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교 우리의 문제들

개혁교회와 신앙고백서

하나님아들 2020. 1. 7. 22:57

개혁교회와 신앙고백서

(the Reformed Churches and its confessions)

 

박상현 목사(은진개혁교회)

 

 

시작하는 말

. 성경 안에서 신경의 위치

. 교회사 안에서 신앙고백서의 위치

. 신앙고백서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입장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내용과 특징

. 신앙고백적인 교회생활

맺는 말

 

 

시작하는 말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강의 제목과 그 범위를 고려하여 몇 가지 사항을 제한하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먼저 개혁교회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에, 그 정의는 여기에서 차치하고, 저는 먼저 화란 자유 개혁교회, 캐나다 개혁교회, 호주 자유개혁교회, 남아공 자유개혁교회와 같은 고신과 자매교회를 맺고 있는 교회들에 제한시키려고 하며, 둘째로 신앙고백서를 말할 때에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서,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말하는 보편신경(Ecumenical Creeds)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돌트 신경을 말하는 세 가지 일치신경(Three Forms of Unity)와 고신이 신앙고백서로 받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Westminster Standards)로 큰 획을 긋고(개혁교회 세 가지 신경과 장로교 신경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마지막 단란에서 간단하게 다룰 것이다), 기타 칼빈이 제네바 교회를 위해서 만든 제네바 교리문답이나 루터의 대소교리문답 등은 필요할 때에만 언급하려 하며, 셋째로 신경(creed)이나 신앙고백서(confessions)나 교리 문답서(catechism)를 동일한 용어로 사용할 것이며, 넷째로 16세기 종교개혁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장로교회를 개혁교회의 범주 안에 넣지만, 두 교회의 전통이 전자는 주로 유럽 대륙에서 형성 발전되었고, 후자는 주로 스코틀랜드(스코틀랜드 자유교회)와 미국(OPC, PCA)에 발전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가급적이면 구분해서 사용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강의의 전체적인 흐름을 통시적(diachronic)으로 접근하고, 우리 현실을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공시적(synchronic)으로 접근하여,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가 제각기 교회생활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 성경 안에서 그 역할

 

-1. 신경은 단지 역사적인 산물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장로교 전통 안에서 신앙고백서가 교회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4장에서 다룰 것임), 물론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예외라고 하더라도, 신앙고백서 혹은 교리문답이나 교리문답 설교가 개혁교회만의 독특한 전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혁교회가 거의 매주일 오후에 교리문답 설교를 한다는 면에서, 이 주장에는 일면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단순히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역사적인 산물이 아니라, 성경에 들어 있는 계시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먼저 숙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과 고백이라는 말을 혼동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신앙(faith)이란 그 근거와 내용에 있어서 주도권이 삼위 하나님과 그의 구원사역과 직결되어 있고, 고백(profession)이라는 말은 주도권을 가진 삼위 하나님, 엄밀히 말한다면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한 사람의 반응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과 고백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로마서 10:14, 17). 이 두 가지 사실이 합쳐져서 신앙고백(confession)”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신앙고백이라는 영어 단어는 헬라어로 같은 것을 반복해서 말한다는 호모로기아(Ὁμολογια)에서 나왔습니다. 쉽게 말하면 신앙고백이란 성령의 일터인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경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아, 그 가르침 받은 말씀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그러하기에 신앙고백은 성경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성경 안에 있는 계시의 한 부분을 선언 혹은 공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고백이라는 말이 신약에서 유래되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약 교회가 구약 교회와 독립해서 자생적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 옛 언약 교회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신경은 계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신경은 계시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신경이 단순히 이단들을 방어하기 위한 변증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계시사적인 차원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신경은 아마 모세 오경에 나오는 쉐마([m;v)” 일 것입니다.

 

쉐마의 전형은 신명기 64절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웨는 하나인 야웨시니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라일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이와 같은 형태를 띤 신경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6절과 에베소서 44-6절입니다. 판 롱언 목사는 위의 신약 두 본문을 쉐마의 신약 개정판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본문이 점차로 확장되어 기독교의 신경인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이 되었다고 결론내립니다.

 

구약과 신약에 근거를 두고 있는 신경을 잠시라도 그 문맥을 살펴봄으로 신경을 구성하는 성격과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구약의 신경 형태를 띤 본문이나 신약의 신경 형태를 띤 본문의 내용은 똑같습니다. 구약의 세 본문은 한결같이 우리 하나님 야웨는 하나인 야웨시다는 것을 출애굽 모티브(Exodus motif)를 가지고 해설하고, 신약은 한 아버지 곧 우리 아버지가 계시니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이 구약성경에서 일관되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예시한 것으로 신약성경이 해설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두 본문은 구약과 신약이 한 교회로서 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누가복음 9:31). 단지 차이가 있다면, 신약의 본문은 옛 언약과는 다른 새로운 상황즉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로 인하여 옛 언약이 성취되고 그리스도의 피로 언약이 갱신되었기 때문에, 서문 즉 역사적인 서문이 확장된 것에 불과합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신경의 성격은 신구약 모두 한 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웨는 하나인 야웨시니라.”라는 쉐마에서 특별히 관심을 맞추어야 할 것은 야웨(the LORD)”라는 신명(神名)입니다. 이 신명이 맨 처음 나타나는 곳은 호렙 산에서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신 후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인접한 문맥에서 살펴볼 때에, 이 신명은 내가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행하는 분이라(I do what I say I will do)”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건져내실 근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2:24)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열조와 언약하신 것을 지키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킬 것을 먼저 모세에게 약속하셨고, 또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이렇듯 신경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백성을 위한 구원사역을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사도신경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일반적으로 세 부분 즉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 구속주이신 성자 하나님, 성화주이신 성령 하나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지만, 신경은 하나님과 그의 구원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할 때에, 쉽게 화란 개혁교회의 전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구속사적인 성경 해석의 근간은 17세기 이후의 개혁교회가 고안해 낸 새 해석법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 스스로가 스스로를 해석한 방법(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성격이 성경에 담겨 있고, 그리고 사도시대 이후 첫 신경인 사도신경이 이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한 마디로 삼위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역사에 대한 고백입니다. 구속역사에 대한 이해는 화란 [자유] 개혁교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화란 [자유] 개혁교회가 이와 같은 공교회적인 입장을 충실하게 견지하였을 뿐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사도] 신경을 가르친다는 것은 결국 삼위 하나님의 전 구원역사를 가르친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개혁교회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주일 오후 예배 시에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을 신구약 교회와 동일하게 한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 사역을 가르치고 공유하는 보편적인 교회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신경은 언약 형태를 띠고 있다.

