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윤리학! 상담학! 교육학!

제8강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

하나님아들 2020. 4. 1. 00:03

제8강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

◆ 정신분석학 - 자크 라깡(상징계로의 진입)


▲ 상징계로의 진입

아기는 이자관계에서 삼자관계로 넘어가는데 이 때 아버지가 출연하죠. 이 아버지는 상징계의 은유라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아버지가 없는 고아의 경우도 상관없는 거죠. 아버지는 곧 법의 세계이며, 달콤한 상상계와 대비되는 차가운 상징계를 상징한다.

아버지가 등장한다는 것은 곧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어떤 편안한 이월이 아니라 균열의 과정이죠. 그 과정을 통해서 무의식이 구조화된다. 다시 말하면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무의식이 생기는 거죠.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어떤 억압이 발생하고, 그 억압을 통해서 무의식이 발생하게 된다는 거죠.

이때 중요한 것은 이름이고 이름이 주체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상징계로 넘어가는 이 단계에서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용을 한다는 거죠. 즉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리비도, 즉 성욕이 규범에 종속된다고 볼 수 있고,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우스를 죽이고 어머니 요카스타와 결혼했듯이, 아기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과정은 의식적 과정이 아니라 무의식적 과정이다. 그러니까 아기가 정말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 아니에요. 아기가 정말로 엄마한테 성욕을 느끼면, 자기가 그것을 알겠죠. 그게 아니에요. 아기는 몰라. 그런데 그 때 무의식 속에서 지나간다는 거예요.

아기에게 어머니는 하나의 결핍으로 나타납니다. 어머니는 뭔가 없는 존재죠. 어머니에게 뭐가 없느냐? 남근이 없죠. 팔루스(phallus)가. 이 때 팔루스는 생물학적 성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지. 아버지의 권위, 아버지의 법이 팔루스지.

어머니에게는 그 팔루스가 결핍되어있는 거지. 그래서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이 팔루스라고 아기는 생각하죠. 그러면 아기는 어떻하겠어요? 아기는 자기가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아기가 엄마에게 성욕을 느낀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아기가 엄마와 섹스를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자기가 엄마의 팔루스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아기가 자기를 팔루스와 동일시한다는 거죠. 내가 엄마의 팔루스가 될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내가 엄마의 팔루스인 줄 알았는데, 내가 아니라 아빠가 엄마의 팔루스인 것을 깨달았다는 거지.

아기는 엄마의 결핍을 채움으로써, 엄마와 더불어 충족한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인데, 상징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프로이트가 볼 때 그런 과정을 거쳐야지 정상적인 아이가 된다는 거지. 이 이야기는 남자아기 중심의 설명이에요. 여기에서 ‘아버지의 이름’, 기표는 ‘아버지의 안돼’이다. 아버지인 상징계는 ‘금지’로서 등장한다.

무엇의 금지인가? ‘안돼’도 여러 가지이죠. 가장 원초적인 ‘안돼’, ‘금지’는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거죠. 근친상간의 금지는 뭡니까? 연속성에서 불연속성으로 가는 거예요. 만약 근친상간이 허용된다면, 아버지와 딸이, 아들과 엄마가, 형제자매 끼리 잘 수 있다면, 삶에 있어서 불연속이 없겠지. 모든 게 연속되겠지.


▲ 연속성과 불연속성

그런데 자연은 연속이지만 문화는 불연속이에요. 이것이 레비 스트로스나 라캉이 모두 깔고 가는 것이에요. 불연속이 존재하지 않으면 문화가 성립하지 않아.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씩 연속성을 원하죠. 그래서 가끔씩 광란의 밤을 보내고 싶어하기도 하고, 원래 카니발이 그런 거죠.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학교 다닐 때 동문회를 하면 야자타임을 해. 그러면 1, 2분 사이에 선후배가 없어. 불연속성이 깨지고 모든 게 연속적이 돼. 그래서 선배한테 야! 자! 그러죠. 그러다 나중에 맞고. 이 연속성을 니체는 Dionysos라고 하죠.

