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들!! 제자들!!

선지자의 시대와 그들의 외침

하나님아들 2020. 10. 28. 17:34

선지자의 시대와 그들의 외침  

 

1. 들어가며

 

선교 130년을 맞은 한국교회가 전환점에 서 있다. 우리 주변의 많은 교회들은 이전 시대에 비해 좋은 건물과 편리한 환경을 자랑한다. 요즘들어 성도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교회는 과거의 그 어떤 시대보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더구나 한국교회는 이제 더 이상 한국사회 속에서 소수세력이 아니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풍요로움 속에서 한국교회는 점차 침체 내지 몰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근자에 한국의 유명한 교회의 담임목사로 인한 문제로 인해 세상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많은 대형교회들이 목회자 세습 문제로 시끄럽다. 이런 문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추어 서고 말았다. 교회 미래학자인 최윤식 박사에 의하면 2050년에 이르면 현재의 800여만 명의 한국교회의 성도수가 500여만 명이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어 놓고 있다. 이러한 숫자의 침체보다 더욱 큰 문제는 교회의 영적인 권위의 급격한 쇠락이다. 더 이상 세상은 교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형편에서 우리는 선지자들의 시대와 그들이 외친 메시지를 주목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 시대 속에서 비록 소수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고, 그들의 외침 속에 오늘 우리 공동체와 개인이 사는 생명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2. 선지자는 누구인가?

 

1) 선지자에 대한 오해

 

한국의 크리스천들 중에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선지자들을 단순히 "앞날을 미리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하면, 구약의 예언자들을 일종의 점쟁이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년이 되면 크리스천 중에도 점쟁이 집에 가서 자신의 1년의 운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선지자가 꼭 그런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오해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 교회의 소위 ‘신령한 9가지 은사’ 중 예언(고전 12:10)의 은사에 대해서도 동일한 생각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 지를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에게 찾아가서 묻곤 한다. 그러나 선지자는 점쟁이가 아니다. 그들은 사람의 앞날을 점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2) 사회학계에서 보는 선지자

 

최근 학계의 주된 흐름은 성경에 나타나는 특정한 사건과 묘사를 하나님의 독특한 말씀으로 보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관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선지자들과 그들의 활동 역시 하나님을 배제하고 ‘삶의 정황’(Sitz im Leben)이 중요하다고 한다. ‘선지자’가 선포하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기보다, 선지자의 말을 권위 있게 받아들이는 ‘지지 그룹’에 의해 그 위치가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기보다는 중개자들(intermediaries)의 입장으로 이해되게 된다. 즉 선지자들과 그들의 지지 그룹이 권력체제에 속했는지 아니면 밖에 있었는지? 그들은 현상유지를 지지했는지 아니면 어지럽혔는지? 등으로 사회학적 관점으로 선지자가 그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입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오늘날 선지자들이 활동했던 시대를 연구함에 있어 이런 사회학계의 연구 성과는 선지자들이 살던 사회를 이해하는데 부분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모세의 언약이 중요한 통치 기능을 한다고 생각하는 전통에 속했다고 생각했다. 반면 남 유다의 선지자들은 환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으며, 이 환상은 결국 성전과 다윗 언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런 연구 성과는 일정 부분 성경 본문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런 사회학적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3) 거짓 선지자

 

성경에는 선지자와 구분되는 거짓 선지자도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많은 말들을 내 뱉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의와 공도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단순한 길흉을 말해주고 복채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거짓 예언만을 하였다. 그뿐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을 핍박하기도 했고(렘 20:1-6), 정치권력과 결탁하였고, 가나안의 부와 권력에 취해 거짓 예언을 일삼았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권력자의 눈치를 보았으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예언을 남발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이런 거짓 선지자들의 패망을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참 선지자들은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과 대항하여야만 했다(왕상 22장; 겔 13장; 슥 13장).

