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교 우리의 문제들

한국교회 성장 둔화와 그 대책

하나님아들 2020. 5. 12. 17:53

한국교회 성장 둔화와 그 대책

들어가는 말

Ⅰ.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
1) 한국교회 성장의 문화적 요인
2) 한국교회 성장의 교회적 요인
3) 한국교회의 성장의 상황적 요인

Ⅱ. 한국교회 성장의 둔화 요인
1) 개교회주의
2) 물량주의
3) 기복신앙의 추구
4) 목회자의 자질문제
5)목회구조에 의한 문제
6) 지역사회에 대한 무관심
7)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문제

Ⅲ. 교회성장 둔화에 대한 대안
1. 목회 갱신을 위한 제안
1) 성숙구조로의 전환
2) 목회자의 자기 개발
3) 신자 양육 프로그램
4) 평신도 의식 개혁
5) 가정사역 강조
6) 협력목회 사역을 강조
7) 개교회주의 극복
8)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9) 교회성장 신학의 정립
10) 신학교육 수준의 향상
11) 성령의 생동적 역사
12) 교회의 정체성 확립
2. 한국사회를 향한 교회의 태도에 대한 제안
1)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2) 영적 리더
3) 정신적 가치관 정립
4)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교회
5) 전인적 사역 지향
6) 연합되고 하나되는 교회
7) 해외신교 지속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지난 60년대 이후 양적으로 급성장을 해왔다. 유럽에서는 교회가 양적인 쇠퇴의 길을 가고 있고 미국에서는 교회가 내적인 세속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 추세를 감안해 본다면 이원규, 『종교의 세속화』,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6,8장.
한국교회의 양적인 성장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실제로 한국의 교회수는 1960년의 5,011개에서 1990년의 35,869개로 30년 동안 61.5%나 증가했고, 교인수에 있어서도 1960년의 623,072명에서 1990년의 10,312,813명으로 같은 기간 동안 무려 1,555%나 증가했다. 이런 놀랄만한 성장을 기록한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는 기독교국가의 형태를 가지는 듯하나 실상을 바라보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구별이 나타나지 않으며 그럼으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됨으로 인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실정으로 추락하여 버렸다. 더군다나 1990년대들면서 국민소득이 1만불이 넘어감에 따라 선진 기독교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독교가 성장일로에서 감소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진정하고 냉철한 자기 반성이 필요하며 여기에 알맞는 대안이 어떻게 제시 되어야 할 것인지를 이 논문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한국교회의 성장에 대한 요인을 문화적, 교회적, 상황적으로 살펴보며, 그 다음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감소추세로 돌아서게된 원인들에 대하여 분석해 보며 마지막으로 이런 성장둔화 현상에 어떤 대안으로 대처할 때에 다시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Ⅰ.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

교회성장의 요인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것이다. 호지(Hoge)와 루젠(Roozen)이 편집한 책으로써 교회의 성장과 쇠퇴의 요인들을 분석하고 있는 『Understanding Church Growth and Decline』(1979)에 따르면 교회의 성장이나 쇠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크게 네가지로 나뉘어진다. Dean R. Hoge and Darid A. Roozen(eds) 『Understanding Church Growth and Decline』 New York: The Pilgrim Press, 1979.
첫째는 전체사회 차원의 상황적 요인(national contextual factors)이다. 이것은 사회구조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상황을 나타낸다. 둘째는 전체교회 차원의 제도적 요인(national institutional factors)으로써 교파적, 초교파적 교회 전체의 경향과 운동을 의미한다. 셋째는 지역적 상황요인(local contextual factors)으로 이것은 특정교회의 지역공동체의 성격-인구이동, 근린관계변화, 지역경제 경향 등-을 말하는 것이다. 넷째로 지역적 제도요인(local institutional factors)으로 이것은 개체교회의 내적인 요소-개체교회의 성격과 구조, 프로그램과 지도력의 특질이나 범위 등-의특징을 말한다. 따라서 특정지역의 개체교회의 성장이나 쇠퇴는 광범위한 사회적, 문화적 힘들의 영향, 교파적 자원과 정책의 영향, 지역사회의 상황적, 제도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David A. Roozen and Jackson W. Carroll, 『Recent Trends in Church Membership and Participation』Hoge and Roozen(eds), op. cit., p. 40.
그러나 크게 범주화하면 사회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도적 요인으로 교회성장의 요인으로 나눌 수 있다. 루프등은 통계학적인 경험적 연구에서 교회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있어서 상황적 요인의 비중이 56%, 제도적 요인의 비중이 44%임을 밝혀냄으로써 교회외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결국 한국교회의 성장은 교회구조적 요인, 사회상황적 요인, 문화적 요인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1). 한국교회 성장의 문화적 요인
한국의 종교문화는 그 자체가 교회성장에 매우 적합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원규, “해방후 한국인의 종교의식구조 변천연구” 『현대 한국종교변동 연구』(한국정신문화 연구원, 1993), pp. 168-180.
한국인의 종교성은 매우 수용적이고 적극적이다. 한국인의 종교적 열정과 적극성은 한국에서 모든 종교를 매우 활발하게 수용,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인의 종교성은 또한 매우 감성적이고 열정적이어서 종교의 양적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한국인의 종교성은 조화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즉, 혼합적이고 절충적인 신앙성향을 한국인은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무종교인의 종교로의 귀의나 종교인의 타종교로의 개종이 용이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종교문화는 무교와 혼합되어 어느 정도 무교적 성향을 띠고 있는데, 무교적 기복성과 현실주의는 대중성 확보에 매우 유리하다. 즉, 한국의 종교는 엘리트의 지성적 종교가 아니라 대중적인 점이 한국의 모든 종교를 성장할 수 있게 했던 문화적 요인이다.

2) 한국교회 성장의 교회적 요인
첫째는 교회운동이다. 특히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 크게 확산되었던 부흥운동, 성령운동, 신유운동 등이 교회성장의 분위기를 조장했다. 부흥운동은 개신교별로, 지방회나 노회별로, 교단별로, 초교파별로 수많은 부흥집회를 유도했고, 이것은 배가운동으로 이어져 전도적 관심과 열심을 크게 일깨워 주었다. 둘째, 교회 프로그램이다. 60년대 이후 여러 가지 교회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활성화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성경공부 혹은 성서연구 프로그램이고, 그밖에도 갖가지 기도회 모임, 선교회 모임, 구역예배 혹은 속회조직, 친교활동 등의 프로그램들이 활성화됨으로써 교인들이 영적으로 무장되고 전도적 소명감이 강화되었다. 셋째, 한국교회의 구조적 성격이다. 한국교회는 자조, 자치, 자력전도로 요약되는 네비우스(Nebius)원리에 힘입어 처음부터 개교회주의 성격이 강했다. 개교회주의는 교회의 모든 인적, 물적자원을 개교회 발전에 집중투자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교회주의는 한국에서 개교회 성장에, 나아가서는 전체 교회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노치준,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 이원규 편저, 『한국교회와 사회』(나단, 1989), pp. 58-60.
넷째는 교회성장의 이념이다. 특히 1970년대 이후 소개되기 시작한 풒러 학파(Fuller School)의 ‘교회성장론’은 한국교회 성장에 있어서 그 이념적 배경으로, 구체적인 전략의 모델로 중요하게 작용해 왔다. 사실상 ‘교회성장론’은 교회성장의 근거, 원리, 방법 등을 소개함으로써 한국교회 성장을 체계적으로 이루어 보려는 노력들의 이론적, 실천적 근거가 되고 있다.