 

-2를 좀 더 진척시켜 봅시다. 신경이 계시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말은 실제적으로 신경이 언약적인 형태를 띤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신경 성격을 띤 신구약 본문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지면 관계상, 신명기 6장에 제한시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는 세 편의 모세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심주제는 언약 갱신 즉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제 2세대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언약을 갱신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신명기 6장 앞 장인 5장입니다. 5장은 출애굽기 20장의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은 백성들(20세 이상 된 남성)은 광야에서 다 죽었기에 언약체결 상황이 달라져서, 이로 인하여 출애굽기의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4계명을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를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두었다면(20:11), 모압 평지에서는 40년 전의 출애굽을 통한 구속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두고 있습니다(5:15). 그렇다고 해서 계명의 본질이 전도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속의 은혜는 항상 창조 질서를 돋보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신명기 5장에서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 모압 평지에 있는 출애굽 제2세대에게 전달하고선, 6장에서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의 핵심을 정리해서 공포합니다. 그 핵심이 쉐마입니다. 쉐마는 언약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쉐마 첫 부분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웨는 오직 하나인 야웨시니입니다. 앞에서 야웨라는 신명의 뜻을 말씀드렸듯이, 언약을 갱신하는 여기에서 40년 전에 모세에게 자기 이름을 계시하시고 곧 바로 그 당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바로의 쇠사슬에서 그들의 아비를 이끌어내어 약속을 성취하셨던 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40년 전의 과거지사를 근거로 해서, 현 출애굽 제2세대와 언약을 갱신하시면, 또한 그들의 미래를 약속하십니다. 야웨는 항상 언약을 동반하는 신명입니다. 언약 백성은 항상 자신들을 가나안 땅에 들이시기 위해서 자신들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아비들을, 종된 땅 애굽에서 이끌어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분은 바로 야웨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쉐마 첫 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성(identity)을 정확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5장에서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 주실 때에도, 계명을 지켜야 할 근거를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야웨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의 열 가지 말씀에 순종해야 할 근거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다는데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언약 백성들이 언약의 계명을 지켜야 할 근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야웨니라는 말씀에서 너희 하나님 야웨라는 문구는 약식(略式) 언약 공식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을 당신께서 창조하셨으나,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주어 너희 하나님 야웨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너희라는 소유격 대명사는 언약적인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부조(父祖)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주신 언약구가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였습니다(창세기 17:7,8). 이 공식구가 더 명료하게 성경 전역에 걸쳐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26:1230:22;31:1,33;:36:28 8:8;21:3,7). 거의 대부분 언약은 두 당사자 사이에 합의를 거쳐 체결되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체결하시는 언약은 그 기원에 있어서 일방적(monopleuric)이나, 유지하는 데 있어서 쌍방적(dipleuric)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방적이라는 말은 선택하셨다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 언약 속에 들이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언약은 두 부분 즉 약속과 의무로 구성됩니다. 약속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크게 두 가지 즉 땅과 후손 즉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창세기 12;1-2; 13:15-16; 15:4-7; 17:1-8). 약속과 아울러 의무 역시 있는데, 의무는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입니다(창세기17:1b). 이런 관점에서 신명기 6:4을 본다면, 이 말씀은 정확하게 언약의 약속 혹은 축복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언약의 열 가지 말씀과 동일한 패턴으로 쉐마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라는 요구가 나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신명기에 따라 모든 계명의 강령 혹은 요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37-40). 이렇듯 신경은 언약의 패턴에 맞추어 나옵니다. 물론 신약 쉐마 역시 동일한 패턴입니다. 마지막으로 신경이 계시 형태를 띤 언약의 틀 속에 출현한다는 사실은 성경에서의 신경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를 가늠하게 합니다.

 

 

. 교회사 안에서 그 위치

 

-1. 초대교회는 철저하게 신경을 존중했다.

 

초대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28:19,20)와 사도들의 명령(딤후2:2; 벧전 3:15)에 순종하여, 교리 문답반을 운영하였습니다. 필립 샤프는 최초의 교회의 신경을 AD 107년에 기록된 익나티우스의 트랄리온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Epistola ad Trallianos)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말할 때에 귀머거리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분은 다윗의 가문으로 강림하셨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또 그분은 [하나님과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죄 없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진실로 태어나셨고, [진실로] 먹고 마시셨고, 참으로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핍박을 받으셨고, 진실로 [단지 모양새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습니다.그리고 그분 또한 진실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리고 제 삼일에 살아나셨다], 아버지께서 그를 살리셨습니다.[사도들과 함께 40일을 함께 지내신 후에, 아버지께로 취하여지셔서, 그의 오른편에 좌정하셨고, 그의 원수를 발아래 두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AD 180년경에 이레니우스가 쓴 이단을 반대하여(Contra Hereses) 라는 책에서 빈번하게 신경 양식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온 세상에 땅 끝까지 흩어져 있는 교회는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믿음(τήν πίστιν)을 전수받았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이신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들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육체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님의 강림과 동정녀의 탄생과 고난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육체로의 승천과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서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것과 한 머리 하에 만물을 다스리실 것과 모든 인류의 모든 육체를 일으키실 것을 믿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사도신경에 유사한 문구들이 발전되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AD 250년경에 카르타고의 키프리안은 마그네인들에게 보내는 편지(the Epistle to Magnus)에서 세례자들을 위한 신경 공식구를 그대로 기록하였습니다. 필립 샤프의 말대로 키프리안의 이 편지는 거의 이단을 방어하고 기독교 교리를 확고하게 하고자 한 것일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습니다.

나는 거룩한 교회를 통한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우리는 키프리안이 이 편지를 작성하기 전에 이미 사도신경의 원조라고 불리는 단편들이 각 지역에 회람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필립 샤프의 판단대로 AD 300년경의 안디옥의 루시안과 325년경의 유명한 교회사가인 가이샤랴 유세비우스의 사이에 아리우스가 만든 개인 신경(AD 328)가 나왔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아리우스의 개인 신경이 니케아 신경과 흡사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사도신경이 니케아 신경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기에 그 때에 사도신경이 분명히 현존했다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필립 샤프는 AD 200년에서 750년까지 사도 신경이 어떻게 정형화되었는지 그 과정을 도표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발전 과정이 초대 교회의 교리 문답 혹은 교육이 어떻게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경이 단지 사도신경 형성만 아니라, 세례를 받으려는 학습자들에게 유명한 신학자들의 교리 문답 설교나 예루살렘의 시릴(Cyril)의 설교집을 읽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집이 일종에 교리문답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 역시 감독이 없는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교육도 받지 않은 채 세례를 받았다는데 대해서 격분했습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최소한 6, 7세기까지는 교리교육이 집중적으로 시행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 중세교회는 고대교회 전통의 흔적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7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소위 중세시대의 교회생활은 성례주의와 자동주의로 특징짓습니다. 이 말은 믿음이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사역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견고한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예식에 참여하는 것 즉 미사에 참여하는 일로 대체 되었습니다. 교회와 신부가 은혜의 중재자 자리를 치지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교회는 예전의 의양에 치중하면서, 예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 설교와 교리문답식 교육이 그 자리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주님께서 친히 신약교회를 위해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 성례 외에, 견진성사, 고해성사, 혼인성사, 서품성사, 종부성사가 버젓이 교회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신부는 자녀들을 교육할 때에, 삼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해설하기 보다는 교회가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성례들을 방편으로 삼아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부추겼습니다. 이들에게 성례를 집례하는 것 그 자체가 은혜를 전달해주는 것으로 생각했고,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기에 우리는 소위 중세를 암흑시대(Dark age)”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중세 내내 일방적으로 말씀과 교리 교육 자리에 거짓 성례들이 자리를 다 차지한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자칭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라고 부른 챨스 대제(742-814)는 영국 태생 대학자인 알쿠인(Alcuin)을 자신의 궁정목사로 청빙하여 강력하게 그를 후원하였습니다. 챨스 대제를 등에 업은 알쿠인은 하나님의 말씀 설교의 중대성을 강력하게 강조하였습니다. 또 설교가 모국어로 행하도록 했고, 그리고 설교가 교리문답 형식을 띠도록 했습니다. 샤를마뉴 영향력으로 마인쯔와 라임스 대회(813)는 교회 예배 시에 교리문답이 의무적으로 시행되도록 칙령이 내렸습니다. 설교를 들은 후에 사람들은 반드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배워야 했습니다. 남부 독일에서 발견된 한 사본에 의하면, 샤를마뉴의 권세와 그의 영향력을, 설교를 끝낸 사제가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 챨스의 명령이기때문에, 방금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본문들을 가르쳐야만 한다고 말함으로 분명하게 논증해놓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흑암과 같은 중세에도 당신의 교회를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전하시기 위해서, 샤를마뉴와 같은 정치가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남부 독일과 일부 인접 프랑스 지역과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설교 예배를 제도화시키는데 읽을 담당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프로네(prone)”, 독일에서 프로나우스(pronaus)”라고 불렸습니다. 12세기의 독일 레젠부르크 지방에서 살았던 어거스토두눔 호노리우스(Honorius Augustodunesis)가 쓴 교회의 거울(Speculum Ecclesiae)”에서 몇 편의 설교와 설교를 위한 실천적인 제안들과 아울러 중세 설교예배의 완전한 예전을 싣고 있습니다. 이 책 안에서 호노리우스는 설교가 끝난 뒤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차례대로 해설되었고, 지금 참회의 기도라고 할 수 있는 죄의 고백이 뒤따랐습니다. 물론 교리적인 측면에서 호노리우스가 종교개혁의 선구자는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에는 이행득의가 강조되고 있고,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중세 시대의 프로나우스가 교리적인 내용상 종교개혁의 교리문답 설교와 비교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가교적인 역할을 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프로나우스는 명백하게 교리문답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요한 울리히 서전트

