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인류역사와 국가 |
◆ 인류 역사 속의 인간 오늘은 타자의 사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강의의 흐름을 잠깐 보면, 우리 삶의 전체적 구조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렇게 그릴 수가 있지요. 그래서 문화가 또 다시 인간을 만들게 되죠. 도시는 분명히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일단 만들면 사람은 도시의 지배를 받게 되죠. 언어도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일단 만들면 사람도 언어의 지배를 받게 되겠죠. 또 이 문화의 틀을 통해서 세계를 바꾸죠. 비록 지구 내에서 이기는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 묘한 존재죠. 세계에서 나와서 자기 세계를 만들고, 자기가 만든 세계로 원래 세계를 바꿔나가는 복합적 존재죠.
우리강의가 1,2강이 말하자면 위 그림에서 세계, 자연세계를 다루었죠. 그리고 3강이 뭡니까? 신체와 영혼, 생물학적인 차원과 인간 고유의 차원, 위 그림에서 인간과 세계가 만나는 경계선을 다룬 거죠. 그리고 4강이 정신분석학이고, 5강이 인식론이었죠. 위 그림에서 인간 고유의 차원을 다룬 거지. 오늘 강의인 6강은 위 그림에서 인간이 문화와 만나는 경계선을 다룹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이 복잡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 문화에서 영향을 받는 그 경계선의 차원을 이야기 합니다.
이 인간이라고 하는 게 무엇인가? 라고 물어볼 적에 실체론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대목도 있죠. 실체론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대목은 예컨대 생물학적인 측면이죠. 아주 멀리 보면 인간도 진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의 essences라고 부르는 것도 엄청나게 긴 시간 속에서 진화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지금부터 1000년, 10세기만 지나면 인간이란 존재는 엄청나게 변해있겠죠. 핵전쟁으로 멸망할 수도 있고, 만약에 멸망하지 않았다면 특히 기계들, 기계들의 사용을 통해서 인간의 신체가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고, 환경 변화로 인해서 살아가는 모습도 굉장히 달라지겠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물학적인 기본 성향이 그렇게 심하게, 현저하게 바뀔 거라고는 단언할 수 없죠. 만약에 이 지구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서 그것이 인간의 생식세포에 영향을 많이 주면 크게 바뀔 수는 있겠지. 마치 SF영화에 나오듯이,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만 우리로서는 쉽게 예측할 수 없는 문제죠. 어쨌든 오랫동안 인간에게는 실체론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면이 있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간이란 무엇이냐 라는 것이 실체론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게 정의할 수 없는 차원이 있어요. 쉽게 말하면 조선시대 사람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어보았을 때 하는 말과 지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어보았을 때 하는 말은 아주 현저하게 다르죠. 지금 만약에 누가 인간이란 자기가 태어난 신분에 충실해야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완전히 원시인으로 취급받겠죠. 그러니까 ‘인간이란 뭐냐’라는 것이 상당히 오래 존속하는 그런 것이 있는가 하면 역사 속에서 계속 바뀌는 얼굴이 있어요. 우리가 3강에서 이야기한 것이 오래 존속하는 이런 면이었죠.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문화와의 경계선에 있는 인간, 역사 속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기 얼굴을 끊임없이 바뀌나가는 거죠. 이런 면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담론들이 협동작업을 해야 합니다.