인간은 불연속성의 세계에 살기 때문에 가끔 연속성으로 가고 싶어 하죠. 스키를 탄다거나 나이트에서 춤을 춘다거나 술을 마시는 것 모두 그런 꿈의 한 표현 방법이죠. 전부다 그런 거예요. 문화나 상징계는 전부 불연속의 세계거든. 그런데 그 자연의 연속성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가 근친상간이죠. 막 뒤섞여 있는데, 그것을 딱 잘라놓는 거지. 여기까지는 ‘안돼’ 하면서 불연속적으로 만드는 거죠.


▲ 거세공포

근친상간을 설명하는 이론은 여러 가지가 있죠. 굉장히 많죠. 예켠대 생물학적으로 근친 간에는 성욕을 안 느낀다. 이런 설명도 있고, 별의별 설명이 다 있는데, 라캉이나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 Claude) 설명은 어떤 구조적인 것이죠.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있다는 거죠. 그런 분리를 거부할 때, 즉 자기가 계속 팔루스라고 여길 때, 아버지가 ‘너 일루와’해가지고 팔루스를 잘라버린다는 거죠. 거세한다는 거지. 문자 그대로 ‘고추’를 자르는 게 아니라, 자기가 팔루스라고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그것을 잘라버리는 거지.

그것이 거세공포야. 내가 어머니의 팔루스인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있더라. 아! 아버지가 내 팔루스를 잘라버리겠구나 하고 거세공포를 느끼는 거죠. 그리고 그 거세 공포를 통과해야, 아! 그렇구나 나와 엄마는 그런 관계가 아니구나, 나는 팔루스가 아니구나, 엄마의 팔루스는 아빠였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런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 아기는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는 거죠.


▲ ‘나의 이상’과 ‘이상적인 나’

그래서 상상계였을 때의 자기의 이상, 이상적인 나, the ideal I, 엄마와 합일을 이루었던 그때의 ideal에서 거꾸로 이세 상징계에서의 the ideal of Me를 가지게 되는 거죠. 나는 커서 대통령이 되어야지! 이런 식의. 된다. 여기서 초자아가 성립되고 주체가 성립된다. 상징계의 자리를 잡게 된다.

the ideal I에서 the ideal of Me를 가지게 됩니다. ‘이상적인 나’는 상상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이지만, ‘나의 이상’은 상징계 속에서 타인이 눈길을 통해 얻는 ‘나’의 모습인 것이다. 이 ‘나의 이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곧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을 가지게 되는 거죠.

이로서 주체가 성립하는데, 그러나 이 주체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는 것을 떠올릴 때의 뉘앙스가 아니라, 거꾸로 상징계에 어떤 자리를 잡게 된다는 그런 의미죠.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언표하는 주체, 즉 말하는 주체와 언표되는 주체, 즉 말의 주체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입니다. 언표하는 주체와 언표되는 주체, 그러니까 ‘엄마가 말했다.

“너는 이러이러 해야돼”’에서 언표하는 주체는 엄마고, ‘너’는 언표되는 주체죠. 그런데 언표하는 주체가 언표되는 주체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죠. ‘나는 “나는 뭐다”라고 생각했다’같은 경우죠.


▲ 원억압

이렇게 자아가 억압되고 소외가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원억압’이다. 억압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모든 인간이 겪게 되는 근본적인 억압인 거죠. 그리고 이런 억압은 필연적으로 욕구불만을 일으킨다. 상징과 도덕이 욕구불만을 발생시키는데, 이 욕구불만도 내가 의식적으로 ‘아! 기분 나빠’ 이런 게 아닙니다. 무의식 속에 욕구불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부정이 등장하게 되고, 도덕과 윤리는 균열, 틈, 입벌림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은 바로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성립한다. 다시 말해 상징계에 대한 거부에서 발생한다.


▲ 히스테리와 강박증

비록 힘든 과정이지만 이 상징계로 원만하게 진입하면, 적어도 표면상 정상적인 삶이 되지만, 상징계를 거부할 때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여성의 경우에는 히스테리에 잘 걸리죠. 히스테리는 자신이 거세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여성이 자신이 팔루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거지. 남자 아이는 거세공포를 느끼지만 여자아이는 애초에 팔루스가 없는 거죠. 여자 같은 경우는 자기가 팔루스가 없는데 없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지. 그러면서 자기가 엄마의 사랑을 듬뿍 못받았다고 생각할 때 여자가 히스테리에 걸리는 거지.

