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신학 자유주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관

하나님아들 2020. 5. 11. 20:59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태도에서 예리하게 대립된다.


예수에 대한 기독교적인 태도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나타난다. 신약성경의 증거를 조사하는 최근 수년 간의 통상적인 방법은 사도 바울에게서 시작하는 것이다. 바울이 예수와 맺은 관계는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관계였음이 분명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신앙을 위한 모범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예수 자신이 신앙의 대상이었다. 예수를 닮는 것이 바울에게 중요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훨씬 중요한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완전히 가려졌음이 분명하다. 예수의 모범이 아니라, 예수의 구속 사역이 바울에게는 일차적인 것이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었다. 바울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 영혼의 영원한 운명을 예수에게 의탁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예수에 대해서 진정한 종교적 관계에 있었다고 말할 때에 우리가 의미하는 바다.


그러나 바울이 처음으로 예수와 이런 종교적 관계를 맺은 사람은 아니었다. 바로 이 결정적인 점에서, 바울은 이전에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이미 취하고 있던 태도를 계속 유지했을 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일에 대한 설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설명은 이미 초대 교회에 구속자에 대한 믿음과 함께 있었다. 바울이 처음으로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만든 바울 이전의 인물들이 누구였는가? 당연하고 확고한 대답은 예루살렘의 최초 제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서신서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와 맺고 있던 관계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를 종교적 믿음의 대상으로 삼음에 있어서- 바울 종교의 심장이요 영혼이었던 이 문제- 바울은 기존 사도들과 의견의 불일치가 전혀 없었다. 만약 그 문제에 불일치가 있었다면,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들이 바울과 교제의 악수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갈2:9). 바울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예수를 종교적 믿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면, 초기 기독교 역사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초기 기독교는 단지 예수를 닮는 것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이 “예수에 대한 신앙”이 예수 자신의 교훈에 의해 정당화될까? 이미 2장에서 답이 주어졌다. 거기서 예수가 자신의 위격을 자신의 복음과 구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을 인간의 구주로 제시했음이 아주 분명했다. 이 사실을 증명한 것이 고 제임스 데니의 가장 큰 공로였다. 데니는 복음서 배후의 자료들에 대해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복음서의 어떤 요소들이 이차적 자료로 거부되든지, 비평 절차가 끝난 후에 남은 이른바 “역사적 예수”가 자신을 신앙의 모범으로만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제시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더욱이 예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짐만 지면 된다고 말하여 사람들의 믿음을 이끌어 내려 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내가 너희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해준다는 말을 믿어라. 하나님은 죄를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시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반대로 예수는 나중에 제자들이 한 것보다 더 무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제시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차별 없는 사랑의 따뜻한 옹호자로 소개하는 바로 이 예수가 저 바깥 어두운 곳, 영원한 불,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는 그 자체로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무서운 그림이, 우리 죄인에게는 오로지 절망만을 가져다준다. 믿음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주의를 기울일 때뿐이다. 그 길은 예수 안에서 발견된다. 예수는 죄인이 하나님의 두려운 보좌 앞에 흠 없이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을 최소화하여 제시함으로 사람에게 확신을 주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기 자신의 놀라운 위격을 제시하며 확신을 주려 한다. 죄책이 크기는 하지만, 예수는 그보다 더 크다. 예수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죄에 빠진 세상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의 아들을 통하여 그의 나라로 이끌어 들인 사람들의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신앙의 대상인 예수에 대한 신약성경의 증거는 완전히 일관된 단 하나의 증언이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의 기록에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어떤 비평에 의해서도 제거되지 않는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예수는 단순한 의의 선생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유형의 종교적 생활을 개척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신뢰할 수 있는 구주로 간주되고 스스로도 그렇게 여긴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종교적인 관계를 맺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와 종교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보다 더 깊은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 현대 자유주의 설교자들은 예수를 존경한다.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늘 입에 달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지고의 계시라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의 종교적 삶으로 들어가거나, 적어도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와 종교적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들에게 믿음의 모범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믿음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따르면 예수는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기독교의 창시자이며, 기독교는 예수가 세운 종교적 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예수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었는가? 하는 질문을 달리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면에서 예수의 경험 안으로 들어가, 그를 모든 점에서 우리의 모범으로 삼아야 하거나 삼을 수 있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어려움이 야기된다.