 

중교개혁이 임박했던 1502년에 설교학 교본(Manuale Curatorum)”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교리교육에 대단히 정열을 쏟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서전트(John Ulich Surgant)입니다. 서전트는 교리적으로 중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의 외형주의를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설교와 교리교육의 중대성을 역설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교중이 반드시 교리문답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주기도, 아베 마리아, 사도신경, 십계명을 신부는 가르쳐야 하고, 교중은 배워야한다고 했습니다. 서전트의 십계명에 대한 석의는 탁월합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고대전설에 따라 사도들이 각 한 항목씩을 말하여 작성했다고 가르치는 등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서전트는 교리문답 목록에 사도신경과 주기도와 십계명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왜냐하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역시 사도신경과 주기와 십계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전트의 교리문답 목록이 아무리 16세기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이나 교리문답의 구조와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해석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철저하게 성경적인 방식에서 교리문답의 내용을 구성했다는데 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 살펴보겠지만,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교리문답을 설교로 이해하고 예전에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 신앙고백서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입장

 

-1. 종교개혁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설교예배에 관한 서전트의 책에 정통해 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개혁가들은 동일한 목록들즉 사도신경과 성례제정의 말씀, 십계명, 주기도문을 교리문답에서 해설할 때에, 자신들이 처음 시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전트와 개혁가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이 목록들의 해석이 참으로 성경적이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울리히 쯔윙글리(Ulrich Zwingli)와 레오 유다(Leo Judae)의 주도하에 교회가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던 쮜리히(Zürich)에서, 공예배 예전이 실제적으로 프로나우스(교리설교)와 똑같은 것을 사용하였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쮜리히는 영국 런던 화란 피난민 교회의 목사인 요한 라스코(John à Lasco)와 영국 다른 지역 피난민 교회 목사인 마틴 미크론(Martin Micron)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런던 화란 피난민 교회가 나중에 화란교회 생활을 형성하는데 본보기로 역할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부터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추적할 수 있는 계보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역사적인 계보는 프로나우스(Pronaus)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사역했던 부쳐(Martin Bucer)와 폴라누스(Valerandus Pollanus)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칼빈이 1538년에 스트라스부르크로 피난 갔을 때에, 거기에서 약 3년 정도 머물면서 스트라스부르크 예전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계보는 쮜리히에서 바젤로 향해 거기에서 사역하였던 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외콜람파디우스를 통해서 제네바의 칼빈의 연세 많은 동역자인 파렐(William Farel)이 쮜리히 예전을 알게 되었습니다. 칼빈이 제네바로 다시 돌아갔을 때에, 그는 제네바 예전을 위해서 부처와 파렐의 예전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이델베르크 팔레티네이트에 흘러들어갔고, 또 이 경로로 네덜란드에도 유입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몇 세기 뒤에, 캐나다, 호주, 한국에 이 예전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종교개혁 교회 예전에서 설교가 두드러진 위치를 점유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당대 대부분 개혁교회의 예전에서 교리문답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리문답의 목록들은 개혁자들에 의해서 성경적인 방식으로 해설되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강조되어야만 합니다. 물론 이후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 그 극치를 이룹니다. 예를 들면 공적인 죄 고백(Public Profession of Sins)이 더 이상 나쁜 행실들을 열거해 놓은 목록을 요약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죄를 범했다는 것과 언약을 깨뜨렸다는 실제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신부(神父)가 선언하는 사죄 선언문도 특별한 진술이나 설교에서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예전은 예전적인 반응에 기인한 교리문답에 의해서 특징지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예전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문답 설교는 우리 교회에서 계속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2. 마틴 루터

 

1529년은 마틴 루터에게 몹시 힘이 들고 걱정거리가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의 생명을 걱정할 정도로 중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회교도가 유럽 동남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고, 그리고 비엔나 시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 기독교가 풍전등화에 처했습니다. 세 번째로, 루터는 교회 방문단으로서 개혁 진영에 참여하였던 교회들을 둘러보고는 경험한 바에 의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식의 수준이 매우 저급했는데, 이는 일반 교회회원들만 아니라 목사들도 그러했다는데 대해서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들 중에 대부분의 목사가 로마교회를 떠난 신부(ex-priests)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이런 교회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개선하기 위해 중요한 결정을 했습니다. 교회의 일반적인 회원들이 십계명과 사도신경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었고, 그리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교중에게 이 목록들을 해설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나중에 대교리 문답(Larger Catechism)이라고 불리는 교리문답을 작성했습니다.

 

실제적으로 오늘날의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이 책은 교리문답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문답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루터가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 성례들에 관해서 전달한 몇 편의 설교를 모아 만든 것이었습니다. 루터가 이렇게라도 책을 만든 의도는 특별히 목사들이 설교의 모델로서 이 소책자의 내용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 나오는 첫 문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설교는 자녀들과 무식한 사람들을 가르칠 목적에 맞추어서 내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터는 아주 간명한 다른 교리문답을 내어 놓았는데, 이런 이유로 인해서 루터의 소교리문답(Martin Luther's Small Catechism)이라고 불려졌습니다. 루터는 이 책 안에 몇 가지 기도 모범 즉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기도문과 식사시간 전에 드리는 기도문을 첨가하였습니다. 이 책은 편람(Enchiridio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루터는 무엇보다도 자기 동료들이 자신의 직분의 책무를 다할 것을 자극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습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최근에 내가 교회를 방문하면서 직면하였던 신자들의 비참한 종교생활을 목도하고 난 뒤에 간략하면서도 가르치기 쉽도록, 교리문답서나 기독교 교리 입문서를 작성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다 . 내가 그때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였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평범한 교회 회원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조금도 알지 못했고, 특별히 촌락에 있는 교회들은 더욱 심했다. 그리고 수많은 목사들이 가르치기에 거의 적합하지 않거나 아니면 가르칠 능력이 아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주의 만찬이나 신경이나 십계명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례를 받았고, 성찬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금수나 이성이 없는 돼지 같은 삶을 계속해서 살고 있다. 게다가 이 복음이 전하여진 마당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철저하게 기독교의 자유가 남용되고 있다.