거꾸로 남자는 강박증에 걸려요. 강박증이 뭐냐 하면 자기가 팔루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데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거지. ‘아 엄마의 팔루스는 내가 아니고 아빠구나’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그것을 잘 못 넘어 갈 적에 강박증이 생긴다.

주체는 상징계에 들어감으로써, 기표들의 장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되며 하나의 인간이 주체가 된다. 물론 인간 주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는 근대 주체철학의 뉘앙스와 정반대죠. 요컨대 기표의 상징적 질서가 주체를 구성하죠. 바로 이것이 라캉의 기본적인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이죠.


▲ 라캉의 구조

인간은 언제나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데, 타인이 자기에게 똑똑하길 요구하면 자기는 그것을 욕망하게 된다. 욕망이 지향하는 것은 곧 기표이다. 그래서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하고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는 상당히 뉘앙스를 달리하게 되죠.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가 자연과학자들이 말하는 자연법칙 같은 것으로 투명하고 수학적이고 명징하고, 쉽게 말해 기름기가 제거된 구조라고 한다면, 라캉이 말하는 구조라고 하는 것은 이 상징계에서 인간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그 상징계를 끝없이 미끄러지면서 배회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죠.

요컨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학의 입장이죠. 현상학이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 노에마라는 의미를 잡아내고 노에마를 표현하기 위해서 기표를 사용하죠.

그런데 구조주의의 경우는 애초에 구조의 장에서 출발한다는 거죠. 기표들의 장이 존재하고 그 기표들의 장에 의해서 주체, 즉 무의적 주체가 형성이 되고 그로부터 의식이 형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무의식은 언어적인 법칙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다.


▲ 미끄러지는 기표

그런데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생기게 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적인 구조를 안으로 내장하게 된다. 무의식이라는 것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은 그 언어구조를 안에 내장하게 돼요.

이것이 라캉의 중요한 통찰입니다. 라캉 이야기 절반은 프로이트 이야기고, 절반은 자기 이야기라고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는데, 저 대목이 라캉의 중요한 통찰이죠. 그런데 라캉이 말하는 언어의 규칙성은 소쉬르 등이 말하는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하는 세계가 아니에요.

기표와 기의가 계속 미끄러져요. 미끄러진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에요. 정신분석학자는 환자의 말을 듣죠.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이고, 그 무의식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죠. 그러니까 X레이를 찍어볼 수도 없는 것이고, 해부를 해볼 수도 없는 것이고,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거죠.

그래서 푸코는 정신분석학자는 귀가 커야한다고 했죠. 정신분석학자가 하는 일은 우리 옛날 속담하고 비슷해요. 조금 거친 비유지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똑같아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억압되어 있는 거죠. 그 말을 들어주는 거야.

그러면 의사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죠. 그 말은 뭡니까? 기표죠. 그 말을 듣고 의사는 뭘 집어내야 하죠? 그 말들이 뜻하는 기의를 읽어내야 하죠. 그런데 기의를 읽어내려면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해야 할 것 아냐? 그래야 읽어낼 수 있을 거 아냐?

그런데 일대일 대응을 안해. 대응을 한하니까 기표를 계속하게 되죠.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배가 가듯이 계속 미끄러져 가는 거죠. 이것이 미끄러진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기표 기표 기표, 말만 계속 이어지는 거죠. 그런데 계속 이어지다보면 사태의 진상에 다가가게 되겠죠.

사태의 진상에 다가간다는 말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의 무의식에 도대체 무엇이 억압되어 있는지에 다가간다는 말이죠.

 

◆ 정신분석학 - 자크 라깡(욕망과 충동)

▲ 지난 시간에 이어

그 <마니>라는 영화를 보면, 부자고 그런데 왜 도벽이 있을까? 해서 가다보니까 자기 어머니가 창녀였고, 손님이 오면 방에서 쫓겨났었고, 또 어떤 때는 손님이 엄마를 해칠 때도 있었죠. 거기서 어린 애가 무의식이 생긴 거죠.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그 영화처럼 명쾌하게 밝혀지기는 경우는 드물죠. 끝까지 안 닿아.


