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 | |
◆ 정신분석학 - 자크 라깡(상징계로의 진입) ▲ 상징계로의 진입 아기는 이자관계에서 삼자관계로 넘어가는데 이 때 아버지가 출연하죠. 이 아버지는 상징계의 은유라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아버지가 없는 고아의 경우도 상관없는 거죠. 아버지는 곧 법의 세계이며, 달콤한 상상계와 대비되는 차가운 상징계를 상징한다. 아버지가 등장한다는 것은 곧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어떤 편안한 이월이 아니라 균열의 과정이죠. 그 과정을 통해서 무의식이 구조화된다. 다시 말하면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무의식이 생기는 거죠.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어떤 억압이 발생하고, 그 억압을 통해서 무의식이 발생하게 된다는 거죠. 이때 중요한 것은 이름이고 이름이 주체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상징계로 넘어가는 이 단계에서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용을 한다는 거죠. 즉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리비도, 즉 성욕이 규범에 종속된다고 볼 수 있고,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우스를 죽이고 어머니 요카스타와 결혼했듯이, 아기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과정은 의식적 과정이 아니라 무의식적 과정이다. 그러니까 아기가 정말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 아니에요. 아기가 정말로 엄마한테 성욕을 느끼면, 자기가 그것을 알겠죠. 그게 아니에요. 아기는 몰라. 그런데 그 때 무의식 속에서 지나간다는 거예요. 아기에게 어머니는 하나의 결핍으로 나타납니다. 어머니는 뭔가 없는 존재죠. 어머니에게 뭐가 없느냐? 남근이 없죠. 팔루스(phallus)가. 이 때 팔루스는 생물학적 성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지. 아버지의 권위, 아버지의 법이 팔루스지. 어머니에게는 그 팔루스가 결핍되어있는 거지. 그래서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이 팔루스라고 아기는 생각하죠. 그러면 아기는 어떻하겠어요? 아기는 자기가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아기가 엄마에게 성욕을 느낀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아기가 엄마와 섹스를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자기가 엄마의 팔루스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아기가 자기를 팔루스와 동일시한다는 거죠. 내가 엄마의 팔루스가 될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내가 엄마의 팔루스인 줄 알았는데, 내가 아니라 아빠가 엄마의 팔루스인 것을 깨달았다는 거지. 아기는 엄마의 결핍을 채움으로써, 엄마와 더불어 충족한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인데, 상징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프로이트가 볼 때 그런 과정을 거쳐야지 정상적인 아이가 된다는 거지. 이 이야기는 남자아기 중심의 설명이에요. 여기에서 ‘아버지의 이름’, 기표는 ‘아버지의 안돼’이다. 아버지인 상징계는 ‘금지’로서 등장한다. 무엇의 금지인가? ‘안돼’도 여러 가지이죠. 가장 원초적인 ‘안돼’, ‘금지’는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거죠. 근친상간의 금지는 뭡니까? 연속성에서 불연속성으로 가는 거예요. 만약 근친상간이 허용된다면, 아버지와 딸이, 아들과 엄마가, 형제자매 끼리 잘 수 있다면, 삶에 있어서 불연속이 없겠지. 모든 게 연속되겠지.
그런데 자연은 연속이지만 문화는 불연속이에요. 이것이 레비 스트로스나 라캉이 모두 깔고 가는 것이에요. 불연속이 존재하지 않으면 문화가 성립하지 않아.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씩 연속성을 원하죠. 그래서 가끔씩 광란의 밤을 보내고 싶어하기도 하고, 원래 카니발이 그런 거죠.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학교 다닐 때 동문회를 하면 야자타임을 해. 그러면 1, 2분 사이에 선후배가 없어. 불연속성이 깨지고 모든 게 연속적이 돼. 그래서 선배한테 야! 자! 그러죠. 그러다 나중에 맞고. 이 연속성을 니체는 Dionysos라고 하죠. 인간은 불연속성의 세계에 살기 때문에 가끔 연속성으로 가고 싶어 하죠. 스키를 탄다거나 나이트에서 춤을 춘다거나 술을 마시는 것 모두 그런 꿈의 한 표현 방법이죠. 전부다 그런 거예요. 문화나 상징계는 전부 불연속의 세계거든. 그런데 그 자연의 연속성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가 근친상간이죠. 막 뒤섞여 있는데, 그것을 딱 잘라놓는 거지. 여기까지는 ‘안돼’ 하면서 불연속적으로 만드는 거죠.
