이고, 나라 법으로써 유대법을 세울 것이라고 믿는다. [조동호 역, “유대주의에서의 메시아사상”(http://kccs.pe.kr →성경연구→신약성경관련).]

 

3. ‘구약’과 ‘신약’의 의미

 

신앙인들 가운데 ‘구약’과 ‘신약’이란 말이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지 모르겠다. 기독교인들 대다수가 ‘구약’이란 메시아 예언에 관한 것이고, ‘신약’이란 재림에 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옳은 답일까?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바벨론 포로기 때에 예언자들의 회복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성서는 대부분 유대민족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언약을 얼마만큼 성실하게 지켰는가에서 찾고 있다. 예언자들의 활동표준은 바로 이 언약에 대한 성실성에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예언서들의 내용은 언약에 대한 유대민족의 성실성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우리 민족이 이 엄청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는가, 왜 우리 민족이 이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는가를 묻고, 그 해답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얼마만큼 성실하게 지켰는가에서 찾았던 것이다.

 

결론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 결론을 근거로 예언자들은 유대민족을 대상으로 회개운동을 펼쳤다. 회개운동 후에 예언자들이 펼친 또 다른 운동이 있었는데 그것이 회복운동이다. 회복운동이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에 대한 예언으로써 그 중심에 메시아 도래에 관한 예언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오시는 때가 이스라엘 국가가 회복되는 때인 것이다.

 

그러면 예언자들의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의 근거가 되었던 ‘언약’은 무엇인가? 성서에서 말하는 언약은 ‘약속’이나 ‘예언’이란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쌍방이 합의한 ‘계약’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옛 언약’이란 뜻의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내산 기슭에서 하나님과 짐승의 피로써 맺은 계약을 말한다. 이 계약에 의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이고, 그 내용이 바로 십계명과 율법이다. 따라서 십계명과 율법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합의한 계약인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십계명과 율법서를 ‘언약서’라 부른다. 이 언약서가 구약성서의 핵심이고, 이 언약과 관련된 유대인들을 신약성서에 기반을 둔 우리 기독교인들은 ‘옛 선민’이란 뜻의 ‘구약공동체’라 부른다. ‘옛 언약 공동체’란 유대인들이 과거의 선민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이 흔히 쓰는 ‘구약’이란 옛 언약서를 말하고, 이 옛 언약서에 기초한 민족이 구약공동체요, 옛 선민이며, 이스라엘 민족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이란 무엇인가? ‘신약’이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맺은 ‘새 언약’을 말한다. 이 ‘새 언약’은 신자들이 침례(세례)받을 때 하나님 앞과 증인들 앞에서 행한 신앙고백이며, 그 내용은 신약성서의 엑기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의 모임인 ‘교회’가 ‘새 언약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고 있는 새 언약 공동체요, 새 선민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짐승의 피로써 맺은 언약공동체이고,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은 언약공동체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구약을 메시아의 초림에 대한 예언으로, 신약을 메시아의 재림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서를 이루는 대부분의 말씀이 시내산 언약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말씀들이고, 신약성서를 이루는 말씀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침례(세례)서약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말씀들이기 때문에 성서를 구약성서 혹은 신약성서라 부르는 것이다. 이토록 언약이란 말이 성서이해에 중요한 열쇠가 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언약’이란 말을 잘못 알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참고자료

 

조동호 역, “유대주의에서의 메시아사상”(http://kccs.pe.kr →성경연구→신약성경관련).

 

최한구, ?유대인은 EQ로 시작하여 IQ로 승리한다? (도서출판 한글, 1998).

Will Herberg, ed., The Writings of Martin Buber, p.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