▲ 누빔점

그런데 라캉은 기표가 기의에 딱딱 닿지는 않지만, 어떤 대목에 딱 닿을 때가 있다는 거죠. 그것을 라캉은 ‘누빔점(point de capiton)’이라 그래요. 기표가 떠다닌다고 해서 기표와 기의 어떤 일정한 관계도 부정되는 것은 아니죠. 그러면 아무 말도 할 수 없겠죠. 그러면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정립하려한 라캉의 의도는 좌절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때의 과학이란 말은 일반적인 과학이란 말의 의미와는 판이한 의미입니다.

정신분석학이 재미있는 게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참 인문학적인 것이고, 인문학이라고 하기에는 참 과학적인 거죠. 과학적인 맛도 있고 인문학적인 맛도 있죠. 과학은 정확하지만 별로 맛이 없지. 인문학은 맛이 있지만, 잘못가면 말잔치가 되죠. 그런 양면성이 있죠.

라캉에게서 기표와 기의는 일정한 지점, 누빔점에서 만난다. 그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라캉 사유에서 합리주의적 측면이다. 합리주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더 좋은 표현은 ‘실재론적’ 측면이죠. 그러나 기표는 궁극적 기의에 결국 닻을 내리지 못한다. 영원히 알 수 없는 기표의 심연에 놓이는 것이다. 이 부분이 라캉이 합리주의에서의 한계를 긋는 부분이죠.


▲ 은유와 환유

라캉의 언어학적 구조주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은유와 환유죠. 은유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이미 이야기 한 부분이죠. 은유는 압축이죠. ‘불타다’와 ‘사랑하다’는 ‘뜨겁다’라는 공통요소를 중첩시키고 있어서 압축입니다. 은유는 치환을 특징으로 한다.

‘부자’가 ‘돼지’로 치환되는 거죠. 프로이트는 꿈이란 바로 이런 은유의 언어로 되어있다고 했다. 그리고 은유는 동시성을 기반으로 하죠. ‘불타다’와 ‘사랑하다’, ‘부자’와 ‘돼지’ 사이에는 어떤 시간적 선후도 없죠. 프로이트가 가끔 ‘무의식에는 시간이 없다’란 말을 자주 하거든. 그런 의미 중의 하나가 이런 대목이겠죠.

환유는 무엇을 무엇으로 통째로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이행하는 거예요. ‘잔을 든다’는 것은 ‘술을 마신다’의 환유죠. ‘연기가 난다’는 것은 어디서 ‘불이 났다’는 것의 환유죠. ‘펜을 들었다’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의 환유죠. 그래서 환유에서 두 항은 치환되기보다는 조합된다.

그래서 ‘잔을 들다’는 ‘술을 마시다’의 앞에 오며, 그래야 환유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제유는 통째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 중이 하나로 상징하는 거죠. ‘사각모’로 ‘대학’을 상징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죠.


▲ 기표중심주의

정신분석학자는 기표들, 즉 환자들의 말, 그 언어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 그런 말들이 뜻하는 환자의 인생을 밝혀내고자 한다. 그런데 기표들과 기의들의 관계가 매끈한 일대일 대응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난점이 발생하는데, 라캉은 모든 열쇠는 결국 기표들이 쥐고 있으며, 우리는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서만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입장은 말년에 가면 조금 변화를 보입니다. 기표중심주의에 대해서 말년에는 변화를 보이죠.


▲ 실재계

기의는 기표에 잡히지 않고 계속 미끄러지는데, 정신분석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기의를 찾아낼 수밖에 없죠. 분석가는 기표라는 낚시 바늘을 던져서 기의를 낚아낸다. 기표들과 기의가 교차하는 지점, 누빔점에서 그것은 성공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칸트의 물자체처럼 저편에 머문다. 이것을 라캉은 실재계라고 합니다.

앞에서 imaginary한 것, 상징적인 것 이야기 했죠. 상징계에서 언어를 통해 환자의 기의를 찾아가죠. 그러나 끝내 드러나지 않는,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 상징계의 기표체계를 와해시키면서 드러나는 거죠. 상징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고, 기표로 잡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표가 작동하지 못하게 하면서 작동하는 게 있어요.