1차적인 담론은 인류학이에요. 인류학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원초적인 상태의 인간을 다루는 것이지. 현대사상에서 자주 쓰는 말로 하면 'degree zero', 영도지. 영도 상태의 인간을 다루는 거지. 문명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의 인간. 인류학자들이 다루는 시점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미개시대는 신분도 없고, 계급도 없고 아주 소박하고 평화로운 시대였다는 그런 입장이 있는가 하면, 루조주의죠. 그런데 두 번째 는 그런 것은 하나의 환상이다. 미개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목가적인 세계가 아니라고 보는 입장도 있어요. 것을 다루는 거지. 그 다음에 이 미개 사회로부터 국가라는 것이 등장하죠. 국가가 탄생하는 것은 예컨대, 왕이라는 존재가 생기고 관료조직이 생기고 성을 쌓고 문자가 발명되고 역사가 기록되고 화폐가 통용되고 신분이 생기죠. 이런 것이 전통사회죠. 국가의 탄생. 그런데 이 국가가 탄생하는 것은 두고두고 논쟁이 되죠. 이런 것을 연구하는 것이 역사죠. 그런데 인류학에서 역사로 넘어갈 때, 최초의 역사, 상고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신화학이죠. 말하자면 신화라는 것은 구체적인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역사기록이죠. 물론 신화에는 우주탄생에 대한 지금으로 말하면 자연과학적인 내용도 있고 다른 이야기도 섞여있지만 신화는 기본적으로 역사 이야기죠. 예를 들어 제우스가 자기 아버지를 쫓아내고 왕이 되고 그런 것이 사실은 인간세계에서 일어난 ▲ 자본주의 그 다음에 이제 역사시대가 죽 오다가, 또 하나의 분기점은 자본주의의 탄생이다. 자본주의의 탄생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송두리째 바꾸어놓게 되죠. 물론 여기에는 과학기술도 있고, 계몽사상 등등이 있지만. 그래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연구하는 것이 정치경제학이죠. 정치학, 사회학도 있지만 자본주의를 연구하는 것은 정치경제학이죠. 그리고 이런 사회를 종합하면서 미래사회를 들여다보는 학문도 필요하죠. 이런 담론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연구하는 중요한 담론들이에요. 그리고 인류역사가 이렇게 죽 진행되어 왔죠. 현대의 인간관, 자연과의 관계 하에서의 인간관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의 인간관, 또 인간관이 함축하는 정치적 맥락 이런 것을 짚어보는 거죠.
역사적으로 보면 전통사회, 왕이란 것이 생긴 이후의 사회는 신분(身分)사회죠. 왕족과 귀족과 평민이라는 이 세 가지 구조, 또는 왕족과 귀족은 하나로 합칠 수 있겠죠. 이런 구조 속에서 인간의 개념이 형성되죠. 여기서 ‘분(分)’이 중요하죠. ‘네 분수(分殊)를 알아라!’라는 말에서 ‘수(殊)’는 언제 쓰는 말입니까? 특수하다할 때 쓰죠. particular. 특수라는 것은 어떤 전체가 나누어질 적에 한 조각이 particular죠.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사회 속에서 특정한 수(殊), 분수(分殊) 안에 들어있는 거죠. 이 분수의 틀을 벗어나면 그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죠. 그게 바로 신분사회죠. 이 신분사회에서의 인간은 귀족계급을 제외한다면 민(民)으로 규정되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어떤 신분으로 태어나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을 대부분 지배하게 되죠. 그런 세계에서 변화가 도래하는 게 대략 17~18세기죠. 이 시대가 되면 이른바 modernity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고,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새로운 통찰이 등장하게 되죠.
전통사회에서 철학자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귀족계급에 속하며 왕을 보좌해주죠. 이때 당시 지식인은 왕의 옆에서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죠. 이런 것이 철학자들의 역할이고, 이런 철학자들은 당연히 분(分)의 세계관을 왕에게 제공함으로써 통치 기반을 닦아주는 거죠. 물론 이런 지식인 외에 또 이들이 볼 때에 이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투쟁이 형성되죠. 대표적인 것이 동양사회의 유교이며 서구사회의 기독교, 인도는 힌두교, 이슬람사회의 이슬람교 등이죠. 이 종교들이 신분체제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이들이 하고 있죠. 위계적이고 신분을 나누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알겠죠. 우리가 사는 사회는 다 불평등한 사회고 가난한 사람과 부자인 사람, 왕과 천민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다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가짜이고, 정말 본질적인 세계는 붓다가 말한 그런 세계라고 철학적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함으로써 거꾸로 정치적으로 승인해주는 거지. 가짜니까 그냥 괘념치 말고 살아라 이거지. 존재론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긍정해주는 거야. 불교조차. 이렇게 종교라고 하는 것은 왕권을 지탱해주는 하나의 권력체계죠. 물론 정치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종교에는 다른 기능들이 있죠. 어쨌든 정치적인 맥락에서 볼 때 종교라고 하는 것은 정치에 빌붙어 있죠. 철학도 마찬가지에요. 철학자들도 기본적으로는 귀족계급에 속하면서 왕권을 지탱해온 사람들이죠. 물론 거기에 저항한 지식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 항상 있어왔죠.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이야기죠.
