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네스토리우스교(동방기독교·경교·景敎)
중국에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가 전래한 635년부터 약 150년간 있었던 선교활동 및 교세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석비. 높이 2.76m, 하부의 너비 1m, 두께 0.27m이다.
명(明)나라 말기 1625년에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서쪽에 있는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의 대진사(大秦寺)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이 석비는 당대(唐代)인 781년에 경교도 사즈드보제드가 건립한 것으로, 845년의‘박해령(迫害令)’후에 매몰된 것으로 추측된다.
'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9자를 3행으로 새긴 전액(篆額)을 포함한 이수(촬首) 부분과 비문을 새긴 부분으로 되어 있다.
1800여 자의 한자와 50여 어의 시리아 문자로 되어 있고, 한자는 대진사의 승려 경정(景淨)의 찬(撰)에 여수암(呂秀巖)의 서(書)로써 경교의 주요 교리와 성쇠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비문의 마지막에는 황제에 대한 상찬(賞讚)과 사제(司祭) ·수도사의 이름 및 지위 등이 열기되어 있어, 당대의 종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최근 기독교의 동방전래 과정이 구전차원을 넘어 차츰 문헌과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새롭게 증명되는 자료를 통해 복음의 역사는 그 뿌리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예수의 12제자 중 도마와 바돌로매가 인도와 중국을 선교했다는 설이 있으며 보다 실증적인 복음의 동방전래는 네스토리우스파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경교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기독교의 중국 한자음 명칭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근처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428년 동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감독에 임명됐으나 교리논쟁에 휩싸였다.
네스토리우스파는 교리논쟁에서 알렉산드리아학파에 패배해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렸다
주후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되고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재차 단죄되었다.
<신학적 논쟁점>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의 마리아 신성 논쟁
에베소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품격(品格)을 둘러싼 논란이 신학문제의 초점이 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한 3차 공의회이다. 안디옥 학파 출신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總大主敎)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학파의 입장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神)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정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학파가 이에 이견을 제시하자, 네스토리우스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강요하여 이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을 추종하는 시리아의 주교들과 교황 셀레스티누스 1세측의 대표자들의 참석을 기다리지 않고, 에페소스의 주교 멤논의 지지를 받는, 네스토리우스의 적수인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가 그들의 도착 전에 개회를 하였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직에서 해임되고, 파문(破門)을 당하였으며 그의 교구는 단죄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니케아신경’이 재확인되었다.
이 에베소 회의는 교회사에서 유명한 도적교회회의라고도 불리운다. 대표자들이 참석 전 강제로 개최했기 때문에 교황 레오 1세가 화가 나서 ‘에베소의 강도들’이라고 부른 데서 이 이름이 붙었다. 당시 에우티케스가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다 함께 갖추었다는 단성설(單性說)을 주창하자, 이에 반대하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大主敎) 플라비아누스는 448년의 회의에서 그를 이단자로 단죄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디오스쿠루스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교회회의 소집을 간청하여 회의를 개최하고, 거기에서 에우티케스를 정통이라고 선언하는 동시에 플라비아누스를 비롯한 양성론자(兩性論者)로 지목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의 주교들을 모두 면직시켰다. 테오도시우스(2세)가 죽은 후 칼케돈 공의회에서 앞서의 에페수스 공의회의 결의 및 명칭을 취소하는 사태를 빚었다. **
로마에서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파는 5세기경 페르시아로 망명,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그 뒤 페르시아 사산 왕조 때 조로아스터교의 핍박을 받았으나 국왕의 비호를 받아 존속하면서 교세를 넓혔다.
7세기경, 페르시아가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게 된 후에도 네스토리우스파는 계속 남아 아라비아 북부 ·인도 ·몽골 ·중국 등지에 포교하였고, 당(唐)나라 때 중국에 들어가 경교(景敎) 피사(彼斯:페르시아) ·대진(大秦:로마)이라는 이름으로 번창하였다.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의 중국선교는 635년 태종 9년( 태종太宗:재위 626∼649)에 대진국(大秦國:로마) 사람 아라본(阿羅本) 일행이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선교한 데서 비롯된다. 당시 동서무역로였던 비단길을 따라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635년, 곧 당(唐)나라 정관(貞觀) 9년이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였다.당 태종은 재상 방현령을 통해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교단을 맞이했고 장안(長安)에 머물면서 경전을 번역하도록 했다.알로펜(Alopen ;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선교단은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페르시아를 기반으로 7세기 초부터 인도와 아라비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고 이 물결은 비단길을 따라 중국까지 이르렀다.
이 네스토리우스파는 처음 페르시아에서 왔다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음을 따 파사교(派斯敎)로 불렀으며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대진'(大秦)을 붙여 대진경교(大秦景敎)라 불리기도 했다. 경교란 '큰 종교'란 뜻이다.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781년에 건립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진상(眞常)의 도(道)는 현묘(玄妙)하여 이름짓기 어려우나 그 공용(功用)이 소창(昭彰)함을 보아 감히 경교(景敎)라고 칭한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동시리아교회, 바벨론교회, 갈대아교회, 에뎃사교회, 네스토리우스교회, 셀루기아교회, 갈대아적 시리아교회 등으로 불리워졌다. 경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回敎)와 함께 삼이사(三夷寺)라 하여 서방에서 유입된 종교로 중국 안에서 상당한 교세로 번창하였다.