3) 한국교회의 성장의 상황적 요인
이 요인은 197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 성장과 80년대 후반기부터의 성장둔화에 대한 설명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즉, 1960년대 이후의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 한국교회 성장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60년대부터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 왔다. 수십년간 군부독재와 권력의 장기화, 집중화, 절대화가 있어 왔고, 정치억압, 인권탄압, 관료적 권위주의로 특정지워지는 정치부재의 상황이 지속되었다. 반공, 안보, 성장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긴장과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상황이 오히려 교회성장에는 도움을 주었다.
현대사회에서는 국가가 국민들에게 안정과 복지를 마련해 줄 것이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치부재 상황으로 국가가 국민들에게 오히려 불안과 불만을 조성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심리적 안정이나 복지감을 마련해 주는 대안을 찾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기능을 지난 70, 80년대에 한국종교들이 수행했던 것이다. 정치상황이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종교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한국의 불안한 정치상황 가운데서 종교들은 안정감과 복지감을 마련해 주면서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특히 현세적인 복지를 약속하는 종교일수록, 교회일수록 그러했다. 이원규, 『한국교회의 사회학적 이해』(성서연구사, 1992), p. 235.

경제적으로 보면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 정책이 크게 실효를 거두어 외형적인 ‘기적적 고도성장’과 공업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성장제일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분배정의’가 실현되지 목한 문제가 생겨났다. 경제적 효율성을 중요시하여 관주도형 수출집약 정책을 쓰면서 경제적 집중현상이 심화되었고,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박탈감이 확산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 제일주의는 물질회득과 양적성장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자연히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 가치관이 크게 조장되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박탈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가장 강력한 기제는 종교로 알려져 왔다. 이원규, 『종교사회학』(한국신학연구소, 1991), 제10장.
‘하면된다’는 식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심어주든, 물질적인 풍요와 축복을 약속하믕로 희망을 주든, 영적 위안으로 만족을 주든간에 종교는 박탈에 대한 중요한 보상기제로 작용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기복적인 종교성이 강한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물질적 보상이나 축복에 대한 약속은 커다란 매력을 줄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물질적 축복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급성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보면 1960년대 이후 한국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져 왔다. 산업구조가 농업과 같은 일차산업에서 공업, 제조업의 이차산업, 전문업, 서비스업의 삼차산업으로 옮겨가면서 농촌에서 도시에로의 인구이동이 활발해졌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도시에는 공동체의 상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의 확산, 정체성의 위기, 계약적이고 공리적이며 타산적인 인간관계의 확산, 사회통제력의 약화, 도덕성의 실종과 같은 문제들이 생겨났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연대감이나 소속의식이 약화되어 도시인을 ‘고독한 군중’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또한 도시의 거대한 조직과 기구는 관료화 되고 제도화된 틀 안에서 각 개인은 개성과 정체성을 쉽게 잃어버리게 된다. 한국인은 급격한 도시화 과정 가운데서 쉽게 공동체성의 붕괴와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종교는 전통적으로 공동체성과 정체성을 마련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Andrew M. Greeley, Unsecular man(New York:Dell Publishing Co., 1972).
종교는 사람들에게 소속의식을 제공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결속시키고 생활에 만족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시화로 인하여 공동체성과 정체성을 상실한 많은 한국 도시인들에게 종교는 큰 힘이 되었고, 이에 따라 종교의 성장이 촉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인규, “도시교회와 농촌교회”, 이원규편저, 『한국교회와 사회』, pp. 139-140.
특히 함께 모이고 서로 도우며 위로하는 일을 하는데 적극적인 기독교가 가장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교회의 성장의 요인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한국교회 성장은 문화적, 상황적, 교회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Ⅱ. 한국교회 성장의 둔화 요인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상황을 개괄적으로 회고하면서 그 결산서를 제출하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성장’이란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매우 수용적이고 적극적인, 감성적이고 열정적인 종교성을 지닌 한국인의 종교문화요인과, 1960년대 이후 크게 확산되었던 부흥운동, 성렬운동, 신유운동, 교회 프로그램의 개발(성서 연구 프로그램, 갖가지 기도모임, 친교활동등)등의 교회적 요인, 그리고 정치 억압등의 정치상황적 용인등으로 인해 많은 성장을 가져왔다. 또한 교회 성장론의 영향 역시 교회성장의 중요요인으로 무시하지 못할 요인일 것이다. 이원규,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친 교회성장론에 대한 임상적 평가”,『목회와 신학』, 1993. 9. pp. 41-44.
물론 가장 큰 원인이며, 이 모든 원인들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음은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장을 목표로 쉴새없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성장 붐’이야 말로 오늘의 목회상황을 대변하는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성장의 물량적인 척도보다도 그 성장이 우리나라 역사나 교회에 주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우리는 다른 하나의 역사적인 전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장 붐’ 때문에 한국교회의 목회상황에는 많은 부조리와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 붐으로 인해 두드러진 목회현장의 문제점들을 몇가지 지적해보자.

1) 개교회주의
자기 교회만 잘되면 된다는 폐쇄적인 교회관이 우리 주변에 팽배해 있다. 세계 교회에는 교리나 전통이 다른 교회들 사이에도 대화와 협력, 나아가서는 신앙적, 기구적 일치운동이 무르익어가는 오늘인데 한국의 경우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현실이다. 교단과 교단사이의 협력은 고사하고 개교회 하나 하나가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개교회주의에 빠져 있으며, 이런 현실이 교회 성장의 무드 속에서는 개교회의 분열, 교인 쟁탈전, 사이비 신학교와 목사의 범람, 교회 경쟁, 교회 밀집 현상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의 직접적인 원인은 개신교 초기의 선교정책이었던 네비우스의 방법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선교방법이 교회의 바람직한 내적 성장에 저해 요인이 되어, 자기 교회밖에 모르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한국교회로 만들었다. 박근원, 한국교회의 목회-오늘과 내일,『세계와 선교』, 64집(1979. 12), p. 40.