그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the real, 실재계죠. 그것은 언어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세계, 인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죠. 라캉의 사유는 상징계의 현상학에서부터 상징계의 구조주의를 거쳐서, 실재계에 대한 탈구조주의적 세계로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타자=상징계=사회=상호주체성

“그것이 있던 곳에서 나는 생성하리라”는 프로이트의 유명한 말이죠. 나의 생성을 좌우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그것도 어릴 때 형성된 무의식이죠.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은 정신분석학에서 또 다른 뉘앙스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의 자아에게 타자이죠. 다른 것이죠.

그러나 그 타자, 다름은 나의 바깥이 아니라, 나의 안에 있죠. 이것은 내가 나에게 타자를 갖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내 안에 나의 타자를 갖고 있다는 것, 이것이 정신분석학이 던져주는 가장 충격적인 메시지죠. 어쩌면 이런 식의 생각이 현대인이라는 한 존재의 얼굴이고, 현대인이라는 존재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아주 복잡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이유라고도 볼 수 있겠죠.

타자라고 하는 것은 언어, 기표의 장소, 상징계죠. 상징계는 어린 아이가 상상계에서 그곳으로 옮겨갈 때 어린 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다. 어린 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한 대신, 상징계 안에서 주체로서 선다.

또한 타자란 상호주체성의 장이다. 사회라는, 상징계라는 상호주체성은 개별적 주체들 사이에서 추후 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즉 각각의 주체가 있고 그 주체들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에서 주체가 되는 그 순간이 이미 상호주체성의 장 내에서 주체가 되는 것이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헤겔에게서 한 인간의 주체성은 타자를 통해서만 자아 속에 이상한 자아로서 타인을 통해서만 형성되죠. 내 안의 나,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타인입니다. 그 타인과의 관계, 그 타인과의 부딪힘, 그 경로를 통하지 않으면 ‘나’는 성립할 수 없다.

라캉에게서도 자아는 자신 속의 이상한 자신으로서, 타자, 무의식을 통해서만 형성되죠. 상징계는 팔루스이고, 상징계를 채우고 있는 욕망은 팔루스에의 욕망입니다. 팔루스는 욕망의 기표이다. 욕망은 팔루스라는 기표를 통해서 형성됩니다.


▲ 욕망, 욕구, 요구

그런데 라캉은 욕망와 욕구와 요구를 구분해요. 욕구는 생리학적 필요성이죠. 요구는 타인에 대한 간청이죠. 내가 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 것은 욕구지만, 남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요구죠. 욕구는 생물학적인 것이지만, 요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게 되는 거죠.

경우에 따라서 우리는 욕구보다 요구가 더 강할 때가 많죠. 아내가 남편에게 맛있는 것을 사달라는 것도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것도 있지만 남편이 자기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거지. 인간의 삶이란 것은 어찌 보면 욕구보다 요구가 훨씬 더 강하게 작동하는 사회죠. 욕구는 보통 사물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을 향하죠.

이에 비해서 욕망은 훨씬 근원적이죠. 욕망이라는 것은 계속 순환하죠. 예컨대 사람이라는 것이 뭔가를 이룬 다음에 굉장한 공허감을 느끼죠. 욕망은 움직여야 하는데, 어느 순간 욕망이 정지한 거야.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거지.


▲ 욕망과 향유

결핍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이미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이다. 이것을 라캉은 후기에 가면 jouissance, 향유라 그래요. 그러니까 무엇이 욕망으로 하여금 그렇게 자꾸 뺑뺑 돌게 만드느냐? 무의식 속에 원초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향유 때문에 그래요.

향유와 욕망의 관계는 엄청 복잡해요. 좀 거칠게 말하면, 욕망은 상징계에서 뺑뺑 도는 거라고 한다면, 향유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실재계를 형성해요. 그리고 그 향유가 드러나는 순간이 있어요. 향유가 드러나는 순간은 대체적으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ungeheuer, 영어로 말하면 uncanny한, 섬뜩한 거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보면, 그레고르 잠자다가 아침에 일어나니까 굉장히 커다란 곤충으로 변했다고 그러죠. 그때 카프카가 쓴 단어가 ‘ungeheuer'지. 그만큼 그 단어가 끔찍하고 섬뜩한 단어에요. 어떤 면에서 욕망이라는 것은 그 향유가 직접 나오면 골치 아프니까, 향유가 직접 나오지 않게 달래기 위해 욕망이 뺑뺑 돈다고 할 수 있어요.