경교가 중국에 전해진 후 3년이 지난 638년에 태종의 칙령으로 국비를 들여 의녕방(義寧坊)에 대진사(大秦寺-파사사(波斯寺)란 사찰을 지어주고 경교승 21명을 배치하였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高宗:650-683, 재위)시대에 경교의 위치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고종황제는 훌륭하게 선조를 계승하여 경교를 윤택하게 하고 모든 주(358州)에 각각 경교 사원을 세웠으며 아라본을 높여서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삼았고 경교의 법이 10道(全國)에 전파되어 국가가 부유하고 태평하였으며 경교사가 모든 성안에 가득 차서 축복이 가정에 융성했다"는 경교비문을 볼 때 당시에 경교승은 전국 각지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200여 년 간(AD 600~800)네스토리우스교는 경교라 명칭하에 중국에서 상당한 교세로 발전했었다. 즉 불교와 형식과 거의 동일하게 목탁을 치며 예배를 드렸고 불경(佛經)의 형태를 빈 여러 종류의 한문 교리서를 제작하였다.
고종의 뒤를 이은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불교를 숭상하여 경교를 억압하였다. 경교는 여러 지방에서 박해를 받아 사원이 파괴되기도 하였고, 수도 장안에서 까지 경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현종(玄宗:712-756) 때에 경교가 가장 크게 성행하였고 사원의 이름도 대진사(大秦寺)로 개칭하였다. 숙종(肅宗:757-763)) 때 안록산의 난을 토벌할 때 경교도인 이사(伊斯)가 큰 공을 세웠고, 대종(代宗)시대에 토번(土蕃: 티베트)의 침공을 물리치는데도 이사가 혁혁한 공을 세워서 경교가 권력의 후대를 받았다.
대종의 뒤를 이은 덕종(德宗:763-779)도 경교를 숭상하였다. 이때가 당대 경교의 절정기로 경교의 선교역사와 그 상황을 요약한 대진경교류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덕종 2년에 건립하였다. 당나라 초기에 들어와 국왕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하였던 경교는 당 말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845년 무종회창(武宗會昌)5년에 실시된 회창금교(會昌禁敎)이다. 회창금교로 경교 사원이 파괴되고 토지와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많은 경교승들이 환속되었다. 경교승들은 약 600 내지 700명이 환속되었다고 보여지고, 경교도는 40,000내지 70,000명이 환속하였다고 추정된다. 이 박해로 경교는 크게 타격을 입었고 궁벽한 곳으로 도피하였다. 무종이 죽고 선종(宣宗)이 즉위하여 박해가 완화되자 불교에서는 사원을 새로 중건하는 등 차츰 원상태로 회복이 쉽게 되었으나 경교는 회복의 기회를 얻고도 재기를 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879년에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 때 경교도 30,000명이 학살당하였다. 그후 경교는 중국에서 끊어졌고 살아남은 경교 선교사와 신자들은 거란, 몽고, 신강,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쫓겨갔고 나머지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고 불교나 도교로 개종하였다. 200,000명을 헤아리던 경교도들은 다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당 이후 중국의 변두리에 있던 경교도들은 한(漢)민족의 문화에 동화 흡수되어 경교는 소멸되고 유적으로만 남게 되었다. 후에 원(元)나라 때에 경교도들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원의 멸망과 더불어 중국에서 소멸되었다.
경교는 13세기 후반에는 페르시아 등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크게 융성하였는데, 14세기에 이르러 티무르가 지배하면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내고 거의 절멸하고 말았으며, 살아 남은 일부도 16세기에 로마교회에 흡수되었다. 아르메니아에 남아 있던 일부 신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를 배반하였다는 이유로 많은 희생을 당했고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극도로 미미해진 이 세력은 이라크 북부 등지에 5만 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네스토리우스파가 경교란 이름으로 중국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워가던 무렵은 우리나라가 당나라와 밀접한 교류가 있었던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이르는 시기(7~8세기)라는 점에 주목할 때 그 전래 가능성이 높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과 통일 이후에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해마다 학승(學僧)을 당나라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였고 이들이 귀국할 때에는 불경, 불상, 사리 등 불교관계 물품들과 한께 중국에서 생겨난 새로운 학문의 신경향과 사상을 들여왔다. 바로 이러한 점등을 고려할 때 당시 중국 내에서 그 위세를 크게 떨치고 있던 경교가 들어오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직도 학문적인 결론을 얻지 못한 상태이지만 1928년 고구려 영토였던 압록강 연변의 만주 안산(鞍山) 지역에서 경교도들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에서 출토된 와제(瓦製) 십자가라든지, 1956년 경주에서 발굴된 십자형 돌과 마리아상 그리고 도에 십자가 등은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유물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복음 접촉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개연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일부 종교 역사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와 몽고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던 고려시대에 경교가 우리나라에 어떤 경로로든 전래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한국기독교사연구회가 1989년 펴낸 `한국기독교의 역사Ⅰ'에 의하면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고든이 이같은 가능성을 제일 먼저 제시했다.
고든은 한일합방 무렵 한국에 4년간 머물면서 불교사찰을 관찰한 뒤 경교가 한국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즉 그는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의 신장과 관음상 나한상 제석천상 등에서 페르시아의 경교적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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