이런 것이 변화가 온 것은 17~18세기지. 이때가 되면 계몽사상이라든가 자유주의라든가 과학기술이라든가 등등이 막 등장하고 문화예술에서도 ‘인간적인 것’을 찾게 되죠. 근대성이라는 게 쉽게 말하면 ‘인간적인 것’을 찾는 거지. 인간적인 것을 어떻게 하든 눌러야 신분사회가 성립하거든 그래서 인간적인 것이 분출하는 거지. 이런 것들을 말하자면 일으켜나가는 계층이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 계층이죠.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부정적으로 보죠. 돈에 따라 움직이고 모든 것이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보죠.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분기점을 만든 역할을 했죠. 이럴 때의 인간은 전통사회의 민(民)이라기보다는 시민(市民)이죠. 과거 백성에서 시민이 된 거지.
그 다음에 결정적으로 찾아오는 분기점은 19세기 후반이죠. 이때가 되면 근대시민계급이 봉건적인 세계를 몰아내고 이른바 프랑스 대혁명의 모토인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웠지만, 그래서 많은 변화가 왔지만, 결국 저 시민계급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을 뜻하는 것이다. bourgeois에서 ‘bourg’는 서양의 도시에 붙는 말이죠. 룩셈부르크, 함부르크, 뉴른베르크. 그래서 bourgeois는 시민이죠. 그런데 그 시민이라는 것이 근대 문화의 건설자, 창조자는 인간 전체가 아니라 사실은 도시에 살면서 생산양식을, 더 구체적으로는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 계몽주의, 과학기술문명, 자본주의 문명 이런 것은 결국은 부르주아 계급들이 만든 것이고, 이 부르주아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죠. 그러니까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몸을 팔 수 밖에 없는 거지. 어떤 사람이 사장이 되고, 어떤 사람이 사원이 되는 겁니까? 그것이 땅이든 건물이든 기계든 간에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자본가,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고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뭐밖에 없어요? 자기 신체밖에 없지. 그러니까 자기 신체를 팔수밖에 없는 거지. 자기의 신체, 노동력이 하나이 상품이라는 말이야. 그러니까 과거에는 전 세계가 귀족과 천민, 백성들의 세계였다면, 근대 세계는 뭡니까?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세계인 거죠. 귀족과 천민이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로 나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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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타자
이렇게 해서 이른바 socialism과 communism이 등장하게 되죠. 그러니까 근대 정치가 이루었던 인간이라는 것은 계몽사상이 이야기하는 그런 식이 어떤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장치 속에서 살아가는 프롤레타리아죠. 그런데 socialism과 communism은 다른 거예요. communism은 자본주의와 정확히 반대되는 공산주의이고, socialism은 그 중간에 있는 거예요. 자본주의를 완전히 부정하기보다는 고쳐 나가야한다는 입장이죠. 오늘날에는 socialism을 사회민주주의라고 많이 부르죠. 유럽에 많이 있는 당이 그래서 사민당이죠. 그런데 1968년을 기점으로 해서, 한국의 경우는 1987년 정도가 여기에 해당되겠죠. 물론 역사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 것처럼 맞추는 것은 문제가 있죠. 그러나 대체적으로 두 시기가 들어맞는 시기죠. 여하튼 이 때 또 다른 변화가 오죠. 그러니까 전통사회로부터의 일탈, 변화가 크게 3단계인 거지. 17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19세기 말에서 시작되어가지고 20세기 중엽까지 이르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죠. 물론 조심해야할 것이 역사라는 것이 어느 하나가 딱 끝나서 다른 것이 온다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역사가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드라마처럼. 역사는 우연으로 가득 차 있는 거거든. 그런 가운데 또 흐름이 있는 건데. 지금도 전통적인 것이 많지. 우리 사회에도 전통사회를 연상시키는 것들이 많이 있지. 또 근대사회의 부르주아계급이 지금도 지배하고 있는 거지. socialism과 communism도 옛날 같은 영향력은 행사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남아있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이상 communism도 존속하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변해왔다는 거지. 