세상은 경제적인 이익만을 위해서라도 서로간의 역사적 원수의 관계까지도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교회는 한분의 주를 모시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주의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 애쓰면서도 서로 자신의 교회만을 위해 노력하고 애쓴다면 이는 분명 하나님의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개교회주의를 벗어나지 못할 때, 앞으로 개신교회는 점차 공신력을 잃을 것이고 사회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2) 물량주의
2차대전의 비극과 국제적 경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겨우 헤어나온 현대인들은 무엇보다도 생활의 안정과 물질의 번영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 사회는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고 물량 팽창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전반에 깔린 물량 팽창에 의한 기치관이 어느새 우리 교회안에 들어와서 목회자와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물론 교인의 숫자적 성장과 외향적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것이겠지만 수천 수만의 성도와 대성전, 교육관, 주차장등의 시설을 구비하는 것이 교회 존재의 우선 순위가 되어 있고 교회 구성원 개개인이 구원 받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왕국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교회 존재의 목적이 차순위나 삼순위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송천호, 교회갱신, 『현대종교』235호(1993. 1), p. 136.

그리고 이러한 물량주의가 교회 안에 있을 때, 사회는 점차 빈부의 격차가 심해가는데 교회는 자연스럽게 가진자 중심의 교회가 될 것이고, 따라서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은 교회안에 와서까지도 또 한번 소외되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할 것이다.

3) 기복신앙의 추구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복받기 원하는 것은 우리나라 원래의 민속종교에서 주류를 이어온 공통된 흐름 가운데 하나이다. 불교도 이 무속의 기복신앙과 결탁한 면이 있고, 유교가 제창한 삼강오륜도 우리 민족의 기복신앙과의 관련에서 발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라고 해서 그 예외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복음이 쉽게 뿌리박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기복신앙의 민속적 바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근원, op.cit., p. 40.

우리 기독교 일각에서 교회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것을 샤머니즘이라 해서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는 이런 기복신앙의 온상에서 싹이 난 복음을 제대로 그리스도교적으로 키워서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일을 바로 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목회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교회성정의 붐속에서 이러한 기복신앙은 목회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결과 우리나라의 교인들은 개인주의적이고 현세 이기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이러한 기복신앙의 뒷치닥 거리를 하기에만 바쁘고 다른 중요한 일을 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되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교인들을 수 많은 기도원과 가정제단에 빼앗기는 현상들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의 목회는 이러한 교인 개개인의 신앙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기독교의 참된 축복이 어떠한 것인지를 제대로 가르쳐서 교인들을 수동적인 유아의 상태에만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단지 현세적인 복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균형적인 가르침을 통해 교인들로 하여금 전인적인 치유의 기쁨을 맛보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다.

4) 목회자의 자질문제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 중의 하나는 신학교의 난립이고, 그에 따른 목회자의 자질 저하이다. 더구나 물량주의와 성장제일주의에 편성하여 한국교회의 목회사역은 직업화의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이와함께 물질추구, 유행에 민감한 반응, 명예심등으로 나타나는 목회자의 세속화 경향이 심각하게 지적되고 있는 실정이다. 백쌍윤, “한국교회성장의 실태와 이에 따른 문제점”,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83), p. 37.
따라서 사명감과 지적능력을 골고루 갖춘 신학도를 모집하며 무분별한 신학교를 교회차원에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5)목회구조에 의한 문제
한국교회 목회구조는 목회기능이 집단 목회 기능인 설교와 예배가 목회의 전영역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러한 설교와 예배의 집단 목회 기능의 독주는 목회의 방향을 선교라는 측면에서 보게 되어 교회의 에너지와 활력소가 세계속의 인간을 교회의 영역으로 옮겨 놓은 것을 선교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기춘, 『한국적 목회신학의 탐구』,(서울:감리교신학대학출판부, 1991), p. 144.
이와 같이 한국교회의 목회구조에 계시적이고 수직적인 성격이 강한 선교와 설교를 그 중심 기능으로 하는 집단 목회기능이 일방적으로 우세해서 생겨나는 문제는 신자들의 삶과 윤리,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선교를 목표로 하는 설교 위주의 집단적 목회의 기능은 교회의 양적 팽창가 구조의 대형화는 이룰 수 있지만 인간의 무의식적 풍토까지 엎을 수 있는 변화는 초래할 수 없고 오직 목회만이 이 변화를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춘, “한국교회 목회구조 갱신의 방향”, 『신학과 세계』, 1982(제8호), p. 516.

그리하여 설교와 예배위주의 집단적 목회기능이 우세하고 목양과 상담의 개인적 기능이 열세했던 결과로 한국 교회 교인들이 형식상으로는 기독교인이지만 의식구조상으로는 유교, 불교, 도교와 샤머느즘에 깊이 물든 비기독교인임을 면치 목하는 의식의 이중구조가 한국 기독교인들의 현실이 된 것이다. 또한 개인과 집단에 대한 목회기능의 불균형은 형식상의 기독교인을 만드는데는 성공하였을지도 몰라도 복음의 의미와 기독교의 가치관 위에 터전을 잡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양육하는데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의 목회 구조와 방향은 설교와 예배위주의 집단적 목회기능과 목양과 상담의 개인적 목회기능이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갱신되어야 할 것이다.