근친상간을 설명하는 이론은 여러 가지가 있죠. 굉장히 많죠. 예켠대 생물학적으로 근친 간에는 성욕을 안 느낀다. 이런 설명도 있고, 별의별 설명이 다 있는데, 라캉이나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 Claude) 설명은 어떤 구조적인 것이죠.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있다는 거죠. 그런 분리를 거부할 때, 즉 자기가 계속 팔루스라고 여길 때, 아버지가 ‘너 일루와’해가지고 팔루스를 잘라버린다는 거죠. 거세한다는 거지. 문자 그대로 ‘고추’를 자르는 게 아니라, 자기가 팔루스라고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그것을 잘라버리는 거지. 그것이 거세공포야. 내가 어머니의 팔루스인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있더라. 아! 아버지가 내 팔루스를 잘라버리겠구나 하고 거세공포를 느끼는 거죠. 그리고 그 거세 공포를 통과해야, 아! 그렇구나 나와 엄마는 그런 관계가 아니구나, 나는 팔루스가 아니구나, 엄마의 팔루스는 아빠였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런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 아기는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상상계였을 때의 자기의 이상, 이상적인 나, the ideal I, 엄마와 합일을 이루었던 그때의 ideal에서 거꾸로 이세 상징계에서의 the ideal of Me를 가지게 되는 거죠. 나는 커서 대통령이 되어야지! 이런 식의. 된다. 여기서 초자아가 성립되고 주체가 성립된다. 상징계의 자리를 잡게 된다. the ideal I에서 the ideal of Me를 가지게 됩니다. ‘이상적인 나’는 상상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이지만, ‘나의 이상’은 상징계 속에서 타인이 눈길을 통해 얻는 ‘나’의 모습인 것이다. 이 ‘나의 이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곧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을 가지게 되는 거죠. 이로서 주체가 성립하는데, 그러나 이 주체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는 것을 떠올릴 때의 뉘앙스가 아니라, 거꾸로 상징계에 어떤 자리를 잡게 된다는 그런 의미죠.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언표하는 주체, 즉 말하는 주체와 언표되는 주체, 즉 말의 주체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입니다. 언표하는 주체와 언표되는 주체, 그러니까 ‘엄마가 말했다. “너는 이러이러 해야돼”’에서 언표하는 주체는 엄마고, ‘너’는 언표되는 주체죠. 그런데 언표하는 주체가 언표되는 주체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죠. ‘나는 “나는 뭐다”라고 생각했다’같은 경우죠.
이렇게 자아가 억압되고 소외가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원억압’이다. 억압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모든 인간이 겪게 되는 근본적인 억압인 거죠. 그리고 이런 억압은 필연적으로 욕구불만을 일으킨다. 상징과 도덕이 욕구불만을 발생시키는데, 이 욕구불만도 내가 의식적으로 ‘아! 기분 나빠’ 이런 게 아닙니다. 무의식 속에 욕구불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부정이 등장하게 되고, 도덕과 윤리는 균열, 틈, 입벌림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은 바로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성립한다. 다시 말해 상징계에 대한 거부에서 발생한다.