 

이렇게 말한 뒤에 루터는 자신이 작성한 교리문답이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는 동료 목사들에게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 심지어 자기가 만든 교리문답 소책자에 이르기까지 같은 역본을 항상 사용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반 사람들이 혼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목록들을 암기할 것을 바랐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위의 목록들을 배우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인임을 스스로 부인하는 자라고 반드시 말하라. 이들은 주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게 해서는 안 될 것이며, 기독교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저들을 로마 교황과 그 하수인들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 마귀에게 던져주어라.

 

두 번째로 목사들은 이 목록이 의미하는 바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설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세부적인 수많은 사항들을 다 다루지 않고, 반드시 행해야 했습니다. 세 번째로 사람들이 소교리 문답을 다 배웠을 때에, 대교리 문답을 도움 받아 계속해서 더 자세하게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루터는 학교가 세워져서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견해를 개진했습니다. 부모들과 관료들은 자녀들이 학교에서 기독교 교리를 가르침 받을 수 있도록 보증할 것을 고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 교리 교육을 다 받고 난 뒤에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교황의 독재가 이제 과거지사이기에, 아무도 강제로 미사에 참여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들은 민중들이, 어떤 법에 의한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주의 만찬에 책임 있게 반응하는 방식으로 나오도록 설교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르치고 배운 결과를 단순하게 볼 수 있습니다. 유일한 법칙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 역시 교리 설교의 문제였다는 사실이 우리가 방금 읽었던 소교리 문답 서론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들과 행정 관료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고무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때

 

부모들과 행정 관료들이 중죄를 짓지 않도록 설교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심지어 사탄은 부모들과 관료들이 이렇게 하지 않도록 마음에 혐오할 만한 것을 획책하고 있다.

 

게다가 1533년에 위텐베르크 교회 질서(Wittenberg Church Order)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채택하였습니다.

 

주일 아침 일찍 목사와 집사는 교리문답을 해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리 전부가 모두 다루어졌을 때에, 또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설교자가 전 교리문답, 특별히 평범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반드시 있어야 세부 사항들을 바르고도 열심히 해설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확보하는 방법이다.

 

비록 팔리티네이트와 달리 일정한 스케줄이 없었다고 하더라도(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52주일 형식을 취하고 있다), 루터는 차서에 따라 교리문답 설교가 행해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3. 요한 칼빈

 

칼빈이 1536년에 제네바에 도착한 얼마나 지나지 않아서,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성경적인 교리를 건전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고대 기독교회의 전통으로 환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1538년 겨울에 1536년에 만든 기독교 강요 초판을 간략한 형태로 요약한 교리문답서를 출판했습니다.

 

교회 생활을 개혁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고, 그리하여 그는 그해에 제네바를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1541년에 제네바 시의 요청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칼빈이 요청을 받았을 때에, 그는 교회 권징 실시와 성경적인 교리문답에 관한 두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541년 연말이나 아니면 그 이듬해에 제네바 교리문답(Genevan Catechism)이라고 알려진 두 번째 교리문답을 출판했습니다. 이때 비로소 교리문답이 문답 형식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1545년에 수많은 동료 목사들의 요청과 그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라틴어판을 출판했습니다. 라틴어판 서문에서 지금껏 사용해온 교리문답 설교가 개혁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진척되어야 한다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교리 안에서 향유하였던 일치가 교리문답서들에서보다 달리 더 분명하게 보일 수 없을 것이다.” 훌륭한 교리문답서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공적으로 증거되어야 하고, 이것으로 교회들이 거리상으로 넓게 분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리스도의 교리 안에서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고, 또 피차 상호간에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교리문답서는 일치 양식서(form of unity)”로서도 역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설교가 보편적이면서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41/42에 제네바 교리문답 프랑스 초판에서 칼빈이 작성한 서론을 번역한 것을 읽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항상 교회의 행습으로 내려온 것이며, 또 자녀들이 기독교 교리로 부지런히 가르침 받을 수 있도록 참석하게 하고, 주의 깊게 살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더욱 더 편리하게 행해지도록 이른 아침에 문을 여는 학교에서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에서도 바르게 가르칠 수 있도록 권고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또한 교회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된 중요한 교리들과 모든 기독교 교리들에 대해서 자녀들이 잘 알고 있는지를 자녀들에게 물어는 보는 것이 공적인 관습이었고 동시에 교회의 행습이었다. 이를 질서 있게 수행하기 위해서 교회는 교리문답 혹은 강요라고 불리는 특정한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 이전에 마귀는 비참할 정도로 교회를 황폐화시키고자 가공스럽게 노략질 했다(세상 안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아직도 잘 볼 수 있는 표지들을). 마귀는 이 거룩한 정책(교리문답을 사용하는 것)을 전복시켰고, 그리고 단지 어떤 흔적(certain remnants)만 남겨놓았는데, 그리하여 어떤 덕을 세울 열매도 없이 단지 미신만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조롱하는 것보다 더 악한 상태의 몸짓만 있고, 심지어 남아 있는 기초도 없이 단지 원숭이들에게만 적합한 논증(Confirmation)”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내어놓은 것은 단지 고대부터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자들 가운데 준수되어 왔던 것들을 사용할 뿐이다. 그리고 이 교리문답은 결코 교회가 전적으로 부패하였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시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서문의 첫 문장들 가운데 한 문장에서 공적인 교리문답이 칼빈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후스파나 발덴네스들이나 다른 사람들도 교리문답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상황에서 우리는 교리문답반이라고 부르는 것이 교리문답 설교와 합쳐져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네 그룹 즉 특히 어린 자녀들, 가정의 하인들, 최근에 도착한 피난민들은 가르침을 받고 문답이 있고 난 뒤에, 교리문답 설교가 전달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1541년에 채택된 교회법(Ordonnances Ecclesiastiques)인 제네바 교회의 교회질서에 들어있는 규정이었습니다. 제네바에 있는 세 교회 모두가 교리문답 설교는 주일날 드리는 세 번의 예배 가운데 두 번째 예배 시에 행해져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학교 교사들은 자녀들을 모아야 했고, 그러나 부모들도 학교에 다니지 않는 자녀들을 데리고 참석해야 했습니다. 개인으로서 요한 칼빈에 관하여, 십계명과 주기도문에 관한 수많은 설교가 보전되었습니다.

 

-4. 독일과 네덜란드

 