자 지금까지는 서론이었고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1968년 즈음에 전 세계에서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 발생해요. 프랑스, 독일에서는 학생운동이 발생해요. 그래서 굉장히 사회격변이 발생하죠. 그 과정에서 프랑스의 드골, 우리나라로 말하면 박정희 같은 사람인데, 이 사람이 물러나는 변화를 겪게 되죠. 일본에서는 엄청난 사회저항력이 나타나요. 동경대 전공투가 대표적이죠. 전공투가 나타나서 일본에도 엄청난 변화가 옵니다. 동경대 같은 데는 학교건물에 불을 지를 정도니까 엄청난 변화가 오죠. 미국 같은 경우에는 히피문화라든가 미국은 문화적 방식이죠. 록 문화나 베트남 반전운동 같은 것이 일어나죠.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대대적인 사회저항운동이 발생하죠. 근데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변화가 발생했을 때, 공산주의사회에서도 똑같은 변화가 발생해요. 이른바 ‘프라하의 봄’, 프라하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는데, 소련이 탱크로 진압해버리죠. 왜냐면 19세기 말에 맑시즘이 등장한 이래로 그리고 특히 1917년 레닌이 소련을 세운 이후로 전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양분되었죠. 양자의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시대죠, 우리 한국 같은 나라가 그런 이념적 지형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나라죠. 내가 초등학교 다닐 시절에는 애들이 매일 산에 가서 삐라를 주워왔어. 삐라를 주워오면 볼펜이나 연필을 줬어요. 그래서 애들이 매일 삐라 주우려 다녔어요. 지금은 거의 없어졌을 텐데, 페치카라고 해서, 반땅굴이라고 산에 가면 동굴처럼 뚫려있어요. 시멘트 같은 것으로 막아져 있고, 이런 것들이 산에 가면 수도 없이 많았지. 시원해서 우리가 여름에 많이 갔지. 전쟁이 끝나고 아이들 놀이터가 된 거지. 아이들이 거기서 전쟁놀이를 해. 전쟁의 재현이지. 거기서 대장 뽑고 졸병 뽑고 해서 전쟁놀이를 하죠. 그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는 이루 말할 수가 없죠. 간첩으로 몰리면 완전히 인생 끝나던 시대니까.
그런데 저 시대가 되면 어떤 변화가 발생 하냐 하면, 19세기에 자본주의가 성립을 하고 맑스가 책을 쓸 당시 노동자는 현재의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죠. 그것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는 소설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죠. 이 소설이 당시의 하층민의 삶을 정말 잘 묘사했죠. 그러다가 자본주의가 최초로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한 것이 언제입니까? 1929년 대공황이죠. 그것을 마르크스가 예견을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제 정말 마르크스가 예견한 대로 세상이 무너지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그 때 등장한 사람이 케인즈(Keynesian)죠. 케인즈가 등장해서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사회주의를 실시하죠. 국가가 개입해서 아담 스미스식의 laisser-faire(자유방임)적인 시스템에 개입을 해가지고 공공개념, 사회주의 개념을 도입을 하죠. 그러면서 자본주의가 그 위기를 벗어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위상이 향상되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19세기 노동자와 자본주의가 굳건하게 살아난 20세기 노동자는 많이 다르죠. 노동자는 임금도 제대로 받고 노동조합을 통해 자기들의 인권도 보장받고 하면서 노동자라는 존재가 19세기의 비참한 거의 짐승 같은 생활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확고한 자기 삶을 누리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시민이 된 거지.
그런데 1968년 이후 일어난 여러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뭐냐? 그와 같은 노동자 집단에 조차도 낄 수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이다. 쉽게 말하면 현대나 삼성의 노동자들이죠. 삼성의 노동자가 비참한가? 그렇지 않죠. 보너스 받아, 보험도 들어, 아주 잘 살지. 지금 노동자들은 아주 안정된 자기 삶을 살고 있죠. 그런데 문제는 그런 노동자 축에도 못 끼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거죠. 같은 노동자인데 차별받는 여성들, 똑같은 노동을 해도 임금이 적죠. 아기 낳으려 휴직하면 임금도 못 받죠. 그 다음에 비정규직, 비정규직의 삶은 정규직에 비해 하늘과 땅 차이죠. 그 다음에 비숙련 노동자들, 실업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학생들이나 권위주의적인 교육을 받은 학생들, 그 다음에 외국인 노동자들, 특히 미국 같은 나라에서의 흑인들, 지역적 차별받는 사람들 뭐 할 것 없이, 거의 100년 동안 공산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자본주의, 그 안에서 위상이 높아져서 어엿한 삶을 누리는 노동자에 끼지 못하는 이런 사람들이 오늘 수업 주제인 타자들, the others이죠. 