6) 지역사회에 대한 무관심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친히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하나님의 사건에 있다. 즉 복음의 계시성이 복음의 현장인 인간의 사회, 역사적 자리에 들어와 역사변혁의 주체자로 등장하였다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의미한다. 역사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운동을 전개시킨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이 세상과 역사를 향하신 하나님 사건의 현장화이다. 따라서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바르게 파악하는 일을 그리스도인들의 지역사회에 대한 사회봉사와 참여에 대한 입장을 규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먼저, 말씀의 성육신된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적 참여이며 하나님의 사회세계 행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역사적 사회현장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게끔 할 만큼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활동의 결정적인 장소이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이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활동의 중요한 대상이다(요3:16). 이 세상은 어서 빨리 탈출해야할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최전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 개인의 삶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맥락에서 세워지고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숭실대학교 기독교사회연구소, 『사회봉사의 신학과 실천』, 한울, 1992, pp. 132-141.
실제적으로 보면 한국교회가 사회봉사의 영역에서는 그 역할을 제댈호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우선 교회 예산 편성에 있어서 그러한데, 조사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순수한 사회봉사비로 책정된 예산은 전체예산의 불과 2.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대부분의 예산은 주로 교회 안에서 쓰여지고 있으며, 교회 밖에서 쓰여지는 것도 주로 선교 등 사회봉사와는 관계없는 영역에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 가운데 교회적으로 사회적 봉사를 실시하는 교회도 23.2%에 불과해 교회의 인적 자원이 교회 밖의 일을 위해서는 사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개교회는 그지역 공동체에서 이질적인 집단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즉 대부분의 교회가 인근 불신사회와 그 주님들의 삶과 연결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인근 지역사회의 애환이나 삶의 현실과 차단된 교회는 그 역사에 뿌리를 내릴 수가 없게 마련인 것이다. 박근원, 『한국교회성숙론』,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p. 119.
어떤 방법으로든지 한국교회는 “지역사회의 교회”로서 체질을 바꿔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를 하고 지역사회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며, 그들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을 때 비록 신앙이나 신념에 있어서 견해나 입장이 달라도 교회가 그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종교단체임을 알고 크게 민족과 지역사회를 위한 일에 협력이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역사회에서 봉사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한국교회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인을 양산함으로 신앙의 본질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로인해 교히는 기복종교로 전락되어 버릴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공신력이 약화되어 교회는 이기주의, 배타주의 집단이라는 사회적인 비판이 강화되면서 그 위상이 크게 손상될 것이다. 결국 교회는 사회의식이 강한 젊은층과 지성인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될 것이며, 사회봉사의 수혜자가 될 노동자, 도시 빈민, 농민계층으로부터 심한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계층으로부터의 거부감과 비판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사회봉사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신앙적인 관점에서든 사회적인 관점에서든 심각하게 반성되어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7)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문제
교회가 이론과 편견과 형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급변하는 세계의 당면한 문제에 대처할 수 없고, 문제 해결의 계기를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체로 화해하시는 이 세계의 죄, 아픔을 대변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적인 위치에 있으며, 다시 세상으로 내보냄을 방을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역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를 증거하는 예언자적 자리에로 파송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기독교학회, 『전환기에 선 한국교회와 신학』, 양서각, 1988, p. 34.
따라서 한국교회는 예언자적 사명을 좀더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참으로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환경의 변화에 좀더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역사를 볼 때 교회가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적극적으로 개혁하여 대응하지 못했을 때 쇠퇴하였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개혁하면서 대처해 나갔을 때 부흥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복종하는 신앙에서 출발하며,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수행하는 일이 곧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본질은 바뀌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교회는 언제나 환경의 변화에 맞게 대응하면서 자신을 갱신할 필요가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급변하는 환경의 변화에 적극 대처하지 못하는 경향들이 있다. 세상의 학교들은 학생들이 다가오는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도록 컴퓨터 교육등 실물을 가져다가 교육을 시키고 있는데 교회는 아직도 몇십년전이나 똑같은 방법으로 이들을 교육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기업체들은 신세대를 고객으로 잡기 위해서 이들에게 맞는 광고를 하며, 과감히 자체내의 구조 개혁등을 단행하는데 교회는 이들 신세대를에 대해서 건설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이들을 정죄만하는 경향들을 보게 된다. 교회가 이렇게 환경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체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는 교회구조의 경직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신앙적 보수성이 문화적 보수성과 혼합되어 교회를 더욱 경직시키고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당회는 노년층으로 이루어지는데다가 구성원을 경질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는 제도로 묶여 있기 때문에 교회의 갱신이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교회는 이렇게 제도화됨으로 인해 효과적으로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교인들 역시 겉도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들이 나타나게 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환경을 제공하게 되고,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사고를 하게 하고, 새로운 사고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에 내는 것이다. 김영호, “하이테크는 어떤 방식의 목회를 요구하는가?”, 『기독교사상』제 441호(1995, 9월호), p. 26.
요즘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모든 면에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어떤 단체이든 이러한 변화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생존자체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는 앞으로 이러한 환경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고, 또한 내부에 있는 고정적인 틀을 인정하고, 교회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좀 더 효과적으로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서 노력하기 위해, 환경의 변화를 읽으면서 그 변화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Ⅲ. 교회성장 둔화에 대한 대안

1. 목회 갱신을 위한 제안

1) 성숙구조로의 전환
목회의식을 성장구조에서 성숙구조로 돌이키는 것이 중요하다. 목회자들 사이에 오가는 말을 들으면 천명이상의 교인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고, 그래야만 성공적인 목회라고 말한다. 또한 그래야만 목회다운 목회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목회자는 주일에 5부 이상의 예배를 드리는 넛이 소원이라고 한다. 이것을 목회자들이 갖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교회성장은 양적이든 질적이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동기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자기의 이름을 세속적으로 날리기 위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참으로 주님의 양을 치고자 하는 동기가 있다면 교인수의 많고 적음은 하나님께 맡기고 양 하나 하나를 충실하게 먹이고 기르는 일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목회학적으로 목회자 환 사림이 제대로 돌볼 수 있는 교인수가 200-300명 정도라고 한다. 양의 형편을 잘 알아서 먹이고 마시고 잠자리를 돌봐주고 모든 필요를 채워 주려면 목자의 힘과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가 교인들의 삶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양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 관심과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래야만 교인들이 당면한 신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합한 설교가 나올 수 있다.
교회가 성장하여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케지게 될 때는 분가해서 새로은 교회를 만드는 세포분열의 형식이 바람직하다.
목회자들의 사고구조가 성장지향적 구조에서 성숙지향적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키워나가야 한다.
성공적인 목회는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다. 목회자의 정성과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수가 많으나 쭉정이 교인을 많이 양산하는 목회가 아니라 수가 적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알곡인 신자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이 성숙구조의 목회이다. 김영한, “교회성장 둔화에 대한 대한”, 『월간목회』, 1997년 1월, pp. 66-68.


2) 목회자의 자기 개발
교회성장의 주역은 무엇보다도 목회자 자신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자질향상이 절실히 요구된다. 신앙 인격이 투영된 목회가 요청된다. 목회자 자신이 애쓰는 목회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목회를 해야 한다. 목회자의 사회적 신뢰가 회복되도록 윤리성이 높아져야 한다. 또한 목회자는 영성을 개발해야 한다. 영성이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시대의 갈 길을 제시하는 예언자상이 요구된다. 듣기에 감미로운 설교가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이 중요하다. 목회자는 입술과 혀보다는 삶과 행동으로 말해야 한다. 진실된 삶,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와 일치하는 삶이 최상의 설교이다. 이러한 목회야말로 인격이 투영된 목회이다. 영적인 권위와 함께 도덕적, 윤리적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그 대표적 예가 미국의 평범한 목회자 프랭크 틸라프(Frank Tillapauph)가 개척해서 목회하는 ‘베어밸리침례교회(Bear Valley Baptist Church)이다. 그는 대단한 신학자나 설교자도 아니고 교회 운영이나 행저에 뛰어난 은사가 있는 자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남아연방 선교학자인 데이빗 보쉬(David Bosch)가 제시한 교회의 모델을 이상적으로 목회에 실천한 자였다.
보쉬에 의하면 교회성장의 모델이란 무한정의 성장이 아니라 내실적 성장이다. 그것은 인위적인 성장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교회로서의 성장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교회로서 성장하면서 이 세상에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틸라프 목사는 이러한 성장모델에 입각해서 1970년대 100여 명으로 시작해서 1982년에는 1,000명이 넘는 성장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틸라프 목사가 좌석이 275개 밖에 없는 교회당을 증축하거나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지 않으연서 내실적 방향으로 교회성장을 하고 있는 데 있다. 방선기, “교회성장운동이란 무엇인가?”, 『목회와 신학』, 1990년 2월호, pp. 40-42.