교리문답 설교는 유럽 일부 지역에서, 단지 제네바 교회에 의해서 정착된 모범을 따르는 문제가 아니라, 중세후반의 행습을 그대로 지속하는 것이 개혁교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첫 번째 증거 중에 하나가 네덜란드의 핍박이 점점 더 가중되자 영국에 세워진 피난민 개혁 교회들이었습니다. 1544년 이래로 수많은 신자들이 영국으로 피난해왔습니다. 그들은 헨리 8세 왕에게 환대받았습니다. 헨리 8(Henry )는 국가 경제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대륙의 산업 인력을 고용한 것입니다. 또한 영국 교회 지도자이자 켄터베리 대주교인 크렌머(Thomas Cranmer)도 이들이 영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교회생활을 형성하였던 방식이 영국 교회를 개혁하는데 좋은 본보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6(Edward ) 재위 동안에 크렌머는 더욱 더 영향력을 행사하여, 초기에 페러가(Austin Friars)의 소유였던 빈 건물을 화란에서 건너온 피난민들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화란 피난민 교회들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라스코(John à Lasco), 미크론(Martin Micron), 델레니스(Walter Delenius), 위텐호버(John Utenhove)였는데, 이들은 교회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매 주간마다 세 번 예배를 드렸는데, 아침 예배 시에 설교는 성경 한 장씩을 강론하였고, 이 설교는 처음 장부터 시작해서 끝 장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주일 오후 예배 시에 1546년에 라스코에 의해서 작성되었고 위텐호버에 의해서 번역된 대교리문답을 한 단락씩 나누어서 교리문답 설교를 하였습니다. 세 번째 예배는 목요일에 거행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설교 나눔(The Prophecy)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회원들이 설교에 대해서 질문할 기회를 얻었고, 또 이 자리에서 성경으로부터 목사는 답변을 했습니다. 불분명한 채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생활의 편성이 나중에 네덜란드 교회들에게 본보기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1544년에 프랑크푸르트 고백서(Confession of Frankfurt)가 출판되었는데, 또 이 고백서가 즉각적으로 독일의 하인올트(Heinault)와 폴라누스에 지도 하에 영국 글래스톤버리에 일찍 세워진 피난민 교회들에서 교리문답 설교 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피난민 교회 회원들은 이 고백서를 익혀서 암기해야 했고, 주의 만찬에 나아가기 전에 온 교중 앞에서 이 고백서를 암송해야 했습니다. 초기에 주일 오후예배 시에 온 교중이 참석한 자리에서 자녀들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교리문답이 시행되었습니다. 가장 이런 자녀들은 주기도문을 배워야 했고, 그 다음 그룹은 사도신경을, 나이가 든 사람은 십계명을, 마지막으로 제일 나이가 많이 든 회원들은 고백서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고 난 뒤에 고백서 각 조항들을 가지고 설교가 전달되었습니다.

 

팔리티네이트에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가 1563년에 1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문답서가 루터파에서 나온 다른 교리문답서들을 대체시켰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 있는데, 피난 가 있었던 단테우스(Petrus Dantheus)가 네덜란드로 귀향하면서, 하이델베르크 교회 질서(Heidelberg Church Order)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는 벌써 1563114번째 판으로 출판된 것으로서, 이 안에 본 교리문답이 들어 있었습니다. 단테우스는 본 교리문답과 다른 문서들을 화란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이 네덜란드에 교리문답 설교에 대한 역사로 눈을 돌리도록 합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유럽 남부 지역(Low Lands)에 교회생활이 형성되기 전에 시행되었습니다. 이미 1566년에 교리문답 설교가 암스테르담에 도입되었습니다. 이 교회 설교가는 가브리엘(Peter Gabriel)이며, 핍박이 한창일 때 들판에서 비밀리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 전달된 울타리 설교집(hedge-sermons)”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화란의 대부분 지역에서 핍박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회의를 열어 교회 생활을 잘 정리하고자 준비된 첫 번째 모임이 국경 너머에서 개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568년 독일의 베젤에서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여기에서 가정과 학교와 교회에서, 세 가지 방향으로 교리문답이 실시되도록 고무되었습니다. 교회 교리문답반에 관하여, 이미 거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적으로 주일 오후에 제네바 교리 문답서나 혹은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서를 가지고 수행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첫 총회가 1571년에 국경 너머 엠덴에서 개최되었는데, 여기에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채택하였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사용되어야 할 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목사들은 이 교리문답에 관한 좋은 설교를 전해야 했습니다. 후속 국가 대회들이 이 사실을 확정하였습니다. 외국 사절단에 의해서 강력하게 지지를 받은 그 유명한 1618/19년 돌트 국가대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돌트대회는 돌트 신경만이 아니라, 돌트 교회 질서를 작성하였는데, 여기에서 교리문답 설교가 어른들과 아이들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간명하게 적합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몇 년 뒤인 1621년에 흐로닝엔 지방 정부는 정규적으로 교리문답 설교를 시행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 이래로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교리문답 설교가 시행되었습니다. 그것도 대체적으로 오후 예배 시에 말입니다. 지금껏 이 아름다운 전통이 참 교회를 통해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캐나다 개혁교회는 교회 질서 제52항에서 당회는 교중에게 주의 날 두 번씩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일 것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당회는 대체로 매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으로 요약된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가 선포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내용과 특징

 

-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작성된 배경과 목적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팔리네이트라고 불리는 선제후가 살던 수도의 이름을 따서 붙인 말입니다. 그 당대에 12명의 선제후가 있었는데, 프레드릭 2세와 오토 헨리를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이 루터를 추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독일 안에서 종교개혁 교회들은 루터가 만든 소교리 문답을 각 도성에서 사용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교리문답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성찬에 대한 마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교회들의 난제는 다름 아닌 주의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시는 방식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심지어 루터파 진영 안에서도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루터의 공재설을 너무 과도하게 해석하여 화체설과 비슷하게 주장하는 극단파가 있는 반면에, 멜랑흐톤(Philip Melanchton)과 같이 루터파에 있으면서도 성찬에 있어서는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 온건파가 있었습니다. 프레드릭 2세 역시 이미 프로테스탄트가 되어 있었고 또 그의 영적인 교사는 멜랑흐톤이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서 프레드릭 3세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작성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선제후가 되자마자 성찬에 관한 분쟁을 해소해야 했습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성찬에 있어서 루터보다는 칼빈이 더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배우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잠깐 루터와 칼빈의 성찬에 대한 이해를 비교해 보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루터는 성찬 시에 떡과 포도주에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한 반면에 칼빈은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수찬자가 믿음으로 떡과 잔을 받을 때에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습니다. 전자를 공재설, 후자를 영적 실재설이라고 합니다. 두 견해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이, 칼빈의 견해가 성경적이고 공교회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칼빈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78문답에서 정확하게 칼빈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78. 그렇다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화됩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되지 않고, 그 자체가 죄를 씻지 못하며 단순히 하나님께서 주신 상징이요 보증인 것처럼(5:26; 3:5.), 비록 성찬에서 사용되는 떡이 그 성례의 성질과 용어상(17:10, 11; 12:11, 13; 고전 10:3, 4; 벧전 3:21.)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어 질지라도(고전 10:16, 17; 11:26-28.), 떡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26:26-29.).

 