 

4) 참 선지자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성경이 보는 선지자(prophet)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종(렘 1:5; 암 7:12)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아 그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렘 1:6-7, 9). 우리는 선지자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 대언하는 자로 생각한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스피커다. 우리에게 선지자의 개념은 ‘말을 하는’ 것과 깊은 인상을 맺고 있다. 하지만 히브리어로 선지자 나비(Nabi)는 어원적으로 ‘the one who was spoken to’를 의미한다. 즉, “말을 하는 자”가 아니라 “말을 들은 자”라는 뜻이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를 의미한다.

구약 시대에 왜 그토록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에 이 히브리어 나비는 명확한 대답을 준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많은 말들을 했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가르는 기준은 무슨 말을 하느냐가 된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말을 하느냐, 아니면 듣지 않은 말을 스스로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자신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과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토라’와 그의 구원의 은총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비뚤어진 현재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한 방편으로, 그에 따른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선언했다. 아울러 선지자는 심판의 메시지만을 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러한 심판의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임을 명심하였고, 그 결과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이스라엘이 회개를 통해 회복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을 전하였다. 결국 선지자들이 전한 예언의 메시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3. 선지자들의 시대

 

선지자들은 그 활동 시기에 따라 초기 선지자와 후기 선지자로 나눌 수 있다. 초기 선지자들과 후기 선지자들을 나누는 가장 간단한 기준은 선지자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된 책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이다. 즉, 초기 선지자들의 경우는 엘리야, 엘리사, 나단과 같이 그들의 활동이 성경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그들이 남긴 책이 없다는 데 있다. 이들은 주로 주전 1050-760년경에 활동했다.

반면 후기로 가면 선지자들이 자신의 활동과 그들이 선포한 메시지를 글로 기록하게 된다. 후기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주전 8세기(주전 760년 경)를 기점으로 한다.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는 바로 주전 8세기 이후에(포로기까지, 포로기부터 포로기 후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들의 말씀과 활동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히브리 성경에서는 후선지서라고 부른다(다니엘서나 예레미야 애가는 제외). 이 선지서들은 하나님의 말씀 혹은 계시의 모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전선지서들(즉 여호수아서부터의 역사서들)에 나오는 선지자들과는 달리 전 백성들에 대한 심판, 특별히 나라의 멸망과 포로 됨을 예고하였다.

이들 후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의 최대 격변기였다. 그 중심에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대립, 두 왕국의 멸망과 바벨론 유수의 시기를 포함한다. 선지자는 이 격변기적 시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였다. 아래의 도표에서 확인되듯이 선지자들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패망의 길로 걸어가던 때에 왕들과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속히 회개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나라가 사라지는 아픔을 맛봐야만 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기름 부어 선택한 백성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면 사랑의 채찍을 들어 패망케 하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다고 하겠다.

 

1) 바벨론 유수 이전 (아래에 소개된 연도는 모두 BC-주전-이다)

북 이스라엘 왕

남 유다 왕

선지자들

여로보암 2세 786-746

웃시야 738-742

아모스, 요나

스가랴 746-745

 

 

살룸 745

 

호세아

므나헴 745-738

요담 742-735

 

베가야 738-737

 

 

베가 737-732

아하스 735-715

이사야, 미가

호세아 732-722

 

 

 

히스기야 715-687

 

 

므낫세 687-642

 

 

아몬 642-640

 

 

요시야 640-609

하박국, 나훔, 스바냐

 

여호아하스 609

예레미야

 

여호야김 609-597

오바댜

 

여호야긴 597

 

 

시드기야 597-587

에스겔, 요엘?

 

2) 바벨론 유수와 그 이후

바벨론과 페르시아이 왕들

선지자들

605-562

느브갓네살의 통치

(다니엘)

562-560

아멜-마루둑의 통치(에월-므로닥)

 

560-556

네리글리사르의 통치

 

556-539

나보니두스의 통치

 

549-539

벨사살 섭정왕

 

539

페르시아 사람 고레스에 의한 바벨론의 함락

 

539-530

바벨론 함락 이후 고레스의 통치

 

530-522

캄비세스의 통치

 

522-486

다리오 I 세의 히스타스페스의 통치

학개, 스가랴, 말라기

 