소규모의 시설은 대형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목사와 교인들과의 관계를 연기자와 관객의 관계로부터 해방하여 인격적인 관계로 회복시켜 준다. 소규모 시설이 대규모 행사를 불가능하게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행사를 위해서는 큰 교회나 고등학교 강당을 이용한다. 소규모 시설을 가진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회 그룹 수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그룹이 증가함에 따라 목사나 교사를 포함한 지도자들이 역시 증가한다.
틸라프는 성경에서는 일인극(One Man Show)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성경은 다수의 목사와 다수의 장로들이 행하는 사역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참여적인 몸이다. 목사와 교사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칠 사람들을 가르치는 모범을 세우도록 되어 있다. 프랭크 틸라프, “작은 시설, 그러나 큰 사역”, 『목회와 신학』, 1990년 2월호, p. 93.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 일인극 아래서 부목사는 단순한 보조자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목사가 해야 할 자리를 만들어 단순한 보조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요세화된 교회가 아니라 해방된 교회이다. 담임목사만 설교를 독점하지 않고 부목사도 설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교회가 해방된 교회이다. 요새화된 교회는 일인 슈퍼스타의 연기를 행하는 교회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된 목회는 섬김모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섬김모임은 목사의 지도를 받은 평신도들이 자기의 조그만 그룹의 지도자가 되어 제자를 양육하는 것이다. Ibid., pp. 88-95.
섬김모임은 밀접하게 연결된 소그룹으로서 평균 숫자 10명이 모여서 친교와 공부와 봉사를 한다.

3) 신자 양육 프로그램
내실 있는 신자양성을 위한 양육 프로그램, 케리그마(선포), 코이노니아(친교), 디다케(교육)과 디아코니아(봉사)가 필요시된다.
케리그마는 교인들이 심령으로 변화를 받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불신자들이 교회의 공동체 안에 들어와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신자들과 같이 나누는 교제이다. 디다케는 교인들을 제자로서 훈련시키고 성경과 교리를 공부시켜서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불우한 이웃과 가난한 신자들에 대한 봉사를 말한다.
교회성장이란 단지 한 불신자를 회개시키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교회로 인도하여 교제에 참여케 하고 훈련시켜 교회의 봉사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영혼의 구원이라는 의미인 복음화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이웃에 대한 봉사와 헌신이라는 의미인 제자화를 말한다. 김선도, “성장하는 교회, 열린 목회”, 『목회와 신학』, 1990년 2월호, p. 45.
이를 위하여 신자의 제자화 프로그램, 영성개발, 성경공부, 평신도 신학강좌가 필요하다. 교회가 사랑방 공동체의 역할을 회복하도록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다가오는 21세기를 예비하는 목회 프로그램이 요청된다. 다가오는 고도의 후기산업사회를 준비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요청된다. 신자들 가운데 각 영역의 전문가들을 선발해서 다가오는 21세기의 각종 문제들에 대하여 신앙적으로 대응하도록 연구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인중, “삶을 나누는 교회가 계속 성장한다”, 『월간목회』, 1992년 10월, pp. 126-134.


4) 평신도 의식 개혁
평신도의 의식 개혁이 요청된다. ‘자기교회’, ‘터줏대감’이라는 사고가 개혁되어야 한다. 오래 다닌 사람, 돈 많이 낸 사람, 창립 맴버가 ‘이 교회는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가 고쳐져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우리는 그의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그러므로 성직자의 것도 아니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제자훈련과 성경공부를 복음적인 삶으로 실천해야 한다. 평신도는 교회 신자로서의 양육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양육되어야 한다. 평신도들은 자신들이 교역자들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은 자들이요,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각성해야 한다. 반드시 담임목사가 헌금을 축복하고 심방예배를 집례해야만 축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다. 부목사도 마찬가지로 축복권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을 받아 중생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평신도가 축복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만인제사장직(Universal Priesthood) 사상이다. 이러한 만인제사장 사상이 평신도 사이에 의식화 되어야 한다. 김영한, opcit., p. 70.


5) 가정사역 강조
가정문제의 확산과 그것이 교회와 사역에 미치는 영향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부부의 갈등, 청소년의 가출과 자살, 비행 청소년의 급증, 성범죄의 증가, 마약복용과 도덕성의 파괴 등, 그치지 않는 범죄에 대하여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이런 것들은 결코 법규로 근절되고 해결될 수 없는 종류이며, 근본적 원인부터 찾아서 다루어야 할 문제들이다.
현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각종 사회문제의 원인 중에는 정치적 혼란이나 경제적 편중, 문화적 갈등 외에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이 가정문제이다. 가정에서 용납과 사랑을 경험할 수 없는 청소년 사회에 반항하며 체제에 도전하게 되고, 가정에서 예절을 배우지 못한 십대들이 학교와 공동체에서 무질서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시급히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곧 가정을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회복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종종 가정보다는 교회를 우선적으로 여기도록 하는 신앙교육과 생활과 신앙의 분리를 지도받은 사람들이 교회 건물 안에서는 훌륭한 신앙인으로 부각되지만 삶의 현장인 교회 담 밖에서는 적응에 실패하여 갈등하거나 위선적인 행위를 계속하는 사례를 보게 된다.
이제 새로운 목회 방향은 가정을 고치는 소위 가정사역이 강조되어야 한다. 미국 트리니티 신학교의 챨스 쉘 교수는 『가정사역』이라는 그의 책에서 교회와 가정은 마치 개미와 떡정벌레의 관계처럼 공생하는 관계라고 말하면서 교회와 가정은 손바닥과 손등처럼 하나로 볼 수 있어서 이것을 갈라 놓으면 어느 한쪽도 제대로 자기 모습을 지닐 수 없게 된다.
가정 사역의 범위는 넓고 내용은 다양하다. 어린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것, 결혼을 앞둔 청년들을 위한 것, 부부를 위한 것, 독신자를 위한 것, 노년층을 위한 것 등 있으며 그 효과는 현저하다. 박광철, “전환기에 선 한국교회성장의 방향”, 『목회와 신학』, 1990년 6월호, pp. 96-104.


6) 협력목회 사역을 강조
한국 교회는 그 동안 서로 “경쟁하며” 성장해왔다고 지적할 수 있다. 개 교회적으로는 이웃 교회와 경쟁하고, 교단적으로 경쟁하면서 심지어 “교인 쟁탈”이라는 혹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교회 분열이 잦았고, 따라서 교회 숫자는 크게 증가해서도 교인 숫자의 증가는 비례적으로 따르지 못하였다. 이제는 협력 사역이 이뤄져야 한다. 이 협력에는 세 측면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교회와 교단 사이의 협력이다. 교단의 특수성을 살리되 훌륭한 교육 내용과 사실 및 인력을 상호활용하여 더불어 한국교회를 세워가는 일이다.
둘째는 교회와 선교기관과의 협력이다. 이 두 구조는 교회 역사에 끊임없는 긴장관계에 있어 왔지만, 이제는 효과적인 협력을 통하여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훈련된 인력과 전문화된 프로그램을 가진 선교 구조와 경쟁력과 시설 및 지도력을 가진 회중 구조 곧 교회와의 보다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협력이 이뤄질 때 한국 교회는 거대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또 한가지는 선교기관들 사이의 협력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구호기관과 전도기관이 협력하여 사역하는 경우, 그 효과가 대단히 클 것이며, 선교 관계 기관들의 경우에도 정보와 인력과 프로그램을 교환하여 함께 개발한다면 좋을 것이다. 1988년도에 처음 시작된 “선교 한국”은 각 선교 단체들이 협력하여 시도한 좋은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Ibid.