비록 힘든 과정이지만 이 상징계로 원만하게 진입하면, 적어도 표면상 정상적인 삶이 되지만, 상징계를 거부할 때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여성의 경우에는 히스테리에 잘 걸리죠. 히스테리는 자신이 거세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여성이 자신이 팔루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거지. 남자 아이는 거세공포를 느끼지만 여자아이는 애초에 팔루스가 없는 거죠. 여자 같은 경우는 자기가 팔루스가 없는데 없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지. 그러면서 자기가 엄마의 사랑을 듬뿍 못받았다고 생각할 때 여자가 히스테리에 걸리는 거지. 거꾸로 남자는 강박증에 걸려요. 강박증이 뭐냐 하면 자기가 팔루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데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거지. ‘아 엄마의 팔루스는 내가 아니고 아빠구나’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그것을 잘 못 넘어 갈 적에 강박증이 생긴다. 주체는 상징계에 들어감으로써, 기표들의 장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되며 하나의 인간이 주체가 된다. 물론 인간 주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는 근대 주체철학의 뉘앙스와 정반대죠. 요컨대 기표의 상징적 질서가 주체를 구성하죠. 바로 이것이 라캉의 기본적인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이죠.
인간은 언제나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데, 타인이 자기에게 똑똑하길 요구하면 자기는 그것을 욕망하게 된다. 욕망이 지향하는 것은 곧 기표이다. 그래서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하고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는 상당히 뉘앙스를 달리하게 되죠.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가 자연과학자들이 말하는 자연법칙 같은 것으로 투명하고 수학적이고 명징하고, 쉽게 말해 기름기가 제거된 구조라고 한다면, 라캉이 말하는 구조라고 하는 것은 이 상징계에서 인간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그 상징계를 끝없이 미끄러지면서 배회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죠. 요컨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학의 입장이죠. 현상학이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 노에마라는 의미를 잡아내고 노에마를 표현하기 위해서 기표를 사용하죠. 그런데 구조주의의 경우는 애초에 구조의 장에서 출발한다는 거죠. 기표들의 장이 존재하고 그 기표들의 장에 의해서 주체, 즉 무의적 주체가 형성이 되고 그로부터 의식이 형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무의식은 언어적인 법칙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생기게 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적인 구조를 안으로 내장하게 된다. 무의식이라는 것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은 그 언어구조를 안에 내장하게 돼요. 이것이 라캉의 중요한 통찰입니다. 라캉 이야기 절반은 프로이트 이야기고, 절반은 자기 이야기라고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는데, 저 대목이 라캉의 중요한 통찰이죠. 그런데 라캉이 말하는 언어의 규칙성은 소쉬르 등이 말하는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하는 세계가 아니에요. 기표와 기의가 계속 미끄러져요. 미끄러진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에요. 정신분석학자는 환자의 말을 듣죠.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이고, 그 무의식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죠. 그러니까 X레이를 찍어볼 수도 없는 것이고, 해부를 해볼 수도 없는 것이고,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거죠. 그래서 푸코는 정신분석학자는 귀가 커야한다고 했죠. 정신분석학자가 하는 일은 우리 옛날 속담하고 비슷해요. 조금 거친 비유지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똑같아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억압되어 있는 거죠. 그 말을 들어주는 거야. 그러면 의사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죠. 그 말은 뭡니까? 기표죠. 그 말을 듣고 의사는 뭘 집어내야 하죠? 그 말들이 뜻하는 기의를 읽어내야 하죠. 그런데 기의를 읽어내려면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해야 할 것 아냐? 그래야 읽어낼 수 있을 거 아냐? 그런데 일대일 대응을 안해. 대응을 한하니까 기표를 계속하게 되죠.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배가 가듯이 계속 미끄러져 가는 거죠. 이것이 미끄러진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기표 기표 기표, 말만 계속 이어지는 거죠. 그런데 계속 이어지다보면 사태의 진상에 다가가게 되겠죠. 사태의 진상에 다가간다는 말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의 무의식에 도대체 무엇이 억압되어 있는지에 다가간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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