4. 선지자들의 외침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구체적인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상황 가운데 전달되었다. 1차적으로 우리는 선지서들의 말씀들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선지자들이 활약한 시대를 보여주는 역사서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도 선지서들은 단순히 그 역사적 상황에만 머무르지 않고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초점은 주로 하나님의 율법(모세오경)을 계속 범하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경고하신 것처럼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 맞추어진다. 그리고 그 심판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것이며, 앗수르에 의한 심판이나 바벨론에 의한 심판으로 종결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 것은 백성들을 단순히 위협하거나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와 심판을 피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 계획하셨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행복의 길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의 메시지들 사이사이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가 등장하고 있고, 대부분의 선지서들은 구원의 메시지로 마무리되고 있다. 그리고 선지서들의 기록에는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나 열방들이 나중에 시온으로 돌아올 것을 함께 기록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단순히 이스라엘에 국한되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심판과 구원이 온 세상의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선지서 이해에 중요한 것은 선지서들에 나타난 많은 예언들 중에서 종말과 관련된 구원의 메시지들은 그 시대들에 다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도래로 말미암는 새 시대를 기다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지서들의 많은 예언들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를 보게 되며, 예수님에 의해 그 의미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5. 결론 : 타락한 세상 속에서 선지자로서의 삶 살기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꿈꾸시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렸다. 그들의 몸은 현실에 있었으나, 그들의 눈은 미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다. 물질적 풍요와 번영이 그들의 마음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살림살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우리네 어머니들이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 일을 이 단어는 보여주고 있다. 국어사전은 이 단어를 ‘살림을 차려서 사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런데 이 살림살이라는 단어는 ‘살림’과 ‘살이’의 합성어라고 한다. 여기서 ‘살이’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살다’이고, 또 하나는 ‘사르다’이다. 즉, 살림살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불태울 때 가능해진다.

하나님은 오늘 시대에 하나님 나라라는 집을 살리는 선지자로 살라고 도전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지자들처럼 우리의 몸을 사르는 헌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목사와 선교사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도인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기위해서는 몇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첫째, 우리는 울어야만 한다. 선지자들은 눈물의 사람들이었다. 예레미야와 느헤미야는 조국과 백성들의 현재와 미래를 보면서 처절히 울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4-5).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 우리 주님 역시 공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1-44).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예수님과 선지자들처럼 이 시대를 향해 처절히 울라고 도전하신다.

 

둘째, 성령 안에서 의와 공도의 메시지를 외쳐야만 한다. 우리는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를 보면서 그들이 상당히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적으로 참 약한 사람들이었다. 예레미야 역시 수줍음이 많고, 마음이 약한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가 왕, 제사장, 거짓선지자들을 대할 때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유다왕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예레미야의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불쏘시개로 쓴다(렘 36:23). 제사장 바스훌에게는 매질 당하고 나무에 매달리는가 하면, 우물에 던져진 적도 있었다(렘 20:1-6; 38:6). 그러나 그는 결코 주님이 주신 메시지를 타협하지 않았고, 불의한 세상에 공의의 메시지를 전했다. 오늘 우리 시대 속에서도 성도는 힘들지만 이런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야만 한다. 내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어떤 불의에도 대항하고, 하나님의 의를 외쳐야만 한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이다.

 

셋째,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 불의한 세상과 심지어 타락한 교회를 비판하는 데는 열심인 반면, 자신이 거룩한 삶을 사는 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선지자는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 그들은 그들의 말에 책임을 졌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쳤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는 말을 하는 사람은 많은 반면에 자신이 말한대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족하다. 주님이 주신 작은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면서 사는 사람이 너무나 부족하다. 이 시대의 선지자인 우리는 주님이 주신 말씀을 지키는데 힘을 써야만 한다. 그래서 거룩한 삶으로 어두운 이 세상에 도전해야만 한다.

 

넷째, 주님이 임하실 나라를 기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선지자들은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몸담고 있는 땅이 완전히 거룩하게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다(사 62장; 65:18-25; 렘 23:5; 겔 37:24-25). 그런 점에서 손봉호 박사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비관적 선지자주의’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이 땅이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원한 통치를 바라보면서 이 땅의 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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