7) 개교회주의 극복
개교회 위주를 탈피하고 한국교회 전체야 한다.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는 대형교회화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대형교회가 노회를 좌를 생각하고 농어촌 벽지교회를 집중적으로 지원해지우지하는 무정부 상황을 초래했다. 개교회 위주의 목회를 지양하고 자기 교회를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로 생각하고 한국교회 잔체를 생각해야 한다. 특히 농어촌, 벽지교회를 지원하여 이들 교역자들이 어려움 없이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기 교회 중심의 이기주의와 배타주의를 탈피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자기 교회 중심적으로 설교하고 목회하기 때문에 교인들도 따라간다. 그리하여 교인들도 자기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만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자기 교회 울타리 안에만 계시는 하나님으로 제한시키는 경우가 많다. 우리 개신교도 이제 카톨릭처럼 동네 교회에 다니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농어촌 벽지교회는 아직도 자립을 못하는 교회가 많다. 교역자들의 대우는 도회지 교회와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같은 교역자이지만 농어촌 교회의 교역자들은 경제적으로 너무나도 어렵게 목회하고 있다. 따라서 교역자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자녀교육과 문화환경이 열악한 농어촌 교회를 피하고 도회지로 모여 드는 것을 비난만 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대도시에서 목회하는 교역자들이 솔선수범해서 이들에게 진 빚을 갚는다는 자세를 가지고 이들을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농어촌 교회의 영세성은 인구는 작은데 교파의 분열로 인해서 여러 교회가 세워져서 교인들이 분산되는데서 기인한다. 그러니 자립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많은 농어촌 교회가 전도사만 모시게 되는 목사배출소 기능만을 하고 있다. 따라서 교히끼리 통폐합하여 농민들 사이에 신뢰감도 조성하고 영세성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김수진, “농촌교회의 문제점”,<한국기독교와 기독지성인>(김영한 편), 1988, 반석출판사, pp. 183-186.


8)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주일학교 학생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교회의 프로그램 개발이 요청된다. 교회운영은 대예배 위주로 진행된다. 주일학교는 설치만 해놓으면 그대로 굴러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주일학교 학생들, 특히 유년부 학생들의 수가 현격히 줄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유년부 학생들, 신자들 가정의 자녀들이 주일학교에 열심히 나오도록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대학부나 청년부에 대하여도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로 교구담당 부목사가 대학부나 청년부를 겸임하게 한다. 그리하여 대학생들의 문제의식과 청년들이 비판의식에 상응하는 지도자의 결여와 프로그램의 결여가 초래된다. 젊은이들은 기독교적 가치관, 세계관 형성의 문제, 이성교제의 문제, 결혼의 문제, 직장의 문제, 사회개혁의 문제, 생태계 파괴와 환경문제, 부의 분배문제, 이데올로기 문제, 노사관계 문제, 남북 통일에 관한 기독교의 역할 문제 등에 관한 진지한 토의와 이에 대한 방향제시를 필요로 한다. 교회는 젊은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표시해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가 바로 자기들의 고민에 대하여 상담해 주고 대화의 상대자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세미나를 가지게 하고, 젊은이들이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진지한 토의와 다양한 연구를 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병원 방문, 고아원 방문, 교도소 방문을 통하여 이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하는 실천적 프로그램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각종 복음화와 관련된 행사에 있어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젊은이들에게 다가오는 21세기에 대한 비전과 도전을 주고 사명감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기독교문화가 세속문화보다 더 우월하며 이것을 위하여 젊은이들은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 김영한, opcit., pp. 71-72.


9) 교회성장 신학의 정립
건전한 신학과 교회성장 신학이 개발되어야 한다. 건전한 교회성장이란 교회당의 확장만을 말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초대교회는 선교와 구제를 두가지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고 초창기의 한국교회도 선교와 구제를 균형적으로 실천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부터 한국의 대형 교회들은 재정의 풍요를 누리면서 1950년대와는 달리 더욱 더 헌금을 강조해 왔다. 한국교회는 선교만을 지상의 과제로 생각하고 교회의 확장을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을 정당시하였다. 더 많은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더 크게 지어야 하고 구제에는 인색한, 균형을 잃은 교회가 되었다. 예배시 헌금을 바친 사람을 광고하거나 복을 비는 일은 1950년대 이전에는 볼 수 없는 진기한 풍습이 되었다. 여기에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상급 주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단지 물질을 바치는 데 따라서 복을 내리는 샤머니즘의 신 표상에 머무는 퇴폐한 풍조가 나타난다. 김영재, 『한국교회사』,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2, p. 344.

한국교회의 성장은 개인 구원의 차원에 머물렀다. 사회 봉사와 구제와 불우한 이웃을 위한 사랑과 헌신의 실천을 하는 성화의 삶에는 소홀히 했다. 그리하여 신앙은 좋으나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박애의 실천은 신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먼 일이 되어 버렸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신앙과 정성이 크도록 하여 전도나 선교를 위하여 집을 팔아 바치는 열성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불쌍한 이웃을 위하여 그리고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사랑을 베푸는 박애의 실천이 결여되어 있다. 카톨릭은 각 지역마다 교인들이 불우이웃과 미성년 가장들을 위한 봉사센터가 마련되어 교인들은 여기서 봉사하는 것으로 잘 훈련되어 있다. 그러나 개신교는 너무나 교단과 파벌로 나누어져서 지역적으로 사회의 불우한 이웃과 노인이나 미성년 가장을 위하여 봉사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사회의 부정부패의 고리에 대한 각성과 윤리의식이 결핍되어 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교회왕국 지향적인 사고로 훈련받기에 이르고 교회의 봉사를 위한 봉사와 구제와 참여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여기서 교회는 이 세상에서 빛을 비추는 등대가 아니라 세상 속에 있으나 자체 속에 폐쇄된 교회가 되어 버렸다. 그런 유형의 종교인으로 교인들은 기형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혼구원 지향적이고 교회왕국 지향적인 성장사고는 아직도 성경적이고 건전한 교회성장 신학이 정립되지 않았다는데서 기인한다. 김영한, opcit., p. 73.