첫 번째 어려움은 예수의 메시아 의식에서 일어난다. 자유주의자들이 우리의 모범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그 인물이, 자신을 온 땅의 최후 심판자가 될, 하늘에서 온 인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가 그를 모방할 수 있을까? 결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특별한 사명을 예수가 감당했다는 것만이 곤란한 점이 아니다. 진짜 어려움은 예수의 거창한 주장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믿지 않을 수 없는 이 주장이 정당화될 수 없다면, 예수의 거창한 주장은 그의 인격에 도덕적 흠을 남기게 된다. 겸손과 온전한 정신에서 너무나 멀리 떠난 나머지, 세상의 영원한 운명이 자신의 손에 맡겨졌다고 믿는 인간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예수가 단지 모범이라면, 실은 그는 좋은 모범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훨씬 이상의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대개 메시아 주장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취해 왔다. 메시아 의식은 예수의 경험의 후기에 일어난 것으로, 실제로는 근본적이 않다는 것이다. 정말로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향한 아들됨의 의식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의식이 모든 겸손한 제자들과 공유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메시아 의식은 뒤에 생긴 결과물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이런 심리학적 재구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노력들은 실패로 끝났다. 먼저, 재구성된 예수가 역사적이라는 진짜 증거가 없다. 삶의 후기에 자기의 뜻을 거슬러 메시아직이라는 카테고리를 취한 예수를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도리어 자료들이 보여주는 유일한 예수는 그의 모든 사역을 자신의 엄청난 주장 위에 세운 예수다. 둘째, 재구성이 역사적이라 할지라도, 제 정신에서 아주 멀리 벗어난 나머지 자신을 온 세상의 심판자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른 사람,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인류의 지고의 모범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예수를 단순히 최초의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는 이 방법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죄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 관련된다. 만약 예수가 그의 메시아 의식에서 우리와 분리된다면, 그에게 죄의식이 없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는 우리와 더욱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예수의 죄 없음이라는 문제에 부딪히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가들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된다. 그에게 죄가 없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현대 자유주의 역사가들이 그렇게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자유주의 종교에 대한 변호를 포기하고, 죄의 성격에 대한 위험한 가설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난관에 직면하여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급한 단언을 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황당함 속에서 그들은 예수에게 죄가 있든 없든, 어쨌든 우리보다 말할 수 없이 높이 있다는 주장으로 만족하려 한다. 예수의 “죄 없음” 여부는 학문적 질문으로 절대적인 것의 신비에 관한 일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우리의 부정함과 비교해볼 때 어두운 방의 하얀 빛 같은 거룩함 앞에 단순한 존경심으로 머리 숙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무죄를 단언하는 종교적 이익을 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인하는 과학적 이익을 취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가 죄가 있었든 없었든 실제로 우리에게 전해진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그가 아무런 죄의식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록된 글 속에서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삶의 죄를 다룬 적이 결코 없었다. 시험 받은 기록에 보면, 그가 어떻게 죄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는지 읽을 수 있지만, 죄가 들어온 후에 그것을 어떻게 처리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복음서에서 예수는 항상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자신에게서는 결코 죄를 찾지 못한다. 이 점에서 예수의 경험과 우리의 경험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이 차이 때문에 예수의 종교적 경험이 그리스도인 삶의 유일한 근거로 사용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란 결국 죄를 제거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는 아무 쓸모가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그러했다. 기독교의 선포를 오순절 날로 잡든지, 혹은 예수가 처음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로 잡든지 간에, 처음 시작하는 말은 “회개하라”였다. 전체 신약성경을 통해서 최초의 기독교는 분명히 죄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한 그에게는 제거해야 할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레샴 메이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