향유가 튀어나오면 골치 아프니까, 그것을 대면하기가 겁나니까. 어떻게 보면 욕망이 향유 너는 가만있어 내가 뺑뺑 돌게 하는 거죠.


▲ 욕망과 충동

욕망의 근원적 기의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이미 상징계로 들어선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래서 욕망의 기표는 팔루스이다. 그런데 욕망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팔루스를 욕망하는 것은 주체가 되기 위한 것, 인간이 되기 위한 것, 일종의 타협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든 정신병을 앓기 때문에 거치는 통과의례죠. 그러나 욕망이 근원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실재계를 영원히 알 수 없듯이, 라캉은 이 세계를 신화의 세계라고 불러요. 인간은 어떤 쪼개짐, 갈라짐으로써 인간이 되죠. 로고스에 들어서는 것이 동시에 분열의 경험이라는 것이 인간이 안고 있는 상황이다.

전통철학과 확연히 다르죠. 전통철학은 로고스에 들어가야 뭔가 인간이 되고, 이성을 가지고, 그 전의 세계는 영 안 좋은 세계죠. 라캉에게는 로고스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분열의 경험이에요. 따라서 욕망의 근원적 기의는 그 어떤 쪼개짐도, 갈라짐도 없는 그 어디일 것이다. 이렇게 도달될 수 없는 그 곳에 대한 욕망을 가지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라캉적 의미에서의 운명이에요.

또 경우에 따라서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pulsion, 충동을 넣기도 하죠. 그런데 충동이라는 단어가 썩 좋은 번역은 아니에요. 우리말 충동은 갑자기 뭐가 탁 튀어 오르는 느낌이 들죠. 그런데 pulsion은 그게 아니고 지겹게 사람을 끌고 다니는 거야.

‘죽음충동’ 그러면 갑자기 ‘아! 죽고 싶어’ 그런 느낌인데, 오해의 여지가 있어요. 그거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지겹게 인간을 죽음으로 끌어당기는 거야. 갑자기 그러는 것이 아니죠. 영어번역이 drive죠. 그 번역은 참 좋은 번역 같아요. 이렇게 몰고 간다는 것이 적절한 뉘앙스야. 독일 원어로는 trieb죠. pulsion은 한편으로는 욕구와 유사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성애적 측면을 띤다는 거죠. 충동이라는 것은 생리학의 영역에서 정신분석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존재한다.


▲ 라캉의 정신분석학

프로이트는 가끔 너무 성욕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너무 모든 것을 성욕으로 설명한다는 비난을 듣죠. 실제 프로이트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 그런 경향이 있죠. 라캉은 그런 생물학주의에는 약간의 거리를 둔다.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번뇌의 존재이다.

도덕이나 윤리는 상징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성립하며, 따라서 영원히 인간의 번뇌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라캉에게 번뇌 해결의 길은 왜 우리가 번뇌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뿐이에요. 이런 점에서 라캉은 내용상 굉장히 비합리주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철저한 합리주의자인 거죠.

철저하게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을 결국 철저하게 합리적으로 해석할 때만 우리는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은 스피노자주의자이고 어떤 면에서는 불교에 가까운 사람이죠.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보다 넓은 지평에서 재창조했다.

라캉이 프로이트와 구분되는 점은 프로이트와 달리 극히 철학적인 담론을 전개했다는 점이죠. 동시에 또 과학적이기도 하고 언어학적이기도 하죠. 라캉을 통해서 정신분석학은 교차하게 되며, 그로서 주체, 자기욕망을 비롯한 숱한 문제들이 새로운 지평에서 논의되게 되었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이런 개념을 다룬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라캉이 정신분석뿐 아니라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거죠. 오늘날엔 지젝 같은 사람을 필두로 하는 이른바 슬로베니아학파에 의해 계승되어서 계속 확장되고 있으며, 특히 문화 예술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