10) 신학교육 수준의 향상
무인가 신학교를 자체적으로 정비하고 신학교의 수준을 상향적으로 끌어올려 목사후보자들이 어느 교파에서 교육을 받든 정상 수준의 신학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신학교 교육 평가위원회를 설치해 신학교 교육의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학교의 현황에 대한 정밀조사와 공정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자격 미달의 신학교는 두가지 방향으로 정비되어야 한다. 하나는 교계정화의차원에서 대대적으로 단속해서 폐교 내지 내실 있는 교육기관에 합병시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실 신학교를 양성화시켜 교육의 질을 높이도록 하는 것이다.
교육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학자율화의 정책에 발맞추어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가 신학교육평가 기준 및 인가 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도서관, 교수진, 복지시설, 강의실, 주위환경 등의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기준미달 학교는 컨소시엄 형태로 서로 협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컨소시엄이 어려운 경우는 정규 신학대학에 위탁교육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대다수 신학교, 정상수준 교육 자격미달”, 『기독교연합신문』, 1994년 11월 13일 면.


11) 성령의 생동적 역사
말씀의 선포와 함께 성령의 생동적 역사에 열려 있어야 한다. 한국장로교회는 불건전한 시니주의 운동을 경계한 나머지 성령의 생동적 역사에 대하여 닫혀있고 오로지 말씀의 강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부으심 없는 말씀의 선포는 딱딱한 교리의 선포나 인본주의적 설교가 되어 버린다. 초창기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을 계기로 크나큰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다. 그러나 1930년 이후 한국교회는 구 프린스턴신학교의 워필드 신학의 영향을 받아 성령의 생동적 역사를 회심이나 중생 등에만 제한시키고 초자연적 이적과 치유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 전통에서 빚나간 변질된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어거스틴, 루터, 칼빈 역시 성령의 생동적 역사를 인정했다. 후기 어거스틴은 성령의 생동적 역사에 의한 치유를 인정했고 칼빈 또한 성령의 내적 확시을 강조했다. 루터는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는 친구 필립 멜랑히톤의 회복을 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했을 때 멜랑히톤은 즉각적으로 회복되었다. William J. Kooimann, By Faith Alone, (London: Lutterworth Press, 1954), p. 192.

장로교의 위대한 설교자 스펄젼 목사는 “성령의 역사하심은 교회의 절대적인 요구사항”이라고 역설한다.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기 전에는 아무리 개혁과 개선을 반복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상태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David Watson, I Believe in the Church,(Gmad Rapids: Eerdmans, 1979), p. 166.


12) 교회의 정체성 확립
교회의 자기 정체성 확립이 요청된다. 한국교회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정하는 방향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좌로 치우치는 것은 교회가 이 세상의 풍조에 영합하여 세속화 되는 것이다. 우로 치우치는 것은 교회가 이 세상을 등지고 신비주의나 교권주의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한국교회는 자유주의 이단과 신비주의 이단에 대하여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의 군사정권이 내걸었던 경제개발 제일주의에 편성하여 성장 제일주의를 유일한 선으로 표방하였다. 성장을 내실적으로 다지지 않고 양적인 증가에만 관심을 가지고 총력을 기울이면서 성장의 내용이 부실하게 된 것이다. 군사정권 때의 졸속한 경제건설의 후유증이 성수대교의 붕괴와 더불어 각종 대교의 붕괴위험, 지하철 누수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도 1990년도에 들어와서 그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김영한, opcit., p. 75.



2. 한국사회를 향한 교회의 태도에 대한 제안

1)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개척하거나 창립한 목회자나 장로나 터줏대감의 교회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성장의 주체는 목회자나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외 어떠한 권위가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된다.
1930년대 한국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일제의 총칼의 위협 속에서 총회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그러나 보수신앙을 가진 주기철목사를 비롯한 보수계 목사들과 신자들은 신도와 군국주의의 노예화에 저항하고 순교하면서 교회의 순결성을 지켰다.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주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확인하였다. 교회 신자수나 교단의 신자를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증가시키고 그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선취적으로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임무이다. 그러므로 하국교회 선포의 주제는 자기 교회나 지파 교단이 아니라 다가오는 왕국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2) 영적 리더
다가오는 21세기에 기술적으로 선진화된 한국사회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리더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 세상의 등대로서 우리 사회의 나아가야 할 길을 예시해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는 역사상 유래 없이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사회의 개혁운동이 정부주도로 진행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한국 사회의 정신적 도덕적 전환기에 도덕성과 윤리성을 진작시켜야만 한다. 정의사회 의식과 공동체의식 구현을 위한 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선두에 서서 차여하는 민족교회가 되어야 한다. 다가오는 21세기에 우리 한국사회는 선진국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복지사회를 향하여 나아가는 한국사회의 정신적 이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복지사회 속에서는 더 이상 단지 생존의 위협이나 사회의 불안으로부터의 도피처로서 교회를 찾지는 않게 된다. 사회가 안정되고 볼지화될수록 종교에 대한 필요는 반비례된다. 이러한 정신적 상황을 예견하면서 기독교는 성숙한 사회를 향한 기독교의 의미를 질문하는 새로운 신앙정립을 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이 더 이상 현실도피나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존재양식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종교의 의미에 있어서는 서구 현대신학자들의 문제 설정과 해답은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다.

3) 정신적 가치관 정립
다가오는 고도의 소비향락 사회를 향하여 영적 메시지 전파와 정신적 가치관 정립에 노력해야 한다. 사회의 근본 기치관 설정에 기여해야 한다. 그것은 고도의 소비사회에서 새로운 금욕적인 삶의 태도, 청빈한 삶의 자세,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삶의 자세, 먼저 양보하는 삶 등을 말한다. 이것은 다가오는 21세기를 직면하면서 환경과 더불어 가져야할 조화스러운 삶의 패턴이다.
1980년대부터 경제적 부의 축적과 더불어 종교성을 상쇄하는 강력한 여가 산업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여가 산업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해온 정치적 불안정의 상황에서 심리적 안정의 기능, 경제적 빈곤과 소외의 상태에서 보상의 기능, 도시화에 따른 공동체 상실의 상태에서 연대감을 제공하는 기능을 대행하고 있다. 그 예가 골프장, 사우나, 술집, 여관, 등의 시설이다. 이러한 여가 산업이 붐을 맞고 있다. 이러한 추세느 고도산업화 사회의 필연적인 현상이다. 교회는 이러한 여가 산업의 도래와 함께 인간들이 여기에 만족할 수 없고 영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영원한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과 질문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적 메시지와 정신적 가치관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여가 산업을 포함한 종교적 기능대행물에 대처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참된 공동체 의식의 회복, 안정과 휴식의 향유, 긴장과 갈등의 해소, 소외감과 박탈감의 해소 등이 신앙적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한다.

4)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교회
사회의 도덕성 함양에 기여하고 사회적 봉사를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1920년 중반 이후에 한국교회는 농촌 진흥을 위한 계몽과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영적인 삶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고 민족의 생활고를 해결하는 데 괸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한국교회는 초창기의 사회 봉사정신을 재활성화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종교만을 위한 교회여서는 안된다. 사회의 각종 소외자들을 위한 피난처와 상담처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높은 도덕성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함양하는 데 기반을 형성해야 한다. 특히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에 앞장 서야 한다. 교회의 윤리의식이 각성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경우 자본주의가 불균형하게 발달하는 과정에서 신자들이 구조적으로 부정에 개입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인천 구청의 세무 공무원의 세금 착복 사건에 신자가 개입되었다거나 각종 공직사회 비리에 신자들이 연루되는 사건들이 비일 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부정으로 번 돈은 큰 액수로 교회에 바쳐진다. 그리하여 교회가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는 신자들의 사회 및 경제활동의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제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신자수가 늘어난다 하더라도 사회에 대한 공신력은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정의사회 구현에 있어서 교회는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제 신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의식화되고 성숙한 기독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Ibid., pp. 76-79.