성경 인용 구절이 보여주듯이 철저하게 성경적이며, 동시에 사도신경의 입장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 제6항에 그는 하늘로 올라가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좌정하셨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부활하신 육체를 가지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육신으로는 더 이상 땅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제47문답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이시고 참 하나님이십니다. 인성으로 볼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땅위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성령의 견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결코 우리를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정확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만일 성찬 시에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신다면, 우리 스스로 사도신경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분은 지금 육신으로서는 하늘에 계십니다. 이렇듯 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태풍의 눈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프레드릭 3세는 선제후가 되기 15년 전에 칼빈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적인 입장을 고수한 결과로 오토 헨리에게 밉보여 하이델베르크 성 안에서 살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프레드릭 3세는 멜랑흐톤의 추천을 받아 오래 전에 위텐베르그 대학에서 멜랑흐톤 밑에서 수학했고, 쮜리히에서 피터 마터(Peter Martyr)에게 수학을 받다가, 그의 천거로 1561년 가을에 하이델베르크 교의학 교수로 와 있었던 28세인 우르시누스(Zacharius Ursinus)에게 이 과업을 맡겼습니다. 그는 라틴어로 된 대교리 문답과 여기에서 축약한 소교리 문답을 출판하였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그는 유대, 칼빈, 라스코로부터 자문을 받았습니다. 신학교수단과 탁월한 몇몇 목사들로 구성된 교리문답 위원회가 이 두 권을 토대로 해서 소책자 사본을 검토한 후에 팔리티네이트의 교리문답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르시누스보다 두 살 더 어린 프레드릭 3세의 주 자문관인 올레비아누스(Casper Olevianus)가 이 교리문답 최종판이 나올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리하여 15631월에 새 교리문답을 채택하기 위하여 소집된 대회에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판이 나오자마자 매진되었고, 같은 해에 제2, 3판이 나올 정도로 환영받았습니다. 2판에서는 현재 제80문답에 있는 교황파의 미사에 관한 문답이 새롭게 삽입되었습니다. 3판에서는 앞에서 언급하였던 바처럼 개혁교회의 주의 만찬에 관하여 정죄를 내렸던 트렌트 공의회의 입장을 응수하고자 미사가 근본적으로 정죄 받을 우상숭배라는 말을 첨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고백서를 작성하게 된 목적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훨씬 더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프레드릭 3세가 이 고백서를 만들라고 명을 내릴 때부터, 그의 주된 목적은 훌륭한 교회질서의 도움을 받아 교회생활을 유기적으로 편성하고자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본 교리문답 서론을 교회질서에 포함시켰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교리문답은 기독교 교리의 가장 탁월한 부분들을 해설한 것을 간략하고, 입을 통해서 전달되어야 하고, 이것으로 어린 자녀나 무식한 사람들도 배웠던 것으로 문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회의 시작부터 주님을 경외하였던 사람들이 자원하여 주님을 두려워하도록 자녀들을 가정과 학교와 교회에서 가르치는데 전력투구하였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역시 동일하게 시행해야만 했습니다. 첫 번째로, 누구나 유익한 교리를 방편으로 해서 매번 이 약함과 싸우지 않는 한, 이 선천적인 약함이 교회와 시민정부에서 우세하여 곡해할 수 있음을 그들은 진지하게 숙고해야만 합니다. 둘째로, 이들은 하나님의 명시된 계명들에 의해서 이 사실을 진척시켜야만 하며, 또 이것을 우리가 출애굽기 12장과 13장 그리고 신명기 4, 6장과 11장에서 읽을 수 있으며, 거기에서 주님께서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할례를 받고 또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되자마자,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 거룩한 표징의 신비를 배워야 했고, 마찬가지로 우리 자녀들도 자신들이 받은 세례[의 의미]에 대해서 가르침 받아야 하고, 그리고 참된 기독교 신앙과 회개 안에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주의 만찬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받기 전에, 자녀들은 온 교회 교중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서론은 더 나아가서 로마교회의 거짓-성례인 견진성사(Confirmation)를 다루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강력한 용어를 사용하여 견진성사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내리신 계명에 기원을 두고 교리문답의 제정이 가공스러운 사탄이 적그리스도인 교황을 통해서 다른 유익한 제도들과 함께 이 교리문답을 폐지할 때까지 기독교 교회에 유지되어 왔고, 그리고 사탄의 교활함과 협잡함과 또 다른 혐오감으로 이것을 대체시켜버렸다.

 

세 번째 단락은 우리에게 교회 예배 시에 교리문답이 실제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해줍니다.

 

매주일 오후, 편리한 시간에 목사가 교중송을 부르고, 먼저 주기도로 기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십계명을 분명하게 읽히는 방식으로 본 교리문답이 설교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순서에 따라 목사는 자신이 설교한 것을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문답형식으로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정하게 그들을 설교 본문으로 이끌고 그렇게 한 다음 문제들을 내어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 한 다음, 목사는 자녀들 중 몇 아이에게 교리문답에서 낸 특정한 몇 가지 질문들에 대답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주의 날들을 몇 부분으로 분류했는데, 즉 이전의 설교를 해설하고, 그리고 이어질 설교를 해설해 주기 위해서이며, 그리고 이것은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이미 배웠던 것이다. 그들이 교중 앞에서 이 문답을 대답하는 것을 마치자마자, 목사는 간략하게 몇 가지 다음 질문을 해석하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목사는 적어도 매년 본 교리문답을 마쳐야 할 것이다.

 

서문에서 살펴보았듯이, 본 교리문답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온 교회가 가르침을 받아야 했던 것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요약하면 본 교리문답을 작성한 첫 번째 목적은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교회회원이 배워서 바르게 예배드리기 위함이며, 두 번째로는 공적인 신앙고백을 하기 위한 자녀들을 교육시켜, 주의 만찬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며, 세 번째 교회의 일치를 위함이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결코 이전에 없었던 것을 새롭게 도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시도했고, 공교회가 했던 바대로의 환원이었습니다.

 

만일 성경의 모든 내용을 누군가가 혼자서 정리하여 숙지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스스로 계시의 말씀을 정리하고 해석하라고 명하시지 아니하시고, 항상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유익을 얻도록 하셨습니다(4:11). 이 방법에 순종한 것이 신앙고백서입니다.

 

-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내용과 특징

 

이제 간략하게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는 본 교리문답을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간명한 방식으로 이해하여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동시에 모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배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은 순종을 유발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고, 일으키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접붙이시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모든 보화와 유익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온갖 보화와 유익들에게 참여한 사람이 순종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64문답). 만일 순종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칼빈이 작성한 1541년의 제네바 교리문답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제네바 교리문답(154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믿음

(1-130문답)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예배, 사도신경을 전부 강해

죄와 비참

(1-6문답)

죄와 타락과 구속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 대한 간명한 해설

율법

(131-232문답)

하나님께서 예배에 대한 규칙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규칙으로서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 해설

그리스도의 구속하심

(12-85문답)

사도신경을 토대로 하여, 중보자이자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사람의 위로와 구원을 해설함. 또 말씀과 성례를 포함시킴

기도

(232-295문답)

주기도문의 패턴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바의 의미와 방식을 설명

감사(86-129문답)

언약의 열 가지 말씀주기도문을 강해함,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에 대한 하나님께 감사함을 계명에 순종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해설함

말씀과 성례들

(296-373)

이를 방편으로 하여 우리가 천국에 들어감,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함

제네바 교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동일한 패턴 사도신경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주기도문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사도신경은 믿음의 내용을,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은 믿음의 순종을, 주기도문은 주님께 감사를 강조합니다. 물론 두 문답이 말씀과 성례들에 관해서도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황파가 성경에도 없는 여러 가지 성례들을 만들고 교회의 의식들을 은혜의 방편으로 가르쳤던데 비해서, 개혁교회는 은혜의 방편들을 말씀과 두 가지 성례 즉 세례와 성찬에 국한시킴으로 성경으로 환원하였습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 문답에서 말씀과 성례들과 함께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넣고 있는데(대교리, 154; 소교리 88), 이는 기도를 감사로 규정하는 하이델베르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본 교리문답의 내용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먼저 두 교리문답이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도신경 자체가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 점에 대해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단지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에는 사도신경이 빠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16세기까지 공교회가 지속적으로 가르쳐 온 사도신경을 공교회의 교리문답서에 빠뜨렸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로교 학자이면서 개혁교회의 교리 문답서를 더욱 더 예찬하는 토랜스 박사(T.F. Torrance)의 예리한 비평은 장로교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할 부분입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는 자신보다 먼저 만들어진 고백서들보다 내용과 시각에 있어서 현저하게 기독론적이지 못하다. 비율상으로 다른 교리문답서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거의 반 정도를 할애한 반면에 웨스트민스트 교리문답서들은 훨씬 작은 부분만 여기에 할애하였다. 그러나 다른 부분이 해설되는 방식에 있어서도 동일한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십계명을 해설한 칼빈의 교리문답은 대교리 문답이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따르지 않고 훨씬 더 복음적으로 설명했다. 종교개혁 교리문답들은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보다 훨씬 덜 합리주의적이다.라고 썼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자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단 9(21-30)만을 할애하였습니다. 반면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전자보다 거의 5배정도 되는 42(12-53문답) 항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historia salutis)를 강조한 반면에,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은 구원 서정(ordo salutis)에 치중하였습니다. 전자는 구원서정에 관하여 즉 믿음(21문답), 의롭다함을 받음(60문답)에 대해서만 언급하는데 비해서, 후자는 소교리 문답에서 8개 문답(31-38문답), 대교리 문답에서 14개 문답(67-81문답)을 제시합니다. 그것도 전자에서는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의 설교에 긴밀하게 연결시켜 구원서정 자체가 구원사역과 독립적으로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정리해놓은 반면에, 후자에서는 구원서정을 순서대로 도식화시켜 놓아, 구원 서정을 영적인 논리적인 순서가 아닌 시간적인 순서로 오해할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 구원서정은 결코 시간적인 순서로 정리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시간상으로 칭의가 성화 이후에 올 수 없지만, 성화는 항상 칭의와 붙어 다닌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칭의가 있고 난 뒤에, 성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칭의와 동시에 성화가 시작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또 칭의나 성화는 구원사역의 설교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교리 문답은 예외라고 하더라도, 소교리 문답은 교회에 대해서 단 한 문답도 할애하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 작성되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장로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회중주의자 혹은 독립교회주의자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교회론에 대해서 불과 1세기 전에 작성된 벨직 신앙고백서(27-32)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교회론과 괴리가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도 고신 자매교회인 캐나다 개혁교회와 미국의 정통장로교회(OPC)와 이 문제를 두고 수십 년 토론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예 캐나다 개혁교회의 자매 교회인 호주 자유개혁교회는 국제 개혁교회 협의회(ICRC)에 호주 동 장로교회가 참석한다는 이유로 1996년에 탈퇴하였습니다.