그런 타자들의 새로운 몸짓들이죠, 그러니까 68혁명 때에 거리에 뛰쳐나온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학생들과 여성들이었죠. 한국도 이와 비슷한 것이 1987년 6월 항쟁이었죠. 물론 서구와 다른 점이 서구는 파시즘을 20세기 전반에 겪었고, 그 이후에 고도성장을 해왔는데, 한국은 1987년까지도 파시즘시대죠. 여전히 신군부시대니까. 우리 같은 경우는 박정희 때부터 전두환까지 전부다 파시즘 시대니까 우리는 서양과 과정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6월 항쟁이 그런 시대죠. 그러니까 1987년 6월 항쟁 때 거리에 뛰쳐나온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아니었지. 그냥 시민들, 넥타이부대, 학생들, 여성들이었지. 이제는 말하자면 사회구조도 그에 대한 저항도 현저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면 공산주의는 뭐냐? 처음 시작할 때 공산주의는 가슴 벅차게 시작했는데, 그러나 점점 가면서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억압적인 관료시스템으로 갔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돈 쥔 놈이 최고지만, 공산주의는 또 하나의 신분사회다. 그러니까 중국이나 북한 같은 나라에 가면 당원들이 옛날로 말하면 귀족이야. 귀족. 식당 같은 곳에 가도 당원증만 딱 내놓으면. 내가 그런 경험이 많지는 않아. 내가 서안 같은 곳에 가봤는데, 내가 공산주의에 대한 일말의 환상 같은 것이 있었는데, 중국에서 완벽하게 깨졌어요. 그들은 지금도 왕조야.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중간에 갑자기 세우더라고 그래서 나는 후진타오가 왔나 했어. 그런데 그 동네 관료가 지나간다고 차를 세우게 한 거야. 그럼 후진타오가 오면 어뜩하냐고 물었더니, 공항에서 시내까지 1미터 간격으로 군인들이 일렬로 쫙 선다는 거야. 쥐새끼 한 마리 없도록. 그러니까 황제지. 황제. 사회주의는 무슨 얼어 죽을 사회주의야. 여전히 왕조야. 신분사회. 공산주의에서 부자와 빈자의 격차는 자본주의 뺨 쳐. 그 격차라는 것은 상상을 불허하는 거야. 그런데 그 부자라고 하는 것이 순수자본주의식의 부자가 아니라, 대부분 뭡니까? 신분사회 또는 관료시스템을 통한 부자인 거지. 그러니까 공산주의 사회라는 것이 평등을 만든다고 하면서 평등을 만드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버리는 거지.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면 만드는 주체세력이 있어야 될 것 아니야? 그런데 그 주체세력들이 말아먹는 거지. 왕조사회로 돌아가는 거지. 그러니까 민족 단위로 잘라서 보는 것과 계급단위로 잘라서 보는 것은 엄청 다르죠. 그런데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보편주의에요. 물론 공산주의 안에서도 여러 입장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보편주의에요. 그러니까 계급이 중요한 것이지 지역이 어디고 민족이 어디라는 것은 부차적이라는 거지. 그런데 막상 공산주의가 서고 나니까 그 안에서 끝없이 민족분쟁이 생겨나죠. 양대 공산주의 국가가 소련과 중공 아냐. 둘이서 맞붙어서 매일 싸우고. 그리고 소련이 동유럽을 제압해서 제국을 세우려고 하니까 동유럽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죠. 그래서 발생한 것이 프라하의 봄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것이 나타나는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분법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세워놓고 0?를 했단 말이야, 너 자본주의야? 공산주의야? 양자택일의 구조였죠. 그런데 이런 식의 역사적 변화를 겪으면서 그런 양자택일의 구조가 무너지게 되죠.
그래서 이제는 자본주의적인 시민이라든가 공산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인간이 아닌 존재. 그리고 정치적으로 말하면 귀족들의 억압을 받는 백성에서 시민가고, 부르주아의 지배를 받는 시민에서 프롤레타리아로 나아왔죠. 그렇다면 그 다음의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1980년대와 90년대, 물론 서양은 더 일찍 왔지만, 나타난 인간은 과연 어떤 인간이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오늘날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 했죠. 긴 층위에서 보는 경우, 즉 자연철학적인 존재론적인 경우와 짧은 층위인 역사로 보는 경우는 다릅니다. 오늘날 인간은 뭐냐? 라는 겁니다. 그럴 적에 나타나는 말이 타자, 소수자, 다중이런 말이죠. 이런 말이 누구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상징적으로 말하면, 타자라고 하면 푸코(Foucault)가 연상이 되고, 소수자라고 하면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가 연상되고, 다중이라고 하면 네그리(Negri)와 하트(Hardt)를 떠올릴 수 있다. 전체적인 흐름 아시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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