5) 전인적 사역 지향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장 위대한 두가지의 명령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즉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영적인 측면으로 이해하여 “복음 전파의 명령”으로 규정한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복음 전파의 명령”으로 규정한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복음 전파와 아울러 “사회봉사 명령”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 한다면 소위 “삼각형 사역”이 된다. 즉 전파, 고침 및 가르침의 세가지 측면인 것이다. 교회 사역은 이 세가지를 균형있게 발전시켜야 한다.
복음의 사회적 측면에 관한 세계 복음주의 크리스챤들의 깨우침은 자못 심각하다. 1974년도 복음주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작성된 로잔언약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종종 등한시하여 전도와 사회참여가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에 대하여 뉘우친다는 표현이 나온다(로잔언약, 5). 또한 1989년도 마닐라에서 열린 제2차 로잔대회에서 작성된 마닐라 선언에서도 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우리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를 등한시한 것을 뉘우치며 그것을 전파하며 또 옹호하기로 결단한다. 또한 가난한 자의 곤경에 무관심하고 부유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생가했던 것을 회개하여,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과 행위로 예수를 전할 것을 결단한다”([마닐라선언]A(2)).
통계에 의하면 52억의 인구 가운데 절대 빈곤 인구가 23%에 달하며 그 인구는 11억이 넘는다. 매년 기근으로 인하여 죽은 사람이 약 2,000만명이 되며, 도시빈민의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경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것은 사실이지만, 도시 변두리의 소위 달동네와 빈민 무허가촌의 환경은 여전히 절박한 도움을 요구하고 있다.
빈곤 문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부정, 상처받은 영혼즐을 위한 이른 바 “치유 목회”의 필요성도 강조되어야 한다. 그 한예로, 이제는 교회가 그곳에 찾아오는 사람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를 위여 무슨 공헌을 할 수 있는지를 보다 실제적으로 조사하고 일해야 한다. 박광철, opcit..


6) 연합되고 하나되는 교회
교단적으로 대화하고 연합하고 하나가 되는 교회이다. 해방과 더불어 한국교회는 분열을 경험했다. 신사참배의 후유증으로 장로교와 감리교가 분열했다. 장로교에서는 6․25동란 중 고신측이 분리하게 되었고, 1959년에는 합동과 통합이 분열되었다. 그 이후로 합동으로부터 다시 분열되어 개혁측, 정통보수측 등 수많은 교파들이 생겨 대한 예수교장로회 간판만 가진 교파만 105개를 헤아리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분열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부수주의 장로교에서 주로 일어났다. 신앙의 보수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독선적인 사고방식과 하나님 말씀을 믿으나 성경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종파적 견해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사룰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교회사적 안목을 가지고 연합하는 운동이 절실히 요청된다. 남북통일을 위하여 교회가 귀감이 되려면 교단의 연합과 일치 운동 그리고 교파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남북통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남북의 민족간의 중재를 할 만한 입장에 서 있지 못하다는 것을 도덕적으로 명심해야 한다.

7) 해외신교 지속
해외선교를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교회의 생동성을 유지해야 한다. 초창기 한국교회는 간도와 연해주에 사는 교포들을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리고 중국 선교를 위해서 중국 산동성과 항해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당시 외국이나 다를 바 없었던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를 파송하였다. 1987년 7월 통계에 의하면 아시아에 172명, 유럽에 70명, 북남미에 65명, 아프리카에 40명, 중동에 14명, 호주에 5명 합계 368명이다. 김성환, “한국교회의 신교현황과 그 대책”, 총신대원보, 1988년 8월 27일.

1994년 현재 세계 50대 교회 중 한국교회가 23개나 포함되고 있고 1천명 이상의 해외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1989년 4월 10일자 “뉴스위크”지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최근 36시간마다 새로운 교회가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아직도 중국은 성경읽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18세이하의 청소년들에게는 종교적인 서적이나 노래에 접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아직도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다고 투옥된 신자들은 귀와 혀와 다리를 잘리는 박해를 겪는다. 그러나 중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그리스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믿을 만한 것을 추구하던 끝에 하나님 밖에는 진정으로 신뢰할 존재가 없음을 발견하고 있다고 한다. Asian Outlook, May-June 1989, p. 9, p. 18.



나가는 말

오늘날 급변하는 현실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이런 자기 돌봄을 통하여 사회를 바라보며 사회의 현실에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투영하여 이 사회를 정화해 나가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할 일이다. 이런 역할을 교회가 감당하지 못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것 처럼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를 상실해 버릴 것이며 이로 인해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를 당할 것이다. 오늘날 이런 현상이 교회 주변에서 조금씩 싹을 트고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우리 한국에 복음이 들어와서 교회가 성장하게 된 원인을 문화적 요인으로 한국의 종교문화는 교회성장에 매우 적합한 성격을 지니고 있고 교회적 요인으로는교회운동, 교회의 프로그램, 한국교회의 구조적 성격, 교회성장의 이념의 차원에서 살펴 보았으며, 상황적인 요인으로는 수십년간 군부독재와 권력의 장기화, 절대화, 집중화로 인한 정치억압, 인권탄압 등의 상황이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었음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소득과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교회는 점점 성장이 둔화되게 되었는데 그 원인으로는 개교회주의, 물량주의, 기족신앙의 추구, 목회자의 자질 문제, 목회구조에 의한 문제, 지역사회에 대한 무관심, 환경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문제에 관해서 알아 보았으며,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크게 두가지 분야에 걸쳐서 생각해 보았다. 먼저 목회갱신을 위한 제언에서 성숙구조로의 전환, 목회자의 자질개발, 신자 양육 프로그램, 평신도 의식개혁, 가정사역 강조, 협력목회 사역을 강조, 개교회주의 극복,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교회성장 신학의 개발, 신학교육 수준의 향상, 성령의 생동적 역사, 교회의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 살펴보았으며, 한국교회를 향한 교회의 태도애 대한 제언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것을 강조, 영적 리더를 개발, 정신적 가치관 정립, 사회 봉사를 실현하는 교회로 만드는 것, 전인적 사역을 지향해야 하며, 연합되고 하나되는 교회, 해외선교의 지속을 통한 복음전파에 중점을 둘 때 한국교회는 안팎으로 골고루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다른 사람의 손에 달린 것도 아니고 오직 이 땅에서 복음을 받아 진리를 깨달은 자의 모두가 고민하고 기도해야 하는 공동의 과제이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노력과 기도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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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교회 성장 둔화와 그 대책|작성자 금강초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