 

 

. 신앙고백적인 교회생활

 

-1. 교회생활이 고백적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개혁교회는 교리문답 설교를 교회 질서와 예전에 포함시킴으로써, 사실상 예배와 교회 생활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와의 차이기도 합니다. 전자는 시작에 있어서부터, 교리와 교회질서 안에 있는 예전을 동시에 다룬 반면에, 장로교는 예배모범 전문 18장 가운데 4(말씀 설교에 관하여)에서 설교를 다루고 있지만, 신앙고백서나 대소교리 문답을 정기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문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또 개혁교회는 교리와 아울러 교회질서를 개교회(당회)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성경적인 원리로 구성된 약 70항정도로 분류해서 만든 반면에, 장로교는 정치가 115조항, 권징조례 136조항, 예배모범 18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캐나다 개혁교회와 호주 자유 개혁교회는 찬송의 책(Book of Praise)에 제네바 운율인 시편 150편과 찬미 65, 보편신경, 세 가지 일치 신경, 예배 순서, 예식서, 기도문, 교회 질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개혁교회 회원들이 신앙고백서와 교회질서가 직분자들을 위한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회원들의 교회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교회정치를 헌법(Law)이라고 부르지 않고 고린도전서 14:40에 의거해서 질서(Order)라고 부릅니다. 장로교는 교회 질서를 헌법(특히, 권징에 있어서 용어가 온통 세상 법률 용어로 채워져 있다, 반면에 개혁교회는 권징을 마태복음 18:15-17절에 기초를 두어 제66-72항 즉 단 7개항목만 할애하였다. 그리고 세상 법률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이라고 부르고, 그러하기에 교회 회원들에게 교회 질서는 직분자들의 전유물 내지는 교권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수단 정도로 취급됩니다. 개혁교회는 교리만큼이나 교회질서를 사랑하며 존중합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자신들이 받은 세례 시의 약속, 공적으로 믿음을 고백할 때에 행한 약속, 성찬에 나아갈 때마다 상기 예식서에서 받은 약속과 요구에 신실하지를 쉽게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각종 예식서에 나타난 고백적인 교회생활

 

이제 구체적으로 신앙고백이 교회 회원들에게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기본 되는 예식서가 유아세례 예식서와 성찬 예식서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에는 유아세례 예식서와 성찬 예식서가 약식으로 꾸며져 있지만, 개혁교회 세례 예식서는 16세기 종교개혁 신앙고백서 토대 위에 세례에 관한 성경적인 근거와 세례를 위한 기도와 부모들에게 문답과 세례 의식과 감사기도 순서로 문서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세례의 교리적인 근거를 언약 즉 하나님의 약속과 요구라는 견지에서 아름답게 정리해놓았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표(), 믿음의 인()도 아닌, 하나님의 언약적인 약속의 표와 인이라는 점을 성경 구절을 쉽게 해석해서 설명해 놓았고, 동시에 세례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받는다는 의미를 사도신경에 근거해서 해설하였습니다. 특히 부모에게 문답하면서 던지는 세 가지 질문 가운데 두세 번째 질문에서 그대들은 이 고백서들 안에 요약되어 있고 또 본 교회에서 가르쳐지는 구약과 신약의 교리가 구원을 위하여 참되고 완전한 교리라는 것을 고백합니까? 세 번째로, 그대들은 부모로서 이 아이가 알아듣게 되자마자 이 교리로 자녀들을 가르칠 것과 그대들의 힘이 닿는 대로 이것으로 자녀들을 가르칠 것을 약속하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물론 당회에서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검토한 후에,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묻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세례를 집례하지 않습니다. [유아] 세례 문답에서 부모들의 교육관이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르치겠다는 사실을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캐나다 개혁교회 질서 제58항에서 당회는 부모들의 능력이 닿는데 까지 교회가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서들에서 요약하고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는 교육을 시행하는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지를 확정해야 할 것이다라고 규정한 것처럼, 부모는 순종해야 하며, 성찬 심방 때에 항상 이 문답을 잘 지키고 있는 지를 질문 받습니다.

 

언약 생활이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 생활을 통해서 몸에 배인 개혁교회 회원들의 생활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입각해서 세운 초등학교 하나 제대로 없는 한국 장로교의 교회의 회원들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생활이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습니다. 장로교인이라면 누구나 자녀들에게 유아 세례를 받게 합니다. 물론 장로교 유아세례 예식서의 세 번째 문답에서도 우리의 거룩한 종교의 도리를 가르치며,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든 기관에서 진력하여 주의 양육과 교훈에서 장성하게 하기를 서약합니까?”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나 노회가 우리 신앙고백과 일치하는 유치원, 초등학교에 대해서 거론조차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신자와 동일한 학교에, 그것도 불신자들에게서 교육을 받습니다. 개혁교회 회원들과 회원들의 가정은 출생 시부터 언약의 약속들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겠다는 것과 동시에 언약적인 요구도 가르치겠다는 것을 자신들의 입으로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서약합니다. 생활 속에 어려움이 일어날 때에, 기도원으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세례 시에 받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약속을 묵상하고, 그 약속을 의지하여 극복하고, 또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도록 가르치고 부모 스스로 이런 순종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보여줌으로 산교육을 가정에서 실행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들이 자동적으로 믿음을 가져 중생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과 교회와 학교가 제각각의 영역에서 세례 시에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녀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더욱 쉽고 자세하게 가르쳐 자원하여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물론 장로교에서 입교(入敎)라고 합니다. 공적 신앙 고백 예식서 문답에서도 세례 시에 부모들에게 던졌던 질문이 이제 다 자란 자녀의 입으로 시인하도록 요구합니다. 그 첫 번째 질문에서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가 이 신앙고백서들 안에 요약되어 있으며 또 이 교회에 의해서 가르쳐지고 있음을 진심으로 믿습니까? 그대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는 이단들과 오류들을 거절하고 생사 간에 이 교회 안에서 일관되게 살아갈 것을 약속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질문(“그대는 주님의 교회의 산 지체로서 당신의 모든 삶을 다 드려서 주님께 예배드릴 것을 확고하게 결심합니까? 그대가 교리나 행위에 있어서 죄를 범하게 되는 일이 혹시 발생한다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이것을 막아주시기를 기원하지만, 이 교회의 권고와 권징에 기꺼이 복종할 것을 약속하십니까?”)은 공적으로 신앙 고백하는 사람의 모든 삶이 성경과 신앙고백에 일치하게 살아갈 것과 동시에 그렇지 않을 경우에 교회 권징을 받아들이겠다는 서약으로 끝을 맺습니다. 교회생활과 자신의 삶을 이원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서약합니다. 그러하기에 혹 성경과 신앙고백에 일치하는 생활을 하지 않을 때에, 자신이 서약했던 세례 예식서와 공적 신앙 고백 시에 한 서약을 상기시켜 회개하고 순복할 것을 요구합니다.

 

개혁교회는 장로교회의 개방적인 성찬(opened communion)”과는 달리, 성찬에 참석하는 사람을 교회 회원과 자매 교회의 무흠 증명서가 있는 사람들만으로 제한시킵니다. 이를 폐쇄적인 성찬(closed communion)”이라고 합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는 순수한 복음 선포와 주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들을 집행하고, 말씀에 따라 기독교적인 권징이 시행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순수한 복음이 선포된다면,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례들이 제멋대로 시행될 수는 없습니다. 개혁교회는 공예배 시에만 성례들이 집행하는데, 지금 한국 장로교회는 당회의 감독 하에 있지 않는 노회나 총회 시에 아무런 꺼림이 없이 시행하고, 심지어 신앙고백이 다른 교회 회원들을 별 무리 없이 성찬에 참여시키는 것은 개혁교회에서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하기에 개혁교회 성찬 예식서는 장로교의 예식서와 비교가 됩니다. 성찬 예식서는 제정, 자기를 살핌, 초대와 경고, 그리스도를 기억함, 확신, 교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림, 기도, 믿음을 고백함, 권고, 교통, 송영, 감사 순서로 진행됩니다. 이에 비해서 장로교 성찬 예식서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물론 개혁 교회 역시 약식 성찬 예식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약식 예식서가 전자 예식서와 근본적인 차이점은 없습니다. 그리고 상례적으로 개혁교회는 성찬을 위해 회원들을 심방하여 자신을 살피는 것을 돕고, 또 세례 시에 서약한 바를 잘 지키고 있는지를 살핍니다. 특히 성찬의 자기 살핌이라는 단락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세 구조(죄와 비참, 그리스도의 구속,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그대로 싣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신앙을 고백한 그대로 살지 않을 시에 그리스도의 식탁이 더럽혀지지 않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지를 확인합니다. 물론 초대와 경고 단락에서는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이 약식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에 드러난 죄가 있거나, 양심에 꺼리는 죄가 있다면 당연히 처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찬 예식서는 세례 예식서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언약의 약속과 요구 그리고 요구에 불순종할 시에 심판을 선언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코 개혁 교회는 교리와 교회 생활과 가정과 개인의 생활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피차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세울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권징(Christian discipline) 하나만 들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개혁교회의 권징에서는 세상의 법률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권징이라고 할 때에도 기독교적(christian)”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사용합니다. 중요한 것은 권징을 시행하는 절차라고 하겠습니다. 캐나다 개혁교회 질서 제66항을 보면 교회 권징은 영적인 성격이고 그리고 천국의 열쇠 중에 하나로서 천국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교회에 주어졌기 때문에, 당회는 교리의 순결과 행위의 순수성 둘 다에 저해되는 죄들에 대해서 벌하는데 사용되어, 죄를 지은 사람과 교회와 또 이웃과 화해시키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 모든 불의를 제거하는데 사용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18:15-17절의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주어진 규칙이 순종되어질 때에만 행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원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뿐 아니라, 피차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서로 권면해야 하며, 듣지 않을 시에 주님의 명령에 따라 한두 사람 증인을 세우고, 그래도 듣지 않을 때에 교회 즉 당회에 보고해서, 교회가 이 일을 완수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절차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호주 자유개혁교회 질서 제71항에 당회는 사적인 권면과 한두 사람의 증인을 세워서 행한 권면이 열매가 없거나 아니면 범한 죄가 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어떤 보고도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명시하였습니다. 상호 권면은 성도의 교통의 일부입니다. 성도의 교통을 교회라고 사도신경은 고백하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서로 권면(권징)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열매인 보화와 유익들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구속사역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인 성도의 교통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수없이 피차 권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성도 교통이기 때문입니다. 개혁교회는 모든 교중이 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참여하였기에(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2문답), 직분이 계급내지는 서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항상 봉사직으로 생각합니다. 세 직분 모두 주님께로부터 온 은사이기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교회를 섬겨야지, 직분을 계급내지는 명예로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들은 교회질서 맨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조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다른 교회를 주관할 수 없으며, 직분자들도 다른 직분자들을 주관할 수 없다.” 이런 바른 성경적인 이해가 개혁교회의 상호권면과 권징의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교회는 주님께서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는 말씀에 순종하고자 애씁니다(마태복음 23:8).

 

 

맺는 말

 

이제 강의를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합시다.

 

첫째로, 신앙고백은 계시의 한 부분이며, 구약과 신약 모두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 사역과 연관되어 나오며, 그러하기에 언약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신앙고백은 교회 역사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언약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례와 성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신앙고백이 언약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언약의 표징인 세례와 성찬과 관련될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성경 안에 있는 고백을 교리적으로 정리하고 교회 회원들로 하여금 반드시 숙지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는 본말이 전도되는 기현상이 일어났지만, 그 형식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로, 이런 기현상을 16세기의 종교개혁 특히 루터와 칼빈을 통해서, 다시 복된 고대전통으로 환원하였고, 더욱 분명하고 견고한 해설서(교리문답서)를 내놓아 교회를 풍성하게 했습니다. 특히 개혁자들은 무식자나 어린 자녀들도 쉽게 성경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 맞는 교리 문답서를 교회에 내어놓았습니다.

 

넷째로, 종교개혁의 꽃은 바로 독일 팔리티네이트에서 만들어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입니다. 이 교리문답서는 사도신경을 따라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사역을 잘 다루었고, 동시에 언약의 열 가지 말씀과 주기도문을 다루어서 공교회적인 입지를 확보하고 동시에 교회적인 일치를 위해서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 교리문답은 독일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개혁교회에서 사용되었고, 440년이 지난 지금도 유럽 개혁교회들과 미국, 캐나다, 호주 자유개혁교회와 아시아인 인도네시아와 한국에서도 사용되어 주님의 교회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전하시는 사역에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는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교회 생활의 방편으로 애용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신앙고백과 교회질서는 불가분에 있으며, 동시에 신앙고백과 교회 질서 모두 언약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모든 교회생활에 고루고루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 예식서들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교회의 주님이시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16:18) 성부로부터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으셨다(6:38, 39; 1:20)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15:26), 그리고 구속사역을 성취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시어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교회에 보내셨습니다(2:1-4). 그리고 사도는 자신들이 받은바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그 지역에 장로들을 세우셨습니다(20:28). 사도는 지역에 세워진 이 장로들을 주님께서 친히 세우셨다고 하였습니다(4:11).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당신의 종들을 직분자로 세워 자기 몸을 보양하십니다(5:29), 이런 은혜가 동일한 한 주님을 섬기는 형제들에게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